• 최종편집 2024-05-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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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U-17 여자축구, 아시안컵 준결승 진출
    [동포투데이] 중국은 14일 일본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4-0으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2024 AFC U17 여자 아시안컵 4강에 진출했다. B조에서 호주, 태국에 2연승을 거두면서 중국은 이미 조 선두 일본과 함께 4강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였다. 일본은 이날 중국을 상대로 4골을 퍼부으며 조 1위를 차지했다. 조별리그 다른 경기에서는 태국이 호주를 3-1로 이겼다. 중국은 16일 준결승에서 A조 1위인 북한과 맞붙고, 일본은 같은 날 한국과 맞붙는다. 5월 6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대회에는 총 8개 팀이 참가하며, 상위 3개 팀이 10월 16일부터 11월 3일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열리는 2024년 FIFA U17 여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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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마라도나 ‘신의 손’ 골든볼 트로피 경매에 나온다
    [동포투데이] 수십 년 동안 사라졌던 마라도나가 1986년 월드컵에서 수상한 골든볼 트로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7일 BBC 보도에 따르면 이날 프랑스 아구테스 경매회사는 이 트로피가 6월 6일 파리에서 경매될 예정이며 입찰자는 15만유로를 지불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매회사에 따르면 이 트로피는 독특함 때문에 수백만 달러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트로피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트로피가 와일드 포커 게임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라도나가 빚을 갚기 위해 트로피를 팔았다고 주장했다. 마라도나가 나폴리의 한 은행 금고에 트로피를 보관했다가 1989년 현지 괴한들에게 강도를 당한 후 금덩어리로 녹아내렸다는 설도 있다. 아구테스 경매사는 "트로피가 금-구리 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주장이 터무니 없다고 지적했다. 2016년 프랑스 경매에서 골든볼 트로피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익명의 구매자가 구입했다. 구매자는 자신의 컬렉션에 많은 트로피를 보유하고 있었고, 온라인으로 검색한 결과 자신이 마라도나의 골든볼 트로피를 구입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마라도나의 무대라고 할 수 있다. 주장으로서 '축구왕'은 아르헨티나 팀을 이끌고 결승전에서 독일을 3: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 5골 5도움을 기록하며 이번 월드컵 최고의 선수가 됐다. 특히 마라도나는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두 골을 기록했는데, 그 중 하나는 논란이 된 '신의 손'이었고, 다른 하나는 5연속 득점을 뛰어넘는 '세기의 골'이었다. 마라도나가 그날 입었던 유니폼과 경기 공은 이전에 수백만 달러의 가격에 경매에 부쳐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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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월드컵 2차 예선]중국, 싱가포르에 4-1 대승
    [동포투데이] 이반코비치 감독이 이끈 중국은 26일 톈진 올림픽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C조 조별리그 4차전 싱가포르와 홈경기에서 우레이(21',85), 페르난둬(65'페널티), 웨이시하오(90')의 골에 힘입어 4-1로 대승을 거뒀다.(사진출처 : 차이나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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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 북한, 일본 2-1로 꺽고 U20 여자 아시안컵 우승
    [동포투데이] 16일 막을 내린 20세 이하 여자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북한 여자 축구 대표팀이 일본을 2-1로 꺾고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일본, 북한과 같은 조에 편성된 중국은 조별리그에서 북한과 1-1로 비기고 일본에 0-2로 패해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한편 호주 여자축구는 3,4위 결승전에서 한국을 1-0으로 꺾었다. 두 팀은 일본, 북한 등 4개 팀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해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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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7
  • 中, 귀화 선수 4명 대표팀 소집...축구팬 “늦었지만 다행”
    [동포투데이] 새로 부임한 이반코비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대표팀의 최근 훈련 명단에 귀화 선수 4명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면서 많은 중국 축구팬들의 관심과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페르난둬, 엘케손, 리커, 장광타이 등 4명의 귀화 선수가 포함된 이번 명단은 중국 축구 대표팀의 귀화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결정이다. 중국의 한 축구 블로그는 귀화 선수를 한 명만 기용했던 이전 관행과 비교하면 이번 4명의 귀화 선수 소집은 대표팀 역사상 처음이며 새로운 시대에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귀화 전략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평가했다. 오랫동안 중국 축구의 발전을 지켜본 팬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의심할 여지없이 흥미진진한 일이다. 지난 4년 동안 귀화 선수들은 축구 대표팀에서 보수적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중국 축구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으로 간주했다. 특히 얀코비치 감독 시절에는 엘케손과 페르난둬 같은 수준급 귀화 선수들조차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부패혐의로 구속된 전 중국 대표팀 감독 리톄와 전 중국축구협회 회장 천쉬위안 시절에는 귀화 선수의 활용이 더욱 제한적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번 대규모 귀화 선수 영입은 대표팀의 경쟁력 강화에 대한 중국축구협회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엘케손과 페르난둬의 복귀, 특히 페르난둬의 부활은 대표팀에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리커와 장광타이의 귀화도 대표팀의 기술적인 측면과 전술적 다양성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 같은 변화는 중국 축구가 지난 4년간의 보수적 전략에서 벗어나 귀화 선수들에 대한 적극적인 활용을 재개한 것으로 널리 읽힌다. 아울러 대표팀이 새로운 감독과 코칭 스태프의 지도 하에 돌파구를 찾고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는 신호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표팀의 이번 소집명단 발표는 귀화 선수 전략의 중대한 조정일뿐만 아니라 중국 축구가 더 높은 수준의 경기 성과를 추구하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향후 대표팀의 경기가 전개됨에 따라 이들 귀화 선수들의 경기력과 그들이 팀의 전술 시스템에 어떻게 융합되는지가 모든 중국 축구 팬들의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 변화는 중국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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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실시간 스포츠 기사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10) 축구도 머리 써야 잘 할 수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문정오 그 사람, 머리도 좋고 집단정신이 강한 선수였다. 자신이 얼마든지 넣을 수 있는 골도 더욱 파악있는 위치의 선수한테 넘겨주군 했다. 지금은 패스라고 하는데…”이는 고 이광수옹이 지난 세기 50연대 길림성 축구팀의 “변선날개”로 “제비”란 호칭까지 받은 문정오 원로를 떠올리면서 자주 외우던 얘기다. 1933년 훈춘현에서 태어난 문정오 원로는 지식인형이고 미남으로서 영화배우나 기타 사무직에 종사할 타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매너도 돋보였다. 옷은 항상 깔끔하게 입고 다녔으며 성격도 아주 자상하여 그제날의 선비를 연상케 하였다. 그러니 얼핏 보면 축구운동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같았다. 하지만 그가 변선돌파를 시도한다 하면 상대방 선수 3-4명씩 따돌리기가 일쑤였으며 그럴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경기장이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지군 했다. 그리고 머리를 잘 굴렸다. 초중(한국의 중학교와 대등)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가 길림성팀에 가입하였고 축구란 개인운동이 아닌 집단적 종합실력이 필수인 운동이란 것을 잘 아는지라 동료들과의 합작을 극히 중시했다. 그리고 길림성팀의 몇몇 선수들이 상대방 문전에서 합작을 시도한다 하면 그 장면이 화려했다. 예술표현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특히 1959년 중국 전국운동회(한국의 전국체전) 축구종목에서 길림성팀의 지청용 선수가 최우수 득점자로 선정되었는데 그가 다득점을 할 수 있는데는 변선의 문정오, 공격조직자인 이광수 등 선수들의 도움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다. 고 이광수옹에 따르면 중국에서 그토록 활약상을 보이던 문정오 선수가 지난 세기 60연대 초 한창 “조선붐”이 일 때 더 크게 해보려는 욕심으로 두만강을 건너갔었다고 한다. 헌데 조선에 건너간 후 문정오 원로는 질병 등 각종 원인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지난 세기 90연대 초에 역시 지병으로 아까운 나이에 세상떠났다고 한다. “중국에 계속 있었더면 병치료도 할 수 있고 체육분야의 권위자로 떠받들릴 수도 있었는데 참 아까운 사람이었다.” 고 이광수옹은 생전에 늘 문정오 원로를 외우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아끼던 선수였다고 늘 입에 올리군 했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편집자: 이번기까지 10번에 나누어 동포투데이는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를 실었다. 중국조선족 축구발전에는 물론 전반 중국축구발전에도 거룩한 기여를 하면서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린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는 이번에 완벽하게 소개되기는 사상 처음이다. 시리즈 연재기간 축구 특히 중국조선족 축구를 사랑하고 관심하는 동포축구팬들의 전화와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이에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한편 이 10명의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외에도 우리 민족과 중국축구에 기여를 한 조선족 축구인들이 많다. 이번에는 소개되지 못했지만 조선족축구 원로들인 김사종, 박상복, 지운봉, 김익갑, 손중천, 김하연, 방정훈, 이창린, 문승학, 송지학, 허경수, 정종섭 등 조선족 축구인들이 많고도 많다. 특히 그런 원로들 중 김사종, 박상복, 지운봉 이 세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4년생인 고 김사종 원로는 1948년에 조선으로부터 중국에 이주, 광복전 서울에서 축구외에도 학교사무원, 기마단 선수, 극단배우 등 사업에 종사하던 분으로서 지식이 연박하고 종합적 재질이 뛰어나 항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셨다. 김사종 원로는 광복 후 연변의 첫 반프로축구팀인 연변교육출판사팀을 몸소 창설하기도 했었다. 그 뒤 김사종 원로는 8.1 군인팀의 주력으로 뛰다가 1956년에 다시 연변으로 진출, 갓 건립된 길림성팀에 몸을 담그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연변을 떠났다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오는 축구선수가 극히 적은 것이 상례이다. 그것은 연변의 대우나 생활환경이 그만큼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연변으로 나와 연변축구와 생사를 함께 한 분이었는데 낡은 사회의 지식인이란 이유로 길림성팀이 출국경기를 치를 적마다 제명되군 했다. 고 이광수옹에 따르면 김사종 원로는 이광수옹과 최혜숙 여사의 결혼중매인이기도 했다. 역시 1924년생인 박상복 원로는 위 만주국시기에 벌써 용정 동흥중학교의 축구선수였으며 후에는 민주연군에 입대하여 장춘 해방전투에도 참가했었고 지방정부의 공무원으로도 사업하던 분이었다. 길림성팀의 감독으로 있던 시기 박상복 원로는 늘 선수들한테 국내전쟁시기 제 4야전군의 조선족 장병들이 가장 용감했다고 하면서 축구장에서도 그들처럼 용맹할 것을 강조했으며 또한 솔선수범하기도 했다. 지식수준이 높고 대가 바르고 인품이 좋은 분으로서 퇴직할 때까지 축구공과 씨름하면서 정직한 인생을 살아왔던 분이셨다. 지운봉 ㅡ 1937년생, 초중졸업 후 그 어떤 스승도 없이 축구기능을 연마해 1956년에 길림성팀에 가입, 그 때로부터 1965년 길림성팀이 전국갑급리그 우승을 쟁취할 때까지 줄곧 팀의 주력으로 활약했고 국가 청년팀에도 활약했음. 기술이 좋고 동작이 멋졌으며 의식이 좋아 머리로 그 역시 문정오와 마찬가지로 머리로 볼을 찬다는 평가를 받았음. 문화대혁명후기에 훈춘현에 하향한 후 거기에서 병을 얻은 채 복직도 하지 못하고 1973년에 타계했음. 동포투데이가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를 계속 낼 수 없게 된데는 정력이 부족한데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조선족 축구원로가 극히 적기에 내원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축구팬들이 어느 한 원로를 알선 소개한다면 동포투데이는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취재하여 올릴 계획이다. 지금까지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를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 스포츠
    2014-04-23
  • 연변축구 잘할 수 있는 무형산업(3)
    편집자의 말: 연변축구는 전통이 있고 역사가 길며 중국 축구사상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좌절, 곡절과 진통 그리고 억울함도 많이 당했으며 서기 1965년엔 전반 중국축구리그를 평정한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동포투데이”는 민함 선생과 예약하여 “연변축구 잘 될 수 있는 일종 무형산업”이란 제목으로 연변축구 특별기획으로 된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연재기간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갑급리그에서의 연변팀 현황 분석도 하게 됨을 알리는 바이다. 편집자 ■ 민함 연변축구팀과 중국 국가축구대표팀이라 하면 벌써 차원이 다르다. 하늘과 땅 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 국가축구대표팀이란 말 그대로 중국내 각 성과 직할시 및 자치구들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로 선발되며 물론 그 중에는 우리 조선족 선수도 적지 않게 선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건국이래 조선족이 국가축구대표팀, 국가올림픽축구대표팀을 비롯해 각종 국가급 축구대표팀에 선수를 수송한 수자는 무려 40여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1992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때 중국 국가축구팀에는 고종훈, 김광주, 이홍군 이렇게 연변적 조선족 선수 3명이나 입선되었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국가축구대표팀에 축구 엘리트들만이 모인 구단이라 할 때 선수 개개인의 신체소질이나 축구기술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출중할 수밖에 없다. 원칙대로라면 국내의 그 어느 팀도 국가축구대표팀과는 견줄 것이 못되어야 했으며 또한 여태껏 국내의 많은 축구팀들이 감히 국가축구대표팀과 평가전같은 것을 치러볼 엄두도 내지 못하군 했다. 헌데 세상일이란 흔히 상상밖의 일이 벌어질 때가 있다. 바로 다른 팀들에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국가팀과의 평가전에 연변팀이 가끔씩 도전한다는 것이다. 간이 크게도 말이다. 아니, 도전할뿐만 아니라 자주 국가팀을 꺾어버리기도 했다. 지난 세기 50-60연대에 그랬고 그 뒤의 80연대에도 그랬으며 그것은 90연대에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그럼 최근에는? 최근에도 물론 해남도나 운남 곤명의 동계훈련 때면 연변팀에서 국가팀과 평가전 제의를 하지만 국가팀에서 거절한다는 것이다. 그도그럴 것이 명색이 국가팀으로 연변팀과 이겨도 광채롭지 못하고 지면 망신살이기 때문이다. 연변팀에서 평가전 제의를 하면 국가팀 감독은 흔히 계획을 잡지 못했소. 선수들이 상할가봐 걱정이요 하기가 일쑤라 한다. 지난 세기 80연대 중국축구계에는 한동안 “깔람도이! 꼬까도이!(광동방언-吉林队! 国家队!)” 란 구호가 나돌았다. 뜻인즉 길림팀 실력이 곧 국가팀 실력이란 것이었다. 바로 원 연변팀의 감독으로 있었던 고훈 선생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1983년엔가 길림성팀(기실 연변팀)이 광주에서 국가팀과 평가전을 치르게 됐다. 그때도 국가팀은 중국내에서는 내로라 하는 쟁쟁한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자기의 소속팀에 있을 때 길림성팀과 경기를 치러본지라 길림성팀 선수들의 강한 투지에 겁부터 먹고 경기초반부터 매우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국가팀 선수들은 자기 앞에 굴러온 공이나 차는 정도였고 근본 길림성팀 선수들과 공쟁탈 같은 것은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는 길림성팀 선수들의 활무대가 되었고 국가팀은 전반전에 벌써 0 : 2로 뒤진 상황이었다. 후반전에 들어 길림성팀은 재차 득점기회가 있었다. 당시 고훈선생은 스트라이커(前锋)였는데 공을 몰고 상대방 문전까지 돌입했다가 꼴을 넣지 않고 공을 되는대로 차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국가팀인데 너무 몰려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 때 경기장 관중석에서는 “깔람도이! 꼬까도이!” 란 구호가 터져 나왔는데 이 구호는 삽시간에 전국에 퍼지면서 중국인들이 국가팀 축구를 비난하는데 자주 이용되군 했었다. 현재 중국축구는 이렇게 저렇게 많이 발전했다. 그 사례로 광저우헝다가 지난해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보좌에 올랐다. 헌데 이는 어디까지나 외적용병이 가맹하는 클럽축구의 성적이지 중국 국가팀의 성적은 아니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중국 국가팀의 수준은 아시아 일류는 못가도 2류 수준의 선두는 차지했었다. 아시아축구에서 한국, 일본, 이란, 사우디 등이 당시 일류였다면 중국은 카타르, 이라크 등과 비슷한 수준으로 1류에는 못미치고 2류라고는 좀 아깝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몇해간은 이라크나 카타르 같은 소국한테도 자주 패한다. 특히 지난해에는 태국의 청년팀한테조차 1 : 5로 패한 적이 있다. 한편 최근 몇년간 연변팀은 중국내 2부리그인 갑급권의 중류수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성적을 보아 절대 갑급의 제1그룹에는 들어가기 힘든 수준이다. 헌데 이런 연변팀과 국가팀은 평가전을 하기 무서워한다. 왜서인가?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시기 많은 중국팬들은 중국 국가축구대표팀이 연변팀을 진정으로 이길 때면 중국축구가 어느 정도 발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 스포츠
    2014-04-21
  • 리호은감독" 곤난한 상황에서 첫 승을 이뤄 기쁘다"
    [감독초대석] 이호은(연변천양천팀 감독): 아주 기쁘다. 상병선수 많고 곤난한 상황에서 첫 승을 이뤄 기쁘다. 선수들 아주 사랑스럽다. 모든 선수들 단결하였기에 홈장 첫 경기를 이겼다. 각층 지도자와 축구팬, 사회 각계, 매체에서 대폭적인 관심과 지지에 갈라놓을 수 없다. 오늘 안정된 수비를 했고 미드필더에서도 공통제를 잘했다. 수차례 득점찬스를 노리다가 기회를 잡았다. 리쥔(李軍)감독(신강천산팀 감독): 오늘 볼 때 갑급 잔류경기 같았다. 경기에서 우리 팀 선수들이 최대의 노력을 했다. 연변 원정경기 아주 골란했다. 경기 시작 20분과 마지막 20분은 기전술발휘를 잘했다. 선수들이 모든 노력을 했다. 이기고 지고 정상적이다. 우리 팀 선수들이 앞으로 제고를 가져올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 스포츠
    2014-04-20
  • [관전평] 승전의 희열과 그 뒤에 남는 아쉬움
    ■ 김철균 19일에 있은 연길홈구장 경기는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이 신강천산팀을 압도적으로 밀어 붙이며 펼친 경기라는 생각이다. 공점유율도 상대방보다 앞섰고 코너킥 기회와 슈팅 차수도 상대방보다 훨씬 더 많이 만들어 냈으며 특히 첫 홈장전을 승리로 장식하여 팬들을 기쁘게 했다. 그 날의 경기를 종합해 보면 연변팀에 아래와 같은 특점이 있었다. 상대방의 스트라이커(前锋) 진니 선수에 대한 노장 한광화의 대인 마크(盯人防守)가 크게 성공적이었다. 상대방의 진니 선수는 지난 해 석가장준호에 가담하여 12골을 기록, 할빈의등의 로드리그와 더부러 갑급 골잡이 공동 8위를 기록한 거물급 “킬러”였으나 그 날 연변팀의 한광화 앞에서는 꽁꽁 묶이운 채 별반 위협있는 슈팅 한번 날려보지 못했다. 지충국의 침투가 살아나고 고만국의 활동영역이 보다 넓어졌으며 최민과 강홍권의 활약도 돋보이었다. 다시 말하면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지충국은 공격선의 김도형과 고만국한테 패스를 적시적이고도 정확하게 해주는 외에도 순간에 따라 상대방 문전으로 번개같이 돌입해서는 상대방 골키퍼가 간담이 서늘해지도록 하군 했다. 그리고 득점했다 해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만국은 때로는 중앙에서, 때로는 변선에서 자주 위치를 바꿔가며 활동공간을 넓게 차지했다. “많이 뛰는 가운데서 전술이란 것이 생긴다”고 고만국의 활약은 드디어 결승골에 성공하는 결실을 안아왔다. 그 외 최민과 강홍권은 수비와 공격에 적극 가담하면서 수비역할도 잘해 낸 한편 위협있는 슈팅도 자주 날려 팬들의 절찬을 받았다. 물론 득점에 성공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좀 있었지만 대담한 시도가 좋았으며 향 후 계속 적극적인 활약을 펼칠 것이 기대된다. 반면에 아쉬움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외적용병의 역할이 너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용병 김도형의 역할이 돋보이지 못했으며 오히려 지충국이나 고만국보다도 실력이 한 수 아래라는 감마저 들었다. 아무리 외적용병의 덕을 크게 보지 못하는 연변팀이라지만 실망이 커도 너무 컸다. 1명이 출전한 외적용병이었지만 그 1명마저 후반들어 다른 선수와 교체되었다. 다같은 한국적 용병이지만 지난해의 용병들과 자꾸 비교해 보게 된다. 다음 경기초반의 공방절주를 너무 늦추었으며 득점도 너무 늦게 성공했다. 만약 경기초반부터 보다 거세게 밀어 붙였더면 골개수 1개에만 그치지 않았을 거란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 외 그날의 기술통계를 보면 연변팀의 코너킥 차수는 15개에 이르러 상대방의 1개의 15배에 달했으나 그 많은 코너킥이 득점과는 하나도 이어지지 않았으며 슈팅차수도 10여차(상대방은 6차)에 달했으나 유효 슈팅은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제 26일에 맞다들게 될 중경역범팀은 결코 신강천산같은 팀이 아니다. 슈퍼리그 출신팀이다. 연변팀이 상대방을 이기자면, 또한 적어도 비기기라도 하자면 단단한 잡도리를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
    • 스포츠
    2014-04-20
  • 연변천양천 홈장서 1 : 0 신강천산 제압
    ◎ 슈팅 차수 많으나 유효 슈팅 적어 아쉬움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19일 오후 2시 30분(중국 현지시간), 중국 연길시경기장에서 펼쳐진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 6 라운드에서 연변장백산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이 17번 고만국 선수의 결승골로 신강천산팀을 1 : 0으로 제압, 올시즌의 첫승을 홈구장 팬들에게 선물하였다. 경기 초반 쌍방은 비교적 보수적인 경기를 치렀다. 쌍방의 실력은 대등해 보였고 연변팀의 홈장우세가 별로 선명하지 못했다. 경기 5분과 6분 경 연변팀은 연속 2차의 코너킥 기회가 있었으나 득점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변팀은 경기 20분경 재차 코너킥 기회가 생겼으나 18번 박만철 선수가 날린 공이 아쉽게 크로스바(球门) 위를 날아넘었다. 경기가 지속됨에 따라 연변팀은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 압도적인 우세로 상대방을 밀어 붙이었다. 38분경, 16번 오영춘 선수가 날린 롱슈팅(远射) 위력이 컸으나 상대방 골키퍼가 쳐냈고 이어 43분 경 20번 최민 선수가 날린 헤딩슈팅도 아쉽게 상대방 크로스바위를 스쳐지났다. 후반들어 연변팀은 공격절주를 빨리며 상대방을 거세게 압박했다. 침투에 유능한 지충국 선수의 활약이 돋보였고 스트라이커 라인(前锋线)에서의 배합도 비교적 화려했다. 하지만 고질인 마지막 공처리가 미흡하여 오랫동안 자주 공격이 마지막 단계에서 무산됐다. 후반 12분부터 연변팀은 연속 선수교체를 하면서 공격에 더욱 날을 세웠다. 후반 15분 9번 한국용병 김도형의 슈팅이 크로스바옆으로 빗나갔고 후반 23분 3번 한광화의 헤딩슈팅도 득점과 이어지지 못했으며 3분 뒤 교체출전한 이호걸 선수의 롱슈팅도 크로스바를 날아지났다. 첫 홈구장 경기마저 무승이 아닌가 하며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중 드디어 연변팀의 결승골이 17번 고만국 선수의 발끝에서 성사됐다. 후반 30분 고만국 선수가 상대방 문전혼란 중 챤스를 잡아 가볍게 살짝 공을 다쳐놓은 것이 득점으로 이어졌다. 이어 4분 뒤 지충국 선수가 날린 프리킥이 상대방 골키퍼의 선방에 맞았고 12번 강홍권 선수의 롱슈팅도 크로스바를 날아넘었다. 19일까지의 갑급순위를 보면 호남상도가 4승 2무 14점으로 갑급선두를 달리고 있고 연변팀은 1승 1무 4패로 여전히 갑급 말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그날 다른 경기구에서 있은 경기결과를 보면 천진송강이 4 : 0으로 청도해우에 대승했고 심양중택이 1 : 2로 무한줘르에 패했으며 광동일지천이 1 : 1로 호남상도와 무승부를 기록, 중경역범이 4 : 2로 심천홍찬을 이기고 하북중기가 2 : 0으로 석가장영창을 제압했으며 청도중능이 0 : 1로 북경팔희한테 무릎을 꿇었다. 북경이공과 성도천성의 경기는 20일 오후 2시 30분(현지 시간)에 펼쳐지게 된다. 오는 26일 연변팀은 역시 안방에서 중경역범팀과 격돌하게 된다. 연변팀 출전멤버 1번 윤광, 3번 한광화, 5번 진효, 9번 김도형, 10번 지충국, 12번 강홍권, 16번 오영춘, 17번 고만국, 18번 박만철, 20번 최민, 27번 김파 후보: 2번 이호걸, 15번 김홍우, 19번 이군, 22번 지문일, 26번 문학, 28번 이성림, 32번 박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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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0
  •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중국 조선족 축구 전문사이트 론평원으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중국조선족 축구론평가이며 한국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선생이 중국조선족 축구 전문사이트의 론평원으로 초빙됐다. 18일, 중국의 성급 언론매체이며 중국조선족 4대 언론사인 길림신문이 연변 국제호텔에서 길림신문 축구 전문사이트 개통식을 갖고 김창권 연변대학 교수(축구학 박사 출신)와 김철균 연변 종합신문 부주필이며 한국 동포투데이 리포터를 이 사이트의 축구론평원으로 초빙, 해당 론평원 2명한테 초빙증서를 발급하였다. 김철균 론평원은 지난 세기 90연대부터 축구보도와 접촉한 이래 연변축구단(길림삼성, 연변현대자동차, 연변오동, 길림오동, 연변세기 등 여러 관명)을 따라 중국내 장강 남북을 넘나들며 2000여편의 축구관련 보도를 하였으며 수백편에 달하는 축구관련 칼럼 및 론평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고 최은택, 고훈, 이장수, 추명, 차범근 등 축구감독들과의 남다른 우정을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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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8
  • 중국 길림신문 축구전문사이트 개통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이젠 연변 장백산천양천축구팀을 사랑하고 연변축구를 관심하는 축구팬들이 축구전문사이트를 이용해 연변축구팀의 최신 뉴스를 접하고 상호 교류하면서 힘을 키우게 되었다. 18일, 중국 길림넷 조선문판인 인터넷 길림신문은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와 손잡고 길림신문 축구사이트(http://sports.jlcxwb.com/)를 개설, 그날 개통식을 가졌다. 중국 길림넷은 길림성 당위 선전부가 주관하는 성급 중점신문사이트로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의 인가로 설립된 전국 40개 중점신문사이트의 하나이며 국내외 조선족 사회에서 비교적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길림신문사 지도부에서는 시종 연변축구팀과 연변축구 관련보도를 중시하여 왔으며 갈수록 많은 독자층이 해외로, 관내로 이동하는 현실에 비추어 주관 부주필을 골간으로 연변지사 주요 인력을 대거 참가시킨 취재편집진을 구성하고 축구 전문사이트를 개통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연변 주 체육국 대표, 연변 추구자축구팬클럽 대표, 언론매체 대표, 길림신문사 대표가 감응구를 작동시켜 축구 전문사이트를 개통시켰다. 이어 김태국 축구 전문사이트 관리자가 사이트 소개를 했고 우장룡 연변 주 체육국 부국장 겸 연변 축구구락부 주임과 이동철 연변 축구운동관리센터 주임 그리고 연변추구자 축구팬협회 대표 등이 축하발언을 했으며 한정일 길림신문 부주필이 답사발언을 했다. 한편 개통식에서는 임종현 연변 주 체육국장과 이동철 연변 축구운동관리센터 주임을 축구 전문사이트의 고문으로, 김창권 연변대학 체육학원 축구전문교수와 김철균 연변 종합신문 부주필을 축구 전문사이트의 평론원으로 초빙하고 해당 증서를 발급하였다. 길림신문 축구 전문사이트는 중국 국내에서 우리 글로 된 첫 축구 전문사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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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8
  • “중국축구협회컵” 연변팀 1 : 0으로 강서연성팀 제압
    [동포투데이=스포츠] 16일, 중국 장시성 난창올림픽체육센터에서 있은 “중국 축구협회컵” 제2라운드 경기에서 연변천양천팀(이하 연변팀)은 경기 37분경에 넣은 이호걸 선수의 쐐기골에 힘입어 을급팀 강서연성팀을 전승하고 중국축구협회컵 제3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이날 연변팀 이호은 감독은 전부의 주력진영으로 을급팀 강서련성팀과 접전하면서 4-2-3-1 포메이션을 구사했다. 경기개시 5분에 있은 10번 지충국 선수의 슈팅으로 연변팀은 상대방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상대방도 만만치 않았다. 연성팀은 홈구장 우세를 빌어 경기초반 연속 3- 4차에 거쳐 연변팀에 슈팅을 날렸다. 경기 25분 연변팀 김파 선수가 왼쪽변선에서 상대 금지구역으로 침투하면서 반칙을 유도했으나 심판은 페널티킥을 주지 않았다. 경기 37분 연변팀은 한차례 화려한 배합으로 상대의 골문을 갈랐다. 17번 고만국 선수가 상대 금지구역 왼쪽에서 공을 지충국 선수에게 패스했고, 후자가 다시 고만국에게로, 고만국선수가 다시 공을 옆으로 패스하자 뒤에서 달려들어오던 2번 이호걸 선수가 강슈팅을 날려 연성팀 골문을 갈랐다. 그것이 경기 종료까지의 결승골이 되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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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7
  •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시리즈(9) “축구선수란 자아풍격 즉 개성 있어야”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중국조선족 축구원로 하면 고 최철봉옹을 빼놓을 수 없다.일찍 지난 세기 50연대 중기 주로 조선족들로 무어진 길림성 축구팀에서 최철봉 하면 모르는 축구팬들은 많아도 “무쇠머리”라고 하면 모르는 축구팬이란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장에서의 최철봉 원로는 이악스럽기도 하거니와 헤딩기술이 출중해 상대방 문전에서의 헤딩 세개 중 하나는 득점으로 이어지군 했다고 한다. 최철봉옹은 축구선수생애가 별로 길지 못했다. 1955년 길림성 축구팀이 창립될 때 그는 32세의 나이에 전업선수가 됐으니 길림성팀의 “아바이선수”란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선수 못지 않게 왕성한 체력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특히 헤딩기술이 중국축구계에서도 가장 출중한 선수 중의 한명이였다. 그리고 공중볼을 쟁탈하면서 높이 솟구치며 헤딩을 하다보면 흔히 상대방 선수와 머리와 머리를 부딪칠 때도 많았는데 그 때마다 상대방 선수들이 그의 머리에 강타를 당해 담가에 실려 경기장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최철봉옹은 특히 “무쇠머리”란 별호를 갖게 되었다. “요즘의 선수들은 이전의 길림성팀에 비하여 기술이 많이 제고되고 기전술 구사도 좋은 건 사실이다. 허나 반면에 이악스러운데는 이전의 선수들보다 못한 것 같다. 참, 우리의 축구가 전통풍격을 잃지 말아야 하고 자아나름대로의 개성도 있어야 할텐데…” 최철봉옹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지난 세기 50-60년대의 길림성 축구팀 선수들한테는 많은 별호가 있게 됐다고 한다. 예하면 “탱크” – 이광수, “대포” – 지청용, “제비” – 문정오/동경춘, “도리깨” - 김동하, “특공대” – 정종섭, “참새” – 손중천, “집게” – 김익갑 등이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 헌데 그 후에 들어 1990연대의 오동팀을 볼 때 중원발동기 – 고종훈 외에는 그렇다 할 별호를 달아줄 선수가 없다는 것이 최철봉옹의 일가견이었다. 한편 옛날의 선수들은 나중엔 초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번 께임의 경기만은 최선을 다한데 반해 그 후의 선수들 특히 지난 세기 90연대에 들어서면서 축구가 프로화로 되면서 적지 않은 조선족 선수들은 장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인지 몸을 좀 아끼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조선족의 축구풍격이 조선족으로 구성된 연변선수중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오히려 한족선수들로 구성된 기타 팀들에서 재현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란다. 그러면서 조선족이 중국축구무대에서 버텨내는 것은 그래도 정신력이나 응집력이지 기술로는 다른 팀과 도무지 비길 수 없다고 고집하기도 했다. 최철봉옹의 다른 한 회고에 따르면 1965년도 그가 인솔한 연변 운수공사축구팀(서병철, 박정운, 손중천 등 길림성팀에서 퇴역한 선수들로 무은 팀)은 전국을급축구리그에서 6등을 하고 또 그해 갑급팀에서 우승한 길림성팀과도 평가전을 치러 2 : 0으로 이겼는데 이에 몹시 감개무량해하는 동시에 후에 그럴만한 과외축구팀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큰 유감을 표했다… 축구를 그렇게 좋아하고 축구경기에 대해 일가견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쉽게 격동되고 흥분하군 하던 최철봉 원로ㅡ 2000연대 초반, 최철봉온 당시의 오동팀이 절강으로 매각되는 것을 끝으로 연변팀이 갑급무대에 재등장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고 최철봉 축구원로ㅡ 저기 저 하늘 나라에서도 연변 조선족 축구를 걱정하고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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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7
  • 연변축구 잘될 수 있는 무형산업 ( 2 )
    편집자의 말: 오는 19일이 되면 중국축구 갑급리그 연변 홈구장 첫 경기가 있게 된다. 연변축구ㅡ 전통이 있고 역사가 길며 중국 축구사상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좌절, 곡절과 진통 그리고 억울함도 많이 당했으며 서기 1965년엔 전반 중국축구리그를 평정한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동포투데이”는 오늘부터 민함 선생과 예약하여 “연변축구 잘 될 수 있는 일종 무형산업”이란 제목으로 연변축구 특별기획으로 된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연재기간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갑급리그에서의 연변팀 현황 분석도 하게 됨을 알리는 바이다. 편집자 ■ 민함 누가 뭐라 해도 연변 조선족축구는 중국축구무대에서의 하나의 구성부분임에 틀림없다. 중국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 연변축구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 것을 또한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연변축구는 그 자체로서의 독창성과 일정한 “개성”을 갖고 있다. 연변축구와 기타 내지축구와의 관계는 다른 지방 사이의 축구의 관계와는 어느 정도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하면 중국내의 대련의 축구와 광동의 축구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연변축구란 말 그대로 연변축구이면서도 중국조선족 축구이기도 하고 중국 소수민족축구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중 삼중의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물론 연변축구에 국내용병인 한족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총체적 성격을 볼 때 조선족이 절대적 주체이기에 본질적으로 조선족축구라 해도 무방할 것이며 또한 지금은 갑급리그에 신강을 대표하는 축구도 있지만 그래도 조선족축구가 장기간 중국축구무대에서 종횡무진을 해왔기에 중국내 소수민족축구의 전범(典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음 연변축구는 국내 그 어느 지구의 축구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격이 있다. 이는 연변축구로서의 하나의 풍경선이다. 적극적이고 완강하며 내용이 이채롭고 재미있는 그러한 풍격으로 많은 중국축구계 인사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한 독특성으로 의해서 연변축구에 참여하는 기타 국내선수(용병)들도 곧바로 연변 조선족축구인처럼 탈바꿈한다. 완강하고 적극적이며 굴할줄 모른다. 곧바로 조선족선수들처럼 된다 이 말이다. 1960연대 길림성팀의 당봉상(한족)이 그랬는가 하면 1990연대의 국내용병들인 황경량, 왕광위, 왕해파 등 선수들도 그랬다. 조선족선수들처럼 뽈을 찼다. 그래서일까? 그제날 지난 세기 50-60연대 중국 국가체육운동위는 외국축구대표단이 오면 곧잘 주로 조선족들로 무어진 길림성축구팀을 내세웠다. 당시 중국 국내의 많은 축구팀들에서는 연변축구를 “야만축구”라고 하면서 무서워했다. “야만축구”라는 말을 정면 즉 긍정적으로 말하면 “완강하고 적극적”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반면에 외국의 축구대표단 선수들은 중국축구를 “무대예술표현”이라고 했다. “무대예술표현”ㅡ 듣기 나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나약하고 골기없다”는 뜻으로도 풀이되지 않을까? 축구와 무대예술ㅡ 모두 기교와 체력을 동반하며 무대의 무용도 운동이라면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축구는 축구이고 무대예술은 그냥 무대예술이다. 양자는 분명 다르다. 하나는 격돌이고 다른 하나는 관중들한테 그저 미적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까? 한편 중국관방에서 외국의 축구대표단한테 길림성팀을 마주 세우는데는 다른 요소들도 있다. 하나는 정치적인 요소로서 소수민족축구를 중시하고 발전시키는 중국 민족정책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축구팀의 실력도 이렇습니다”라고 자랑하려는 요소도 깃들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 연변축구의 정체성을 놓고 여러 가지 논쟁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각 자의 주장들이 다 일리는 있다. 하지만 필자의 주장을 펼친다면 연변축구는 분명 중국 조선족축구이며 중국내 소수민족축구를 대표하는 축구라는 것으로서의 그 색깔이 더 진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연변축구가 이름이 여러번 바뀌였었다. 길림성 축구팀이요, 연변오동팀이요 등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길림성을 대표하든 연변을 대표하든 막론하고 총체는 조선족축구선수를 주체로 만들어진 조선족 축구팀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한마디에 귀결할 수 있다.
    • 스포츠
    201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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