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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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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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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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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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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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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수필] 두 누나 시집가던 그해의 봄
    ■ 김철균 꽃이 핍니다. 봄이 왔습니다. 연길시 거리마다에는 연분홍 살구꽃이 만발해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오늘은 일요일, 연길시 인민공원과 청년공원 등 유원지에서는 10여살 푼한 어린이들이 흩날리는 꽃보라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이 봄을 즐기고 있습니다. 봄, 세상만물이 소생하는 봄 – 얼마나 좋은 계절입니까. 하지만 봄이라고 해서 해마다 낭만적이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동년시절 나의 두 누나가 시집가던 그 해의 봄만 해도 괴롭고 울적하고 슬픈 봄이었습니다. 1 지금으로부터 40여 년전, 그러니까 1971년의 봄이었습니다. 바로 그해에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따르던 누나 둘이 한꺼번에 시집을 갔던 것입니다. 결혼이란 싱글로 살던 시절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에 들어선다는 것으로,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당시 우리 가정의 상황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는 19살, 하나는 18살 연연생으로 된 누나 둘이 너무나도 일찍 시집가게 된 것은 일종 생활의 핍박에 의해서였기도 했습니다. 1967년에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매맞아 사망됐고, 그 이듬해인 1968년 여름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마저 반란파들한테 끌려 다니다 못해 서슬 푸른 훈춘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던 그 시절, 우리 가정은 그야말로 살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집에 있는 식구라고는 15살인 셋째누나와 14살인 넷째누나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이었는데 숨이 붙어 있었으니 살았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고행이였습니다. 덮쳐드는 생활고도 그러했고 정치적으로 받는 정신적 타격도 그랬으며 거기에 여자인 두 누나의 인신보장도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친척들도 남의 감시가 무서워 우리 집으로 다니기를 꺼려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독재대상”의 자녀라고 기시를 받고 집에 들어오면 서럽고 적막하기만 하던 그 세월, 그래도 나의 6촌인 김정일형이 담이 크게도 우리 밤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지켜주군 했습니다. 그만큼 특등영예군인의 아들이였던 6촌형님은 가정토대의 덕분에 그래도 마음대로 우리 집으로 드나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중학교 홍위병들이 셋째누나를 붙잡아 가려고 했습니다. 말로는 어머니의 “죄장”을 고발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이 누나를 끌고가서 어떤 짓을 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6촌형님이 나섰습니다. “이놈들아, 할 말이 있으면 나한테 해라. 열다섯살밖에 되지 않은 애가 알면 뭘 안다고 그러냐!” 6촌형님의 호령에 홍위병들은 물러갔지만 그 뒤일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간혹 6촌형님이 일이 있어 오지 않는 날 밤이면 우리 세남매는 무서운 나머지 집안 한구석에 몰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번개가 치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날 저녁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령이 창밖에서 맴도는 것 같아 그러한 공포는 더하군 했습니다. 2 한편 정치적 박해와 더불어 힘든 생활난도 련속 들이닥쳤습니다. 생산대에서 “독재대상집”이라고 식량을 적게 주어 배를 곯는데다 겨울마다 화목을 해결하지 못해 집이 춥기를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시골인 우리 동네는 대부분 땔나무를 해다가 밥을 하고 집도 덥히군 했는데 남성일군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산에 흔해버린 그 나무도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밥을 하는 땔거리란 누나 둘이서 들에 나가 마른 풀을 베오거나 밭에 가끔씩 서있는 옥수수대 등을 갖다가는 하루하루를 겨우 이어갔는데 당시 저의 어린 생각에도 그 것은 장구지책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누나들 몰래 도끼와 낫을 가지고는 나무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헌데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여느 남정들처럼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임업정책이란 것도 몰랐기에 산기슭에 이르자 마자 어른들 팔뚝만큼씩 굵은 가둑나무들을 찍어댔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찍어 넘겼을가? 겨우 한수레가량 되게 나무를 찍으니 가뜩이나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서산기슭에서 넘어가려 했고 어린 나도 기진맥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좀 높은 곳의 나무를 끌어내릴 때 끝내 나무를 끌어 안은채로 경사진 곳에서 굴러 낭떨어지로 내려왔습니다. 팔과 얼굴이 긁히고 여기 저기가 아파났습니다. 헌데 아픈고 아린 것보다 너무나도 기진맥진한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누워 자고만 싶었습니다. “엄마야, 엄마 왜 날 두고 저 세상에 갔어?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해?…”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철균아, 너 어디 있어? 철균아!” 셋째 누나였습니다. 누나가 끝내 수소문하다가 산까지 찾아왔던 것입니다. 나를 발견하는 순간 누나는 나를 부둥켜 안았습니다. 그러고는 울었습니다. “너 이 나이에 어떻게 나무를 한다고 그래?! 이 불쌍한것아…” 누나는 내가 불쌍해 울고 나 또한 우는 누나가 가여워서 울었습니다. 난리가 날 일은 그 뒤에 있었습니다. 내가 한 그 나무가 또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6촌형님의 손을 빌어 나무를 수레에 싣고 집에다 부리웠더니 대대의 임업위원이 찾아와 임업정책을 어기고 굵은 나무를 찍었으며 이 역시 사회주의 담벽을 허무는 행동으로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 대신 누나가 생산대대에 불리워가 비판을 받고 자아검토서까지 쓰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나무 한수레 또한 한가치도 아궁이에 넣어보지 못하고 생산대 우사로 싣겨갔고 말입니다. 3 험악한 세상, 각박해진 인심 - 우리 세 남매는 그냥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몇년이 지나 셋째 누나가 19살이 되자 현 성에서 사업하는 형님이 대책을 댔습니다. 그 대책이란 것이 뭐겠습니까? 바로 여동생들이 어린대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은 연길에 사는 큰 매형과 토의해서는 고향사람들 몰래 두 누나를 연길의 총각들한테 마주세웠던 것입니다. 고향의 반란파들이 알고 연길로 찾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날이면 겨우내 만들어낸 혼사가 파탄될 수도 있겠으니 말입니다. 그해 우리 세 오누이는 현 성에 있는 형님네 집에 얹혀사는걸로 가장하고는 고향을 떠나 우선 형님네 집에서 얼마간 있다가는 그 해의 5월 1일은 셋째 누나의 결혼날로, 5월 2일은 넷째누나의 결혼날로 정했습니다. 1971년 5월 1일, 셋째 누나가 시집가던 날은 가뜩이나 흐리터분한 날에 궂은비가 구질구질 내렸습니다. 비가 오면 신부가 울면서 산다는데 셋째 누나의 결혼운명이 어떻게 될런지? 당시 그 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연길시 교외농촌의 4대가정이 사는 대가정으로 동생을 시집보내며 한숨을 쉬는 형님의 얼굴에서 어린 나도 다소 얼마간이라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튿날 넷째 누나가 시집을 갔는데 역시 연길시 교외의 그 농촌마을은 한공에 10여전밖에 되지 않는다는 가난한 곳이었습니다. 진탕속을 빠져나와 다시 먼지구덩이로 들어간다고나 할가? 여하튼 시집이라고 갔지만 나의 두 누나는 몇년간 많은 고생을 한 걸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잘하고 어른들은 잘 모셔 칭찬도 자주 받는다는 소문도 들었고요. 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격으로 부랴부랴 시집간 우리 두 누나의 신세, 그것이 그닥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현재 나의 두 누나는 모두 자녀들을 출세시키고 아주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같은 연길 시가지에서 살면서 서로 오가며 즐겁고 기쁜 사연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와 누나들은 어쨌든 이젠 한집식구가 아닌 서로 다른 가정을 꾸리고사는 현실, 나는 그것이 어쩐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같이 살던 형제가 왜 갈라져 다른 가정을 만들고 살아야 하는지? 아니 그 것도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서로 헤여져야 했으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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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4
  • [수기] 풀린 수수께끼
    ■ 이진숙 그게 어느 해였던가! 아무튼 한해가 막 저물어가던 추운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주방에서 한창 저녁을 짓고 있을 때 “띵뚱-”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앞치마에다 젖은 손을 대충 문지르면서 나는 부랴부랴 급기야 문을 열었다. “아이구, 웬일이지? 어쩌면 연락도 없이 이렇게…반갑구나. 어서 들어와.” 고중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먼저 떠나간 동남이와 승철이었다. 허겁지겁 애들의 손을 막 잡으려는데 동남이가 두손에 받쳐 든 고압가마를 내 손에 넘겨 주었다. “선생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이건 닭곰이고요.” “와-” 나는 애들처럼 소리치며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어른이 된 후에도 잊지 않고 찾아오는 학생들의 그 마음에서 어찌 교원이 된 긍지와 자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지금도 그 날의 감동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난다. 나는 서둘러 요리 두어가지를 만들어서는 맥주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 잇따라 고압가마뚜껑을 열었다. 흰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면서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너희들 남자애 맞니?” “식으면 맛이 없죠.” “하하하…호호…” 눈물나도록 고마운 제자들의 진심은 마지막까지 그들을 잡아주지 못한 자책감과 미안감으로 하여 마음이 괴로워났다. “자, 마시자! 너무너무 고맙다. 그리구 미안해.” 셋은 맥주잔을 들었다. “선생님, 우리 때문에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잔 또 한잔…그렇게 그시절, 그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터져 나온다. 술을 마시고 토하기까지 하여 자습시간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일, 파벌싸움에 참가하여 온 학교를 들썽이었던 일… “한번은 선생님께서 회의하러 가시면서 반장인 저에게 오후의 자습관리를 부탁했는데 글쎄 제가 앞장서서 분필 뿌리기를 시작해서…선생님은 고양이한테 생선가게 맡겼다며 노발대발하셨죠.” 승철의 말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하하하…호호…” “전 공부하기 싫어했기에 꾸지람도 많이 들었죠. 문과와 이과를 나눌 때 ‘넌 이과반이나 가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에 얼마나 무안했던지…” 동남이가 말끝을 흐리우면서 히쭉 웃어보였다. “정말 서운했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찾아와주니 고맙구나.” “아닙니다. 우린 선생님을 믿고 이해하니깐요.” 그래, 교원에 대한 신임과 리해가 애들 맘속에 뿌리 내렸다는것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으랴. “사실 선생님의 꾸지람을 많이듣던 애들은 대체로 공부를 잘해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던 애들보다 더구나 선생님을 잊지 못해 합니다.” “정말입니다. 후날 선생님을 만나도 꼬박꼬박 인사도 잘하구요.” 둘은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차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불쾌하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한번은 연변병원 ××과에 병보이러 갔었는데 마침 부주임의사가 앉아 있었다. 이윽고 내차례가 왔다. 나는 힐끗 쳐다보던 의사가 “××에서 오셨죠”하고 친절하게 물었다. “예-”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중학교에 있었습니까?” “예.” 순간 뭔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담임은 아니였어도 학년에서 손꼽히는 학생이고 작문을 잘써서 몇번이나 그가 쓴 작문을 모범작문으로 읽어주고 총애했던 그 학생, 하지만 머리속에서 이름까지는 딱 찍혀 떠올랐다. 그는 증상을 묻더니 처방을 쏙쏙 써서 훌 넘겨주는 것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 것 같아 그 무슨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얼굴이 막 뜨거워났다. (어쩌면 그럴 수가? 그래 잊어야지) 나는 그 날의 일을 지워 버리고 싶은 생각에 고개를 흔들면서 사념에서 깨여났다. “선생님, 취했습니까?” “너희들 말을 듣다보니 뭔가 쭉 생각이 나서…그런데 한가지 좀 묻자. 금방 동남이가 한 말이 내겐 수수께끼었는데 왜서일까?” “그건요, 나같은 애꾸러기들은 ‘우리 선생님’을 ‘나의 선생님’이라 생각해요. 저와 싱갱이질하면서 몰부운 심혈을 나중에 알았으니깐요.” “맞아요. 공부를 잘하는 애들은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고 ‘내’가 우수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답니다.”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은 생각을 말했다. 오, 그렇구나.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알았다!” 나는 여태껏 “나”와 “우리” 사이에 그런 비밀이 있는걸 정말 몰랐지. “자, 마시자!” 우린 또 맥주를 한잔씩 굽냈다. 나는 또 그들의 오늘과 내일에 대해 묻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앞으로 연변 땅에서 우리 이름도 함께 빛내렵니다. 두고 보세요.” 그들의 호기찬 말에 나는 너무도 대견스러웠다. “난 너희들을 믿는다. 잘해봐!” 그후 세월은 또 흘렀다. 말그대로 동남이와 승철이는 자기 업종에서 바야흐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동남이는 미용업계에서 활약하면서 박사학위까지 따냈고 승철이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계통에서 전문가수준의 인재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인재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는 말 천만지당하다고 말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4-03
  • 수 산 나
    ●김철균 여기는 스페인 항구도시 라스팔마스 출항의 쌍고동을 길게 뽑는 “카나리아립퍼”호는 서서히 육지와 떨어진다. 근 한달 간의 수리와 정비를 거친 이 원양화물선은 붉게 타는 바다의 저녁노을 속을 헤치며 22노트속도로 미끌어 질 듯 질주한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선박이 등대탑 해수욕장 앞바다를 지나고 가물거리던 라스팔마스항의 아스디캉 도커장이 시야에서 점차 사라지자 뎃기에서 정든 항구 라스팔마스를 바라보던 이 동아의 마도로스들은 아쉬운 듯 하나, 둘씩 침실로 들어갔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뎃기, 배머리를 철썩철썩 갈기는 파도소리에 깊은 감개에 빠져 있던 나도 정신이 부쩍 들었다. 주방과 식당의 설거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라스팔마스에서 나의 주방조리수가 병으로 입원하는 통에 이번 항차만은 주방장인 내가 도맡아 해야 했다. “오빠 ? ”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 주방에 들어서던 나는 흠칫 걸음을 멈췄다. 좌 우와 앞 뒤를 둘러 봐도 아무도 없었다. “오빠…” 또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와 더불어 나의 두 눈을 감싸는 보드러운 여자의 두손, 필경 꿈도 착각도 아니었다. 수산나! 너 어떻게?! 내가 수산나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반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한국 ××해운주식회사의 선원으로 고향 연변을 떠나 스페인 라스팔마스에 도착한 것은 19991년 5월, 우리가 승선할 선박이 스켓줄이 갑자기 바뀌면서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그 곳에서 약 한달가량 대기상태에 있게 됐다. 그러자 당시 국가급 2급요리사 증서가 있었던 나는 라스팔마스 현지에서 한국인 이횡권씨가 경영하는 “호텔강촌”에 줄을 놓아 쉽게 그 곳의 주방장 조리수란 일자리를 찾을 수가 있었다. 주방일은 일반적으로 자정이 넘어야 끝나군 했다. 당시 내가 들어있는 곳은 “세멘스클럽(선원회관)”이었는데 자정이 넘어 그곳으로 오자면 어쩔 수 없이 창녀촌으로 불리우는 싼타까따리나 거리를 거쳐야 했다. 때는 또한창녀들이 한창 손님을 끄는 고봉기었다. “꼬레안노, 올라? 지기지기 노프로그램아?(스페인어: 한국사람, 안녕하세요? 섹스요청해도 괜찮을가요?)” “야, 그년 그 몸매 하나 싹 죽여 주는데, 어째 끝내줄 만 해?” 이러한 지껄임은 이 거리의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바로 그 거리에서 수산나를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었던 것이다. 헌데 내가 보는 그녀는 여느 창녀와는 달리 보였다. 대마초나 마리화나를 복용하여 시누렇게 시들어가는 그 곳 오리지날 창녀들에 비하면 수산나는 아직 싱싱한 그대로었다. 그만한 미모라면 얼마든지 신사들도 끌 수 있겠으나 그는 손님한테 끈질기게 매달릴 줄도 몰랐고 간혹 술주정을 하는 사내가 다가 설라치면 겁에 질려 “노…노”하며 뒤걸음 치기가 일쑤었다. 이는 사내라면 흑인이든 술취한 알코올중독자든 가리지 않고 서로 빼앗기를 하는 다른 창녀들과는 현저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날도 내가 그 거리에 들어서는데 감실감실하게 생긴 필리핀 선원 한명이 징글거리며 수산나한테로 접근하는 것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오기같은 것이 생겼고 어쩐지 내 여동생이나 처제가 짐승한테 짓밟히는 듯한 감이 들었다. 그리고 고향 연변에 아내와 따님까지 둔 몸이었지만 그때 그 순간만은 내가 절대 너같은 반깜둥이한테 그 여자를 양도할 수 없다는 반발심까지 생겼다. 바로 이때 “모멘또(스페인어?잠간만)”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리더니 모로코 여자 한명이 불쑥 그들의 중간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필리핀 사내녀석과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수산나쪽으로 홱 돌아서며 욕질해대는 것이었다. 아마도 자기가 정했던 파트너를 유혹하지 말라는 으름장 같았다. 이에 수산나가 몇마디 변명해 나서자 그녀는 다짜고짜로 수산나의 머리칼을 걸머쥐는 것이었다. 둘은 대뜸 한덩어리로 엉켜졌는데 몸집이 작은 수산나가 그 야생암말같은 그 모로코 여자의 상대가 될리 만무했다. 차마 더 지켜볼 수 없는 정경, 나는 수산나가 나의 뭐라도 된 것처럼 그 여자들 싸움에 끼어들어 수산나한테서 그 모로코 여자를 뜯어내었다. 그러자 그 모로코 여자는 입에 게거품을 물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어 우리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구석쪽 골목으로부터 곰같이 생긴 흑인사내 세놈이나 칼을 빼들고 다가서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필리핀 선원 녀석은 슬슬 뒤걸음 쳤다. 나 역시 잘못 걸렸구나 하는 후회가 없지 않았으나 언제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일단은 맞다들고 볼 판이었다. 수산나를 슬쩍 뒤로 피하게 한 뒤 나는 늘 호신용으로품속에 넣고 다니던 쇠사슬을 뽑아 들었다. 우선 위엄부터 보일 심산으로 그놈들한테 접근한 후 내가 그 쇠사슬을 휙휙 내두르며 군복무를 할 때 배운 무술동작 몇가지를 표연하자 뜻밖의 효과가 나타났다. “오우, 치이나쿵우!(중국무술이다)”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깜둥이들은 줄행랑을 놓았다. “아밍고, 무쵸그라시아스,(스페인어 대단히 고마와요.” 수산나는 내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태는 수습했으나 나는 이런 수산나를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를 아니했다. 결국 나는 수산나의 손목을 이끌고 나의 숙소가 있는 “세멘스클럽(선원회관)”으로 갔다. 숙소에서 나는 출국할 때 몇권의 외국어교재를 가졌던 행운이랄가? 수산나와 스페인어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었다. 수산나는 콜롬비아의 스페인계 아가씨로서 이곳에 온지 10여일밖에 안되었다. 라스팔마스는 천국이고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대서양을 건너온 그녀었으나 그것이 떨어지는 사과를 받아 먹기보다는 훨씬 고된 노릇이었다. 거리마다 몇해째 해먹던 창녀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기에 수산나같은 애숭이 창녀는 이골목 저골목에서 쫓겨 다니기가 일쑤었다. 그렇다고 많은 빚을 내고 이민권을 산 수산나가 다시 콜롬비아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다음날 아니 정확히 그날 오후, 나는 수산나를 데리고 “호텔강촌”으로 갔다.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은 교회의 1등집사로서 선교사업과 자선사업을 각별히 중시하는 분이었는데 동란지역에서 온 많은 난민들을 받아 들여서는 그들한테 알맞는 일자리를 알선해 주군 했다. “갓 피기 시작한 꽃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 아깝다. 어떤 출신, 어떤 상황에서 시작했던 간에 창녀의 운명이란 모두 비참한 것으로 끝난다. 한 생령이 타락의 수렁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손을 내밀어 구해줘야 할게 아닌가?!” 내가 이렇게 언어밑천을 몽땅 동원하여 이횡권 사장님한테 사정하자 수산나의 일자리는 쉽게 해결되었다. 그날로 호텔의 스튜어드가 된 수산나는 너무너무 좋아하었다. 그날 밤 우리는 누구의 제의라 할 것 없이 한방에 들었다. 이 수산나가 지금 남몰래 우리 선박에 승선했다. 이젠 배가 한바다에서 항행하는 중이라 하선시킬 수도 없는상황이다. 그녀가 내곁에 있게 된 것이 못내 기쁘기도 했으나 뒤 일이 몹시 근심되었다. “호텔일은 어떻게 하고 나왔어?” “건 신경 안써도 돼. 사장님한테 허락을 받았으니까.” 천진난만한 수산나는 그동안 한국말을 그렇게도 유창하게 잘 배웠었다. 허나 지금은 그런걸 칭찬할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침울해있자 그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빠, 왜 이래? 무슨 일 생겼어?” “너 참, 말도 안돼, 예가 뭐 너 맘대로 오르는 곳인줄 알아! 너 누구한테 신고했어?” “그럼 이제라도 신고하면 되잖아?” “이 철없는 아가씨야, 너한테 선원수첩이 있나, 여권이 있나, 더구나 이번 스켓줄이 쿠바로 정해졌단 말이야. 캡틴이 알면 난리난다, 난리가 나.” 전반 쿠바가 그러하듯이 수도 아와나항구는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이나 네델란드의 로토르담항처럼 사람이 제멋대로 드나드는 자유항이 아니었다. 쿠바에 입항하자면 사람은 물론 배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한테도 수첩이 있어야 했고 지어는 선원들이 소지한 술담배와 돈까지도 몽땅 체크하고 신고해야만 했다. 때문에 선내스피카에서는 쿠바입항시의 유의할 점과 주의사항들이 매일같이 방송되고 있었다. 그런데 수첩도 여권도 없는 여자, 그것도 타국인 콜롬비아 아가씨가 한국선박에 편승했으니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는 판이었다. 아니나다를가 이튿날 저녁, 설거지가 끝나자 선장의 호출이 있었다. 내가 3층에 있는 선장사무실에 들어서니 징계위원들인 선장, 기관장, 1기사, 1항사, 통신장 이렇게 다 모여 있었다. 눈살이 꼿꼿해 앉아 있는 선장 강귀수. “주방장, 오늘 왜 불렀는지 알만한가?” “죄송합니다. ” “이 사람아, 그 말 한마디면 단거요? 내가 묻고저 하는건 쿠바입항시 어떡허면 탈없이 무사하겠는가 하는거여. 여자를 올렸으니 대책 있을거 아니여?” 뒤이어 수산나가 승선한 걸 주방장이 몰랐다는건 턱도 없는 소리라는둥, 어느 누구는 여자를 올리기 싫어서 안올렸겠느냐, 주방장이 다 뭔데 선장도 감히 하지 못하는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연변놈이 간이 커도 한정 없다느니 뭐니 하며 기관장과 1기사가 맞장구를 쳐댔다. “캡틴, 우리 선박에서 연변 놈들이 너무 날치고 있어요. 이번 사건을 꼭 엄하게 처리해야 선내 분위기가 개선되는줄 알겠습니다.” 기관장의 건의에 뒤이어 선장 강귀수는 사무상을 탕 치며 호령했다. “주방장 문성화, 금일부터 즉시 근무중지, 시말서를 쓰고 다음 항구에서 하선할 준비를 할 것. 1항사, 문성화의 강제하선 서류를 작성하고 장본인을 독방에 가두며 주방일은 잠시 보숭(갑판장)이 대신할 것. 이상 동의하는 자 손 드세요. ” 그러자 모두들 하나같이 손을 들었다. 다만 통신장 이덕수씨만이 눈치를 살피며 주저주저하더니 마지막으로 손을 들었다. “자, 의문사항 없으면 즉시 집행!”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2항사와 2기사가 뛰어 들어 와서는 나의 두팔을 휘여 잡았다. “어서 걸엇!” 독방에 갇히고 밖으로부터 자물쇠를 철렁 잠그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공포가 뇌리를 탁 쳤다. 2년이라는 출국근무기회에 꼭 큰 돈을 벌어 내 가정을 일신시키리라던 내가 강제귀국이라니? 그것도 일개 창녀 때문에 이게 무슨 개망신이람… 돈을 벌기는커녕 이제 귀국하면 회사에서는 집을 팔아서라도 왕복 항공료를 본인더러 물라고 할 것이다. 게다가 떠나기 전에 꾼 이자돈 만원은 뭘로 어떻게 갚는단 말인가? 그것보다 어린 딸을 업은채 달리는 기차를 따라오며 울부짓던 아내를 대할 면목조차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할 수록 기가 막혔다. 뉘라서 세인을 놀래우는 거사를 치러서만이 기적이라 했는가. 자신이 가장 실망했던 일이 뜻밖으로 풀리어 그의 인생을 다르게 만들었을 때 이것 역시 그의 인생으로서의 기적이 아닐가? 내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 이틀후 독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통신장 이덕수씨가 소리치며 들어섰다. “성화씨, 당신 진짜 복있는 사람이라구. 강제귀국 결의가 취소되고 원직이 회복됐지 뭐겠어.”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서슬푸르던 강귀수 선장이 이틀밖에 안되는 사이에 자기의 결정을 그렇게 소홀히 취소하다니 그래 그가 갑자기 부처님이라도 됐단 말인가. 해가 서쪽에서 뜰 지경이었다. “통신장님,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혹시 쿠바에 갈 때까지 주방사정 때문에 그러는건 아닌지요?!” “참, 사람 그렇게 기만할 수가 있어요. 한국사람은 그런 거짓말까지는 하지 않아요. 그리고 성화씨의 복직은 완전히 이 수산나 아가씨가 자신을 희생시킨 덕분이라구.” 뭐, 수산나가?!… 어느 사이 다가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 수산나가 나는 썩 반갑지를 아니했다. “오빠,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다시 내 몸에 기대여 울며 흐느끼는 수산나. 미구하여 나는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내가 독방에 갇히자 문제의 엄중성을 느낀 수산나는 그날로 선장 강귀수를 찾아 올라가서는 왜 죄없는 사람을 가두느냐, 가둘테면 나를 가두고 죽여도 나를 죽이라고 야단을 쳤다. 이에 강귀수가 그녀까지 가두라 하고 을러멘데서 수산나 역시 독방에 갇히였었다. 그런데 그날 밤 속으로 딴 궁리를 한 선장 강귀수는 다시 수산나를 찾아가서 제말을 들어주면 풀어주겠노라고 꼬셔댔다. 이에 수산나는 주방장까지 풀어 주어야 말을 듣겠노라고 잡아떼다가 그러마 하는 선장의 승낙을 받고서야 선장을 따라 갔다. 그날 저녁 수산나는 선장방에서 몸서리치는 성시달림을 받았다. 선장 강귀수라면 선내에서 다 아는 변태성욕자였다. 그는 자기의 남근을 수술해서는 그 속에 구슬 몇개씩이나 집어 넣었는데 그것이 여자라면 밤낮이 따로 없이 쳐들군 해댔다. 그리고 그의 장끼라면 여자를 장밤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물건이 기능을 다 한후에도 천방백계로 여자를 괴롭히고는 고통스러워하는 여자한테서 쾌감을 얻군 했다. 그날밤 선원들은 밤이 새도록 선장방에서 째는듯한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산나는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나의 강제귀국결정을 취소한다는 선장의 싸인을 받아냈다. 대신 그녀의 몸에는 꼬집어 퍼렇게 멍든 자리, 담배불로 지져놓은 자리 등 숱한 흉터가 생겨났다. 선장한테 몸을 바친 수산나의 대가, 이건 확실히 내 운명을 바꿔놓은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쉰음식을 먹은듯 께름하었다. 여자의 몸을 방패로 액운을 피햇다는 것 자체가 광채롭지 못할 뿐더러 또한 그 여자 역시 창녀경력이 있는 여자라 그 자신이 돈많은 선장한테 붙어 보자는 욕구가 없었다고 어떻게 장담하랴. 이렇게 오래도록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을 때 뜻밖에 있은 선장과 수산나의 싸움이 그것이 아니라는 걸 해석해 줬다. 그날, 브릿치쪽에서 하도 떠들어 대기에 주방일손을 놓고 올라 갔더니 선장방은 완전히 수라장이었다. 깨긴 유리병쪼각, 뒤엎어진 냉장고, 각종 서류들은 되는대로 널려 있었으며 어떤 서류는 배바람에 날리어 바다물위에 낙엽마냥 떨어지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이발자국이 난 볼을 붙잡고 있는 선장과 머리가 흐트러진 수산나가 서로 상대방을 노려보며 서있었다. 이미 옆에서 말린 뒤라 싸움은 일단 끝났지만 싸움의 계기는 그녀가 선장방을 청소하는 기회에 선장이 재차 그녀를 범하려다가 그 꼴이 됐다는건 물어보나마나었다. 헌데 시어미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고 선장은 나한테 화풀이를 해댔다. “이 씨팔놈아, 넌 왜 올라왔어? 너 이년을 도와 날 때리러 왔지. 그래 이년이 너의 와이프라도 된단 말이냐?” “선장님, 말이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대체 어쨌다는 겁니까?” 또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릴줄 알았던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선장은 나를 잡아먹을 양으로 미쳐 날뛰었다. 뒤이어 날아오는 강귀수의 주먹질, 나의 눈앞에서는 불꽃이 반짝했다. “너 내가 누군줄 알고 말대꾸냐? 네놈이 그래도 여직 고분고분했기에 봐줬다. 이번엔 영낙없이 귀국이다. 시말서 당장 써!” 억울하게 맞는 것만 해도 분한데 또 귀국이요. 시말서요 해댔다. 아무리 선박이 자기 세상이라 해도 그렇지 사람을 완전히 짐승 취급하는 놈이었다. 나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 싸가지 없는 전라도 새끼야. 네가 무슨 놈의 선장이냐! 너와 나 인간 대 인간, 오늘 네죽기 아니면 내가 죽기이다. 귀국하기 전에 나 너부터 죽일테다.” 나는 대뜸에 선장 강귀수를 메따꼰지고는 얼굴이고 가슴이며를 마구 짓밟아 뭉갰다. 바빠맞은 선장은 배에서 깡패로 불리우는 2항사와 1타수를 불렀다. 그러나 그 두사람이 나서기도 전에 본선에서 근무하는 6명의 연변동료들이 그 둘을 막아나서면서 주방장한테 손대는 날엔 자기네들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렇듯 똘똘 뭉친 기세앞에서, 또한 그들 역시 진작 선장을 아니꼽게 보던차라 감히 어쩌지 못했다. 무졸장군이 된 선장은 그제야 자기의 고립을 알아챘는지 “쿠바에 간후에 보자”고 한마디만 남기고는 부랴부랴 브릿치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헌데 쿠바 아와나항에 입항해 징계를 받은 것은 내가 아니라 선장 자신이었다. 입항한 그날 저녁, 선장 강귀수는 어느 호텔앞에서 한 아가씨를 꼬시다가 당장에서 뽀리시(경찰)한테 덜미를 잡혔으며 그것을 끝으로 다시는 본선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쿠바도 사회주의 국가체제었던만큼 남녀사이의 비정상적 성접촉은 극력 통제하는 모양이었다. 한편 수산나는 세관원들의 수사를 피해 낮에는 줄곧 엔진품에서 숨박꼭질을 했는데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긴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뒤이어 회사본부로부터 선장 강귀수의 강제귀국조치와 신임선장 정인식씨의 부임발령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몇개월이 지나갔다. “오빠, 나 아마도 이상해. 벌써 오래전부터 그 것이 오지가 않아.” 디스코클럽 “벌칸”에서 수산나가 이 말을 할 때는 그녀의 아랫배가 이미 어느 정도 부풀어 있었다. 뜻하지도 않던 수산나의 임신, 아내밖의 여자, 그것도 해외에서 만난 여자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자체가 나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라스팔마스에는 한국선원들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거리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헌데 그 여자들 거개가 한국남자들에 대해서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국 선원들은 여자를 꾀여낸 후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은 한국이 스페인보다 훨씬 더 잘 산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억수로 많으니 한국에 데려다 살림을 차려 줄테다 라는 감언설로 공갈쳐 놓고는 그대로 실행해 주는 이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걸레를 갈아 채듯 또 다른 여자를 봐다니군 했다. 물론 나는 수산나한테 내 집이 여차여차하다고 자랑한 적도 없고 얼마만큼 잘해 주겠다고 약속한적도 없었다. 허나 내가 귀국 할 때 수산나가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면서 위자료요, 생활안치비요 하고 떠드는 날에는 영낙없이 국제재판정에 나서야 할 판이었다. 이튿날 저녁 통신장한테서 500불 가불한 나는 수산나앞에 그 돈을 내놓았다. “오빠, 웬 돈인데 날 주는거야?” “그게 바로 너 바라던거 아니야?! 그것이면 아이를 지우고도 영양비로는 충분할거야.” “…?!” 수산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이런 수산나가 슬며시 무서웠다. 수산나가 어떻게 나올런지. 돈이 적다고 뾰로통해 할지 너,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발뺌 하려느나 하며 갑자기 달려들어 내 얼굴을 뜯어놓을는지… 헌데 아래의 수산나의 말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오빠, 알만해. 오빠가 골치 아파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난 어쩔 수가 없어. 난 일부러 오빠의 씨를 받았고 오빠를 닮은 아기를 낳아 키우고 싶었어.” 나는 그러는 수산나가 더 가슴이 아팟다. 아까 내가 무서워 했던 것처럼 그녀가 선장 강귀수한테 달려들던 때와 같이 나한테 성풀이를 했더라면 차라리 속 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산나, 너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너 지금 나를 한국사람으로 알겠지만 난 아니야. 중국사람, 차이나 아니 스페이말로는 치이나, 너 알지? 사람 많고 가난한 나라. 그런 곳으로 난 돌아가야 해. 널 데려갈 수도 없고 나 혼자 말이야.” “맞아 오빤 가야 해. 나도 오빠가 언제건 내곁을 떠난다는 걸 예감했어. 오빠가 중국사람이라는 것두 나와는 상관없어. 오빠한테는 중국의 와이프가 좋을 것이나 난 어쨌든 첫 애인으로 오빠가 좋았어. 오빨 붙잡진 못해도 아이만은 가질 수 있잖아!” 한 서양여자의 입에서 그것도 창녀경력이 있는 여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올 줄이야. 나는 이전의 그 여자가 아닌 새 인간 수산나를 보는 듯 했다. 나와 수산나, 여기서 나는 종래로 이 모든 것을 사랑과 연결시켜 본 적이 없었다. 헌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라스팔마스 거리에서의 여느 남녀들보다 우리의 관계는 다른 점들이 많은듯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나 사이는 돈을 주고 육체를 사는 그런 매음관계가 아니었다. 하긴 내가 그녀한테 얼마만큼의 돈을 쓴 건 사실이나 그건 절대 몸값을 준다는 기분이 아니었으며 그녀 역시 그런 요구글 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내가 스스로가 원해서 그녀한테 옷도 사주고 함께 술집이나 디스코클럽에 출입했을 뿐이었다. 돈을 쓴 건 또한 나만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그녀가 자기의 돈으로 먼저 값을 치를 때도 몇번 잘 되었다. 그리고 다른 선원들은 입항할 적마다 다른 여자를 갈아댔고 지어는 한방에 2∼3명으 창녀를 넣고 질탕하게 놀아댔으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외출했던 남편이 아내곁으로 찾아오는 심정이랄가. 라스팔마스에 입항할 적마다 그 매혹적인 아가씨들이 팔을 잡아끌며 유혹했으나 나는 번번히 물리치고 내 유일한 파트너인 수산나만을 찾군 했고 그 때마다 그녀 또한 그 동안의 그리움과 정성을 몽땅 쏟아 나를 섬기군 했다. 이것이 바로 여자 수산나로서의 매력이랄가. 하긴 이러한 수산나가 있었기에 라스팔마스의 그 매혹적인 밤거리에서 내가 다른 선원들처럼 방탕하게 놀지 않았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 날 버리고 어딜가. 너 죽고 나죽고 해 볼테다 라고 하면서 수산나가 지꿎게 매달린다면 미련없이 그녀를 뿌리칠 수도 있을 나었으나 그녀가 일절 신경 쓰지 말고 집에 가라고 나를 위안하는데는 도리어 그럴 수가 없는 나었다. 연변 고향집의 아내와 따님은 아무 때건 모이면 될 일이지만 밤만 자면 배가 부풀어 오르는 수산나와 그 배속의 씨앗을 두고는 그것이 설사 어떤 사랑이고 또 어떤 결실이던간에 한번 가면 영영 만날 수도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다. 귀국일자가 각일각 다가 올수록 이러한 안타까움은 더욱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결국 나는 선박근무날자를 얼마간 연장한느 것으로 나의 얼마만한 책임이라고 다해 보려고 했다. 후에 나의 신청이 허락되자 그것이 반년이라는 짧은 연장임에도 수산나가 그렇게까지 좋아할수가 없었다. 그때로 부터 약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우리가 아프리카 앙골라 해상에서 냉동물고기를 받아싣고 라스팔마스를 향해 금방 선수(船首)를 돌렸을 때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으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 왔다. 내가 새로 교체된 통신장 이순택씨의 부름을 받고 통신실로 달려 갔을 때는 스피카에서 이미 수산나의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오빠, 오빠 뭘하고 있어? 빨리 말해 오빠야. 오버-” 나는 급급히 대화기를 부여잡았다. “수산나. 나야. 너 웬 일이야? 오버-” “기뻐해 오빠. 내 큰 일 해냈거든. 오빠 알만해. 한번 맞춰봐. 오버-” 순간 나의 온몸에는 전률이 쫙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나와 수산나의 2세 탄생 맞지? 오버-” “그래 그래 맞았어. 오빠의 복제품 남자애야. 오빠 어서 와봐. 오버-” 산후진통을 깡그리 잊은 듯 수산나는 잔뜩 희열에 차 있는 듯 했다. 그 뒤에 있은 6일간의 항행. 나는 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된장국을 끓일 때 설탕을 잔뜩 넣어 들큰하게 했는가 하면 반찬을 너무 짜게 하여 입에 댈 수조차 없게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선원들은 “쩌어식, 돌아도 한창 돌았군”하며 악의 없는 농담질을 했다. 배가 부두에 와닿자 나는 저녁 설거지가 끝나기 무섭게 수산나한테로 달려갔다. 그녀는 라스팔마스의 순복음 한국인교회에서 세운 병원에서 출산하고는 이미 이틀전에 자기의 거처로 옮겨와 있었다. 나와 수산나를 반반씩 닮았다고 할가. 아기는 전형적인 동서양인의 혼혈결정체었다. 그리고 출산카드에 적혀있는 아기의 혈형은 A형, 그것은 생부인 나의 AB혈형과 혈육관계가 건립된다는 것이었다. 해외에서의 한 외국여자와 맺은 사랑의 결실, 그것은 누구나 다 수확해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기쁨이 큰만큼 뒤에 따르는 번뇌는 더 컸다. 자식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는 무책임한 생육, 생부를 영원히 모르고 자랄 사생아의 운명, 그것이 수산나한테는 어떤 수확으로 될는지는 모르나 나한테는 어쨌든 죄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위스키를 정신없이 들이 켰다… 다음날, 나는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겨우 침대에서 눈을 떴다. 헌데 수산나가 보이지 않았고 이횡권 사장님의 부인 유혁선 여사가 거실에서 아기한테 우유병을 물려주고 있었다. “맙소사, 아저씨 어쩌면 그토록 곤드레 만드레 취할 수가 있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아버님, 사탄마귀한테 홀리운 저 영혼을 구원해주옵소서. 아멘-” 교회 전도사인 여사님은 누구를 만나든 먼저 그 사람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이젠 습관으로 된 모양이었다. “여사님, 수산나는요?” “그것도 모르니 사탄마귀한테 혼백을 몽땅 빼앗긴게 아니고 뭐예요. 아가씨는 아저씨 대신 선원형제들의 밥을 지으려고 새벽에 부두로 나갔어요.” 말을 마친 여사님은 계속 구원해 주옵소서를 연발하며 열심히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도 따위에는 별 흥미도 없었다. 나는 부랴부랴 아기를 싸안고는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바르꼬(스페인어-배에로)” 본선에 돌아오니 수산나는 한창 주방조리수와 함께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 그 옆에서 거들어 주던 갑판장 김정억씨는 나를 보더니 빙그레 웃어 주기까지 했다. 그 의미심장한 웃음에서 나는 긴장이 확 풀렸으며 선내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감촉할 수 있었다. 한국선원법에 따르면 무단적 외박은 틀림없는 징계범위에 속했으며 강귀수 선장 때 같으면 그것이 에누리 없이 집행되었을 것이었으나 출산 10일도 안되는 수산나가 열심히 일한 정성이 꽃으로 폈는지 아니면 유혁선 여사님이 드린 기도가 하느님을 감동시켰는지 아무튼 정인식 선장님까지도 흐뭇해서 우리의 아기를 안아 보며 “거참. 우리 선박에 경사가 났구나”하고 우스개까지 피웠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오침에 들어가자 나는 수산나를 앉혀 놓고 오래동안 벼르고 벼르던 말을 끄집어 냈다. “이젠 아기까지 있으니 너와 나 더는 떨어 질 수 없구나. 너 나와 함께 중국 가서 살자. 이젠 그럴 수밖에 없어.” “오빠, 몇번 말해야 돼? 신경쓰지 말라구. 난 이 애면 족해. 중국은 공산권국가기에 여자 둘씩이나 한집에서 와이프로 살 수 없잖아!” 중국에 대한 그녀의 개념이란 고작 이 정도었다. “건. 상관마. 내가 마누라와 갈라지면 될거 아냐!” 앞날이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는 나었으나 일단은 그 쪽으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와이프와 나 모두 여자야. 난 그게 싫어. 또 오빤 그럴 사람 못돼. 그러나 오빠 내 말 한가지만 꼭 들어줘.” “무슨 부탁인데 힘이 닿는대로.” “심각한건 아니야. 오빤 할 수 있어. 바로 오늘밤 나와 결혼해 줄 것만 약속해줘. 그담에 난 수도원에 들어 갈거야. 오늘 밤 일은 이미 캡틴과 다 연락 있었어.” 결혼?!… 그녀와 나 이미 살을 섞었던 몸. 새삼스레 결혼이란 뭔가. 그것도 말이 결혼이지 법적승인도 없는 형식적 결혼. 그것이 수산나한테 어떤 큰 위안이 되는가. 또한 그런 형식적 결혼을 해놓고 수도원의 수녀로 일생을 기약한다는 것. 그것이 과연 내 아내를 위한 희생인가 아니면 어지러운 속세의 모든 것이 싫어서인가. 하지만 수산나를 놓고 볼 때 이는 너무도 각박한 인생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밤, 나와 수산나는 선박갑판위에서 결혼 아닌 “결혼파티”를 열었다. 습관에 따라 선박에서는 갑판조명을 몽땅 끄고 초불을 켰으며 선수 크레인앞에는 예수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은 십자가까지 세웠다. 간단한 예식이 있은 후 선장 정인식씨의 설교가 있었다. “너그럽고 자비하신 하느님, 원항에서 파도와 싸우는 우리 선원형제들이 오늘 하느님 뜻과 어긋나게 결혼파티를 열었사오니 죄많은 속세의 영혼들을 널리 용서해주옵소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은 모두 우리 어리석은 영혼들에게 참된 뜻과 참된 삶의 이치를 깨우쳐주고 있사오니 우리 선원형제들은 그 뜻 받들어 영원토록 살겠사옴을 기도합니다. 아멘-” 선장의 설교 역시 형식에 불과했다. 뒤이어 술판이 벌어지고 춤노래가 시작되었다. 바다의 마도로스들한테는 하느님보다 그래도 술과 노래아 여자가 더 좋은 모양이었다. 파티가 클라이막스에 오를 무렵, 누군가 선박에서 SOS구조용폭죽을 가져다 하늘에 쏴올렸다. 항구의 밤하늘은 수십갈래의 꽃무늬를 이루면서 한결 더 황홀해졌다… 얼마후 수산나는 과연 이횡권 사장님의 알선으로 스페인 사람이 세운 수도원의 수녀로 들어갔다. 나와 있었던 로맨틱한 과거를 깨끗이 씻고 나를 잊으려는 마음에서인지 그때로부터 그녀는 나를 통 만나주지 않았으며 나는 귀국할 때까지도 그녀와 아기의 얼굴 한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인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는 오늘, 아무리 수녀라 해도 내 아이를 기르는 수산나가 과연 나를 깡그리 잊을 수 있을는지?…세상에 완미한 것이 있을수 없듯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합법적인 것이래서 다 신성한 것이 아니며 비법적인 것이래서 다 죄악만은 아니라고. 이것은 다만 내 아내가 낳지 못한 아들을 수산나가 대신 낳아 주었다는데서만이 오는 변호가 결코 아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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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조선족 이산가족’, 왜 만나면 싸우기만 할까?
    ●김철균 지난 2월 북측 금강산호텔에서 있은 남북이산가족상봉 장소는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60여년간 갈라져 살아야만 했던 부모와 자식 그리고 홀로 외롭게 살면서도 상대방을 기다리며 통일을 부르짖던 아내와 남편들이 서로 부둥켜 안으며 울부짖었다. 여기에는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없었다. 잘 살고 못 살고가 또한 없었다. 그저 만나는 것이 좋았고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도 기뻤다… … 다른 한편 아내의 한국행으로 3년만에 만난 조선족 부부들. 【렌즈 1】 “당신 한국생활 얼마나 피곤하고 스트레스 쌓이는지 몰라요. 여기서는 한국에서 보낸 돈을 펑펑 퍼쓰며 팔자가 늘어지게 잘 살지만 한국의 돈은 뼈돈이예요. 모두들 한국에 가면 돈이 그저 길에 널렸는가 하는지…” “아니, 이 여편네 봤나?! 한국에 간 사람은 그저 자기 한몸만 건사하고 챙기면 그 뿐이지만 여기서 아이를 데리고 생활하는 것이 쉬운줄 아는 모양이지. 내쪽과 처가쪽의 큰 행사는 다 참가해야 하고, 아이는 하루 건너 돈을 달라고 칭얼대지 어디 그뿐인가. 음력설이면 축에 빠질가 집에 한상 차려놓고 친척 집 애들한테 100원 한장씩 나눠줘야 하고, 청명과 추석이 되면 화장터에 가서 양측 가문의 7-8명 되는 고인들의 제사를 도맡아 지내야 하고, 9월이면 교원절, 5월과 10월이 되면 결혼청첩만 10여장씩 날아들고, 11월이 되면 빼빼로라고 애한테 털리고, 어디 그뿐인가 애의 서클비만 매달 2000원씩 대줘야 하니 이곳에 뒤치락거리를 하는 것이 한국보다 더 힘들고 피곤하단 말이야.”..... 【렌즈 2】 “남편이 한국에 가서 버는족족 집에 돈을 보내주니 당신 돈이 어떻게 벌어지는 거나 알아? 이게 뭐야. 이 옷들은 당신 평생 입어도 다 못입을 옷들이야. 이옷은 도대체 몇번이나 입어본거야?! 그리고 맨날 노래방이나 마작판이나 돌아다니구. 남편이 뭐 돈벌어 들이는 기계인가? 보내주는 돈은 애 학비와 나의 사회보험이나 물라는건데 애 공부성적이 이게 뭐고 또 나의 사회보험은 왜 2년씩이나 물지 않은 거야?! 도대체 당신이란 여자는 궁리가 있는거여 없는 거여!” “뭐라구?! 당신이 도대체 얼마나 보내 줬다는거야?! 한국에서 노가다로 뛰면 일당 10만원 이상 받는다는데 그러면 월당 300만원이 되는거 아니야? 고깟거 매달 100만원도 안되게 보내주면서 큰소리는 무슨 큰소리야. 나 집에서 애를 키우는 것만 해도 중국돈 5000원은 버는 셈이야. 그러면서 좀 놀러 다녔는데 어쨌다는거야. 남편을 뒀다 어디에 써먹겠어…” “뭐야 일당 10만원 이상을 타도 일하는 날이 며칠이나 된다고 그래. 비가 와서 놀고 일거리가 없어 놀고 또 세집을 맡고 살지 남는 것이 뭐 있다고 그래” 【렌즈 3】 “아무리 홀애비살림이라 해도 집안 꼴이 이게 뭐예요. 그리고 당신 목욕이나 하며 사세요. 꼭 마치 돼지같아요. 어 냄새야. 한국사람들은 당신같지 않아요. 매일 샤워하고 출그할 때는 양복에 넥타이를 받쳐매고 당신처럼 몸을 거두지 않는 사람은 없다구요.” “뭐야 낸들 몸 가꾸기 싫어 그랬겠나. 매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애를 깨우서는 밥을 먹인 뒤 학교에 보내고, 또 출근하고 퇴근해서는 또 밥을 짓고 학교에 가서 애를 데리고 오고 하다보면 언제 내몸에 신경쓸 사이가 있다고 그래.” “아이고 참, 내가 눈이 멀었지 내가 그래 여태 저런 돼지같은 남자를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는가?!” “뭐야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 없구나. 너 그럼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남조선새끼와 살아봐라. 아니 너 이미 그 새끼들과 뒹굴어 봤지? 가라 가 이젠 이혼이다.” “그래 그래 이혼이다. 남편이란 것이 이혼소리를 하는데 내가 뭐 벌벌 떨줄 아느냐?” 【렌즈 4】 “당신 한국에 갔다 오더니 달라졌어.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단 말이야. 그리고 맘속에 내란 존재가 없고 꼭 마치 한국에 숨겨둔 여자가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돈도 잘 보내주지 않고…” “한국 가서 스트레스 받으며 일한 남편한테 이게 뭐야. 그리고 내 나이 아직 젊은데 여자 없이 어떻게 살아. 너 여기서는 놀러 다니지 않아? 널 배반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줄 알아라.” “아이구 나 못산다 못살아. 낸들 놀러 다닐줄 몰라서 안 다닌줄 알아. 아이를 키우고 집을 거두고 하다 보면 시간도 없고 또 당신같은 것도 남편이라고 여직껏 기다려 왔는데 그게 무슨 양심이야. 남자란 것은 다 짐승이라더니…” 【분석】 얼핏 보면 이런 가정들의 불화는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 같다. 몇년씩 떨어져 있다 보니 할말도 많고 불평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라면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그 점이다. 흔히 보면 부부중 한국에서 온 일방이나 중국에서 남편 혹은 아내 일방은 만나면 서로 상대가 자기를 이해하고 위로해 줄 것을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떨어져 살면서 힘들고 외롭고 또 하소연할 곳도 없다가 갑자기 만나니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것이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질 때가 많다. 기실 한국생활이나 중국생활 모두 힘들긴 마찬가지이다. 특히 한국에서 힘들게 번 돈을 중국에 있는 아내 혹은 남편이 되는대로 써버린다면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고 중국생활 또한 최근 몇년간 경제발전과 더부러 소비수준도 크게 올라가다 보니 이곳저곳 돈 들 곳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연변이 그렇다. 그리고 최근 몇년간 인민페의 절상으로 한국과 중국사이의 차이가 그만큼 좁혀졌기에 지금 한국에 가도 큰돈을 벌기 어렵다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문화적 차이이다. 한국에 간 사람은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아끼고 낭비에 인색한 한국사람들의 소비문화를 접했고 연변은 또 아직도 먹어라 써라 하는 문화에 빠져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러저러한 모순과 갈등이 많지만 그것을 풀자면 옴니암니하고 다퉈서 될 일이 아니다. 그저 긴말이 필요없이 상대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노라면 참게 되고 이해가게 되며 또한 부부간의 화목도 도모할 수 있겠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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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31
  • 행복한 부모...자녀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 ‘이주와 정착 독서포럼’ 문민대표 나는 고등학생 딸을 둔 학부모다. 어제 학부모회가 있다고 해서 딸이 다니는 학교를 다녀왔다. 딸애가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는 직장을 핑계로 학부모회 통지서를 받았어도 그냥 스쳐지다. 이제는 딸애가 고등학생이라 부모들이 학교를 찾아가면 머쓱해 할까봐 먼저 동의를 구했다. 생각 밖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모처럼 학부모회에 참석했는데 큰 강당에 빈 좌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꽉 차있었다. 전체 학부모회의를 마치고 반별로 자녀가 공부하는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면담시간을 가졌다. 앞으로 1년 동안 딸애의 담임을 맡아줄 선생님을 직접 뵙고 나니 마음이 든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딸애는 엄마에게 꼭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학교입구에 있는 분식집에 들렸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과 즐겨먹는 주먹밥을 주문했다. 엄마가 학교에 찾아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여느 때보다 말이 많아졌다...... 나에게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지만 학부모회에 찾아온 엄마의 기억은 없다. 과연 학부모회가 있었을까 싶다. 중학교부터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나의 학창시절은 반 친구와 선생님이 전부였고 기숙사-식당 –교실- 운동장 4박자에 맞춰 매일 매일 보냈던 것 같다. 사춘기 때 힘들었어도 엄마가 곁에서 토닥토닥 해준 적 없다. 학교에서 스케이트 선수로 뽑혀 기분이 날듯이 기뻤어도 바로 엄마에게 알릴 수 없었다. 요즘 나는 고등학생 딸애를 지켜보면서 학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학기 초라 하루에도 몇 장씩 학부모 안내문을 받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딸애가 교복 치마 길이 때문에 선생님께 불러갔다고 들었는데 이 일을 알고도 모르는척해야 하는지 아니면 선생님께 자녀 대신 사죄 전화라도 해야 하는지 등등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4월1일부터 법무부 동포정책이 개선되었다. 앞으로 가족단위로 한국에 체류하는 동포가 많아질 것이다.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미성년 자녀를 중국에 두고 왔던 학부모들에게 희소식이다. 이제는 자녀들을 집에서 가까운 학교에 보내며 매일매일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부재했던 가정교육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정교육은 부모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환경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던 자녀가 한국에 온 후 매일과 같이 부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가...... 서울시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중국동포 학부모들이 한국 교육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자녀들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오는 5월부터 학부모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한편 재한동포교사협회에서도 동포자녀들을 위해 학교입학, 학교생활 안내, 자녀 진로상담 등 내용으로 중국동포 학부모 상담실(070-7573-5988)을 운영하고 있다. 내 혼자 힘이 부족하면 주변을 둘러보자.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아 머리를 맞대보자. 내 자녀 문제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녀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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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7
  • 시진핑 주석의 ‘능력’은?
    지난해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취임한 시진핑(習近平)의 1년간 행보로 볼 때 기대에 못 미치는 인상을 심어준다. 외교에서도 노련미를 찾아보기 쉽지 않고── 물론 아직 당내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상황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을 참작하더라도 그렇다.외국 언론들은 시진핑 주석이 역대 중국 주석 가운데 ‘가장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인물이다.’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은 외국 언론의 평가를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만 볼 때 어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지난해 말 한족의 ‘한 자녀 정책’을 완화한 ‘단독 두 자녀(憺二胎) 정책’의 개정한 것도 그렇고, 정치개혁을 비롯해 서부 동북 지역의 권력을 축소해 중원과 동남 지역의 관리들을 대거 등용하는 것만 봐도 시진핑 주석의 생각과 방향을 조금을 읽어낼 수 있는 것 같다. 헌데 앞으로도 이 같은 행보라면 중국의 앞날이 그다지 낙관적이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실 이런 얘기는 북경의 택시 기사들이 더 세세히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름 국가 령도 못지않은 나름의 정보들이 많다. 그래도 지난해 시진핑 주석의 정치활동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북경의 한 뽀즈 가게를 들러 뽀즈를 사 먹기 위해서 줄 서서 친서민적 행보를 보여준 것 같다. 미국의 오바마가 햄버거를 사 먹기 위해서 줄 섰던 걸 표절한 걸로 보이는데 창의성은 별로였다. 그 뽀즈 사건 때문에 별명도 ‘시뽀즈’가 됐고 거기에 지방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뽀즈 먹는 열풍이 불어서 화제가 된 해프닝까지 있었다. 아무튼, 그때 뒷골목 전언에 의하면 중남해 뽀뵤(경위)들이 최소 20명이 쫙 깔렸다고 하던가. 그리고 중국 신랑 웨이보에 기사를 게재한 기자들만 서너 명이었는데 시민으로 가장했다는 이러쿵저러쿵….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홍콩에서 시진핑 일가에 대한 재산 보도가 나온 당일 중국 대부분 지역의 인터넷이 한동안 데이터 서버 오류가 발생해 연결이 끊어진 일이다. 그 뒤로 인터넷 감시 체제를 강화한 방화벽이 출시되면서 ‘翻墙’ 프로그램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됐고 언론 봉쇄의 극치를 보여줬다는... <연변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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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5
  • 재한조선족 이젠 이미지 가꿀 때 아닐까?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얼마전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서 재한 외국동포중 중국조선족의 호감도(2013년 재외동포에 대한 국민인식조사)가 14%에 불과하다는 수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그럴 수가 있느냐 할 정도었다. 중국조선족은 자랑할만한 전통이 있고 중국의 56개 소수민족중 교육·문화 및 기타의 많은 분야에서도 우수한 민족으로 손꼽힌다. 헌데 이렇듯 우수한 중국 조선족이 왜 한국인들한테는 호감도가 왜 그꼴, 그 모양에 불과할까? 한편 한국인의 입장과 시각으로 재한 중국 조선족을 조명해 보았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들한테는 여러 가지로 중국조선족의 많은 것들이 아니꼽기도 했겠다는 생각이다. 하다면 오늘은 한국인들이 중국조선족을 보는 시각으로부터 몇가지로 나누어 우리 “중국조선족 현상”을 반추해 보면서 언급하고 싶다. 첫째 역사적으로 내려 온 원인 역사적으로 내려 오면서 중국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시각은 그닥 곱지 않았다. 지난 세기 40년대까지는 다 같이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피흘리며 싸웠지만 나라가 두 동강이 나면서 이른바 정치적 이념 또는 기타 모종의 원인으로 중국조선족도 한국인과 대립되는 정치적 및 군사적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다. 동족상잔의 “6.25” 당시 인민군에는 중국해방군출신의 조선인이 상당수였으며 자아 뜻과는 별개로 그들은 한국군과 싸운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원인으로 한시기 한국인들한테 “공산국가”에서 온 사람은 눈이 퉁방울 같고 머리에 뿔이 난 “악마”로 보이었으며 지어 지금도 한국의 부분적 노년세대는 “공산국가”에서 온 사람이라 하면 이빨을 갈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도 재한조선족중 일부는 사기, 강탈, 살인 등을 저지른다. 극히 일부분이지만 이런 현상은 전반 재한조선족 사회에 먹칠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재한조선족은 이제부터라도 절대 대부분의 중국조선족은 한국인과 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으며 선량하고 의리적이며 노동을 사랑하고 남돕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란 것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재한조선족의 자질 솔직히 말해 현재까지도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중 적지 않은 부분의 지식계층과 기타 전문업종 출신의 사람들이겠지만 상당 부분은 중국의 농촌사람들이거나 도시에서 백수로 있던 사람들이다. 중국의 공무원이나 기타 문화분야 등 “상류층”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한국행을 크게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재한조선족의 자질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제날에는 한국인이라면 60~70대 노인한테도 새파란 30~40대 여성들이 시집가고 돈벌이에 집착하다 보니 불법체류도 서슴없이 강행하는 중국조선족이었다. 한국인들의 시각이 고울리 만무하다. 다행히도 현재는 중국경제의 재빠른 성장 그리고 중국동포에 대한 한국정부의 완화정책 등으로 이상과 같은 현상이 많이 개변된 상황이다. 그리고 재한조선족중 상당수가 단지 돈벌이만이 아닌 일종 사업의 성공과 기타의 이상실현을 위해 한국생활을 선택하고 있어 그나마 재한조선족의 이미지 살리기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중국조선족과 한국 본토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과 더부러 자질상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무시와 편견이 완전히 없어지자면 재한조선족들의 총체적 자질이 한국인들과 동등하고 또한 중국조선족사회 역시 경제생활을 비롯한 기타 문명사회구축에서 한국인들의 부러움을 자아낼 때가 돼야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다. 셋째 “흉내내기”로 망가지는 이미지 한국에 가면 중국사회와 비교되는 것이 많다. 그중 가장 눈에 뜨이게 비교되는 것이 있다면 한국에 교회가 많다는 것이다. 교회라고 하면 하나같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성지”라 핤 수 있다. 헌데 그런 교회의 일부 집사 혹은 전도사 같은 분들은 사람들을 끌어 당기면서 “저기 저 ××교회는 여차여차하게 좋지 않으니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는 현상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그 현상에 절로 도리질이 나왔다. 그리고 한국에는 신문과 단체가 많다. 중국은 신문사나 단체를 만들자면 상급 해당 부문의 엄격한 심사를 거친 뒤에야 가능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해당 부서에 등록만 하면 오케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 신문사와 단체가 많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재한조선족 사회에도 신문사나 단체가 많다는 것이다. 헌데 그런 신문사나 단체가 자체 기능 즉 “자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이 허다하다는 점이다. 언론매체로서의 신문사나 사회공익그룹으로서의 단체는 기타 산업체와 실질적으로 다르다. 예하면 신문은 자체 특성과 더불어 사회와 민중을 대변하는 독특한 뭔가를 보여줘야 하고 단체란 사회의 지성인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지향하면서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요해한데 따르면 재한조선족 사회의 허다한 신문은 자체의 독창적인 기사나 언론이 없이 그저 남의 것을 “퍼오기를 반복”하는 신문에 그치며 단체 또한 단체라는 이름을 빌어 자아이익을 챙기는 행위가 허다 하다고 한다. 이렇다면 그런 신문이나 단체는 상업행위이지 신문이나 단체란 이미지에 손상주기 마련이다. 신문이나 단체가 진정 “자체 기능”을 올바르게 관철한다면 많아도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 것은 무의미하며 “거품”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인들한테 “중국에서는 이런 사람들도 신문사나 단체를 만들 수 있겠구나” 하는 오해를 주기 쉽상이다. 넷째 당당하지 못하는 노예근성 현상 중국조선족은 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 부동한 역사시기를 거쳐 이뤄진 “특수형성체”이다. 많은 학자들이 “중국조선족의 이중성”을 논하고 있지만 중국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 대가정의 일원이기도 하고 한국이나 조선의 동포이기도 하다. 그러니 중국에서나 한국에서나를 막론하고 떳떳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헌데 재한조선족의 경우 떳떳하지 못한 사례들이 허다하다. 중국에서는 볼 수 없던 노예근성이 한국에 가서는 별의별 현상으로 다 나타난다. 돈벌이 목적으로 한국인들 앞에서 지나치게 얼굴에 웃음을 바르며 아부하는 현상, 한국인들이 꺼리는 그 무엇이라도 다 하는 현상 특히 여성들의 경우 돈이 되는 일이라면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가 알린다더냐”하는 현상 등은 모두 한국인들의 말밥에 오른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인들은 아무개가 어떻더라고 하지 않고 중국조선족이 어떻다고 하기가 일쑤이다. 한편 이렇게 떳떳하지 못하며 굽신거리다가도 막다른 벼랑가에 이르면 폭력도 서슴없이 감행하는 현상도 있다. 마치 흑인노예들의 폭동과도 같다고나 할까? 떳떳해야 한다. 배운 것이 없고 잘 살지 못하더라도 떳떳해야 한다. 중국조선족이란 것이 부끄러운게 아니다. 중국조선족으로 된 것이 역사적으로 내려온 것이지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고 조상을 탓할 것도 아니다. 반면에 중국조선족으로 된 것이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 수 있고 활개치며 돈도 벌고 사업도 성공할 수 있는 우월성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오히려 자부할 일이다. ※ ※ ※ 중국조선족의 “코리안드림”은 일찍 지난 세기 60~70년대 한국인들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이민을 하던 때나 기타 인력송출로 유럽이나 중동으로 진출할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시 한국인들도 코가 크고 거만한 서양인들한테 굽신거리던 시대가 있었고 눈물을 속으로 떨구며 참을 때가 많은 걸로 알고 있다. 우리 중국조선족의 “코리안드림” 역시 비교적 장시기동안의 힘들고 어려운 세월도 있었지만 이젠 눈물겨운 “고난의 년대”를 지나 “성숙기”에 들어 섰다고 보여진다. 들을라니 최근 한국정부도 중국조선족에 대한 마지막 장벽까지 허물었다고 한다. 이는 중국조선족으로 말할 때 한국진출의 초창기를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다면 우리 중국조선족의 이미지를 한차원 높게 가꿀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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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24
  • 울고 웃는 마작판
    ■ 이진숙 나는 “마작귀신”은 아니지만 마작노름은 무척 즐긴다. 마작놀이가 비록 두뇌운동과 노인들의 치매예방에 좋다지만 하루 4시간 이상 초과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한다. 마작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니깐. 지금 우리 나라 노인인구는 2억으로서 전체 인구의 15%에 달한다는데 조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중국 노인들의 행복지수가 제일 높다고 한다. 하긴 중국 노인들의 생활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공원에 가면 노인들은 춤추고 노래부르고 태극권을 하고 또 노인무도장, 노래교실, 노인대학 등에 다니면서 각 자의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중에서도 첫 째로 손 꼽히는 것은 아마 마작노름일 것이다. 각 계층, 각 행업, 집집마다 사람마다 즐겨노는 지력체육운동이 마작이 아닌가? 마작은 웃기를 즐긴다. 마작은 줄국에서 기원되었고 오랜 역사의 흐름속에서 황실과 귀족들이 놀던 궁중유희로부터 민간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발전했으며 청나라 중기에 이르러서는 지금의 136장의 마작쪽이 됐다 한다. 국수(國粹)라 불리우는 마작은 명나라 때 만병초(萬秉迢)란 사람이 “수호전”의 양산박 호걸들을 기념하려고 알심들여 설계해 만든 오락공구란다. 108명 양산박 호걸들을 뜻하는 마작꽃(108장)은 제가끔이라 9소는 “9문용시진”을 나타낸다는 등등이란다. 동서남북중(20장)은 양산박 호걸들이 사방에서 모여왔다는 방향을 뜻하고 “白”과 “發(8장)”은 호걸중에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있다 해서란다. 알고 보면 전통오락문화인 마작쪽에는 수자로부터 도면에 이르기까지 정말 흥미진진한 뜻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마작의 내용처럼 그 재미도 특별한 맛을 돋구는 것이다. 20여년간 나의 마작노름역사를 회고해보면 노름을 노는 그속에서도 느끼고 깨우친 바가 퍼그나 된다. 마작은 울 줄도 웃을 줄도 안다. 맨 처음 놀 때엔 보이는 건 죄다 “츠, 차”하면서 패가 다 됐다 생각되면 돼지의 돌진성미처럼 막무가내로 마작쪽을 친다. 그 다음엔 꽝이다. 돈이 줄줄 나간다. 짜증도 막 난다. 노름이 줄거울 대신 걱정을 안고 논다. 내 세포가 좋아할까? 이럴 때면 내눈에 보이는 마작쪽들이 울고 있다. 그럭저럭 노름력사가 길어지다보니 지금은 어물쩍하게 노는것 같다. 헌데 마작이라는게 너무도 이상하다. 운이 좋을 때면 눈감고 놀아도 마작쪽이 춤추며 내 손에 들어 오지만 안될 땐 살얼음 딛고 조심조심 걷듯이 무진 애를 써도 연거퍼 꽝, 꽝이다. 고추가루 팔러 가니 바람불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격이다 과연 운수라는 게 있나부다. 그러길래 마작군들이 하는 말 “3은 기술이요, 7은 운수다” 그래서 마작은 기술에 울고 운이 좋아 웃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느슨해지고 짜증도 원망도 사그러지게 된다. 손자병법에도 실패가 거듭될 땐 시기를 기다리라 했다. 슬렁슬렁 배경이 되어 놀면서 말이다. 노름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급하여 조바심을 내여 짜증낸들 손해보는 것은 본인이다. 눈이 있고 귀가 있다는 마작을 울게 말고 웃게 하라. 격앙된 감정은 치명적인 독소를 방출한다 했다. 성 나고 분노한 사람의 혈액을 추출해 실험용 생쥐한데 주입했을 때 쥐들은 2분도 안돼 죽었다 한다. 내가 울면 마작이 운다. 무슨 일에서나 조급성을 삼가하라 했다. 머리를 쓰면서 상황파악도 하고 즐겁게 논다면 시간을 사고 건강을 사고 치매를 예방하고 꿩먹고 알먹고 둥지 털어 불 때고 일거삼득이 이닌가. . 늙어서는 돈을 팔아 시간과 건강을 사라고 했다. 우는 마작은 독이고 웃는 마작은 약이다. 내가 웃어야 마작도 웃는다.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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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 일본 오끼나와 유람기
    ■ 이진숙 4년전, 60년 만에 한 번 씩이라는 “호랑이 해” ㅡ 2010년 여름에 우리 양주는 북경에 있는 둘째 딸네와 함께 일본 오끼나와여행을 갔다. 오끼나와는 입본열도 남단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태평양과 남해가 있었고 옛날부터 “유구왕국(流球王國)”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해상기후라 사시장철 봄처럼 따뜻하고 숲을 이룬 종려나무며 갖가지 아열대 식물과 그 열매들이 함께 어울려 그야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아열대지구의 풍경화를 방불케 한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정결한 백사장, 두눈이 모자라 더 볼 수 없는 넓고 푸른 바다, 가슴이 탁 틔고 감탄사가 연속 터져 나온다. 아! 오!ㅡ 미풍이 살랑살랑 불 때마다. 여인의 치마주름 같은 잔잔한 파도가 조용히 밀려오다가도 때론 바위에 부딪쳐 새하얀 물갈기를 날리다가 대뜸 물보라로 흩날린다. 멀리서 보느라면 해빛에 반사된 물방울들은 마치도 수만개의 은구술인양 반짝이며 사처로 흩어진다. 절승경개가 따로 없다. 일본은 세계3위 경제강국이고 1위 장수국으로 오끼나와는 또 일본의 장수고장이라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여서 현재 오끼나와는 총면적의 3분의 1을 미군이 차지하고 있다. 오끼나와에서 우리는 해변가의 한 5성급 호텔에 들었다. 시설이 구전하고 티없이 깨끗한 방이었으며 특히 화장실은 중국에선 그때까지 보급되지 못한 신비한 시설이었다. 더구나 손님들을 보면 한결같이 미소를 보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접대원 할머니들을 볼 때면 너무나 송구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항상 목에 기운을 주며 꼿꼿이 머리를 쳐들고 걸으면서 고개 숙여 인사에 습관되지 않은 중국인들도 예절바른 일본인들에게 탄복하면서도 나처럼 무척 불편을 느꼈으리라. 한번은 저녁식사 후 바다가에 나갔다가 호텔로 돌아오는데 웬 승용차 한대가 달려왔다. 횡단선도, 지시등도 없는 좁은 길이라 우리 걸음을 뚝 멈췄다. 헌데 웬걸, 승용차기사는 우리가 “촌닭”인걸 눈치챘는지 차창밖으로 손을 흔들어 “먼저 가라”는 시늉을 했다. 감동을 먹었다. 연길 같으면 어림도 없지, 횡단선이 있어도 차들은 행인보다 먼저 지나겠다고 사정이 없다 태평양과 남해가 이어진 곳, 사면이 바다였지만 오끼나와에서 비린내란 전혀 없었고 그 어디를 보아도 쓰레기 하나 널린 곳 없었다. 환경보호의식이 세계에서 으뜸인 일본은 많은 투자를 하여 냄새를 풍기는 해초를 수시로 제거하고 또 특수한 설비로 바다물을 정제하여 직접 음료수를 만든다고 했다. 마셔보니 그 맛이 광천수보다도 훨씬 낫았다. 하얼빈에서 왔다는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허위광고가 없고 뭐든지 거짓과 가짜의 정체가 들어나면 TV에 나와 반성하고 국민의 직책읋 받아 영원히 매몰된다고 한다. 한번은 어느 식당에서 어머어마한 분들이 식사하고 갔는데 사장이 남은 음식들을 딴 손님들한데 올렸다가 공교롭게도 그 일이 들통나서 사장은 TV앞에서 전 국민에게 사죄하고 3년 영업중지를 당했단다. (발달한 나라의 국민의식이란 곧 이런거였구나.) 정말 신비하게 들렸다. 그런데 참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 떨며 살고 있다. 먹는 것부터 쓰는 것까지 하나부터 열, 안심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가짜식품, 가짜약, 허위광고 권력부패…몸부림쳐도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하기야 우리 중국도 멀지 않아 세계 최대의 발전국으로 도약할 거고 국민의식도 놀랍게 제고될 때가 올 것이다. 오끼나와에 가서 크게 눈에 띄인 것이 또 하나 있다. 가는 곳마다 길가에 띄염띄염 음료수 자동판매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상했다. 왜 하필이면 밖일가? 가이드가 말했다. 일본은 민주이식이 특별히 강한 나라라고 한다. 그 작은 땅에 인구가 1억이 넘기에, 전쟁이나 지진에 대비하여 사면바다에 포위되어 일본인이 멸종될가 우려되여 만든 하나의 조치었다. 재난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게 말이다. 밥은 40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일주일만 못 마시면 죽는다 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생육을 제창하고 아이가 셋 이상이면 나라에서 보조하여그들의 의료비, 교육비는 모두 국가에서 부담한다. 나중에 우리는 동아시아에서는 제일 크다는 지하미술관 “옥천동”을 구경했다. 옥천동의 전체 길이는 약 5킬로미터로 95만개의 갖가지 모양새를 가진 종유석 (鐘乳石)이 있었다. 안에 발을 척 들여 놓는 순간 우리 모두는 환성을 올렸다. 조물주가 만든 대자연이의 걸작이라 할까? 과연 동양제일의 천태만상의 정경이 펼쳐진 것이다. 한두사람이나 겨우 지날갈 수 있는 다리를 따라 가노라면 양켠에는 굵다란 얼음고드름 같은 것이 주렁주렁 드리웠는데 어떤 것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지나면서도 당금이라도 머리우에 떨어질가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다리밑으로는 물까지 졸졸 흘렀다. 난 그저 와, 와 연신 찬탄을 내뿜었다. 손자놈은 좋다면서 맨 앞장에서 달려가다가는 뒤돌아보면서 막 소리지르기도 했다. “옥천동”에서 나와 시계를 보니 근 1시간이 걸렸다. 대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위대한 걸작 ㅡ “옥천동” 지하미술관이여 더많은 관광객들을 불러주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맘껏 누리게 하라! 3박 4일에 거친 일본 오끼나와여행, 다른 어떤 여행지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즐거움과 그 느낌이야말로 얼마나 감미롭던가. 오끼나와 해변가의 정자에서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지구상에서 제일 낮은 곳은 바다, 그 겸손함에 크고 작은 강물들이 끊임없이 바다로 향해 흘러간다. 바다는 또 한없이 넓은 품으로 크고 작은, 깨끗하고 어지러운 모든 강물들을 반겨 안아 준다. 바다같은 흉금, 참 음미해 볼만하다. 오끼나와의 푸른 하늘아래 펼쳐진 한폭의 아름다운 아열대 풍경화를 감상하면서 느꼈다. 세계 장수고장이 결코 명불허전이 아니구나. 호텔에서, 식당에서 그리고 상점에서 길가에서 일본인들과 순간순간 만나면서 발달한 나라의 국민도덕의식이란 곧 이런 거구나를 마음에 새겨보았다. 잘 있거라, 오끼나와여, 잘 있거라 아름다운 고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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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5
  • 관광업의 발전과 연변경제
    ■ 김철균 최근 중앙TV방송을 시청하던 중 스페인 라스팔마스의 20리 해수욕장을 소개하는 프로와 대면하게 되었다. 대단했다. 그야말로 큰 돈을 별로 팔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천연적인 관광자원이었다. 순간 연변의 관광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연변에는 스페인 라스팔마스처럼 천연적인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장백산에서 절로 흘러내리는 700리 두만강, 동북 3성에서는 단 한 곳밖에 없는 훈춘 방천의 3국 변경지대, 왕청의 만천성 그리고 지금은 성 직속으로 됐지만, 중국 10대 명산중의 하나인 장백산 또한 연변경내에 있다.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연변의 관광객수는 1167.75만인차, 관광수입은 172.78억원에 달해 그 전해 동기보다 각각 15%, 25% 장성했다. 언제인가 모 경제학자로부터 “관광객 1명을 잘 유치하면 자동차 한대를 수출하기보다 그 수익이 훨씬 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동차회사를 차려놓고 땅을 사서 공장을 세우고 설비를 앉혀 자동차를 만들어서는 경쟁이 치열한 국제시장에 수출하기보다 개척하기보다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뜻으로, 상상만 해도 짐작이 간다. 천연적인 관광자원은 그냥 그 경관으로 구경시키고 돈을 벌 수 있다. 막말로 장백산같은 명산을 사람의 힘으로 조성하자면 아마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다행히도 장백산이 천연적인 산물이기에 우리는 아주 적은 투자로 큰 돈을 벌고 있다. 투자를 놓고 말하면 미국 라스베가스의 도박성은 말 그대로 불모의 사막에 돈을 쏟아부어 일떠 세운 “불야성”의 도시이다. 미국정부는 세계적 부자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그네들의 자금과 기술에 의해 이같은 도박성을 구축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 비해, 또한 일본의 “도꾜타워”와 기타 여러 나라의 인공관광 설들에 비해 연변의 우세란 천연적인 장백산, 두만강과 여러 곳에 널려 있는 관광자원들이다. 연변의 로무일군들이 해외에서 벌어 들이는 돈이 10억 딸라선을 넘어선 것은 지난 2000년대 초반부터 있은 일이다. 그 역시 적은 액수가 아니며 연변경제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돈은 피와 땀동이를 쏟으며 벌어온 돈이다. 우리는 흔히 “해외에서 돈을 벌어온 사람이 더 깍쟁이로 된다”는 말을 한다. 이는 그런 사람들이 해외의 소비문화를 배운 것도 있겠지만,그들이 번 돈이 “뼈돈”이기에 깍쟁이로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천연적인 연변의 관광자원ㅡ 지금도 잘 리용되고 있지만 앞으로 보다 한차원 높여 국내명승지가 아닌 세계적 명승지로 만들어, 해외로무보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더욱 많고 관광수입도 경제수입의 톱을 차지하는 연변제1의 기둥산업으로 발돋음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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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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