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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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7년, 그의 나이 102세를 맞으며 사람들 앞에서 선보인 옛 상해의 절색미인이었던 엄인미(严仁美) 여사는 여전히 숱이 많은 머리칼로 세월이 무색케 하였다. 비록 흰 머리칼이 조금씩 보이긴 했으나 윤기가 흐르고 잘 정리된 엄인미의 머리칼을 보고 모발분야의 연구일군들은 분분히 그녀한테 머리칼 보호비법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엄인미 여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여러분들의 질문에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어릴 때 저는 머리에 모발 몇 대 자라지 않아 늘 중머리를 하고 있은 <못난 새끼 오리>였답니다…….”
 …
엄인미의 인생을 밝히자면 그에 앞서 그 조상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엄인미의 증조부 엄소방(严筱舫)은 이홍장(李鸿章)의 참모로서 상해에서 중국의 첫 은행인 중국호시은행(中国互市银行)을 세웠고 제1임 총재로 되었으며 또 상해 총상회(上海总商会) 및 호번관 사영기업(浩繁官)을 창립, 녕파방(宁波帮)으로부터 <개산의 창시자(开山祖师)>로도 불렸다. 그리고 엄인미의 조부 엄자균(严子均)은 환전실무를 취급하는 금융업자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상해 성황묘(城隍庙)의 물화루금점(物华楼金店)과 남경로에서 유명한 아홉째 장주장(老九章绸庄) 모두가 엄자균의 하청업체였다. 

한편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严智多)는 당시 절강성 호주(湖州)지구의 4대 재벌거물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유용(刘镛)의 손녀 유승의(刘承毅)를 부인으로 맞이, 첫 출산한 아이가 바로 엄인미었다. 헌데 임신 8개월만에 고고성을 울린 엄인미는 머리에 머리카락 몇대 없었다. 이는 엄지다 부부한테 큰 실망을 주었다. 반대로 엄인미의 조부는 아주 개화된 사람으로 아기의 이름을 <엄인미>라고 지었으며 아기가 자라면서 그 이름처럼 점점 아름답게 숙성하기를 희망했다.
 
그 뒤 엄인미의 어머니는 머리칼을 빡빡 깎으면 모발이 잘 자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딸한테 실험, 2살이 될 때까지 엄인미는 무려 7차례에 거쳐 <아기여승(婴儿女僧)>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거의 효과가 없었으며 후에 병원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던 한 친척이 엄인미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 수차에 거쳐 치료하면서 비로서 효과를 보게 되었으며 귀국할 때의 엄인미는 새까만 모발로 뒤덮이었다.

6살부터 엄인미는 조모를 따라다니면서 생활, 7살이 되자 계모의 고모가 교장으로 있는 계수여자학교(启秀女校)에 입학하면서 학업의 첫 발자국을 뗐고 10살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섯째 고모가 임직하고 있는 중서여자중학(中西女中)에 학적을 옮겼다.

당시 중서여자중학교는 명망 높은 귀족서당이었는데 엄인미가 다니는 학급에 도합 9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이 중 엄인미를 포함한 8명 여학생이 가장 절친한 사이었다.

그 때, 엄인미 외 7명의 자매 역시 모두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명문가정의 규수들로서 이들 중에는 국민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있는 장수용(张寿镛)의 딸 장함분(张涵芬), 중국 서약업의 선구자 황초구(黄楚九)의 딸 황혜보(黄惠宝), 중국 주 프랑스 대사의 딸 당민정(唐民贞), 복건의 거상 임씨 가문의 규수 임앵(林樱) 등이었다.
 
엄인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기가 그녀한테 있어서 가장 천진난만했으며 즐겁고도 유쾌한 시절이었다.
 
바로 이때 엄씨 일가에는 한 규수가 봉건식 결혼에 반항해 타지로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은 이 일가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엄인미의 부친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그는 여자애들의 반항심은 공부를 하면서 현시대 물정을 너무 많이 알아서이고 이런 여자애들을 잘 단속하려면 공부를 적당히 시키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 때 엄인미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에 엄인미는 공부를 그만둘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한테 맞섰고, 이에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딸이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아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다. 이어 기적이 생겼다. 아버지의 뜻밖으로 엄인미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험에서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은 건 물론이고 전 학급의 1등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제 중학교만 졸업하면 공부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 이유인즉 이미 딸의 결혼상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1929년 엄인미의 여섯째 고모가 결혼, 고모가 결혼한 마씨 가정은 상업에 종사하는 아주 부유한 가정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 고모의 출가와 더불어 마씨 가정에서는 인편을 통해 또 다른 기별을 보내왔다. 즉 마씨 가정에서는 엄인미까지 며느리감으로 점찍고 있으며 그 어떤 요구도 다 들어 줄테니 재삼 혼약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마씨 가정으로 놓고 말하면 첫째, 당시의 엄인미가 천하절색이었고 둘째는 당시 마씨의 부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상황으로 엄인미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액막이(冲喜)>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이에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는 마씨 가정의 외부배경만 보고 흔쾌히 그 혼인을 허락했으며 엄인미가 불복하자 그 때부터 딸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는 서당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엄인미는 단식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강요에 대항, 단식이 지속됨에 따라 영양실조가 왔으며 나중에는 폐병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그 뒤 사태의 위태로움을 느낀 엄인미의 외조부는 급히 외손녀를 항주로 데리고 가 치료하기로 작심했다. 엄인미의 외조부를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외손녀를 애지중지하던 어른이었다. 그는 외손녀의 병 치료를 위해 좋다는 약을 다 구해왔고 용하다는 명의는 다 청해오기도 했으며 거처 옥상에 유리방(玻璃房) 하나를 가설하여 엄인미로 하여금 경상적으로 햇볕 쪼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외조부의 정성이 지극해서일까? 과연 약 1년 뒤 엄인미의 병세는 근본적으로 호전되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부친과의 마라톤식 타협 끝에 양보와 주견을 병행한 협약을 맺었다. 즉 결혼은 할 수 있으나 공부는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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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홍구클럽에서 친구들과 함께 남긴 엄인미의 사진(제일 가운데 여인이 엄인미임)


엄인미가 결혼한 뒤 과연 마씨네 마님의 병세가 나아졌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엄인미는 임신했고 더 이상 서당으로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러자 마씨 가정에서는 한 영국인 목사를 청해 집에서 엄인미한테 영어와 사회교제 등을 배우주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서당으로 다닐 수 없는 엄인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 시기 그래도 엄인미의 지인으로 돼 준 것은 <조씨네 넷째 딸>로 불리는 남편의 형수였다. 그녀는 늘 엄인미와 함께 상해 교외로 나가 산책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동반해주었다. 둘은 비록 동서 사이었지만 친자매마냥 아주 자별했으며 그들이 몰고 다니는 승용차 역시 멋지고도 고급스런 무개차로서 한 대는 <조씨네 넷째 딸>이 운전했고 다른 한 대는 엄인미가 운전했다.


이렇듯 결혼 뒤 엄인미는 <조씨네 넷째 딸>한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마음의 평형을 잡으려 했지만 기타의 여건은 여전히 많은 실망을 가져왔다. 마씨네 가문은 비록 부유하였지만 전형적인 봉건식의 가정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에 눈을 뜬 엄씨네 가문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 부부 또한 한명은 봉건전통가정의 <나으리>였다면 다른 한명은 발랄하고도 개방적인 신 여성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유와 관념도 제각각이었고 음식습관마저도 도무지 융합될 수 없었다.


엄인미의 낭군 마령랑(马令郎)은 비교적 소탈하게 생겼지만 성격상 봉건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편으로 개인생활상 여자들과의 관계가 난잡했으며 그의 주위에는 생활습성이 나쁜 친구들이 늘 붙어다녔다. 그러한 그의 생활습성은 엄인미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점점 드러났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엄인미가 주장하는 신문화 및 개방형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엄인미는 결연히 신랑 마령랑과의 이혼을 결심했다. 이 역시 그 때의 시대로서는 흔치 않게 봉건적 혼인에 대한 현대여성의 대담한 도전이었다.


바로 이 시기, 엄인미는 송애령(宋霭龄)의 큰 딸 공녕의(孔令仪)와 각별히 가깝게 지낸다. 명문가족끼리는 세세대대로 교제한다고 공녕의가 비록 엄인미보다 한 살 어렸지만 두 자매는 늘 가슴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공녕의는 엄인미의 불행한 혼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더러 자주 공씨네 집에 와서 놀도록 하였으며 또한 공씨네 윤선(轮船)에 승선해 홍콩 등지에 가서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선에서 엄인미는 서양요리사한테서 제빵 기술을 습득, 자신이 직접 만든 빵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여사한테도 드렸는데 송미령 여사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평소 엄인미는 송애령 여사한테 <부인> 하고 깎듯이 불렀지만 그럴 때마다 옹애령 여사는“너도 녕의처럼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는 송애령 여사가 엄인미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했을뿐만 아니라 엄씨 가문과 공씨 가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기도 했다. 또한 송씨 가문과 공씨 가문 모두가 엄인미의 이혼결심을 지지했으며 그녀가 다시 분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고무 격려했다.

 

태평양전쟁 전야, 엄인미의 수양어머니 성관이(盛关颐)가 상해를 떠나게 되어 신강화원 15번지(新康花园15号)의 주택이 비어있게 되었다. 상해를 떠나면서 성관이는 엄인미가 이 주택에 기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부들을 청해 이 주택을 새롭게 수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조계지내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였다. 아울러 엄인미가 들려고 했던 신강화원 15번지의 이 주택 역시 일본관원들이 사무실로 쓰려고 노리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이 주택을 보러왔던 일본인 야마모토는 엄인미의 미모를 보고는 더욱 끈질기게 <주택임대>를 명목으로 치근덕거렸으며 그날부터 매일 이 주택으로 들락거렸다. 이에 엄인미는 재삼 주택을 임대해주지 않는다고 밀막아 버렸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모 친일주구 한명은 엄인미를 찾아와 “야먀모토는 관직이 높은데다 미혼이기에 그와 결혼하면 낭패될 것이 없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그 뒤 엄인미는 화를 피하려고 더 이상 신강화원 15번지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러 있었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친정을 찾아와 치근덕거렸다. 이어 엄인미가 숙부의 집에 가 피신해 있자 야마모토는 또 숙부 집 주위에 감시망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엄인미는 다시 몰래 작은 고모가 출가해 있는 주씨 가정에서 몰래 숨어있어야 했다.


엄인미가 주씨 가문에 숨어있던 그 나날, 주씨 가문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움켜잡고 숨 죽이며 긴장해하던 나날들이었다.


한편, 송애령의 딸 공녕의는 엄인미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엄인미를 중경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떠날 날자가 다가오자 뜻밖으로 엄인미의 원 시가인 마씨 가정에서는 그녀가 자식을 데리고 떠나지 못하게 했고 엄인미 역시 아들애와 떨어지기 싫었다.


결국 엄인미는 계속 상해에 남기로 했다.


일본인 야마모토가 계속 치근덕거리는 상황에서 상해에 홀로 남아 있는다는 것 역시 장구지책이 못되었다. 이러자 엄인미의 가까운 친척들은 상론한 끝에 유일한 방법은 하루 속히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 엄인미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그 3개월 뒤, 과연 엄인미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신랑감이 나타났다. 바로 엄씨 가문과 세세대대로 가깝게 지내왔으며 역시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씨 가문의 공자- 이조민(李祖敏)이었다. 광화대학 경제학부(光华大学经济科)를 나온 이조민은 학식이 연박하고도 본분을 잘 지키었으며 대중성냥공장(大中火柴厂)의 보스이자 미혼의 몸이기도 했다.


혼례식 날, 만일의 경우 일본인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울 것이 염려되어 이씨 가문에서는 10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혼례도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그 일례로 엄인미의 결혼사진 중 신랑와 신부가 나란히 등장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마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는 오늘까지 엄인미가 가장 유감스러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혼 뒤, 엄인미의 결혼생활은 아주 행복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극진히 상대를 사랑했으며 일본인들도 더 이상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엄인미는 애국운동에 적극 가담, 나라건설을 위해 자신이 솔선적으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공상업계의 모금계획도 적극 추진했다. 그러면서 이런 애국운동중 공상계의 유념의(刘念义), 영의인(荣毅仁), 성가년(盛康年) 등 거물들의 믿음직한 동반자로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하와이에 가서 당시 그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장학량과 조일획(조우쓰 쇼제-赵四小姐)를 탐방했는가 하면 또 워싱턴에 가서 채문치 장군(蔡文治将军)을 만나뵙기도 했다. 미국방문시 엄인미는 그 시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만나 뵐 계획을 하였으나 송미령이 대륙에서 온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송미령은 공녕의한테 부탁하여 엄인미한테 고급옷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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