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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문가 “일본 항복의 결정적 요인은 소련의 선전포고”

  • 화영 기자
  • 입력 2023.04.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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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현재 많은 사람이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를 꼽고 있지만, 이는 사실 일본의 항복을 촉진했을 뿐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일본 전문가 다니가와 다케시(谷川毅)는 일본을 항복시킨 주된 이유가 소련의 선전포고 때문이라고 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철도를 폭파하고 중국에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이 시작됐고, 2차대전이 뒤따랐다.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일본이 전장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은 이들이 선전포고 없이 싸운 것이 주원인이었고, 전쟁 후반 반파시즘 국가 국민들이 용감하게 항쟁하여 결국 1943년 9월 8일 이탈리아,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하였고, 일본은 8월 15일이 되어서야 무조건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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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미국은 반파시즘 국가였지만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동맹국에 무기와 장비만 제공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하와이 미 해군기지를 폭파한 뒤에야 태평양 전장에 합류했다.


많은 사람은 왜 일본이 감히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 고위층은 미국이 중국의 전장에 가세할 것을 우려해 그들이 생각하는 미국의 가장 강력한 태평양 함대를 무너뜨려 미국이 동남아 지역의 이익을 포기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일본군은 이런 행위가 닭을 훔치려다 쌀을 한 줌 잃는 꼴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기습당한 후 미국은 일본군에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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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는 첫 번째 원자폭탄이 알라모고도 사막에서 성공적으로 폭발하면서 초기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 후반 일본 국토의 대부분을 미 공군이 점령해 일본 주민들은 매일 미군의 공습을 피해 다녀야 했다. 같은 기간 일본해군은 이미 전장에서 기술 부족으로하여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고, 패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일본 국민 전체가 참전할 것을 호소했다.


1945년 7월 26일부터 미군 항공기는 일본 상공을 선회하며 포츠담 선언을 전하며 하루빨리 항복해 사상자를 줄이기를 희망했다. 당시 일본 총리는 이 선언을 무시한 채 작전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때 미군도 어떻게 하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미 당국은 미군이 일본 상륙을 강행할 경우 큰 인명피해가 날 것으로 보고 신중한 검토 끝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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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리틀보이'라는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잠시 후 일본 상공에 버섯구름 한 송이가 나타나자 히로시마는 초토화되어 8만 명이 즉사하고 10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은 실향민으로 전락됐다.


8월 8일 일본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져 약 2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은 미국의 대대적인 선전과 원자폭탄의 위력 때문에 항복을 선택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볼 때 원자폭탄은 치명적 무기였지만 당시 일본이 볼 때에는 미국이 개발한 신형 폭탄에 불과했다. 일본이 정말 원자폭탄의 위력을 꺼렸다면 미국이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뒤 투항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일본이 항복한 이유가 유일한 것은 아니었고, 결국 일본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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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수많은 적이 있었음에도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소련과 일본 양국은 중립 조약을 암묵적으로 실천하였기 때문에 미국 대통령이 소련의 참전을 여러 차례 권고하였음에도 소련은 응하지 않았다.


미국의 관점에서 볼 때 소련의 이런 행태는 산에 앉아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의 수렁에 깊이 빠지면 그 틈을 타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고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소련의 중립적 태도는 사실상 버팀목이었고 미-소의 대결은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또한 소련은 미국이 발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며, 적절한 시기가 되면 소련이 일본의 동맹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소련 지도자는 소련 홍군의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상황을 지켜보려 했다. 전쟁 후반 일본의 패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고, 8월 9일 새벽 소련은 공식적으로 대일 전쟁을 선포했다.


이 선전포는 일본 고위 관리들을 당황하게 했고, 포츠담 선언에 서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소련이 보름 정도 만에 대일 전쟁을 선포할 줄은 누구도 생각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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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지친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반전(反戰)에 나선 데다 오랜 전쟁으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자원도 부족해 며칠 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야 했다.


일본의 실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당시 일본 고위층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중재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의심할 여지 없는 헛된 꿈이며 이익 앞에 동맹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의 원자폭탄 위협과 소련의 선전포고로 일본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나라의 용기 있는 저항도 일본을 무력화시켰다.


중국 전장에서 수많은 군인들은 첨단 무기를 갖추지 못했지만, 여전히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다. 항일 전쟁에서 중국의 승리는 중국 군인들의 강인한 의지와 조국을 수호하려는 결의에 달려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원자폭탄은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이고 소련의 선전포고야말로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지푸라기라 할수 있다. 어쨌든 세계 반파시즘 전쟁은 각국 국민이 앞장서서 저항했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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