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칼럼 시리즈 (3) 연변축구 공로자들 - 감독편
편집자의 말: 연변축구는 전통이 있고 역사가 길며 중국 축구사상에서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좌절, 곡절과 진통 그리고 억울함도 많이 당했으며 서기 1965년엔 전반 중국축구리그를 평정한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었다.
“동포투데이”는 민함 선생과 예약하여 “연변축구 잘 될 수 있는 일종 무형산업”이란 제목으로 연변축구 특별기획으로 된 글을 연재하기로 했다. 연재기간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갑급리그에서의 연변팀 현황 분석도 하게 됨을 알리는 바이다. 편집자
◐ 민 암
연변에는 축구 명선수가 많이 배출된만큼 유명감독도 많다.
중국의 건국후로부터 보더라도 1955년에 연변축구인들을 주축으로 한 길림성 축구팀이 건립되어서부터 박상복을 시작으로 김사종, 박만복, 정지승, 정종섭, 이호은, 고훈, 염승필 등으로 본토 감독들을 만들어 냈는가 하면 최은택, 조긍연 등 한국적 감독들도 연변축구의 사령탑을 잡아 큰 기여를 했으며 최근에는 김광주, 이광호 등도 자주 팀위기를 만회하는 “촉매제” 작용을 하여 감독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초대감독 박상복은 군인출신으로 동북민주련군에 참가했다가 장춘해방전투, 흑산저격전 등 전역에서 몸을 굳혀온 사나이었다. 그의 성격 또한 군인다웠다. 그래서인지 그 시기 길림성팀의 선수들 모두가 군인처럼 강했다. 특히 공격형 미드필더 이광수, 손중천, 지청용 이 3명의 “폭격기편대”가 출격한다 하면 그야말로 질풍같은 힘이여서, 그 “폭격기편대”를 막을만한 수비진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렇듯 박상복 감독의 풍격은 드세게 몰아 붙이는 축구였으며 그것은 선수들의 기전술 관철에 의해 곧잘 나타나군 하였다. 그래서 당시 길림성팀은 중국내 축구계의 “4대 강팀”중의 하나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한편 그 때도 길림성팀은 “강팀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팀 앞에서는 강하지 못한 특징”이 있었다. 그 당시 길림성팀과의 경기에서 자주 주눅이 들군 하던 팀들이라면 이른바 강팀이라는 북경팀, 상해팀과 료녕팀 등이었다. 반면에 길림성팀은 광동팀한테는 어쩐지 자주 패해군 했다.
길림성팀의 제2임 감독 김사종은 서울에서 들어온 사람으로서 선수 개개인의 특점을 중시하는 축구감독이었다. 특히 김사종 감독의 축구풍격이 가장 잘 체현된 때는 1959년 제1차 중국 전국운동회 축구종목경기에서였다. 당시 길림성팀의 매 선수마다 “별명”이 붙었다. 그번 운동회 축구종목에서 13골을 기록해 최우수골잡이로 선정된 지청용은 “대포”란 별명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청용이 기록한 골은 그 거개가 중거리 슈팅 등으로 통쾌하게 들어간 것들이었다. 또한 어떤 중거리 슈팅은 호선을 긋으며 들어가는 것이 마치 포알이 날아가는 듯한 감을 주어 그한테 “대포”란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이광수한테는 “탱크”, 동경춘한테는 “제비”, 문정오한테는 “변선날개” 등 “별명”들이 붙었는데 당시 한개 구단에 이렇게 많은 선수들이 “별명”이 붙은 구단은 오직 길림성팀뿐이었다. 특히 이 “별명”들은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하룡주임(군계급으로는 원수)가 만들어 준 것이어서 더욱 값졌다.
다음 길림성팀에 투지와 기술을 동시에 주입한 것은 박만복 감독이었다. 박만복 감독은 지난 세기 50연대 초기 중국국가류학생축구팀 일원으로 헝가리에 가서 전문 축구연수를 하고 돌아온 축구인이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았을 초기, 그는 팀에 전문기술축구를 주입하면서 풍격과 투지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홀시하였다. 그러다보니 팀은 내지 기타 성과 시의 구단들과 비슷한 팀이 되고 말았으며 결과 1963년에 성적이 추락하여 갑급으로부터 을급권으로 강등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박만복 감독은 경험교훈을 총화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강조하되 우리 민족의 고유풍격을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감안하고 이 양자를 상호 결합하면서 팀을 정돈, 드디어 우리 민족의 축구사상 한페지에 기록할만한 업적을 쌓게 됐다. 즉 1965년 중국축구무대의 1부리그인 갑급리그의 우승고지를 점령했던 것이다. 하다면 박만복 감독은 우리 민족축구를 가장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축구인으로 우리 민족축구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축구인으로 손색이 없게 된 것이다.
그 뒤 문화혁명이 터지면서 연변의 축구계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쑥대밭”이 되었다. 많은 축구 감독들과 선수들이 공장과 농촌으로 쫓겨가게 되었고 전업단체의 정규적인 축구경기는 볼래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장이나 농촌으로 쫓겨간 축구인들은 몸에 배길대로 배긴 축구운동을 버릴 수가 없어 각각 자기의 마을이나 기업소에서 축구팀을 조직해서는 훈련도 하고 서로 시합도 하면서 축구운동을 견지해 나갔다. 그 전형들을 말할라치면 연변농구공장, 도문철도, 훈춘시 영안촌 등 기업소와 농촌들이었다.
그러다가 1971년 조선 함경북도 축구팀이 길림성을 방문하면서 축구친선경기를 요청, 그러자 당시 연변 주 혁명위원회에서는 부랴부랴 원 길림성팀에서 볼을 차던 선수들을 모집, 연길시 공원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결과 0 : 1로 패했다. 그러자 당시 좌경노선이 판을 치던 시기에도 해당 지도일군들은 축구를 중시, 해산됐던 축구팀을 재건하기 시작하면서 연변의 축구운동은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시기에도 축구팀의 인솔자는 한족을 중용했지만 감독만은 조선족을 선택하군 했다. 그것은 연변의 축구는 그래도 조선족이 이끌어야 된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연변의 축구운동의 “동산재기”를 위해 노력한 이들로는 박만복, 동경춘, 허경수, 정지승, 정종섭 등 감독들이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굴곡을 겪던 연변축구가 제궤도에 들어서서 재활약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지난 세기 90연대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3년 그 전해에 을급팀으로부터 갑급에 진출한 연변팀은 당시 제7회 전국운동회에서 “학원파” 감독 이호은의 지휘하에 “전면 진공, 전면 방어”의 3-5-2 포메이션을 구축, 중국축구무대에서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호은의 이름은 당시 중국축구계의 화제거리로 됐다.
그 이듬해 즉 1994년 중국의 프로축구가 출범하면서 연변팀은 당시 길림삼성의 이름으로 중국축구 갑A무대에 입문, 이호은이 사령탑을 잡게 됐다. 중국축구가 프로화로 되면서 연변축구는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되었다. 즉 외적용병들이 중국축구무대에 진출하면서 인구가 적고 경제발전이 더딘 연변의 우세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연변축구는 축구프로화가 되는 해부터 해마다 강등화제에 올랐고 감독 이호은도 자주 경질위기를 초래했으며 그 위기 때마다 원로감독 정종섭이 뒤를 받쳐주면서 1996년까지 3년간 갑A무대에서 버티어냈다.
그러다가 1997년 한국으로부터 “학자파” 감독 최은택 교수가 연변팀의 사령탑을 잡게 되었다. 그해 시즌초반 최은택 감독 역시 제 5 라운드까지 1무 4패로 1점을 기록, 이른바 중국 국내 축구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가장 유력한 강등후보로 추측되었으나 제 6 라운드 석가장에서 8.1팀을 2 : 0으로 제압하면서 반전에 성공했고 최종 갑A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해 중국축구무대에서 센세이숀을 일으킨 최은택 감독은 3차에 거쳐 중국의 모 권위적인 매스컴에서 선정한 최우수감독으로 되었으며 중국 CCTV는 연길까지 찾아와 최은택 감독에 대한 전문 프로를 제작해서는 연속 2차에 거쳐 “축구의 밤” 프로에 방송하였다. 그리고 최은택 감독의 성공으로 중국축구무대에서는 외국적 감독을 영입하는 붐이 일었으며 한국인 감독만 해도 김정남, 박종환, 차범근, 이장수 등이 선후로 중국축구무대에 진출했다.
최은택 감독에 이어 고훈 감독 또한 연변축구의 새로운 역사를 쓴 유명감독으로 손색이 없었다. 1998년 6월 최은택 감독한테서 사령탑 지휘봉을 넘겨받은 후 그는 최은택 감독의 기전술에 자신의 축구사상을 결합하여 팀을 지휘, 저조기에 처했던 팀을 최종 갑A의 11위로 되게 만들었다. 그 뒤 1999년은 고훈의 축구감독 생애에 있어서 휘황찬란하던 한해였다. 그해에 고훈 감독은 선후로 갑A순위 선두에 올라서는 산동노능, 북경국안, 상해신화, 사천전흥, 중경융흠 등 5개 팀을 꺼꾸러뜨려 일약 “거물킬러”라는 별호를 갖게 됐다. 순위 선두에 올라서는 5개 팀을 선두에서 끌어내리는 축구ㅡ 이는 중국축구사에는 물론 세계축구사에도 흔치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해 고훈 감독은 길림오동팀을 이끌고 팀을 갑A 8위에 안전하게 고착시키는데 성공했으며 또한 “중국축구협회컵” 리그에서도 팀을 4강에 선착시켰다.
2000년 그 해는 고훈 감독한테 있어서 실로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해 4월 팀성적이 부진인데다 산동원정에서 경기를 지휘하던 고훈 감독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잔디밭에 쓰러졌다. 그 해 길림오동팀은 조영원 감독이 잠시 맡았다가 다시 염승필 감독한테로 넘어갔으며 계속 부진을 겪다가 결국 7년간 지켜오던 갑A리그에서 강등한 동시에 그해 12월 찬바람이 몰아치는 엄동속에서 절강에 매각되어 연변을 떠나게 되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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