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철균
나한테는 A라는 한 친구가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부터 지금까지 쭉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절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몹시 착하고 의협심도 있어 친할만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좀 부는 편이었다.
그가 한국에 가서 노가다로 뛸 때의 일이다.
“나 말이야, 지금은 한국에 와서 노가다로 뛰지만 중국에 있을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구. 군복무 3년을 했고, 대학 2개를 나왔으며 국가기관의 공무원으로 10여년간 과장직에도 있어봤고 그러다가 그걸 때려치우고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면서 꽤나 돈도 많이 벌었었는데 그만 8년만에 큰 사기를 당해 망했지만 말이야…”
“그럼 아저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얼마긴 얼마야? 마흔여섯이지…”
“어머, 그럼 아저씨의 사업년한이 나이보다 더 많네요…”
이 글의 제목을 보면 왜서 “한 300년 살아보기”라고 달았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자고로 300년을 살아본 사람은 없었으니깐. 나 또한 이제 반백 정도인 사람이다. 그럼 왜 한 300년 살아본다고 하는걸까? 나의 고백을 적어본다.
나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반석향 유정촌이다. 1957년 8월 26일, 태어날 때 나는 7남매 중 막내였고 당시 어머니가 42살, 아버지가 52살이었는데 가정이 째지게 가난한데다 아버지는 장기환자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늦동이인 나를 두고 “귀엽게는 생겼는데 부모복은 없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들 한다.
아니나 다를가 나는 세살 때에 급성폐렴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약 한첩 지을 돈도 없는 나의 부모는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나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그 시각에 나의 5촌 숙부님이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을 사왔고 그걸 한대를 맞고 나는 열이 내리면서 기적적으로 소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2년만에 죽음의 과정(기억은 없지만)을 경험해보게 되었다.
한편 나의 부모는 늦게 나를 본데다 명도 길지 못하였다. 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니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했고 어머니도 매를 못이겨 훈춘강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 그러니 남들이 내가 부모복이 없겠다고 한 그 말은 너무나도 일찍 현실로 다가왔다.
그 뒤 나는 손위의 누나 둘과 함께 4년, 누나들이 시집가자 형님과 형수의 슬하에서 4년, 집체호에서 3년, 공장생활을 5년 하다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3년만에 이혼을 하여 아이와 단둘이 사는 홀애비로 되었다.
어려서 부모을 여의고 중년에 상처는 안했지만 이혼을 덜커덩 한거라 “팔자타령”도 할만 했다. 그 몇년 사이 나는 또 훈춘방송국에 편집원으로 일하다가 나왔었고 장사길에 나섰다가 꼴깍 망하기도 했다. 그 몇년 뒤에는 해외노무송출길에 나갔다가 근무를 마치고 귀국, 형편이 좀 펴이니 양고기산적집을 차렸다가 재차 망했다. 일이 안되었고 악성순환의 계속이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걸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아니, 노력이라기보다는 발버둥질을 쳤다고 해야 더욱 적절할 것이다. 어릴 때는 뭘 전공하면 취미 혹은 남이 하니 덩달아 따라서 하는데 불과했지만 17-18세부터는 일종의 “이상”이란 것을 갖고 달라붙었다. 그림을 그려봤고 서예도 연마했으며 음악을 한답시고 입술이 터지도록 트럼벳을 불어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노무송출일군으로 해외에 나가서는 주방의 주방장 겸 요리사로 근무했고 지금은 편집기자랍시고 모 신문사의 일군으로 10여년채 출근하고 있다.
안해본 일이 거의 없었고 직종으로는 군대, 이발사외 학생, 농민, 노동자, 마도로스, 편집일군 그리고 오래는 해보지 못았지만 탄광의 채탄공 일도 한달가량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남들은 아파트 2-3채씩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여태껏 단층집에서 살다가 이제 겨우 파가이주로 아파트를 분배받게 됐다. 그것도 추가된 면적의 집값을 물돈이 없어 마누라더러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게 하고있다. 못난 놈, 그러니 지금은 또 작은 애와 함께 홀아비로 보낸다. 1983년에 첫 결혼을 한 뒤 지금의 두번째 마누라를 맞아들여서 그 28년 사이에 부부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한 세월은 그 50%나 될까? 인생살이에는 빵점이다.
나는 모험도 좀 즐기는편이다. 만미터 고공에서 자유낙하하는 그런 모험가는 아니지만 그 버금의 담량은 있는 것 같다.
내가 해상에서 마도로스로 근무할 때니까 1992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함께 출국한 동료선원의 이간질로 인해 한국인 조기장과 한바탕 크게 싸웠다. 둘 다 얻어터지고 멍이 들대로 들었다. 그런데 징계를 받은 쪽은 나였다. 일리가 있건 없건 내가 조선족이었으니 당해야만 했다. 강제귀국조치었다. 이제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하면 보따리를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강제귀국이란 당시 중국 조선족선원한테 있어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할까? 당시 내가 징계를 받던 앙골라 해상에서 라스팔마스까지 항행하려면 거의 20일이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강제귀국에서 벗어나려면 모험도 필요했다.
징계를 받던 그날 밤, 나는 부식창고안에서 빵, 사과, 물, 소세지, 위스키, 맥주 등 먹고 마실 수 있는 부식은 가득 꺼내서는 침대밑에 넣었고, 그 다음 주방과 창고의 열쇠를 인계한 후 침실문을 안으로 닫아 걸었다.
“단식투쟁”이었다. 그러자 처음에 선장 등 한국선원들은 “자식, 뭘 단식을 해?! 멍청한 놈, 언제까지 버티는가 좀 보구려”라고 하며 코방귀를 뀌더니 3일이 지난 후부터는 선장부터가 불안해지며 얼굴표정이 심각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약 단식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선장은 그 책임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장은 처음에는 통신장을 보내 나한테 설득을 시작하더니 나중엔 1항사까지 보내어 나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선장이 오기 전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고 버티면서 침실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약 5일 가량 지난 어느날 밤, 선장이 나의 침실문을 노크하더니 “조리장, 그만 하이소. 우리 좀 대화해봅시다. 나 선장이 조리장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기로 했어요. 자, 그만 문 좀 열어주이소”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 시간을 질질 끌었고 문틈으로 들여보낸 진짜 징계를 해제한다는 선장의 각서까지 받은 뒤에야 침실문을 열어주었다.
그 동안 나는 단식은커녕 먹을 것을 실컷 먹었고 숱한 책을 읽었으며 밀려온 잠도 늘어지게 자버렸다.
나의 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헌데 나의 대부분의 모험은 충동적일 때가 많았다. 앞뒤를 재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성공차수보다 실패차수가 더욱 많기 마련이었다. 그 사례로 귀국한 뒤 연길에서의 시장조사를 거치지 않고 음식업을 벌였다가 꼴깍 망한 것 등으로 여러 건이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쩐지 글의 주제와 좀 벗어난 감이 든다. 여하튼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란 사는 날자보다 삶의 내용에 그 무게를 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초년에 부모를 잃고 고생한 걸 말할라치면 두 세 사람이 일생동안 당한 고생에 맞먹는 것 같다. 세살적에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마도로스시절에는 본인 실수로 영하 20여도 되는 냉장창고에 갇혀 동사할뻔한 일도 있으니 죽음의 과정도 두번 넘겨봤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마누라를 두 번 만났으니 그 것도 사람마다 겪어보는 일은 아닐테고 또한 마도로스 시절에는 36개 나라의 50여개의 항구에도 드나들었다. 1.62메터의 키에 58킬로그람의 체중을 가진 보통에도 못미치는 사내치고는 그야말로 범상치 않는 경력창조자이니 “300년 살아보기”란 말도 나올상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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