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렌타인데이 날 있은 일
■ 전영실
발렌타인데인(情人节)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내가 시티폰가게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웬 중년남자가 손을 내밀어왔다. 올려다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얼마나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인가?! 21년전의 첫사랑 남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살아 있으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만.”
그 남자도 무척 흥분된 표정이었다.
나는 24살이 되는 그 때 중매군의 소개로 그 남자를 만났었다. 훤칠한 키꼴에 얼굴도 영준하고 대졸생인 그 남자, 총명이 넘치는 그 남자의 모습에 나는 첫 눈에 마음이 끌렸다. 그 때 나는 대졸생을 무척 흠모했다. 얼마간 요해하는 과정에 그는 모름직이 나의 마음속의 우상이 되었으며 몰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한 남자에게 그토록 마음이 끌려보기는 처음이었다.
……
그런데 얼마 뒤 결국 내가 바라지 않던 소문이 들려왔다. 바로 그 남자의 과거였다.
그 남자의 속내를 아는 분이 귀뜀해주기를 그 남자한테 약혼녀가 있는데 지금 그녀를 떼어버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억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여자의 마음에서 내가 배신당한 그런 기분이었고 마음속에서는 이름할 수 없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헤여지고 말았다. 그 남자의 인격에도 의심이 갔고 몇해동안 뒷바라지를 해준 그 시골쳐녀도 가긍스러웠고 더구나 남의 발등을 밟고 행복을 만들고는 싶지 않았다. 지금 세월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지 모르나 그 때 그 세월에는 크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다. 물론 헤여질 때 나의 가슴에는 여전히 그 남자에 대한 일루의 미련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첫 사랑이란 잊을 수 없는가 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편과 결혼하여 20여년을 살아오면서 가끔 그 남자를 떠올릴 때도 있었다. 이전에 길림에서 사업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 시골여인과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끔 남편과 불화가 있을적이면 그 남자와 살았다면 어떻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자들은 문턱을 넘으면서도 열두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가 보다.
이렇게 잊혀지지 않던 그 남자가 그날 느닷없이 근 20여년만에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게 아닌가. 세월이 흘렀지만 총명이 넘치는 그 모습은 여전했다.. 그 남자는 유정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길을 피했지만 웬지 나의 가슴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퇴근한 뒤 시간을 낼 수 있겠소?”
나는 저도 몰래 머리를 끄덕이었다. 퇴근시간까지는 한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전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아니했다. 마치 열두마리의 토끼새끼를 품기라도 한듯 콩당콩당 심장이 뛰고 저도 모르게 이 양볼에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퇴근종이 울리기 바쁘게 그를 따라 직장대문앞에 나갔더니 택시가 진작 대기하고 있었다.
“추억다방”에 도착한 후 그는 면목도 모르는 다방의 마담한테 나를 소개하며 “나의 첫 사랑이라니깐”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첫사랑”이란 그 표현은 어쩐지 께름적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알고도 모르는 것, 께름직했던 느낌은 순간에 눈녹듯 사라지고 다시 애틋한 정이 찰랑거렸다. 그날 우리는 서로 대방의 사업과 가정형편을 물었고 그립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는 단 한번도 나를 잊어본적이 없다고 몇번이나 곱씹어 말하였다. 그는 신문과 잡지들에서 나의 글도 보군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렵게 살아왔었다. 그 시골처녀와 결혼을 한 뒤 그녀의 호구와 직장을 해결하느라 많은 돈을 썼고 세집도 여러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의 형편도 여의치 못한듯 했다.
“영실인 잘 살지? 집도 몇채 있다면서…?”
집고생은 한번도 한적 없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몹시 부러워했다.
“우리 둘이 결혼했더면 고생 모르고 잘 살았을텐데, 우리 둘이 결혼했어야 하는건데…”
그는 자기의 혼인에 대해 김빠진 소리만 하였다. 나는 그러는 그 남자한테 연민의 정이 생겼으며 더구나 헤여질 때 “며칠 뒤면 발렌타인데이인데 그날 우리 다시 만나기요”하는 말을 들으며 이상야릇해나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발렌타인데이 날이었다.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하루종일 소녀처럼 시티폰을 들여다 보군 했다. 아니나다를가 퇴근무렵, 시티폰이 울렸다.
시티폰을 들자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실이 나요… 지나번 약속 안잊었지?”
나는 무척 흥분되면서도 여자의 체신을 지키느라 일부러 “그만 깜박했네요. 오늘은 일이 많은데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꼭 할 말이 있다”면서 늦게까지라도 지난번 만났던 “추억다방”에서 날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오래만에 만난 첫 사랑 남자가 더구나 발렌다인데이날 나한테 꼭 할 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프로포즈?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시 한다발의 장미꽃을 안겨주려고? 그렇지 않으면…? 다방으로 갈 무렵,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수선하던 머리도 다시 쓰다듬었다.
젊은 색시들이 “언니 어디에 가기에 이렇게 이쁘게 하고 가요?” 하고 물을 때 “너희들만 애인이 있어 나도 축하해줄 사람이 있어”라고 하면서 갸웃거리는 처녀애들을 뒤로한채 다방으로 향하였다.
다시 찾아온 이 남자, 내곁에 있지 못했어도 잊어본적 없었던 이 남자. 내 인생에서 다가서지 못할 꿈으로만 남아있는 그 남자, 생각만 하여도 활랑거렸다.
내가 추억다방의 문을 열었을 때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는 원망의 눈길 대신 무척이나 반가워하였다. 뜻밖에 그 남자는 장미꽃을 안겨줄대신 후ㅡ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속탄이야기를 터놓자고 기어이 만나자고 했다는것이었다. 지저분한 명태껍질, 질서없이 열어제낀 빈 맥주병들 그만 마시라고 권고했지만 소용없었다.
“참 저한테 꼭 할 말이 있댔잖아요? 어서 하세요.”
나는 기분을 바꾸려고 이렇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순간, 그 남자는 나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영실이 미안해, 영실이한테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집사람을 외국에 보내려는데 돈2만원 가량 모자라, 영실이 좀 도와줘. 영실한테 그만한 돈은 있잖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 뜻밖의 충격에 내가 마음속에서 달포 이상 쌓아올렸던 기대와 희망의 모래성은 삽시에 무너져내렸다.
남의 이야기로만 듣던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자들의 돈을 바라보고 혼인 했다던 남자들의 이야기, 여자의 돈을 꾼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다른 남자의 이야기…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차마 세상에 그런 일이?”하며 드라마에서나 있을 일이라 비웃던 나였는데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물론 내 앞의 첫사랑 남자가 그런 이야기속의 주인공이였던 A, B, C, D처럼 사기군은 아니라면서 자신을 위안하고는 있었지만 말끝마다 “첫사랑”이라면서 그것도 낭만으로 넘쳐야 할 발렌타인데이날에 이처럼 구구하게 돈구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가슴속에 소중이 간직해왔던 꽃병이 짤랑 하고 박산났다. 왜서 그리움과 환상의 첫사랑 여자앞에서 이런 비굴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내 앞의 이 남자, 그리고 이야기들속 사내대장부들의 당당한 기상이 죄다 사그러졌단 말인가? 이 사내들을 이렇게 만든건 단지 그네들만의 탓이란 말인가?
그날 밤 그 남자가 많은 말을 털어놓았지만 한마디도 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이 초라한 남자한테 마음이 흔들린 내가 더 초라해 보였다. 내 마음속의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 그 남자는 내 손목을 다시 잡으면서 말을 했다
“영실이, 왜 대답이 없소?”
나는 더욱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양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괞찬소, 내가 말을 잘못 꺼냈구만. 이런 말 그만 두고 … 다음 오는 3.8절에 내가 영실일 기분좋게 해주겠소…”
그 남자는 이렇게 너스레를 쳤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단호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 남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그 남자를 뿌리치고 혼자 걷기로 했다. 찬기운이 얼굴로 맞혀왔다. 가로등과 길 양켠의 장식등들이 명멸하는 도시의 활홀한 야경이 펼쳐졌다.
발렌다인데이밤이라 연인 혹은 애인들이 떠들썩하며 지나가고 꽃파는 남녀들이 호객을 하느라 분주했다.
식당, 노래방, 다방의 네온싸인들이 깜박거리면서 발렌타인데이를 경축하고 있었다. 밤은 점점 도가니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 가슴은 냉장고처럼 싸늘해지기만 했다.
나는 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처 누구를 향해서인지도 모르고 이런 물음표를 내던졌다.
아, 저 사람들은 다 행복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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