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1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일본 밀정의 배신으로 인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만 독립지사들의 일화에 대해 소개했다.

그 일화가 바로 당시 간도 나아가 일본과 한반도를 들썽케 했던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이다.

1915년전 후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반일열혈청년은 비밀결사조직인 “철혈광복단”을 결성했다. 그 후 이 단체의 대부분의 단원들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통합되어 항일투쟁에 힘을 보태었다.
 
식지를 깨물어 혈서를 쓰고 일제와의 사투를 맹세했던 광복단 단원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 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었다.

단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책략을 모았다. 용정에서 거사를 기획 한 사람들로는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전홍섭(全洪燮)이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홍섭에게 독립무장을 위한 행동에 참여하자고 건의 했다.

이에 일본기관에서 일보고 있지만 역시 일제괴수들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있던 전홍섭은 인차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홍섭은 자기는 놈들의 은행권 수송에 몇번 참가한 적 있다면서 “왜놈들이 회령에서 용정 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구체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았다. 이에 영웅들은 일제의 수송자금을 중도에서 탈환하기로 하였다. 전홍섭은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1919년 12월 그믐 날 전홍섭은 용정 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에게서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30만원의 현금을 수송 해 오게 된다는 비빌을 알아내었다. 전홍섭은 즉각 철혈광복단에게 이 비밀행동에 대해 쪽지로 전달했다.
 
쪽지에는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 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 수 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고 씌어있었다. 4,5일이면 시간이 이틀 밖에 없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등 6명은 명동에 집결하여 면밀하게 습격계획을 짰다.

거액의 현금을 운송하는 일이니 놈들은 전신무장한 순사들로 호위로 경비가 삼엄할것이다. 인적이 적고 산발이 험하고 나무가 무성한 오랑캐 령이나 선바위 밑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힐 것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총령사관이 있는 용정촌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해 질수도 있다.
 
드디여 그들은 습격지점을 동량리 어구(지금의 승지촌으로부터 100여메터 상거한 길)로 정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여섯 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었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 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일제를 향한 증오의 총칼을 서슬푸르게 벼르고 있던 철혈광복단은 즉각 행동에 들어 갔다. 1920년 1월 4일,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여섯 명의 철혈광복단 대원들은 결전의 길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림 속을 꿰질렀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가르며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 어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동량리 어구는 용정시 남쪽으로 흐르는 륙도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좌안의 도로를 따라 약 4㎞ 가량을 가면 닿게 된다.

동량리 어구에서 그들은 큰 길옆 버들 방천에 숨어서는 오로지 수송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적들의 수송대가 나타났다. 수송대는 느릿느릿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행렬의 륜곽이 점점 똑똑히 알렸다. “땅!” 어스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다. 그 신호와 같이하여 대원들은 일제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 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 세웠다. 그런데 이때 총소리에 놀란 맨 앞장 선 말이 네굽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말을 붙들라!”

윤준희와 최봉설은 15리나 쫓아가서 어느 산중 턱에서 간신히 말을 멈춰 세웠다.

말에 실은 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주머니 속에는 도합 15만원의 새 지폐가 꽉 차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지니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 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휴식을 취한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출발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두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블라지보스토크를 향해 떠났다.

러시아 모구위(毛口崴)에서 배를 타고 블라지보스토크로 향발, 23일 블라지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사건이 일자 온 간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 날인 1월 5일, 용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수백 명의 중일경찰들을 동원 해 평강일대에서 조선인들은 검거 체포했다.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반일지사들을 잡으려고 악에 바쳐 광분하고있을 때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은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논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임국정이 찾았던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일제의 끄나불 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1908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이범윤의 의병부대에서 좌영장(左營將)을 맡아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한 사람이었다. 봉오동 전투를 진두 지휘한 반일명장 홍범도와도 의형제 사이로서 일제가 한 때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측 한국어 통역관의 증언에 의하면  엄인섭은 요수를 잘 부리고 투전 꾼이며 본처 외에 몇 명의 첩을 거느리고 품행이 아주 좋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성격이 포악하여 살상을 자기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철혈광복단이 부푸는 꿈을 안고 엄인섭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변절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상이자 일본의 첩자로 되어 있었다. 엄인섭은 겉으로는 무기를 사는 일은 근심말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호언하면서 서둘러 블라지보스토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 해 버렸다.

헌병대의 정보를 받은 일제는 즉각 출동했다. 조선 나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까지 블라지보스토크에 파견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을 벌렸다.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꿈나라에서 무기교섭의 성공을 꿈꾸던 그들은 한밤 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자 잠을 털고 일어났다. 바깥동정을 느끼고 서둘렀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던 것이다.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뒷방 문 곁에서 자고있던 최봉설이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앞을 가로 막는 일본군헌병을 발길로 걷어차 넘어 뜨리고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헌병들이 최봉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최봉설은 상처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계속 앞으로 뛰였다. 얼마 못뛰여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총알을 맞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추슬리며 최봉설은 단말마로 뛰고 또 뛰였다.

일제의 검거로 단원들이 목숨걸고 탈취했 던 15만원중에서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다. 아울러 블라지보스토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는 대가를 치렀다.

1921년 8월 25일 윤준희 등 세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에 언도되었다.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애젊은 나이었다.
 
당시 최신 소총 한 정이 30원 이었다고 하니 15만원은 반일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비장하게 마무리 된15만원 탈취사건이 있은 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일었다. 15만원 탈취거사가 무기구입 성사로 마무리 되었더라다면 전반 한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것은 물론일 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설처럼 살아남은 최봉설(崔鳳卨)은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러시아 백파군과 맞서 싸웠다.

“15만원탈취사건”이 발생한지도 이젠 90여년 세월을 경과했다. 그동안 사건경위에 대해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의 증언과 관련자료들이 아직도 그냥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한편 밀고자 엄인섭의 행방을 보면 그후 원산에서 손영극이란 사람과 술자리에서 힘 자랑을 하다가 주먹깨나 하는 손씨의 주먹 한방에 복부를 맞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손씨는 “너, 이새끼 왜놈 앞잡이지”하는 괘씸한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때렸다고 한다.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동북동지회 엮음, 코람데오, 2009. 105페지)

지금 용정지역에는 “15만원탈취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년 일제의 군자금 조달지점이었던 조선은행 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원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용정 시정부 서쪽문, 신화서점 사거리에서 용정 서시장쪽으로 빠지는 골목 바로 오른 편의 회색 2층건물이 바로 그 곳이다. 한때 용정시 공상은행 영업청으로 사용되었다.

“15만원 탈취사건”의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유적지로는 탈취사건 지점에 세워진 거사 기념비이다. 용정 시에서 동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 그 부근에 거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포장도로 오른 편 육도하가 흐르는 강언덕, 돌로 3메터 가량 쌓은 축대 언덕주변은 세멘트로 단을 쌓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석비 정면에 한자로 “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 있다.

“15만원탈취사건은 민족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장을 장식하면서 아주 큰 역사 적 의미를 가진다.” 학계는 15만원 탈취사건은 용정 3•13 만세운동으로 대표되 던 비폭력 항일운동에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거사라고 정평하고 있다.
 
몇해 전 칸 국제영화제 초청,  200억원이라는 억대의 제작비에 정우성, 이병헌등 최고스타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으며 당년 한국영화의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 오른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바로  “간도15만원 탈취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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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서프라이즈”,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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