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만보산 사건은 9·18 사변 이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 동북을 침략하기 위해 중·조 인민의 관계를 이간질하기 위해 고의로 조작한 유혈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현지 화교 9명이 일본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일본 신문은 기회를 틈타 기만 선전을 펼치며 반중 감정을 부추겨 조선 내 수천명의 화교들이 학살당하는 참사를 초래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작한 만보산 참사
일본은 조선을 병합한 후 중국 동북 침략을 서두르며 계획적으로 대량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동북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1930년 말 기준, 관동주(여순·대련 지역)와 남만철도 연선 부속지에 이주한 일본인은 24만 명을 넘었으며, 일본인과 조선인을 교체 이주시키는 방식을 통해 조선인을 동북으로 밀어넣었다. 이로 인해 동북 지역, 특히 길림성 일대의 조선인 인구는 토착 주민을 초과했고, 1930년 말 동북 내 조선인은 58.8만 명에 달했다. 또한 일본의 박해로 생계를 잃은 조선인들이 밀입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조선인들은 중국 법령을 준수해야 했으나, 일부는 일본의 "보호"(실제로는 감시)를 받으며 중국 정부의 법령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의 세력을 등에 업고 중국 주민을 괴롭히며 토지를 강탈하고, 임금을 체불하며,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빈발했다. 중국 지방정부는 일본 영사관과 경찰 당국에 반복적으로 항의했으나 공정한 해결을 얻지 못했고, 일본은 오히려 사태를 확대시켰다. 만보산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만보산 사건과 일본 경찰의 만행
만보산은 장춘 북쪽 40리(약 20km) 지점에 위치한 비옥한 농지로, 이통강 근처에 자리해 벼농사에 적합했다. 1931년 4월, 장춘현 농업회사 관리인 악덕 상인 하영덕은 고가를 제시하며 현지 지주들을 유혹해 장춘 북교 만보산 지역 소한림·장홍빈 등의 황무지 500헥타르(垧)를 10년 기한으로 불법 임대했다. 이후 그는 이 땅을 같은 기한으로 조선인 농민에게 전세줬다(당시 중국 법령상 정부 승인 없이 외국인과 계약하는 것은 불법·무효).
조선인 이승훈·이조화·박노창 등은 하영덕과의 계약을 근거로 "장춘시정준비처"에 만보산 일대 500헥타르 임차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지원 아래 중국 법령을 무시하고 400여 명의 조선인 농민을 모아 중국 농민의 경작지에 강제로 길이 20여 리(약 10km), 너비 4장(약 12m)의 수로를 파며 이통강 물을 끌어왔다. 이 과정에서 400여 무(약 26.7헥타르)의 경작지가 파괴되었고, 수문을 막아 상류 지역의 농지가 침수되며 수백 가구의 어민 생계도 위협받았다.
장춘현 정부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의 불법 행위는 계속되었고, 그해 7월 1일, 만보산의 농부들이 자발적으로 500여 명이 모여 도랑을 메우고 댐을 평평하게 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곳의 일본 경찰이 뜻밖에도 총격을 가해 농민 9명을 사살(부상 수십명)하고, 십여 명을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그리고 "중국 농민이 조선인을 학살했다"는 거짓 주장을 퍼뜨리며 대량 군경을 투입해 농민들을 추가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했다. 중국 측 외교관의 강력한 항의로 일본의 음모는 일단 저지되었으나, 일본 정부는 사건을 왜곡해 조선 내 반중 폭동을 선동했다.
조선 내 일본의 반중 폭동 조장
당시 조선에는 8~9만 명의 화교가 북부 지역에 분산되어 거주하며 농업과 상업에 종사했다. 평소 조선인과 갈등이 없었으나, 만보산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 내 신문을 통해 "만보산 조선인이 중국인에게 학살당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려 증오를 부추겼다. 일본 낭인과 군경은 조선인 복장을 하고 폭도들 사이에 섞여 폭력을 선동했다.
7월 3일 밤, 한성(서울)에서는 화교 상점이 전소되었고, 4~5일에는 100여 호의 주택이 파괴되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인천에서는 화교들이 단결해 저항하며 추가 피해를 막았으나, 상인천 지역의 화교들은 전원 살해당했다. 평양에서는 4일 밤부터 5일까지 조직적 습격이 이어지며 4~500호의 가게와 주택이 약탈당하고 260여 명이 학살되었으며, 100여 명은 대동강에 내몰려 죽었다. 7일까지 지속된 이 폭동에서 총 600여 명이 사망·부상했고, 김천·한천·진남포·신의주·안동·개성·부산 등 전역에서 동시다발적 학살이 발생했다.
일본의 숨은 의도
일본이 조선 내 화교 학살을 주도한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조선인의 중국 증오를 부추겨 향후 침략 시 후방의 우려를 없애고, 둘째, 조선인을 앞세워 중국 침략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셋째, 중국인으로 하여금 동북 조선인에 대한 보복을 유발해 "조선인 보호"를 명분으로 동북으로 진군하려는 것이었다.
중국 민간의 대응과 국민당의 무책임
요녕성 국민외교협회는 긴급 회의를 열어 주환계를 장춘에 파견해 사건 진상을 조사하고, 안동으로 피난 온 화교들을 구호했다. 8월 10일까지 모금된 3만 위안 중 1만 엔을 환전해 노광적·왕화일·왕소은 등 3명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들은 8월 18일 일본 총영사관의 소개장을 받고 안동을 거쳐 한성·인천을 경유해 20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 시내는 화교 상점과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교외의 채소 농가들도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장산 기슭에는 일본과 조선 폭도들에게 살해당한 화교들이 10명씩 묶여 알몸으로 매장된 집단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사망자 수는 확인되지 않았다. 협회는 난징 정부에 일본 측 처벌을 요구했으나, 국민당 정부는 5만 위안의 위문금만 보내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역사의 교훈
만보산 사건과 조선 내 학살은 일본 제국주의가 중·조 민중을 분열시키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잔혹한 사건이다. 이는 민족 간 증오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그리고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어떤 비극을 낳는지 경고한다.
BEST 뉴스
-
한중 외교의 민감한 분기점, 반중 극우 시위 수사의 의미
글 | 허 훈 최근 서울 남대문경찰서가 중국 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극우 단체 ‘자유대학’의 반중(反中) 시위에 대해 수사에 착수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 세력으로 알려진 이 단체는 7월 22일 집회에서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과 다이빙 대사의 얼굴이 인... -
교육이 사라진 대학
무더운 여름도 무색하게, 한국의 대학 현장은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 얼어붙어 있다. 대학 위기론은 낯선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단순한 학령인구 감소나 재정난이 아니다. 특히 적지 않은 사립대학은 ‘교육’이라는 본질보다 ‘경영’이라는 명분 아래, 이윤 추구에만 몰두하며 스스로 존재의 이... -
“무비자도 독점 장사? 한국 관광정책의 속 좁은 계산”
글 | 허 훈 한국 정부가 중국 단체관광객에 한해 무비자 입국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겉으로는 양국 교류 확대를 말하지만, 세부 규정은 자유여행객을 철저히 배제하고 8개 지정 여행사만 이용하도록 했다. 한마디로 관광을 ‘공공 외교’가 아닌 ‘특정 기업 수익사업’으로 보는 발상이... -
일본 패망 이후, ‘한간(漢奸)’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동포투데이]1945년 8월 15일, 중국 전역은 14년간 이어진 항일전쟁의 승리 소식으로 들썩였다. 당시 언론 <대공보(大公報)>는 대형 활자로 “일본 투항!”을 전하며, 수많은 중국인들이 기다려온 순간을 알렸다. 그러나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민중의 관심은 ‘일본에 협력한 한간(漢奸) 처벌’로 향했다.... -
침묵과 왜곡을 넘어, ‘기억’이라는 저항
일본의 교육 현장에서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시도는 오랜 과제였다. 특히 극우 단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つくる会)’이 만든 ‘신しい歴史教科書’(New History Textbook)는 난징대학살, 위안부, 기타 제국주의적 침략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미화하는 내용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 교과서는... -
반중 정서, 불안한 사회가 만든 혐오의 정치학
글 | 허훈 2025년 들어 동아시아와 서구 곳곳에서 반중 정서가 노골적으로 분출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중국인 상점이 파손되고, 도쿄 거리에서는 관광객이 폭행당하는 일이 잇따른다. 단순히 범죄의 숫자가 늘어난 문제가 아니다. 그 장면들은 불안한 시대가 만들어낸 상징이자, 사...
NEWS TOP 5
실시간뉴스
-
“총구 겨눈 혈맹, 1969년 중·북 국경 위기의 전말”
-
일본 패망 이후, ‘한간(漢奸)’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
“이게 발해 맞아?”…훈춘 ‘발해고진’을 둘러싼 논란, 그 풍경의 진짜 정체는
-
21세기에도 남아 있는 노예제…모리타니, 인류의 그림자
-
“제주도가 중국인의 섬?”…무질서한 중국 관광객에 쏟아지는 비판
-
역사 속 ‘신에 가까운’ 일곱 사람…제갈량도 5위 밖, 1위는 누구였을까
-
단동의 밤, ‘해당화’ 식당에서 피어난 이념의 그림자
-
“9·18 사변의 전주곡—만보산 사건의 전말”
-
[역사 바로보기] 중국사 속 3대 허위사실…'주유왕 봉화사태'부터 '강건성세'까지
-
국경을 초월한 영웅, 이다 스케오의 희생과 평화의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