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포투데이] 장백폭포에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한참 내려오자, 하늘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나무 그늘이 짙어졌다. 해발 1200미터 아래, ‘백두산 지하삼림(곡저삼림 地下森林)’이라 불리는 거대한 원시림이 펼쳐져 있었다. 천지의 화산분화로 생긴 협곡 속에 자리 잡은 이 숲은,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그저 짙은 초록의 덩어리 같지만,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공기는 더없이 맑고 서늘했다. 자욱한 이끼 냄새와 젖은 흙 내음,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묘한 울림을 남겼다. 나무들은 줄기가 굵고 가지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서로의 그늘 속에 얽혀, 거대한 초록의 성당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백두산의 ‘숨은 심장’이에요.”
지하삼림 입구에서 만난 현지 안내원 리춘하(조선족, 38)는 그렇게 말했다. “천지가 백두산의 얼굴이라면, 지하삼림은 그 영혼입니다. 화산이 폭발하고, 숲이 스스로 회복된 자리죠.” 그는 숲길을 걷는 내내 발밑의 식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이건 인삼과 비슷한 삼지구엽초, 저건 희귀한 백두산 들꽃이에요. 여름엔 버섯이 산을 뒤덮습니다.”
관광객들은 깊은 협곡 사이로 이어진 나무계단을 조심스레 걸었다. 원시림에 들어서자 물소리가 들렸고, 짙은 안개가 발목을 스쳤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 이민주(24)씨는 “천지에서 본 장엄함과는 달리, 여기는 시간마저 멈춘 느낌”이라며 “자연이 스스로를 치유한 흔적 같아요”라고 말했다.
지하삼림의 숲속에는 작은 폭포와 맑은 계류가 곳곳에 흘러 있었다. 햇빛이 틈새로 비칠 때마다 안개가 무지개처럼 피어올랐다. 카메라 셔터 소리 대신, 사람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 신비로운 침묵이야말로 백두산이 오랜 세월 품어온 생명의 리듬이었다.
숲 끝자락에서 만난 노년의 조선족 촌민 김창수(70)씨는 “어릴 적엔 여기에 산삼을 캐러 다녔지요. 지금은 보호구역이라 채취는 금지됐지만, 그래도 백두산은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예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숲이 오래도록 그대로 남아야 우리 후손들이 백두산의 진짜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라며 미소 지었다.
길고 어두운 협곡을 빠져나오자 다시 햇살이 쏟아졌다. 뒤돌아본 숲은 안개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천지의 푸른 물결, 장백폭포의 굉음, 그리고 지하삼림의 고요 — 이 세 풍경은 서로 다른 얼굴로 백두산의 생명력을 완성하고 있었다.
기자는 문득 생각했다. 백두산은 단순히 높은 산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시간 위에 새겨놓은 거대한 연대기이자, 인간과 생명이 함께 써 내려가는 서사시였다.
BEST 뉴스
-
서울 3년 살며 깨달은 한국의 민낯
영하 12도의 서울. 바람은 칼날처럼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홍대 입구에 서 있었다. 움직이는 이불 더미처럼 꽁꽁 싸매고, 온몸을 떨면서. 그때 정면에서 한국 여자 셋이 걸어왔다. 모직 코트는 활짝 열려 있고, 안에는 얇은 셔츠 하나. 아래는 짧은 치마. ‘광택 스타킹?’ 그런 거 없다. 그... -
마두로 체포 이후, 북한은 무엇을 보았나
글|안대주 국제 정치는 종종 사건 자체보다 ‘언제’ 벌어졌는지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를 전격 체포한 직후,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 일정과 맞물려 북한이 고초음속 미사일 발사 훈련을 공개했다. 단순한 군사 훈련의 공개로 보기에는 시점... -
같은 혼잡, 다른 선택: 한국과 중국의 운전 문화
글|화영 한국에서 운전하다 보면 반복해서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차선을 바꾸기 위해 방향지시등을 켜는 순간, 뒤차가 속도를 높인다. 비켜주기는커녕, 들어올 틈을 원천 차단한다. 마치 양보가 곧 패배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 도로에서는 ‘내가 우선’이... -
트럼프 2.0 이후 세계 정치 변화, 극우 확산의 구조적 배경
편집자주: 본 기사는 해외 정치커뮤니케이션 전공 학자의 분석을 바탕으로 2025년 세계 정치 환경 변화를 조망한 해설 기사입니다. 다양한 국가 사례와 학술적 관점을 종합해 재구성했으며, 기사에 담긴 해석은 참고용 분석입니다. 2025년 들어 전 세계 정치 지형에서 공통적으로 포착되는 변화... -
“왜 이렇게 다른데도 모두 자신을 ‘중국인’이라 부를까”
글|화영 해외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종종 비슷한 의문이 제기된다. 남북으로 3000km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 영하 50도에서 영상 20도를 오가는 극단적인 기후, 서로 알아듣기 힘든 방언과 전혀 다른 음식 문화까지. 이처럼 차이가 극심한데도 중국인들은 자신을 ... -
중국산 혐오하면서 중국산으로 살아가는 나라
중국산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중국산 없이 하루라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사회의 중국산 혐오는 이미 감정의 영역에 들어섰다. “중국산은 못 믿겠다”, “짝퉁 아니냐”는 말은 습관처럼 반복된다. 하지만 이 말은 대부분 소비 현장에서 힘을 잃는다. 불신은 말...
실시간뉴스
-
“홍콩 반환, 무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
역사 속 첫 여성 첩자 ‘여애(女艾)’… 고대의 권력 판도를 뒤집은 지략과 용기의 주인공
-
백두산 현장르포④ | 용정의 새벽, 백두산 아래에서 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
-
[기획연재③]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북간도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항일운동
-
백두산 현장르포③ | 지하삼림, 천지의 그늘 아래 살아 숨 쉬는 또 하나의 세계
-
백두산 현장르포② | 폭포 앞에서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
[기획연재①]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문학, 민족, 그리고 기억의 장소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에서 천지를 마주하다
-
“해방군인가, 약탈군인가”…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출과 동북 산업 약탈의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