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과 더불어 새롭게 인식되는 역사
■ 김철균
“사람은 모든 것에 다 사연이 있는 법이란다. 절대 남의 험담을 할 필요가 없는 거란다. 뒤동네의 영덕이네 3형제를 보아라. 3형제중 그래도 제일 공부를 많이 하고 제일 똑똑했던 사람이 둘째인 영덕이었는데 지금의 그를 보아라……”
영덕이란 당시 30살 정도가 된 홀아비었는데 정신분열증에 걸려 한밤중에도 자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를 하는 이수일과 심수애는 양인이로다…”를 부르면서 희트테리를 부리군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왜 정신분열증에 걸렸는냐 하면 그건 어렸지만 나 역시 동네사람들한테서 들은터였다.
일찍 그는 공부를 잘하여 연변제4고중(현재의 훈춘시2중)에까지 다녔었다. 동네사람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혼자 무선통신기(无线电台)를 조립하여 외부에 신호를 발사하는데 성공한 수재였다. 그 일로 훈춘현 공안국에 잡혀들어가 며칠간의 조사를 받았으나 원체 출신이 좋은데다 외국과의 연계같은 것이 전무였고 그냥 취미로 만든 것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장춘의 어느 연구소에서 데려간다 어쩐다 하는 말까지 돌았었다고 한다.
헌데 그가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고중시절 서로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훈춘시가지에 집을 둔 학생이었다. 당시 그 여학생도 영덕이를 몹시 좋아했으나 그녀의 부모가 한사코 반대했던 것이다. 이유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직은 학생이기에 연애는 일찍하다는 것이었다. 헌데 그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니었다. 영덕이가 농촌농민의 자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정에서는 둘 사이를 뜯어놓으려고 연 며칠동안 딸을 가두어놓고 학교에도 못가게 하였다고 한다. 결국 영덕이는 절로 그 여학생의 곁에서 물러났다. 헌데 고민끝에 그것이 병으로 되어 결국 정신이상증에 걸렸고 나중에는 연변4고중에서 퇴학까지 하게 되었으며 병세가 점점 악화돼가기만 했다.
“사람이란 너무 총명하고 머리가 좋아도 운명이 사납네라. 사람은 적당한 팔자대로 살아야 한다. 욕망은 크고 그 욕망이 실현되지는 않고 하다가는 병이란 것이 생긴단다.…”
아버지의 얘기였다. 아버지는 또 장애인으로 절망하다 물에 뛰어들어 자결한 청년의 아야기와 결혼 뒤 애를 낳을 수 없어 시집에서 쫓겨난 뒤 친정에서도 들여놓지 않자 한족 홀애비와 동거하고 있는 김옥란이란 여인의 이야기 등으로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그 당시 이내 나이는 고작 8~9살이었던지라 아버지의 말뜻을 3분의 1가량도 터득할 수 없었던 나였다. 그저 왜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가? 김옥란이란 여성은 왜 한족홀아비와 살고 있는가? 또한 영덕이란 아저씨는 왜 정신병자가 됐는가?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 그저 현상만 보고 생각했을뿐 그 깊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할려고도 하지 않았었다.
내가 썩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아버지가 나한테 들려준 얘기들은 말속에 말이 있었다. 이는 아버지가남의 사연을 빌어 자기 자신이 살아오면서 심리고통을 겪어온 것을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었다. 좋게 말하면 그랬고 다른 한편으로 분석하면 그것은 변명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제시기 제대로 된 공부는 못했지만 조선으로부터 유정촌에 와서 야학을 세운 박씨네 형제로부터 시국과 사회에 대한 교육을 일정하게 받았던 아버지는 그 시대로 말하면 비교적 개방적인 청년이었다. 그러했기에 아버지는 부모(나의 조부모)들끼리 맺어준 혼인에 대해 강한 거부의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 표현의식이란 곧바로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집을 뛰쳐나가 근로봉사로 일본군이 벌여놓은 공사장에 가서 부역을 했고 광복 후에는 민주연군에 참가하여 중국내전에 투신했으며 나중엔 조선으로 나가는 “혁명투사”로 되기까지 했다. 혁명투사ㅡ 참 그럴듯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행동을 놓고 진정한 혁명가이고 애국자라고는 불러주기가 좀 그렇다. 적어도 자식인 나부터가 그렇다.
……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에 의해 조선으로부터 “끌려온 뒤”에도 아버지는 각종 구실을 대서는 집을 나가 10여일씩 나돌다가 돌아오군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7년 아들인 내가 태어난 뒤부터는 일절 밖에 나돌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그 시기 아버지가 10여일씩 밖으로 나돌 때 과연 어디에 갔었겠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나의 엉뚱한 추측이겠으나 당시 아버지가 간 곳이 조선에 있다던 그 여인한테로 간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럼 그 여인한테로 갔다면 왜 다시 돌아왔을까? 이것 역시 미스테리이다. 나의 판단이 맞다면 아무리 봉건적 혼인에 반기를 들고 나선 아버지었지만 윗어르신들이 건재하는한 그 어르신들의 뜻을 거슬리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로부터 연속 딸 둘을 낳다가 1957년에 아들인 내가 태어나자 다시 들떠있던 마음을 다잡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그렇게도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술이 얼근히 된채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리 집에서 아들 낳았소”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머리속에서도 기억이 생생하지만 아버지는 어디에서 돌배 한알이 생겨도 호주머니에 건사했다가는 몰래 나한테 주군 했었다.
그러니 내가 들떠있던 아버지의 발목을 묶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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