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인물포토】쟝칭이 질투했던 민국시기 “사교계의 꽃” 쉬라이
한시기 중국의 제1부인이었던 쟝칭(江靑)은 민국시기에도 영화계의 한떨기 꽃이었다. 청순한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 모든 것은 당시 많은 남성들한테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민국시기 천하의 내노라 하던 쟝칭도 질투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인즉 당시 사교계의 꽃으로 불린 쉬라이(徐来)었다.
쉬라이(1909년 – 1973년 4월 4일), 영화배우이고 원명은 쉬제펑(徐洁凤)이다. 지난 세기 20연대 후기 상하이 중화가무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화가무단에 입문, 쉬라이는 수차 가무단을 따라 광둥, 샹강(香港) 등지에 가서 공연했고 1928년에는 태국, 싱가폴, 자바(爪哇) 등 나라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옛상하이 영화잡지 “량유(良友)”는 언제인가 당시 영화계에서 잘 나가는 여성스타들의 합영사진을 표지에 게재했다. 그들로는 후데(胡蝶ㅡ 뒷줄 제일 가운데) , 쉬라이(뒷줄 오른쪽 첫번째), 천옌옌(陈燕燕ㅡ 앞줄 가운데), 왠링위(阮玲玉ㅡ 뒷줄 오른쪽 두번째), 왕런메이(王人美 앞줄 오른쪽), 왠미윈(袁美云ㅡ 앞줄 왼쪽), 리밍휘이(黎明晖ㅡ 뒷줄 왼쪽 두번째), 예츄신(叶秋心ㅡ 뒷줄 왼쪽 첫번째) 등이었다.
1932년 쉬라이는 상하이 밍싱영화공사(明星影片公司) 배우로 데뷔, 선후로 “화산염사(华山艳史)”, “서북행(到西北去)”, “여아경(女儿经)” 등 영화에서 여러가지 역을 감당했다. 1935년 쉬라이는 “선가녀(船家女)”의 주인공을 맡고 압박받고 유린당하는 뱃사공 처녀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소화해냈다. 그 해 쉬라이는 영화계에서 은퇴, 지난 세기 40연대말에는 샹강(香港)으로 이주했다.
상냥하고 틀거지가 없는 쉬라이는 평소 영화팬들한테 항상 가까이 접근, 그녀의 팬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녀는 자주 사인비서를 시켜 자기한테로 온 팬들의 편지를 정리처리했으며 팬들에게 자주 회답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녀는 영화배우중 선참으로 여비서를 둔 여인이었고 후에는 자가용도 구입, 양네메이(杨耐梅)에 이어 두번째로 자가용을 갖춘 여자 영화배우가 됐다.
쉬라이가 촬영한 영화는 많지 않으며 영화계에서 활동한 시간도 3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영화권과 사교계의 화제로 되었다. 당시 그녀가 어디에 나타나면 곧 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되었으며 그녀에 대한 의논뿐이었다. 당시 쉬라이는 사교계에서 “표준미녀”란 미명을 얻게 되었고 그것으로 그녀는 생활에서 명성에 지치기도 했다.
쉬라이는 평소 춤추고 웃고 떠들기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들한테서 인기가 높았다. 또한 그녀는 무도청 등 사교장소에 자주 출입하면서 허다한 국민당 고위관원들과도 내왕이 빈번했다. 당시 많은 남성들이 그녀를 사모하면서 쉬라이의 치마밑에 굴복했다고 한다.
쉬라이가 출연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그녀의 미모를 인정, “표준미녀”란 칭호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쉬라이는 뤼진후이(黎锦晖)가 세운 “밍웨이사(明月社)”에도 출입, 가무를 배웠을뿐만 아니라 밍웨이사를 도와 내부관리와 공공사무도 협조해주군 하였다. 그때로부터 쉬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사교계의 꽃”으로 등극되었다.
여스타의 일거일동은 원체 쉽게 많은 이슈를 낳기 마련이다. 쉬라이도 만찬가지었다. 결혼후에도 쉬라이는 자주 유언비어에 말려들군 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국민당의 고위관원 탕성밍(唐生明)은 아내 쉬라이를 데리고 상해에서 일본에 투항, 그 뒤 쉬라이는 일본인들과 더불어 많은 합작으로 하면서 “다한젠(大汉奸)”으로 되었다.
BEST 뉴스
-
극우, 이제는 때려잡아야 할 때
극우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국내의 한 극우 청년단체가 미국에서 첫 공개 활동을 열었다는 소식은 가벼운 해프닝이 아니다. 그들이 쏟아낸 말은 정부에 대한 저급한 욕설, 선거가 조작됐다는 허무맹랑한 주장, 종교를 빌미로 한 선동뿐이었다. 사실은 실종되고 증거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음모론과 분열의 광기뿐이다. ... -
인천 앞바다의 선택, 인간애가 남긴 울림
며칠 전 인천 앞바다에서 있었던 구조 소식은 제 마음을 오래 붙들었습니다. 34살 해경 이재석 경장은 새벽 바다에 뛰어들어 위기에 처한 중국인 노인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밤중의 차가운 바다, 거센 파도 속에서 그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
“터무니없는 괴담, 정치 선동의 불쏘시개 될라”
글 | 허훈 최근 온라인 공간에 떠도는 ‘중국인 괴담’은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내년까지 중국인 2천만 명이 무비자로 들어온다”, “아이들이 납치돼 장기 적출을 당한다”는 식의 주장들이 버젓이 퍼지고 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임에도 수백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수십 차례 공유하...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 천지를 마주하다
[동포투데이] 2025년 9월 26일 아침, 백두산 자락은 맑은 하늘 아래 싸늘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정상에 오르는 길목에는 이른 시간부터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 카메라를 든 한국인 청년들, 러시아와 몽골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백두산은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긴 오르막을 지...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동포투데이] 백두산 자락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서면 용정시 명동촌이 나온다. 소박한 기와집과 푸른 담장이 맞아주는 이 마을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곳은 한 시인의 생가를 넘어선다. 근대 조선 민족운동의 요람이자, 교육·종교·문화가 교차한 북간도의 심장부였다. 1906년 서전서... -
[기획연재①]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문학, 민족, 그리고 기억의 장소
[동포투데이] 2025년 9월 25일, 기자는 길림성 용정시 명동촌을 찾았다. 이곳은 애국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이다. 복원된 생가는 소박하게 서 있고, 그 앞마당에는 여전히 들판에서 불어온 가을 바람이 머문다. 마을 입구의 표지석은 단순히 한 시인의 흔적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명동촌...
실시간뉴스
-
백두산 현장르포② | 폭포 앞에서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
-
[기획연재②]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교육·신앙·항일의 불씨
-
[기획연재①] 윤동주 생가에서 보는 디아스포라 — 문학, 민족, 그리고 기억의 장소
-
백두산 현장르포① | 민족의 성산, 천지를 마주하다
-
“해방군인가, 약탈군인가”…1945년 소련군의 만주 진출과 동북 산업 약탈의 기록
-
“고층에 살면 수명이 짧아진다?”…연구가 밝힌 생활 속 건강 변수
-
여성 우주인, 왜 우주비행 전 피임약을 먹을까
-
반려견 키우기의 ‘10가지 부담’…“귀여움 뒤에 숨은 책임”
-
“총구 겨눈 혈맹, 1969년 중·북 국경 위기의 전말”
-
일본 패망 이후, ‘한간(漢奸)’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