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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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국초기 사창업은 규모화를 형성하기 시작, 가장 번창하던 1917년 북경에 등록된 기방은 도합 391개에, 기생 3500명에 달했으며 암암리에 사창업에 종사하는 기생은 적어도 7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항전시기 북평의 매 250명의 여성중 1명은 기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
 
북평이 해방된 후 사회는 복잡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비록 기방들에 대해 즉각적인 차압을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치안을 정돈하면서 기방들을 관제범위내에 넣었고 각 공안분국과 파출소들에서는 경상적으로 기방의 표객(嫖客)들을 검사하고 나쁜 분자들을 추적하군 하였다.
 
당시 기방은 흔히 국민당 특무들이 숨어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차압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북경시 공안국에서는 사회치안을 수호하는 각도에서 기방들에 대해 약간의 잠정규정을 정해놓고 관제하고 있었다. 당시 북경시 정부의 규정에는 해당 공안국과 파출소에서는 우선 각 기방들에 대해 등록하고 각종 방식으로 해결방식을 탐색하군 하였다.
 
한편 어떤 공안분국에서는 표객들의 기방으로 드나드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표객검사” 도장을 만들어서는 파출소들에 발급, 표객이 발견되면 우선 교육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표객의 신분증과 영수증에 도장을 찍군 하였다. 한번은 50세 가량의 한 남성이 기방에 들어왔다가 파출소 일군들한테 잡히게 되었는데 그한테는 그 어떤 증건도 없었다. 그러자 파출소 경찰은 그 남성의 와이셔츠에 “표객검사”란 도장을 찍어보내였다. 그 뒤 기방마다 “도장일군이 왔다”고 하면 모든 표객들은 도망가군 하였으며 기방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으며 어떤 업주들은 문을 닫고 폐업하였고 적지 않은 기생들은 기타 지구의 기생방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암암리에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군 하였다.
 
(2)
 
1949년 5월, 북경의 사회치안은 혼란현상이 기본상 청리되었다. 그러자 북경시 정부에서는 회의를 열고 전문 기생들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당시 북경시 시장이었던 엽검영은 “기방에 대한 처리는 반드시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정황을 요해한 후 처리방침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5월 23일, 북경시에서는 민정국, 공안국과 부련회 등 기관의 일군들로 구성된 사업조가 조사사업에 착수, 전 시 200여개의 크고 작은 기방의 기생들을 대상으로 공안국과 민정국에서 각각 조사자료를 작성, 기방의 역사, 분포상황, 등급, 시설, 영업상황 및 기생들의 종류, 내원, 생활상황과 윤락원인 등을 시정부와 중앙공안부에 바치었다.
 
한편 민정부문에서는 기생들을 집합시킬 장소를 선택하고는 일부 생필품을 구전하게 갖추어놓았으며 시부련회 간부가 직접 각 부문으로부터 뽑아온 간부들에게 정책선전 훈련을 시켰고 위생국의 의사를 초청해 성병방지지식강좌를 조직했다. 또한 기업국에서는 수용된 기생들이 해야 할 일, 즉 털실옷 뜨기 등 일거리를 마련하군 하였다.
 
10월 15일, 북경시위와 북경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공안국, 민정국, 부련회 등 부분에서는 “기방 봉폐행동 총지휘부”를 내왔으며 시공안국 국장 나서경이 총지휘를 맡았다.
 
(3)
 
행동시간: 1949년 11월 21일 오후 6시
 
책임부문: 북경시 공안총국
 
총지휘: 나서경
 
행동방식:3명씩 1개 소조로 배비, 1명의 여간부 5개 내지 10개의 기방 조사기록.
 
조사대상: 주인, 마담 및 대리인, 기생, 심부름꾼 등
 
행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오후 6시를 행동시간으로 규정, 집합시켜 회의를 여는 방식으로 주인, 마담을 집중시키고 오후 8시에 기생과 심부름꾼 등을 집중관제에 들어간다.  
 
행동지휘부는 기방 분포상황에 따라 도합 5개의 소지휘부로 설치, 기방이 비교적 집중된 5개 지역에 각각 설치하였고 행동소조는 27개로 구성되었으며 도합 81명으로 매 소조마다 3명씩이었다. 그리고 매 소조마다 1명의 성격이 드세고 사업능력이 비교적 강한 여간부와 정책선전수준이 뛰어난 과장급 이상의 간부를 두었다. 행동소조의 임무는 지정된 기방에 도착하여 북경시 각계대표회의의 결의를 선포한 뒤 기생들을 집중시키고 심부름꾼과 마담 및 표객을 해산시키고 기방 재산을 차압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 날 어느 한 행동소조가 소상루(潇湘樓)에 도착하자 한 심부름꾼이 문어구에 앉아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기방검사단이 왔다. 손님이 있든 없든 모두 자기의 문어구에서 검사를 받으라!”
 
그러자 일부 요염하게 생긴 기생들이 엉덩이를 휘두르며 자기의 문앞에 나타났다.
 
“기방검사단이 아니야, 우리는 너희들 기방을 차압하러 온 사람들이다.”
 
행동조 조장이 웨쳤다.
 
이어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몸에 녹색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에 장탄한채 기방의 문어구에 버티고 서자 그제야 도고하던 기방의 주인과 심부름꾼 등은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행동조장의 말에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했다.  
 
몇시간 뒤 기생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전문밖, 숭문문밖, 서교백방자와 동교로부터 한가담과 백순골목에 자리잡은 8개의 부녀노동교양소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기생들은 각각 여러 뜨락에 배치되어 학습하는 한편 노동개조를 하게 되었다. 
 
(4)
 
1949년 11월 23일, 북경내 기방들이 차압된지 3일 후 북경의 8대 골목중의 하나인 한가담(韩家潭)의 대문에는 “북경시 부녀생산교양원”이란 간판이 걸리었으며 역시 철갑모를 쓴 공안총대의 전사가 총을 쥐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1949년 11월 29일, 북경대학병원 성병방치소 등 6개 의료부문의 57명의 의료일군들이 육속 부녀생산교양원에 파견되어 기생들에 대해 신체검사를 하고 성병에 걸린 기생들에 한해서는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교양원에서는 기생출신의 여성들의 출로문제를 두고 아주 심중하게 처리하였다.
 
이 교양원에서 개조를 마치고 나가는 여성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수속을 밟아주었다.
 
첫째, 정부의 증명신을 발급, 증명서가 있는 본인은 정당 직업이 있는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둘째, 생활보장을 해주는 기초상 몇가지 보증을 하게 하였는바 그것들로는 교양원에서 나간 뒤 노동이거나 가무에 종사하고 더는 창녀생활에 종사하지 않는 것, 정부의 혼인법에 따라 혼인하되 변상적인 매매혼인행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결혼시 반드시 위생부문을 통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 등등이었다.  
 
한단계의 학습과 개조를 통하여 도합 1077명 여성들이 교양원에서 나가게 되었다. 헌데 대부분 여성들은 집이 없기에 자원하여 교양원에 남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교양원에서는 그들에게 82대에 달하는 직포기, 양말편직기 등을 사줌과 아울러 그녀들을 위해 신생 편직물공장을 차려 주었다.
 
한편 교양원에서는 북경에 있는 희곡인원들을 초청하여 그녀들을 도와 일부 소형연극을 자체로 창작해 출연하게 하였다. 이 중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千年冰河开了冻)”은 금교라는 여자가 기방에 팔려가 기생으로 전락되었다가 해방을 받는 내용을 주선율로 낡은 사회 창기제도의 잔혹성과 암흑성을 폭로하였다.
 
교양원에서는 또 특별히 극단을 조직, 한단계의 연습을 거쳐 1950년 춘절이후 이 극단에서 출연한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 북경성내에서 대 환영을 받았는바 1일주일간 출연하는 동안 극장안은 번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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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겨울 북경의 ‘금창(禁娼)운동’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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