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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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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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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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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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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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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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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황후와 오타아 줄리아
    韓流의 성공 한국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계에 김연아의 한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 이영애의 “대장금”이 아시아와 중동지역을 석권하였고 “소녀시대”등 한국의 걸 그룹이 아시아를 휩쓸고 유럽과 미국에 진출하고 있다. 최근 한국 여인들이 만들어 내는 한류의 성공을 보면서 과거 한반도 출신으로서 기구한 운명을 맞아 중국에서 황후로 일본에서 순교자로 생을 살면서 역사의 뒤안 길에 숨어 있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700년 전 당시 세계의 으뜸제국인 元의 황후가 되었던 奇小姐의 조국 사랑은 대제국 元에 고려의 문화를 전달하여 오늘 날의 한류의 원조가 되고 있다. 1225년 몽고사신 저고여가 피살되는 사건을 이유로 몽고는 오고타이가 이끄는 대군을 보내 고려를 침공한다. 이후 1231년 살리타의 침략 등 28년간 7차례 항쟁 끝에 1259년 고려는 몽고가 세운 元의 속국이 되어 元의 요구사항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 元에 부족한 여인을 공물로 바치고 貢女제도가 있었다. 행주 대첩과 행주 奇씨 서울 근교의 고양시에 한강을 굽어 보고 있는 행주산성이 있다. 임진왜란 다음해 1593년 2월 서울 탈환을 위해 권율장군이 이끄는 3천명의 소수정예가 조선 침공 총사령관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이끄는 3만의 일본군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행주의 여인들이 치마 폭에 돌을 싸서 투석전을 도운 것으로 돌을 싼 치마를 행주치마로 불러 주부들의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 행주는 奇씨들의 집성촌이었다. 奇씨는 중국의 殷(商)나라의 왕족으로 점령군 周의 통치를 거부하고 조선에 망명한 箕子의 후손으로,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라고 전해지고 있다. 필자의 48대손인 馬韓의 元王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백제 사람이 된 우성이 행주에서 奇씨를 창성하였고 나머지 두 아들은 각각 신라에 이주 청주 韓씨로, 고구려에 벼슬하여 태원(충청도) 鮮于씨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奇-韓-鮮于 3씨는 한집안으로 결혼도 잘 안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퇴계 李滉선생의 문하생이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가지고 스승 퇴계선생과 四端七情 논쟁을 한 고봉 奇大升같은 유학자도 행주 출신이다. 그 보다 수백년 앞서 고려 말 幸州의 세도가 奇子傲의 딸로써 공녀가 되어 중국으로 건너 간 奇小姐가 오늘 날 한류의 원조인 “高麗樣”의 바람을 일으켰다. 황후가 된 고려처녀 奇소저가 간 곳은 元의 大都. 지금의 北京이다. 그녀는 미모에다 총명하여 고려 출신의 환관의 도움으로 황제의 차 시중을 드는 궁인이 되었다. 당시 원에는 고려의 공녀뿐만이 아니라 고려의 지식인이 환관이 되어 유학지식이 부족한 몽고의 관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원을 세운 쿠빌라이는 고려의 남자는 학문에 깊고 여인들은 미인에다 총명하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원의 황제(순제)는 고려에서 온 奇소저를 총애하기 시작했다. 황제 자신은 11세 때 황실간의 세력다툼에 희생이 되어 멀리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되어 1년 6개월을 고려에서 지낸 추억으로 고려 여인에 대한 특이한 향수가 있었다. 서해 5도의 하나인 황해도 앞바다의 대청도에는 지금도 원의 순제가 어린 시절 보냈던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제는 태자를 분만한 奇소저를 황후가 되도록 하였다. 몽고의 전통은 외국인이 황후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奇소저는 황실의 여러 가문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30여년간 우매한 순제를 제치고 원의 황실은 실세가 되었다. 한류의 원조 고려양 기황후가 우리 민족을 위해 해낸 것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황후로서 중신들이 고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省)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막아 냈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정 국가를 지도상에서 없애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오히려 원의 중신들을 회유하고 元의 황실에 고려의 아름다운 풍습을 전파시켰다. 고려는 세련되고 선진적인 문화의 나라임을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 元에 유행한 고려의 유행을 高麗樣이라고 하였다. 奇황후는 元의 중흥을 위해 무능한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태자를 통하여 개혁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황제의 비협조로 타이밍을 놓친다. 결국 元의 황실은 홍건군에서 시작한 明에 의해 大都를 빼앗기고 八達嶺을 넘어 몽고고원으로 쫓겨 가야 했다. 실의에 빠진 奇황후는 고려의 아름다운 靑山을 그리면서 삭막한 몽고초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살으리랐다. 살으리랐다. 靑山에 살으리랐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靑山에 살으리랐다”라는 청산별곡은 그 무렵 高麗樣을 가져다 준 奇황후가 즐겨 불렀던 고향의 노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줄리아 일본에는 “오타아 줄리아”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일본인에게 천주교를 전파하여 聖人이 되었고 그의 유해는 서울 마포구 절두산 성지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1593년 1월 평양성을 지키던 고니시(小西行長)가 조선을 지원하러 파병된 李如松의 明軍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면서 평양인근에서 부모를 잃은 전쟁 고아를 발견하였다. 그 고아가 줄리아로 3세 때였다. 고니시는 평양을 빼앗기고 서울로 후퇴 권율장군의 조선군과 행주산성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보다 1년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의 침공을 명령했다. 일본군 20만명이 부산에 상륙한 때는 1592년 4월 12일로 조선 건국 20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 침공의 직접 목적은 엉뚱하게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아들 鶴松이 조선의 使臣과 함께 온 이름 모를 조선 귀신에 씌여 죽었다고 믿고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두사람이 선봉장이 되었다. 가토는 불교신자였지만 고니시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동양 최초의 이상한 “십자군” 유럽에서는 16세기 초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16세기 중반에는 적극적 해외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예수회가 창설된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 짜비에르가 인도 고아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다. 일본의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효과가 있었는지 16세기 후반에는 일본의 천주교(切支丹) 신도가 20만을 넘었다고 한다. 천주교 다이묘(大名) 영주들이 늘어나고 그 중에서 고니시 家門도 포함되었다. “아우그스티누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고니시의 조선 침공 제1군은 주로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졌으며 붉은 비단장막에 흰 십자가가 그의 군기였다고 한다. 동양 최초의 “십자군”이었지만 무고한 조선을 침공 인민을 살육하는 그들의 행동은 전혀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지 않았다. 고니시는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종군사제를 요청, “세세페데스”신부가 종군하였다. 고니시의 “십자군”은 부산상륙 20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고 개전 2개월 만인 6월 13일 평양성도 수중에 넣었으나 이듬해 李如松軍에 패퇴한 것이다. 줄리아는 고니시에 의해 일본으로 보내져 고니시의 수양딸로 성장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부모를 잃고 일본군에 사로잡혀 일본에 보내지거나 제3국에 노예로 팔려 나간 조선인이 3-4만명이 넘는다. 이태리 화란 등 유럽의 무역상인들이 많았던 지방에서는 일본에서 팔려 간 조선인 노예의 후손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토요토미의 죽음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의 7년전쟁은 끝났다. 순천에 왜성을 쌓고 명령을 기다리던 고니시군은 토요토미가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귀국명령을 받고 귀환 도중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과 중국 수군제 독진린(陈之粦)장군의 습격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돌아간다. 노량해전은 조선 수군의 승리였지만 이순신장군이 순직한 해전이다. 聖人이 된 전쟁고아 일본에 돌아 온 고니시를 기다리는 것은 7년 전쟁중에 세력을 키운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중심으로 하는 東軍과 토요토미 사후 그를 대리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西軍과 내전이었다. 서군편인 고니시는 1600년 “세끼가하라”전투에서 東軍에 패배하였다. 고니시는 이시다와 함께 형장의 이슬이 된다. 양부모를 잃은 소녀 줄리아는 미모와 총명함으로 도꾸가와의 시녀가 되나 천주교 교리에 따라 절조있는 생활은 도꾸가와를 분노케 하여 오시마(大島)로 유배된다. 불교 신자인 도꾸가와는 천주교의 금교령을 내리고 천주교신자를 고문으로 개종케 하였다. 도꾸가와 막부에서는 당시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잔인한 “후미에(踏繪)” 방법을 고안했다. 성모 마리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펴 놓고 신도들이 진흙 발로 얼굴을 밟고 지나가게 한다. 자연스럽게 밟고 지나가면 통과되나 초상화를 밟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멈칫하면 곧바로 체포 모진 고문을 하고 처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천주교 박해 속에 줄리아는 오시마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니지마(新島) 그리고 고쓰시마(神津島)로 유배된다. 유배되는 곳마다 지방관리와 현지인에게 천주교를 전도하여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줄리아는 평생 독신으로 독실한 신앙을 쌓아 그가 죽은 수백년이 된 지금에도 오시마 및 고쓰시마의 수호 성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400여년전 천주교에 귀의한 조선의 전쟁고아의 종교 한류가 일본 현지인을 감동시키고 있다. 글_ 유주열(전 주중대한민국 대사) 이 글의 저작권은 제휴사 <좋은아침>에 있습니다 ,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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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6
  • “난 바보 엄마야!”
    ◎ 이진숙 결혼 1년 후인 1971년 12월, 큰 딸애가 고고성을 울리며 세상에 나왔다. 그때로부터 만 1년이 지난 1973년 1월에 뒤질세라 둘쨰 딸애가 또 태어났다. 연연생이란 말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옛말처럼 말하지만 그 때는 정말 인생계획 밖의 일이라 어이가 없어 좋은 줄도 기쁜 줄도 몰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배치받아 간 곳은 헤이룽장성 치따이허(七戴河)시 어느 자그마한 조선족마을의 소학교었다. 그 때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다. 의학상식, 건강상식…그런 와중에 연속 애를 갖다 보니 “우둔한 놈 곰 잡는 바보 엄마”가 되어 동네방네 웃음거리가 됐다. “아유, 기가 차라, 어쩜 그렇게까지…” “병신 안 된게 천만다행이야!” 정말이지 둘째 딸애가 이 세상에 나온 기적적인 사연에 대해 너무도 끔찍스러워 혀를 끌끌 차지 않은 사람이 없다. 큰 애가 석달 푼히 됐을 때부터 나는 온몸이 몹시 불편했다. 소화가 되지 않아 음식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고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쩍하면 오가는 감기는 내 몸에 와 붙어서는 떨어질 줄 몰랐다. 암을 모르는 세월이고 촌 마을이어서 그렇지 지금 같으면 위암을 의심하며 검사받느라 야단이었을 것이다. 대신 그 때는 농촌합작의료여서 나는 쩍하면 의사한테 가서 소화에 좋다는 약이라면 엇바꿔가며 줄기차게 먹었다. 그래도 그 상이 장상이다. 찌들어가는 나를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침을 맞아보라고, 기와집 할배가 의사는 아니지만 사정하면 침을 놔줄 거라고… “바쁜 놈이 우물파기”라고 의사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그 날로 침할배를 찾아가 증상을 말했더니 “배속에서 여기저기 움직이며 꿈틀대는 건 적”이라며 나더러 누우란다. 주저할게 뭐람, 아파 죽을 지경인데- 나는 누워서 옷을 거둬 올렸다. 할배는 이리저리 꾹꾹 눌러보더니 동침을 빼들고 배의 몇 곳에다 호박 찌르듯 쓱쓱 꽃는 것이었다. 나는 먹지 못하는 고통에서 한시 바삐 벗어 나려고 찍소리 없이 그 침대를 받아들였다. 그 후에도 호전이 없었다. 나는 그냥 약을 밥먹듯 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차 11월 말에 우리는 전근령을 받고 연변으로 나오게 되었다. 간단한 세간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돐도 안 된 큰 딸애를 업고 달랑 셋이 몸만 차에 실었다. 나오는 길에 우리는 먼저 밀산에 있는 큰 시형네 집에 들렸다. 길에서 극도로 지친데다 감기까지 걸린지라 나는 시형네 집에 도착하자 마자 동네의사를 보이고 링게르를 맞았다. 그런데 하나님 맙소사! 의사말이 임신이란다. 새해 1월 말이 출생예정일이었으니 따져 보면 그 때 벌써 여덟달 된 셈이다. 바보, 바보! 이런 바보가 또 어디에 있담? 몸집이 그다지 알리지 않았어도 평소보다는 완전히 달랐을 텐데 모르다니…진짜 바보야. 첫 애에 이어 두번째 애가 잇따라 생길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 이보다 더 무지한 바보가 따로 없다. 무지하면 미련한 법이다. 하지만 옛날속담에 “우둔한놈 곰 잡는다” 했다. “자식은 하느님이 주는 선물”이라 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서인지 이 미련둥이 우둔한 엄마는 진짜 “호걸”이 되었다.태아 때 벌써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딸애는 건강한 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머리 또한 매우 총명했다. 공부에서는 처음부터 1등 자리를 굳혀왔다. 연변1중에서 칭화대학에 추천(동점일 때 우선)되었을 때 그 걸 마다하고 딸애는 베이징우정학원에 갔다. 졸업하여 베이징에 배치받았고 우정부장의 통역으로 일본과 한국에도 다녀왔다. 한국 우정장관이 중국방문 때는 전 리펑 총리의 통역으로 되어 중국 중앙TV방송에도 나왔다. 정말이지 TV방송에서 리펑 총리의 곁에 서있는 딸애를 보던 순간이 나한테는 더없는 영광이었고 자호였으며 세상을 독차지한 그런 심정이었다. 딸애는 지금 중국 이동통신 베이징시 ××구 분국의 부총경리로 근무하고 있다. 조선족 여자애가 이만큼 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조련찮은 일이냐며 다들 가문의 자랑으로 가슴 뿌듯해 한다. “사선에서 살아 남으면 꼭 복이 온다”더니 “우둔한 엄마”, “바보엄마”를 만나 세상구경도 못해볼 번 했는데 딸애는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자랑을 안겨 주었던가. 하긴 불쌍한 몸과 정신을 갖고 이 세상에 온 애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섬찍해난다. “만일에, 만일에” 정말 그제날 그 일을 떠올리기가 무섭다. 그리고 딸애가 무척 고맙고 대견스럽다. 세상엔 결코 “절대적” 또는 “100프로”란 결코 있을 수 없다. “만일”이란 단어가 하필이면 모든 일에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겠는가. 그 “만일”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역전되면서 때로는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게 “바보엄마”인 내가 얻은 또 하나의 인생수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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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3
  •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 요즘 한국내에서 중국조선족을 “조선족”인가, “재중동포”인가를 갖고 많이 의론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보기에는 명칭차이지만 사실은 중국조선족을 어떻게 보는 것과 연관이 된다. 한국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조선족을 해외동포의 한 부분으로 “재중동포”라 부르는 것은 일본의 “재일동포”나 미국의 “재미동포”를 부르는 것처럼 같은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국적 시각에 불과하다. 사실은 위의 각 자가 처한 배경과 위치가 많이 다름으로 그들을 같은 차원에서 볼수 없다.조선족은 이미 법적으로 인정받은 중국 다민족국가의 한 성원이다.정치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민족의 자치지역이 있고 각 급 정부기관에는 조선족 관료가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중국에는 정부관할의 조선족학교, 조선족문화관 등이 있고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에는 조선족교수, 연구원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은 자기특징을 갖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조선족”이란 명칭은 이미 특유의 고정된 개념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그 누가 승인을 하든 안하든 “조선족”의 존재는 엄연한 사실이다.따라서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는 것을 갖고 논의하는 것은 하등의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한국적 시각에서 일반인들이 조선족을 “재중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무방하겠지만 정계, 학계에서까지 “조선족”이냐, “재중동포”냐 하면서 “조선족”명칭을 무시하는 것은 중국조선족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따라서 이러한 타당성이 없는 언행은 권장할 바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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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20
  • 다시 듣고 싶은 아버지의 “잔소리”
    ■ 이진숙 나의 아버지는 한평생 교원이었다. 직업병이라 할까? 고질병이라 할까? 딱 온집식구가 밥상에 마주 앉으면 단 한마디라도 “잔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셨다. 어릴 적 그 시절엔 그 “잔소리”가 정말 싫었다. 언니나 동생에게 “옷에 탐 적게 내고 신문이나 한 글자 더 봐라”하며 했던 말 또 한다. 그리고 늘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 “사람은 먹물을 먹어야 한다”, “빈 바게스는 소리뿐이야” “…” 생각해보면 자식들더러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이지만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듣기 싫다 했다. 나중에 아버지의 훈시가 잔소리로만 들리면서 반감이 생겨 마이동풍격으로 됐다. “너희들은 절대 교원질을 하지 말라. 훈장의 똥은 개도 안 먹느니라.” 우리가 점점 커가니 아버지는 이게 또 걱정인 모양이다. 하지만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아버지의 말씀은 잔소리로 흘려 보냈는지 운명은 묘하게도 5형제중 오빠, 언니, 나까지 셋이나 교원사업에 몸을 담구게 했다. 내가 대학을 나와 교육사업에 금방 발을 들여놓자 아버지의 “훈시”는 끝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한 사발의 물을 주려면 물 한동이는 물을 준비해야 하느니라.” “애들에게 절대 손을 대지 말아.” “힘들어도 담임을 해라. 그래야 보람이 있고 후날에라도 찾아오는 애들이 있다.” “…” 얼마나 현명한 말씀인가. 황금 천냥인양 주옥같은 아버지의 말씀은 감로수마냥 마음속에 흘러들어 교원생활의 초행길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참, 나중엔 너무도 귀찮았다. 잔소리로 생각된 그 순간부터 나는 말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벌떡 일어나 다른 일을 하는척 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후회된다.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첩약 한 두첩 먹고 효과를 보니 나중엔 상을 찡그리며 대충 먹고는 버리는 격이다. 배은망덕이 또 따로 있을까. 짜증나는 잔소리 또 있다. 밥상에 마주 앉으면 어김없이 되풀이 하는 말 “먹던 오이나 파를 그대로 장그릇에 넣어 찍어먹지 말라. 위생적이 못돼.” “밥을 먹을 때 쩝쩝, 후룩후룩 소리를 내지 말라.” “…” 아버지가 필경 “량반전”을 읽으신 분은 아닌데 남들의 말처럼 틀림없는 “량반”이요 “선비”였다. 그것은 지난 세기 60연대 초 온 나라가 굶주리던 대식품시기였다. 한참 자라는 때라 엄마는 우리가 배를 곯을가봐 모진 애를 쓰셨다. 산에 가서 가둑나무잎을 뜯어 말리워 가루를 낸 후 물에다 수십번 우려서 떡을 만들고 또 술찌꺼기를 얻어다 떡을 만들었며 눈속을 뚜져 누런 배추떡잎을 줏어다 삶아서는 장국이라도 걸게 끓여 우리의 배를 불려주었다. 부지런한 엄마덕에 우리는 똥배를 잔뜩 늘구었다. 어느 설날, 엄마는 이삭을 주어 모은 입쌀로 죽을 끓였다. 그 시절엔 정말 희귀한 음식이었다. 군침을 꼴깍 삼키며 밥상에 마주 앉은 나는 후후 불며 급히 먹다가 나중엔 아예 사발채로 후루룩 소리내며 마셨다. 웬걸, 여기서 그만 사달이 났다. “너 무슨 음식버릇이야, 추물스럽게 말이다…” 그 말에 나는 화가 울컥 치밀었다. 나는 뒤 말은 더 듣지도 않은 채 숟가락을 탕 놓고 울면서 휑-하니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미웠다. 엄마는 설날 아침에 웬 잔소리냐며 아버지를 나무람했다. “내가 틀린 말 했수? 그렇게 애들을 감싸고 돌아보지, 쯧쯧…” 언제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였다. 공자는 “60이 이순(60而耳顺)”이라 했다. 그 후 오랜 세월속에서 더구나 이순의 막 끝에 오른 지금에 와서 나는 종종 아버지를 떠올리며 미안과 후회로 가슴을 뜯는다. 아,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의 그 잔소리를 들어봤으면… 항상 자식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가정교육”이란 이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우리 자녀들더러 인생을 당당하게 살라고 가르친 것이었겠는데 왜 그 때는 몰랐을가? 방법상 잠시 자녀들의 반감을 자아내긴 했어도 아버지의 그 잔소리 때문에 우리는 한결같이 인생을 참답게,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던가. 현대사람들처럼 그 때 만약 “긍정적 사고방식”과 “이해 만세”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을텐데… 지금은 생각이 완연 바뀌었다. 아버지도 세상뜬지가 오래고 우리 세 자매 모두 흰 머리와 주름살로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살지만 아버지 잔소리에 대한 마음의 천평과 양심의 호소는 더욱 눈부시게 찬란하다. “그 애비에 그 딸”이라고나 할까? 나도 자식들에게 아버지처럼 “잔소리 교육학”을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들한테 옳바른 삶을 기대한다. 어느 날, 우리 세 자매는 입체조를 하면서 그 옛날 아버지의 잔소리를 앞다투어 떠올렸다. “뒤에서 다른 사람의 흉을 절대 하지 말라, 바람 안 새는 벽은 없느니라.”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친구 잃고 돈 잃는다. 남과 돈거래를 하지 말라.” “동네 어른 보면 공순히 인사 드려라.” “…”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잔소리 틀린 말 한마디도 없어, 모두가 우릴 위한 말씀이었는데…” 셋은 한입을 모았다. “지혜의 말이 네게 보약이 되리라. 보약이 사람의 배속까지 스며들어 몸을 튼튼하게 해주듯 네가 옳바르게 삶을 살아가게 해 주리라.” 옛날 이스라엘의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한 말이다. 아버지의 잔소리는 정녕 보약이였다. 아, 꿈결에라도 듣고 싶은 아버지의 그 잔소리, 지금도 정말 듣고 싶다! 2014년 2월 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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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7
  • “엄-마-”
    ■ 이진숙 현재 내 나이 70세가 됐음에도 가끔씩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다. 너무도 너무도 못 견디게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나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총명했고 계산에 참 빨랐다. 가감도 구구도 모르는 엄마임에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신기하다. 나의 엄마는 근면하고 무던한 분이시다. 일가친척들과 동네에서는 나의 엄마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세상 모든 엄마들 다 그러했듯이 나의 엄마 또한 자식들 사랑에 극진했다. 말수가 적었어도 묵묵히 그 행동으로 특별한 사랑을 쏟아주었다. 온나라가 굶주림에 떨던 지난 세기 60년대초, 3년 “대식품해”를 겪던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그때 오빠와 언니는 이미 외지에 가서 사업에 참가했고 집에는 초중생인 나와 동생 둘이 있었다. “공산풍”이 불면서 거의 집집마다 집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우리 형제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는 아침마다 밥그릇을 들고 10분씩 걸어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식당에 가서 밥을 타왔다. 배급소에서 주는 식량표준은 한달에 성인 27근반, 중학생은 35근, 출근하는 사람은 31근이었다. 그 중에서 입쌀은 겨우 2~3근뿐이다. 정말이지 육류도, 채소도, 부식도 없는 때라 허기찬 배를 달래기는 어림도 없었다. 똥배는 왜 그리도 컸는지 먹고 돌아 앉으면 또 배가 고팠다. 엄마는 우리 애들의 배가 부르게 하느라고 타온 밥(혼자 다 먹어도 성차지 않을 양)에 물을 붓고 죽을 끓이지 않으면 이삭으로 주은 감자와 시라지를 삶다가 밥을 섞어 수량을 늘이었다. 얼마 후 상급의 지시가 있어 식당들은 다 문을 닫고 우린 더 큰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진짜 “대식품해”였다. 개떡, 누룩떡, 나무잎떡…학교에서는 대식품 잘 하는 곳도 참관시켰고 구사회의 쓰라림을 회고하는 대회도 열면서 간고분투하라고 교육했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용평 뒤산에 가서 가둑나무잎을 마대에 넣어 가득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걸 가루내여 수십번 우린 다음 떡을 만들었다. 웬걸 그게 뭐 떡이냐 쓰디쓴 약이였다. 배가 고픈지라 나와 동생들은 풍로불을 온 가운데 놓고 떡을 새까맣게 태워서 먹었다. 쓴맛과 탄맛이 범벅이 되어 먹기가 한결 나았다. 뽀얀 연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탄것엔 발암물질, 연기는 환경오염-무지했던게 다행이었다. 이럴 때면 아버지 그저 “쯧-쯧”하면서 우리를 외면했고 엄마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 세월에 엄마는 사시절 짬만 있으면 산이나 들로 나가 뭐든지 먹을 걸 찾느라 말 못할 고생을 다 겪었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엄마는 배가 불렀다”, “난 그걸 안먹는다” 하면서 우리들에게 넘겨준다. 부모는 사흘 굶어도 먹을 것이 있으면 자식들한테 준다는 말 후에야 알았다. 그래도 이런 고생은 다 둘째였다. 그 때 엄마는 쌀도둑으로 몰리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굶주림만 더한게 마음고생이라더라. 지난 세기 60년도의 겨울이었다. 옆집에 애 한명을 가진 중년부부가 이사해 왔다. 엄마는 한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면서 늘 진심으로 남의 일을 관심하고 걱정하셨다. 한번은 엄마를 따라 옆집에 놀러 나갔는데 마침 그 아줌마가 부지런히 입쌀을 주머니에 퍼넣고있었다. 이윽고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일이 있어 며칠간 집을 비우겠는데 이 쌀을 어디다 두면 좋겠슴둥?” 했다. 엄마는 한참 이리 저리 보더니 “그래도 부엌쪽에 숨겨 두면 좋겠구만”라고 했다. 쌀주머니는 그 자리에 옮겨졌고 그 아줌마는 엄마보고 집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걱정 마우.” 그런데 웬걸, 그 아줌마가 돌아오던 날 난리가 터졌다. 우리 집에도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 사이 도둑이 들어 그 아까운 쌀을 주머니채로 몽땅 들어갔단다. “아는 사람이 도둑”이라고 엄마는 하루밤새 쌀도둑으로 몰리웠다. 신흥대대 치보위원인 김××가 찾아와 빈정대며 엄마더러 솔직하게 탄백하란다. 천백번 아니라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버선목이면 뒤집어라도 보이겠건만 하늘도 무심했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온집안에 먹장구름이 쫙 꼈다. 선비인 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빤다. 엄마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여서는 종일 집에 누워서 한숨만 쉰다. 하루는 내가 집으로 오는데 동네 아줌마 둘이 수근대며 서있었다. “풍더분하게 생긴 분이 보기와 다르네. 사람속은 정말 모르겠당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집으로 막 뛰여와 엉엉 울어댔다. 그때 나를 한동안 지켜보던 엄마는 “후-”한숨을 내뿜었다. “도둑때는 어느 때건 벗는다더라, 걱정 말어라.” 겨울방학이 되자 오빠가 돌아왔다. 엄마가 도둑으로 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오빠는 성난 사자처럼 씩씩 거리더니 씽하니 옆집문을 열고 소리쳤다. “우리 집 빨래줄에 널어놓은 옷들을 당장 벗겨갑소. 우리가 또 도둑질하면 어쩔라구.” 우리 모두 속이 다 시원했다.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뻥긋하지 못했는데 오빠의 그 한마디에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움에 김치 가지러 나갔던 엄마가 빈바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되면서 낮은 소리로 겨우 말했다. “열지도 않은 김치 한독을 누가 몽땅 퍼갔다.” 엄마는 온돌에 올라와 털썩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떤 김치인데? 더구나 대식품해에 김치 한독이 어떤건데? 우리 모두 맥이 풀렸다. 배고프던 세월에 기나긴 겨울밤은 견디기 어려웠다. 밤참을 좋아하는 오빠는 저녁이면 배추김치 한포기씩 먹었다. 덕분에 우리도 더불어 끼워서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김치를 아껴 먹으면서 오빠를 기다리면서 새독은 열지도 않았었다.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웠다. 도둑때를 벗지 못했으니 내놓고 말도 못했다. 이듬해 봄의 어느날 길건너 집에 또 도둑이 들었다. 온동네가 떠들썩했다. 파출소도 동원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를 짚으면 어떡하지?) 겁이 더럭 났다. 맙시사, 원 세상에! 알고보니 도둑은 다름 아닌 그 아줌마였다. 엄마를 도둑으로 몰아붙힌 그 철면피한 여자였다.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도둑질하면서 그 물건들을 집안 곳곳에, 지어는 구들고래에까지 감추어 놓았단다. 쌀도둑은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고 김치도둑은 그 아줌마였다는 것이 천하에 밝혀졌다. 시루떡빛이 된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를 한 광주리나 떠이고 초점잃은 두눈을 멀정하게 뜨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 아줌마의 모양새는 정말 천하 꼴불견이었다. 도둑놈의 더러운 딱지를 달고도 참고 또 참으면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던 엄마의 일을 생각하니 억울함과 분노에 온몸이 전률했다. “너, 당장 이 동네를 떠나라.” “도둑이 도둑이야 한다더니 참…”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동네사람들이 분노하여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는 그 여자의 앞에 가서 소리쳤다. “도둑은 앞으로 잡으라 했다. 멍텅구리야. 오늘보니 오누이 똑같은 도둑이네.” “하하하…” 온동네가 들썽한다. 그날 나는 일자무식이지만 사리밝고 점잖은 우리 엄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자식들의 마음 상할라 억울함도 묵묵히 참아가면서 속으로 눈물 떨구신 위대한 우리 엄마! 지금도 엄마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 어두웠던 그림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난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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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1
  • 취미생활 그리고 사는 재미
    ■ 김철균 사람의 취미생활이란 처음부터 재미가 있어 목적성이 있게 하는 것이 아주 적겠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든다. 특히 나의 경우가 그렇다는 생각이다. 올해 내 나이 막 세면 58살이 된다. 이렇다면 나이가 많을까? 하긴 많은 사람에 비하면 적을 것이고 적은사람에 비하면 많을 것이고 그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한가지 분명 밝힐 것은 나이가 이 정도에 이르게 됨에 따라 동년배들에 비해 나이만큼 나의 취미생활도 몇가지 더 된다고 자랑하고 싶기도 하다. “고추장 맛보기”라고나 할까? 나의 취미생활을 보면 “풍부하다”고 하기까지엔 미치기 어려울 것이나 여하튼 여러 가지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선 사내로 생겨서 앞치마를 두르기 좋아한다. 여인들 처럼 주방일을 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니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할 때가 많으며 또 하다 보니 재간도 어느 정도 늘기도 했다. 다음 나는 동관악기 트럼베트(小號)도 어느 정도 불 줄 안다. 단독으로 불 줄 알고 제대로 연주할 수있는 곡이 수십 가지가 되니 불 줄 안다고 해도 될 것이며 또 “콩나물”을 잔뜩 그린 악보를 볼 줄 아니 남한테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나이 50살을 넘기면서 나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 즉 페물로 공예품(일명 : 소제작)이란 것을 만드는 취미까지 갖게 되였다. 왜서인가구? 모두가 그렇게 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외 나는 어릴적 부터 그림 그리기에 취미가 있었으며 또 나 자신이 기자이고 작가이니 글쓰는 취미가 있다는 것은 두말이면 잔소리 아닐까? 아니 기자는 나의 직업이니 싫어도 해야 하는 “밥줄”이니 거기에 뭐 취미고 뭐고 이름 붙일 것이 못된다. 이러고 보니 아마 일반인들한테 있는 취미생활 중 머리깎는 재간과 자동차를 모는 재간외엔 모르는 것이 별반 없는 것 같다. 참,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몰 줄은 알았어야 하는 건데… …… 내가 이렇듯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 진짜 머리가 좋고 손재간도 있는줄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렇고 또 반면으로 말하면 내가 남이 하는 노릇이면 다해보고 싶어하는 이른바 “다욕한 인간”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둘 다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취미생활 중 글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외에는 그 거개가 생활의 환경에 의해 그렇고 그렇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트럼베트를 배우게 된 데는 아래와 같은 사연이 있었다. 일찍 소학교시절에 나는 학교예술클럽에서 무용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초중에 올라와서도 자연히 학교예술단체의 무용대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소학교시절까지만도 키가 썩썩 잘 크기만 하던 내가 초중부터는 유전요소 때문에서인지 키가 그냥 고 모양새였다. 초중 2학년이 되자 무용대의 여자애들보다도 주먹 하나는 더 작은 키가 됐다. 그러니더는 무용대에서 더는 춤을 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술대에서 나갈 수 없어 차례진 것이 그래도 배우기쉽다는 동관악기인 트럼베트(초중 2학년이 되어 바이올린이나 손풍금같은 악기를 배우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음)였다. 하지만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온 동네가 손가락질을 하며 욕할 정도로 요란스레 트럼베트를 불어대면서 연습했기에 얼마 안 있어 선전대 악기조의 2번 트럼베트 리스트로 될 수 있었다. 다음 요리만들기 취미 역시 다음과 같은 에피소트가 있었다. 그것은 1991년 당시 내가 선원이 되어 한국선박에 승선했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원래 갑판부 말단부원이었는데 어느날 주방에서 싸롱뽀이로 근무하던 이상 친구(역시 중국선원임)가 “나이가 많아 갖고 주방에서 심부름같은 일을 도무지못하겠노라”고 한사코 나눕자 선장은 키가 작고 나이도 그닥 많지 않은 나한테 싸롱뽀이직을 마구 떠맡기는 것이었다.당시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한 갑판부 작업은 시간은 짧았지만 체력적 요구가 몹시 높았기에 나처럼 왜소한 체질에는 맞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다면 짜증 나고 시간도 지루하지만 그래도 나같은 놈이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주방근무인 것 같았다. 한편 나는 질긴 놈이었다. 좋게 말하면 뭐나 한다고 하면 최선을 다하는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서일가 나는 싸롱뽀이직 6개월만에 귀국한 한국주방장 후임으로 주방장직에 진급했고 기타 중국선원들보다 보너스 100달러 더 받는 선원이 됐다. 그랬다. 우리 선박에서는 주방장, 갑판장 그리고 조기장 이 3명은 동급이었다. 그 외 나의 취미생활을 말하자면 그림 그리기, 퀴즈문제만들기와 그 것을 풀기, 또한 바구니 엮기와 물고기 그물 뜨기 등으로 여러 가지이지만 그 것을 구구히 다 소개할 수가 없다. 단, 내 나이 50살이 넘어 배운 취미 페물로 공예품 만들기는 꼭 소개해야 할 것 같다. 나는 42살에 늦동이 딸을 봤다. 아들인 큰 애와 15살 차이니까 늦동이라도 한참은 늦동인 셈이다. 그러니 그 딸이 소학교에 붙게 되니 내 나이가 50살이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 붙으니 학교에서는 매 학기마다 애들한테 소제작이란 것을 만들어 오라고 강요해댔다. 그런데 이걸 애들이 만든다구?! 천만에다. 다 학부모들이 만들어 갖고 학교에 보내는 것에 불과했다. 처음에나는 딸애가 그것을 만들도록 여러모로 유도했다. 하지만 딸애는 공부는 매우 잘했으나 그런 것을 만드는데는 아주 둔재였다. 매 학기마다 그 것을 바치지 못해 선생님한테서 꾸지람을 들었었다. 나이 들어서 본 딸, 나는 딸애가 선생님 한테서 꾸지람을 듣는 것이 기분 나빴다. 그래서 그런 소제작을 잘한다는 학부모한테 만들어 달라고 몇번 청들었다가번마다 거절당하자 나한테는 일종 오기가 생겼다. 바로 내가 직접 만들어 본다는 것, 그렇게 무작정 마음먹고 달라붙자 못할 것도 없었다. 아니, 내가 정성들여 만들어 바치니 딸애가 내놓은 소제작 “민속촌의 물레방아”가 뭐 동북 3성 소제작 콩크르에서 3등상을 받았다나?… 현재 그 딸애는 초중 3학년, 이제와서 내가 딸애한테 더는 그런 소제작을 만들어 “제공”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씩 무료하거나 TV를 볼 때면 그런 것을 만든다. 만들어서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친구들한테나 기타 교류가 잦은 지도일군들한테 선물로 주기도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은 다른 그 어떤 예물을 받기보다 더 좋아한다. 또한 이렇게 머리도 쉬울 겸 TV시청을하면서 이런 공예품을 만들다 보면 골초였던 내가 담배를 적게 피우게 된다. 아니, 그 것을 만들 때면 거의 금연시간으로 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만들면서 머리를 쓰면 치매에 적게 걸린다나? 여하튼 건강에도 좋고 무료함도 달래고 특히 적은 원가(비행기 하나 제작하는데 5위안도 들지 않음)로 남한테 선물해 큰 보람을 느끼니 어찌보면 일거삼득인 것 같기도 하다. 한편 나한테 이렇듯 여러 가지 취미생활이 있지만 내가 A급으로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요리 만들기에서도 그렇고, 악기를 다룸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또한 그림 그리기와 공예품 만들기 등등을 아무리 따져 봐도 내가 어느 것을 내놓고 수준급이라고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재미를 붙이다 보면 내가 만든 것이 아무리 하찮아도 보람이 있게 되며 또한 그 것이 국가급상 같은 것을 받은 것보다 더 기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총적으로 뭘 바라고 하는 취미생활이 아니니까 그냥 들놀이에 가서는 트럼베트를 불고, 회식장소에 가서는 사시미나 소고기 꽃등심 불고기나 만들어 선보이고, 또 적적할 때에는 TV를 보면서 공예품이나 말들고 하는 걸로 만족이다. 그렇다. 그냥 재미이니까. 또한 취미생활이니까. 필자가 만든 부분적 공예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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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8
  • “배놈”의 세계
    ■ 김철균 1992년 3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항에서 승선할 때는 5명, 1994년 9월,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에서 하선할시엔 3명… 한명의 친구를 진눈까비 흩날리는 남대서양의 차디찬 바다에 수장하고 또 한명의 친구를 태평양의 군도 - 싸이판의 유치장에 남긴채 환고향하는 학송이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1 부산항구, 제2부두 무역선이 오고 가는 배길 따라 원양송출선 “프리오이워니오”호가 고동을 뽑으며 부두에 닿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부산, 꿈결에도 안기고 싶던 조상의 산천이다. 그 시각 중국 조선족선원인 학송이는 이름할 수 없는 정감세계에 사로 잡혔다. 고향인 경남 울산에도 가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아버지를 대신해 이 땅을 밟는다는 행운이랄까? 그의 눈시울은 어느 덧 축축히 젖어 들었다. 학송이 외 기타 조선족선원들은 고국이고 뭐고 그닥 흥미가 없어했다. 흉터많은 얼굴에 항상 성난 표정인 “안도망치” - 덕수, 담배를 꼬나물면 한숨만 내쉬는 정택이와 용철이 그리고 총각인 봉남이, 그중 학송이와 함께 외출하고 싶어하는 친구는 용철이였는데 목적은 집에서 갖고 온 우황청심환을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입항절차가 완료되고 모두들 샤와까지 마치자 1항사로부터 중국선원들만 식당홀에 모이라는 통지가 방송됐다. 1항사의 통지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교포친구들, 미안하군요. 회사본부로부터 교포선원들을 상육시키지 말라는 지시가 있습니다. 아마 아르헨티나 탈출사건 때문에 이런 조치가 내려진 모양입니다.” 아르헨티나 탈출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중국선원 4명을 고용해쓰는 기름탕크선 한척이 아르헨티나의 어느한 부두에 입항, 그 이튿날 저녁 그 배의 중국선원들은 악덕 한국선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돈도 더 벌기 위해 선박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헌데 머리가 그토록 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탈출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글쎄 탈출한다는 친구들이 그까짓 옷과 비누와 라면따위를 놓은 보따리를 둘처메고 항구정문을 빠져 나왔으니 의심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행처는 야간 택시기사들과 연락하니 인차 드러났다. 결국 그들은 멀리도 가지 못한 채 어느 한 창녀촌에서 덜미를 잡혔다. 그런 전례가 있은 즉 회사에서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서 중국선원들이 상육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육금지에 애석해하는 선원은 2명, 한명은 고국정에 울고 있는 학송이었고 다른 한명은 우황청심환을 팔지 못해 속이 탄 용철이었다. 2 “자넨 인격도 없는 인간인가? 왜 그까짓 한국옷 때문에 치사하게 놀아! 그들이 싸구려옷들을 주면서 우릴 거지취급한단 말이야. 정신차려 이 친구야.” “자네는 너무 자존심이 강해. 약하면 굽어들기 마련 아니야? 약소민족한테는 외교도 없다고 했어.” 한국옷을 놓고 바다에 처넣으러느니 못그러겠다느니 싱갱이질하는 학송이와 용철이, 그 광경을 차마 그냥 볼 수 없어 그 옷가지들을 확 나꿔채여 바다에 날려 보내는 덕수, 학송이한테는 말대꾸도 하고 제법 성낼줄도 알지만 덕수앞에서는 찍소리 한번 못하는 용철이다. 아니, 덕수란 이 “안도망치”앞에서는 감판장 김만길마저도 은근히 두러워 하는 편이었다. 포클랜드해상에서 전재작업을 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창에서 뒤가 나오도록 긴장히 일하는데 덕수가 진짜 뒤를 보겠다고 간청했다. 이에 반신반의하면서 응낙하지 않는 갑판장. “아이구, 갑판장님, 진짜 참을 수 없수다. 정 안되면 여기서 바지를 벗게 되겠는걸요.” “그래 이 새끼야, 꾀부리는게 아니면 네 엉뎅이 한번 구경하자꾸나.” 그러자 덕수가 정말 바지를 벗더니 똥 한무더기나 내 갈길줄리야. 순간 역한 구린내가 공기가 희박한 어창안에서 지독하게 풍겼다. 괄시당했다고 느낀 갑판장은 성이 나서 길길이 뛰였다. 거기에 동조하여 덕수한테 물매를 들이대는 한국선원들, “미욱하기로 돼지같다”느니, “인간성없는 빨갱이”라느니 하며 별의별 욕설이 다 튀여 나왔다. 하지만 이에 굴복할 덕수가 아니었다. 그가 물매속을 헤치고 고기박스더미위로 뛰쳐올라 갔을 때는 이미 옷도리를 팽개친 뒤였다. “이 쥐불알같은 남조선 새끼들아, 내몸의 칼자리만 봐라. 언제 네깐놈들을 무서워한 나였더냐! 다 함께 덤벼들어봐라, 너 갑판장 네놈부터 내 손에 죽어봐라!” 덕수가 쇠갈구리 하나를 주어들고 생사결단하니 뒤걸음치는 건 오히려 갑판장과 한국선원들이었다. “저 놈 완전히 미치고 돌아 버렸어. 관두자, 똥이 무서워 피한다더냐, 더러워 피하는거지.”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갑판장이 덕수를 대하는 품이 어딘가 달라졌다. 덕수가 좀 아프다고나 하면 “응, 그래? 오전에 약 먹고 푹 쉬렴” 하기가 일쑤였고 술처먹고 근무해도 머리를 돌리며 모르는체 하기만 했다. 덕수가 이렇게 무법분자인가 하면 용철이는 그 정반대였다. 그는 말그대로 돈이라면 인격도 없는 인간이었다. 예하면 자기보다 손 아래인 한국선원들의 구두를 닦거나 빨래를 하여 풋돈벌이를 하는것이었다. 3 “배놈”으로 생겨 오입 한번 못해보면 평생후회라는 말은 선원들의 입에 오래전부터 굳어진 말이다. 그러건 말건 학송이는 승선한지 1년이 다 되도록 창녀촌출입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이성이 싫어났고 풍류세계와 담을 쌓은건 결코 아니었다. 네델란드 항구도시 로톨담, 지구촌의 수많은 항구에 가닿았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던 학송이가 로톨담에 입항한 그날 저녁 선참으로 외출하자고 했다. 그 것도 유럽미녀들만 있다는 “해상천국”이란 창녀촌에 가서 몸이나 풀자고 했다. 학송이한테서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학송이와 동행한 사람은 용철이와 덕수였다. 그날 밤, 그들을 실은 택시는 항구주변을 요리조리 돈 뒤 다시 바닷가로 뻗은 방파제길로 몇분간 달리더니 바다가운데의 한 호화로운 건물앞에서 멈춰섰다. “하와이유, 굳나인(인사말).” 계단앞에서 싸롱뽀이의 안내를 받으며 그들은 3층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그들이 좌석에 둘러앉자 레지 한명이 메뉴안내서를 가져왔고 뒤따라 마담이 창녀들의 사진이 박힌 스크랩을 갖다 보이며 영어로 뭐라고 씨부렁댔다. 사달은 여기서 생겼다. 나름대로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흥정하는 용철이. “아임 차이나맨 스몰머니 원 한드레딸라 오케이?(중국인 돼서 돈이 적으니 100달러면 되는가?)” 엉터리 영어구사였으나 마담은 알아듣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차이나맨? 노, 노, 스몰머니 노터치 우먼!(중국인?돈이 적으면 아가씰 못다쳐!)” 마담은 가차없이 축객령을 내렸다. 옆에서 웃고 떠들며 비꼬는 양코배기들과 일본인들… 그날 밤 선박으로 돌아온 학송이는 정신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노래를 불렀다. … 돌아 보면 그다지도 먼길도 아닌데/ 저 멀리 솟는 해는 날보고 웃네/ 취한 김에 껄걸 웃지만 웃는 눈에 맺힌 눈물은/ 아 뜨거운 눈물 사나이의 눈물… 아, 돈! 그 돈이 그다지도 중하다더냐?… 이튿날 저녁 학송이는 홀로 택시를 타고 “해상천국”으로 향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은 뒤 미구하여 각양각색의 피부를 가진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그 속에는 본선의 한국사관 몇명도 끼어 있었다. 이 때라 생각한 학송이는 마담을 불러 제일 몸값 높은 아가씨를 자기 옆에 앉게 했다. 두시간쯤 흐른 뒤, 아가씨의 팔을 끼고 다시 나이트클럽 공개홀에 나타난 학송이의 모습, 한국인들은 물론 내노라던 일본인들마저 눈알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아가씨의 몸값은 2000딸라, 한국인 항해사의 한달 급여와 맞먹는 어마어마란 액수였다. 4 그들 일행이 “프리오이워니오”호에 승선하여 세상이 좁다하게 주름잡아 온지도 어언간 1년 6개월, 그 사이 조선족선원 거개가 정도부동하게 “중국똥포”란 딱지를 뜯을만큼 근사한 한국인으로 닮아갔는데 말씨부터 중국교포의 말씨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중국에서 대학과정을 마친 학송이는 물론 정택이, 봉남이 그리고 “안도망치”덕수까지도 제법 선박생활에 잘 적응했다. 하지만 해와 달이 바뀌도록 고약한 습관을 고치지 못한 인간은 용철이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거나 한턱 술 사야 돈주머니를 풀어 놓는다거나, 그외 1년 넘도록 고향서 갖고온 엽초를 피운다거나 하는 걸 보면 같은 중국선원들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깊은 밤, 갈매기도 지친듯 사라졌고 사위를 둘러봐도 어둠이 깔린 바다. 이 시각 “프리오이워니오”호는 남대서양의 차디찬 파도를 헤가르며 포클랜드군도를 바라고 배길을 재촉했다. 바로 이 때 웬 검은 몸뚱이 하나가 갑판에 나타나더니 살금살금 기름저장고 입구쪽으로 다가갔다. 용철이었다. 약 20분간 스파나로 싱갱이질한 끝에 뚜겅을 열어제친 그는 다시 한번 사위를 둘러보고는 그 속으로 사라졌다. 이 기름저장고는 새기름을 넣기 위해 낮에 반나마 청리하다가 그만 둔 것이었다. 기름저장고 청리작업이란 공기가 희박한데다 기름 자체의 독성이 강하기에 일반적으로 선박에서는 방독면을 쓰고서야 이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각 남몰래 기여드는 용철이한테 방독면이 있을지 만무했다. 낮에 작업할 때 한국인 3기사 김형모씨가 부주의로 손목시계를 기름깡치속에 떨어뜨렸는데 용철이는 그것이 탐나서였다. 이탈리아 로마제품인 그 시계는 순금이라 했다. 금시계란 말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용철이는 미처 모든걸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7시경, 짙은 안개속을 헤치며 배가 계속 항행하는 가운데 갑판으로 조깅을 나갔던 기관장이 급기야 소리치며 식당에 들어섰다. “밤새 누군가 기름저장고 뚜껑을 열었어.” 선원들이 웬일이냐고 갑판으로 우르르 몰려가보니 열어 제친 뚜껑우에는 스파나 두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선원 3명이 방독면을 쓰고 그 안에 들어가 이미 숨져 굳어버린 용철이를 찾아낸 것은 그 때로부터 10여분 후였다. 용철이의 두손에는 손목시계와 그 때까지 켜진채로인 플랫시(손전등)가 쥐여져 있었다. “쯧쯧, 그까짓 시계가 얼마나 욕심이 났으면… 가난이 원쑤야.” 선장과 기관장 지어는 3기사마저 죽은 이의 소행을 너그럽게 용서해 줬으나 학송이한테는 그 말이 매를 들이대는 것보다 더 옹이 막히는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값없는 죽음을 당했지만 선내에서는 고인과 그 가정을 위해 의연금을 모았고 장례까지 치러 주기로 했다. 장례식을 하던 날, 흐리터분한 하늘에서는 진눈까비가 지궂게 흩날렸다. 항행을 멈춘 선박이 한바다에 정박한 가운데 장례식은 기독교신자인 선장의 설교로부터 시작됐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 불쌍한 인간을 끝까지 구하지 못한 죄많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나이다. 너그럽고 자애로운 하나님께서 부디 자선을 베푸시여 가는 이는 눈을 감게 하고 살아 남은 우리들은 죄를 피하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장례식은 별다른 절차없이 간단히 진행되었다. 선장으로부터 술을 붓고 절을 한 뒤 크레인을 리용해 고인을 수장하기로 되어 있었다. 죽을 때까지 돈과 재물을 탐내다가 숨진 현대의 “수전노” - 용철이, 카톤박스안에 포장된 그의 시신이 크레인에 의해 하늘 반공중에 떴을 때 브릿치에서는 세번 고동을 울려 애도를 표했다. 가련한 목숨, 가도 이렇게 가다니… 평소엔 그토록 괘씸한 용철이었으나 무정한 현실앞에서는 학송이도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인의 시신이 “철렁”하고 바다에 던져지자 그 것은 인차 파도속에 휘말려 들었다. 그 것이 다시 물우에 나타났을 때는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되어 이리저리 표류했다. 그것도 잠간뿐, 미구하여 그 것이 끝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든 것은 언제 그랬냐 싶게 원상태로 돌아왔고 선박은 다시 항행을 계속했다. 5 용철이가 죽은 뒤 겨우 심리균형을 찾고 안정됐던 덕수의 야성이 되살아 날 줄이야. 그 역시 용철이를 곱게 본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덕 한국선원들이 용철이의 행위를 거론하면서 어진 정택이와 봉남이를 기시할 때면 가차없이 주먹맛을 보이군 했다. 이런 반상적 행위는 설사 그가 한국선원이라 해도 강제귀국범주에 속했겠으나 웬일인지 선내에서는 그한테 아무런 징계도 주지 않았다. 아마 오래잖아 근무만기가 되는데다 특히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운 선상에서 징계위원회라는 것도 그를 건드리기 싫어 내버려둔 모양이었다. 지중해와 수에즈운하 그리고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에 들어선 “프리오이워니오”호는 그 시각 싸이판을 바라고 항행하고 있었다. 싸이판, 일본군 점령지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학도병으로 말아 먹었고, 그 뒤엔 동맹군의 승리로 미국땅이 된 군도이다. 입항하던 날 저녁, 중국선원 4명은 집단적으로 외출길에 올랐다. 이제 싸이판을 떠나 다음 항구에 들어가면 근무만기가 될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야자수 우거지고 해풍이 가볍게 얼굴을 희롱하는 싸이판의 야경은 황홀했다. 에이젠트가 그들한테 알선해준 곳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모 디스코바였다. 깊은 밤이 아니어서인지 바홀안은 퍼그나 조용한 편이었다. 한국인 2남 2녀가 다정하게 소곤대고 있는외 필리핀선원 몇명이 들어오더니 한쪽 구석을 차지했다. 바의 댄서아가씨들은 일색으로 한국말에 영어가 짭뽕인 동양인아가씨들이었다. 오래간만에 상종하게 될 동질감을 느끼는 아가씨들이다. 일찍 한국이 가난하던 20여년전 일본선박에서 근무하던 반도의 마도로스들은 기시와 천대를 받을 때마다 섬나라 계집들을 정복하는 것으로 그 스트레스를 풀었다 한다. 하다면 오늘 학송이네도 반도계집들의 배를 타보는 것으로 지겹고 짜증나는 “배놈”생활에 종지부 찍는 것이 목적이었다. 학송이가 머리를 끄덕이자 총각인 봉남이가 담도 크게 제일 이쁜 것들로 4명 골라잡고 끌고 왔다. 사내들한테 안기다 싶이 몸을 밀착시킨 여인들. “아저씨들 참 멋져요. 이 아저씬(덕수) 꼭 마치 야쿠자같아도 진짜 사내다와요.” “임잔 숫총각인가베? 이것보지 이 누님이 오늘밤 사내로 만들어줄가베. 마이프런드 사랑해.” 세계를 메주밟듯 해온 “배놈”들보다도 한술씩 더 떳다. 술을 붓고 떠드는 혼탁한 무드속에 화제는 또다시 덕수한테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덕수의 배가 크고 히프와 가슴도 커서 탐난다느니 하며 찧고 까불어댔다. 이에 흥이 나서 제딴에 우쭐대는 덕수. “나 말이야, 못살고 가난한 중국서 왔지만 세상서 제일 멋진 마도로스란 말이야.” 그 말에 아가씨들의 눈이 화등잔처럼 됐다, “쳇, 똥포들이구만. 그러게 어딘가 표가 난다 했지. 우리 이걸로 끝내는게 좋잖어? 얘들아, 자 일어들 나자.” 이렇게 자리를 뜨던 중 한 아가씨가 엉겁결에 “참, 썅디메이야”라고 지껄이였다. “썅디메이(想得美)”란 한마디에 학송이는 문득 짚이는바 있었다. “이 계집년들아, 흉내를 낼터면 근사해야지. 썅디메이가 다 뭐야? 네 년들이야말로 진짜 중국똥포년들이구나.” “뭐야?” 죄꼬만 눈에 살기를 내뿜는 덕수, 싸이판이란 이 낯선 땅에서 같은 조선족년들한테서까지 “똥포”취급을 받다니 “펑”하는 맥주병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한 아가씨의 머리에서 선지피가 콸콸 쏟아졌다. 이지를 잃고 칼날처럼 예리한 깨진 맥주병을 계속 휘둘어대는 덕수, 한국인 남자 둘이 말리려다가 둘다 덕수의 발길에 채이어 저만치 뿌리워 나가 뒹굴었다. 홀안은 삽시에 수라장이 되었다. 학송이는 어떡하나 덕수를 구슬려 피하려 했으나 녀석이 어찌나 기운이 센지 도무지 용빼는 수가 없었다. 어느 결에 경보를 울리며 들이닥친 경찰차, 사태가 이 지경이 됐는데도 덕수는 흑인경찰 2명이나 때려눕혔다. 그날 밤 그들 4명은 모두 경찰들한테 연행됐다. 2일 후 학송이,봉남이와 정택이는 풀려 나왔으나 덕수만은 예외였다. 맥주병에 얻어터진 아가씨가 출혈이 심해 병원에서 숨진데다 녀석이 경찰까지 때려 눕혔으니 옥살이를 면치 못하게 됐다. 배가 출항하던 날 덕수는 2명의 경찰한테 이끌려 부두까지 왔다. 죄수복에 수쇄까지 찼건만 겉으로는 여전히 개잡은 포수마냥 우쭐대는 덕수. “학송형,나 한놈의 옥살이로 우리의 본때를 보여 줬으니 그래도 통쾌해 하하하…” 그러면서도 눈확을 적시는 억대우같은 사내의 눈물, 그 역시 참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닻줄을 거두어 들인 “프리오이워니오”호가 육지와 떨어지는 순간 덕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땅바닥에 꿇어 앉으면서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함께 가자. 왜 나 혼자를 두고 너희들만 가는거냐?! 엉엉… 이 괘씸한 녀석들아!…” 완전히 실성한 덕수, 그한테 무슨 위안을 해줘야 할지 학송이는 도무지 적절한 말구절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부두가 멀어지고 덕수의 모습이 하나의 점으로 가물거리다가 점차 사라지자 학송이는 재차 용철이를 보낼 때의 그 이상야릇한 감정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 × × 1992년 3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항에서 승선할 때는 5명, 1994년 9월,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에서 하선할시엔 3명… 한 친구를 진눈까비 흩날리는 남대서양의 차디찬 바다에 수장하고 또 한 친구를 태평양의 군도 - 싸이판의 유치장에 남긴채 환고향하는 학송이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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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8
  • 심양총영사관 대련출장소 문제점
    중국 심양총영사관 대련출장소 민원업무처리방법, 민원인들 ‘고개 갸웃’ [동포투데이] 법무부의 외국국적 동포정책제도 개선으로 지난 4월1일부터, 현재 만 55세 이상 60세 미만인 동포, 미성년자, 제조업 등 근무가족 등에게 제한적으로 발급되던 단기사증이 만 60세 미만인 외국국적동포에 대해 3년간 유효한 단기방문(C-3, 90일) 복수사증으로 확대 시행 됐다. 따라서 그동안 비자취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국동포들이 비자신청을 하기위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해당 각 영사관으로 몰리며( 정책 공지이후 부터 이미 여행사들이 돈을 받고 모집한 인원들),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민원인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폭주하는 신청인으로 중국 주재 대한민국 심양총영사관(총영사 조백상)은 ‘3년 복수사증’을 지금 접수하면 올해 10월쯤에나 받을 수 있으며, 다른 영사관들도 빨라야 7월에나 비자를 받을 수 있다니 입장이 같기는 마찬가지다. 영사업무도 업무이지만 많은 어려운 사정들을 갖고 있는 동포들은 여간 번거롭고 불편한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와중에 대련출장소(총영사 백범흠)의 사증과 관련한 민원업무처리 방식이 잘못됐다는 민원이 있어 비자신청 동포들의 어려움을 가중 시키고 있다. 대련출장소는 인력부족으로 하루에 지정여행사 3곳에 20명씩밖에 접수를 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다음주부터 지정여행사 3곳을통해 30명씩 비자를 접수하라는고 통지를 내린상태라고 전했다. 출장소에 직접접수나 예약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만 가능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무조건 지정여행사를 통해 접수하라는 안내를 하고 있어 민원인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지정여행사와 그 아래 인원모집 하청여행사들이 비자를 빨리 빼준다는 조건으로 적게는 3000위안에서 10,000위안을 넘게 받고 있다는것이다.실제로 여행사들의 말을 믿고 그들이 요구한 금액을 지불한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는 것이 문제이다. 법무부의 세부적인 정책이 공지된 직후부터 여행사들이 일정금액을 받고 이미 많은 사람들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란이 생기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다. 대련출장소는 대련뿐만이 아니라 관할 이외 지역까지 접수를 받고 있으며, 대련내에 여행사 3곳을 지정하여 각 여행사마다 하루 20~30명씩 접수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일반 비 지정여행사들까지 현지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광고물을 통하여 순서와 상관없이 빠른 시일 내에 비자를 발급받게 해줄 수 있다는 말들로 현혹하고 있는 등, 빨리 비자를 발급받고 싶어 하는 동포들의 금전적 요구로 경제적 부담을 가중 시키고 있다. 대련출장소는 “부족한 인력으로 시행초기 폭주하는 민원을 감당하기 어려워 모든 민원인이 만족할 수 있는 업무를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지정여행사도 불러 주의사항을 주지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며, “시행초기라 몰리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업무가 안정되면서 해결될 일이다.”라며 "혹시 정책이 바뀌지 않을까 불안해서 일시 몰리는 현상이니 시간을 가지고 접수를 해주었으면 한다" 라는 문제 해결하고는 거리가 먼 대답뿐이였다. 정책 시행 초기의 혼란은 어느 정도 이해는 하나, 빠르고 공정한 업무로 오해를 불식시키고 민원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이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의 입장이다.정책이 공지된 이후부터 일정금액을 받고 이미 많은 인원을 모집해 놓았기 때문에 정책발표를 듣고 접수하는 사람들은 접수할 기회가 전혀 없는 상황을 영사관측은 알아야 한다. 또한 대련출장소는 인력부족을 말하지 말고, 업무 범위를 관할 지역으로 국한 시켜 업무의 충실도를 높이고, 지정여행사의 영업행위의 감독을 강화하고 대한민국의 영사로서 각종 비리의혹과 지정여행사와의 검은연결고리 의혹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이다. 재외공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정직,성실,공정,친절하게 업무를 수행하여 국가와 국민들에게 불명예스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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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6
  • [수기] 인생스케치
    ■ 이진숙 새의 족속들을 보면 거개가 수컷이 암컷보다 더 멋지게 생겼다 한다. 붉은 볏을 머리에 이고 갈구리발에 머리를 잔득 쳐들고 멋지게 휘여진 꼬리를 흔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씩씩하게 걷는 수탉의 도고한 모습은 실로 오만한 왕자를 방불케 한다. “문, 무, 용, 인, 신(文,武,勇,仁,信)” 5덕을 갖췄다는 수탉은 12띠 중에서 유일하게 날수 있는 동물이다. 라이벌과 맞서 용감하게 싸워 “용덕”이라는데 닭띠생인 내가 라이벌로 보였는지 어릴 때에 죽도록 혼난 적이 있다. 지금도 장거리나 농촌 마을에 갔다가 덩치가 큰 수탉을 보면 속이 한줌만 해서 슬그머니 피한다. 대약진으로 한창 들끓던 그 연대- 바로 1958년에 나는 초중에 붙었다. 학교들마다 근공검학이랍시고 별의별 일들을 다 했다. 우리 학급에서는 100여마리가 잘되는 오리와 닭을 키웠다. 수탉 한마리가 적어도 10여마리의 암탉을 거느린다더니 그 닭무리속에 얼마 안되는 수탉들이지만 우리 간담을 서늘케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때 우리는 둘씩 한개조가 되어 번갈아 당번을 했다. 우리의 임무는 아침 일찍 밥도 먹지 못한채 닭과 오리를 밖으로 내몰고 우리청소를 한 다음 배추따위를 짓쪼아 물에 퍼지운 두병(콩찌꺼기)에 섞어 아침식사를 시키는 것, 그리고 업간체조시간, 점심시간, 하학후에 시간을 맞춰 모이를 주고 나중에 닭과 오리를 잠자리에 몰아넣으면 당번 끝이다. 어느 당번날 아침, 나는 대야에 모이를 담아들고 허리를 굽혀 좁고 기다란 나무구유에다 손으로 모이를 쭉 널어놓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드는 순간, 글쎄 수탉이란 놈이 새노랗고 똥그란 눈을 부릅뜨고 나의 팔을 탁 쫏는 것이었다. “어구-엄마” 나는 숨이 떨어지는 소리를 질렀다. 긴박한 순간에 여자애들은 왜 남자애들과 달리 하나같이 엄마를 부르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이대야를 내 동댕이치고 요리조리 수탉을 피했다. 웬걸 , 그 놈은 한사코 따라와 길길이 뛰면서 되는대로 나를 쪼아 놓았다. 키가 작은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소리 지르며 울안에서 뱅뱅 돌아쳤다. 그럴수록 사납게 달려드는 수탉이다. 끝내는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 안에서 청소하던 당번애가 달려나와 나무꼬쟁이를 휘둘러서야 짐승과 사람전쟁은 끝났다. 지금 같으면 혈압이 터졌을거다. 제길할, 내가 닭이라고 착각했나 봐, 사람도 하루에 한번씩은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더니 요 놈의 수탉도 정신상태가 빵점인 모양이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쓱 닦고는 나무꼬챙이를 들고 “복수”에 나섰다. 이게 뭐냐? 이번엔 딴놈 이 등 뒤에서 “꼬-꼬-꼬”하면서 야단을 부린다. 와-정말 개판이다. 그날 저녁 나는 자면서도 소리치고 놀라고 식은 땀을 흘리고 했다. 정말이지 닭우리에 “새 친구”가 오면 밤새 쪼아서 피투성이로 만든다는 그 “닭의 텃세”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혹시 덩치가 큰 수탉을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런데 늙으막에 또 재수없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오후, 외손자를 데리고 함께 교문을 나섰다. 금방 골목길에 꺾어 들었는데 갑자기 난데없는 수탉 한마리가 우쭐우쭐 걸어오고 있었다. 옛날 나를 혼내던 그 수탉과 아주 흡사한 놈이다.(에구,북경에두 수탉이 활개치며 다니다니…) 나는 한 손에 손자의 책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애 손목을 잡고 다짜고짜 뛰었다. “얘, 닭이 너를 문다.” 골목길을 벗어나자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 그러자 손자 놈은 나를 쳐다 보더니 “닭이 어떻게 물어, 쫏겠지”라며 비양댄다. 사실 난 그때 “쫏는다”는 말을 한어로 할줄 몰랐기 때문이다. 해마다 딸집에 가서 몇 달씩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번번이 발음이 틀리고 음조가 틀려 수없이 애하테 몰렸는데 오늘 또 당한 셈이다. (후-쬐꼬만 애한테까지 늘 훈시받다니…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긴 한족사위와 대화를 잘 나눌 수 없는 것이 내게는 큰 고민이고 스트레스다. 밥상에서 이야기 꽃을 피울 때도 반벙어리상을 해야 했고 사위와 말을 건네기도 조심스럽다. 한족말을 잘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되는 순감이 많다. 내게는 큰 후회였다. 정말이지 한어말로 제생각도 쨩 소리나게 표달못하니 이보다 더한 바보가 어디에 있을소냐?! 누군가 인생은 후회의 누적이라 했다. 틀리고 후회하고 하지 않아 후회하고… 먼저 미련하게 처사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크고 작은 모든것, 미련은 먼저 나고 슬기는 나중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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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 '감독'의 탈을 쓴 ‘협잡’, 이제 그만!
    기자는 평범하면서도 특수한 직업입니다. 기자는 일반 근로자이면서도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강철같은 어깨에 도의를 떠메고’ ‘묘한 솜씨로 글을 써내’ 대중의 신뢰를 받고 언론인의 숭고한 명예를 수립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자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이용해 협잡을 일삼고 허위 보도를 만들어 내면서 부당하게 돈을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기자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사회 기풍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2013년 8월의 어느날, 산시성 빈현의 모 진에 기자라고 자칭하는 사람 둘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현지 정부를 찾아 최근 진에서 취재한 내용을 확인하러 왔다고 했습니다.두 사람가운데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사람이 기자증을 내보였는데 신분은 ‘중국특산보’의 기자이고 이름은 왕밍저였습니다. 좀 더 젊어보이는 사람의 이름이 안옌지였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나서 두 사람은 진의 간부에게 ‘중앙언론사 원고 발송 고지함’이라는 붉은색 문서명을 가진 서류를 건네주었습니다. 서류 뒤쪽에는 이 진에 관한 보도가 첨부되었는데 페이지마다 하단에 이 ‘함’은 국가재정부, 농업부, 산시성 인민정부 등의 기관에 송달될 것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이 이상한 요구를 제기해왔습니다. 왕밍저는 “당신이 아주 난처해 하고 있으니 부정적인 보도는 쓰지 않겠다, 그러나 내 지면을 사려면 8만 위안, 최저 4만 위안은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돈을 받자마자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떠나가 버렸습니다.보도를 한 글자도 쓰지 않고 돈만 가지고 떠나버린 것에 이상한 생각이 든 진정부에서는 즉시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이는 보도 취재를 이용해 부당한 이익을 절취한 협잡사건이었습니다. 주범인 왕밍저, 한옌지가 소지하고 있던 기자증은 모두 위조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언론사 원고 발송 고지함’이라고 하는 서류도 왕밍저 등이 호텔에서 밤새 만들어낸 것이었습니다.이번 사건은 그들이 처음 저지른 범행이 아닙니다. 2010년부터 왕밍저 등은 지금까지 산시성 여러 현과 시에서 40여 차례나 범행을 저지르고 무려 80여만 위안의 거액을 갈취했습니다. 왕밍저가 근무했던 ‘중국특산보’는 이에 앞서 수 차례의 위반 행위가 있어 2013년 4월에 휴간 정돈 조치를 받았습니다. 신문사가 휴간 정돈하는 사이에 왕밍저 등은 여전히 ‘여론 감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도처에 다니면서 협잡해 재물을 갈취하곤 했습니다.2013년 12월, 국가신문출판라디오영화텔레비전총국은 ‘중국특산보’의 출판 허가증과 왕밍저의 기자증을 회수했고, 이번 사건의 용의자들은 모두 형사 구류되었습니다.이와 같은 뉴스 협잡 사건은 최근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사 처리된 언론인과 가짜 기자, 가짜 언론사의 협잡사건만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경제시보’ 허난 기자참의 부참장 츠융펑 등은 2010년 10월부터 시작해 ‘여론 감독’과 ‘언론 공개’라는 명목으로 기층에 압력을 가하고 기업의 경제 분쟁에 개입해 25만 위안의 부당 이익과 불법 발행비 33만여 위안을 가로챘습니다. 2013년 12월, 국가신문출판라디오영화텔레비전총국은 중국경제시보사 허난기자참을 철회하고 츠융펑 등의 기자증을 회수했습니다. 사건 관련자들은 이미 사법기관에 이송돼 곧 법률책임을 추궁받게 됩니다.‘서부시보’ 간쑤 기자참의 마위화 참장, 산시 기자참의 톈화 등은 타인과 결탁해 여러 차례 지방 간부와 기업에 비리를 밝히겠다고 협박하면서 35만 위안에 달하는 자금을 갈취한 것으로 밝혔졌습니다.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은 이 신문사에 휴업 정돈 조치를 취했고 마위화는 협잡으로 재물을 갈취한 죄로 유기도형 6년6개월에 10만 위안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톈화도 유기도형 4년에 5만 위안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이런 협잡사건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감독’과 ‘공개’의 탈을 쓰고 언론의 취재보도 권리를 이용해 경제적인 이득을 챙긴 것입니다. 협잡 액수가 점점 커지고 있고 수단과 방법도 더 다양해지고 있습니다.인터넷은 문턱이 낮고 방문자가 많기 때문에 뉴스 협잡사건이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분야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조사 처리된 인터넷 뉴스를 이용한 협잡사건과 허위 보도 유포 사건에서 어떤 사건은 관련 액수가 백만 위안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일부 언론은 해마다 협잡 표적이 될 단위와 기업의 명단을 열거해놓기도 한다고 합니다.자이후이성 중국기자협회 당조서기는 “이런 언론사는 명단을 열거해놓고 올해는 어느 업체들을, 내년에는 또 어느 업체를 공략할지 계획하고 있으며 협잡에 사용된 보도는 대다수가 거짓 보도”라고 밝혔습니다.이런 뜬구름 잡는 식의 허위 보도는 오히려 매번 재물 갈취에 성공하곤 했는데 그것은 ‘돈으로 재난을 막으려’는 일부 지방과 기관단위, 기업의 심리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최근 중공중앙 선전부, 광전총국, 국무원신문판공실, 공안부 등 9개 부문은 공동으로 통지를 발표해 “전국 범위내 에서 뉴스협잡과 허위보도를 타격하는 특별정돈행동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신고 제도를 완벽화 하는 것은 ‘뉴스협잡’, ‘허위보도’와 ‘가짜기자’를 단속하는 법보입니다. 중국 기자 사이트에 기자증 번호를 입력해보면 기자 신분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해당 법률과 법규는 합법적인 취재보도는 그 어떤 경제적인 이익도 챙길 수 없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견되면 해당 부문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언론은 사회를 감독하지만 사회의 감독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직업 도덕의 속박을 받고 법률과 법규를 지켜야만 사회적 양심을 일깨울 수 있고 사회 질서의 근본을 지켜갈 수 있습니다.출처: CNTV 한국어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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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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