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진의와 김염이 결혼하자 모든 친구들이 진의를 대신하여 기뻐해 주었고 진의 또한 이전 혼인의 음영에서 벗어나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를 만났다고 내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염의 나쁜 습관은 결혼 첫 날부터 드러났다.
결혼식 날 김염은 입이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고 흐트러지게 만취상태가 되었으며 집안 바닥의 여기저기에 토해놓았다. 이러자 진의는 만취한 김염을 달래어 침대에 눕게 하는 한편 난장판이 된 방안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아니 이보다는 심리상의 불안이었다. 전 남편 진천국이 주정뱅이더니 김염도 같은 <술 귀신>이 아닐까? 그녀는 김염만은 진천국 같은 남자가 아니기를 맘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불안했지만 필경은 신혼이라 진의는 이러한 불안은 피면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은 보다 많은 아름다운 여정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런데 결혼 후 김염과 같은 방안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의의 실망은 점점 커가기만 했다. 왜냐하면 김염은 거의 매일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는 날이 밝을 녘에야 집으로 돌아 오군 했으며 또한 그럴 때마다 인사불성이 되군 했다. 진천국보다 더 심했지 조금도 나은 점이 없었다.
진의는 어릴 적부터 대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여자로서의 어느 정도 인내심이 있었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으면서 이한 가정을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울러 자녀 1남 1녀를 낳기도 했다. 한편 김염은 아주 출중한 인재로서 한시기 전체 상해탄을 휩쓸었던 영화황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술 마시기를 즐기는 것 외 김염은 다른 흠집이 크게 없었으며 진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나이인 것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자기의 자식을 남한테 주려고 한 진천국보다는 인격상 고상하다고 점찍을 수 있었다. 또한 진의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남자의 스타일은 진천국보다는 김염같은 어딘가 고집은 세지만 떳떳한 그런 사나이 스타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의는 가정과 사업을 따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결혼생활이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하자 그녀는 사업에 일심의 정력을 몰부었으며 해방 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그녀의 출중한 연기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진의는 1961년 중국의 <22대 영화스타> 평의에서 제12위로 입지를 굳혔으며 또한 그 때 그녀의 나이는 39세로 더욱 휘황한 앞날이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50살을 넘긴 김염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생활방식을 고집, 술을 마시고 집에서 꽃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는 등으로 남들이 보는 시선이 그닥 곱지를 아니했다. 그리고 가끔씩 성격이 조폭하여 남한테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점차 그 누구도 그와 합작촬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진의는 자주 김염한테 그런 자본주의 시대식 생활방식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김염은 외부로부터 오는 시선 때문에 자기의 생활방식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회의 환경에서 김염의 이런 아집은 자아고립을 자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당히 어울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환경에 어울리지 못한 김염은 자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되니 그의 인생은 피곤했으며 한편 김염 또한 자신의 인생에 위안이 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돌파구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런 시기에 김염의 인생에는 그의 본처 왕인미(王人美)가 다시 뛰어들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김염이 왕인미를 불러들였느냐 아니면 왕인미가 김염을 유혹했느냐 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진의는 사업이 한창 분망한 시기라 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촬영을 하였기에 부부 사이에 교류하는 시간이 갈수록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남편 김염의 신변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가 타인의 입을 통해 김염의 탈선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진의가 받은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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