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평양에 드리운 공포는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루손섬에 배치된 미군의 ‘타이푼’ 미사일 시스템처럼, 좌표와 사정거리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다. 이 미사일은 중국 동남연안을 사정권에 두고 있으며, 대만해협을 통과하는 해상 요충지를 정조준한다. 단순한 무기가 아닌, 전쟁의 입구를 보여주는 지도 위 군사 기호다.
그 불길은 이어진다. 북쪽의 오키나와는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불린다. 대만과 한반도, 중국 본토를 동시에 겨냥할 수 있는 미군 전초기지다. 더 동쪽에는 미국의 ‘제2섬쇄’ 중심인 괌이 있다. 장거리 폭격기와 수송기, 해군 기지가 집결한 이 섬은, 미군의 후방 거점이자 핵심 병참기지다.
이들은 바다 위를 오가는 핵잠수함과 연결돼 하나의 촘촘한 전략망을 형성한다. 평소에는 억제의 상징이지만,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이 모든 인프라가 한꺼번에 가동되며, 적의 대응 이전에 전쟁의 주도권을 확보하려 한다. 일본 나가사키대학 핵무기폐기연구센터(RECNA)는 이를 ‘선제타격 충동’이라 표현했다.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상대의 핵보복 능력을 무력화하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상대가 반격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만 유효하다. 현실은 다르다.
중국의 ‘동풍(DF)’ 시리즈 미사일은 이미 전장을 다시 짜고 있다. 괌까지 닿는 중장거리 미사일, 다탄두 장착이 가능한 고속 재래식 미사일, 심지어 핵탄두 탑재까지 가능한 무기들이 줄줄이 배치돼 있다. 중국은 전통적인 의미의 핵 억제력을 넘어서, 전면적인 ‘2차 타격’ 능력을 확보했다. 전략폭격기와 전략핵잠수함까지 포함된 ‘3중 핵전력 체계’는, 설령 미국이 선제공격을 가하더라도 중국이 미국 본토에 보복할 능력을 보장한다.
문제는 이 억제의 밸런스가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RECNA가 수행한 시뮬레이션은 이를 예고한다. 가상의 상황에서 중국과 미국이 각각 30기의 핵탄두만 사용하는 ‘제한적 핵전쟁’을 벌인다는 시나리오. 얼핏 보면 절제된 상상처럼 보이지만,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 30기의 핵무기만으로도 도심과 군사시설이 초토화되고, 수백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다. 핵폭발로 인한 열과 충격파, 방사능 낙진은 일본, 한국, 필리핀까지 덮친다. 나가사키대학의 분석에 따르면, 공격 지역의 인구 중 최대 35%가 사망하거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 수천만 명의 생명이, 단 몇 번의 발사 버튼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억제’나 ‘제한’이란 말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제한된 핵전은 없으며, 한 번 시작되면 통제 불가능한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은 수천 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양국 중 어느 한쪽이 ‘최후의 수단’을 택할 경우, 전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
그런데도, 왜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처럼 다가오는 걸까. 그 배경에는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개념이 있다. 신흥 강국이 기존 패권국을 위협할 때,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역사적 패턴이다.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견제는, 점점 이 논리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계산이 존재한다. 미국의 싱크탱크들이 수십 차례 수행한 대만해협 관련 군사 시뮬레이션은, 거의 모든 경우에서 ‘승리는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미군이 개입하든 안 하든, 대규모 전면전에서 미국은 ‘작은 패배’ 혹은 ‘중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역사적 추세는 전쟁으로 향하지만, 군사적 계산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전쟁을 선택하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로 다가가는 세계. 이 모순이 핵전쟁 가능성을 더 위태롭게 만든다.
결국 이 모든 전략, 시뮬레이션, 철학은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간다. 세계 최초의 핵폭탄 피해 도시 중 한 곳. 그 잿더미 위에 선 학자들이 다시 한 번 경고한다. 핵무기는 숫자가 아니라 기억이다. 한 도시가 말살된 그날의 기억이, 인류를 전쟁에서 멈춰 세우는 마지막 장벽이다.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억제’는 억제가 아니다. 그것은 파국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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