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원 부총이 오의(吴仪)는 성격이 직설적이어서 그한테는 비밀이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뭇사람들한테 한가지 큰 의문을 남기었다. 감정이 그렇듯 풍부한 여인이 왜 줄곧 싱글로 생활하고 있을까?
이에 대한 오의 여사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생활은 나한테 결혼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미 이렇게 시기를 놓쳤으니 억지로 결혼생활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다. 이 역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젊은 시절의 오의는 낭만주의와 영웅주의 색채가 짙은 소련문학을 즐겨 읽었다. 언제인가 오의는 “모스크바와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란 책을 읽은 뒤 결연히 석유전업을 선택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녀의 마음속에는 책의 주인공 토만노프(特曼诺夫)와 같은 “백마왕자”가 자리잡게 되었다. 후에 오의 여사는 “백마왕자”란 실제 생활에서는 있을 수 없다면서 그제날 자기가 너무 이상주의 생활을 추구했다고 회고했다.
이렇듯 젊은 시절의 과분한 이상주의애정관과 분망한 사업 등으로 오의는 줄곧 따뜻한 사랑의 항만을 찾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오의는 늘 자신은 “쾌활한 싱글”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성격이 쾌활하고 취미가 다방면으로 북경에서 있은 몇차례의 낚시경기에서 그는 수차 우승하기도 했다. 당시 많은 남성동료들은 “이 물고기들이 오의가 이쁘니까 전문 그녀한테로 헤염쳐오는게 아닌가?”라고 우스개를 했다고 한다.
그가 지도일군 직무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수하의 남성들이 수긍하는가”고 물었다. 그러면 오의는 웃으면서 “난 줄곧 남성동료들과 잘 어울린다”고 대답하군 했다. 그는 감정을 중히 여겼고 하급을 잘 관심하여 남성지도일군한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세심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일단 사업한다치면 과단성이 있어 여성대장부다운 풍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한 성장은 “원칙을 견지하고 실제적이며 의리와 감정을 중히 여기는 훌륭한 누님”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일찍 젊은 시절 친구들은 오의 여사의 외관을 두고 “이쁘다”는 말을 아주 적게 썼다고 한다.
원적이 호북 북해인 오의는 1938년 가을 무한의 한 보통 지식분자가정에서 출생, 형제로는 8살 이상인 오빠뿐이었다. 오의는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떴기에 기본상 오빠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때 오의는 오빠를 따라 사처로 다니며 생활, 한시기 중경에 있는 친척집에 의탁해 살기도 했고 후에 오빠를 따라 난주에 가서는 난주여자중학(지금의 난주시27중)에서 공부를 하였다.
난주여자중학교 노교장의 회억에 따르면 그 시기 여학생들은 대부분 머리를 길러 땋았으나 유독 오의만은 단발머리를 하여 남학생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의가 치마를 입은 것도 거의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오의는 “이쁘다”는 말을 별로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 90연대에 들어 오의를 취재한 한 기자는 오의 여사의 생김새를 놓고 “오의는 이쁘다기보다는 멋지었다. 피부가 희고 오관이 단정하였으며 얼굴윤곽이 좀 클뿐이었다. 이는 오히려 오의로 하여금 더욱 호방하고도 대범하게 보이게 했다”라고 묘사하였다.
1988년 TV방송을 통해 북경시 부시장 후선인으로 선보였을 때 오의는 쟈켓을 입고 테가 굵은 안경을 걸었었다. 후에 오의 역시 자신이 다른 여사들과는 애호가 어느 정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 “나는 다른 여성들처럼 쇼핑을 즐기는 축이 못된다”고 고백하였었다. 하지만 “미”를 추구하는 천성은 다른 여성들과 조금도 구별이 없었다. 1991년 북경시 부시장으로 된 오의와 기타 도시의 99명 부시장들이 항주에 모여 중국 여시장친목회 설립했다.
설립식이 있은 그날 저녁 53세의 오의는 연회석상에 들어설 때 아름다운 치포를 입고 선보였다. 순간 연회청내는 대뜸 더욱 밝아지는듯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매체들에서 오의를 보도할 때는 자주 “오의는 그 어떤 공공장소에 나타나든 항상 우아한 옷차림을 했으며 새하얀 머리칼은 한오리도 흐트러짐이 없다”라고 묘사하군 하였다.
2003년 3월에 오의가 국무원 부총리로 당선된 뒤 얼마 안되어 중국에는 전국을 휩쓴 사스가 만연되었다. 그러자 국무원 부총리 겸 국가위생부 부장으로 사스를 박멸하는 제1선에 나가 지휘하군 하였다.
그 당시 오의 부총리는 낮엔 사처로 뛰어다니며 사스박멸현장을 지휘하고 저녁이 되면 홀로 임시거처에 돌아와 지친 몸을 침대위에 던지군 했다. 오의 여사의 회억에 따르면 젊었을 때는 고독이란 뭔가를 몰랐지만 나이 60세를 넘기고 보니 신변에 남편도 자식도 없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의는 인차 이지를 되찾고 자신을 달래면서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자고 결심했다고 한다.
청년시절 온몸에 이상주의 색채가 농후했던 오의는 “문학청년”으로 될 꿈을 가져봤고 소련문학에 빠지면서부터는 석유공업발전에 자기의 한생을 바치리라는 포부를 지니기도 했으며 후에 소련영화 “서광이 비낀 모스크바”를 본 뒤에는 한명의 유명한 여공장장으로 돼보려는 꿈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의 여사는 너무도 꿈과 이상만 추구하다보니 결국 장장 10여년에 달하는 결혼적령기를 놓쳐버렸고 후에는 아주 결혼꿈을 포기한채 싱글여성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출처: 신화넷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BEST 뉴스
-
하영에게 증조부의 죄까지 물을 것인가
배우 하영이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의혹과 관련해 결국 고개를 숙였다. 하영은 12일 자필 사과문을 통해 “과오를 무겁게 받아들이며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가족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논란 이후 관련 자료를 직접 ... -
건보 땐 ‘먹튀’, 연금 땐 ‘꼼수’…또 조선족 때리기인가
국내에서 불과 한 달가량 국민연금에 가입한 뒤 추후납부 제도를 이용해 가입기간 10년을 채우고 노령연금을 받는 중국인 사례가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보도는 최근 외국인의 추납 신청과 연금 수급 사례가 늘고 있다며 “특히 한국계 중국인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 -
[민국의 그림자 ⑦] 패망을 감지한 밀정들…‘76호’의 붕괴와 특무들의 마지막 선택
1943년 후반, 상하이의 공기는 달라지고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흐름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왕징웨이 정권 내부에서도 동요가 시작됐다. 겉으로는 여전히 일본과의 협력을 외쳤지만, 일부 고위 인사들은 이미 일본이 패전할 경우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고 있...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①] 선아오, 연변에서 중국 영화의 중심으로
중국영화 금계장 시상식에서 트로피와 수상증서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선아오(申奥) 감독. [사진=1905영화망]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영화계에서 최근 주목받는 젊은 감독 가운데 한 명인 선아오(申奥). ‘수익인’(受益人)과 ‘고주일척’(孤注一掷)에 이어 ‘난징사진관’(南京照相馆... -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배우들 ②] 장률, 국경을 넘어 세계영화의 ‘지음’을 찾다
중국 조선족 영화감독 장률(张律) [인터내셔널포커스] 중국 영화계의 조선족 감독을 이야기할 때 장률(张律)은 빼놓기 어려운 이름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던 그는 마흔을 전후해 뒤늦게 카메라를 잡았지만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해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
장동혁의 ‘중국 편이냐’ 질문…안보는 편 가르기가 아니다
▲ 외국 세력의 간첩 활동과 정보 유출, 대공수사를 둘러싼 논란을 형상화한 이미지. [AI 생성 이미지·인터내셔널포커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이재명 정부를 향해 “중국 편인지 대한민국 국민 편인지 확실하게 밝혀라”고 말했다. 중국의 선거 개입과 간첩 활동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