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포커스]독일 정부가 유럽연합(EU)의 외교·안보 의사결정 구조를 대폭 손질해야 한다며 강도 높은 개혁론을 공식화했다. 특히 중국산 희토류 의존과 제조업 경쟁력 약화를 유럽의 핵심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미국·중국 중심의 글로벌 경쟁 구도 속에서 유럽이 빠르게 밀려나고 있다는 위기감도 드러냈다. 한국 역시 반도체·배터리 산업의 핵심 원료 확보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어서, 유럽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글로벌 원자재 시장과 산업 전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독일 DPA통신과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요한 바데풀 독일 외무장관은 6일(현지시간) 베를린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행사에서 EU 개혁을 위한 ‘6대 구상’을 발표했다. 그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회원국 만장일치 원칙을 사실상 폐기하고 특정다수결 방식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데풀 장관은 “안보 문제에서 만장일치 제도는 유럽 전체를 생존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의사결정 지연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발언은 최근 독일 보수 진영의 기조 변화와도 맞물린다는 해석이 나온다. 중도우파 기독민주당(CDU) 계열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보다 강경하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강화하면서, EU의 느린 의사결정 구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데풀 장관은 연설에서 유럽 산업 경쟁력 약화와 중국 의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그는 “과거 석탄과 철강이 유럽 산업의 기반이었다면 이제는 희토류와 전략 광물이 첨단 산업 경쟁력의 핵심 자원이 됐다”며 “하지만 관련 공급망은 사실상 중국이 장악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이어 “유럽의 중희토류 수요 가운데 약 97%가 중국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다”며 “지난 25년 동안 중국의 세계 제조업 비중은 6%에서 30%로 급증한 반면 EU 비중은 19%에서 15%로 축소됐다”고 설명했다. 또 “독일에서는 지난해 하루 평균 300개 이상의 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며 제조업 기반 약화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유럽 산업계에서도 비슷한 위기감이 확산하는 분위기다. 독일과 프랑스 주요 산업계는 최근 배터리·전기차·반도체 분야에서 중국 공급망 의존이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우려를 잇달아 제기하고 있으며, EU 차원의 전략 광물 확보 정책과 역내 생산 확대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바데풀 장관은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불안,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라는 지정학적 압박까지 동시에 받고 있다”며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경제 분야에서도 미국과 중국에 비해 뒤처진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EU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단일시장 가운데 하나”라며 “27개 회원국이 하나로 움직일 때만 미국과 중국에 대등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개혁안의 핵심은 특정 회원국의 거부권 제한이다. 바데풀 장관은 “참여를 원하지 않는 국가는 일시적으로 빠져 있을 수 있지만, 나머지 국가들의 정책 추진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는 헝가리가 최근 EU의 대우크라이나 지원안을 가로막았던 사례를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현재 EU는 대러 제재, 외교 정책, 신규 회원국 가입, 세금 문제 등 주요 사안에서 회원국 만장일치를 요구하고 있다. 바데풀 장관은 독일이 EU 최대 회원국으로서 개혁 추진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으며, 현재까지 12개 회원국이 외교·안보 분야 특정다수결 확대에 찬성 의사를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또 EU 집행위원회와 외교 조직 간 협력을 강화해 브뤼셀의 외교·안보 기능을 보다 통합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치주의 위반 국가에 대한 재정 제재 장치를 EU 예산 체계에 포함하는 방안과 신규 가입국의 단계적 편입 방식도 제안했다.
블룸버그는 이번 개혁 구상에 대해 “EU가 중국 의존과 지정학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 주도의 전략적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바데풀 장관은 “세계 변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며 “EU가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 결국 다른 세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독일은 유럽이 더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기를 원한다”며 “특히 공동 외교·안보 정책 분야에서 브뤼셀의 대응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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