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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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벼라 별 희한한 일이 다 있었다. 도적 출신으로 공을 세운 호걸이 있는가 하면 도술로 30년간이나 한중에 군림한 기인이 있었고, 심지어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이고도 환대를 받은 인물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장연(張燕), 장수(張綉), 장로(張魯) 이며 모두 성이 장씨(張氏)라는 공통점이 있다.

 

장연은 도적패를 만들어 산과 소택(沼澤) 사이를 전전하며 싸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리가 2만 명이 넘었다. 장연은 쇠뿔이라 불리는 장우각(張牛角)과 연대하였고 장우각을 우두머리로 추대하였다. 장우각이 죽자 무리는 전 두목의 유언에 따라 장연을 우두머리로 모셨으며 이 때문에 장연의 성이 본래 저(褚)였는데 장씨로 바꾸게 되었다.

 

장연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표독하고 민첩했기 때문에 군중(軍中)에서는 그를 날아다니는 제비라는 뜻인 비연(飛燕)이라고 불렀다. 그의 무리는 다른 도적무리를 흡수하는 등 나날이 커져 군세는 1백만에 달했고 흑산(黑山)이라 불렀다. 조정은 이들을 정벌할 방법이 없었고 황하 이북의 각 군은 모두 그들에게 패할 만큼 세력이 대단했다.

 

장연은 도적질에 질렸던지 아니면 관직에 욕심이 생겼는지 아무튼 수도에 사자를 보내 투항의사를 전달하니 그를 평난중낭장(平難中郞將)으로 임명했다.

 

이후 원소와 공손찬이 기주 땅 따먹기 다툼에 장연은 곤손찬을 도와서 원소와 싸웠다. 그런데 장연의 군사들이 불행하게도 패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할 때 장연은 명분 좋게 관군을 지지했으므로 조조는 그를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임명했고 식읍 5백 호를 내렸다.

 

이렇게 장연은 도저패의 우두머리로부터 일약 관군의 장수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장로는 대대로 도술을 전파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장릉(張陵)은 도술에 관한 책을 지어 백성을 미혹했다. 그에게 도술을 배우는 사람은 모두 다섯 말의 쌀을 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적(米賊)이라고 불렀다. 장릉이 죽자 아들 장형이 도술을 이어 받았고 장형이 죽자 장로가 계승했다. 장로의 대에 이르러 도술은 정식으로 오두미교로 발전했고 교세가 굉장히 팽창해졌다.

 

각 지방 조직에 좨주(祭酒, 제사를 관장하는 사람, 오두미교에서는 기독교의 목사 역할에 해당함)를 두어 의사(義舍, 의로운 집)를 지어 거기에 쌀과 고기를 비치해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배가 찰 때까지 먹도록 했다. 만약 필요 이상으로 가질 경우 요술로 징벌했다. 법령을 위반한 사람은 세 번까지는 너그럽게 용서하지만 그 후 다시 범하면 엄하게 징벌했다. 장리(長里, 마을 이장)를 두지 않고 모두 좨주가 다스렸다. 한족과 오랑캐는 이것이 편리하다고 여겨 좋아했다. 장로는 이 방법으로 파군과 한중에서 30년이나 웅거했다.

 

후한 말 조정은 장로를 징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사자를 보내 진민중랑장(鎭民中郞將)으로 삼고 한녕 태수를 겸임하게 했다.

 

건안 20년(215) 조조가 장로 정벌에 나섰다. 장로는 한중을 바치고 투항하려 했으나 부하들이 말려 도망갔다. 당시 부하들이 진귀한 보물을 쌓아놓은 창고를 불태우려고 하자 장로가 말했다.

 

“나는 본래 조정의 명에 따라 귀순하려 하지만 실현될 수 없을 것이오. 현재 도망치는 것은 조조 군대의 예봉을 피해보려는 것이지 결코 나쁜 뜻이 없소. 진귀한 물품을 쌓아놓은 창고는 국가가 소유하는 것이오.”

 

장로는 창고를 불태우지 않고 굳게 닫아놓고 떠났다. 조조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장로를 칭찬했으며 장로는 가족을 데리고 조조에게 귀의했다. 조조는 기쁘게 그를 영접했고 진남장군으로 삼아 빈객의 예우를 했으며 낭중후(閬中侯)로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주었다.

 

장수는 표기장군 장제(張濟)의 아들이다. 장제가 죽자 아들 장수가 그 군대를 이어 받아 유표와 연합했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한 지 한두 달도 채 안 되는 시점, 정확히 건안 2년(197)에 남쪽으로 원정하여 육수(淯水)에 주둔하고 있을 때 장수 등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는 조조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은 성과였다. 그런데 조조는 손쉬운 승리에 도취되었던지 심중치 못했다. 장수의 부친 장제의 미망인을 첩으로 맞아들여 장수에게 굴욕감을 안기려했고 기를 꺾어놓으려 했다. 뿐만 아니라 조조는 장수의 부장인 호차아(胡車兒)와 좋은 관계를 맺어 장수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 했다. 이것이 오히려 조조에게 화근이 되었다. 장수는 복수의 칼을 갈고 또 갈았다. 조조는 장수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비밀리에 장수를 죽이는 것으로 선손을 쓰기로 했는데 비밀이 새나가 장수 귀에 들어갔다. 장수는 아무런 준비가 없는 조조를 기습하였고 조조의 군사들은 패해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죽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장수가 조조의 아들 둘이나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여러 사료(史料)들에 의하면 조조의 장남인 조앙이 죽은 것은 사실이고 나머지 한 명은 조조의 친 아들이 아니고 그의 조카 조안민으로 밝혀지고 있다. 조조에게는 아들 하나가 죽었든 둘이 죽었든 또 조카의 죽음도 아들이 죽은 것만큼 비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더욱이 조앙은 조조가 가장 아끼던 후계자였으니 그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후한서>에 의하면 장남 조앙이 죽자 조조의 후처로부터 정실이 된 변부인은 마치 자신의 친아들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이 변부인에 대한 ‘미담’이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속편들에서 다루기로 하고 계속해서 장수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겠다.

 

건안 2년(197) 가을 조조는 두 번째로 장수 정벌에 나섰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서 패배한 장수는 근거지마저 잃고 남쪽에 가서 유표와 손잡는다.

 

이듬해 3월 조조는 아들과 조카의 죽음에 철저하게 복수하려고 세 번째로 장수 정벌에 나섰다. 사실 이때 책사를 맡은 순유(荀攸)가 말렸다.

 

“현재 장수와 유표는 비록 가후(장수의 모사)의 중재로 연맹을 결성하고 있지만 이 두 사람은 동상이몽하고 있습니다. 장수는 유표에게 식량과 마초를 제공받으려 하는데 유표는 제공할 수가 없으니 그들은 조만간 각기 제 갈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싸우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패할 테지만 급하게 다그치면 유표가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순유의 예측이 100% 맞는 말이지만 조조는 복수심에 불타 그 말이 귀에 들어가기 만무했다. 결국 유표가 지원에 나서자 조조는 양성에서 고생만 하고 철수하고 만다.

 

조조가 퇴각하자 장수는 이때라 싶어 기뻐서 곧바로 병사들을 보내어 추격하게 한다. 그런데 가후가 말린다.

 

“추격해서는 안 됩니다. 추격하면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조조와 마찬가지로 장수도 승리에 도취되어 모사의 말을 들을 리가 없이 추격한 결과 크게 낭패를 보았다.

 

가후가 또 말했다.

 

“지금은 추격할 수 있습니다. 빨리 쫓아간다면 틀림없이 승리할 것입니다.”

 

장수는 어안이 벙벙하여 말한다.

 

“방금 선생의 말을 듣지 않아 크게 패했는데 또 추격이라니 뭔 소리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추격하기만 하면 됩니다. 빨리 가십시오.”

 

장수가 반신반의하면서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추격했더니 과연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장수는 아무리 생각을 굴려보아도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아 가후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정예 병사들로 퇴각하는 군대를 추격할 때 선생은 반드시 패한다고 했고 지금 패잔병들로 승리한 군대를 추격할 때는 선생은 반드시 승리한다고 했소. 매번 선생이 예측한 대로 되니 나는 도통 알 수가 없구려.”가후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비록 용병술에 뛰어나지만 솔직히 조조만 못합니다. 조조가 이미 철수를 결정했다면 반드시 직접 후방을 엄호했을 것입니다. 장군의 병사들이 비록 정예이기는 하지만 장군의 장수들은 조조만 못하고 조조의 병사들도 정예병들이기 때문에 장군이 패한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가 장군을 공격할 때에 실책이 없었던 데다 힘을 다하지도 않았는데 싸우지 않고 철수했으니 분명히 후방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가 기왕에 장군의 추격병들을 물리친 이상 반드시 군대의 무장을 가볍게 하고 속도를 내어 안심하고 길을 갔겠지요. 뒤에 남아 후방을 엄호하는 군대의 지휘관들은 장군의 상대가 안 되었을 테니 이번에는 장군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가후의 예측대로 조조의 후방에 문제가 생겼다. 원소가 조조의 남쪽 원정에 나선 틈을 노려 허현을 습격했는데 결과는 원소의 패배였다. 여기서 물러설 원소가 아니었다. 조만간 원소와 조조 사이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될 것이냐는 생사결단의 큰 전쟁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는 원소의 군대가 막강했다. 거의 열 배 정도의 군사 차이가 있었다. 조조에게는 힘이 부치는 전쟁일 터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급시우(急時雨)가 나타났다. 바로 장수의 투항이었다.

 

원소도 비록 조조에 비해 막강한 실력의 군사를 소유하고 있지만 조조에게 투항하는 무리를 경계하여 먼저 선수를 쳐 자기편으로 만들려 했다. 원소는 사자를 보내 장수를 설득하려 했다. 이때 가후가 나서 말했다.

 

“귀찮으시겠지만 귀하는 원본초(원소의 자)에게 가서 자기 형제(원술)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하의 뛰어난 선비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말해주시오.”

 

곁에서 듣고 있던 장수는 너무 놀라 오금이 저려 났다.

 

“막강한 원소의 미움을 사면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러시오?”

 

가후가 태연한 태도로 말했다.

 

“조조에게 의탁합시다.”

 

장수는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즉 자기 아들과 조카를 죽인 원수를 받아주겠느냐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하물며 원소는 강대하고 조조는 약소한데 조조에게 붙다니? 말이 되냐는 것이다.

 

가후가 조리 있게 설명했다.

 

“바로 그 때문에 조조에게 의탁해야 합니다. 첫째 조조는 천자를 받들고 있어 정치적으로 명분상 유리합니다. 둘째 우리 인마(人馬)는 원소에게는 보잘 것 없지만 조조에게는 눈밭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 숯불을 가져다주는 격이 될 것입니다. 셋째 천하를 제패하려는 조조는 개인적인 원한을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가후의 예측대로 조조는 장수를 환영하는 파티를 성대하게 열고 과거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으며 곧바로 양무장군에 임명하고 제후로 봉했다.

 

조조의 넓은 도량에 감동을 먹은 장수는 관도대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장수의 모사였던 가후도 그 이후로 조조에게 가장 도움이 큰 책사였으며 조비 시대까지 역할하면서 천수를 다할 때까지 현명하게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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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재해석⑪ 조조의 두 아들을 죽이고도 환대 받은 장수(張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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