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 곽용호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2001년 3월20일 김포공항에 내리면서 한국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장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남조선” 세글자에 대해서 생소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중국 연길에 계시면서 매일 저녁 주무시기 전 라디오를 통하여 KBS라디오 방송을 시청하였다. 1910년대에 중국에 이민 갔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여 한국 뉴스도 시청하고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듣곤 하였다. 이렇게 나는 간접적으로 한국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999년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변1중에서 영어교사로 2년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이시다. 그때 당시 중국 현지 언론을 통하여 정보통신분야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뉴스를 많이 접하였다. 정보통신공부를 하여 벤처기업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나는 성스러운 교사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변1중은 조선족고등학교에서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이고 대우도 아주 좋았다.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나를 친척, 친구들이 재삼 고려하라면서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결정을 꺾을 수 없었다.

 

북경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15명의 연변 청년들이 경희대정보통신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한 형님과 나의 비자가 늦게 승인을 받아 두 명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로 버스를 잡았다.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까치 둥지이다. 진짜로 까치 둥지가 아주 많았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무위의 까치둥지는 나의 고향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정보통신대학원 멀티미디어학과 전공을 선택한 나는 학부때 관련 지식을 공부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수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무엇을 얘기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모르지만 듣고 또 듣고 용어사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방학에도 다른 유학생들은 한과목을 선택하여 계절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두 개 과목을 선택하여 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 달 지나더니 드디어 기초 용어를 알아들었다.

 

생활비도 문제다. 15명 조선족 유학생 친구들은 힘들어 했다. 주유소에서 시간당 2,500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주유소의 모집공고가 들어왔다. 한국 학생들도 방학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도 중국 연변대학교를 다니면서 두 달간 방도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었다. 80키로 되는 문짝을 옮기고 설치하고 꽤나 힘들었지만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주유소에서 주는 돈은 적지만 생활비를 얼마간 충당할 수 있고 여건이 좋은 아르바이트 기회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마음에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9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주유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 때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 그 나머지 시간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주유소에서 두달 가까이 지내다가 벼룩시장에 나온 식당 홀서빙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은 수업 끝난 후부터 저녁 11시까지여서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급여보다 두배 가까이 받는다. 아직도 처음 면접때 일을 생각하면 재미 있었다. 일라인 스케티트를 타고 식당앞에서 멈추고 신발을 바꿔 신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식당 주인이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 하였다. 자신도 일본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파수 대가 거의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일 시작하기 전부터 나한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가게 사장이 일라인을 타면 위험하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처음 면접 본 풋내기 유학생한테 이런 선물을 하다니.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 생고기집은 6테이블 밖에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고기도 최상급이고 소스도 일본에서 개발했던 소스를 사용하여 저녁 식사시간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가게 사장, 주방장, 그리고 홀서빙하는 나를 포함하여 세명은 저녁식사시간에는 전쟁이다. 야채, 수저, 밑반찬, 숯불목탄 세팅부터 남은 그릇 주방까지 나르기가 나의 몫이다.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열정을 가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항상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장은 대견스럽게 여긴다.

 

일년 지나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인턴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우리학교에 전해왔다. 같이 온 조선족 유학생들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연구원에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유일하게 내가 선정되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영어를 전공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론 지식은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였으나 이 분야에서 눈을 뜬 건 사실 연구원에서 한중 통역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근무하는 기간 여러 연구원들과 일을 같이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통신 첨단 기술 발전추세도 파악했다.

 

해외 정보 사업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정음정보처리회의 (2002,심양)에서 “동북아과학기술정보교류 방안”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 Computer Network Information Cente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의 네트워크 관련 교류를 추진하였고 슈퍼컴퓨터, 디지털도서관, 인체영상 분야의 통역을 진행했다. 2002년 12월 16일에는 중국문헌정보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자원공유 교류 통역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분야의 용어를 접촉하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르면 배우자. 모른 것은 죄가 아니다. 나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전문용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중국 정보통신관련 연구원들과 물어보고 또한 번역한 결과를 한국 연구원들에게 의사전달이 맞는지 확인하였다. 과학기술 통역은 어떻게 보면 연구원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때 당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있으면서 한중 엘리트들과의 접촉가운데 정보통신관련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고 또한 이러한 것들은 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되었다.

 

저자 곽용호 경력:

1995~1999 연변대학 영문학과 졸업
1999~2001 연변1중 영어 교사
2001~2003 경희대 멀티미디어학과 석사 졸업
2005~2007 숭실대 마케팅박사 수료
2011~현재 중국동포축구연합회 사무총장
2011~현재 재한연변대학학우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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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학생활은 열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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