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캡처.PNG

최승희 중년시절

 

일전 상하이에서 발매 된 매란방 기념카드가 전에 없던 구매 열조를 일으켰다. 기념카드가 발매되는 광장에는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암시장에서 카드는 하루 새에 28위안으로부터 150 위안으로, 몇달 후에는 330위안으로 폭등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열한 배나 폭등한 가격일망정 한 무용배우의 기념 카드를 사들이고 있는 것일가?


한편 한국에서는 무용가 최승희의 가장 오래 된 영상기록물이 공개되어 화제다.


최근 발굴된 영상에는 1926년 10월 3일 이시이바쿠무용단 일원으로 작품에 출연한 15세의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담겨있다.


1926년 3월 일본에 유학간 최승희가 무용 입문 7개월 만에 스승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주역이 된 셈이다.


이 영상은 1926년 10월 3일 도쿄 베비 시네마 구락부 아사이 클럽 주최로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촬영회에 이시이바쿠무용단이 초청돼 공연 당시 촬영한 것이다.


경극예술의 대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중국의 경극200년사에서 최고로 지칭 되는 천재 경극배우 매란방. 18세기 청나라후반에 처음 등장한 이후 19세기 과도기를 거쳐 20세기 중, 후반까지 경극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관중을 사로 잡으며 중국의 대표 예술로 자리 매김했다.


그 와중에 경극에서 여자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를 지칭하는 화단(花旦)연기의 일인자로 중국대륙은 물론 전 세계에 경극의 아름다움을 알린 신화적 존재가 바로 매란방이다. 매란방은 1894년10월, 강소성 양주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모두가 경극계의 명배우들인 경극세가(世家)에서 태여어 다. 여덟 살 때부터 경극을 배웠고 열 한 살 때 처음 무대에 오른다. 각종 배역을 훌륭히 소화를 해내며 경극계의 기대주로 부상한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 깔끔한 무대매너 그리고 중후한 연기력을 과시하며 재빨리 명실상부한 경극의 대표 배우로 성장한다.


1929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중국인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뉴욕의 맨해튼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큰길에 조성된 극장가)에서 공연을 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한다.


매란방은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일본, 미국, 쏘련등지를 순회하며 문화 교류에 앞장섰고 경극의 존재와 그 진가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킨다.


이 기간에 그는 저명한 희극대가 채플린, 소련의 문호 고리키, 유명한 배우 스타니슬라프스키 등 저명한 문호,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미국 공연시, 촬영을 중단하고 달려와 매란방을 만난 찰리 채플린은 “그는 나의 예술적 소울 메이트였다!” 고 매란방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의 마수가 중국을 유린하던 기간에는 일본치하에서 공연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여 화단(花旦)연기자로서 수염을 기른 사건은 예술가의 곧은 오골(傲骨)을 보여 주는 전례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후에도 경극의 전통적 체계를 보전하면서 그 개혁과 발전에 힘쓴다. 배우로 활약하는 한편,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을 맡아 후배 육성에 힘쓰고 많은 배우를 배출한다. 나아가 전국인민대표, 중화전국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등 요직에 있으면서 문화적, 정치적으로 많은 공적을 남긴다.


매란방을 경극계의 “공전절후(空前绝后)한 대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그의 인기를 실감하는 작은 일화를 곁들어 본다. 매란방의 출연료는 금괴(金塊) 즉 금덩이 10개에 상당했다고 한다. 해방 후 부자가 사라진 중국, 당시 최고 노임을 받는 사람이 바로 매란방이었다. 50년대 국가 주석 모택동의 노임은 408.8위안(인민폐), 매란방은 자유직업자인만큼 출연료가 순 수입이었는데 1956년 매란방이 주동적으로 월급을 낮춘 후의 노임이 2100위안(인민폐)에 이르렀다.


당시 명문대 청화대학의 교수가 매달 식사비 8 위안(인민폐)으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다는 상황으로 보아 당시 매란방의 노임 2100원은 어떤 개념인지 가히 가늠할 수 있다. 때문에 전쟁이 일자 대포도 아닌 비행기를 직접 기증할 수 있었다는 매란방의 경제력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매란방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무대의 혁신을 과감히 꾀하여 경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연기의 폭을 넓혀서 모든 단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최초의 배우였다.


50 여년의 무대생활을 통해서 그는 경극의 전통적 레퍼토리 가운데 100개 이상의 역을 소화해냈다. 그가 무대에서 표현했던 부드러우면서도 올곧은 인물들처럼 그 자신도 그러한 품성을 일생 간직했다. 이점이 그의 인간성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매란방은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그의 성을 따서 “매파(梅派)”라는 경극의 한 유파를 이루었을 정도로 경극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매파”예술은 이미 세계 예술보물고의 정신적인 재부가 되었으며 매씨희극이론도 세계3대 희극예술체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여자

 

여기 또 한 분의 춤의 대가가 있다. 바로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이다. 최승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4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한다. (그의 큰 오빠 최승일은 1922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가입한 좌파 소설가이다.) 그녀가 자신의 한생을 무용의 외길로 가려 마음먹은 것은 1926년 오빠의 권유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러갔던 뒤의 일인 듯 싶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한결 같이 전위적인 양식의 신무용들이었다. 오빠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러 왔던 열 여섯 소녀 눈에서는 광채가 번뜩이었다. 그날 한 조선 소녀의 운명은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뒤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곧 이시이를 따라 일본으로 갔고 3년이 못 되어 이시이 무용연구소 간판 스타가 되었을뿐 아니라 전 일본 열도를 흔들어 놓게 된다.


그러나 오성(悟性)이 강했던 그녀는 곧 얼마 후 스승의 춤에 혼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고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 온다. 그녀는 이시이뿐아니라 “이사도라 던컨이나 니진스키류의 음악에 종속화한 무용”아닌, “조선의 전통과 풍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계로 나갈” 당찬 생각을 뼈물게 된다. 그녀는 민족적인 것으로서 세계적인 것을 이루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든 예술가의 지상 명제인 그 야심을 이루고 만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신작발표회를 가진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 두 차례 일본 유학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을 출간 할 정도로 유명해 진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전미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며 “동양의 진주” “금강산의 화신”이라는 갈채를 받는다.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도 그에게 반했다고한다.


1947년 북한으로 건너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조선 춤을 체계화하며 무용극 창작에 힘 쓰다가1969년 타계한다.

조선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진공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 간 최승희, 최승희의 삶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가 오히려 비좁았던 그에게는 그러나 정작 고향이 없었다. 남에서는 친일파요, 북에서는 자본주의 성향의 반혁명 예술가라고 버림받았던 그, 하지만 땅의 나뉨도 분단의 이데올로기도 그의 예술혼은 묶어둘 수는 없었다.


그는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을 안고 쉼없는 춤사위를 통해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디샹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으며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신화적 존재로 남았다.


거장들의 악수

 

사실 최승희와 중국과의 인연은 일찍부터 이어졌고 놀랍게도 많은 중국 문학예술계의 쟁쟁한 거장들과 만남과 교류의 일화를 남기고 있었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의 녀류작가 장애령(张爱玲. 동방의 제인 오스틴이라고 불리는 유명 여류소설가.  쟁명을 빚고 있는 영화 “색계”의 원작자)도 일찍 최승희와 만남을 가졌었다.


1945년4월,신중국보(新中国报) 편집부는 상하이에서 무용가 최승희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는데 무용계 인사들외에도 장애령 등 상해의 유명 여류작가들이 간담회에 동참했다.


그날 간담회 석상에서 최승희는 “우리의 무용예술은 고대나 서방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지 말고 그 장점을 따서 현대적이고 진정 자신에게 속하는 동방적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장애령은 바로 문학에서도 그러한 고견은 적용된다며 동감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장애령 역시 최승희의 무용에 심취되어 있었다. “서방의 무용, 그리고 중국명사파들의 표현은 최승희에 짝지는 것이 많다. “며 최승희의 예술체계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쓴“태양은 쌍간하를 비춘다”의 작가 정령(丁玲), 그녀도 최승희와 묘한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1948년 정령은 쏘련에서 돌아와 로신예술학원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었다. 쏘련에 체류하던 기간 보았던 무극은 그녀에게 강령한 인상을 남겼다. 하여 그녀는 연안 “보육원”에서 자란 딸 장조혜(蒋祖慧)가 춤을 배우기를 권장했다.

  

이공과에 흥취가 있는 딸애를 설복하여 조선으로 보내어 다름 아닌 최승희의 문하에서 춤을 배우게 했다. 최승희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장조혜는 유명 뮤용수로 성장, 그후 유명한 현대경극 “홍색랑자군”의 제작을 맡아 그 유명세를 떨쳤다.


최승희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중국으로 와서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차원 높은 예술무용을 공연하여 중국예술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예술전통을 익혀나갔다.


바로 이 시기 매란방과 최승희는 역사적인 조우를 가진다. 매란방등 경극계의 명배우들은 최승희를 수차 방문했고 그와 함께 무대예술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다. 최승희의 높은 무용예술표현, 견해는 매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중국의 “화경일보”는 “노래를 위주로 하는 옛 경극은 최승희 무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가서 변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소식까지 실으며 최승희의 실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경극대사 매란방과 교류하면서 최승희는 경극을 토대로 한 무용 창작론과 기본 동작을 모형화하고 교수체계를 정립해 중국 무용을 현대화하는데 기여 했다. 그러한 정론을 최승희는 인민일보에 “중국무용예술의 무용예술의 미래”라는 서명문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 이애순교수는 일찍 발표 한 논문 “중국무용의 현대화와 최승희의 역할” 에서 최승희가 중국에 예술무용을 전파하며 중국무용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한바 있다.)


한편 자신의 무용세계를 살찌우는데서 최승희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는 실제 중국무용의 실험적 창작에도 참여해 여러 유형의 창작물을 탄생 시켰다. 그중 중국의 고전문학과 경극의 검무를 소재로 만든 “패왕별희”와 당나라 양귀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양귀비 연무지도”가 대표적이다. 어젯날 양귀비를 소재로 한 매란방의 대표작 “귀비취주”와 역시 양귀비의 춤사위를 재 해석 한 최승희의 “양귀비 연무지도”가 농도와 줄기가 다른 현란한 모습을 뽐내며 한 무대에서 어우러졌다.

 

살얼음과도 같은 시대에 오로지 타오르는 예술혼을 고이 껴안고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면서 민족적인것을 세상에 알리는데 혼신을 던진 매란방 그리고 최승희,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운명의 질곡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를 거장들의 앞선 행보는 보여주고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조명되고있는 예술대가들의 모습들, 다시 한 번 경모를 머금고 보고 듣고 읽어 본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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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전설의 춤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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