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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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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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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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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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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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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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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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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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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주주의의 성공 비결
●송첸/중국 리즈 트러스(Liz Truss) 영국 총리가 집권 44일 만에 사임하고 리시 수낙(Rish Sunak) 총리가 두 달 만에 보수당 내 세 번째 총리로 취임한 것은 영국식 민주주의가 정치적 안정을 담보하기에는 무능함을 보여준다. 미국식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서방 민주주의는 정당 정치에 기반한 부자들을 위한 클럽이다. 서방 정치의 주장은 풀뿌리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의회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항의할 수 있지만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러한 항의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트러스의 몰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낙수 경제"를 기대하면서 수백만 파운드의 기업과 개인에 대한 세금 부담을 낮추려는 그녀의 계획으로 인해 발생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그 계획이 부자는 더 부자가 되도록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깊은 빈곤으로 몰아넣는다고 비난했다. 미국에서 최고 정치인(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포함)은 백만장자이다. 빈곤율 11.7%는 세계 평균인 10.1%보다 높지만, 이들은 국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을 찍어내며 세계 곳곳에서 불필요하고 부당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마약 중독과 총기 난사도 정부가 국내 정책보다 대외 정책에 집중하기 때문에 골칫거리다. 반면 중국은 절대빈곤을 근절한 유일한 주요국이다. 14억 인구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이를 통해 토지 개발, 교통 연결성, 수력 발전소를 통한 청정에너지 생성 등 생활 환경도 개선했다. 중국은 또한 인터넷 서비스가 가장 외진 마을에도 도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서방에서 정치는 국민의 복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 정부가 하거나 제안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에서 생존하거나 권력을 얻는 것에 관한 것이다. 서방의 민주주의는 혼돈 속의 권력이다. 중국의 민주주의는 법이나 조치를 확정하기 전에 풀뿌리를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려하는 인민의 힘이다. 서방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18세에 도달한 모든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 투표권과 피선거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타운 및 카운티 수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에 의해 선출된 지방 인민대표대회 대표는 투표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의 대표를 선출한다. 이는 영국, 미국 및 기타 서방 국가의 민주적 투표 시스템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자격이 있는 유권자들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그 의원이 해당 국가의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인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로 번역되는 민주다. 중국은 이처럼 크고 다양한 국가이기 때문에 소수 민족 간의 투표도 허용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 제도를 사람 최우선으로 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 좋은 거버넌스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정책 결정은 서방처럼 정치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풀뿌리 국민도 포함한다. 국가 최고 정치 자문기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는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에 있어 폭넓은 협의를 주창함으로써 중국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특징과 장점을 충분히 보여준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공개 협의를 통해 수립된 정책 선택은 여론과 밀접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범위한 공개 협의로 인해 중국의 정책 변경은 위에서 아래로, 지역, 성, 시, 진 및 촌에 이르기까지 긴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생각과 필요를 반영하며 정치인의 아이디어와 결정이 우세한 서구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또는 조직적 투입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현대 기술의 출현으로 중국 정부는 시민들에게 법률 및 규정 초안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온라인 상담을 점점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 상담은 거버넌스 개혁의 도구가 되었으며 정치협상회의는 이를 대중적 지지를 육성하는 수단으로 수용했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정치협상회의는 중국 공산당이 만든 위대한 정치 협상제도이다. 사회주의 협상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당파, 인민단체, 민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주 : 본문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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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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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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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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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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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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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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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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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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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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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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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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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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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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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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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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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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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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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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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③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약속, 그것은 역중천균(力重千钧)이다. 또한 수파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말한 것처럼 “중국이 ‘WTO 가입’시 약속한 대외 개방을 이행한 것은 구성원 중 가장 깊고도 광범위하였다” 그리고 진리췬(金立群)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 총재는 “‘WTO 가입’ 초기 중국이 발전 배당금을 더 많이 받았더라면 현재와 미래는 세계가 중국의 기회를 더욱 많이 공유할 것”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회 이래 중국은 개방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파악하여 대외 개방의 질적 증가속도를 높였다. FTA 시험 구역과 자유무역 항구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대하였으며 외국인 투자 진입 네거티브의 부단한 축소와 ‘일대일로(一带一路)’의 가일층 심화…세계는 중국을 집중 조명하면서 중국 발전의 ‘급행열차’와 ‘편승열차’를 함께 타기도 했다. 푸젠(福建)에서 태어난 ‘중국초(中国草)’는 초대목(草代木)으로 식용균을 재배할 수 있어 경제적 가치와 생태적 효과를 겸비했다. 중국은 이 균초 기술을 전문가 그룹과 더불어 사심 없이 세계, 특히는 저개발국과 공유하고 있다. 현재 ‘중국초’는 세계 100여 개 국가에 뿌리를 내리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중국초’가 빈곤 지역의 발전 희망을 부풀리는가 하면 ‘중국 도로’, ‘중국 교량’과 ‘중국 열차’도 국경을 넘어 우정과 발전의 맥을 전하고 있다. 지난 12월 3일 중국-라오스 국제철도가 개통됐다. 북쪽 쿤밍(昆明)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비엔티안에 도착하는 국제 열차이다. 전체 길이는 1035킬로미터이다. 이 ‘강철 실크로드’는 동남아 국가들에 피복되어 번영과 풍요로움을 주는 큰 통로가 됐다. 또한 중국과 아프리카 27억 대중이 손잡고 높은 수준의 중국―아프리카 운명공동체 구축을 추진하고 중국·아세안 협력도 가일층 승화돼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이끌고 있다. ‘차이나 기회(中国机遇)’의 스토리가 매일 이어지면서 전 세계 우호 국가가 확대되고 개방과 공영의 굉장한 힘을 모으고 있다. 중국식 다스리기- 개방은 개혁을 추진하고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 개척 이는 ‘WTO 가입’의 배당금이자 개혁의 배당금이었다. 개혁은 진통이 있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긴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중국 기적’은 대외 개방과 개혁 심화를 결합한 소중한 경험을 갖고 있다. 왕원타오(王文涛) 중국 상무부장은 “WTO에 가입한 이래 중국은 개방으로 개혁과 발전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끊임없이 완전하게 추진해 시장과 사회의 역동성을 불러일으켰다”며 “개방은 체제의 문제점을 표출시키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바로 개혁의 주안점이다”라고 밝혔다. 1986년 중국이 정식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총 협정 체결국 지위 회복신청을 낸 이래 15년이란 긴 회복기간과 ‘WTO 가입’ 협상이 있었다. 이로 하여 중국은 WTO에 미리 적응하는 시간을 벌었고 국내 경제 개혁에 방향을 제시했다. 장샹천(张向晨) 세계무역기구 사무 부총장은 “다자간 무역체제와 국내 경제체제 개혁을 통합해야 국제무역체제에서 수혜를 볼 수 있다”며 “결재기간은 15개의 영업일에서 3개의 영업일로 압축되었으며 올해 4월 하이난(海南) 해상사무 부문의 개혁으로 하이난 FTA항의 첫 외국인 독자기업인 양푸항(洋浦港) 착지가 빨라졌다”고 평가했다. 20년 동안 중국의 이러한 국내개혁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났었으며 경제 분야의 각종 체제기제의 약점을 부단히 보충했다. 개방하면 늑대와 춤을 추는 업종이 반드시 있을 법이기에 중국은 오히려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굳은 살을 헤치고 다시 태어나라’고 몰아붙이곤 했다. 자동차업계의 경우 더 많은 외국 브랜드를 유치했지만 자국 브랜드에도 기회를 주어 중국 자동차도 경쟁에서 ‘물 대포’를 맞으며 ‘보위전’을 치렀지만 그것이 ‘진급전’을 이어갈 정도로 경쟁이 커졌다. 469만 대와 5000만 대, 이는 2001년과 2020년 중국 자동차생산 판매량의 비율로 거대한 차이가 업계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2018년 합자주율 제한이 가시화되면서 신에너지 트랙에서 중국산 자동차들이 앞지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 네거티브 리스트 개정(负面清单) ‘감법(减法)’ 하나하나가 더 개방적인 영역을 의미했고 리스트가 적어질수록 관리 틀과 모델상의 개혁 요구는 더 높아졌다. 개방은 제도로 보장하고 개방은 제도로 확대한다는 것이 중국이 세계에 보내는 더 높은 수준의 개방 신호다. 2018년에는 중국의 첫 ‘제도적 개방’을 실시했고 2019년에는 ‘규제·관리·기준 등 제도적 개방 추진’을 명시해 중국의 개방 개혁이 국내제도 차원으로 한 단계 더 확대됐음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전 세계에 약속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중대한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룽융투(龙永图) 중국의 ‘WTO 가입’ 수석협상대표는 “오늘날 인민 중심으로 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이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20년간 중국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수준, 발전 단계, 수용 능력에 입각하여 질서정연하게 시장 개방을 추진하였다. 또 선진국 발전 경험과 사회주의 제도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금융업에서 중국은 서방의 100년 간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발전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즉 본토와 결합해 제도 혁신을 하였고 나름대로의 세계적 금융허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중국은 반성과 함께 금융업 개혁과 개방을 자국의 절주대로 밀고 나갔다.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先为不可胜,以待敌之可胜)’이라고 ‘손자병법’의 이 구절은 소박한 진리를 말한다. 자신의 단점을 직시해 약한 부분을 공략하면 후발 강점을 살리고 결국에는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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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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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②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에 새로운 시대에 들어 중국의 더욱 폭 넓은 개방에 더욱 경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표 대회 이래 중국의 대외 개방은 수동적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세계 경제를 이끄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났다. 지난 12월 1일, 중국-유럽행 열차가 충칭 단결촌에 있는 철도 중심역에서 화물을 가득 실은 채 천천히 빠져나왔다. 충칭세관이 올해 들어 감독관리를 더 한층 풀어준 2191번째 중국-유럽행 열차로 그 옛날 사막의 낙타방울이 오늘날의 ‘강철 낙타 행렬’로 된 셈이다. 10년간 중국-유럽행 열차는 이미 일대일로를 공동 건설하는 중요한 운반체가 되어 중국의 대외개방 판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충칭이란 이 ‘산성’은 세계에로 통했고 ‘옛 고지’는 다시 새로운 봉우리로 올라가게 되었다. FTA 실험 구역은 수차례 중국의 동서남북에 일떠섰다. 선전 경제특구의 40년 재출발, 하이난 자유무역항은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했고 광둥, 홍콩과 마카오는 공동으로 국제 일류의 걸프 지역과 세계적인 도시 군을 건설했으며 슝안 신구(雄安新区) 천년대계와 국제소비중심도시 건설은 쾌속 궤도에 진입했다. 이렇듯 하나의 강력한 움직임이 모여 중국경제 총량을 100만 억 위안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했고 1인당 GDP는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공업 분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빠른 걸음으로 고품질 발전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즉 신에너지차, 인공지능(AI), 디지털경제 등 분야에서 대규모의 추월을 야망하고 있다. 중국의 기회, ‘세계시장’을 개방 육성하고 세계경제를 일지춘수(一池春水)로 활성화 시켜 중국은 개방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개방 속에서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 ‘중국의 기회’는 세계적인 대 변혁사였으며 4회 연속 거행된 수입품 박람회는 경전적인 주목으로 ‘이전난구(一展难求)’의 큰 인기였다. 곧 바로 세계 각국이 개방 확대와 세계화의 종심(纵深) 발전을 향해 던진 중국의 ‘신뢰표’는 중국 시장의 큰 매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2018년, 중국은 보호무역주의 역풍에 맞서 세계 최초로 수입을 주제로 한 국가 급 수입품박람회를 상하이(上海)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무역자유화와 경제세계화를 지지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또한 2019년에 있은 제2회 수입품박람회는 신 중국 창립 70주년을 맞아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이라는 시대적 강음을 전했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재출발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2020년에 있은 제3회 수입품박람회는 전 세계 코로나19 상황의 충격에 직면하여 중국은 세계에 향해 “새로운 발전 구도는 결코 폐쇄적인 국내 순환이 아니다”라고 정중히 선언했다. 국내와 국제라는 쌍 순환 트랙을 더욱 활짝 열어놓은 셈이다. 2021년 제4회 수입품박람회의 취지는 ‘개방의 봄바람으로 세계가 따뜻하게 하자’는 대국의 드넓은 도량이었다. 중국은 인구 14억여 명과 중위소득 4억 명 이상으로 연간 약 2조5000억 달러의 수입과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크다. 수입품박람회의 ‘로드맵’중국 시장은 ‘세계의 시장, 공유하는 시장, 우리 모두의 시장’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WTO 가입 20년, 중국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세계와 시장 기회를 확고히 공유하고 있다. -화물 부문은 전체 관세가 7.4%로 낮아지고 서비스 부문은 120개 가까이 개방돼 모두 ‘WTO 가입’ 시의 약속 수준을 웃돌았다. -중국은 120여 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로 부상해 지난 20년간 세계 경제성장에 대한 연평균 기여율이 30%에 육박했다. -세계적인 수입대국이 되어 42개 최빈 개도국의 97%에 대해서는 관세면제 혜택을 주었고 25%에 해당하는 그들의 수출을 유치하여 최빈개도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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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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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④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1968년의 10월 초부터 곽영회는 핵 실험장에서 중국의 첫 열핵탄두 발사 준비작업에 참여하면서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날 저녁 그는 북경으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고는 곧 비행기를 탈 목적으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당시 야간항공편을 타지 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라는 동료의 만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곽영회는 역시 “야간항공편을 이용하면 이튿날 근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이 곽영회는 과제 연구조 성원의 회보를 받은 후 인차 비행기에 올랐다. 5일 새벽, 곽영회가 탑승한 비행기는 북경 수도공항에 서서히 착륙하다가 지상 400미터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균형을 잃었으며 한동안 허우적거리다가 공항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옥수수 밭에 추락했다. 당시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 도합 14명 중 중상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그 생존자는 당시 추락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곽영회가 생명의 마지막 시각에 “아, 나의 서류!”라고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사고 직후 구조대원들이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머지 13구의 희생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너부러져 있었지만 유독 2구의 시신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시커멓게 탄 시신 2구를 떼어내려고 애를 쓰던 중 그 2구의 시체의 가슴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였다. 거의 멀쩡한 서류 가방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곽영회가 상급에 보고하려고 했던 그 열핵미사일 시험 데이터 자료가 있었다. 그 시신 2구의 시신은 곧 바로 곽영회와 경호원으로 확인됐다. 열사의 정신은 영생한다 곽영회가 당한 조난은 삽시에 세상을 진동하였다. 주은래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비행기는 내비게이션시스템(导航系统)에 고장이 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곽영회의 비보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던 전학삼은 “그냥 10초였다.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수한 역학 연구 대가가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 10초였다!”며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한편 조난 소식을 접한 곽영회의 아내 이패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혼자 베란다로 나와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07년 이패 여사는 평생 모은 돈 60만 위안을 두 차례에 걸쳐 중국과학기술대학과 중국 과학원 역학연구소에서 설립한 ‘곽영회 장학금’에 기부했다. 들려오는 풍문에 따르면 당시 누군가 이패 여사에게 “왜 기부의식을 차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패 여사는 그냥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식은 무슨 의식? 그냥 원해서 기부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에서는 곽영회에게 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즉 곽영회가 사망한지 22일 후, 그가 생명으로 지켜낸 중요한 자료에 따라 중국은 첫 열핵미사일 실험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또한 1970년 4월, 곽영회가 직접 설계한 ‘동방홍 1호(东方红一号)’ 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프로젝트에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자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23명 중 곽영회는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 연구개발에 모두 참여하고 이바지한 과학자이자 유일한 열사였다. 2018년 7월, 국제 소행성센터는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공지를 발표하여 일련번호 212796과 212797의 소행성은 ‘곽영회성’과 ‘이패성’으로 영구 명명했다. 매번 우리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우리의 진로를 안내하는 것은 언제나 빛나는 그 별이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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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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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①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일전,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지난 11일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20주년을 맞은 날(이하 ‘WTO 가입’으로 약칭)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나무채 하나, 사인펜 하나로 중국은 세계 무역의 대 가정에 ‘입성’, 카타르의 도하 만에서 이를 지켜보며 글로벌 산업 고리의 가치 고리를 공유하는 역사적 기회를 얻게 되었다. 20년 간 중국은 개방으로 개혁을 촉진하고 개혁으로 발전을 촉진해 ‘세계의 공장’과 ‘세계의 시장’으로 도약하겠다는 ‘WTO 가입’ 약속을 전면적으로 이행했다. 전면적으로 샤오캉 사회(小康社会)를 건설하는 첫 번째 100년 분투 목표의 실현을 추진하였다. 그 20년 후, 역사의 새로운 길에 들어서면서 중국은 ‘탈군(退群)’, ‘탈연(脱钩)’이라는 세계화의 역류 앞에서 강대국의 담당과 역사의 주도권을 보여주었으며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끄는 역사적 변혁을 맞았다. “군자는 근본에 충실하고 그 본은 도생으로 일어선다(君子务本,本立而道生)”. 100년 만의 큰 변화에 직면한 중국은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을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으며 인류 운명공동체 구축의 발걸음은 지축을 울렸다. 중국의 기적: 개방은 ‘세계의 공장’을 만들었고 중국 발전의 도도한 물결을 격발시켰다 현재의 중국으로 된 데는 개방전략의 힘이 컸다. “‘WTO 가입’이 분수령이었다.” 중국 대외경제무역대학 세계무역기구연구원 도신취안(屠新泉) 원장의 말이다. 그렇다면 1971년 유엔에서의 합법적 지위가 회복된 것이 중국의 ‘정치적 신분’이었다면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은 중국의 ‘경제적 신분’을 해결한 것이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에 세계는 곧 급성장하는 ‘중국의 기적’을 맞이했다. 거시적 안광으로 보면 중국 경제는 후발 우세와 비교 우세를 과시했다. 2010년 경제 총량은 일본을 앞지르면서 6위에서 10년 만에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WTO 가입’ 전까지 4%에 불과했던 중국의 GDP가 2020년에는 전 세계 17%를 점했다. 다음 미시적 안광으로 보면 ‘늑대가 왔다’는 경고에 중국 업체들은 늑대와 함께 춤을 추며 국제경쟁의 시련을 이겨내면서 큰 잠재력을 발휘했다. ‘WTO 가입’ 전까지 세계 500대 기업 중 10여 개에 불과했던 중국 기업이 2021년에는 143개의 기업이 명함장을 올렸다. 그리고 효율적 안광으로 보면 20년 전 중국에서 하룻동안 드나들던 수출입 물량을 지금은 3시간 남짓하면 완료할 수 있고, 20년 전 중국이 1분 동안 일궈내던 GDP 수치는 지금은 7초면 충분하다. “큰 보폭으로 시대를 성큼 따라갔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 부장에 따르면 지난 20년 간 중국의 경제 총량과 화물 무역은 모두 8배나 증가하면서 중국은 세계 1위의 무역대국이 됐으며 대외직접투자는 세계 26위에서 1위로 성큼 올라섰다.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 때문에 중국이 ‘WTO 가입’ 약속을 전면 이행했음을 세계가 증명하고 있다. "‘WTO 가입’ 3년이 지나자 중국은 무역 경영권을 개방할 것을 약속했다. 2004년 7월 새 무역법을 시행하여 반년 앞당겨 실현했다. ‘WTO 가입’ 약속을 이행하여 3년 동안에 증권회사 주식 3분의 1을 외국인이 차지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지식재산권 보호를 약속하면서 중국은 ‘국가 지식재산권 전략요강’을 제정, ‘중국 지식재산권 보호 행동계획’ 등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다양한 분야로부터 1000여 건의 구체적 조치를 시행했다. 사실 중국은 WTO 가입 약속을 10년 만에 모두 이행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초과기여를 했다. 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라미 등 유지인사들은 모두 중국에 ‘WTO 가입’ 답안지에 ‘A+’라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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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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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③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곽영회는 귀국하자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의 직접적인 접견을 받았다. 접견 장소에서 주은래가 곽영회에게 “무슨 요구가 있는냐”고 묻자 곽영회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하룻 빨리 업무에 임하고 싶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조국이 수요하는 사업에 투신 1956년 말, 중국역학연구센터가 설립되자 전학삼이 소장을 맡았고 곽영회가 상무부소장이 됐다. 그 이듬해에는 역학연구센터와 청화대학이 공동으로 공학역학 연구반을 운영하였으며 곽영회가 담임교원과 강사를 맡았다. 1958년 중국 과학기술대학에서 화학물리학과를 설치했으며 초대 학과장에는 곽영회가 부임했다. 그러는 동안 곽영회는 ‘역학보’와 ‘역학번역총서’를 창간하였으며 동시에 많은 역학학술 명작을 번역 출판하였다. 이렇게 곽영회는 전학삼과 더불어 중국 근대 역학사업의 창시자로 되었다. 이후 곽영회가 참여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교수나 연구보다 어렵고 간고하였으며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인 즉 중국이 자체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의 관계 파탄으로 관련 전문가와 기술 장비 및 관련 자료를 모두 철수해 중국의 ‘양탄 프로젝트(원자폭탄과 수소탄 프로젝트)’는 심한 난항을 겪었다. 당시 곽영회는 도면과 자료도 없는 상황에서 위기 앞에서 왕감창(王淦昌), 팽항무(彭桓武) 등과 함께 중국 핵무기 연구의 최초 3대 기둥을 형성, 당시 중국과학원 제9연구원(현재의 중국공정물리연구원)에는 4개의 첨단기술위원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중 곽영회가 장외 실험위원회를 이끌면서 핵무기 개발의 실험과 무기화를 담당했다. 원자폭탄 연구 과정에서 곽영회는 한편으로는 과학자들을 위해 폭발역학과 탄두설계의 기본 이론을 전수시킴과 아울러 신속하게 실험실을 건립하여서는 구조의 강도와 진동과 충격 등의 데이터를 연구했다. 특히 대잠 핵무기의 수중폭발역학과 수역학 등에 관한 연구도 담당, 거기에 폭발 물리 실험에서 곽영회는 연구팀을 이끌고 실험을 거듭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해 최종 우열을 가리는 것’으로 중국의 첫 원자폭탄 폭발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 결정됐고 이후 이는 중국의 1세대 핵무기에 사용됐다. 1963년, 곽영회는 핵무기 개발 연구진과 함께 핵무기 연구 기지로 거처를 옮겼다. 당시 이미 반백이 넘은 곽영회는 중국의 1세대 핵무기 연구자들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다. 영하 40도의 혹한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대지 그리고 고지대 반응으로 인한 두근거림과 가슴의 답답함, 부종을 견뎌야 하고 밤낮없이 계산하고 연구, 실험과 폭파를 반복하면서 곽영회는 중국의 원폭 실험을 성공에로 몰고 갔다. 1964년 10월 16일, 중국 신강의 뤄푸버(罗布泊) 상공에는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중국의 첫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던 것이다. 순간, 환호하는 인파 속에서 곽영회는 격정의 눈물을 쏟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뒤에도 곽영회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수소폭탄과 미사일 개발에 관한 작업 외 1965년 9월부터 곽영회는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개발 중 위성 본체가 지구로 귀환하게 하는 연구팀을 지휘하게 됐다. 고강도, 고밀도 작업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 곽영회한테는 여가시간이란 전혀 없었다. 그는 워낙 음악 감상을 좋아했다. 미국에서 귀국할 때 음반 두 상자를 가져왔지만 오랫동안 봉투도 뜯지 않고 있다가 결국에는 몽땅 중앙인민방송에 보냈다. 그리고 그는 우표 수집을 좋아했으며 그한테는 수집해 놓은 우표만도 책 세 개에 달했다. 그러나 이 역시 국가 우정총국에 몽땅 보내졌다. 그는 또 촬영도 좋아했으나 결국에는 렌즈를 만질 틈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당시 곽영회는 실험기지와 북경을 자주 오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늘 비행기를 탔다. 당시 중공중앙은 그의 안전을 위해 늘 걱정했으며 주은래 총리 역시 곽영회 같은 과학자들의 비행기 탑승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쫓기 위해 늘 비행기에 탑승했다. 1968년 12월 4일, 그날도 곽영회는 야간항공편을 이용했다.(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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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②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당시 곽영회를 포함한 중국의 유학파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임이 인차 증명되었다. 곽영회, 전위장과 임가추 등 3명은 함께 캐나다 토론토대학 응용수학부에 보내져 반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곽영회는 1941년 미국 캘리포니아 이공대학 공기역학연구센터에 입학하여 공부하게 됐다. 당시 이 연구센터의 구겐하임 항공실험실(GALCIT)은 전 세계 최고의 연구센터였다. 왜냐하면 이 센터의 기둥 교수는 세계 기체역학의 신격인 폰 카르멘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곽영회는 훌륭한 교수를 만났고 또한 평생의 지기였던 선배 전학삼을 알게 되었다. 학업기간 곽영회는 ‘초음속류 불연속해결’ 연구를 주도적으로 제안했다. 이는 당시 공기역학 분야에서의 최우선 과제였으며 후에 곽영회는 이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냈다. 1946년, 폰 카르멘의 학생 빌럼 힐스는 코넬대학에 항공공학 연구원을 설립하려 했다. 이러자 폰 카르멘은 곧바로 그에게 제자 곽영회를 추천했다. 또한 매사추세츠 이공대학(MIT)으로 강의하러 가려던 전학삼은 직접 차를 몰고 와서는 후배 곽영회를 코넬대학으로 호송하기도 했다. 코넬대학 교수로 부임한 곽영회는 비행기의 초음속 장애 제거를 위한 돌파 연구에 몰두했다. 당시 초음속 비행을 갓 실현한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인즉 일단 비행기가 초음속에 가까워지면 저항이 급증하는 것이었다. 일단 조작이 먹통이 되면 추락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초음속 장애 제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곽영회는 자신의 끈질긴 연구끝에 업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완전히 새로운 계산 방법을 창조하여 인류가 음향 장애를 돌파함에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1946년 5월, 전학삼과 곽영회는 미국 캘리포니아 이공대학을 떠나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에 부임했다. 이들 두 사람은 당시의 NASA에 ‘압축이 가능한 무선 아음속과 초음속 혼합형 흐름 및 상임계 마하수(可壓縮無旋亞聲速和超聲速混合型流動和上臨界馬赫數)’란 제목으로 된 논문을 제출해 초음속 흐름에서의 이론과 계산 문제를 해결하고 초음속 비행체 설계를 크게 촉진했다. 공기역학과 응용수학에서 뛰어난 활약과 공로로 곽영회가 미국 업계에서 크게 명성을 얻게 되자 많은 대학에서 강의를 요청했고 관련 기업들도 높은 연봉을 대가로 스카우트했다. 당시 곽영회는 이미 코넬대학의 교수이자 항공공학 연구원의 3명 핵심 중 한 명으로 미국에서 자동차와 집이 있었고 생활도 편했다. 그러나 1949년 이후부터 그의 마음속엔 귀국이라는 욕구가 더 강열해졌다. 그때 어떤 친구가 “장차 아이들도 이곳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텐데 왜 빈곤하고 낙후된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가”며 곽영회의 생각을 돌려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곽영회의 대답은 “가정과 나라가 가난한 것은 아들로서의 무능을 말해줄 뿐이다. 나는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자부하며 나한테는 귀국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조국을 건설할 책임이 있다”는 몇 마디였다. 그러나 곽영회의 귀국길 쉽지 않았다. 그때 곽영회는 코넬 대학에 도착하자 “내가 이 대학교에 온 것은 그냥 잠깐 온 것 뿐이며 이제 적당한 시기가 되면 곧 떠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항공공학연구회에서 근무하면서 곽영회는 많은 기밀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한번은 곽영회의 테이블 위에 한 장의 등록지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을 위해 복무할 의향이 있느냐”는 물음란도 있었다. 그것을 본 곽영회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NO(아니오)’라고 적었다. 그 이후 곽영회는 더 이상 기밀 자료를 열람할 권한을 잃었다. 1950년 전학삼은 미국당국에 귀국 제의를 했다가 수감되었으며 아울러 자택도 검문검색을 받았다. 동시에 곽영회의 출국 자유도 제한되기 시작했다. 곽영회는 영국에 가서 강의하는 것조차 불가능 했다.이런 상황은 1955년까지 지속되었고 중미 양국이 대사급 회담에서 합의를 보고 나서야 미국은 자국 내 중국 유학생과 과학자들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전학삼은 마침내 먼저 귀국할 수가 있었다. 전학삼이 귀국한 후 곽영회는 귀국 욕망이 더욱 강렬해져 매일 아내 이패(李佩)와 귀국 계획 의논했다. 그동안 코넬대학은 곽영회를 잡아 두기 위해 높은 급여를 제시했고 대만 당국도 후한 대우로 그가 대만으로 오기를 희망했다. 드디어 귀국 날짜가 다가왔다. 곽영회는 자신이 10여 년간 심혈을 쏟아왔던 대량의 연구 자료와 강의 원고를 태웠다. 이에 아내 이패의 회억에 따르면 연구자료는 남편의 오랜 정성이란 사실을 알고 말렸지만 당시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곽영회 또한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렇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것을 가지고는 미국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다” 곽영회가 이렇게 과단한 결심을 내린데는 선배 전학삼이 귀국할 때 갖고 있던 서적과 공책 800킬로그램이 모두 미국 세관에 의해 압수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곽영회가 원고를 태운 바로 다음 날 코넬대학 항공공학 연구원 원장은 곽씨네 부부를 위해 대형 피크닉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서 곽영회는 곧 완성될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현장에 있던 교수들과 학생들은 모두 타오르는 불빛을 바라보며 묵묵부답이었다. 1956년 9월 30일, 마침내 곽영회 부부는 몇몇 중국 과학자들과 함께 귀국하는 ‘클리블랜드 프레지던트호’에 탑승했다. 그런데 배가 출항하기 직전 미국 이민국과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갑자기 배에 올라 귀국하는 모든 중국 과학자들의 짐을 강제로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패는 사전에 남편이 서적을 다 태워버린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에 대해 그때에야 알았다고 회고했다. 2시간여 만에 ‘클리블랜드 프레지던트호’가 드디어 고동을 울렸고 곽영회는 마침내 귀국하게 되었다. 그해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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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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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유엔 평화수호 행동의 관건역량으로③
- [동포투데이] 중국은 30년 넘게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유엔 평화 유지부대의 핵심 역량으로 됐으며 말리, 콩고 등 임무 수행 지역에서도 그랬고 갑작스런 코로나19 사태 시에도 중국 평화유지군은 ‘대국의 담당역할과 세계 평화 수호’란 초심과 사명감을 안고 실제 행동으로 전란 충돌 지역 주민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중국 평화유지군 참모 장교, 평화유지활동 차질 없이 진행 ● 쥐환레이(勾焕蕾) 1990년 4월, 유엔 정전감시기구에 군사관찰원 처음 파견하면서 중국군이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하는 길이 열렸다. 30여 년간 25개의 유엔 평화유지 활동에 참가한 중국군은 매년 말리, 남수단과 콩고 등 위험한 전란국가와 뉴욕 유엔본부에 군사관찰관, 참모장교, 기간제 장교를 파견해 휴전, 연락협상, 행동지휘, 조직계획 등을 관찰, 감독했다. 우리가 평화 유지의 길에 오른 것은 인류의 평화를 지켜낸 것이자 세계에 중국을 알리고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3년 전 평화유지 임무를 맡고 콩고로 떠난 데 이어 2020년 3월 6일, 우리는 사명감과 영예감을 안고 다시 평화유지 일선인 서아프리카의 말리로 향했다. 말리는 사하라 사막과 가깝기에 날씨가 무덥고 늘 황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무장충돌이 빈번히 발생했다.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이후 말리에서는 247명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순직했으며 2020년 3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유엔 평화유지군은 13차례나 공격을 받아 7명이 숨지고 66명이 다쳤다. 당시 말리에는 중국 평화유지군의 공병, 의료분대가 일선에서 안전보호, 공사건설, 의료보장 등 평화유지 활동을 원만히 수행하고 있었다. 말리에서 다 층차의 유엔 종합안정특파단(이하 유엔 안정단으로 약칭)에 배치된 중국군 참모장교는 모두 13명으로 업무는 인사, 작전, 훈련, 공사 등 다양한 직종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처음 도착하자 사령부 업무 영역 내에 빨리 편입되기 위해 선배들이 남긴 경험을 배우는 한편 프로세스를 익히기에 주로 노력했다. 동시에 영어 대화 연습을 추가하는 등 대외교제를 능력 제고에 힘썼다. 2020년 3월 25일, 말리에서는 처음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보고됐으며 4월에는 유엔 안정단에서도 확진자가 나왔다. 당시 사령부 내의 방역조치에는 손 씻기와 재채기를 할 때면 팔꿈치로 가려야 하는 등이 있었다. 우리는 국내 효과적인 방역 경험을 주둔지와 공유하기 위해 코로나19 방역 지도팀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채택했다. 또한 군인 전원에게 마스크 착용과 방역 방법 홍보, 밀접촉 상황 추적과 통계 작성, 격리병동 건립 등 많은 일을 하였지만 모두들 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낌새였다. 그래도 성과도 있어 6개월 후 1만3000여 명의 주둔지에서 확진 자 제로(0)를 달성하였으며 코로나19 1차 확산 사태를 이겨내고 작전 능력을 최대한 보장했다. 초심을 잊지 않으면 사명은 반드시 달성되는 법이다. 참모 장교는 개인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중국의 목소리를 세계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명감이 곧바로 스트레스를 동력으로 삼아 도전장을 내밀고 평화유지 활동에 적극 기여하게 한 것이다. 말리 수도에서 400킬로미터 떨어진 동부의 중등 도시 자오에서 나의 동료인 리윈강(李云钢)은 유엔 안정단 동부 전구 훈련처 수석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해마다 7월에서 9월까지는 말리는 우기여서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도로가 질척거려 열악한 자연환경이 후방 수송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훈련과 실전을 결합하기 위해 리윈강은 공병부대를 조직하여 숙영지내에 깊은 도랑을 파서 물이 무릎까지 올라오는 하천을 만들었다. 이어 도하전술 동작에 대해서는 안전 경계, 팀 편성, 위험 제거 등을 보급했다. 이 도하 훈련 방법은 유엔 안정단 총사령관의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동부 전구 의료처 참모 장교인 장웨이(张伟)는 작전 중 부상자 이송과 의료기재 후송 등을 조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수년간 무전기를 들고 다니다가 돌발상황이 닥치면 정신적으로 대처했으며 늘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 한치의 소홀함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해 6월 1일 새벽, 다급한 전화 소리에 잠들었던 장웨이는 잠을 깼다. 독일 평화유지군 작전 소대가 자폭공격을 받아 6명이 다쳤던 것이다. 부상자 후송이 시급했다. 장웨이는 즉시 구조에 응하는 절차를 개시하여 작전지휘센터에 연락해 헬리콥터가 사고 지점으로 출동하도록 조정하고 아울러 중국 2급 병원에 즉시 진료준비를 하도록 통지하여 부상자가 제때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직책에서 빈틈없이 성실히 업무를 수행하고 사령부의 기능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적극 추진했다. 평화 유지 임기는 짧은 것이다. 나는 훈련담당 사령부 전투준비처 처장에서 훈련평가를 담당하는 부참모장으로 성장하면서 잊지 못할 경험을 많이 했다. 이렇게 우리는 30여 년 간 평화를 지켜온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아 분쟁지역 주민들에게 믿음과 힘을 불어넣었으며 평화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작자는 유엔 말리 다층차 통합 안정특파단 사령부 전 부참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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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유엔 평화수호 행동의 관건역량으로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