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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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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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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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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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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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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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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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로나19 사망자 65만 명 초과! 美 정부 국민께 할 말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12일, 중신망은 ‘코로나19 사망자 65만 명 초과! 美 정부 국민들에게 할 말은?’이란 제목으로 중국 산시성(陕西省) 작가협회 레이중저(雷钟哲)작가의 글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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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4
  • 문재인정부에 실망이 크다
    ●김정룡(多가치 포럼 대표) 오는 9월 7일부터 제5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고 정부가 발표했다. 1인 가구 건강보험료 17만 원 이하이면 1인 25만원을 지급한다. 이렇게 따지면 전체 80%이상이 재난지원금을 받게 된다. 필자가 제5차 재난지원금에 주목한 것은 재한동포사회에 대한 지급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년 재난지원금 지급에 있어서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동포들의 경우 영주권자(F-5), 국민의 배우자(F-6)에 한해서만 지급했을 뿐 재외동포비자(F-4)와 방문취업비자(H-2)는 제외시켜 논란이 있었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혹시나 하는 의망을 품었으나 역시나 실망이다. 무슨 말이냐면 이번 제5차 재난지원금 지급에서 역시 F-4와 H-2를 배제시켰다는 것이다. 코라나19는 어느 나라든 빠뜨리지 않고 휩쓸고 있다. 따라서 어느 나라든 재난지원금 문제에 마주하고 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경우 자국에 장기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재난지원금을 어떻게 지급하고 있을까? 미국을 비롯한 유럽국가들 및 이웃 나라인 일본마저 90일 이상 장기체류하면서 경제 활동하는 외국인에게 전부 재난지원금을 지급했거나 하고 있다. 여기서 경제활동이라는 개념은 세금을 납부한다는 의미이다. 재난지원금 뿐만 아니라 작년 초 코로나19 확산 시 선진국들에서는 마스크 판매에 있어서 외국인을 제외시키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재한동포사회를 어떻게 대해 왔는가? 지난해 3월 초 정부는 마스크 품절현상에 대비해 공적마스크를 판매했는데 내국인에게만 팔고 동포들에게는 팔지 않았다. 한 달 지나 마스크 공급이 조금씩 완화되자 건강보험가입자에게만 한해서 판매했다. 어느 공무원 나으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내국인만 마스크 쓰고 ‘외국인’은 마스크 쓰지 않아도 방역이 된다는 건지? 공적마스크 판매에서 외국인을 제외시키더니 재난지원금 지급도 외국인을 배제했다. 혹자는 중앙정부는 국민을 대상으로 정책제도를 펼치기 때문에 외국인을 제외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의 정부 행정시스템 상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핑계가 된다면 F-5와 F-6 소지자도 똑 같이 제외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왜 어떤 비자는 되고 어떤 비자는 안 된다는 것인지? 선진국들이 외국인에게 지난지원금을 지급하는 조건은 정상적인 체류자로서 세금을 납부하는 자이다.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F-4와 H-2 소지자들은 역시 세금을 납부하고 있고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이 두 가지 조건만 구비되면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두 종류 비자 소지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사실 재한중국동포 중 F-5와 F-6 소지자는 소수이고 F-4와 H-2 소지자가 50여만 명이나 된다. “만약 중국동포들이 전부 한국을 떠나는 날이면 대한민국은 마비상태에 빠질 것이다.” 어느 거물급 정치인의 말이다. 현재 F-4와 H-2 소지자들이 대한민국 산업을 떠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중요한 일을 떠맡고 있는 이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그렇거니와 제도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더 웃기는 것은 F-4와 H-2 소지들을 주민으로 취급하지 않고 순수 외국인으로 취급하면서 왜 주민세는 꼬박 받아 가는가?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주민세를 납부하는 사람들을 재난지원금에서 배제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일흔이 넘는 안00는 작년 1월 말 한국에 입국해서 F-4비자로 10개월 체류하다가 작년 11월 말경에 출국했는데 요즘 2021년 주민세를 납부하라는 고지서가 날아왔다. 이미 출국한 분들마저 주민세를 납부하라고 하면서 재난지원금은 안 주겠다는 정부는 이북 말로 표현하자면 실로 ‘아다먹기, 시비도리를 따지지 않고 막무가내란 뜻)’다. 물론 전산 시스템 상의 문제로 인해 출국이 체크가 안 돼 그럴 수는 있겠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자. 하지만 필자의 뜻은 받을 것은 악착스레 받으려 하면서 줄 것은 주지 않겠다는 정부의 속셈이 야속스럽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또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정부는 재한외국인을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시켰다. 듣기 좋게 의무적 가입이지 사실상 강제가입이다. 물론 의무든 강제든 가입자체를 흠 잡자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이든 외국인을 건강보험에 가입시켰으면 그에 해당되는 혜택도 따라가야 마땅한 제도가 아닐까? 이번 제5차 재난지원금 지급 조건은 1인당 수입도 보지만 가장 기본 조건이라 할까 건강보험에 가입한 자에게만 한해 지급한다. F-4와 H-2 소지자 중 다수는 세금도 납부하고 건강보험에도 가입되어 있다. 내국인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재난지원금을 주지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대한민국이 아니었다면 우리 조선족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넉두리는 이젠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왜냐면 과거 시장에서 사과 한 알 사 먹으려 해도 중국과의 환율을 따져보고 내밀었던 손을 주춤거리며 한 푼이라도 최대한 아껴 고향에 송금해서 빚 갚고, 자녀를 공부시키고, 아파트를 마련하던 시대에나 맞는 말이다. 이젠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천지개벽이다. 고향에 사 두었던 아파트를 팔고 한국에서 내집 마련에 보태고, 자동차도 사고, 입을 것을 아끼지 않고 입고 먹을 것을 아끼려고 먹지 않는 세월은 이미 천방야담(천일야화)과 같은 얘기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젠 주말이면 명절이면 가족끼리 친구끼리 여행 다니고 낚시 다니면서 즐기는 삶을 살고 있다. 번 돈을 한국에서 대부분 소비하는 시대가 왔다. 내국인과 똑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왜?! 이 말만은 하지 않으려고 다짐했건만 너무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주민의 정치성향은 진보를 지지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보편 현상이다. 미국의 경우도 공화당 정부는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치고 민주당 정부는 그 장벽을 허문다. 쉽게 말하자면 진보 정권은 약자의 편에 서고 보수 정권은 이주민을 배척하는 경향이 보편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의 경우 과거 한 때 절대다수가 불법체류로 암담하게 살고 있던 동포들을 합법적으로 구제한 것이 노무현 정부이다. 2007년 3월 방문취업비자(H-2)를 신설하여 조선족동포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되었고, 고향에 합법적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재한조선족사회는 진보정권을 많이 지지해왔다. 문재인 정부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지지를 보냈다. 약자를 대변한다는 문재인 정권 초기에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는 몰라도 많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재인정부 들어서서도 영주권자를 포함한 동포 자녀가 유치원에 다니면 유치원비를 내야 한다. 내국인과 같이 세금 내고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어도 유치원비를 낸다. 4년 내내 이 문제를 제기해도 허공의 메아리다. 2년 지난 시점에 동포사회에 대한 정책제도상 별로 눈에 띌만한 변화가 없었다. 후반기에는 낫겠지. 그런 와중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환난이 생겼을 때 친구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코로나19사태가 터지자 공적마스크도 사지 못하게 하고 재난지원금도 주지 않는다.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캠프들에서 동포사회를 많이 찾아온다. 마치 제기하는 문제를 전부 해결해 줄 것처럼 공약(公約)에 반영하겠다고 큰소리들 친다. 정작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수염을 쓱 닦고 돌아선다.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만 남발하려 다니는 선거캠프들. 이젠 이런 ‘사기성적인 정치해위’에 속지 말아야 한다. 거꾸로 선거철만 되면 후보 캠프에서 00위원장, 00본부장이요 하는 임명장을 받으면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우쭐대는 동포사회도 문제이다. 동포사회도 이젠 이런 유치한 행위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치 참여가 시행되어야 할 시기이다. 아직도 성숙되지 못해 정치인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그런 유치한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공적마스크와 같은 차별을 하지 않을 후보, 재난지원금도 주는 후보, 재외동포비자 소지자를 외국인이 아닌 진정 주민으로 받아들이려는 후보에게 한 표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9-06
  • 신하의 배신과 군주의 책임
    ●김정룡(多가치 포럼 대표) 제나라 환공은 사치하고 방탕하며 예의를 지키지 않았고 인륜도덕마저 저버린 패악무도한 자로서 군주의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임금이었다. 그런 이를 춘추오패로 만든 인물이 바로 관중(管仲)이었다. 관중은 사·농·공·상 제도를 만들어 정치를 개혁하였고, 조세개혁으로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고, 인류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창(公娼)을 설치하여 이웃나라들의 정보를 수집하여 제압하는 등 그 시대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 위대한 정치가 관중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성을 쌓고 남은 돌이 되었다. 제환공은 비어 있는 재상 자리를 채우려고 관중을 찾아갔다. “중보(仲父)께서는 집에서 병들어 계시는데 불행이도 이 병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면 장차 누구에게 정치를 맡기면 좋겠소?” 관중이 대답했다. “소신은 늙었습니다. 물어볼 것이 못됩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신이 듣기로는 ‘신하를 잘 아는 데는 그 왕만 한 사람이 없으며 자식에 대해 잘 아는 것은 그 아비만 한 이가 없다.’고 합니다. 왕께서는 마음속에 생각했던 바를 먼저 말씀해보십시오.” 환공이 말했다. “포숙아는 어떻소?” 관중이 말했다. “안 됩니다. 포숙아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곧고 고집이 세며 일처리에서 너무 과격한 면이 있습니다. 강직하면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나설 우려가 있고 고집이 세면 백성들의 마음을 잃게 되며 과격하면 아랫사람들이 등용하기를 꺼려할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두려워하는 바가 없으니 패왕의 보좌역이 아닙니다.” 환공이 또 물었다. “수조는 어떻소?” 관중이 말했다. “안 됩니다. 사람의 본성이란 누구나 자기 몸을 아끼기 마련입니다. 군주께서 질투심이 강하고 여색을 매우 좋아하자 수조는 스스로 거세해 후궁들을 관리하였습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자가 어찌 그의 왕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환공이 또 물었다.“그렇다면 위(衛)나라 공자 개방(開方)은 어떠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 사이는 열흘 거리에 불과합니다. 개방은 왕을 섬긴다는 이유로 그 비위를 맞추려고 십오 년 동안 부모를 찾아가 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인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자신의 부모도 섬기지 않으면서 또 어찌 왕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한공이 계속하여 물었다. “그러면 역아(易牙)는 어떠하오?” 관중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역아는 군주의 미각만을 위할 뿐입니다. 한번은 왕께서 맛보지 못한 것은 사람고기뿐이라고 하자 역아는 그의 장자를 삶아 바쳐서 왕께서 맛보게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삶아 요리를 해서 왕께 바쳤으니 자기 아들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또 어찌 왕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환공이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좋겠소?” 관중이 말했다. “습붕(隰朋)이면 좋습니다. 그는 사람됨이 안으로는 굳은 마음을 지녔고 밖으로는 예의가 바르며 욕심이 적고 신의가 두텁습니다. 안으로는 마음이 굳건하므로 표준으로 삼을 만하며 밖으로는 예의가 바르므로 큰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또 욕심이 적으므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고 신의가 두터우니 이웃나라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패왕을 보좌할 사람이 갖춰야 할 조건입니다. 왕께서는 그를 쓰십시오.” 환공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소.” 일 년이 지나 관중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환공은 습붕을 등용하지 않았고 수조에게 자리를 주었다. 수조가 나라의 대사를 관장하게 된 지 삼 년쯤 됐을 때 환공은 남쪽으로 당부를 유람하고 있었다. 그때 수조가 역아, 개방과 대신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환공은 목마르고 굶주린 채 남문의 침궁(寢宮)에 갇혀 죽었다. 환공의 시신을 죽은 지 석 달이 지나도록 거둬주지 않아서 시체에 생긴 구더기가 문밖으로까지 기어 나올 정도였다. 환공의 군대는 천하를 주름잡고 자신은 다섯 패자의 우두머리가 됐지만 마침내 신하들에게 시해당하고 고귀한 명성까지 잃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환공의 이 처참한 말로의 원인을 역사가들은 관중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신을 등용한 탓이라고 말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신하가 임금을 배신하여 나라를 빼앗은 사례는 많고도 많다. 하나라를 뒤엎고 상나라를 세운 탕(湯)은 본래 하나라 걸왕의 부하였고,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한 주무왕도 본래 상나라 주왕(紂王)의 대신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하극상의 세상이었다. 대부는 제후를 뒤엎고 제후는 천자의 위에 군림하여 세상을 흔들어 그야말로 뒤죽박죽이었다. 군주가 신하의 배신에 의해 망하는 데는 공통적인 패턴이 있다. 신하를 잘못 등용한 것이 망인(亡因)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차기 대선시즌이 불붙은 시기이다. 야권의 대선후보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로 간칭함)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신하였다. 희한한 것은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부임한 윤석열이 재직 시부터 여론조사에서 야권대선후보로 꼽혔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년 전 취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국민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장관급 인사가 재직 시에 야권대선후보로 매일이다시피 여론에 오르내린 적이 문재인 정권 이전에는 없었으니 실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6월 29일 윤석열이 대선출마를 선언하자 여권인사들이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배신자!” “자기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는 몰상식한 자!” “배신자의 말로는 좋지 못할 것이다.” 뭐 대충 이런 식인인데 골자는 ‘배신’이다. 윤석열 입장에서는 자신을 배신이라 공격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핍박에 못 이겨 문재인 정권을 떠났고 핍박에 못 이겨 양산박에 오르듯이 차기 대선출마를 선언했다고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역사를 돌아보면 역사적으로 신하가 일으킨 구테타가 성공하면 영웅이고 실패하면 역적이다. 문재인 정권을 약탈정부라고까지 비난하고 정권교체를 외치면서 대선출마를 선언한 윤석열의 행위는 걸왕의 부하 탕의 출정식을 떠올리게 한다. “오라 그대들이여, 모두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나는 감히 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하의 죄가 많아 천명으로 이를 토벌코자 한다.” 윤석열이 입만 벌리면 내세운 ‘국민의 뜻’이 바로 탕의 천명과 닮아 있다. 아무리 천명을 핑계로 내세워도 탕은 내내 무력으로 주왕을 내쫓았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윤석열은 아무리 국민의 뜻을 들먹여도 문재인 정권에 등을 돌리고 자심이 몸담았던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행위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 없을까? 탕은 다행히 중훼(仲虺)라는 친구가 나서 글을 지어 위로했고 일명 ‘중훼지고’라는 글이 역사에 남아 내려왔다. 윤석열은 누가 나서 위로하는 글을 역사에 남겨 줄 것인지? 그건 그렇고.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하마평에 올릴 때 일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여 세상이 아주 시끄러워졌다는 것이 일부 여권 인사들의 주장이다. 당시 반대 이유는 주로 윤석열의 사법연수 기수 때문이었다고 한다. 윤석열은 나이는 많은데 늦깍기라 사법연수 선후배 기수를 따지는 검찰 ‘계급사회’에서는 부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관중에게 물어보았다면 아마 관중은 아래와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전하, 안 됩니다. 윤석열의 사법연수 기수가 문제가 아니라 윤석열은 ‘선대 임금’에게 칼을 겨눴던 자로서 후대 임금에게 칼을 겨누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의 성향은 변하지 않으니 그를 등용하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중용하면 안 되는 주요 이유입니다.” 임금 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검찰개혁이니 짐은 윤석열을 가장 적임자로 간주해왔소. 임명을 강행해야겠소.” 임명장 수여식이 열렸다. “당신을 굳게 믿소. 살아있는 정권에도 칼을 겨누세요.” 임금의 이 한 마디가 부메랑이 되어 윤석열이 현정권에 대해 마음껏 칼을 휘둘러대도 임금은 입도 뻥긋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윤석열의 ‘배신’은 임금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봐야 마땅하지 않을까? 서두에서 인용한 관중과 환공이 주고받은 대화의 포인트는 임금이 신하를 잘못 등용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조를 탓하기보다 임금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조간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릇 귤나무를 심은 자는 그것을 맛있게 먹고 향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가시나무를 심은 자는 그것이 성장하면 찔리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 등용이 귤나무를 심은 것이 아니라 가시나무를 심어 자신이 그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문제는 대통령이 자신이 임명한 신하를 자신이 컨트롤이 왜 안 되는지?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궁금증이다. 전한 때 황생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모자가 아무리 헐었더라도 머리 위에 쓰는 것이고 신발이 아무리 새것이라도 발에 신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상하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비자에』에 이르기를, “무릇 호랑이가 개를 복종시킬 수 있는 까닭은 발톱과 이빨을 지녔기 때문이다. 만일 호랑이에게서 발톱과 이빨을 떼어 개에게 붙여 사용하게 한다면 호랑이가 도리어 개에게 복종할 것이다.” 속설에 이런 말이 있다. 한 길의 나무가 천 길의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은 그 나무의 길이가 길어서가 아니라 그 나무가 산꼭대기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분명 ‘모자’이지 ‘신발’이 아니다. 문재인은 분명 ‘호랑이’지 ‘개’가 아니다. 그는 또 천 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이다. 이것이 바로 군주에게 주어진 권력이다. 이런 ‘하늘같은 권력’을 손에 쥐고도 왜 신하 하나 컨트롤 못해 질질 끌려 다니는지? 나 같으면 초기에 불러놓고 이렇게 처리하겠다. “나의 임명을 받은 사람이 야권 차기대선후보 1위라니 말이 되나. 보자 하니 나와는 ‘철학’이 맞지 않은 것 같은데 사표를 내세요.” 본 시리즈의 주요 포인트는 군주의 통치술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삼 김 이후 대통령들은 확실히 왕의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통치술이 매우 빈약하다. 문재인 대통령도 통치술, 그 가운데서도 용인술이 매우 부족하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독립군을 등용하지 않았다. 반일했던 사람들은 기필코 반미 할 것이고 친일했던 사람들은 또 친미 할 것이라는 것이 이승만의 판단이었다.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집권해야 하는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승만은 용인술을 아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친일파를 등용함으로써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못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이 아주 시끄럽다. 이 면에서 말하자면 이승만은 만고의 죄를 지은 임금이다. 허나 개인적으로 평가할 때 이승만은 용인술을 아는 임금이라는 뜻이다. 그랬기 때문에는 그는 집권 시 반미에 부딪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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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6
  • 스포츠 실력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
    ● 철 민 지난 8일, 2020 도쿄 올림픽이 17일간의 열전 끝에 그 긴장하고도 화려하던 순간 순간의 막을 내렸다. 올림픽은 막을 내렸지만 그 여운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와 동메달 18매(미국은 금메달 39매, 은메달 41매와 동메달 33매로 종합 1위)를 획득해 종합 2위에 놓이면서 금메달에서는 스포츠 강국인 미국과 단 1매의 차이로 거의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종합 2위, 이는 중국 선수단 총체 실력의 합리적인 반영인가 아니면 실력 이상의 반영인가 또한 반대로 실력 이하의 반영인가? 필자가 인정하건 대 이는 자로 잰 듯이 정확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는 중국 선수단 총체 실력의 합리적이고도 정확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스포츠 실력의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가 스포츠 실력의 향상은 국력 향상의 축소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그 여러 가지 요소 중 역사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중국의 올림픽 출전 역사 대사기 중국이 제일 먼저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32년 7월(현대 올림픽의 기원은 1896년임)이다. 당시 중국 대표단은 도합 6명의 대표단 성원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제 10 회 올림픽에 파견, 당시 선수로는 류창춘(刘长春) 단 1명뿐이었다. 류창춘은 올림픽에서 원래 3개 종목의 육상 단거리 경기에 참가하려고 했지만 여로의 피로 때문에 400미터 종목은 포기하고 100미터와 200미터에만 참가하여 각각 5등과 6등을 하였으며 결승에 오르지도 못했다. 초라했다. 인구 4억 명에 달하는 대국인 중국은 스포츠에서도 서방세계와는 아주 까마득하게 거리가 먼 후진국이었고 말 그대로 ‘동아병부(東亞病夫)’였다. 그 뒤 새 중국이 창립되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 15회 올림픽이었다. 당시 중국은 비교적 늦게 올림픽 참가 초청을 받았다. 중국은 40명에 달하는 대표단을 파견하였지만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는 올림픽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 오직 우촨위(吴传玉)만이 100미터 배영 경기에 참가했다. 경기 성적은 1932년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결과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한편 그 당시 국제올림픽 위원회의 많은 인사들이 ‘두개 중국’론을 주장하면서 새 중국과 타이완(台湾) 모두 올림픽에 참가하게 하려고 하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1956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되는 제 16 회 올림픽 참가를 거절하였으며 1958년 8월 19일에는 성명을 발표하여 아예 국제올림픽 위원회에서 퇴출해 버렸다. 이어 중국은 그 뒤 1960년 8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있은 17회 올림픽, 1964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있은 18 회 올림픽, 1968년 10월 멕시코 멕시코 시티에서 있은 19회 올림픽, 1972년 8월 독일 뮌헨에서 있은 20회 올림픽과 1976년 7월 캐나나 몬트리올에서 있은 21회 올림픽에 불참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각종 월드컵이나 선수권에 참여하는 것으로 스포츠의 종합실력 향상에 여러 모로 노력을 쏟았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기어코 올림픽에 복귀하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스포츠의 종합 실력은 오직 올림픽에서만이 체현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중국은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점진적으로 스포츠 실력을 쌓아 가기만 했다. 이렇듯 중국 정부와 중국인민들은 먼 앞날을 내다보며 장기 타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1979년 11월 26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중국 올림픽위원회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타이완은 오직 중국 타이베이 올림픽위원회(台北奥委会)의 명의로 올림픽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그 몇 달 뒤 중국은 처음으로 13회 동계올림픽에 참가했다. 1980년 7월, 구소련 모쓰크바에서 22회 올림픽이 개최되게 되자 중국은 참가하기로 하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헌데 세상 풍운을 예측할 수 없다고 각종 원인에 의해 중국은 올림픽 정신과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모쓰크바 올림픽에도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올림픽 선수단은 1980년 4월 24일 국가올림픽위원회가 발부한 공고에 따라 모쓰크바 올림픽 참여를 포기하였다. 1984년 7월 2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컬리시엄에서 있은 23회 올림픽 개막식에는 중국 선수단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간판을 든 소녀의 뒤에서 진붉은 오성홍기를 추켜들고 입장했다. 이 대회에서 중국은 도합 225명에 달하는 선수단을 파견했다. 축구, 필드 하키 볼, 복싱, 승마와 현대 5종을 포함한 16개 종목에 참가하였으며 7월 29일, 푸라두 사격장에서 울린 중국 선수 쉬하이펑(许海峰)이 울린 총소리가 중국 올림픽 사상의 금메달 ‘0의 돌파’를 실현했다. 즉 이 금메달은 1932년 중국이 처음으로 올림픽에 참가한 이래의 첫 금메달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중국은 도합 금메달 15매, 은메달 8매와 동메달 9매를 따내 종합 4위에 올랐으며 ‘동아병부’란 오명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당시 스포츠 강국 미국의 벽은 높았다. 이 대회에서 미국은 도합 금메달 83매, 은메달 61매와 동메달 30매를 차지하며 금메달 수량 상 종합 2위인 루마니아(금메달 20매)보다 63매나 더 많았다. 한편 올림픽 대회에서의 중국의 굴기는 우연한 것이 아니란 것은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실로 입증되었다. 물론 자그마한 굴곡은 있었지만 올림픽에서 중국의 상승세는 지속되었다. 1984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이후 올림픽 대회에서 중국의 메달 획득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88년 9월,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 24획 서울 올림픽 당시 중국은 301명의 선수단을 파견,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5매, 은메달 11매와 동메달 12매를 획득하면서 종합 8위를 기록했다. 1992년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25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6매, 은메달 22매와 동메달 16매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1996년 7월 미국 애틀란타에서 개최된 26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16매, 은메달 22매와 동메달 12매를 따내면서 종합 4위에 올랐다. 2000년 9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27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28매, 은메달 16매와 동메달 15매를 획득, 종합 3위를 차지하면서 순위 한 단계 끌어올렸다. 2004년 8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된 28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2매, 은메달 17매와 동메달 14매를 따내면서 종합 2위를 차지했고 순위를 재차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스포츠 분야에서 강자로 군림하였다. 2008년 8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29회 올림픽, 중국은 일개 스포츠 후진국인 ‘동아병부’로부터 마침내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을 주최하는 동방의 ‘거성’으로 떠올랐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580여 명의 선수단을 선 보였고 중국 올림픽 사상 참여한 종목도 가장 구전하였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은 도합 금메달 51매, 은메달 21매와 동메달 28매를 따냈으며 금메달 순위에서는 스포츠 강국 미국을 따돌리고 첫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중국의 스포츠 종합실력이 미국을 능가했다는 설명은 아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미국은 금메달 36매, 은메달 38매, 동메달 36매 도합 110매로 여전히 중국의 100매의 메달 총수보다 많았다. 그리고 중국은 자국에서 개최한 올림픽이다 보니 천시, 지리와 인화 등 우세가 있었으며 진정으로 미국이란 높은 벽을 뛰어 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또한 그 뒤에 있은 몇 차례의 올림픽에서도 충분히 나타났다. 2012년 7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30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와 동메달 22매를 획득하면서 미국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했다. 2016년 8월,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개최된 31회 올림픽에서 중국 선수단은 금메달 26매, 은메달 18매와 동메달 26매를 따내면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종합 3위에 머물며 몇 회에 거쳐 지켜오던 2위 자리를 영국에 넘겨주었다. 스포츠란 항상 변화무쌍한 법, 올림픽 역시 그 법칙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실력적으로 강하기만 하면 남한테 뒤지는 건 잠시적인 것, 이번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32회 올림픽에서 중국은 종합 2위 자리를 되찾아 왔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폐막의 전날인 7일까지 만도 금메달 개수에서는 1위를 지키기도 했다. 경제 발전과 스포츠 실력 향상은 정비례 관계? 주지하다 싶이 개혁개방을 실시한 지난 40여 년래 중국은 세계를 놀라게 하는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였다. 데이터에 따르면 개혁개방이 되던 1978년 중국의 GDP는 3679억 위안으로 세계 10위에 있었으나 1년 전인 2020년에는 100만억 위안을 돌파했다. 40여 년 간 271.8배 증장하면서 미국의 버금으로 세계 2위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다. 구체적으로 보면 2000년 10만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이탈리아를 초과해 세계 6위를 점했고 2006년에는 20만 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영국을 초과해 세계 4위에 올랐다. 2007년에는 독일을 초과하면서 세계 3위가 되었다. 그리고 2010년에는 40만 억 위안을 돌파하면서 일본을 추월하면서 세계 2위를 차지했다. 그럼 중국의 GDP가 언제 미국을 따라잡거나 혹은 추월하는가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간적 문제만 남았다.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해 미국의 GDP는 20.94만억 달러였고 중국의 GDP는 14.71만억 달러였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GDP가 세계 경제에서 점하는 비율은 각각 24.7170%와 17.3811%이다. 그럼 이처럼 비약적으로 발전한 중국 경제와 중국의 스포츠와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거듭 말하지만 필자의 주장이라면 이 양자의 관계는 정비례로 발전한 관계라는 것이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 경제는 새 중국이 창립된 후에서 아주 오랫동안 낙후한 상태에 있었다. 적어도 중국공산당 11중 3차 전원회의가 열린 뒤인 지난 세기 70년대 말까지만도 ‘먹고 입는 문제’마저 해결하지 못한 빈곤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1980연대 초기부터 농촌에서는 호도거리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개혁개방으로 시장경제의 초급단계에 들어가면서 경제 분야에서는 초보적으로 생기발랄한 현상이 출현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1984년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23회 올림픽에서 중국은 금메달 ‘0의 돌파’를 시작으로 올림픽 폐막할 때까지 금메달 15매, 은메달 8매와 동메달 9매를 따내면서 종합 4위에 올랐으며 스포츠에서의 ‘동아병부’란 오명을 깨끗이 벗어 내쳤다. 아쉬운 것은 중국은 1956년에 있은 16회 올림픽부터 22회 올림픽까지 연속 7회의 올림픽에 불참하였기에 그 기간 동안의 중국의 종합 스포츠 실력에 대해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탁구와 체조 외에는 금메달 사냥에 성공할 종목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중국은 비록 낙후했지만 스포츠에서의 탁구와 체조에서만은 내노라 할 수 있었던 만은 사실이었다. 탁구와 체조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아무리 개도국이고 후진국이라 해도 자국의 특성에 따른 스포츠 종목은 가끔씩 있었다. 예하면 중국이 탁구와 체조를 내세울 수 있었다면 아프리카의 케냐 등 국가와 중남미의 자메이카 등 국가는 육상이 ‘명품 종목’이라 할 수 있었으며 남미의 브라질,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등 국가는 축구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다시 본 화제로 돌아와 1984년 7월의 로스앤젤레스의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의 종합 스포츠는 굴기하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즉 그 위에 있은 1988년의 서울 올림픽, 1992년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6년의 애틀란타 올림픽, 2000년의 시드니 올림픽, 2004년의 아테네 올림픽,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 2012년의 런던 올림픽 그리고 2016년의 리우 올림픽과 올해의 2020 도쿄 올림픽 등 올림픽에서 보면 중국은 스포츠 분야에서의 강한 굴기를 보였다. 이 10회에 걸친 올림픽에서 중국이 차지한 가장 낮은 종합 성적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의 8위였고 가장 좋았던 성적은 2008년의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1위였으며 해외 출전 사상 가장 좋은 성적은 2012년의 런던 올림픽(금메달 38매, 은메달 31매와 동메달 22매)과 이번 도쿄 올림픽(금메달 38매, 은메달 32매, 동메달 18매)에서의 종합 2위였다. 한편 중국 연변출신인 필자로서는 중국 연변의 경제 발전 및 스포츠의 발전과 중국 국가적 차원의 경제 발전 및 스포츠의 발전을 비교하면서 분석해보지 않을 수 없다. 연변은 중국에서 2개의 ‘축구의 고향’ 중의 하나이다. 즉 남방에서는 메이현(梅县)이었고 북방에서는 연변이다. 특히 지난 세기 50년대 주로 연변 조선족들로 구성된 지린성(吉林省) 축구팀은 중국 내 4개 강팀 중의 일원이었고 당시 중국의 모든 축구 전업 팀에는 조선족 선수가 없는 팀이 거의 없었다. 중국 국가 임업팀에는 일색으로 조선족 선수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연변은 또한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를 비롯한 동계 스포츠 방면에서도 유명한 곳이다. 동계스포츠라고 하면 중국에서는 흔히 헤이룽장성(黑龙江省)과 지린성에서 인재가 많이 나왔으며 지린성의 선수 거개는 연변적이었다고 한다. 이외 여자축구와 여자배구 역시 연변은 전국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이 중 일찍 지난 세기 80년대에 연변 여자축구가 중국 국내 리그에서 우승(남자축구는 1965년 지린성팀의 이름으로 우승)을 한 적도 있다. 스포츠뿐이 아니다. 연변은 일찍 ‘축구의 고향’과 더불어 ‘사과배의 고향’과 ‘가무의 고향’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가 지나간 일이다. 지금 연변에서 여자배구, 여자축구와 동계 스포츠는 뀅 구워먹은 자리가 됐고 남자 프로축구도 자취를 감췄다. 뿐만 아니라 현재 연변의 사과배는 풍년이 들어도 그 판로가 막혀 창고에서 썩어나는 현상이 비일비재이고 연변의 자랑이던 연변가무 역시 지린시가무단과의 경쟁에서 ‘1위 자리(지린성을 대표하는 가무단은 원래의 연변가무단으로부터 지린시가무단으로 넘어갔음)’를 내주어야만 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장시기 기간의 인구 감소와 내지와는 점점 뒤 처져지는 경제상황 등등이다. 그럼 연변스포츠, 사과배와 가무의 진로가 암울하고 심지어 부진하는 현상을 놓고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가? 필자의 조심스러운 분석이라면 아쉽고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이는 중국 내지의 스포츠와 기타의 모든 것이 전반에 거쳐 돌파성적으로 발전했다는 증거로도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연변의 상황에 가슴 아파하기도 해야겠지만 한편으로는 국가와 기타 국내 많은 지방의 거족적인 발전에 기뻐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민족과 국가가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2030년의 분수령 - 중국의 국력과 스포츠 실력 라인은? (에필로그) 세계의 많은 예언가들은 이제 2030년이 되면 중국 경제가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진작 추정했다. 필자가 중국인이라서 이 추정이 맞는다고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지나온 과정을 놓고 볼 때 이는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과 미국 사이에 GDP 차이는 분명 존재하나 구매력에서는 중국이 이미 미국을 추월한 상황이다. 그럼 경제발전과 스포츠 실력 향상이 정비례가 된다는 필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2030년 그 때에 가서 중국의 스포츠 역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올해에 개최된 도쿄 올림픽에서 어느 정도 증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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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7
  • '삼국지' 재해석⑳ 유비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Ⅰ
    ●김정룡(多가치 포럼 대표) 나관중의 구라와 유비의 이미지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두 사람과 도원에서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과 싸운다. 이들 삼형제는 황건적과 싸워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다. 전투라면 승패는 병가의 상식이어서 당연한 일이다. 동탁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뒤집어 놓자 전국에 반동탁연합군이 생겨났고 유비 삼형제도 이 조직에 가담한다. 동탁의 부하 화웅이 무술이 어찌나 뛰어난지 반동탁연합군에 대적할 만한 장수가 없었다. 이때 관우가 나선다.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를 비롯해 조조 등 한다하는 거물들이 모두 관우를 처음 본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관우의 실력을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그 중에 그래도 사람을 볼 줄 아는 이는 조조였다. 조조가 따뜻한 술 한 잔 따라주면서 고무격려로 용기를 북돋아준다. “이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오겠습니다.” 관우의 비장한 각오다. 과연 관우는 빈말을 하지 않았다. 술이 채 식기도 전에 검붉은 얼굴에 웃음을 활짝 담고 손에는 화웅의 머리를 들고 돌아왔다. 화웅이 죽자 여포가 직접 나선다. 유비 삼형제는 먼저 관우가 맞섰는데 결과가 나지 않자 장비가 나섰고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아 유비까지 합세하여 반나절 싸웠지만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자 여포는 돌아간다. 천하에 적수가 없다던 여포와 맞서 싸운 유비의 삼형제는 세상에 명성을 널리 알린다. 이들 삼형제의 출발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인지, <삼국연의>를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이들에게 푹 빠지게 된다. 유비는 출발도 좋았지만 223년 죽을 때까지 영웅의 발자취를 멋지게 남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 스토리들은 전부 나관중의 구라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나 역사에 깊은 연구가 없는 절대다수 독자들은 나관중한테 ‘사기’를 당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독자들이 알고 있는 유비 삼형제의 모습은 역사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문학적인 이미지라는 것이다. 진수의 <삼국지>를 역사적인 이미지라고 믿는다면 사서와 소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물론 소설은 문학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허구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도 무방하다. 재미가 있으면 그만이다. <삼국연의>는 진짜 재미있다. 어느 정도로 재미가 있나? 동양 삼국 고전 소설 중에 가장 많이 읽혔고 따라서 현재도 게임소재로 활용되는데 최고의 소재로 꼽히고 있고 수입창출도 다른 고전 소설이 죽었다 깨도 따를 수가 없다. 실망스런 사서의 기록 그렇다면 유비 삼형제, 특히 유비의 역사적인 이미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비는 역사적인 이미지와 문학적인 이미지가 너무 거리가 멀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진수는 <삼국지>를 기전체로 편찬했다. 그런데 조조와 그 후계자들에게만 ‘기(紀)’를 붙이고 나머지 수많은 인물들에게는 전부 ‘전(傳)’으로 기록했다. 예를 들어 조조와 그 후계자들을 ‘무제기’, ‘문제기’, ‘명제기’, ‘소삼제기’라 했고 유비는 황제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주전’, 그의 후계자 황제 유선을 ‘후주전’이라고 붙였고 손권도 마찬가지로 ‘전(傳)’으로 기록했다. 진수의 이와 같은 기록 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논란이 있긴 한데 문제는 촉서(蜀書)는 위서(魏書)와 오서(吳書)와 달리 유비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유언과 유장의 합전(合傳)으로 막을 열었다는 것이다. 유언과 유장의 합전 제목을 유이목전(劉二牧傳)이라 붙이고 부제를 ‘현명하지 못한 유비의 선조들’이라고 달았다. 유비의 팬들이 이 촉서의 서두를 접하게 된다면 기분이 되게 나쁠 것이다. 진수는 유언과 유장을 유비의 선조라고 했는데 사실 유비는 이들 두 사람과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다. 이 세 사람은 같은 유씨이고 모두 황족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아마 진수는 ‘선조’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후한에 이르러 세상이 혼란해지자 조정에서는 황족인 유씨 집안사람들을 각 지방에 관리로 많이 임명했다. 유주목인 유우, 형주목인 유표 등등이 있다. 유비는 자칭 황족이라 하지만 이 부류에 끼지 못했다. 유언은 익주목이었다. 시중 동부(董扶)라는 사람이 유언에게 말했다. “앞으로 수도는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익주의 분야에 천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유언은 동부의 이 감언이설에 빠져 천자가 되려는 마음이 강렬해져 걸림돌이 되는 자를 하나하나 제거하고 천자가 타는 수레 용구 1천여 대를 만들었다. 형주목 유표가 유언의 행실이 못 마땅해 조정에 표를 올려 고발했다. 조정에서는 유언을 일깨우려고 유장을 파견했는데 유언은 유장을 돌려보내지 않고 눌러 앉혔다. 유언은 마등(馬騰)이 일으킨 모반에 가담해 신세를 망친데다 낙뢰를 맞아 성이 불타고 수레 용구를 모두 탕진했으며 민가에까지 피해를 끼쳤다. 결국 유언은 인재와 천재가 겹쳐 상심하다가 악성종양이 나서 흥평 원년(194)에 죽었다. 유언이 죽자 익주 유지들이 유장을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익주목이 된 유장은 장송의 꾀에 넘어가 유비를 맞아들인다. <삼국지>에 의하면 “유비가 이끄는 장수와 사병은 유장이 있는 곳에 가서 1백여 일 동안 즐겁게 마셨다.”고 한다. 유장과 유비는 한중의 장로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해 나중에는 유비가 유장을 파멸시키고 촉을 차지한다. 진수는 왜 이 유언과 유장의 합전을 촉서의 첫머리를 장식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좋고 아름다운 일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부정적인 ‘사건’으로 서두를 떼야했을까? <삼국지> 연구가들은 이 때문에 매우 곤혹스러울 것이다. 유비의 출신과 소년 시절 유비는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유승(劉勝)의 후예라고 <삼국지>는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비는 황족이라는 ‘명함’을 내밀고 다녔다. 그런데 전통시대에서는 6대를 벗어나면 친족의 의미가 사라진다. 유승과 유비는 6대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에 유비를 황족이라고 볼 수 없어 당시 황족들이 지방 관리부임에 유비는 끼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어디를 가나 이르는 곳마다 누구든지 황족 후예로 인정해 주었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돗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독자들은 이 대목을 근거로 유비가 어릴 적에 매우 빈한하게 살았고 요즘 말대로 하면 흙수저라고 인식하고 자수성가한 모델이라고 높이 평가를 내리고 싶어 한다. 유비는 어릴 적에 진짜 가난하게 살았을까? <삼국지>에 의하면 “유비는 소년시절 책 읽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개와 말, 음악과 아름다운 옷을 좋아했다.”고 한다. 유비가 좋아했던 개가 그냥 떠돌아다니는 똥개였는지, 아니면 값비싼 사냥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추측해 본다면 똥개를 좋아하는 것을 갖고 사서에 개를 좋아했다고 기록할 리는 만무하니 비싼 개였을 확률이 매우 높다. 말은 아무리 보통 말일지라도 보통 백성은 소유하지 못한다. 게다가 좀 괜찮다는 말을 소유하려면 웬만한 경제여건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음악을 좋아하려고 하면 큰돈이 아니더라도 가난한 집 아이들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의 돈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옷도 당연히 돈이 있어야 좋아할 수가 있다. 개와, 말을 좋아한다는 표현은 유비가 그것을 소유했다고 보아야 하고 음악도 악기가 없이 그냥 좋아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다니려면 역시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유비는 어릴 적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유비의 집 동남쪽 모퉁이 울타리 옆에 높이가 5장(丈)쯤 되는 뽕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수레 덮개와 같았다. 그곳을 오가는 사람은 모두 이 나무를 기이하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틀림없이 귀인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탄생에는 반드시 ‘신화’가 있기 마련이다. 이 대목은 유비의 탄생신화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어서 기록된 문구가 중요하다. 유비는 어릴 때 같은 종중(宗中)의 아이들과 이 나무 밑에서 놀며 말했다. “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한 개거(蓋車, 천자의 수레)를 탈거야.” 유비는 필경 어릴 적에 가난한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부잣집(유씨 가문) 아이들과 놀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난한 집 아이면서 가난한 집 아이들과 어울린다면 어떻게 천자의 수레를 알 것이며 감히 천자의 수레를 탈 궁리조차 할 수 있겠는가? 유비가 어릴 적 가난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또 있다. 열다섯 살이 된 유비는 어머니가 공부하도록 하여 같은 종중인 유덕연(劉德然), 요서군(遼西郡)의 공손찬과 함께 전에 구강태수(九江太守)를 지낸 같은 군(郡) 출신 노식(盧植)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는 요즘처럼 의무교육도 아니고 또 공부한 비례가 매우 적었다. 유비 시절 공부하려면 부잣집 아이 아니면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물론 유덕연의 아버지 유원기(劉元起)가 늘 학비를 대주어 그의 아내가 바가지를 긁었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있다. “각각 따로 일가(一家)를 세우는데 어찌하여 늘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유원기가 말했다. “우리 종중에 있는 이 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이 부부의 대화를 보면 유비가 공부한 학비를 유원기가 전부 대준 것이 아니고 더욱이 유원기를 믿고 공부시킨 것도 아니다. 다만 유비가 어릴 적부터 싹수가 보였고 될 성싶은 떡잎 감으로 보였기 때문에 유원기가 학비를 늘 대준 것이다. <삼국연의>의 수천만, 심지어 현재까지 동양3국의 수억 명의 많은 독자 중 다수는 부자가 아니라 흙수저 출신이다. 이들은 한 가지 로망을 갖고 이 소설을 읽는다. 즉 유비는 가난한 출신으로 자수성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는 매력에 빠져든다. 그래서 유비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유비가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거나 인정하게 된다면 스스로 배신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유비의 출신과 소년시절의 이모저모를 알지 못하고 그냥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지만 한편 우리는 나관중한테 ‘사기’ 당한 것을 되돌릴 권리가 있다. 필자가 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재해석 작업을 하는 이유가 바로 되돌려주기 위함이다. 유비는 환갑 직전까지 3부 리그에서 헤맸던 인물 유비는 키가 7척5치(175센티미터)로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까지 닿고 눈을 돌려 자기 귀를 볼 수 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의로운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므로 젊은이들은 다투어 그를 가까이했다. 유비의 외모는 귀인(貴人)의 상이고 성격 또한 서글서글하고 붙임성이 좋아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범상치 않는 영웅의 기질을 갖고 있어 투자자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중산의 큰 상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 등은 천금의 재산을 모아 탁군 일대에서 말을 사려다가 유비를 보고 첫눈에 반해 뛰어난 인물이라 여겨 그에게 많은 돈을 투자했다. 유비는 이것을 종자돈 삼아 무리를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대목이 무슨 뜻이냐면 천하가 대혼란에 빠진 난세에 입으로만 하는 선비들은 나라를 구하지 못한다. 원소는 대단한 선비가문이지만 군벌로 변했다. 오로지 군벌이 되어야만 게임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유비가 투자를 받아 무리를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유비도 한황실(漢皇室) 부흥을 이루려면 군벌이 되는 길밖에 없었고 그 투자에 의해 군벌이 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군벌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 길은 험난하고 또 험난했다. 유비가 무리를 모아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황건적과의 싸움이었다.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안희현(安喜縣)의 현위(縣尉, 현의 경찰서장 급)로 임명되었다. 젊었을 때 유비는 아마 자존심이 굉장히 강했던 모양이다. 군의 독우(督郵)가 유비가 있는 현에 왔고 유비가 만나기를 요청했는데 재수 없게 거절당했다. 화가 난 유비는 독우를 묶어놓고 곤장 200대나 때렸다. 소설에서는 장비가 때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 유비가 더 많이 때렸다. 누가 더 많이 더 적게 때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급 관리를 팼으니 배길 수 없게 되어 관직을 버리고 도망갔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이 사람을 파견하여 단양으로 가서 병사를 모집하게 했는데 유비도 하비현에 이르러 적과 죽기내기로 싸워 공을 세워 하밀현(下密縣)의 승(丞)에 임명되었으나 또 관직을 버렸다. 뒤에 고당현(高唐縣)의 위(尉)가 되었다가 현령으로 승진하기까지 했는데 재수 없게 황건적에게 격파되자 공손찬이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유비는 기이하게도 관직을 쉽게 얻기도 하고 또 쉽게 버리기도 했다. 또 유비의 주특기는 여차 싶으면 도망가는 것이다. 앞으로도 유비의 도망을 여러 차례 만날 수 있다. 심할 때는 처자식까지 버리고 도망간다. 공손찬이 유비보다 나이가 더 많아 유비는 공손찬을 형으로 모시고 가까운 사이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유비는 공손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유비한테는 공손찬이 큰형 같은 사람이어서 가장 어려울 때 공손찬을 찾아갔던 것이다. 공손찬은 유비를 원소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유비가 공을 세웠으므로 잠시 평원(平原)의 현령을 대행했으며 뒤에 평원의 상(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비의 성미는 한 곳에 지그시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한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고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제(齊)에 주둔해 있던 유비는 전해와 함께 서주목 도겸(陶謙)을 구하러 갔다. 이때 유비는 사병 1천여 명과 유주의 오환족(烏丸族)에 속하는 기병이 있었으며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다다르자 도겸이 유비에게 병사 4천 명을 증원시켜주니 유비는 동창생이자 오랜 친구이자 형처럼 모시던 공손찬을 떠나 도겸에게 귀의했다. 도겸은 질병이 악화되자 유비에게 서주를 맡아 줄 것을 부탁한다. 먼저 별가 미축(麋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의 백성을 인솔하여 유비를 맞이하려 했지만 유비가 감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비는 겸손의 달이다. 감투가 생겼다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경솔한 인간이 아니었다. 보다 못해 답답함을 느낀 하비 사람 진등(陳登)이 유비를 설득한다. “지금 한나라 왕실은 점차 쇠약해지고 천하는 엎어지려고 합니다. 공업(功業)을 세우기에는 오늘이 좋은 기회입니다. 이 주는 튼실하고 풍요로우며 인구가 1백만입니다. 당신이 이 주를 맡아주시기를 머리 숙여 원합니다.” 진등의 이 말뜻은 당신이 한왕실 부흥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뭔가 공이 있어야 될 것 아니냐! 빈말로 하면 누가 인정해주냐!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이니 이 하늘이 내린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유비는 여전히 뒤로 빼며 사양한다. “원공로(원소)가 가까이 수춘(壽春)에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네 대에 걸쳐 공경 다섯 명을 배출했고 천하의 인심이 그에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주를 그에게 부탁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렇게 거듭 사양한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진짜 겸손의 달인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몸값을 높이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등은 유비의 거듭 사양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에 나섰다. “원공로는 교만하고 오만하여 혼란을 다스릴 만한 군주가 못 됩니다. 지금 서주에서는 당신을 위해 보병과 기병 10만 명을 모으려고 합니다. 위로는 천자를 돕고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시대의 오패와 같은 위업을 이룰 수 있고 아래로는 영지를 나눠 받아 국경을 지켜 공적을 죽백(竹帛)에 남길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제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저도 감히 당신 뜻을 듣지 않겠습니다.” 북해(宰相)의 재상 공융까지 나섰다. 그는 당대의 명성이 자자한 명사였다. “원공로가 어찌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을 잇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는 무덤 속에서 살이 썩어 없어진 송장의 뼈와 같은데 생각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현재 상황으로는 백성이 유능한 인물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하늘이 내려준 좋은 기회를 받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해도 늦을 겁입니다.” 유비는 더는 사양 못하고 마침내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원소도 유비가 서주를 다스리는 것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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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1-08-01
  • 말라리아 퇴치 후 국제사회 돕고 있는 중국②
    ‘영원히 가지 않는 팀’ 만든다 아프리카의 토고, 상투메 프린시페로부터 오세아니아 파푸아뉴기니에 이르기까지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인 ‘중국 방안’을 활용한 참가국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중국은 의료약품의 배달과 병원과 말라리아 퇴치센터의 건립은 물론 의료진과 과학기술자를 대거 배출해 ‘영원히 가지 않는 팀’을 만들고 있다. 2017년 중국 광둥(广东) 항말라리아팀은 파키스탄 정부와 협력해 키리비나 섬에서 말라리아 퇴치실험을 시작, 2018년 8월 ‘중국-파키스탄 말라리아 퇴치센터’가 문을 열었다. 항말라리아 단체의 위정제(余正杰)에 따르면 센터는 건립 이후 60여 회에 달하는 훈련을 조직하였으며 현지에서 30명에 가까운 말라리아 퇴치 중·고급 기술자와 200명 가까운 일반 기술자를 양성했다. 콩고 노스키우 주 쑥 재배기지 연구원 페생트 카를로마 씨는“우리는 푸른 쑥을 재배하며 관련 기술을 중국인한테서 배우는 것 등을 보급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말라리아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만연 상황 멈추지 않았지만 중국은 코로나19 발생 이후에도 아프리카 등 지역의 말라리아 대응을 도와주었다. 동아프리카 국가인 남 수단은 장기적인 전란으로 위생조건이 열악하고 의료자원이 부족했다. 중국(안후이-安徽) 제8진의 남 수단 의료팀장 우화이궈(吴怀国)에 따르면 당시 남 수단의 코로나19 상황은 말라리아 검사와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가져왔다. 우화이궈는 “코로나19와 말라리아 모두 발열증상이 있기 때문에 폭염 속에서도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위해 말라리아 항체 검사와 치료가 필요했으며 아울러 코로나19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흉부 CT 검사도 병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2007년 아프리카에 진출한 중국계 약 업체 푸싱(复星)의 약품에는 이미 20여 개의 항 말라리아 제품이 세계보건기구(WHO)를 통해 사전 약품 인증을 받았다. 병풍이 전 세계 공급 사슬에 가져온 도전에 직면하여 복성의약품은 국내 국제 구매 강도를 높이고 대체 공급 업체를 발전시켰으며 제품의 원부자재 공급을 보증하여 제품이 중국에서 아프리카로 순리롭게 운송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케냐 보건부 말라리아 프로젝트 사무국장인 조지 지투카는“지난 1년간 케냐는 항 말라리아 물자 부족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하자 중국 푸싱의약에서는 즉시 대량의 물자를 기증하여 급한 불을 꺼주었다”고 밝혔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7-27
  • 말라리아 퇴치 후 국제사회 돕고 있는 중국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중국에 말라리아 퇴치 인증서를 보냈다고 중국의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전에 중국은 말라리아 감염사례가 매년 3000만 건 정도씩 보고되다가 이어 4년 연속 현지 환자가 0건 발생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이 걸렸다. 중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 이르기까지 말라리아 없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믿음과 힘을 불어 넣으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다. 말라리아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여름이 되면 모기는 많은 사람에게 골칫거리가 된다. 별 볼일도 없는 곤충 때문에 수천 년간 지속된 인간과 말라리아 간의 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말라리아는 중국 민간에서 속칭 ‘학질’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말라리아 원충이 일으키는 급성 전염병이며 모기에 물리면서 전파된다. 말라리아 감염자는 간헐적으로 오한이 나고 열이 나 치료를 제때 받지 않으면 인체기관에서 혈액공급이 파괴돼 사망할 수도 있다. 그럼 말라리아는 얼마나 무서운가? WHO 웹사이트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 말라리아 발생 추정 건수는 2억 2900만 건, 사망건수는 40.9만건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30여 년 만에 서태평양 지역에서 말라리아 무 인증 판정을 받은 첫 국가이다. 여러 차례 전 세계 말라리아 퇴치 최전선에 나섰던 광저우 중의약대학교 쑹젠핑 교수(广州中医药大学宋健平教授)는 중국이 말라리아를 퇴치한 것은 세계에 위대한 공헌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말라리아는 퇴치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많은 말라리아 때문이 괴롭게 보내는 많은 나라의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말라리아와의 오랜 싸움에서 중 약초 중에서 청호소(青蒿素)를 발견하고 추출하여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 환자의 생명을 구했다. 중국의 축적과 총화의 경험은 말라리아로 고통 받는 여러 나라에 자리 잡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중국의 창의력은 말라리아에 대한 자국의 대처에 좋은 역할을 했는가 하면 전 세계에도 독특한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와 인민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새롭고도 혁신적인 방법을 찾고 있다. 보편적인 약복용으로 말라리아 유행 억제 말라리아 퇴치에 있어서 중국의 국제협력이라면 달의 나라 코모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아름다운 인도양의 섬에서는 한시기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렸다. 14살 때 말라리아에 감염됐던 나수는 예전에는 섬에서 많은 사람이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5세 이내의 경우 생이별을 경험하는 가정이 많아 부모들은 아이가 5세까지 살 수 있을지 걱정하였다고 한다. “이전에 우리 집에서 가족 3명이 말라리아에 걸린 적이 있었으며 입원비가 매달 많이 들었다.” 코모로 전 부통령 포아드 무하지는 이렇게 회고했다. 2006년 중국 광둥(广东)의 신난팡(新南方)그룹과 광저우(广州) 중의약대학교로 구성된 항말라리아 팀이 아프리카로 건너가 말라리아 퇴치 지원 사업을 벌였다. 광동 청호소 말라리아 퇴치 단체인 코모로 프로젝트팀 덩창성(邓长生)에 따르면 중국 측은 코모로인 지역에서 근무하고 있다. 멜라닌 복방으로 말라리아를 빠르게 퇴치하는 방법이기에 전 국민이 멜라닌 복제를 복용하면 인체에 있는 말라리아 원충을 퇴치하는 방법을 창조적으로 제시했다. 2014년에 들어 코모로는 말라리아 제로사망을 기록, 말라리아 발병 사례는 2142건으로 2006년 프로젝트 이전보다 98% 감소하였다. 인류 사상 처음으로 집단적인 약물개입을 통해 한 국가가 말라리아 유행을 빠르게 통제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더창성은 “2019년 전 세계 말라리아 사망자의 94%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해 아프리카의 GDP는 매년 평균 1%의 손실을 보며 이는 아프리카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크파카 칼루 WHO 아프리카 사무소 관원은 “아프리카의 말라리아 퇴치를 돕기 위해 중국은 항상 움직이고 있다”며 “아프리카가 앞으로도 말라리아 제로(0)를 달성할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7-18
  • 이재명과 필부의 분노
    ●김정룡(多가치 포럼 대표) 요즘 정치권에서 가장 핫한 말이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TV토론에서 이재명 지사가 한 말이다. 마땅히 나라 경영 정책토론이 관심을 끌어야 할 토론회가 엉뚱하게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 이 한마디 말에 다 가려져 버려 정치권이 시끌벅적하다. 이 말을 뱉은 당사자인 이재명 지사는 ‘이미 끝난 일을 갖고 재차 공격해오니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대응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그의 이 변명은 궁색한 답변으로서 자신의 점수를 많이 까먹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재명을 좋아한다. 이재명은 행정가로서 갖춰야 할 결단력이 마음에 들었고 개인사생활을 포함한 자신에게 향한 굴욕적이고 치욕적이고 수모적인 공세도 과거에는 의연한 태도로 이겨내는 것이 사나이다운 기질을 갖췄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이 사나이다운 기질은 정치가로서의, 특히 ‘왕’이 되려는 사람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재명을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이재명의 이번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라는 발언은 정말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역사에서 불세출의 정치가로 평가받아온 제갈량은 이런 말을 남겼다. “걸출한 정치가의 정확한 결정은 시의에 따라 임기응변해야 하고 심모원려(深謀遠慮)해야지 절대로 필부의 분노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 된다.” 이재명 지사의 이번 ‘바지’ 발언은 필부의 분노의 표현이므로 ‘왕좌’에 가까워지고 있는 유력한 대선후보 입장에서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 시민이 문재인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본인 명으로 경찰에 고소했다가 취하한 사건이 있었다. 일국의 군주가 필부의 분노로 시민을 대한 전형적인 사건이다. 표현의 자유가 한계를 넘어선 것인지 뭔지, 대통령 모욕죄가 어떻고 시시비비를 떠나 군주는 대범하게 모른척해야지 필부의 분노로 대처하면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웃음거리만 남기고 만다. ‘부인지인(婦人之仁), 필부지용(匹夫之勇)’이란 말이 있다. 부인지인은 불인(不仁)을 참지 못하는 것을 뜻하고 필부지용은 수모를 참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후흑학(厚黑學)』저자 이종오(李宗吾)는 ‘불인을 참지 못하는 것은 속이 검지 못한 이유이고, 수모를 참지 못하는 것은 뻔뻔하지 못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종오의 이 말 뜻은 영웅이 되려면 속마음이 검어야 하고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뻔뻔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공한 영웅인물을 살펴보면 이종오의 이 지적이 십분 맞는 말이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물론이고 삼국시대를 풍미했던 유비, 조조, 손권 모두 속마음이 검었고 얼굴이 뻔뻔했다. 반대로 천하쟁패에서 항우는 속마음이 검지 못하고 얼굴이 뻔뻔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항우의 부하였다가 후에 유방에게 의탁한 한신이 항우의 실패원인을 ‘부인지인, 필부지용’이란 여덟 글자로 촌평했다. 해하지전(垓下之戰, 항우와 유반이 천하를 놓고 다툰 최후의 결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항우는 겨우 적의 포위를 탈출하여 단기로 오강(烏江)에 도착했다. 이 때 오강의 정장(亭長)이 항우에게 강동에 가 전력을 만회하여 권토중래할 것을 권했으나 항우는 강동의 부형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모를 이겨내는 뻔뻔함이 없었던 탓이다. 죽는 순간에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한탄하고 원망했다. 항우의 실패는 군주가 마땅히 갖춰야 할 조건인 ‘인욕(忍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항우를 ‘부인지인, 필부지용’으로 촌평했던 한신은 어떠했는가? 한신은 출세하기 전에 동네 건달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는 수모를 당했으나 참고 견딘 뻔뻔함으로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한신은 속마음이 검지 못해 천하의 주인감은 아니었다. 한신에게는 괴철(魁徹)이라는 참모가 있었다. 그가 한신에게 유방과 항우에 대항하여 제 삼의 세력이 되라고 건의했다. 역사가들은 이 건의가 중국역사상 최초의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을 배신할 수 없다면서 괴철의 건의를 묵살해버렸다. 한신의 이 행위는 결국 천하 주인이 되려는 검은 속마음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항우의 라이벌이었던 유방은 수모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살펴보자. 항우는 억류하고 있던 유방의 부친을 인질로 삼아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의 부친을 삶아먹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유방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침착하게 이 같이 말했다. “당신과 나는 초나라 회왕의 명으로 형제의 동맹을 맺은 사이이니 나의 부친은 곧 당신의 부친이오. 당신이 부친을 삶아 그 국물을 마시겠다면 나에게도 한 사발 나누어 주도록 하시오.” 중국문화에서 치욕 가운데서 가장 큰 치욕이 바로 조상을 건드리는 일이다. 이 대목에서 유방이 부친의 삶은 국물 나누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부자의 윤리와 인륜을 떠나서 그가 최대의 치욕과 수모를 대범하게 이겨냈다는 영웅기질에 사람들의 눈길이 가는 것이다. 후세 사학자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유방이 천하를 거머쥔 데에는 이런 대담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 왈, “유방의 성공은 조상을 건드리는 최대의 수모 앞에서조차 필부의 분노로 대하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의연히 대처한 결과이다.” 유방에게는 스승이자 동지이자 부하였던 장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장량은 하비(下邳)에 있을 때 흙다리 위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은 일부러 다리 아래로 자신의 짚신을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주어오라고 시켰다. 이후 그는 장량을 만날 때마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 장량을 꾸짖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장량은 노인의 모욕적인 주문을 끝까지 참아내는 인내심을 보였다. 결국 그는 이런 시험을 무사히 거쳐 드디어 노인으로부터 세상에 전해지지 않은 희귀한 병서를 손에 넣게 되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수모를 수모로 여기지 않고 가장 뻔뻔하게 세상을 산 인물이 바로 유비일 것이다. “내가 머리에 털이 나서 이 세상에 유비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 원소의 사촌 동생인 원술이 한 말이다. 당시 원술은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손견과 그의 아들 손책을 들었다 놓았다 한 만큼 위력이 있었고 스스로 황제를 참칭할 정도로 무시 못 할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유비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유비는 별 볼일 없는 아마추어그룹에 속해 있었다. 실제 사실을 보자면 유비는 가장 먼저 동문수학했던 형벌 되는 공손찬에게 의탁했다. 원술에게 붙었다가 원소의 밑에 들어갔다. 조조한테 귀의했다가 여포에게 매달렸다. 나중에는 형주목 유표에게 신세를 진다. 이렇게 주인을 대여섯 번 바꿔가면서 얹혀사는 더부살이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유랑아다. ‘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남한테 얹혀사는 더부살이는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또 얼마나 많은 수모를 겪어야 했을까? 그렇지만 유비는 전혀 치욕으로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상황을 맞이하고 대처하면서 힘을 키웠다. 결과 유비는 아마추어에서 3부 리그에 명함을 내밀더니 나중에는 천하의 한 모퉁이의 주인자리에 올라 황제라는 우사모를 쓰고 생을 마감했다. 유비는 확실히 필부의 분노를 초월한 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상을 욕하는 것은 욕 중에 최대 욕이다. 조조는 자신의 조상 삼대를 악랄하게 공격했던 원수마저 용서했다. 진수의『삼국지』진림전(陳琳傳)에 의하면 관도대전에서 진림은 원소의 부하로 일하면서 원소를 대신해 격문(檄文)을 기초(起草)하여 조조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나중에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자 진림은 포로가 된다. 조조는 진림을 만나자 이렇게 말했다. “욕을 할 때 나를 욕하는 건 괜찮지만 어떻게 나의 조상 삼대까지 욕을 하는가?” 진림은 사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위에 화살을 얹으면 쏠 수밖에 없습니다.” 조조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그를 사공군모좨주(司空軍謀祭酒)로 임명했다. 삼국시대에 장수(張綉)라는 호족이 있었다. 장수는 조조에게 투항했다가 조조가 경각심을 늦춘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조조를 크게 격파했다. 이 싸움에서 조조의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죽었다. 조조와 장수는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는데 번번이 조조의 패배로 끝났다. 장수의 모사 가후는 당시 형세를 분석하고 원소는 믿을 만한 인물이 못 되고 결국 천하 큰 지분을 차지할 인물은 조조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장수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귀의하자고 권고한다. 조조의 아들과 조카를 죽인 죄를 지은 장수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펄쩍 뛴다. 그러나 장수의 우려는 기우였다. 장수가 일단 귀의해오자 조조는 멀리 마중 나가 가족처럼 환대한다. 아무리 인재가 시급한 상황이라 해도 아들을 죽인 원수마저 포용한 조조의 이 처사는 필부의 분노를 초월한 진짜 영웅의 기질을 갖춘 사나이의 배포이다. 진수는『삼국지』오주전에서 손권을 이렇게 평했다. “자신을 굽히면서 굴욕을 인내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임용하고 계책을 중시했다.” 손권이 자신을 굽히면서 굴욕을 인내했다는 것은 조조한테서 받은 수모를 말하는데 만약 손권이 필부의 분노를 초월하지 못했다면 진즉에 조조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굽힐 때는 굽히고 나설 때는 과감히 나서는 능굴능신(能屈能伸)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걸어야 할 길이다. 손권이 바로 이런 인물이었다. 이재명의 ‘바지사건’은 몇 년 전의 가황 나훈아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나훈아는 일본 야쿠자의 여자를 건드려 거세당했다는 루머 때문에 기자회견을 열어 단상에 올라 바지 내리는 시늉으로 가짜소문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이재명과 나훈아는 똑 같이 ‘바지사건’을 일으켰지만 이 둘은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명성이 높은 나훈아라 해도 필경 그는 일개 시민이다. 그러므로 나훈아는 필부의 분노로 일을 대처해도 괜찮다. 나훈아에 비해 이재명은 ‘왕’이 되려는 사람이기 때문에 수모를 당해도 필부의 분노로 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 1인1표 선거민주주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선거운동은 총칼을 든 전쟁에 비해 상대방에 대한 공격수법이 다양하고 매우 야비하고 악랄한 일들이 많다. 없는 사건을 조작하여 주관적인 자의적 판단으로 상대에게 네거티브를 발동하고, 근거가 없거나 부족한 루머나 스캔은 상대공격의 가장 좋은 수단이다. 과거 대통령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고건과 반기문이 이른 시점에 중도 포기한 이유가 바로 공격을 이겨내는 뻔뻔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들이 필부의 분노를 초월하지 못한 결과이다. 이재명은 여러모로 유방이나 조조와 비슷한 기질이 있다. 이에 과거처럼 필부의 분노를 초월하는 의연한 태도만 플러스 한다면 충분히 ‘왕좌’에 오를 수 있다. 한편 군주는 군주로서 갖춰야 할 조건이 있는데 ‘인욕(忍辱)’도 군주가 갖춰야할 필수 조건 중 하나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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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7-17
  • 미국의 제재는 영광이다
    ●장저우샹(중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홍콩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며 "중국(중앙) 정부가 홍콩 특별행정구역을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국 정치인 등 일부 서방 정치인들은 항상 경제에 대한 고유한 정의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빠진다는 게 무슨 뜻일가? 2021년 1/4분기에 홍콩은 7.9%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1년 전에는 -2.8%였다. 2021년 상반기에 홍콩 주식시장은 47개의 상장(IPO)을 기록했으며, 총 자금 규모는 2,129억 홍콩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머쉬엄(mushrooming)"으로 묘사되었다.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지 1년 만에 검은색 옷을 입고 몽둥이를 들고 한때 거리를 막고 민간인과 경찰을 때리던 폭도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한때 홍콩인들의 마음을 두렵게 했던 공포가 물처럼 증발했다.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이 발효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SAR는 중국 본토 및 외부와의 다양한 문화교류를 환영하고 있다. 7월 1일 홍콩대학과 홍콩폴리텍대학에 여러 명의 우주 비행사가 방문한 것과 7월 14일부터 시작되는 홍콩 도서전은 홍콩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이다. 홍콩인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삶을 설명하자면, 이성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평화롭고" "번영적인"이라고 부를 것이다. 바이든이 '악화'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오히려 충격적이다; 어쩌면 일부 서구 정치인들은 홍콩이 2019년처럼 폭동에 시달리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백일몽은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 언론들도 한 소식통을 인용해 금융 제재가 홍콩특별행정구 중앙인민정부 연락실 관리 7명을 대상으로 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마도 그 배후의 미국 정치인들은 과거에 다른 날조된 이유로 제재를 받았던 중국 관리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누군가를 제재하는 것은 영광일 뿐만 아니라, 제재받은 사람들이 홍콩의 질서와 번영에 기여한 것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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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1-07-17
  • ‘왕’이 되려는 윤석열에게는 ‘왕의 수업’이 우선이다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전 정권 치하에서 ‘변방’을 맴돌던 자신을 벼락출세 시켜준 임명권자에게 반항하는 배짱으로 재직 시부터 야권 차기 대선후보1위로 부상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하 윤석열이라 함)은 3월 4일 사퇴하고 ‘대통령공부’에 몰입해왔다. 지금까지 언론을 통해 전해진 바에 의하면 야당의원 누구누구를 만나고 김형석 학계 원로를 비롯해 여러 교수들을 만나고 기타 분야의 영향력이 있는 분들을 만나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고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수’에 노력해온 것 같다. 이런 과정을 밟는 것은 정치초보인 윤석열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코스’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만 의해서는 왕이 되기 어렵고 가령 왕이 되었다 해도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은 야밤삼경에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왕이 되려면 우선 왕의 통치술부터 공부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삼김 정치’ 이후 대통령들은 왕의 통치술이 부족해 모두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왕의 통치술이 부족한 것은 ‘왕의 수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정당 내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출마를 선언한 정치인이 많다. 여당인 민주당에는 9명이고 야당인 국민의힘에는 아직 출마선언에 불이 붙지 않아 잠잠하지만 8월 ‘버스’가 본격 출발하면 족히 10여 명의 정치인이 나서지 않을까 전망된다. 문제는 왕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정치인은 많은데 정작 왕의 통치술에 관심 있는 정치인은 없다. 출마를 선언한 정치인과 출마를 눈앞에 둔 정치인 중 다수는 이미 정치판에서 정치 물을 마셔본 경험이 있어 왕이 되면 왕의 통치술이 저절로 쏟아져 나올 것처럼 ‘왕의 수업’에 신경을 쓰지 않는데 이런 정치인들이 왕이 되면 100% 실패한다. 전통시대에 왕자는 왕자의 수업, 세자는 ‘세자 수업’ 태자는 ‘태자 수업’이 있었다. 이런 수업들이 괜히 있은 게 아니다. 이런 수업을 거쳐야 각자 처한 자리에서 무난하게 살면서 나라에 기여할 수 있고 특히 왕이 된 자는 왕의 대업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대한민국은 유교의 왕의 수업이라는 훌륭한 전통이 있었으나 민주화시대에 들어, 특히 ‘삼김 정치’ 이후 이런 전통은 사라지고 개인 인기에만 매달려 대통령이 되다 보니 대통령이 된 후 통치술이 부족해 천하가 아주 혼란스럽다. ‘왕의 수업’을 거치지 않은 대통령들의 어설픈 통치술에 의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정치판의 물을 전혀 마시지 못했던 윤석열은 다른 후보들에 비해 마땅히 더욱 ‘왕의 수업’에 신경을 써야 하건만 그도 역시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을 아예 의식하지 않은듯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윤석열은 앞서 논의했던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하는 것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왕의 수업’을 병행했어야 한다. 특히 대선캠프를 차리는데 있어서 각 분야의 전문가 그룹을 섭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왕의 수업’ 그룹도 반드시 차려야 한다. 윤석열은 정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왕의 수업’조차 없으니 그 폐단이 출마를 선언하기 전부터 벌써 터져 나오고 있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윤석열 캠프에 1호 인사로 영입된 참모이자 대변인인 이동훈 전 조선일보 기자가 10일 만에 사퇴하는 불상사가 터졌다. 이 사건을 두고 온 대한민국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썩하다. 100%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린다. 이동훈 대변인의 사퇴이유가 건강상의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온천지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윤석열의 식 전언정치가 빚은 결과라는 지적이 다수다. 이준석 신임 당대표는 윤석열을 ‘침대축구’에 비유했다. 점수가 앞섰다고 공격을 전혀 하지 않고 수비만 하려고 조금만 다쳐도 누워 딩구르는 것이 침대축구다. 매우 생동하고 적절한 비유이다. 이동훈 대변인의 사퇴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이유로서 윤석열의 소통부족을 꼽고 있다. 지난 22일 한국일보에 <흔들리는 윤석열, 그에게 없는 세 가지에 답이 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세 가지 답이란 무소통, 무세력, 무콘텐츠이다. 무세력과 무콘텐츠에 관해서 추후 다른 편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할 생각이며 여기서는 무소통을 주제로 논의해 보려고 한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다. 왕이 그 정점에 있는데 왕이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사권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요즘 민주화시대에도 대통령의 인사권은 어마어마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2000개의 자리에 사람을 앉힐 수 있는 인사권을 갖고 있다고 하니 실로 대단한 권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2000개나 되는 자리를 대통령이 전부 일일이 관여할 수는 없고 수하에 10여 명의 인재만 두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수하에 3명만 진짜 인재가 있어도 성공한 왕이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왕의 성공여부는 곁에 어떤 사람을 두는가는 데 달려 있다. 당나라 때 출간된 조유의『반경』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상등의 군주 곁에는 스승이 있고, 중등의 군주 곁에는 친구가 있고, 하등의 군주 곁에는 관리가 있고, 망국의 군주 곁에는 시종이 있다.” 문재인 곁에 포진된 참모들은 ‘동지들’이니 문재인 대통령은 상등의 군주는 아니라는 얘기가 되겠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신은 최순실 아바타’라는 말이 나오자 이렇게 말했다. “최순실은 나의 시종 같은 사람이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시종 같은 사람이 곁에서 보좌했으니 ‘망국의 군주’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박근혜는 이 한 마디 말만 보아도 왕의 수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왕은 어떤 사람을 곁에 두어야 성공할 수 있는가? “막사 안에서 전략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리를 이끄는 일이라면 나는 장량(張良)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살피며 군량을 공급하고 보급로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나는 소하(蕭何)만 못하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 싸우고 공격해 반드시 승리를 거두는 일이라면 나는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걸출한 인물들이다. 그들을 잘 등용한 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다.” 유방이 천하의 주인이 되고 나서 한 말이다. 유방의 말대로 하면 요소요소에 모두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앉혀야 천하를 거머쥘 수가 있다. 유방처럼 이렇게 성공하려면 군주 되려는 자와 군주가 된 자는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 첫째 자신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부하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인정해 주면서 장끼를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순신이 자신보다 우수하다고 여긴 선조(宣祖)는 질투심이 강해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선조야말로 왕의 자질이 부족한 군주였다. 둘째 믿음이 있어야 한다. 중국속담에 “의심스런 자는 기용하지 않고 사람을 일단 기용했으면 끝까지 믿으라.”라는 말이 있다. 이 두 가지 마음가짐은 말이 쉽지 실천에 옮기는 일은 정말 어렵다. 역대로 성공한 군주는 이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갖춘 자들이고 반대로 이 두 가지 마음가짐을 갖지 못한 자들은 모두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했거나 가령 운이 좋아 되었다 해도 실패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되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동훈 대변인 사퇴이유에 대해 이런 추측을 내놓았다. 윤석열이 이동훈을 ‘기자 좀 했다고 나를 끌고 가려하나?’라는 생각으로 내 친 것 아니냐. 유방처럼 성공하려면 이 두 가지 마음가짐 외에 부하들과 소통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소통 없는 성공은 없다. 그럼 어떻게 소통해야 할 것인가? 이 면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인물로서 유비를 들 수 있다. 유비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필자가 아는 역사인물 중 유비는 가장 뛰어난 소통가였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만나 의형제를 맺은 이후로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이 얘기는 진수의 <삼국지>에 기록된 것이니 믿을만하다. 어떤 학자들은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한다. 유비가 매일 밤 부하들과 잠을 잤으면 그의 부인은 독수공방했단 말인가?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유비가 부하들과 잠을 자주 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관우와 장비뿐만 아니라 후에 삼고초려로 모셔온 제갈량과도 잠을 함께 잤다고 하고, 모사인 법정과 방통과도 한 침대에서 잤다고 한다. 부하들과 함께 한 침대에서 잠을 잤다는 것은 유비가 부하들과 얼마나 많은 소통이 있었는가는 좋은 증거이다. 유비의 이런 소통노력이 결국 일단 그의 부하가 된 자는 주군을 배반하지 않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무일푼으로 출발한 유비는 말이 왕족이지 정확한 족보는 없이 허울 좋은 왕족이지만 ‘한왕실부흥(漢王室復興)이라는 정치신념과 부하들과 소통하여 형제처럼 지내는 믿음으로 나중에 천하의 한 모퉁이의 주인 자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조도 소통의 능수였다. 유비와 순욱을 비롯해 괜찮은 인물을 만나면 좌석격식 없이 함께 식사하고, 같은 수레를 타고, 때로는 잠도 같이 자면서 담론을 이어갔다고 한다. 모든 내를 흡수하는 큰 강처럼 천하의 영웅이 모두 조조에게 몰려든 이유 역시 조조가 소통의 능수였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조조는 넓은 도량으로 찾아오는 인재들과 소통하는 노력 덕분에 당시 천하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방과 대조적인 인물이 바로 항우다. 항우는 유방과는 아예 비교가 안 될 만큼 훌륭했고 천하쟁패에 있어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유방이 승리했고 항우가 실패하는 대역전극이 벌어졌다. 무엇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항우는 명문가문 출신으로 농민출신인 유방에 비해 우선 가문이 좋았다. 항우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는 뜻) 영웅으로 묘사될 만큼 힘이 천하의 으뜸이었다. 전투도 잘했다. 70여 차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천하는 항우의 것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유리하던 항우가 보잘 것 없이 여겼던 유방에게 천하를 빼앗기고 말았다. 항우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본문의 주제와 연관시켜 말하자면 항우는 자신이 너무 뛰어나다고 여겨 부하들을 믿지 않았고 부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논공행상은 병가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항우는 이 중요한 일마저 부하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처사했다. 부하들과 소통이 없었다는 뜻이다. 아예 소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신, 진평, 경포는 모두 본래 항우의 부하였다. 이들은 항우의 사람 됨됨이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고 게다가 천하의 주인이 될 그릇이 못된다고 판단되어 유방에게 귀의했다. 원소가 조조에 비해 여러모로 유리한 고지에 있었으나 실패한 원인 중에 그가 부하들과의 소통이 부족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원소가 소통이 보족했기 때문에 순욱, 허유를 비롯한 훌륭한 부하들이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 귀의했던 것이다. 윤석열은 유비처럼 한 침대에서 만날 잠을 잘 정도는 아니더라도 함께 천하를 도모할 의기투합으로 캠프에 합류된 사람들과 긴밀한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입당 문제를 두고 한 시간 격차로 대변인의 말이 다르고 본인의 말이 다른 것은 소통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는 증거다. 대변인이 10일 만에 사퇴한 이유가 바로 소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앞으로 헤쳐나아가야 할 일이 태산 같다. 현재 상황에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통치술을 익히는 왕의 수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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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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