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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중 FTA시대 조선족의 비전은?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찌기 지난 세기 20~30년대 우리의 조상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만주땅에 가서 거친 땅에 보습을 박고 땀 흘리며 일해서 후대들을 대학교에 보내 여러 분야의 인재로 키웠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나 우리의 선조들은 재차 신흥개발국인 고국땅에 찾아와 한국인들이 꺼려하는 일터를 찾아와 적지않은 멸시를 받아가며 일하며 경제적 부를 창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최근 조선족 20~30대 젊은이들은 더 이상 단지 돈벌이를 위해 한국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꿈을 안고 고국땅을 찾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한국자본시장 연구위원인 안유화 박사가 아닌가 싶다. 한국자본시장연구원 안유화 박사는 중국조선족 출신으로 현재 한국 현지에서 중국금융 전문가로 통한다. 중국 연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3년 한국 고려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왔으며 2008년 7월부터 한국자본시장연구원 국제금융실에서 중국경제와 금융시장 연구 및 정책개발을 하는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한국자본시장연구원 안유화 박사와의 일문일답. Q: 한국에서 중국 조선족 출신 박사님을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안유화 박사님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 저는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서 온 조선족 출신입니다. 중국 연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3년 한국 고려대학교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오게 되었고, 2008년 7월부터 한국자본시장연구원 국제금융실에서 중국경제와 중국금융시장 전문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Q: 현재 어떤 업무를 하시는지요? ― 한국자본시장연구원은 한국금융투자협회, 한국거래소, 한국증권금융, 한국예탁결제원, 산업은행, 대우증권, 삼성증권 등 대형 금융기관들이 출자하여 만든 금융투자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은행과 보험 영역을 제외한 자본시장 영역의 학술연구와 정책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를 포함한 국회,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정부기관의 금융투자업 정책자문연구를 많이 한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주로 중국경제 및 금융시장과 관련된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Q: 박사님은 중국경제 관련 포럼에서 다양한 주제로 논문을 많이 발표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우리 연구원에서 저는 2009년 4월부터 <중국금융시장FOCUS>라는 계간지를 창간해 발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총편집장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 주식시장 특성과 외국기업의 활용방안>, <위안화의 역외사용 확대와 한국의 대응> 등 조사보고서와 이슈보고서들을 작성했습니다. 학술적인 논문의 경우는 주로 기업재무, 기업지배 구조와 기업상장(IPO) 그리고 기업인수합병(M&A) 관련 논문들을 작성하고 발표하였습니다. 2010년, 한국산업은행의 중국진출 용역도 완성하였습니다. 주로 산업은행의 중국 은행시장 진출전략과, 대우증권의 중국 자본시장 진출, 그리고 사모펀드의 중국시장 진출 전략에 대한 방안을 만들었습니다. 2014년에는 기획재정부의 위안화허브 구축 용역책임을 맡고 완성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원과 위안의 직거래시장, 800억위안 RQFII한도 획득 및 중국 교통은행의 청산은행 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한국예탁결제원(KSD)의 위안화 채권인프라구축 용역책임을 맡고 중국국채 등기결산공사(CCDC)와 KSD간의 위안화채권 청산결제 인프라 구축을 위한 연구를 완성했습니다. 현재 두 기관간에 T/F 워킹그룹이 만들어져서 합작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Q: 얼마전 한중 양국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문에 가서명을 하였습니다. 한중 FTA 발효를 대비해 중국조선족사업가와 재중한국인사업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중 FTA 시대 중국조선족들에게 미치는 영향,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며, 향후 한중 FTA 시대 중국조선족들에게 장기적 비전을 제시해 주십시오. ― 먼저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지금 이 시점은 한국과 중국간의 경제 및 정치협력의 가장 좋은 기회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만 말씀드리면, 한중FTA발효로 양국간의 무역규모는 5,000억달러를 쉽게 달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 중요한 변화는 한중간의 직접 투자가 급속하게 증대될 것입니다. 그 동안 무역 외에는 금융투자 협력이 거의 전무하였지만 앞으로 금융투자업무가 많아 질 것입니다. 특히 중국기업들의 한국진출과 한국에서의 소비 및 자산운용 수요가 급속하게 증가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중국 조선족들의 경우 한국어,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를 잘 구사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중간에서 정보 비대칭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양쪽 문화를 다 잘 알기 때문에 가교역할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만 접근방식에 있어서 과거의 월급 받는 직원으로 근무하는 마인드에서 벗어나 금융 개념으로 자신들의 입지와 경쟁력을 키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즉 유대인식으로 문제를 접근하고 비전을 갖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큰 그림을 보고, 글로벌 500대 기업들의 주인이 우리라는 생각을 갖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의 글로벌 500대 기업은 10년이 지나면 거의 절반이 바뀔 것입니다. 새로 입성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에서 나올 것이고, 특히 중국에서 많이 나올 것입니다. 금융은 결국 지분입니다. 지분투자 개념으로 접근하면 우리는 그 기업들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세계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예리한 눈과 끈질긴 탐구정신으로 발굴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한중 FTA라는 계기로 자본과 경험의 경쟁력을 키워 글로벌기업들의 아시아투자(중국과 한국)의 플랫폼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Q: 박사님은 고급 엘리트로서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에서도 부러움과 동경의 대상으로 되었습니다. ―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합니다. 그냥 모두가 부지런히 열심히 사시는 것처럼 저도 그렇게 매일 노력하면서 열심히 살아 갈 뿐입니다. Q: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 제가 목표하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리면 어떠한 역경이 찾아와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주변 환경이나 조건을 이유로 포기하지 말자 것입니다. 저는 가장 좋아하는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즉 외부환경이 제아무리 어렵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조건을 막론하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운동경기처럼 결과로만 평가받는 것이니깐요. Q: 중국 조선족 20~30대가 우리 부모님들 세대와 다른 점을 강조한다면은요? 그리고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우리 20~30대들의 사명감을 말한다면? ― 지금 젊은 조선족 세대들은 매우 총명합니다. 한국에 유학도 많이 오고 있습니다. 제가 강의하고 있는 대학원 과정에도 조선족 학생들이 가끔 있는데요, 정말 똑똑합니다. 공부하면서 창업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어떤 친구는 서울에서 강남, 강북 여러 곳에 체인점들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조선족들에 비해 중국어도 잘 구사하고 영어도 잘합니다. 참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은 “자기만의 인생을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먼저 고민하고, 그 목표에 맞추어 오늘 할 일들을 찾아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다 보면 멀리 가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고 큰 목표를 갖고 가야만 오래 갈 수 있고 중간에 어려움이 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을 생각하고 가다보면 어려움이 올 때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식이 있는 부모와 혼자 사는 사람들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 있는 부모는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을 위해 어떤 어려운 일도 다 할 수 있는 마음자세가 싱글들에 비해 잘 되어 있다고 할까요? 조선족이라는 한계를 넘어 당당한 세계인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큰 그림을 보고 큰 목표를 갖기를 부탁드립니다. Q: 현재 연구원 외에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 중앙대학교 객원교수로 대학원 MBA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외교부 경제분과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구요. 한국금융투자협회 중국자본시장연구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회 산하 국제해양포럼 회원으로서 한국과 중국간의 해양펀드 구성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학술적으로 한국증권학회, 한국재무학회, 한국금융학회 및 한국국제금융학회 등 회원으로도 연구활동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조선족동포들에게 한마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조선족이지만 조선족이 아닌 듯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의 장점을 잘 활용하고, 현실에서 살아갈 때는 그 점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남들이 조선족에 대해서 편견을 갖고 안 좋은 이야기를 할 때도 조선족이 아닌 듯 무시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족이라는 것을 감추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떳떳하게 조선족을 밝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조선족들에 대한 외부 평가나 의견에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게 나만의 길을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즉 조선족은 소중한 존재이니깐요. 누구의 말 한마디나 평가 및 장애로 우리의 삶이 흔들려서는 안되고 존재의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 사람들
    2015-03-16
  • 과외촬영 취미로 석양 수놓는 할머니
    [동포투데이] “철도 할머니”라 불리는 이해숙 노인은 오늘도 붉은 촬영복 단장으로 84세 연령을 감추며 렌즈속에 담긴 작품을 정리하는 일과로 웃음 짓는다. 일찍1979년 연길기차역에서 정년 퇴직한 후 주민위의 서기직을 맡았고 지역사회의 치안주임 노인협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직장에서 다 하지 못한 기여를 가두사업에 바쳤다. 그러던 2005년의 어느날 카메라를 멘 몇몇 로인들이 노인협회 활동실을 찾아와 자기네들도 이 곳에 와 활동하자고 청구하자 이해숙은 쾌히 승낙하고 그들의 활동을 살폈다. 멋진 사진들을 내놓고 소감을 나누는 이들을 보며 할머니는 손녀가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자그마한 카메라를 들고 촬영에 대한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며 그 행렬에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카메라 뚜껑도 열줄 몰라 꺼꾸로 들고 찍으려 했고 첫 사진은 사람의 얼굴 절반을 찍기도 했었다. 이렇게 사진찍기를 배우며 촬영팀의 야외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하였고 젊은이들과 경쟁하며 부지런히 묘한 장면을 포착, 자신만의 안광으로 렌즈를 돌리던 끝에 드디어 2007년 제1회 연길시 “석양미컵” 촬영콩쿠르에서 3등상을 수여받게 되었다. 2009년9월, 연길시촬영가협회에서 훈춘에 가 취재할 때 모두들 연세가 많은 이해숙 할머니더러 거리가 멀고 산길이 험하니 가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노인은 앞장서 차에 올랐고 현장에서는 겨우 몇 사람밖에 오르지 못한 벼랑가에까지 올라 “6각석림 (六角石林) ”이라는 연변의 특이한 자연풍모를 찍어내였다. 2011년 화룡에서 펼쳐진 진달래축제에 참가하여 수십명이 함께 포착한 풍경에서 이해숙 노인이 찍은 “민족단결” 촬영작품이 3등의 영예를 따내였다. 또한 할머니는 사회복리원을 찾아가 노인들을 위문, 노인들에게 무려 200여장에 달하는 행복사진을 찍어 선물하기도 하였다. 한편 촬영팀에 참가하여 10년간 병원출입 한번도 하지 않아 의료카드의 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며 큰 돈 벌고 있다는 느낌을 향수하는 “철도할머니”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뿐이다. 즐겁게 샤타를 누르는 이할머니는 매양 사랑의 마음으로 들끓고 있다. 베푸는 느낌이 그토록 즐거워 자꾸 자꾸 주고 싶다는 할머니이다. 양로원의 노인들에게 한복만도 벌써10벌을 사서 선사하였고 치아 때문에 고생하는 빈곤 할머니를 억지로 데리고 가 틀이빨를 해넣어 드린 일, 난방주택개조 때 돈없어 창문을 바꾸지 못하는 극빈호들을 위해3000여위안이나 기부하여 전반 개조공사를 제때에 마무리하게 도와준 일, 돈을 대여 독거노인의 온수온돌을 고쳐드려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게 한 일, 이 외에도 김해연으로 하여금 대학공부를 마치고 지금 인민교원으로 사업하도록 도와준 일, 연변대학 촬영학부에 입학했지만 사진기도 갖추지 못한 김나 학생한테 카메라를 사주며 졸업 때까지 도와준 일… 이젠 어려운 노인들을 돕는 일이 이할머니의 습관처럼 되었다. 샤타를 누르며 석양을 빛내가는 이해숙 할머니의 사적은 2014년 4기 “민족화보”에도 멋지게 홍보되었다. 박철원
    • 사람들
    2015-02-26
  • [인물탐방] 한국외대 일본언어문화학부 최재철 교수
    [동포투데이]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이 과거의 질곡을 딛고 오래된 이웃이자 성숙한 파트너로서 새롭게 교류하기 위해서는 정치 및 경제교류도 중요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화 교류의 확대가 절실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의 최재철 교수(사진)는 "우리의 역사를 동아시아 세계 속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며 "한일 양국이 상호 우호적으로 인문학을 통한 동아시아의 소통을 모색해 근대 전환과정에서 빚은 실패를 만회하고 진정한 화합과 연대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라 말했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 확립은 양국 간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문화의 본질과 직면하는 것이므로 인문학적 접근을 통해 단계적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최재철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 일본이 우리나라의 대외적 측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유난히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정신적, 물질적인 흔적이 깊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한국인과 일본인은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웃 일본과 동반자 관계를 복원하여 상호 협력해나가기 위해 올해는 최우선으로 한일 정상이 직접 만나서 무릎을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해야 한다. 일본의 위정자는 세계인과 소통 가능한 역사 인식을 갖고 우리 정부는 정치력과 외교력을 발휘하여 젊은 세대에게 꿈을 심어주는 교류와 협력을 추진하길 기대한다. 최재철 교수는 일본을 깊이 알고 한국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과 사상 관련 텍스트를 읽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최 교수는 "감정과 이념대립으로 얼룩진 양국 관계를 단기간의 편협한 시각에서 보기보다 긴 호흡으로 동아시아적 시야 속에서 서로 근원적인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수없이 언급됐던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이라는 말이 더 이상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 전했다. 글로벌시대에 원활한 소통과 보다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최 교수는 현재 한·중·일 관련 학자 3인이 진행 중인 '동아시아 인문 대화'를 정리하여 단행본 출간을 기획하고 있으며 '일본문학 속의 사계(四季)-한국문학과의 비교-'라는 저서를 집필 중으로 한·일 간의 자연관과 계절감을 비교, 상호 이해의 심화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일본 근대 대표작가의 '소설 번역'을 계획하고 있고 '한·중·일 동아시아 교류와 소통'의 저변 확산을 목표로 '시민인문대학' 강좌의 지속적인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최재철 교수 경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부 교수(1983년∼현재)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전공 석사·박사과정 수료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장 외국문학연구소장 도서관장 행정지원처장, 일본어대학 학장 역임 ▲한일비교문학연구회, 한국일어일문학회, 세계문학비교학회 회장 역임 ◇대표 업적 ▲저서: '일본문학의 이해' 민음사, 1995년(문화체육부 추천 우수도서 선정), '비교문학자가 본 일본, 일본인'(공저, 현대문학, 2007), '무라카미 하루키를 논하다'(공저, 제이엔씨, 2014) ▲역서: '산시로'(나쓰메 소세키 지음). 한국외대출판부, 1995년(세계문학총서 7) ▲편집: '오오에 켄자부로 소설문학전집'(고려원, 1995), 편집위원, '일본근대문학 -연구와 비평-' 제1-5호, 한국일본근대문학회, 2002-2006.(외)
    • 사람들
    2015-02-26
  • 김철균 특파원 연변주 보도사업 선진일군으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이며 연변 특파원인 김철균 기자가 2014년 연변 주 보도사업 선진일군으로 평선되었다. 1957년 생인 김철균 특파원은 일찍 문화혁명의 여파로 정상적인 대학진학의 기회를 놓치었지만 농촌의 집체호에서, 또한 공장 직장에서 생활하면서 열심히 문학창작에 정진하는 한편 자습하는 걸로 1984년 중국 연변대학 통신학부(지금의 성인학원)에 입학했다. 이 해에 김철균 특파원은 훈춘시 방송국 편집기자로 입문해 보도사업에 투신하였고 연변라디오방송국 청년부 기자, 연변일보 체육부 기자, 연변일보 종합신문 편집국장 등 직으로 활약하면서 수천편에 달하는 신선한 보도기사를 써내어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 기자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1995년부터 스포츠기자로 되자 선후로 연변축구팀의 감독직을 맡았던 최은택, 고훈, 김광주, 이광호, 고종훈 등 감독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을뿐만 아니라 중국 국내의 치우성(戚武生), 진즈양(金志杨), 츠샹빈(迟相斌) 그리고 한국의 차범근, 김정남, 이장수 등 감독들을 취재하는데도 성공했다. 김철균 특파원은 집착적이고도 끈질긴 기자였다. 한편의 “특종기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는 인물과 사건을 다루었으며 한편의 기사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2000년엔 베이징 둥팡병원(东方医院)에 입원한 원 길림오동팀 고훈 감독한테로 달려가 투병 중의 고훈을 위문하는 한편 “푸른 잔디밭에 쓰러진 사나이”을 써냈고, 2002년 초 중국 국가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한일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자 역시 베이징으로 달려가 원 중국축구협회 상무 부주석이던 남용씨를 취재해서는 “중국국가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기까지의 내막”이란 기사를 써내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전국을급리그 8강전이 펼쳐지는 허난성 정저우(郑州)로 가서는 연변세기팀이 갑급진출에 성공하는 전반 과정을 몇편의 기사로 생동하게 담아내기도 했다. 이 외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기간에는 혼자서 베이징 올림픽이 펼쳐지는 몇개의 경기장을 돌면서 근 20편에 달하는 경기보도를 하는 한편 “올림픽 정신 협애한 애국주의 아니다”, “주최국 자존심 – 문명고국 중국의 올림픽 저력”, “베이징 올림픽 총결산 – 재래관념의 경신, 기록돌파의 새 풍경선” 등 특종을 만들어 재치있는 필치와 심도 깊은 분석력으로 베이징올림픽을 홍보하여 여러 노기자들의 감탄을 자아내었다. 김철균 특파원의 끊임없는 노력과 쌓아올린 성과는 연변 주내는 물론 중국 국내와 한국의 매스컴들의 인정을 받았다. 2014년 중국의 성급 신문인 “길림신문”에서 중국에서 유일한 축구전문 사이트를 개설하자 김철균 특파원은 연변대학 체육학원 박사출신의 교수 김창권 선생과 더불어 이 사이트의 논평원으로, 한국의 인터넷신문 “동포투데이”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받았다. 한편 기자생활을 하는 기간 동안 김철균 특파원은 짬짬의 시간을 타서는 문학창작에도 꾸준히 노력해 단편소설 “수산나”, “배놈의 세계”, “얻은 것과 잃은 것”, “전쟁과 칠성영감의 여인들”, 장편실화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작품집 “성공과 실패의 몸부림속에서”, “야망의 축구스타(합작)”,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번역작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오묘한 세계 대백과”, 수필 “꿈에 본 어머니”, “사향심” 등과 여 러편의 산문, 잡문, 만필 등을 창작하여 글집필에서의 다재다능의 기교를 한껏 과시하였으며 2003년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작가로 되기도 했다.
    • 사람들
    2015-02-15
  • 구련옥-조선족의 영원한 인기스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88년 겨울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어느 한 극장무대, 당시 그 곳에서는 미국의 한인사회로 놓고 말하면 아주 “이색”적인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이른바 “공산국가”에서 온 중국 조선족예술단의 대형공연이었던 것이다. 중국조선족의 쟁쟁한 중견가수들인 유병걸, 김만, 최경호, 조옥형 등이 무대에 오른 가운데 한 20대 초반의 여성가수가 관중들의 이목을 잡았다. 이름은 구련옥- 연변구연단 소속의 가수였다. 그녀가 부른 노래는 흘러간 옛노래 “찔레꽃”과 “섬마을 선생님”이었다. 잔잔하고도 애수가 잠긴듯한 구련옥씨의 노래에 미국의 한인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고 미국의 한인사회는 중국 조선족사회에 대한 인식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자 미국의 한인들은 구련옥, 조옥형 등 가수들의 손을 잡고 “너희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빼빼 마르고 그런줄 알았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이쁘고도 착하게 생겼느냐?”, “어쩌면 우리네 자식들과 똑 같게 생겼느냐? 동족은 속일 수 없구나”하며 찬탄해 마지 않았다. 어떤 노인장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990년, 구련옥씨는 연변가무단의 홍인철 가수와 함께 한국 KBS방송국 “가요무대”에 서기도 했다. 당시 그녀가 부른 노래는 흘러간 옛노래 “꿈에 본 내고향”이었다. 그 때는 한중수교전이어서 한국인들한테 있어서 중국 조선족사회는 일종 미지의 세계, 당시 한국무대에 선 방초선, 구련옥, 유병걸 등 가수들은 중국 조선족사회를 한국에 홍보하는 작용을 했다. 그 때로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구련옥씨는 연변가요로 된 “오빠의 편지”란 음반을 내면서 중국 조선족가요계의 여스타로 일약 떠올랐으며 1990년 제 4 회 “오주배(五洲杯)” 중국 전국 청년가수TV 콩쿠르에서 통속창법 3등을 쟁취, 1994년에는 제6회 “통업배(通业杯)” 중국 전국청년가수 TV콩쿠르에서는 우승이란 월계관을 따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연변라디오 방송국의 “매주일가”를 통해서는 구련옥씨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연변TV방송국 무대를 통해서는 구연옥씨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으며 그녀가 부른 “보리차”, “해바라기”, “추억” 등 노래들은 오랫동안 트롯트가요 청취(시청)에 갈증을 느끼던 중국조선족들한테 하나의 싱싱한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 세기 90연대 중반부터 자기가 근무하던 연변구연단을 떠나 연길시(연변병원 서쪽 노무시작 골목)에 “구련옥 미용원”을 오픈,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오던 미용업에 투신했다. 그러면서 남편한테는 현숙한 아내로, 딸애한테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되었다. 그 뒤 미용업에서 일정한 입지를 굳히자 대련으로 진출했다가 다시 몇년전부터 사천성 수부도시 성도로 진출해 대륙의 서부지구에서의 미용업개척자로 되었다. 그러던 구련옥씨가 일전 연길시 TV방송국이 개최하는 2015 연길시음력설야회 제작진의 부름을 받고 꿈에도 그리도 연변으로 달려왔다. 일찍 왕청현 천교령진의 상수촌이라는 오지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던 구련옥씨었다. 연변 조선족관중들의 사랑과 받들림 속에서 가수생활을 하며 스타로 떠올랐던 구련옥씨었다. 그리고 가수생활이냐 아니면 개인사업이냐를 놓고 방황하다 결국 가수생활을 포기했던 구련옥씨었다. 가수생활의 포기- 이는 그녀가 가수생활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두가지를 다 성공할 수는 없었던 그 시기, 구련옥씨는 마이크와 작별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한다. 성도에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조선족 노래방에 가면 그제날 가수시절을 그리며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한껏 열창하며 그 무드속에 흠뻑 빠지군 했다는 구련옥씨, 그녀가 노래방 마이크가 아닌 무대의 마이크를 다시 잡아보려고 연변으로 달려왔다. 이제 오래지 않아 방영되게 될 연길시 TV방송국 음력설 야회에서 오랫동안 연변관중들과 정들었던 스타가수 구련옥씨는 “매화향기”란 신곡을 선물하게 된다.
    • 사람들
    2015-01-31
  • 조선족 김문원 김욱, 10대 “감동 길림” 인물로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 인터넷이야기 감동 길림 2014” 인터넷인물 시상식이 1월 29일, 중국 길림성 장춘시에서 성대히 열렸다. 근 3개월간 수십만명의 길림성 네티즌들이 투표에 참가해 2014 감동길림 인터넷인물 10명을 선정한 가운데 조선족 김문원과 김욱이 선정되어 이날 수상했다고 중국 신화통신이 30일 보도했다. 보도는 이들 “감동 길림” 10명 인물들의 이야기는 진실하고 소박하며 사랑과 꿈이 있는 이야기들로 이날 대회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혔다고 전했다. 이날 수상식에서는 “평범한 영웅” 장가록, “귀염둥이 집으로(宝贝回家)” 사이트의 창시인 장운호, “나무 사령원” 김문원, “몽골의 설창(琴书)예인” 고수자 바오차오거주, 길림의 “뢰봉” 초립문, “회선성류”의 고운홍, “환경보호의 선봉” 리회삼, “택배의 형” 두립국, 천가만호에 불 밝혀주는 송전인 왕염파, “장애인 창업모범” 김욱 등 10명의 감동인물들이 무대에 올라 수상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조선족 김문원은 연변군분구 전 부사령원으로 퇴직후 심산골에 들어가 고향사람들을 이끌고 치부했다. 8년 전, 그는 선후하여 홍송 11만그루, 낙엽송 4만그루를 심어 산골짜기에 푸른 색을 입히고 산야에 생기가 돌게 했다. 김문원의 인솔하에 전 촌은 이미 10가지 산업이 형성되고 인구당 수입이 6000여 위안에 달해 빈곤에서 해탈되고 치부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김욱은 연길시 육룡컴퓨터강습센터의 교장이다. 23살에 남을 구하다가 하반신 고위 마비가 되어 평생 휠체어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는 견강한 의력과 인격으로 자기 인생의 가치와 사회적인 가치를 실현했는바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료로 컴퓨터를 가르쳐 주고 컴퓨터강습반을 꾸려 모은 돈을 어려운 가정과 학생들을 도와왔다. 그의 감동적인 사적은 중국 각급 언론들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사회 각계의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10명의 “감동 길림 2014” 인터넷인물들은 모두 자기들의 실제 행동으로 성실, 책임, 견지, 효성, 열심, 선량, 정의 등 중화민족의 전통미덕을 전하고 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 사람들
    2015-01-30
  • 한류를 만들어 가는 한복 명인- 이광희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언젠가 KBS TV에서 노랑머리에 코가 길쭉한 서양인들이 한복을 입고 한국의 전통명절쇼에 나온 모습을 보고 인상이 깊었다.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이 잘 생겨서일까, 아니면 우리 민족의 브랜드 한복이 다른 패션에 비해 우수해서일까? 두 가지 요소가 다 있겠다는 생각, 한복의 우수성에 자호감을 느꼈다. 오늘날 한복은 우리 동양인은 물론 양복과 원피스에 습관된 서양인들마저 즐겨 입는 패션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렇듯 한복이 글로벌 브랜드로, 세계인들 속에서 인기가 오르기까지에는 수많은 한복 디자이너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다. 그들중의 한 사람으로 지난 24년간 전통한복 살리기에 앞장서온 “정민(姃玟) 이광희 한복•침구”의 이광희 원장을 기자가 일전 만나 인터뷰를 했다. 이광희, 그는 2013년 한국 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에서 시행한 한국예술문화 명인인증 행사에서 명인인증위로부터 한복명인으로 선정되었고 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식 때 입었던 한복의 복(福)자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광희 여사가 태어난 곳은 경북 의성, 즉 금성면 산운리에 위치한 산운(山雲)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의성을 대표하는 고택촌으로 영천이씨의 집성촌. 자연의 부드러움과 색상, 그 은은함이 이광희 여사가 디자인하는 한복에도 나타나고 있다. 당시 어머니가 삼베로 길쌈을 하셔서 이광희 여사는 자연 어릴적부터 바느질을 익혀왔고 그 바느질 솜씨로 커서 뭔가를 해보겠다는 “꿈”을 키워왔다. 하지만 오로지 전통만을 고집하는 마을에서 “꿈”을 키울 수 없었던 이광희 여사는 21살에 달랑 보따리 하나를 들고 서울로 올라온다. 북아현동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원광대 한복복식학과를 졸업, 31살 때부터 등촌동 등지에서 가게를 얻어 한복을 짓기 시작했다. 물론 힘들었고 피고름을 짜내는듯한 실패의 시련도 있었다. 하지만 여성의 집요함과 끈질김으로 견지했고 점차 운이 따라주는 쏠쏠함도 생겼다. 언젠가 50대 후반의 여의도 갑부로 돼보이는, 세련되고 점잖은 부인이 이광희 여사의 가게를 찾아왔다. 부인은 이광의 여사가 골라보이는 치마, 저고리 원단을 보더니 “학교는 어디를 나왔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물론 독학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 때로부터 이광희 여사의 한복 디자인이 흥행을 타기 시작한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2008년,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식 때 입을 한복의 복(福)자를 디자인해 선물했고 그 “福”자에는 은은한 담백함이 돋보여 많은 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해 그의 한복 디자인작품이 배재대 교재에 수록되었고 2009년에는 세계의상패스티벌에 참가한 주한 가봉대사 부부가 이광희 여사가 선물한 전통한복을 입어 한복은 일약 세계인들이 즐겨입는 브랜드로 됐다. 이광희 여사의 한복디자인은 2010년 서울 아트패스티벌과 2011년 중국 하얼빈에서 개최된 한중 문화박람회 등을 통해 세계에 널리 홍보되었으며 최근에는 한중 합작의영화 “한복 입은 남자”의 의상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여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진 한복을 세계 으뜸의 패션으로 만드는 것이 꿈이란다. 한류가 연예계에만 있는 것이 아닌듯 싶다. 한복을 세계적인 패션으로 부상시키는 것 역시 한류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앞장에 이광희 여사가 있다고 기자는 생각했다.
    • 사람들
    2015-01-28
  • 2015 한국의 아름다운 얼굴 김진희 작가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예술가는 있어도 장인은 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국내 미술계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세계를 경주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다변적인 현대 미술계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정립해 가고 있는 김진희 작가가 그 주인공. 국내화단의 역량 있는 여류화가로 미술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노력을 쏟으며 자신의 내면세계와 예술가로서의 자화상을 투영하고 있는 김진희 작가가 자신만의 예술적 감수성이 담긴 예술세계를 꽃피우며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현대 미술에서는 작가의 독창성이 없으면 외면받기 쉬울 수밖에 없다. 김 작가는 이런 시점에서 바라면 그녀의 예술적 감성과 표현방법론상의 예리한 직관력은 다른 화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나며 머릿속에 담겨진 정신적, 감성적인 느낌을 여성적인 시각에서 그대로 표현해 내는 창작에서는 또 다른 김진희를 만날 수 있다. 김 작가는 "예술이란 작가의 내면적 경험과 각성을 포함한 내면의 심상을 보여주는 형식적 창조다. 내면적 경험과 각성이라는 것은 작가의 실존적 위치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바라보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존재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여성에서 어머니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자아의 존재감 표현하고 있는 김 작가의 작품 중 'Woman'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몰입은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스스로 머리를 풀고 세상으로 나오지만 아직은 웃을 수 없다.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의 변화가 보이는데 이는 'Life and Death'로 발전해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가며 희망과 소망의 상징인 정체성을 찾아 자유로워진 영혼은 새와 나비를 날리고 초록 이파리 하나 없는 나무 뒤에서 세상 안으로 들어온다. 여성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긴 여정을 표현하는 김 작가의 그림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지난 상처의 극복 그리고 생명에 대한 억압을 극복하며 마침내 비상한다. 수년간의 변화에서 드러낸 작품은 이의 연장선으로 여성의 본질을 자연과의 조화 속에 알려가는 자신의 생각들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김 작가는 "인간의 삶은 자기를 둘러싼 주변 조건들과 자기 내부의 깊은 곳으로부터 발생하는 근원적인 의문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해답을 추구하는 힘든 과정"이라며 "내게 있어 작품 활동은 자기 내부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자연과의 지속적인 반응과 소통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삶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전남대 예술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달, 해를 품다, 뉴 디스코 초대작가 전' 등 수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해 온 김진희 작가는 조형적인 형태에서 사유적 방향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자아실현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 오며 역량 있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인간 내면의 갈등과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본성을 회복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몽상의 자유' 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예술적 성찰과 진정성 그리고 삶의 추상성이 스며들어 있는 작품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김진희 작가는 "작가라면 자신의 예술적 감성을 담아 사물을 새로이 해석하고 다양한 표현방법을 통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화가를 꿈꾸다 보면 이상과 다른 현실에 부딪혀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정진과 도전으로 일구어내는 희열과 감동이야말로 화가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자 기쁨"이라고 전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힘든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작품으로 웃음과 여유, 휴식과 희망을 잉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녀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 사람들
    2015-01-28
  • 소품 배우 김문혁씨, 투병 의지 강해...현재 호전중
    [동포투데이] 20일, 연변에 거주 중인 김문혁 씨 인편으로 긍정적인 소식이 전달됐다. 지난 해 11월 17일 ‘동포투데이’를 통해 김문혁 씨의 안타까운 투병 소식이 전해진 뒤 중한 양국에 거주 중인 동포들의 따뜻한 정신적, 물질적 응원에 힘입어 김문혁 씨가 호전 기미를 보인다는 소식이다. 우선은 김문혁 씨 스스로가 투병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는 점이다. 김문혁 씨는 집에 80고령의 노모가 있어 연길지역을 떠나 더 큰 병원에 가 치료받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연변 지역의 의료기술과 약물로 치료를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 치료 초기에 투병하던 때와 달리 투병 소식이 알려지고 팬들의 따뜻한 응원에 힘입어 김문혁 씨는 요즘에도 매일 반시간씩 운동을 견지하는 중이다. 최근 김문혁 씨에게 또 반가운 일이 생겼다. 연길 철남병원의 정원장이 무료로 치료를 돕겠다고 선뜻 나선 것이다. 김문혁 씨의 주치의인 김선생은 대개 두 개 료정의 치료기간을 거치면 상태가 많이 호전될 것이라며 ‘(김문혁 씨의) 체력상태가 많이 저하되어 치료에 어려움이 있으나 함께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김문혁 씨는 열흘째 수면제 처방 없이도 잘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김문혁씨는 꾸준히 인편을 통해 소식을 전해왔다. 관심을 준 팬들과 후원자들에 감사의 인사와 더불어 현재의 진행상황을 알리며 치료에 힘써야 된다는 의지 때문이다. “고마운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팬 여러분 들 앞에 다시 서는 것만이 여러분들의 사랑과 관심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고 앞으로도 열심히 병마와 싸울 것입니다.” /전춘화
    • 사람들
    2015-01-22
  • 스케일이 큰 서사구조안에 우리 민족의 상흔을 보듬다
    [동포투데이] “역사라는 거대한 거푸집 안에 민족의 스토리와 애환을 무늬결 섬세하게 새겨넣은 력사물에 대한 작업이 요즘 내가 하는 전부의 일입니다.” 조선족문단의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이 새로운 판형으로 새해 첫기가 출싱, 그 중 압권으로 김혁 소설가의 새로운 장편 “춘자의 남경”이 눈에 띄였다. 소재 또한 특이하면서도 우리 문단에서는 독보적이다. 바로 일본군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이라는 소재를 한꺼번에 다룬다고 작가는 머리말에 밝혔다. 그 소재의 방대함과 시효성있게 이 다루기 어려운 묵직한 소재의 집필에 착수한 소설가를 만나보았다. 기자를 만나자 김작가는 하쿠다 나오키라는 작가를 아느냐고 선참 물었다. 일본에서 알아주는 베스트셀러작가인데 그의 대표작인 “영원의 제로”라는 소설을 해외에서 주문해 읽었고 영화로도 보았다고 했다. 일본의 자살특공대 소재를 다룬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소설이였는데 소설이 다룬 극우적인 경향은 물론 무엇보다도 이 작가가 도처에서 “남경대학살은 없었다”, “위안부는 거짓말”이다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는데서 경악을 느꼈다고 했다. “과거사 문제로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얼어붙은 가운데 몇몇 일본 작가들의 극우적인 행보에 대한 유감과 작가로서의 책무감으로 이 소재를 다룰 생각을 갔게 됐다”고 김작가는 말머리를 열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작가를 떠올렸다고 한다. 장순여(张纯如)라는 미국계 중국인 르포작가이다. 작가이자 사학가인 그녀는 남경대학살에 대해 저술한 르포로 유명하다. 그가 저술한 장편르포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는 해외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1937년의 그 겨울, 남경에서 일본군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대학살 그 만행의 참상을 생생하게 되살린 보고서였다. 저자는 섬세한 필치로 남경의 대학살을 이야기했고 또 일본이 어떻게 역사속에서 대학살의 기억을 지우려 망녕되게 시도했는지 낱낱이 밝혔다. 하지만 그의 양심적인 집필은 일본 극우세력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들로부터 끈임없는 협박을 당해 왔던 그녀는 정신적 고통을 못이겨 2004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작가에 대해 중앙텔레비방송국 다큐프로에서 보고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녀의 문명(文名)을 알린 이 장편르포를 해외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해 읽었다고 했다. 소설쓰기와 병행해 매체에서 20여년을 기자직으로 일해온 김작가로서는 르포가 갖는 매력에 대해 십분 잘 알고있었다. 르포의 매력에 푹 빠져 한때는 수천부가 팔려 당시 이슈로 된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를 출간한적도 있었기에 아직도 애대하는 쟝르라고 했다. 그 르포를 읽으며 저도모르게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었다고 했다. 이는 문단에서 “독서광”으로 알려진 김작가의 엄청 많은 열독리력중에서도 크게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다고 했다. 그후로 cctv의 일곱시 뉴스에서 또 한번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는데 뉴스에 의하면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1명이 열흘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한다. 그날 김작가는 이미 구상을 마무리한 다른 소재를 미루고 이 소재를 장편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장편화하기로 하고 지난해 여름부터 차분하게 자료집필에 착수 했는데 뜻밖에 기성의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어요.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그런대로 적지않은데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많았지요.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몰아의 지경으로 하나에 몰입하는 작가로 알려져있는 김작가는 지난해 하반년을 옹근 위안부와 남경대학살의 사료를 뒤지고 수집하는데 시간을 바쳤다. 수십편의 문사자료집과 피해 당사자들의 진술서는 물론, 원체 영화수집에도 흥취가 있는지라 관련 다큐와 영화, 드라마도 수십편 보았다고 했다. 일본군국주의 실상을 깊이 료해하기 위해 수백만자에 달하는 대하실록소설 “태평양 전쟁”도 읽었다. 그 와중에 외려 위안부 소재의 소설작품이 일본 본토작가의 작품이 있는데 반해 우리 작가들의 작품이 없는데 대해 놀라움을 느꼈고 창작의 립지를 더 굳히게 되였다고 한다. “가와다 후미코라는 일본작가의 ‘빨간 기와집’ 그리고 한국작가 윤정모의 ‘에미이름은 조선빼였다’, 미국작가 모헤이더의 ‘난징의 악마’등 이 소재 관련 몇부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작가 엄가령의 남경대학살 소재 ‘금릉 13채’는 이미 몇해전에 읽었지요. 소설로서는 이 몇부가 작품성이 들쭉날쭉한 이 소재의 작품들중에서의 수작(秀作)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이 작품들을 꼼꼼히 읽으면서 작가적 시각과 의무감에 대해 다시금 깊이 느꼈습니다" 새로운 장편의 창작을 위해 김혁작가는 지난 가을, 남경을 다녀오기까지도 하였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고한다.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300000”이라는 수자가 도처에 새겨진 기념관에서 일본군인의 극한적 잔혹성을 보여주는 만여점의 자료들을 둘러보면서 다시한번 이 소재 작품창작에 매진해야할 각오를 머금었다고 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있다. 불과 수십년전 중국과 한국등지의 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수십만이나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다. 하지만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위안부 배상촉구시위가 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냉냉하게 외면하고 있다. “위안부는 자발적인 성매매이다”며 그 오욕의 력사에 대해 세탁하려하고있다. 이러한 “역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역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한 소설가의 창작충동을 건드렸다”고 김작가는 말한다. “역사의 질곡에 갇혔던 불운한 그녀들을 대상화하는데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대미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반성과 공감과 치유를 부르는 그런 재현물을 쓰고자 합니다. 단지 상상해서 만드는 픽션이 아니라 생존자들의 진술,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문서, 르포 등 갖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삼아 력사의 진실과 아픔을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근 십년사이에 김혁작가는 다섯부의 장편소설과 한부의 장편르포와 문화시리즈 그리고 두부의 인물전기를 펴냈다. 거의 한해에 한부꼴로 펴낸 셈이다. 게다가 칼럼, 명상록, 소설, 편찬저서들도 곁들면 이 동안 그의 창작량은 그야말로 문단의 원로들이 격찬할만큼 “전무”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그중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문혁에 관한 기억을,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흔들리고 있는 조선족공동체의 아픔속에 스러져가는 녀인들의 모습을, “완용황후”은 연변에서 숨진 청나라황후로부터 근대 동북의 근대사를 보여주고 있다. 또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는 “무성시대”는 중국영화황제 김염의 영화인생을 그린 장편소설로서 지난해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지지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모두가 평론가들이 평하다싶이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그외 50여만자에 달하는 “일송정 높은솔, 해란강 푸른물”은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룡정의 생성과 지금까지의 력사에 대한 완결판같은 작품이며 3년채 련재되고있는 문화 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은 스크린의 각도에서 조선족의 백여년력사에 대해 다른 텍스트로 연구한 작품이다. 김혁 소설가가 들려주는 신작장편 “춘자의 남경”의 스토리만 들어보아도 주인공의 삶의 리력이 너무나도 장대해 “파란만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사적 개념이 우렷이 드러나 보인다. 자신의 근년래의 창작성과와 금후의 과제에 대해 김혁작가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말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이러한 창작성향이라고 그는 말한다. “신뢰할 만한 소설 창작 기량을 발휘해 주제와 소재의 명징성, 소설적 사건의 이미지화와 깔끔한 흐름등이 잘 조합되여 있는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것”이 그의 근년래 그리고 금후의 창작방향이라고 해석한다. “한 민족, 한 인물의 연대기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인 재현만으로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 내면을 탐사할수 있다”면서 “민족의 역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입체성을 규명하는” 방대한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있는 김혁 작가, 그의 신작이 기대된다. 신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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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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