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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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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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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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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미자- 그녀는 한국생활 19년이 된다. 19년을 사사오입하면 20년이 되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생활 20년이 가까운 최미자씨한테 있어서 어떤 변화들이 생긴 20년이었을까? 2001년 최미자씨가 한국행을 할 적엔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경제생활 수준 차이가 크게 날 때였다. 거기다 중국에서도 동북쪽 오지라 불리는 연변과 한국 사이의 차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연변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은 일종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하다면 최미자씨 역시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수많은 중국 조선족 중의 한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저의 고향은 중국 연변이구요. 한국은 2001년에 나왔어요. 중국에 있을 때 부자란 소리는 못 들었지만 그렇다고 매일 의식주를 걱정할 사정은 아니었어요. 한국으로 나온 건 한국의 선진적인 문화를 배우고 또한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물론 돈도 벌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죠.” 어찌 보면 최미자씨는 <코리안 드림>으로 한국으로 진출한 여느 중국 조선족들과 다른 곳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디를 보나 그냥 보통 여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한테는 꿈이 있었다. 꿈이란 타인한테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 한국에 온 뒤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그것보다는 배울 것이 많았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동방의 예의지국(东方礼仪之国)>라는 한국에서는 가정예의 외에도 밖에서의 <인사예의>, <봉사예의> 그리고 남녀 사이에서의 이성을 대하는 예의 등으로 예의범절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같은 민족이라 해도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차이가 아주 많았다. 총체적으로 자질 상 한국인은 중국 조선족에 비해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의 티>라고나 할까?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시각에는 어딘가 <색깔>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동족인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한가정의 부부 중 한쪽이 한국인이고 한쪽이 외국인일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사례로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쯤 한국에는 일본에 있는 한인 동포에 대해서는 <돈포>라 했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에 대해서는 <똥포>란 당시의 <신조어>가 유행될 정도였다. 최미자씨는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저는 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가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아이>들입니다. 그러자 다가정 문화 가정의 아이란 자체가 색깔적인 시각인 거지요…현재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다문화 가정>이 아주 많으며 그것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8년 <인구 주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다문화 가구원>은 33만 5000가구에 인구는 100만 9000여명으로 총 인구 5136만명 중 2%를 차지합니다.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이런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이 없는 올바른 정의(定义)를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최미자씨는 생각은 굴뚝 같았으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발기해 낸 것이 몇몇 중국 출신 여성들과 함께 만들어낸 자조모임(自助聚会)이었다. 그런데 정작 활동을 벌이자고 보니 언어의 불편, 서류 작성 미숙 및 통역 곤란 등 이런저런 애로가 적지 않았다. 이런 애로사항을 극복하자면 몇몇이 아닌 일정 규모가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최미자씨는 뭘 하려면 체계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을 털어놓자 기타 자매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2010년 충남의 다문화가족협회가 고고성, 본 협회는 공주에 두었고 지회는 공주, 계룡, 논산과 보령에 두었으며 최미자씨는 보령시지회장을 맡게 됐다. 지난해 6월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 <국적 미취득 결혼 이주여성 대상 연구 조사 발표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회의에서는 많은 것들이 제기됐다. 한국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이 어려운 것, 이로 인해 인구감소가 초래되고 지어는 인구절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것,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하고 저 정부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동남아 여성들과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의 필요에 의해 이주해온 여성에 대한 한국의 차별 인식과 대우에 문제가 있다는 것 등으로 어떤 이들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문제는 이주 여성뿐 아니라 이주 여성의 자녀들까지 겪어야 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파헤치기도 했다. 회의에서 최미자씨는“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도 차별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아이들이다. 그야말로 다문화 가정 아이라고 호칭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다문화가정의 여성 및 그 자녀들에 대한 차별과 기시,이는 이주 여성들의 말없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충청남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결혼이주여성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주 여성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 107명 중20%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본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 같아서”란 응답도 16%였다.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서 보면 결혼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깊이 적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최미자씨 역시 한시기 중국 국적을 포기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후회가 없지 않았었다. 그녀가 한국에 나올 때에 비해 현재 중국이 경제적으로 엄청 살기가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한국에 비해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미자씨는 인차 그 후회를 접기로 했다. 같은 동포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한 정이 그 후회를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던 간 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한국행이었고 또한 그 선택이 딱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기에 애써 자아위안을 하면서 내가 선택한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한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더듬게 됐고 결국 이주 여성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거예요. 이렇게 마음을 굳히니 두루두루 할 일이 생기더군요. 협회 일을 보는 한편 주민들을 위한 영어와 중국어 가르치기, 자녀를 위한 방과 후 수업, 노인복지관의 배식 봉사 등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활동은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한 것이고 그 행사에서 최고의 만족도를 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었죠. 거기서 전 크나큰 자신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우리 이주 여성들도 본토 한국여성들처럼 잘 살 수 있고 떳떳이 살 수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을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심을 말입니다.” 한국인이 올바른 주인의식과 책임감으로 이웃인 다문화 가정을 좀 더 세심하게 보듬어주고 바른길로 이끌어 ‘화목한 이웃’이 되기를 희망하는 최미자 씨. 그의 바람처럼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없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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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현대무용 공연의 주역·무용가 최효진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현대무용가 최효진 교수(한양대 무용학과)는 현대무용의 인재 양성과 정기공연 활성화에 기여해온 대표적인 대한민국 무용계의 한 사람이다. 20여년이 넘도록, 현대무용계의 발전과 후학양성의 길을 걸어온 최효진 교수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 제자들과 함께하는 정기공연으로 6년째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9년, 한국의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쉴 틈 없이 달려온 최효진 교수는, 앞으로도 무용인의 예술혼과 젊은 제자들의 열정을 모아, 현대무용 예술의 정점을 춤의 미를 통해 관객의 마음 속으로 전달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Q. 정기공연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A. 어릴 적부터 무용을 배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까지 긴 시간 동안 문화예술과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나이가 들고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현대무용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자 하였기에, 정기공연으로 관객에게 찾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무대를 준비 하는 것이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지만,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이 뜻을 지키기 위해 매년 무용단 정기공연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오늘도 초심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Q. 공연 내용이 궁금하다. A. 공연은 어린 제자들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됩니다. “Happy Day”라는 작품을 통해 어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소녀들이 성장하여, 소외된 계층을 위해 손을 내밀며 “선물”처럼 다가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여성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중 놓치고 살아가 “유실” 된 것에 대하여, 저와 제자들이 여성들의 일과 꿈에 정체성에 대해 춤으로 표현합니다. Q. 공연 제목이 왜 ‘The Lost유실’인가 A. 이번 공연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놓쳐 유실된 것>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공연에 제목은 몇 년 전 폭우로 인한 우면산 산사태에서 얻어졌는데, 그 시기에 저에게 춤에 대해 유익한 조언을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 제목을 제안하셨습니다. 춤으로 다루기 어려워 고민하던 차에, 한 편의 시를 읽고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는 어딘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증폭되는 가사일과 일상의 부조리함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감을 받았고, 저의 삶 또한 이처럼 유실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며 이 공연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열고 닫는 냉장고, 부르릉거리는 세탁기와 청소기 소리, TV에서 나오는 뉴스와 나도 모르는 라디오 음악,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잡동사니 그리고 아파트 문간에 쌓여만 가는 배달박스들 등. 우리 모두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둘러싸여 있고, 저마다 조금씩 나를 유실하고 있는 건 아닐 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 현대무용가 최효진교수, 한양대 무용학과,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이사 Q. 마지막으로 감사한 분들이 있나 A. 저에게 춤을 처음 알게 해주신 장연향 선생님, 또 제 삶을 무용에 대한 신념 하나로 무용가와 교육자를 만들어 주신 이숙재 교수님, 공연 때마다 항상 저를 찾아와 응원해주시고, 한국문화예술발전에 열정을 가르쳐주시는 문예총 장유리 이사장님 등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특히, 이번 “유실”이라는 타이틀을 후배, 제자라는 보물들과 함께 하게 됨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추운 겨울, 김이 서리는 무용실에서 추위를 잊을 만큼 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제자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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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헌터: 월드’ 게임 BGM 작곡가 강정란 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의 유명한 컴퓨터게임기업 캡콤(Capcom)이 야심차게 개발한 신작 ‘몬스터헌터: 월드’(MHW)가 발매된지도 벌써 7개월이 훌쩍 지났다. 갈수록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게임은 기존의 게임에 비해 혁신적이란 호평을 받고 있는데 배경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게임속의 BGM 상당수가 한 조선족 작곡가의 손을 직접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 출신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강정란(康贞兰) 씨, 2006년 지린성 연변1중을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서 “조경디자인(景观设计)”을 전공한 후 일본 규슈대학에 유학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음악감각이 탁월했고 일본어 실력도 뛰어난 그는 캠퍼스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매우 빠르게 유학생활에 적응했다. 강정란 씨는 캑콤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편곡 맡은 게임 BGM은 ‘몬스터 헌터 : 월드’(MHW) ‘영웅의 증거’였다. 그는 나리타 아키히코 씨 밑에서 수행을 하며 제작하였고, 하나의 큰 과제인 "영웅의 증거"의 편곡을 맡았다. 나리타는 작곡가들의 특징과 개성을 파악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지휘를 항상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부담감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의미를 생각하며 제작에 임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난 6월 일본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 앨범상과 음악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은 인기 게임 사운드 트랙을 스포티하이(Spotify).내 재생횟수와 유저들의 투표수로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강정란 씨는 “금번 이런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많은 유저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이 타이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큰 호평을 받아서 매우 놀랐다”며“트로피를 손에 들었을 때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몬스터 헌터: 월드’의 음악을 들어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감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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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인생연습’ 한가빈, “따뜻한 가수로 남고 싶어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동장군의 기세에도 기죽지 않고 기세등등한 가수가 있다. 지난 상반기 유튜브 조회수 100만을 기록하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트로트계의 ‘한가인’ 한가빈(27) 씨가 주인공. 최근에는 한 씨를 위한 전국 규모의 팬클럽이 생겼고, 네이버밴드 등 SNS에 그의 이름이 수 없이 올라 화제가 됐다. 방송사로부터 연일 러브콜을 받으며 주가도 크게 올랐다. 데뷔 후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한가빈 씨를 만났다. Q : 안녕하세요. 최근 ‘한가빈 효과’라고 할 정도로 온·오프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아요. 방영 중인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OST를 불러 많은 시청자들의 호평도 받았죠. 그간 소회와 OST ‘인생연습’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 포털이나 방송사 홈페이지를 보면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제 노래를 듣고 ‘펑펑 울었다’는 댓글을 보면 절로 힘이 납니다.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이게 꿈 인가 생신가 싶기도 하죠. 제가 부른 곡 ‘인생연습’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뷔 6개월 만에 드라마의 OST, 그것도 공중파 드라마를 맡았다는 건 큰 영광이죠. 물론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어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호응은 어떨까’라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감독님이 타이틀 곡 ‘꽃바람’을 들으신 후 “이 친구 OST 시켜야겠다”마음 먹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로트 앨범에는 유일무이하게 기타 반주 하나로만 부른 어쿠스틱 발라드 버전이 있거든요. 그 버전이 너무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Q : 다른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A : 작곡하신 김종천 선생님도 곡 쓰시기 전부터 “한가빈에게 꼭 맞게 써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쓰셨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저와 찰떡궁합입니다. 녹음 전까지 크게 고민 하지 않았고, 술술 풀렸으니까요. 음악이 공개된 후 방송국 게시판에 이 노래가 뭐냐는 문의가 폭주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종합 차트에서 아이유, 빙탄소년단을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고요. 처음으로 비명이라는 걸 질러 봤습니다. Q : ‘인생연습’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던 데 어떤 내용인가요? A : 방송이나 행사에 가면 꼭 인생연습 불러달라는 요청이 많아요. 그때 마다 노래만 하지 않고 가사를 설명 드리곤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보통 인생을 얘기할 때, 인생에 연습이 어딨어 인생은 생방송이지…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노래가 그 정의를 바꿉니다. 인생에도 연습이 있다고. 지금까지 아파했던 날 들은 인생의 연습이었다치고 이제부터 행복한 실전을 살아 갈 거야하고 다짐하는 곡입니다”라고 말하죠. 몇 마디로 전달 할 수 없지만 조금 이라도 더 와 닿으시라고 항상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인생 연습을 들으시고 조그마한 위로가 됐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수많은 날들이 인생연습이겠지만, 저 역시 그때마다 제 노래를 부르면서 이겨내려고 합니다. Q : 가수로 데뷔는 때는 언제 인가요? A : 중3 때 음악을 처음 접한 후 몸과 마음이 들떴습니다. 노래를 해볼 까 하다가 이게 꿈이 돼버렸죠. 인기가요를 보고 화려한 무대에 오른 가수와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길을 걷기로 했어요. 그러다 중 3때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21살 때 트로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때부터 말 그대로 고생길이 열렸죠.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다 현재 소속사 마이클미디어를 만나 6년 간 산전수전 다 겪고 2015년 10월 “꽃바람”을 발표했죠. 다른 사람들은 첫 앨범을 내면 감격해 눈시울을 붉힌다고 하던데 저는 ‘이제 고생이다’는 생각에 기뻐할 시간도 없었어요. Q : 처음 무대에선 기분은 어땠나요? A :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대신 아마추어 가수로는 수 없이 많이 무대에 올랐지만 대중가수로는 처음이었으니 긴장이 컸던 것 같아요. 한편으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에 슬프면서도 기쁘고 복잡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Q :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즐겨 듣는 음악 장르는? A : 저는 시실 이런 질문이 가장 힘들어요. 다양한 장르의 가수와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콕 집어 얘기하면 제 감성과 가장 잘 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트로트보다 발라드입니다. 대표적으로 린, 박화요비 선배님을 들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부른 트로트 음악은 감성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마도 이 두 가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Q : 가수로 활동하면서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A : 어린 친구들로부터 쪽지와 메일을 종종 받아요. 그 중 “언니 같은 가수가 될 거에요”라는 내용이 많은데요. 저도 어릴 때 다른 가수를 보고 꿈을 키웠듯 이제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었구나 생각하면 기쁘고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친구들 때문에 더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앞으로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A : 따뜻한 느낌의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노래 잘하는 가수, 예쁜 가수보다 누군가 저를 봤을 때 “저 가수는 잘은 몰라도 참 따뜻해 보여”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추운 겨울 따뜻한 난로처럼 항상 곁에 두고 싶은 가수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Q : 끝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 제가 항상 팬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는 서로 가수와 팬으로 만나지만 궁극적으론 가족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누구를 동경하고 가까이하지 못하는 사이가 아니라 함께 힘을 주고 기뻐하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가수와 팬은 함께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팬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트로트 계에 입문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그동안 숨어있던 내공이 한 번에 분출한 것일까. 그만큼 기대되는 가수다. 머지않아 한국 트로트 계를 주름 잡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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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이 낳은 한송이 아름다운 “예술의 꽃”
중국명: 金海心 영문명: Hannah Kim 출생년도: 1978.10.30 출생지: 중국 베이징 직업 : 가수, 사회자 혈형: B형 언어: 중,영,한,일 소속: 김해심음악레이블 조선족 가수 김해심은 1978년 베이징의 음악인 가정에서 출생, 부모는 음악교수었으며 일찍 딸 김해심에게 고전음악을 가르쳐 주었다.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음악기초를 다져온 김해심은 1998년 부모의 학생인 저명한 음악가 싼보리(三宝力)의 추천에 의해 소니레코트회사와 계약을 맺고 가수생애를 시작했다. 이 해 김해심은 저명한 대만시인 리만팅(厉曼婷)이 작사한 “조금도 안남겨(毫无保留)”와 “잠들지 않는 바다(睡不着的海)”를 불렀다. 이 중 “잠들지 않는 바다”는 1999년 10대 골든곡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김해심은 그녀의 두번째 앨범 “그렇게도 자호감 있어(那么骄傲)”을 출판, 직접 앨범의 노래를 제작하는 사업에 참여했으며 이 중 3수의 노래는 자신이 직접 창작한 것이었다. 2002년 김해심은 중국의 유일한 대표가수로 상하이에서 펼쳐진 한류음악회에 참가햇다. 그 이듬해 김해심은 화나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 “김해심”을 제작, 이 중 김해심이 선정한 주제곡 “대안(对岸)”은 연속 2주간 중국가요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6년 김해심은 독립적인 앨범회사를 창립, 동시에 앨범 “독립일”을 제작했는데 이중 80% 이상의 작품의 작곡은 그녀가 직접한 것이었으며 이 앨범은 음악대상을 받기도 했다. 2008년 김해심은 국내사상 처음으로 있은 대형 패션오락프로 “아름다운 소가인(美丽俏佳人)”의 사회를 맡았으며 베이징올림픽을 맞으면서 “베이징은 그대를 환영한다(北京欢迎你)”를 부르기도 했다. 2009년 김해심은 데뷔 10주년 기념 앨범을 출판, 동시에 음악드라마 “곧 사라지게 될 청춘(致我们终将逝去的青春)”에 출연, 정휘의 역을 맡았다. 2010년 김해심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사랑은 그대와 나사이에”를 불렀다. 2013년 김해심은 김해심음악레이블 회사를 창립하고 경영주로 되었다. 김해심은 가수일뿐만 아니라 창작일군이며 또한 사회자기도 한 다면수이다. 거기에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를 정통하고 있으며 중국의 7대 방언중의 하나인 광동어를 특히 잘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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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아시아를 잇는 재일 조선족 여가수 김경자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개혁개방의 중국대륙은 외국을 향해 문을 열면서 가요분야에서도 미국노래, 일본노래, 인도의 노래와 홍콩, 마카오의 노래들이 쓸어들어 왔고 당시 국교가 없었던 나라인 한국의 노래들도 중국 대륙에 상륙하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홍색중국”에서도 철저하기로 두번째라면 서러워 할 연변의 가요계는 중앙과 주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많은 가요들이 창작되고 방송과 무대를 통해 선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질, 형식과 종류상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 가요창작 일꾼들은 한국의 트롯트 가요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노래를 창작할 엄두를 크게 내지 못했다. 특히 가요창작에 있어서 남녀간의 화끈한 사랑을 취급한 노래는 별반 만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럴 즈음, 프로가수도 아닌 중국 연변의 한 여대생이 “살구나무”란 노래를 갖고 라디오방송국의 마이크를 잡으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당시 연변대 조선문학부에서 작가지망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었던지라 한번은 제가 ‘소녀의 사랑’이란 가사를 쓰고 연변대학 예술학부의 이정씨가 곡을 붙인 노래를 갖고 연변방송국으로 찾아갔었지요. 저 자신이 직접 불러보고 싶어서요. 그 때 방송국 음악편집 선생님들이 저의 노래를 들어보시고는 목소리가 참 맑지다면서 가수로 데뷔하면 좋겠다고들 했었고 저는 그 제의를 숙명처럼 받아들였어요…” 이를 계기로 김경자씨는 “산향길”, “돌다리”, “물소리” 등 여러 수의 노래를 연속 불러 방송전파를 타면서 “살구꽃 소녀”로 불리면서 일약 대학가요제의 스타로 성장하였다. 하긴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했던 김경자씨가 대학입학 전까지 무대에 오르는 차수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가수로 데뷔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녹음이 된 음악으로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노래만 맞추면서 감각적으로 고창모 선생이 편곡한 반주가 너무 황홀하여 저도 몰래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는 김경자씨었다. “이렇게 저의 데뷔는 라디오방송국 취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그녀한테는 많은 팬들이 생겼는데 제일 처음으로 받은 팬의 레터는 바로 일본에서 날아온 것이었으며 그 팬의 이름은 사쿠라이 키요코였다. 이는 신인가수였던 김경자씨한테 무궁무진한 자신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아래의 내용은 김경자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즐겨 들었던 가요는? -제가 데뷔하던 지난 세기 80년대는 라디오를 통해 한국음악을 몰래 듣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어요. 다른 외국 음악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그 때는 한국 가요무대 방송을 제일 기다렸고 그 중 흘러간 옛노래들에 되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미자 가수의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같은 트로트가요가 가슴에 감동을 많이 주었어요. Q 가수로써 항상 마음(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은? -저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고 문학을 전공하였어요. 목소리는 아마 천성적인 것이라 생각되었기에 발성연습은 따로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노래는 소리보다는 마음을 전하는 예술이라 생각되었으며 가사 한마디 한마디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전하려고 많이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관중들에게 표현예술의 즐거움도 선물하고 싶어 율동표현도 많이하고 있습니다. Q 가수를 하면서 가장 잘했다 싶을 때는? 역시 무대에서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때 제일 행복하고 저에게 노래할 수 있는 목소리를 주신 부모님한테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1년 2월 일본 “아사히신붕” 1면 2면 기사에 “아시아를 이어주는 가수”로 소개되었을 때 제일 가슴이 벅찼습니다. Q 반대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노래는 저에게 있어서 아마 하느님이 주신 제일 훌륭한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좋아서 즐기고 있습니다. 노래에 특별한 욕심도 없기에 별로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Q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꿈꾸는 뮤지션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국경을 넘어서 민족을 넘어서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는 것이겠지요. 꿈꾸는 뮤지션은 항상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가까이에서 음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 3국의 훌륭한 음악을 서로 서로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한편, 현재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경자씨의 스켓쥴을 빽빽했다. 연간 10회 정도의 공연활동에 참가하며 기자의 인터뷰를 접수하던 전날 밤에서 사쿠라 마츠리에서 일본가요, 중국가요와 한국가요 이렇게 몇 수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오는 6월 13일에는 일본 유명가수들과 함께 “꿈의 광장 가요제”에 출연, 오는 9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진행되는 일본문화제 공연에도 참가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외 일본에 건너간 뒤 2011년 “살구나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출판, 주로 중국에 있을 때의 힛트곡들을 리메이크 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출판, 주로 일본명곡들을 우리말로 리메이크 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기도 했다. 현재 가수생활외 김경자씨는 일본 도쿄 히나타상사를 운영, 한국화장품, 건강식품 판매를 하면서 겸하여 중국어교실을 운영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1992년 재일교포출신 남성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현재 남편은 대학교수로, 딸은 에이지약과대학에 재학중이다. 1988년 중국 연변라디오방송국에서 선정한 제일 좋아하는 노래(10년간의 노래) 10곡 중 1위(산향길), 2위(살구나무), 4위(돌다리)를 하면서 연변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수로 부상했었던 김경자씨ㅡ 현재 그녀는 그 어떤 상이나 순위보다는 도쿄돔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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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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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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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동포투데이] ‘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 짜기 노래’,‘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붉은 해 변강 비추네’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친 원로가수 방초선 선생은 지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가 1급 성악가인 방초선 선생은 연변에서 북경, 전국, 나아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높은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특별예술가”칭호를 받은 방초선 선생은 “중국 예술가 사전”과 “중외 여성 명인 사전” 등 사전에 약력이 수록될 만큼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1932년 조선 김책시에서 출생한 방초선은 여덟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마을의 꾀꼴새로 불리던 그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많은 외국 노래를 배우고 불러 늘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5살 나이의 방초선은 길동군분구 문공단의 선전대원으로 성장하였다. 1949년 연변가무단 전신인 연변문공단이 세워지면서 방초선은 연변문공단에 전근하여 독창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1957년, 방초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연환축제 음악콩쿠르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삐어난 목청과 춤사위로 방초선은 ‘처녀의 노래’로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은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 후 방초선 선생은 공장, 광산, 병영, 향촌 그리고 변방의 방방곡곡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겼고 열정과 희망을 안고 북경 최고 음악학부에서 성악공부를 계속하였다. 방초선 선생의 음악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을 말하면 인생 동반자인 남편 왕개평 선생이다. 1975년 방초선 선생은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어 독창 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 분야를 넓혀갔다. 이 기간 방초선 선생은 북경, 연길 등 지역에서 개인 독창음악회를 가졌고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북경, 상해, 남경, 중경, 연길, 카나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를 순회하면서 80차의 음악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은 방초선 선생을 보고 선천적으로 좋은 목청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는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목소리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초선 선생은 음악은 자신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무대위에서 빛났던 그의 70여 년의 예술 생애를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그의 고운 목청을 타고 ‘명곡’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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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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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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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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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 ● 철 민 “나의 일생은 축구의 일생이다. 인생의 청춘기에 들어서서 축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 이 때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박만복 원로가 늘 입버릇처럼 외우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와 더불어 장장 60여년간 고집스레 한우물만을 파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박만복 원로의 축구생애를 단계로 정리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네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단계 : 선수로 뛰던 나날 왕청현 태생인 박만복원로가 전업 축구선수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53년 3월, 그는 과외축구팀에 불과한 연변 축구팀의 주장으로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당시 연변팀은 그 경기에서 준우승을 따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연변이란 조선족집거지구가 있고 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심어 주었다. 그후 박만복은 중앙체육훈련반 축구팀에 선발됐고 뒤따라 인차 24명(조선족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중국 청년축구 유학대표단과 함께 헝가리로 향발, 유학시절에 중국 청년팀의 이름으로 루마니아, 폴란드, 동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등 나라 축구팀과 자주 평가전을 치르군 했다. 특히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연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에서 박만복을 포함한 중국청년팀 수비라인은 그 탄탄한 수비력으로 하여 “깨뜨릴 수 없는 만리장성”이란 별호를 갖게 됐는데 그 중앙수비가 바로 박만복이었다. 또한 유학시기 박만복은 헝가리국가팀 감독으로부터 중국청년팀의 “로켓”으로 불리우게 됐고 귀국 후에는 북경팀의 선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리그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들과 함께 건장칭호를 받게 됐다. 두번째 단계 : 축구팀 사령탑 잡던 나날 1959년 박만복 원로는 어느 한 경기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선수대오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뒤 북경팀의 감독조리로 2 - 3년간 있으면서 일정한 경험을 쌓자 팀의 사령탑을 잡을 야망이 생겼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의 축구부터 춰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여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발전전도 등을 그대로 뿌리치고 연변으로 달려왔는데 그 때가 바로 1962년 8월경이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은 박만복은 길림성팀 선수들이 속도가 빠르고 완강하고 체력이 왕성하지만 기전술이 차한 페단에 근거하여 유럽식기전술을 팀에 주입, 그 기전술을 당분간 받아물지 못한 팀이 1963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강급해 을급으로 내려가는 불운을 지니긴 했으나 그 뒤 반복적으로 기전술응용을 교정한 결과 1964년에 인차 을급리그 2등으로 갑급에 올라왔고 바로 올라온 그 해인 1965년엔 끝내 중국조선족축구력사에서 휘황찬란한 전국축구갑그리그의 우승이란 전과를 올리었다. 또한 그해에 박만복 감독은 허경수, 정종섭, 당봉상, 김정식, 이두근, 유명복 등 6명 선수를 국가팀에 수송해 냈을뿐만 아니라 지운봉, 정지승, 동경춘 등 10여명의 건장도 육성해냈다. 그것은 박만복 원로의 감독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었다. 그뒤 1971년 문화혁명의 가장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자 박만복 원로는 재차 길림성 청년 3팀을 조직, 이 팀은 1973년 전국축구청년연맹전에서 4등이란 영예를 지니게 됐으며 그 시기에 염승필, 이승범, 전석기, 우근화 등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냈다. 감독생애를 거치면서 박만복 원로는 도합 100여명의 우수한 선수와 10여명의 건장을 육성, 이는 중국축구 특히 우리 민족의 축구발전사에 있어서 거룩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단계 : 축구친목회 회장사업 맡던 나날 20세기 80연대에 이르러 중국축구의 발전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조선족축구는 그 보급과 발전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박만복 원로는 조선족축구로 하여금 연변을 벗어나 동북 3성 및 전국에 보급해야 할 사명감을 안고 중국조선족축구친목회를 구상, 그 것이 바로 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가민정부에 등록된 국가1급체육사회단체(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한 체육단체)인 중국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이다. 친목회가 설립된 후 박만복 원로는 직접 그 회장직을 맡고 많은 사업을 했다. 우선 동북3성 각 지구에 친목회사업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적극 발전시키는 기초상에서 200여차에 달하는 축구지도원 및 심판원 양성반을 조직하여 조선족축구발전의 템포를 다그쳤으며 근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청장년과 소년아동들을 축구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중국조선족 근 100년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중국 전국조선족축구운동회를 5차에 거쳐 조직했으며 매차례의 경기 때마다 한국축구연합회의 여러개 팀을 초청하여 경험교류를 하군 했다. 지금 동북조선족 축구친목회에는 20여개의 분회와 1000여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는바 10년간 걸어온 그 자취마다에는 창시인의 한분이신 박만복 전임회장의 노고가 역역히 슴배어 있다. 네번째단계 : 축구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 박만복 원로는 고래희를 훨씬 넘긴 몸이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박만복 원로는 여전히 연변축구를 관심하고 있다. 은퇴 뒤 한시기 박만복 원로는 연길시에 장백축구학교를 세워놓고 축구후비력육성에 여생의 정력을 쏟다붓기도 했다. 당시 그 목적은 각종 원인으로 기회를 놓쳐 체육학교같은 곳에 가지 못한 축구인재를 받아들이고 키워주는 것, 그러한 취지로 세운 학교이기에 박만복 원로는 돈벌이보다는 축구인재발견에 모를 박았으며 그 학교는 당시 상급 해당부문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직업고중행열에 들어서기도 했다.한편 박만복 원로는 지금도 현재의 연변팀을 몹시 관심하면서 경기장을 자주 찾는가 하면 구단내에 존재하는 문제점도 지적하고있으며 또한 가끔씩 매스컴에 축구에 관련된 글도 써서 발표하군 한다. 중국축구 및 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사심없이 일해온 중국축구계의 원로이며 도사이신 박만복 원로 – 그이가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그렇게도 자랑찬 긍지로 주렁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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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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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제 77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미국의 뉴스전문방송(CNN)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의 골든 글로브 상은 정치대화의 무대로, 상을 발급하는 이와 수상하는 이 모두 여러 차례 목전의 국제 대사건들을 언급, 예하면 호주의 산불, 악천 기후의 위기, 여성의 낙태권 및 폭발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등이었다. 수상자들을 놓고 보면 브래드 피드가 영화 <할리우드 과거사>로 최우수 조연상을, 영화 <체르노빌>이 재차 최우수 한정 드라마(限定剧)로, <어리 광대>가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기생충>이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획득하였다… 이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은 아콰피나(Awkwafina)였다. 아콰피나는 코미디/뮤직 영화 <그녀한테 말하지 마(Do n't Tell Her)>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여 골든 글리브 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아콰피나는 그녀의 예명이고 진짜 이름은 린자쩐(林家珍)이며 1988 년 미국 뉴욕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콰피나는 4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줄곧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생활,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부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콰피나는 트롬벳을 배우기 시작,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6세 때 그녀는 영어단어 <어색한>에서 파생된 아콰피나란 이름을 자신에게 달아주면서 남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아콰피나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북경 언어대학교에 진학하여 2 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어 아콰피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와 올 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 및 여성연구를 전공, 졸업 후 여러 미디어업체에서 근무했다. 아콰피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지만 기실 랩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3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랩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튜브에 많은 노래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2014 년과 2018 년 각각 2 개의 개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랩 외에도 아콰피나는 배우로 경력을 바꾸었으며 영화 <놀라운 사랑(Amazing Love)> 및 <제동수 2 (Bravesman 2)> 그리고 <피크에 닿다(Reach the Peak)> 등에서 영화배우로서의 기질을 출중히 보이었으며 중국인 감독 왕즈이(王子逸)가 만드는 영화 <그녀에게 말하지 마(Do n't Tell Her)>를 촬영한 후에는 29 회 고담 독립영화상 최우수 여주연상을 받아 안았고 코미디/ 뮤직 영화에서 최우수 여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는 코미디/뮤직 영화 최우수 여배우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상까지 추켜올렸다. 아콰피나는 토크 쇼 사회자로 활동, 류위링(刘玉玲)의 뒤를 이어 <토요일 저녁 현장>을 사회하는 두 번째의 중국계 여성으로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반격 실제로 아콰피나의 많은 랩과 영화 및 TV 작품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공동체의 고정관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12년 아콰피나는 첫 번째 랩의 노래를 촬영, 이 노래의 초점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아시아 소녀들의 반항이었다. 2016 년 6 월 오카리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마르리트 조(Margaret Cao)와 협력하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의 고정관념을 조롱한 단일 <녹차>를 출시했다. 아콰피나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후 그 영화<그녀에게 말하지 마>를 보자 그 영화의 내용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 혼란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CNN의 보고서에 따르면 5일 저녁 무대 뒤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아콰피나는 “놀랍지만 아시아인이 더 많이 이길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콰피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후 처음으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2 년간 지명된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이다. 2019 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이자 <판타스틱 러브>의 배우 우텐민(吴恬敏)은 코미디/뮤직 부문 최우수 여배우로 지명되었지만 불행히도 최종 낙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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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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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이사장의 창조적 사회가치 사랑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홍진기 회장은 지난8월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 이사장에 취임했다. 사회적기업의 규모와 영향력을 좀 더 키워가기 위한 선택이다.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21개 지부로 운영되며 150개 회원사가 있다. 홍진기 회장은 회원가입에 대해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설립된 지 2년 남짓 되었지만 이미 경기도 사회적기업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려면 “기업들이 협회에 회원사가 되면 혜택도 있고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점 등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 내 대기업들도 사회공헌기금 등을 활용해 사회적기업의 제품을 구입해서 명절상품 등으로 지급한다면 지역기업들과도 상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가치를 끌어내는 윈윈의 창조적 활동이라고 그는 믿는다. 더불어 함께 만들어 가는 공공의 이익 홍진기 회장은 “경기도 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대표로 구성된 경기도사회적경제협의회는 사회적기업의 협력과 상생을 도모하며 무엇보다 사회적기업들의 이윤창출을 위한 실질적인 역할에 힘쓰는 단체이기에 지역 내 기업들도 사회적기업과의 상생을 위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라 전했다. 이미 (사)경기도사회적경제협회는 4개 사단 군부대와 MOU를 체결하였고, 지난12월2일에는 경희대학교 테크노 경영대학원 사회적경제경영전공개설 협약을 체결하였다. 군부대 기지 내 매점에 사회적경제 관련기업의 제품을 납품할 수 있도록 계약을 체결하였고 명문 전문경영대학원에 사회적경제기업 CEO및 사회적경제 활동가를 위하여 사회적경제 경영전공과정을 만들기로 체결한 것이다. 이 계획 속에는 사회적경제 조직이 좀 더 자생력 있는 조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홍진기 회장의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 관계기업에 연관이 있는 조직이라면 꼭 협회 회원이 아니어도 함께 품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신도 전했다. 그의 뚝심 있는 행보가 기대된다. 새롭고 쓰는 인생 2막의 기대 홍회장은 이제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의 보물을 찾아가고 있다. 개척의 의지로 도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가슴 뜨거운 인생을 달려 온 주인공이 개인의 발전을 뛰어넘어 기업의 성장을 촉구하는 든든한 동행이 되어 준 리더로서다, 홍회장의 인생2막을 펼치는 멋진 이야기를 들어 보자. 홍진기 회장이 사회적기업의 성장에 깊은 관심과 참여를 하게 된 것은 6년 전 그가 30년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면서부터다. 중소기업지원센터에서 진행한 CEO교육과정을 3개월 정도 배우게 된 홍진기 회장은 사회적기업과 관련해 더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한신대학교에서 MBA과정도 밟고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도 다녀왔단다. “조금만 도와주면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기업이 많습니다. 단순히 감투만 쓰는 명예직이 아니라 사명감을 가지고 이들 기업을 위해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함께 교육을 받았던 50여 명의 대표들은 사조직처럼 모임을 만들었고 일부는 지정 사회적기업으로 성장도 했다. 이들 사회적경제 기업들은 경기도 내 유망기업 1위에서 8위 안에 들 정도로 경쟁력을 지니면서 경기도 내에서도 기업CEO협의회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이 경기도에서 인지도 높은 지정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뿌듯하면서도 보람을 느낀다며 이 협회에서의 사회적경제 기업조직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보였다. 홍진기 회장이 향 후 31개 경기도 시군구 지부장 등 경기도를 통합하는 사회적경제네트웍 중요함사회적기업의 든든한 파트너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직장생활을 토대로 쌓인 삶의 연륜과 내공의 힘이다. 우선한 사회적가치 창조에 주력 홍진기회장은 문제를 풀어 가는데 있어 필요한 몇 가지를 말한다. 우선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반해 활동하는 비율은 30~40%에 그치고 있습니다.”라며 안타까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는 협동조합에서 출발한 조직들이 사회적기업이 되고 마을기업으로 발전해 가는데 우리나라는 사회적관계 기업들이 정부주도하에서 관리되다보니 짧은 시간에 양적인 성장은 했지만 질적인 향상은 부족한 실정입니다.” 홍회장은 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도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협회는 경기도와 유기적인 관계 형성, 도로부터 자금 수혜의 방안을 요청하고 따복공동체와도 함께 사회적 가치 실현에 많은 일들을 수행하려고 한다. “사회적기업이 출범한 지 7~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초창기 때 만들어진 관련 법률과 제도는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이다보니 사회적기업의 현실적 목소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홍진기 회장은 사회적기업의 성장에 장애물이 되고 있는 제도 개선을 위해서도 협회내에 연구원 제도를 두어 협회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융자 수혜의 적정성등 이다. 현재 사회적기업이 되면 정부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사회적기업 전 단계인 예비적기업의 경우 5천만 원까지 융자지원이 가능하고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으면 1억 원까지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기업이 5~6년 정도 기업운영을 하는 상황에서 1억원의 금액은 적다. 3~ 억원까지 융자규모를 늘리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기업들도 제법 안정성과 규모를 갖춘 기업들이 많아진 것은 정부와 중소기업청의 도움과 협동화 사업의 시너지 효과도 있지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참여한 사회적 기업가인 리더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수고의 결과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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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기 이사장의 창조적 사회가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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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외교 가교 역할, 진정한 문화 외교관 김선녀 씨
- [동포투데이] 서울시 중구 무교동과 경기 안산시 고잔동에 위치한 소망여행사 (대표 김선녀) 가 중국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로 성장시키며 여행업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4년 3월 외국인투자개인사업체를 설립한 그녀는 중국 국적의 장점을 살려 중국 특화 여행이라는 아이템으로 성실하고 신뢰받는 여행 상품을 개발하며 한국과 중국의 외교 역할까지 톡톡히 해내고 있어 화제를 모아오고 있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여행업에 뛰어든지 11년째.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세월이지만 믿음과 신뢰만큼은 변치 않으며 소망 여행사를 그동안 키워왔다. <월간한국인>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코리안 드림과 여행사의 어려움에서부터 보람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중국문화를 보급하고자 설립한 슈퍼차이나문화연구소에 이르기까지 삶에 대해 다양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노력과 땀으로 일궈낸 코리안 드림 “저도 다른 동포들처럼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행을 선택했습니다. 뇌졸중으로 많이 아프셨던 어머니의 병치료를 마음껏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한국인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면 시간당 4~5천밖에 안되였지만 한국에서는 2만5천~3만정도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대박의 꿈을 안고 통역했던 회사의 초청으로 한국행을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더군요. 연변 사투리를 사정없이 쓰던 저에게 아이를 믿고 맡길 부모는 없었습니다. 일자리 광고지를 매일 뒤지며 점점 마음은 조급해졌습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당시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주인 언니가 충무로에 있는 지인을 소개해주어서 중국어를 처음으로 가르칠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고 맡겨주었던다는것만도 고마웠던 그녀는 수업을 10~20분씩 더 가르쳐주었고, 중국에서오는 팩스가 있으면 무료로 번역해드리기도 했다. 그녀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성실성은 주위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중국어 강사는 물론이고 통역, 중국시장조사등 중국 전문가로 자리를 점차 굳혀가는 발판이 되었다. 하지만 비자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3개월에 한번씩 중국에 다녀와야만 했던 단기비자는 그녀가 하는 일에서 연속성을 잃게 했다. “오랫동안 체류하고자 불법체류의 생각도 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더라도 정직하고 정도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힘들더라도 3개월에 한번씩 다녀야 하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면서 더욱 열심히 뛰었던 거 같습니다. 결국 한국에서 신뢰와 믿음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지인들의 도움으로 외국인투자비자를 발급받게 되었고 지금의 여행사를 설립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직과 성실, 그리고 노력으로 일궈낸 성공 - 맞춤형 나만의 여행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당당히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은 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더군요. 코리아 드림을 꿈꾸는 수많은 동포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살아가면 꼭 귀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한국인들과의 일자리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특화된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라는 것. 이것이 김선녀 대표가 강조하는 시크릿 노하우이다. 중국과 한국을 잘 알고 있는 중국동포였기에 한국 경쟁 여행사보다 알찬 견적으로 “맞춤형” 나만의 여행상품을 만들 수 있었다. 고객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았다. 소망여행사는 가격경쟁을 해서 싸고 품질이 떨어지는 여행상품이 아닌 맞춤식상품으로 고객들을 만났다. 여행사는 크지 않지만 고객들은 최고의 VIP로 모시는 서비스를 구현하고 있다. 쇼핑센터와 옵션이 없는 편안한 일정과 출발전 여행지 안내 서비스, 여행중 사용하는 일상 중국어 제공, 3년이내 새롭게 건설된 호텔을 사용해서 포근한 잠자리 제공, 신차를 사용해서 안전한 차량으로 걱정없이 여행을 즐기게 하는 등 고객의 니즈에 부합하는 차별화된 상품을 제시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아카데미, 워크숍 등 기업 CEO 들을 위한 맞춤 현장 견학 프로그램 등 한중 문화에 익숙한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고객만족은 소망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며 거미줄처럼 지인소개가 끊이질 않고 있다. 처음 낯설고 막막하기만 했던 한국생활에서 어느덧 안정을 찾고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김선녀 대표. 처음 기회를 주었던 모든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이제는 누군가에 감사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소감을 밝혔다. 김선녀 브랜드 가치 창조, 슈퍼차이나문화연구소 설립 소중한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행사가 자신만이 브랜드를 갖고 오늘처럼 성장했다고 생각한 김 대표는 나눔의 크기를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으면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재능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지역아동센터, 자원봉사협의회등을 통해서 각단체에서 중국문화특강을 무료로 해주기 시작했다. 그런 나눔을 통해서 그녀는 중국문화특강의 중요성을 깊게 깨치고 올해 1월에 슈퍼차이나문화연구소를 설립했다. 김 대표는 “여행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중국문화를 현장으로 느끼고 경험한다면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특강은 경험을 통해서 현실에 직접 응용할 수 있는 좋은 점”이라고 말한다. “나의 사랑, 대한민국” 그녀가 하는 강연은 많은 편견과 아픔을 극복하고 한국생활에 정착하고 성공한 사례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주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감동으로 이어져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뿐만아니라 “중국인의 상술“, ”중국인의 직업관“, ”중국진출 성공프로세스“ 등 주제로 기업체 , 대학교 , 법원공무원교육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기있는 강의를 진행하면서 한중문화교류에 외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는 법무부 지정 한중동포신문 자문위원, 재한동포문인협회 이사, 소울림 총동문회부회장등 여러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동포에 대한 편견을 하나하나 없애고 있다. 그녀의 노력은 카네기최고기업인상, 재한동포문인협회 문화상,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표창상, 중국동포타운신문 칼럼 우수상 등 좋은결과로 이어졌다. 늘 바쁘게 하루를 쪼개살고 있는 김선녀 대표. 그녀는 적자생존(适者生存 )이라는 성어를 좋아했다. 적응하기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그녀는 한국정책재단(이사장-임태희)에서 운영하고 있는 소울림아카데미 (원장-잡코리아 창시자 김승남)로 수료를 했고, 카네기 최고경영자 과정, 소비자정보대학, HK여행작가아카데미, 이주민방송 라디오제작교육을 수료했으며, 지금은 한양대 창조경제 고위경영자 과정을 수료중이다. “맞춤식”여행사상품으로 고객들이 웃을수 있도록 만족을 주었다면 지금은 중국동포로서 김선녀란 이름 석자의 브랜드를 만들어 오는데 최선을 다해오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김선녀 대표에 대한 한줄 정의는 무엇일까? 바로 한국과 중국을 모두 잘 아는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다들 입을 모은다. 대한민국을 너무도 사랑하는 김 선녀 대표. 편견과 차별을 넘어 앞으로 그녀가 꿈꾸는 미래는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 행복한 동행을 <월간한국인>에서도 함께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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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외교 가교 역할, 진정한 문화 외교관 김선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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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가수 김미아입니다”
- [동포투데이] “올해는 왕년에 비해 여러번 고향을 찾게 되네요. 얼마전 훈춘 방천에서도 공연이 있었구요.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듯 해요. 어디에 가든지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들구요.”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 참가차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된 김미아씨, 음악회 참가는 마치 고향의 어머니를 보러 오는 기분이다. 음악회에서 김미아씨는 “등대”와 “겨울의 홰불”을 불렀다. “등대”가 어떤 년령층에게나 힘을 주고 희망을 줄수 있는 노래이기에 고향인민들이 힘든 일이 있어도 꿋꿋이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겨울의 홰불”은 다함께 대박 나자는 희망에서 선곡했다고 설명했다. 김미아씨가 전국에 이름을 날린 것은 “성광대도”에서 우승하면서부터다.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더 큰 꿈을 실현하고 싶어 무작정 상경했고 지금까지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요즘 들어 “겨울의 홰불”은 원곡자 비상(费翔)보다도 김미아씨의 버전이 많이 들려진다. 2012년 CCTV음력설야회무대에서 김미아씨는 “겨울의 홰불”로 팝가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몇분 안되는 무대였지만 그 무대에 오르기 위한 경쟁은 치렬했다. 2012년이 CCTV 음력설야회 30회가 되는 해였기에 그동안 불리워진 대표곡들을 선정해 부르는 부분이 마련되였는데 “겨울의 홰불”도 그중의 한곡으로 선정되었다. 원곡자 비상을 초청했지만 그는 감독팀에 김미아씨를 추천했다. 그렇다고 절대 쉽게 오를수 있는 무대는 아니였다. 당시 중국가요계에서도 나노라 하는 쟁쟁한 가수들이 앞다투어 이 곡을 부르겠다고 나섰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했지만 그가운데서 최종 김미아씨가 발탁됐다. “원곡자앞에서 어떻게 부르냐?”는 의문도 많이 받은것으로 알려진다. “무대는 요만한데 가수는 이만큼이나 있어요. 그래서 항상 남보다 더 노력하고 남들이 할수 없는 것을 내가 해야만 그 사람의 앞에 설수 있거든요. 무슨 일이든 하루만에 완성될 수 없어요. 또 내가 노력한만큼 그것이 결과로 보여지지요. 그래서 한발작을 내디뎌도 착실히 하려고 노력하고있어요. 지금까지 견지해온 원칙이기도 하죠.” 김미아씨는 항상 “조선족가수 김미아”로 활동하는 것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가요계에서 활동하다보니 비록 민족가요를 부르는 기회가 적지만 “모두로 하여금 내가 조선족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내가 민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언제든지 고향에서 부르면 다른 공연이 있어도 달려오게 되였다고 덧붙인다. 요즘 김미아씨는 신곡을 준비하느라 바삐 보낸다. 다음달말쯤이면 선보일 예정인데 기대해도 좋을듯하다면서 완벽하든 완벽하지 못하든 항상 리해하고 지지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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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가수 김미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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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회에 조선족 알리고 싶었다”
- [동포투데이] 지난 11월 초, 중국 조선족 처음으로 한국 서울특별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된 "사단법인 GK희망공동체" 허을진 대표를 만났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허을진 대표가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된데는 조선족을 위한 그의 사심없는 노고와 한국사회에서의 역활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허을진 대표는 안도현 석문진 중평촌에서 태여났다. 일찍 중국에 있을 때부터 까페 [중국조선족대모임]을 운영해온 그는 인터넷신문에 대한 남다른 애착심을 갖고 연변지역내 소식을 국내외 동포지역에 널리 알리면서 중국 조선족을 긍정적으로 알리는데 노력해 왔다. 그동안 끊임없는 헌신적 노력의 결과 현재 허을진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동포투데이]는 한국은 물론, 중국에도 취재기자를 두고 있으며 인터넷포털 "다음", "구글", "네이트", "줌" 등 과 뉴스검색 제휴를 맺는 전문적인 인터넷 신문으로 발전했다. 다음은 인터뷰 허을진 대표와의 일문일답. ▶조선족을 알리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 입국한지 10년이 다된다. 한국에 처음 입국했을 때 만난 한국사람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조선족은 누구이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교포 혹은 동포라면 알았으나 조선족이라 하면 동포(한민족)가 아닌 중국인(한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족 밀집 지역에서는 다르겠지만… 현재 한국에 진출한 중국 조선족은 70여만명으로 헤아려진다. 그들은 한국에 엄청난 재부를 창조해 주고 기여를 하고있는 거대한 공동체로 성장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절대 홀시할수 없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누구나 알다싶이 어려운 시기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와 15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친 조선족은 민족독립과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의 선구자들며 우리 민족 문화와 민족의 "넋"을 지켜가면서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며 중국 주류사회에 진입한 우수한 민족이다. 자랑스러운 민족, 위대한 민족임을 알려 그들로 하여금 한민족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재한 중국 조선족에 대한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실천해왔는데 어떠한 생각으로 이러한 선행에 나서게 됐는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중병이 들어 오래동안 병석에 누워있게 되자 집안 환경이 어려워지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그때 이웃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나이가 어려서인지 도움을 준 이들의 고마움을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때 도움을 주었던 고마운 분들이 생각났고 나도 어려운 이들을 돕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것 같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좋은 일도 해보니 보람도 느껴지고 뿌듯한 마음도 느껴졌다" ▶재한 조선족을 위한 각종 사업 진행(성과, 영향력)을 하면서 주변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다년간 단체활동과 온라인커뮤니티, 인터넷신문을 운영하면서 여러차례 수상 영예를 받았다. 이 자리를 빌어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서울시민과 국내외 조선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현재 기관이나 단체에서 다양한 사업 제휴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 ▶최종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 혹은 목표는? "현재 하고있는 일을 최정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영수 연변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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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회에 조선족 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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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중 비즈니스 컨설팅 전문 티앤씨네트웍스 CEO 김홍화 씨
-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국내 외국인 유학생 8만명 시대, 낯선 한국 땅에서 자신만의 아이템으로 창업을 실현하고 있는 중국 유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창업의 종류는 IT, 무역, 여행사, 컨설팅, 음식점, 옷가게, 신발가게 등으로 다양하다. 중국 길림성 안도현 출신인 중국동포 김홍화씨는 2001년 숙명여자대학교에 입학해 컴퓨터과학 석사학위를 취득 후 SK C&C, 서울관광마케팅주식회사에서 다년간 근무하다가 올 7월에는 서울시 사무실 무상지원을 받아 여의도 IFC에 한중 비즈니스 컨설팅 전문회사 티앤씨네트웍스(T&C Networks)를 설립하였다. 김홍화씨는 회사를 운영하는 바쁜 와중에도 열린의사회 봉사단체의 일원으로 정기적으로 어르신과 아동을 돕는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매월 기부도 하고 있다. ▲김홍화씨는 회사를 운영하는 바쁜 와중에도 열린의사회 봉사단의 일원으로 정기적으로 어르신과 아동을 돕는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매월 기부도 하고 있다. 기자는 김홍화씨가 꿈꾸는 창업과 그를 통한 비전, 창업을 대하는 자세는 어떨까.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티앤씨네트웍스의 경영이념은? -티앤씨네트웍스 경영이념은 ‘기술과 문화로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기업’으로 도전과 열정을 핵심가치로, 최상의 품질, 서비스로 세상에 보탬이 되는 기업이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Q.티앤씨네트웍스는 어떤 회사인지? -한중기업의 투자유치 컨설팅(법인 및 체인점 설립 등),한중 양국 간 문화교류(기업 및 단체간 교류 예:연수 및 수학여행 등), 기프트 컨설팅(기업간 기프트 맞춤형 제공, 티앤씨 브랜드의 해외 체인점 설립, 글로벌 기념품 전문쇼핑몰 운영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는 한중 비즈니스 컨설팅 회사이다. Q.인생 좌우명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선택을 하며, 온전한 삶을 살자 Q.현재 사업을 하시게 된 계기(동기)는 무엇인지? -공무원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안정된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안정적인 공기업에 입사 하였으나, 이것이 내가 원하는 진정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끊임없이 자기계발서적과 다양한 교육에 참여 하면서, 내가 원하는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공기업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Q.현재 추진 중인 주요 사업이 있다면? -현재 추진중인 주요 사업은 기프트컨설팅과 해외체인점 설립 사업이다. 한중 비즈니스 컨설팅을 하다보니 수많은 기업 담당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담당자들의 고민이 예산에 맞는 세련된 기프트 선별 이라는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로 서울관광마케팅 주식회사에서의 업무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실무가 쌓여있는 상태에서 고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기프트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따라서, 기존 기념품이 마음에 썩 들지 않더라도 그냥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떠한 기업이든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기프트가 필요할 것이고 그 기프트를 선별하는 작업을 잘 해낼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어서 시작하였다. 저희 제품은 다양하지만 시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닌 제품이 많다. 그러다보니 가격이 저렴하진 않다. 하지만 소중한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앞서는 기업이라면 저희 안목을 높이 평가하고 선택을 해주시는 편이다. 최근에는 저희 회사 제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해외에서 체인점을 오픈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고 진행 중에 있다. Q.회사운영 외에 어떤 활동을 하고있는지? -2012년부터 열린의사회 봉사단체를 통해 국내외 의료봉사를 다녔다. 매월 기부도 하고 있다. 월1회 국내봉사는 주로 지방에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의료봉사였고 연1회 해외봉사는 네팔, 방콕, 외몽고 세개 나라를 다녀왔다. 주로 지역주민들을 위한 치과, 외과, 산부인과, 내과, 한의과 등 의료봉사였다. 해외봉사는 한번가면 10일 정도를 소요했기 때문에 한해남은 휴가를 다 사용하여야만 가능했다. 개인휴가기간에 사비를 들여 해외봉사를 간다고 하니 회사 동료분들이 많이 의아해 하였다. SK 회사를 다닐때에는 정기적으로 장애우를 위한 의무봉사도 하였다. Q.재한중국동포 그리고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우리는 정말 혜택을 받고 태어난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그만큼 정체성의 혼란이 오는 시기도 많았을거라 생각한다. 이 모든것을 이겨내고 최선을 다해 각자의 삶을 만들어가는 우리 동포분들 그리고 후배분들을 인정하고 존경한다. Q.이야기하고 싶은 스토리나 꿈이 있다면? -저의 꿈은 재단을 설립하는 것이다. 대학교 다닐때 장학금을 받았고, 그돈이 저에게는 공부에만 올인할 수 있게 한 큰힘이 되었음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해외에서 공부하는 동포들에게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 싶어서 언제부터인가 이 꿈을 꾸게 되었다. 안정적인 회사를 용기내서 그만두고 어려운 선택을 하게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Q.마지막으로 못 다한 말씀이나 강조하고자 하는 사항이 있다면? -제가 한국생활 15년을 하다보니, 주변에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또 제가 필요한 정보를 주변분들을 통해서 빨리 접하고 있다. 현재, 여의도 IFC에 서울시 입주기업으로 있게된것도 지인분이 서울시에 좋은 정책이 있으니까 확인해보라고 하여 알게 되었고 마감임박할 시점에 운좋게 지원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얘기는 서울시글로벌센터에서 외국인 창업기업이나 동포들을 위해 많은 혜택을 주고 있으며 여러 설문조사를 통해 창업에 필요한 다양한 교육과 지원을 점차 늘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직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거라 사료되어 이번 기회에 널리 알리고 싶고 이러한 혜택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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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중 비즈니스 컨설팅 전문 티앤씨네트웍스 CEO 김홍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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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영우 홍콩한인회장, “시대가 요구하는 한인회로 발전해야"
- [동포투데이] "취임 후 홍콩 교민사회의 '소통과 화합', '변화와 성숙'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봉사는 내 삶의 일부분이다. 앞으로도 교민사회 발전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지난 11일 최영우 제48대 홍콩한인회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셩완에 위치한 ‘두란노’를 찾았다. 최 회장은 바쁜 일정으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밝은 미소와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최 회장은 본격적으로 인터뷰가 진행되자 피곤함도 잊은 채 소신 있는 발언을 이어갔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머릿속에는 ‘청렴’, ‘소신’, ‘외유내강’ 등의 단어들이 자꾸 떠오르는 건 왜일까? 2014년 3월 한인회장 취임 후 활동과 홍콩 교민사회의 현주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최 회장은 1979년 롯데그룹 홍콩 법인장으로 근무를 하면서 홍콩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됐다. 1994년부터 홍콩 한인회 기획이사,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홍콩 교민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한미사랑의 재단(부총재), 중국한국인기독실업인회(총회장) 등 다양한 봉사활동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지난 10월 8일 ‘제9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 유공 포상자(‘국민훈장 동백장’)로 선정됐다. 다음은 홍콩한인회장인 최 회장과의 일문일답. -48대 회장 취임 시, 취임 후 1년은 “홍콩 한인사회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스스로 성과를 평가한다면. ▲오랜 시간 홍콩 한인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화합’의 필요성이었다. 홍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또한 ‘화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을 원활하지 못한 ‘소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통과 화합’을 1차 년도 목표로 잡았다. 홍콩 교민 중에는 유독 자존심이 강하고 본인 주견이 확실한 분들이 많다. 소위 성공한 분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경청’에 힘을 기울여 자칫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교민들 간의 오해를 풀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을 더욱 이해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소통이 이뤄졌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교민사회에서도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갈등을 빚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지양하고 소통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고자 했다.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발로 뛰는 게 중요했다. 가능한 모든 단체 모임에 참석했고, 유관 단체들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이처럼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는데, 비교적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갈등의 근본원인이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이미 골이 깊어진 경우가 많아 개인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모든 갈등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교민의 ‘화합과 소통’을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며, 이는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해야 할 문제다.- 2015년 목표를 ‘변화와 성숙’에 둔다고 했는데,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었는지. ▲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거기에 걸맞은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부조리하거나 불합리한 부분을 찾아 개선해 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성과를 굳이 꼽자면, 한인회에서 자체 발행하고 있는 '교민소식지' 인쇄업체를 공개 입찰했다. 이로 인해 수년간 적자를 내던 제작비를 대폭 절감해 흑자로 전환시켰다. 또한, 회계와 행정을 투명하게 처리해 문제의 소지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교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한인회 정관 개정 문제, 토요학교 운영세칙 마련 등 중요한 과제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 과제들도 효율적이고 시대에 걸맞게 개선하여 추진하고자 한다. -임기 중에 꼭 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제반 여건상 추진하지 못했거나 과정상 미흡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 어느 공동체나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들과 합의를 거쳐 일을 추진하되,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정책을 수립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책을 맡은 임원 대부분이 본업 때문에 한인회 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팀워크를 요구하는 일을 진행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런 점이 한인회 운영이나 봉사의 한계로 작용하는 것 같다. 틀에 박힌 규제나 관행 때문에 현실적으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과 이로 인해 계획했던 많은 일들을 충분히 실행하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남은 기간 동안 힘이 닿는 곳까지 추진할 생각이다. -한인회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만사가 인사’라는 말이 있다. 어느 조직이라도 유능한 사람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헌신적으로 일한다면 그 조직은 분명 성장˙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현 한인회 인사제도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인사제도의 개선 없이는 한인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며, 매너리즘에 빠진 직원들만 양산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손익을 중요시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해 최대의 능률을 올리는 기업과 달리, 잘못 가고 있는 것을 알아도 유턴할 수 없는 ‘거버넌스 체제’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래서 사기업의 성과급제도 등을 도입하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 월급은 근속이 아닌 직무 특성,성과, 능력 등을 고려해 책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평가기준, 원칙, 법적 규정 등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불확실성, 불안정성, 복잡성 등 다양한 구조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인회가 이러한 흐름에 맞춰 성장˙발전할 수 있는 성숙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미래상의 큰 그림 아래 개혁이 필요하며 우리가 모두 협력해야 한다. 한인회 인사가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있다. 한인회 인사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개선해야 할 사항은. ▲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학연˙지연˙종교 등으로 얽힌 사람들끼리 반복적으로 서로 자리를 주고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지금 ‘러닝메이트’ 제도하에서는 인재풀 구축 자체가 어렵다. 홍콩에 거주하는 한인이 13,000명이라고 하지만, 한인회 회원은 4,000여 명이고 피선거권자는 100명 미만이다. 이들 중 교민사회에 알려진 인사는 20여 명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능력 있고 참신한 인재를 기대하기 힘들며, 경선을 치르게 된다면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 현행 회장단 선거제도도 다소 문제점을 안고 있다. 홍콩한인회는 지금까지 ‘러닝메이트 제도’로 회장단을 선출해왔다. 다른 어느 나라 한인회에서도 예를 찾아보기 힘든 선거방식이다. 물론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홍콩처럼 좁은 공동체에서는 불합리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러닝메이트 제도'의 특성상 현재 진행되는 선거 방식은 자칫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 봉사정신 등을 평가하는 선거가 아니라 학연˙지연˙종교 관계로 구성된 ‘러닝메이트 팀’의 경쟁체제로 돌변하게 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편법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병폐를 막기 위해 자질과 자격 그리고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빠른 시일 내에 홍콩 교민사회의 실정에 맞게 피선거권 제도를 개정해 한인회 발전을 꾀해야 한다. 최근 많은 기업이 우수한 인재 확보와 기업 이윤 극대화를 위해 ‘글로벌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홍콩한인회도 작은 공동체이긴 하지만, 역량을 갖춘 후배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그에 따른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일부 원로들과 기득권자의 내려 놓음이 필요하며, 그 동안 쌓은 연륜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덕스럽게 권고하고 격려함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라고 생각한다. -한국국제학교와 토요학교의 문제점과 발전방안은. ▲한국국제학교 - 학기와 학제가 다른 두 학교가 한 건물에 공존하다 보니 운영 면에서 비효율적이거나 비경제적인 부분이 있다. 게다가 한국어 과정은 한국 교육부에서, 영어과정은 홍콩 교육부에서 각각 통제하고 있어 더욱 그렇다. 장기적으로 볼 때 학제가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해결책을 찾기 힘든 원초적인 문제다. 하지만 학교 관계자들은 명문학교 만들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실력 있는 교사 초빙, 교육시설 완비, 학교 관련 규정체제 확립, 신속하고 투명한 행정, 재정 관리 등 완벽한 교육˙관리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프로젝트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학교 장기 발전위원회’를 만들어 발전기금을 모금하고 있다. 앞으로 많은 기관˙단체˙교민들이 동참한다면 더 좋은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 토요학교 - 교사의 소명의식과 학교 관계자들의 학교 시스템 개선 의지가 부족했던 것 같다. 현안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져야 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한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시키고 학습 동기유발 방안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지난해부터 하나하나 변화를 모색해 나가고 있지만, 완벽한 교육환경을 갖추기 위해서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홍콩 교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높이기 위한 방안. ▲ 넓은 의미에서 한인회는 토요학교 학부모로 구성된 의무 회원과 오래 전부터 참여해온 자발적 참여회원(교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회원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회원 자격을 한민족 혈통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도록 문호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검토˙추진 중이다. 또한, 한인회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인센티브 방안 연구가 더욱 필요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 회원 가입을 독려할 것이다. -한인회장으로 재임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 한국국제학교(KIS) 증축을 완공했지만, 홍콩정부 당국의 허가문제로 교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나섰고, 그 결과 1년 반이 지난 올 9월에 완전히 해결했다. 과정상 애로사항은 많았지만, 지금도 그 공간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학생들 모습을 생각하면 흐뭇하다. 또한, 많은 교민들의 협조와 참석으로 성황리에 마쳤던 ‘한마음장터’와 올해 처음으로 열린 '열린 음악회'도 보람이 있었다. -리더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자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조직이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자격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첫째, 건강해야 한다.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도 포함한다. 편파적이지 않고 정직하며 올바른 사고를 지녀야 하는 것은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사명감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 크든 작든 자신이 이끄는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사명감이 투철해야 한다. 셋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 한인회 임원은 대가 없는 봉사직이다. 자신의 시간, 에너지, 물질 등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직책이나 권위를 이용해 다른 이익을 취하려고 한다면 조직이 위험에 빠지거나 불행을 초래한다. 이처럼 뜻한 바가 있어 직책을 맡았다면, 진취적이고 혁신적으로 정열을 바쳐 일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하늘에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그저 안일하고 구태의연한 생각으로 과거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그 공동체는 전진 없는 퇴보만 있을 뿐이다. 뜻있는 지도자라면 잘못된 일이나 관행은 과감히 개선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강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홍콩교민 역사의 맷돌은 돌아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민 여러분께 하고 싶은 말은. ▲ 우리 교민들도 홍콩 한인사회 안에서 우리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동할 게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홍콩지역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할 때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시스템과 네트워크 구축의 결여, 인식 부족 등으로 활발한 교류활동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러나 앞으로는 현지사회와 교감을 할 방안도 꾸준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후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교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 덕분에 부족한 제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고, ‘국민훈장 동백장’도 수상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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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영우 홍콩한인회장, “시대가 요구하는 한인회로 발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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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사회는 현재 과도기… 동포관련 전문기구 내와야”
- [동포투데이] 한중동포신문 편집국장 문현택 화백과 마주 앉았다. 대림에 있는 한 고급음식점에서 커피타임을 즐기는 시간대를 이용하여 이야기가 오갔다. 현재의 직업인 언론인 보다는 화백으로 더 잘 한국사회에서 알려져 있었다. 흑룡강성 해림 출신이다. 1980년대 초반 연길에서 장식미술을 익혔고 1994년 서울에 들어왔다. 이듬해부터 각종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수상하고 1996년 대구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2년간 전공하였다. 2005년에는 세계예술대상전 미술 서양화 부문 대상, 2007년 경남환경미술대전 전국공모전 대상 등 영예를 따내기도 하였다. 2010년 조선일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금년 10월에는 서울 구로아트벨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또 개최하였다. 하지만 언론인의 직업적 센스는 우리의 이야기에서도 짙었다. 약장사 보따리에서 시작한 조선족의 한국정착, 그리고 20여년을 꾸준히 이어오면서 형성된 벌집같은 자그마한 재한조선족사회, 한국주류사회에서 여전히 배척받으면서 변두리에 떠 있는 고독하고 한적한 쪽배처럼 비바람에 흔들리며 풍화되다가도 다시금 반사되는 해빛을 받아 반짝이고, 그러다가 다시금 휘청거리고, 가끔은 벌레같은 소리를 저지르고 불길한 일이 터지면 손가락질 받고, 그렇게 끈질기게 명을 이어가고 있다. “전반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에 대한 태도나 눈길은 변해가고 있고 따스해져가고 있지요. 하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언론은 재한조선족에 대하여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불만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해 연말에 터진 박춘풍 살인토막유기사건이다. 당연히 언론은 보도해야 하겠지만 공평하고 공정한 보도를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초기부터 한국 주요언론들은 사건을 보도하면서 협의자가 ‘동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고 있어요. 언론이 조선족을 들먹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한국시민들은 유난히 뉴스에 민감하고 또 잘 믿는 편입니다. 언론의 동기가 어떠하였던 결과적으로 이 사건을 통하여 한국인에게 재한조선족을 흉악하고 잔인하고 범죄집단으로 각인시키는데 일조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 사건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특정된 편견, 과도한 시청(가독)율 추구, 부당한 시너지 효과 최대화는 평소에 우리가 수 없이 의론하고 지적했던 한국언론의 최대 약점인 것이다. 언론은 응당 객관적이고 준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하면서 사건 발생의 배경, 원인, 대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언론보도가 사회 안정과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불신과 반목과 대결을 초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왜서 토막살인 같은 특대 살인사건이 이렇게 빈번하게 발생하는가? 왜서 자살율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이 국가적 언론으로서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아니겠는가? “한국언론의 이러한 편견적 보도는 국가적으로 재한조선족동포 정책의 제정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지요.” 한국에 뿌리 내리기 시작하는 조선족사회는 현재 그 자체가 불안정하며 확고한 기반이 없으며 성숙으로 가는 도중의 과도기에 처하여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많이 좋게 변했어요. 무단횡단 안 하지요,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않아요, 그리고 순차로 승차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지금 과도기에 있거든요. 그 예로 각자가 뭔가를 생각하면서 사회단체를 수없이 만듭니다. 한국 실정 상 단체등록이 쉬어요. 아마 현재 25개 단체가 있을 겁니다. 그러하니 다시금 ‘행사 과다증’에 걸려있습니다. 하지만 응집력이 없고 지도력이 결핍합니다. 요즘 서남권 동포현안해결을 위한 협의회가 세워지고 동포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나가자는 의도죠. 재한조선족단체도 현재 과도기에 있는거죠. 서울시청에서 차이나타운 계획을 발표하였고, 대림, 가리봉 일대가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주민과 동포들이 공동 사용할 수 있는 문화센터였으면 합니다. 점차 한국사회와 융합되고 상부상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지 않을가요?” 재한조선족사회에서 현재 50-60대가 1세대라고 하면 약 10년 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1세대의 자식들을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재한조선족 1세대가 피땀으로 자그만 하지만 그래도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터전과 여건을 마련하였다면 문제는 2세대에서 오고 있다. 2세 대부분이 중국에 있을 때는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호황을 부렸으나 현재 많은 이는 승학하거나 사회 진출이 여의치 않고 자립능력이 약해 다시금 한국에로 들어온 것이다. “재한조선족 2세 대부분은 별다른 특장이나 지식이 없고 의지 또한 나약합니다. 또 다시금 부모 등에 업혀 사는 것이지요. 이들 중 백수가 늘어나요. 안정된 직업은 없고 PC방에서 새벽에 기여나오고, 월조금이 60만씩 되는 외제차를 타고 다닙니다. 이들이 앞으로 재한조선족사회에서 어떠한 각색을 할 것 같겠습니까? 또 한국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요? ” 이러한 결과의 악영향은 1세대로 바로 돌아오는 것이다. “재한동포 1세대는 노후대책이 없습니다. 젊어서는 자식을 위하여 투자했고 지금에 와서는 또 한국에 온 자식을 돌보아야 하니 노후보장을 마련하지 못한 것입니다. 돈 시달림을 엄청나게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포사회 나아가 한국사회 관련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정부 관리기구이다. “재한조선인 관리 전담기구가 필요합니다. 협회나 단체 차원이 아닌 국가행정관리 차원의 기구가 있어야 하지요.” 모든것은 민의에 따라 움직이고 흐르고 무언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과정의 과도기에 있는 것이요, 서서히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글/ 한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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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사회는 현재 과도기… 동포관련 전문기구 내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