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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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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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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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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미자- 그녀는 한국생활 19년이 된다. 19년을 사사오입하면 20년이 되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생활 20년이 가까운 최미자씨한테 있어서 어떤 변화들이 생긴 20년이었을까? 2001년 최미자씨가 한국행을 할 적엔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경제생활 수준 차이가 크게 날 때였다. 거기다 중국에서도 동북쪽 오지라 불리는 연변과 한국 사이의 차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연변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은 일종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하다면 최미자씨 역시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수많은 중국 조선족 중의 한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저의 고향은 중국 연변이구요. 한국은 2001년에 나왔어요. 중국에 있을 때 부자란 소리는 못 들었지만 그렇다고 매일 의식주를 걱정할 사정은 아니었어요. 한국으로 나온 건 한국의 선진적인 문화를 배우고 또한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물론 돈도 벌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죠.” 어찌 보면 최미자씨는 <코리안 드림>으로 한국으로 진출한 여느 중국 조선족들과 다른 곳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디를 보나 그냥 보통 여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한테는 꿈이 있었다. 꿈이란 타인한테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 한국에 온 뒤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그것보다는 배울 것이 많았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동방의 예의지국(东方礼仪之国)>라는 한국에서는 가정예의 외에도 밖에서의 <인사예의>, <봉사예의> 그리고 남녀 사이에서의 이성을 대하는 예의 등으로 예의범절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같은 민족이라 해도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차이가 아주 많았다. 총체적으로 자질 상 한국인은 중국 조선족에 비해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의 티>라고나 할까?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시각에는 어딘가 <색깔>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동족인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한가정의 부부 중 한쪽이 한국인이고 한쪽이 외국인일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사례로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쯤 한국에는 일본에 있는 한인 동포에 대해서는 <돈포>라 했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에 대해서는 <똥포>란 당시의 <신조어>가 유행될 정도였다. 최미자씨는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저는 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가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아이>들입니다. 그러자 다가정 문화 가정의 아이란 자체가 색깔적인 시각인 거지요…현재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다문화 가정>이 아주 많으며 그것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8년 <인구 주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다문화 가구원>은 33만 5000가구에 인구는 100만 9000여명으로 총 인구 5136만명 중 2%를 차지합니다.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이런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이 없는 올바른 정의(定义)를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최미자씨는 생각은 굴뚝 같았으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발기해 낸 것이 몇몇 중국 출신 여성들과 함께 만들어낸 자조모임(自助聚会)이었다. 그런데 정작 활동을 벌이자고 보니 언어의 불편, 서류 작성 미숙 및 통역 곤란 등 이런저런 애로가 적지 않았다. 이런 애로사항을 극복하자면 몇몇이 아닌 일정 규모가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최미자씨는 뭘 하려면 체계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을 털어놓자 기타 자매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2010년 충남의 다문화가족협회가 고고성, 본 협회는 공주에 두었고 지회는 공주, 계룡, 논산과 보령에 두었으며 최미자씨는 보령시지회장을 맡게 됐다. 지난해 6월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 <국적 미취득 결혼 이주여성 대상 연구 조사 발표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회의에서는 많은 것들이 제기됐다. 한국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이 어려운 것, 이로 인해 인구감소가 초래되고 지어는 인구절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것,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하고 저 정부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동남아 여성들과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의 필요에 의해 이주해온 여성에 대한 한국의 차별 인식과 대우에 문제가 있다는 것 등으로 어떤 이들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문제는 이주 여성뿐 아니라 이주 여성의 자녀들까지 겪어야 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파헤치기도 했다. 회의에서 최미자씨는“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도 차별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아이들이다. 그야말로 다문화 가정 아이라고 호칭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다문화가정의 여성 및 그 자녀들에 대한 차별과 기시,이는 이주 여성들의 말없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충청남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결혼이주여성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주 여성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 107명 중20%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본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 같아서”란 응답도 16%였다.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서 보면 결혼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깊이 적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최미자씨 역시 한시기 중국 국적을 포기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후회가 없지 않았었다. 그녀가 한국에 나올 때에 비해 현재 중국이 경제적으로 엄청 살기가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한국에 비해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미자씨는 인차 그 후회를 접기로 했다. 같은 동포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한 정이 그 후회를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던 간 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한국행이었고 또한 그 선택이 딱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기에 애써 자아위안을 하면서 내가 선택한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한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더듬게 됐고 결국 이주 여성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거예요. 이렇게 마음을 굳히니 두루두루 할 일이 생기더군요. 협회 일을 보는 한편 주민들을 위한 영어와 중국어 가르치기, 자녀를 위한 방과 후 수업, 노인복지관의 배식 봉사 등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활동은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한 것이고 그 행사에서 최고의 만족도를 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었죠. 거기서 전 크나큰 자신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우리 이주 여성들도 본토 한국여성들처럼 잘 살 수 있고 떳떳이 살 수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을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심을 말입니다.” 한국인이 올바른 주인의식과 책임감으로 이웃인 다문화 가정을 좀 더 세심하게 보듬어주고 바른길로 이끌어 ‘화목한 이웃’이 되기를 희망하는 최미자 씨. 그의 바람처럼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없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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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현대무용 공연의 주역·무용가 최효진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현대무용가 최효진 교수(한양대 무용학과)는 현대무용의 인재 양성과 정기공연 활성화에 기여해온 대표적인 대한민국 무용계의 한 사람이다. 20여년이 넘도록, 현대무용계의 발전과 후학양성의 길을 걸어온 최효진 교수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 제자들과 함께하는 정기공연으로 6년째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9년, 한국의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쉴 틈 없이 달려온 최효진 교수는, 앞으로도 무용인의 예술혼과 젊은 제자들의 열정을 모아, 현대무용 예술의 정점을 춤의 미를 통해 관객의 마음 속으로 전달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Q. 정기공연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A. 어릴 적부터 무용을 배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까지 긴 시간 동안 문화예술과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나이가 들고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현대무용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자 하였기에, 정기공연으로 관객에게 찾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무대를 준비 하는 것이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지만,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이 뜻을 지키기 위해 매년 무용단 정기공연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오늘도 초심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Q. 공연 내용이 궁금하다. A. 공연은 어린 제자들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됩니다. “Happy Day”라는 작품을 통해 어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소녀들이 성장하여, 소외된 계층을 위해 손을 내밀며 “선물”처럼 다가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여성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중 놓치고 살아가 “유실” 된 것에 대하여, 저와 제자들이 여성들의 일과 꿈에 정체성에 대해 춤으로 표현합니다. Q. 공연 제목이 왜 ‘The Lost유실’인가 A. 이번 공연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놓쳐 유실된 것>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공연에 제목은 몇 년 전 폭우로 인한 우면산 산사태에서 얻어졌는데, 그 시기에 저에게 춤에 대해 유익한 조언을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 제목을 제안하셨습니다. 춤으로 다루기 어려워 고민하던 차에, 한 편의 시를 읽고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는 어딘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증폭되는 가사일과 일상의 부조리함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감을 받았고, 저의 삶 또한 이처럼 유실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며 이 공연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열고 닫는 냉장고, 부르릉거리는 세탁기와 청소기 소리, TV에서 나오는 뉴스와 나도 모르는 라디오 음악,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잡동사니 그리고 아파트 문간에 쌓여만 가는 배달박스들 등. 우리 모두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둘러싸여 있고, 저마다 조금씩 나를 유실하고 있는 건 아닐 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 현대무용가 최효진교수, 한양대 무용학과,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이사 Q. 마지막으로 감사한 분들이 있나 A. 저에게 춤을 처음 알게 해주신 장연향 선생님, 또 제 삶을 무용에 대한 신념 하나로 무용가와 교육자를 만들어 주신 이숙재 교수님, 공연 때마다 항상 저를 찾아와 응원해주시고, 한국문화예술발전에 열정을 가르쳐주시는 문예총 장유리 이사장님 등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특히, 이번 “유실”이라는 타이틀을 후배, 제자라는 보물들과 함께 하게 됨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추운 겨울, 김이 서리는 무용실에서 추위를 잊을 만큼 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제자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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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헌터: 월드’ 게임 BGM 작곡가 강정란 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의 유명한 컴퓨터게임기업 캡콤(Capcom)이 야심차게 개발한 신작 ‘몬스터헌터: 월드’(MHW)가 발매된지도 벌써 7개월이 훌쩍 지났다. 갈수록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게임은 기존의 게임에 비해 혁신적이란 호평을 받고 있는데 배경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게임속의 BGM 상당수가 한 조선족 작곡가의 손을 직접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 출신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강정란(康贞兰) 씨, 2006년 지린성 연변1중을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서 “조경디자인(景观设计)”을 전공한 후 일본 규슈대학에 유학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음악감각이 탁월했고 일본어 실력도 뛰어난 그는 캠퍼스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매우 빠르게 유학생활에 적응했다. 강정란 씨는 캑콤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편곡 맡은 게임 BGM은 ‘몬스터 헌터 : 월드’(MHW) ‘영웅의 증거’였다. 그는 나리타 아키히코 씨 밑에서 수행을 하며 제작하였고, 하나의 큰 과제인 "영웅의 증거"의 편곡을 맡았다. 나리타는 작곡가들의 특징과 개성을 파악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지휘를 항상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부담감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의미를 생각하며 제작에 임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난 6월 일본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 앨범상과 음악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은 인기 게임 사운드 트랙을 스포티하이(Spotify).내 재생횟수와 유저들의 투표수로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강정란 씨는 “금번 이런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많은 유저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이 타이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큰 호평을 받아서 매우 놀랐다”며“트로피를 손에 들었을 때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몬스터 헌터: 월드’의 음악을 들어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감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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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인생연습’ 한가빈, “따뜻한 가수로 남고 싶어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동장군의 기세에도 기죽지 않고 기세등등한 가수가 있다. 지난 상반기 유튜브 조회수 100만을 기록하며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트로트계의 ‘한가인’ 한가빈(27) 씨가 주인공. 최근에는 한 씨를 위한 전국 규모의 팬클럽이 생겼고, 네이버밴드 등 SNS에 그의 이름이 수 없이 올라 화제가 됐다. 방송사로부터 연일 러브콜을 받으며 주가도 크게 올랐다. 데뷔 후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한가빈 씨를 만났다. Q : 안녕하세요. 최근 ‘한가빈 효과’라고 할 정도로 온·오프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아요. 방영 중인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 OST를 불러 많은 시청자들의 호평도 받았죠. 그간 소회와 OST ‘인생연습’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 포털이나 방송사 홈페이지를 보면 저를 응원하는 분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어요. 제 노래를 듣고 ‘펑펑 울었다’는 댓글을 보면 절로 힘이 납니다.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이게 꿈 인가 생신가 싶기도 하죠. 제가 부른 곡 ‘인생연습’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뷔 6개월 만에 드라마의 OST, 그것도 공중파 드라마를 맡았다는 건 큰 영광이죠. 물론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어요. ‘제가 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호응은 어떨까’라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감독님이 타이틀 곡 ‘꽃바람’을 들으신 후 “이 친구 OST 시켜야겠다”마음 먹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트로트 앨범에는 유일무이하게 기타 반주 하나로만 부른 어쿠스틱 발라드 버전이 있거든요. 그 버전이 너무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Q : 다른 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A : 작곡하신 김종천 선생님도 곡 쓰시기 전부터 “한가빈에게 꼭 맞게 써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쓰셨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저와 찰떡궁합입니다. 녹음 전까지 크게 고민 하지 않았고, 술술 풀렸으니까요. 음악이 공개된 후 방송국 게시판에 이 노래가 뭐냐는 문의가 폭주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종합 차트에서 아이유, 빙탄소년단을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고요. 처음으로 비명이라는 걸 질러 봤습니다. Q : ‘인생연습’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하던 데 어떤 내용인가요? A : 방송이나 행사에 가면 꼭 인생연습 불러달라는 요청이 많아요. 그때 마다 노래만 하지 않고 가사를 설명 드리곤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보통 인생을 얘기할 때, 인생에 연습이 어딨어 인생은 생방송이지… 이렇게 말씀을 많이 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노래가 그 정의를 바꿉니다. 인생에도 연습이 있다고. 지금까지 아파했던 날 들은 인생의 연습이었다치고 이제부터 행복한 실전을 살아 갈 거야하고 다짐하는 곡입니다”라고 말하죠. 몇 마디로 전달 할 수 없지만 조금 이라도 더 와 닿으시라고 항상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인생 연습을 들으시고 조그마한 위로가 됐다면 저는 행복합니다. 수많은 날들이 인생연습이겠지만, 저 역시 그때마다 제 노래를 부르면서 이겨내려고 합니다. Q : 가수로 데뷔는 때는 언제 인가요? A : 중3 때 음악을 처음 접한 후 몸과 마음이 들떴습니다. 노래를 해볼 까 하다가 이게 꿈이 돼버렸죠. 인기가요를 보고 화려한 무대에 오른 가수와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가수 길을 걷기로 했어요. 그러다 중 3때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21살 때 트로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때부터 말 그대로 고생길이 열렸죠. 이 회사 저 회사 돌아다니다 현재 소속사 마이클미디어를 만나 6년 간 산전수전 다 겪고 2015년 10월 “꽃바람”을 발표했죠. 다른 사람들은 첫 앨범을 내면 감격해 눈시울을 붉힌다고 하던데 저는 ‘이제 고생이다’는 생각에 기뻐할 시간도 없었어요. Q : 처음 무대에선 기분은 어땠나요? A :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대신 아마추어 가수로는 수 없이 많이 무대에 올랐지만 대중가수로는 처음이었으니 긴장이 컸던 것 같아요. 한편으론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는 일이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에 슬프면서도 기쁘고 복잡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Q :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즐겨 듣는 음악 장르는? A : 저는 시실 이런 질문이 가장 힘들어요. 다양한 장르의 가수와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콕 집어 얘기하면 제 감성과 가장 잘 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트로트보다 발라드입니다. 대표적으로 린, 박화요비 선배님을 들 수 있죠. 그래서 제가 부른 트로트 음악은 감성적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마도 이 두 가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Q : 가수로 활동하면서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A : 어린 친구들로부터 쪽지와 메일을 종종 받아요. 그 중 “언니 같은 가수가 될 거에요”라는 내용이 많은데요. 저도 어릴 때 다른 가수를 보고 꿈을 키웠듯 이제 나도 누군가의 꿈이 되었구나 생각하면 기쁘고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 친구들 때문에 더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 앞으로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A : 따뜻한 느낌의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노래 잘하는 가수, 예쁜 가수보다 누군가 저를 봤을 때 “저 가수는 잘은 몰라도 참 따뜻해 보여”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추운 겨울 따뜻한 난로처럼 항상 곁에 두고 싶은 가수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Q : 끝으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 제가 항상 팬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는 서로 가수와 팬으로 만나지만 궁극적으론 가족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누구를 동경하고 가까이하지 못하는 사이가 아니라 함께 힘을 주고 기뻐하는 사이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가수와 팬은 함께 성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팬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트로트 계에 입문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그동안 숨어있던 내공이 한 번에 분출한 것일까. 그만큼 기대되는 가수다. 머지않아 한국 트로트 계를 주름 잡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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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이 낳은 한송이 아름다운 “예술의 꽃”
중국명: 金海心 영문명: Hannah Kim 출생년도: 1978.10.30 출생지: 중국 베이징 직업 : 가수, 사회자 혈형: B형 언어: 중,영,한,일 소속: 김해심음악레이블 조선족 가수 김해심은 1978년 베이징의 음악인 가정에서 출생, 부모는 음악교수었으며 일찍 딸 김해심에게 고전음악을 가르쳐 주었다.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음악기초를 다져온 김해심은 1998년 부모의 학생인 저명한 음악가 싼보리(三宝力)의 추천에 의해 소니레코트회사와 계약을 맺고 가수생애를 시작했다. 이 해 김해심은 저명한 대만시인 리만팅(厉曼婷)이 작사한 “조금도 안남겨(毫无保留)”와 “잠들지 않는 바다(睡不着的海)”를 불렀다. 이 중 “잠들지 않는 바다”는 1999년 10대 골든곡으로 선정되었다. 2000년 김해심은 그녀의 두번째 앨범 “그렇게도 자호감 있어(那么骄傲)”을 출판, 직접 앨범의 노래를 제작하는 사업에 참여했으며 이 중 3수의 노래는 자신이 직접 창작한 것이었다. 2002년 김해심은 중국의 유일한 대표가수로 상하이에서 펼쳐진 한류음악회에 참가햇다. 그 이듬해 김해심은 화나음반회사와 계약을 맺고 앨범 “김해심”을 제작, 이 중 김해심이 선정한 주제곡 “대안(对岸)”은 연속 2주간 중국가요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06년 김해심은 독립적인 앨범회사를 창립, 동시에 앨범 “독립일”을 제작했는데 이중 80% 이상의 작품의 작곡은 그녀가 직접한 것이었으며 이 앨범은 음악대상을 받기도 했다. 2008년 김해심은 국내사상 처음으로 있은 대형 패션오락프로 “아름다운 소가인(美丽俏佳人)”의 사회를 맡았으며 베이징올림픽을 맞으면서 “베이징은 그대를 환영한다(北京欢迎你)”를 부르기도 했다. 2009년 김해심은 데뷔 10주년 기념 앨범을 출판, 동시에 음악드라마 “곧 사라지게 될 청춘(致我们终将逝去的青春)”에 출연, 정휘의 역을 맡았다. 2010년 김해심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사랑은 그대와 나사이에”를 불렀다. 2013년 김해심은 김해심음악레이블 회사를 창립하고 경영주로 되었다. 김해심은 가수일뿐만 아니라 창작일군이며 또한 사회자기도 한 다면수이다. 거기에 중국어와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를 정통하고 있으며 중국의 7대 방언중의 하나인 광동어를 특히 잘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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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아시아를 잇는 재일 조선족 여가수 김경자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개혁개방의 중국대륙은 외국을 향해 문을 열면서 가요분야에서도 미국노래, 일본노래, 인도의 노래와 홍콩, 마카오의 노래들이 쓸어들어 왔고 당시 국교가 없었던 나라인 한국의 노래들도 중국 대륙에 상륙하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홍색중국”에서도 철저하기로 두번째라면 서러워 할 연변의 가요계는 중앙과 주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많은 가요들이 창작되고 방송과 무대를 통해 선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질, 형식과 종류상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 가요창작 일꾼들은 한국의 트롯트 가요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노래를 창작할 엄두를 크게 내지 못했다. 특히 가요창작에 있어서 남녀간의 화끈한 사랑을 취급한 노래는 별반 만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럴 즈음, 프로가수도 아닌 중국 연변의 한 여대생이 “살구나무”란 노래를 갖고 라디오방송국의 마이크를 잡으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당시 연변대 조선문학부에서 작가지망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었던지라 한번은 제가 ‘소녀의 사랑’이란 가사를 쓰고 연변대학 예술학부의 이정씨가 곡을 붙인 노래를 갖고 연변방송국으로 찾아갔었지요. 저 자신이 직접 불러보고 싶어서요. 그 때 방송국 음악편집 선생님들이 저의 노래를 들어보시고는 목소리가 참 맑지다면서 가수로 데뷔하면 좋겠다고들 했었고 저는 그 제의를 숙명처럼 받아들였어요…” 이를 계기로 김경자씨는 “산향길”, “돌다리”, “물소리” 등 여러 수의 노래를 연속 불러 방송전파를 타면서 “살구꽃 소녀”로 불리면서 일약 대학가요제의 스타로 성장하였다. 하긴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했던 김경자씨가 대학입학 전까지 무대에 오르는 차수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가수로 데뷔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녹음이 된 음악으로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노래만 맞추면서 감각적으로 고창모 선생이 편곡한 반주가 너무 황홀하여 저도 몰래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는 김경자씨었다. “이렇게 저의 데뷔는 라디오방송국 취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그녀한테는 많은 팬들이 생겼는데 제일 처음으로 받은 팬의 레터는 바로 일본에서 날아온 것이었으며 그 팬의 이름은 사쿠라이 키요코였다. 이는 신인가수였던 김경자씨한테 무궁무진한 자신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아래의 내용은 김경자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즐겨 들었던 가요는? -제가 데뷔하던 지난 세기 80년대는 라디오를 통해 한국음악을 몰래 듣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어요. 다른 외국 음악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그 때는 한국 가요무대 방송을 제일 기다렸고 그 중 흘러간 옛노래들에 되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미자 가수의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같은 트로트가요가 가슴에 감동을 많이 주었어요. Q 가수로써 항상 마음(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은? -저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고 문학을 전공하였어요. 목소리는 아마 천성적인 것이라 생각되었기에 발성연습은 따로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노래는 소리보다는 마음을 전하는 예술이라 생각되었으며 가사 한마디 한마디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전하려고 많이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관중들에게 표현예술의 즐거움도 선물하고 싶어 율동표현도 많이하고 있습니다. Q 가수를 하면서 가장 잘했다 싶을 때는? 역시 무대에서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때 제일 행복하고 저에게 노래할 수 있는 목소리를 주신 부모님한테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1년 2월 일본 “아사히신붕” 1면 2면 기사에 “아시아를 이어주는 가수”로 소개되었을 때 제일 가슴이 벅찼습니다. Q 반대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노래는 저에게 있어서 아마 하느님이 주신 제일 훌륭한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좋아서 즐기고 있습니다. 노래에 특별한 욕심도 없기에 별로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Q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꿈꾸는 뮤지션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국경을 넘어서 민족을 넘어서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는 것이겠지요. 꿈꾸는 뮤지션은 항상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가까이에서 음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 3국의 훌륭한 음악을 서로 서로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한편, 현재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경자씨의 스켓쥴을 빽빽했다. 연간 10회 정도의 공연활동에 참가하며 기자의 인터뷰를 접수하던 전날 밤에서 사쿠라 마츠리에서 일본가요, 중국가요와 한국가요 이렇게 몇 수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오는 6월 13일에는 일본 유명가수들과 함께 “꿈의 광장 가요제”에 출연, 오는 9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진행되는 일본문화제 공연에도 참가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외 일본에 건너간 뒤 2011년 “살구나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출판, 주로 중국에 있을 때의 힛트곡들을 리메이크 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출판, 주로 일본명곡들을 우리말로 리메이크 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기도 했다. 현재 가수생활외 김경자씨는 일본 도쿄 히나타상사를 운영, 한국화장품, 건강식품 판매를 하면서 겸하여 중국어교실을 운영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1992년 재일교포출신 남성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현재 남편은 대학교수로, 딸은 에이지약과대학에 재학중이다. 1988년 중국 연변라디오방송국에서 선정한 제일 좋아하는 노래(10년간의 노래) 10곡 중 1위(산향길), 2위(살구나무), 4위(돌다리)를 하면서 연변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수로 부상했었던 김경자씨ㅡ 현재 그녀는 그 어떤 상이나 순위보다는 도쿄돔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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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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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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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동포투데이] ‘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 짜기 노래’,‘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붉은 해 변강 비추네’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친 원로가수 방초선 선생은 지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가 1급 성악가인 방초선 선생은 연변에서 북경, 전국, 나아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높은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특별예술가”칭호를 받은 방초선 선생은 “중국 예술가 사전”과 “중외 여성 명인 사전” 등 사전에 약력이 수록될 만큼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1932년 조선 김책시에서 출생한 방초선은 여덟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마을의 꾀꼴새로 불리던 그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많은 외국 노래를 배우고 불러 늘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5살 나이의 방초선은 길동군분구 문공단의 선전대원으로 성장하였다. 1949년 연변가무단 전신인 연변문공단이 세워지면서 방초선은 연변문공단에 전근하여 독창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1957년, 방초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연환축제 음악콩쿠르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삐어난 목청과 춤사위로 방초선은 ‘처녀의 노래’로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은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 후 방초선 선생은 공장, 광산, 병영, 향촌 그리고 변방의 방방곡곡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겼고 열정과 희망을 안고 북경 최고 음악학부에서 성악공부를 계속하였다. 방초선 선생의 음악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을 말하면 인생 동반자인 남편 왕개평 선생이다. 1975년 방초선 선생은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어 독창 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 분야를 넓혀갔다. 이 기간 방초선 선생은 북경, 연길 등 지역에서 개인 독창음악회를 가졌고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북경, 상해, 남경, 중경, 연길, 카나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를 순회하면서 80차의 음악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은 방초선 선생을 보고 선천적으로 좋은 목청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는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목소리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초선 선생은 음악은 자신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무대위에서 빛났던 그의 70여 년의 예술 생애를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그의 고운 목청을 타고 ‘명곡’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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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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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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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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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 ● 철 민 “나의 일생은 축구의 일생이다. 인생의 청춘기에 들어서서 축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 이 때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박만복 원로가 늘 입버릇처럼 외우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와 더불어 장장 60여년간 고집스레 한우물만을 파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박만복 원로의 축구생애를 단계로 정리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네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단계 : 선수로 뛰던 나날 왕청현 태생인 박만복원로가 전업 축구선수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53년 3월, 그는 과외축구팀에 불과한 연변 축구팀의 주장으로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당시 연변팀은 그 경기에서 준우승을 따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연변이란 조선족집거지구가 있고 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심어 주었다. 그후 박만복은 중앙체육훈련반 축구팀에 선발됐고 뒤따라 인차 24명(조선족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중국 청년축구 유학대표단과 함께 헝가리로 향발, 유학시절에 중국 청년팀의 이름으로 루마니아, 폴란드, 동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등 나라 축구팀과 자주 평가전을 치르군 했다. 특히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연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에서 박만복을 포함한 중국청년팀 수비라인은 그 탄탄한 수비력으로 하여 “깨뜨릴 수 없는 만리장성”이란 별호를 갖게 됐는데 그 중앙수비가 바로 박만복이었다. 또한 유학시기 박만복은 헝가리국가팀 감독으로부터 중국청년팀의 “로켓”으로 불리우게 됐고 귀국 후에는 북경팀의 선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리그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들과 함께 건장칭호를 받게 됐다. 두번째 단계 : 축구팀 사령탑 잡던 나날 1959년 박만복 원로는 어느 한 경기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선수대오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뒤 북경팀의 감독조리로 2 - 3년간 있으면서 일정한 경험을 쌓자 팀의 사령탑을 잡을 야망이 생겼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의 축구부터 춰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여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발전전도 등을 그대로 뿌리치고 연변으로 달려왔는데 그 때가 바로 1962년 8월경이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은 박만복은 길림성팀 선수들이 속도가 빠르고 완강하고 체력이 왕성하지만 기전술이 차한 페단에 근거하여 유럽식기전술을 팀에 주입, 그 기전술을 당분간 받아물지 못한 팀이 1963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강급해 을급으로 내려가는 불운을 지니긴 했으나 그 뒤 반복적으로 기전술응용을 교정한 결과 1964년에 인차 을급리그 2등으로 갑급에 올라왔고 바로 올라온 그 해인 1965년엔 끝내 중국조선족축구력사에서 휘황찬란한 전국축구갑그리그의 우승이란 전과를 올리었다. 또한 그해에 박만복 감독은 허경수, 정종섭, 당봉상, 김정식, 이두근, 유명복 등 6명 선수를 국가팀에 수송해 냈을뿐만 아니라 지운봉, 정지승, 동경춘 등 10여명의 건장도 육성해냈다. 그것은 박만복 원로의 감독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었다. 그뒤 1971년 문화혁명의 가장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자 박만복 원로는 재차 길림성 청년 3팀을 조직, 이 팀은 1973년 전국축구청년연맹전에서 4등이란 영예를 지니게 됐으며 그 시기에 염승필, 이승범, 전석기, 우근화 등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냈다. 감독생애를 거치면서 박만복 원로는 도합 100여명의 우수한 선수와 10여명의 건장을 육성, 이는 중국축구 특히 우리 민족의 축구발전사에 있어서 거룩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단계 : 축구친목회 회장사업 맡던 나날 20세기 80연대에 이르러 중국축구의 발전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조선족축구는 그 보급과 발전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박만복 원로는 조선족축구로 하여금 연변을 벗어나 동북 3성 및 전국에 보급해야 할 사명감을 안고 중국조선족축구친목회를 구상, 그 것이 바로 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가민정부에 등록된 국가1급체육사회단체(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한 체육단체)인 중국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이다. 친목회가 설립된 후 박만복 원로는 직접 그 회장직을 맡고 많은 사업을 했다. 우선 동북3성 각 지구에 친목회사업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적극 발전시키는 기초상에서 200여차에 달하는 축구지도원 및 심판원 양성반을 조직하여 조선족축구발전의 템포를 다그쳤으며 근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청장년과 소년아동들을 축구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중국조선족 근 100년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중국 전국조선족축구운동회를 5차에 거쳐 조직했으며 매차례의 경기 때마다 한국축구연합회의 여러개 팀을 초청하여 경험교류를 하군 했다. 지금 동북조선족 축구친목회에는 20여개의 분회와 1000여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는바 10년간 걸어온 그 자취마다에는 창시인의 한분이신 박만복 전임회장의 노고가 역역히 슴배어 있다. 네번째단계 : 축구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 박만복 원로는 고래희를 훨씬 넘긴 몸이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박만복 원로는 여전히 연변축구를 관심하고 있다. 은퇴 뒤 한시기 박만복 원로는 연길시에 장백축구학교를 세워놓고 축구후비력육성에 여생의 정력을 쏟다붓기도 했다. 당시 그 목적은 각종 원인으로 기회를 놓쳐 체육학교같은 곳에 가지 못한 축구인재를 받아들이고 키워주는 것, 그러한 취지로 세운 학교이기에 박만복 원로는 돈벌이보다는 축구인재발견에 모를 박았으며 그 학교는 당시 상급 해당부문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직업고중행열에 들어서기도 했다.한편 박만복 원로는 지금도 현재의 연변팀을 몹시 관심하면서 경기장을 자주 찾는가 하면 구단내에 존재하는 문제점도 지적하고있으며 또한 가끔씩 매스컴에 축구에 관련된 글도 써서 발표하군 한다. 중국축구 및 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사심없이 일해온 중국축구계의 원로이며 도사이신 박만복 원로 – 그이가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그렇게도 자랑찬 긍지로 주렁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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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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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제 77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미국의 뉴스전문방송(CNN)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의 골든 글로브 상은 정치대화의 무대로, 상을 발급하는 이와 수상하는 이 모두 여러 차례 목전의 국제 대사건들을 언급, 예하면 호주의 산불, 악천 기후의 위기, 여성의 낙태권 및 폭발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등이었다. 수상자들을 놓고 보면 브래드 피드가 영화 <할리우드 과거사>로 최우수 조연상을, 영화 <체르노빌>이 재차 최우수 한정 드라마(限定剧)로, <어리 광대>가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기생충>이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획득하였다… 이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은 아콰피나(Awkwafina)였다. 아콰피나는 코미디/뮤직 영화 <그녀한테 말하지 마(Do n't Tell Her)>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여 골든 글리브 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아콰피나는 그녀의 예명이고 진짜 이름은 린자쩐(林家珍)이며 1988 년 미국 뉴욕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콰피나는 4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줄곧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생활,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부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콰피나는 트롬벳을 배우기 시작,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6세 때 그녀는 영어단어 <어색한>에서 파생된 아콰피나란 이름을 자신에게 달아주면서 남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아콰피나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북경 언어대학교에 진학하여 2 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어 아콰피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와 올 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 및 여성연구를 전공, 졸업 후 여러 미디어업체에서 근무했다. 아콰피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지만 기실 랩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3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랩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튜브에 많은 노래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2014 년과 2018 년 각각 2 개의 개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랩 외에도 아콰피나는 배우로 경력을 바꾸었으며 영화 <놀라운 사랑(Amazing Love)> 및 <제동수 2 (Bravesman 2)> 그리고 <피크에 닿다(Reach the Peak)> 등에서 영화배우로서의 기질을 출중히 보이었으며 중국인 감독 왕즈이(王子逸)가 만드는 영화 <그녀에게 말하지 마(Do n't Tell Her)>를 촬영한 후에는 29 회 고담 독립영화상 최우수 여주연상을 받아 안았고 코미디/ 뮤직 영화에서 최우수 여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는 코미디/뮤직 영화 최우수 여배우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상까지 추켜올렸다. 아콰피나는 토크 쇼 사회자로 활동, 류위링(刘玉玲)의 뒤를 이어 <토요일 저녁 현장>을 사회하는 두 번째의 중국계 여성으로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반격 실제로 아콰피나의 많은 랩과 영화 및 TV 작품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공동체의 고정관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12년 아콰피나는 첫 번째 랩의 노래를 촬영, 이 노래의 초점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아시아 소녀들의 반항이었다. 2016 년 6 월 오카리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마르리트 조(Margaret Cao)와 협력하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의 고정관념을 조롱한 단일 <녹차>를 출시했다. 아콰피나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후 그 영화<그녀에게 말하지 마>를 보자 그 영화의 내용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 혼란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CNN의 보고서에 따르면 5일 저녁 무대 뒤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아콰피나는 “놀랍지만 아시아인이 더 많이 이길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콰피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후 처음으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2 년간 지명된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이다. 2019 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이자 <판타스틱 러브>의 배우 우텐민(吴恬敏)은 코미디/뮤직 부문 최우수 여배우로 지명되었지만 불행히도 최종 낙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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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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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에 나선 조선족 유학생
- ▲ 젊음과 열정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나선 재한조선족유학생 권진명 [동포투데이] 20대의 젊음과 열정이 느껴지는 그녀, 청년공동체 ‘세움’의 부대표로 활약하고 있으며 시각디자인이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전공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권진명(27세)씨를 만나보았다. Q 시각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한다면? ― 전공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다. 흔히 시각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는 視覺傳達라고 한다.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패션 디자인 쪽으로 많이들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들도 도대체 내가 무슨 디자인을 하는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컴퓨터 작업이나 명함, 상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가끔 무료로 명함이나 로고를 만들어달라는 지인들의 ‘일감부탁’이 많이 들어오고 있죠.” (웃음) 그만큼 시각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중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실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다 있는 것이여서 얼마든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거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하는 것이다. 평면디자인, 그래픽 디자인보다 폭이 훨씬 넓은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쁘게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 소통하고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에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다양한 방식의 디자인을 활용하여 리서치, 기획, 스케치, 디자인의 순서로 완성된다. 추상적인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내용을 더욱 쉽게 사람들한테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보면 된다. Q 그림과 다른 점이라면? ― 그림은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치중점을 둔다면, 시각디자인은 타인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다.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Q 졸업작품으로 조선족 관련 소재의 작품을 준비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기존의 재한조선족들에 대한 영상이나 댓글, 논문을 찾아봤다. 그러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재한조선족에 관한 영상들을 보면 주로 몇가지가 있다. 1, 현 재한조선족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2, .조선족 범죄사기 비판 영상. 3, 조선족에 관한 편견을 버리자는 캠페인 영상. 그 외에도 많은데 대다수 동정심 유발이나 심각하게 다룬 내용들이 많다. 두 번째는 조선족 관련 논문들을 보면, 그래도 민족성, 정체성, 한 민족 통일성, 재한조선족의 현황 등을 다룬 내용들이 대다수다. 자료수집을 위하여 이것 저것 많이 찾아보면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놀랐다. 한국인들에게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 조선족의 역사와, 조선족들이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많이 홍보하고 싶다. 작품으로 이런 걸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나왔던 논문식의 장황하고 엄숙한 거 말고, 다른 걸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가족사를 풀어놓고 우리 민족 역사를 더 쉽게 공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조선족은 중국현대사와 조선의 현대사가 결합된 민족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민족이다. 그래서 이런 설정을 해보았다. 나의 가족과 친구의 가족을 인물 설정을 해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의 88올림픽을 비교하는 방식.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친구의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같은 곳이다. 나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역사고리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을 그래픽, 사진, 동영상, 등 전시를 통해 대조적인 시각으로 보여준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전공에 더 열중해야겠다. 너무 힘들어서 디자인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몸에 배어있다는 걸 느꼈다. 한국이나 중국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글로벌한 시각과 마인드로 발전하고 싶다. 두 번째 목표는 ‘세움’ 공동체의 일에 더욱 정력을 기울이고 싶다. ‘세움’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세움동아리도 만들고 다양한 활동, 행사를 조직하고 싶다. 청년들이 맴버여서 신선한 아이디어뱅크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그런 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세 번째 꿈은, 나를 통해 주위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다. 고향에 가서, 고향을 위해서도 뭔가를 하고 싶다. 자그마한 변화일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의 마감에 그녀는 청년공동체 세움에 대해 특별히 홍보를 했다. “청년공동체 세움의 취지는 사람을 세우고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플랫폼과 네트워크를 하는 공동체죠. 기성세대의 것을 본받되, 청년들 스스로가 나서서 청년들의 힘을 합쳐서 세계적인 평화를 이룩하자는 글로벌한 마인드의 단체입니다.” 자체로 하는 행사도 있고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와 같이 하는 것도 있는데 중국조기유학생들, 각 대학교 중국유학생들에게 맨토링을 하고 있고 문화특강을 개최해 글짓기 특강을 하고 있다. 청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인재 영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운영진에는 북경, 상해, 서울, 서주, 남창 등 여러곳의 청년들이 있는데 위챗 회의를 통해서 소통을 하고 운영방침을 토론한다. 이제는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서 나설 시기이다. 전 세계 청년들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 /곽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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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에 나선 조선족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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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만(金曼)-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표현예술가이자 “오페라 여왕”으로 등극한 조선족 여가수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천부적인 재능과 자신의 피 타는 노력으로 중국 오페라무대에서 제3대의 “강누나(중국의 여혁명가 강설금)”역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중국 오페라 계를 들썽하게 하였으며 제10기 중국 전국 정치협상회 위원, 전국 정협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었다. 현재 김만은 중국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오페라분야에서의 인재양성 및 수준급 작품창작을 위해 모든 심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만- 그녀야말로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사업가임에 분명하다. 꿈의 스타트는 고향의 산간벽지서 어릴 때의 김만은 흑룡강성 소흥안령(小兴安岭)의 평정산(平顶山)하의 아름다운 산간벽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의 모든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푸른 산정을 맴도는 흰구름, 돌돌 흐르는 시내물과 울창한 임해-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절로 흥얼거리게 하였으며 때로는 목청껏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김만은 성악가로 될 수 있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녀의 첫 꿈 역시 가수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아주 수수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의 기억에 따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전 장차 커서 의사로 되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전 세계명작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란 책을 읽고 나라를 지키는 혁명가로 될 꿈을 가졌으며 또한 과학가로 될 이상도 가졌었지만 예술가로 될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노래와 춤은 역시 저와 연분이 있은 모양이었고 운명은 결국 저로 하여금 예술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죠. 현재 저는 제가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국의 오페라사업에 투신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페라 무대에서의 “강누나”- 김만 1981년 김만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정치부 문공단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예술생애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녀는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가요의 벗 음악회”에서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가 작곡한 가요 ‛금실 북과 은실 북(金梭和银梭)’을 불러 일거에 중국 음악계에서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한 중국의 유명한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주인공으로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981년- 예술계에 갓 입문한 김만은 첫 스타트부터 중국 국내의 유명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었다. “1984년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제3차로 오페라 ‛강누나’을 무대에 올릴 때 전 재차 주인공으로 선택받게 되었죠. 당시 시간이 긴장하고 임무가 막중하였기에 전 20여 일간이나 두문불출하고 주인공이 맡은 노래와 극본대사를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하고 또 하군 하였어요.” 그 20여 일이 지난 뒤 김만은 재차 ‛강누나’역을 성공적으로 맡아하였으며 1981년의 공연에 비해 더욱 성숙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과로 하여 1991년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제9회 매화상을 받아 안기도 하였다. 한편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김만은 늘 격정에 넘치군 했다. 그만큼 오페라 ‛강누나’가 그녀한테 주는 영향은 아주 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오페라의 매 인물과 내용에 대한 감수가 깊어질 수록 전 무대에서의 강설금에 대해 끈끈한 정을 느끼군 했어요. 강설금은 견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 혁명가인 한편 온화하고 위대한 어머니기도 했어요. 그의 매력은 늘 저를 감화시키군 했으며 그의 정신은 늘 저를 고무하기도 했었죠.” 무대를 떠나 단연히 “하해”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성공은 김만한테 예술생애에서의 크나큰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도전을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녀 김만은 단연히 “하해”의 길을 선택했다.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 전 공군정치부 문공단을 떠나 ‛하해(下海)’를 결심했어요. 제가 무대를 떠난 건 예술과 작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저의 예술생애에서 한번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 미쳤다고 했어요. 공군정치부 문공단은 저의 큰 밥그릇과 같은데 그곳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이었어요. ‛하해’- 그것으로 하여 확실히 저의 위치가 180도로 달라졌어요. 공군문공단에서의 저는 스타였으나 그 곳을 떠나니 일반인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기 시작했어요. 음식점을 차려보기도 하고 부동산업계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또한 국외의 대형그룹과 손잡고 일을 벌여 보기도 했었죠. 이 과정에 그야말로 인생의 희노애락이 많았었요.” 중국 대륙의 고풍격예술 전승인으로 2000년에 이르러 김만은 자신의 자금을 털어 문화산업회사를 차림과 동시에 오페라 “강누나”를 개편하여 한차원 업그레드화하였다. 한국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합창, 중창, 독창을 음악주체로 하였고 부드럽고도 소박한 무드속에서 “강누나”에 대한 예술적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김만은 뮤지컬의 형식과 오페라 “강누나”의 기질을 아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재현한다는 자체가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질의를 던졌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강누나’란 오페라에 대해 아주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거든요. 다음으로 전 중국오페라의 발전과 변혁을 위해 형식을 창신하고 내용을 잘 짜면 역시 상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였어요. 이전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공연할 때면 대부분 티켓을 선물하였지만 저희들 문화산업회사에서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였죠. 그리고 전통오페라는 배우와 악사가 많았고 게다가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원가가 들어갔지만 뮤지컬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니 원가가 적게 들었어요. 또한 전 적지 않은 생기발랄한 젊은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2년간 10여 만위안의 투자로 근 100회의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며 원가를 뽑고도 얼마간의 이윤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죠. 후에 우리는 이런 모식으로 또 ‛당의 딸’이란 뮤지컬 형식의 작품 등 여러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아주 좋은 사회적 효과를 보았었요.” 김만- 그녀가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사회 각 계의 뜨거운 찬양을 받았으며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김만을 “대륙에서 선참으로 고풍격의 문화산업을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조선족 원장 김만-오페라 공연 본분 지키며 중국오페라 발전시킨다 뮤지컬 형식의 무대작품을 성공시킨 동시에 김만은 적지 않은 우수한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각 오페라 극단의 기둥배우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힘들었다. “문화산업회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훈련할 때 저는 그들 모두가 성악기초가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달 동안 정도 훈련시키면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들어가니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학원생이 많은데다 그들의 수준차이가 컸으며 많은 학원생들은 클래식 창법으로 중국노래를 부를 때 발음이 똑똑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또한 표현상에서도 팔다리가 조화가 되지 못했죠. 오페라란 복잡한 예술이기에 완벽한 산업고리가 있어야 해요. 오페라에는 큰 부분으로 이론연구, 음악창작, 극본개편 및 배우선택, 연출, 무대미술, 조명 등이 따라가야 하고 또한 작은 부분으로는 관리, 녹음, 악보출판, 음향제품 발행, 선전판촉 등이 있어야 하며 매 고리마다 동시에 움직여야 해요. 헌데 이전에 중국 국내에는 오페라 배우를 전문 육성하는 전업이 없었거든요. 이는 저로 하여금 오페라 학원을 세워 중국식 클래식 창법과 중국식 오페라를 발전시킬 야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만의 생각과 베이징대학의 발전계획은 교묘하게도 일치하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6년 중국 베이징대학 학술위원회에서는 김만이 교부한 오페라연구학원 건립방안을 통과시켰으며 5년 뒤인 2010년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이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 학원을 세운 목적은 첫째 광범한 범위로부터 오페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 중국오페라의 획기적은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어요. 인재육성을 위하여 우리는 장일민(蒋一民), 대옥강(戴玉强) 등 국내외 우수한 성악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였으며 우선 오페라 및 뮤지컬학부, 오페라사론연구학부, 오페라제작 및 관리 학부 등 3개 전업을 설치하였어요.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페라창작, 연출, 무대미술 및 기술, 지휘 등 학부를 증설하여 비교적 완벽한 오페라 과학 및 교수과학연구 체계를 세울 타산이예요. 베이징대학의 우월한 학술환경하에서 우리는 이미 육속 ‛칭춘의노래(青春之歌)’, ‛전학삼(钱学森)’, ‛왕선(王选)’ , ‛송경령(宋庆龄) 등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내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형원형오페라 ‛무측천(武则天)’을 공연할 계획이예요,”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원장 직을 맡은 김만의 중임은 무겁고 압력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방면의 인재든 다 수요해요. 우리의 연구학원은 창립된지 금방 10년밖에 안되며 아직 성장기에 있어요. 때문에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발전도 거듭해야 하는 두 가지 부담이 얹혀 있어요. 하지만 멀지 않는 장래에 베이징대학 오페라 학원은 부단히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영예를 빛내일 것이고 중국 오페라 계에는 긍정코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출현할 것이며 중국오페라 또한 언젠가는 꼭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예요.” 그렇다! 조선족 여원장 김만의 꿈 역시 언젠가는 꼭 현실로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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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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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가야하반에 자리 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조선족 무용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 무용을 계승, 발전시켜 왕청은 물론 연변에서 '민간무용가' 로 인정받는 여성이 있다. 그가 바로 올해 71세에 나는 김춘복씨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김춘복씨는 1946년 왕청진 삼합촌의 김씨네 가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953년에 왕청 2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왕청 2중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민간문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는 민간무용 연출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야학실에 다니면서 무용을 직접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민간무용에 대해 심후한 감정과 애착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 소학교를 다니면서 반급에서 줄곧 문예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 유치원 교양원으로 사업하면서 합창, 아동무용, 동화극을 창작해 어린이들에게 배워 주었다. 그리고 여유 시간이면 사그라져 가는 조선족 무용을 살리기 위해 문예공연대를 설립하고 수십차의 문예공연을 조직, 현성내 각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들에 조선족 무용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왕청현의 군중문화예술이 다시 활기를 띠게 하였다. 생활속에서 무용소재를 모색 1964년, 촌유치원과 촌문예대가 설립되면서부터 그녀는 안무를 담당하고 무용창작을 본격적으로 해나갔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사소한 장면도 그냥 지나치는 습관이 없고 늘 머리속에 춤을 생각하고 살았다.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제비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면 제비춤이 생각났고 남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허투루 볼 때가 없이 그 속에서 알맹이를 배워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동집게 같은 예리한 감각으로 작품의 령혼을 포착하면서 연변 특색이 짙은 무용을 창작해 대중들과 호흡을 나누었다. 대중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그는 공연 때마다 무대 뒤에 숨어 관람석을 관찰하면서 관람자들의 표정과 박수를 통해 자기의 작품에 대한 인정을 스스로 느끼군 하였다. 하기에 53년 동안의 무용창작에 대한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목이 꽉 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야무지게 펼쳐 나갈 수 있은 것은 그녀만의 신조 외에도 2006년에 한국에서 "전통공연문화학교"의 조선족무용기본공반에 입학해 한해에 학비 80만원씩 내면서 고급반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그를 대신해 밥을 짓고 옷을 씻는 등 전부의 가무 일을 전담해준 남편 정창도씨가 그녀의 예술 생애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었다고 한다. ▲ 왕청현 노년상모춤예술단 김춘복씨의 인생스토리 사심없는 노력은 사회의 인정을 53년 동안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창작한 무용 "장화꽃", "숲속의 아침", "장백산아래 우리집", "슬기로운 우리민족", "붉은해 변강비추네" 등 민족특색이 짙은 100여가지 무용들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김춘복씨의 사심 없는 노력은 각급 정부와 사회의 호평도 받았다. 칠순을 넘긴 김춘복씨는 취득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왕청현노년상모춤예술단에서 조선족 문화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보람찬 사업에 온갖 심혈을 몰부어 가면서 노후를 보람 있고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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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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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함께 살자 … 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류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안해 유형숙씨 (60세)에 대한 남편 리희태(63세)의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 주위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주고 원근 사람들에게 수없는 감동을 주고 있다. ▲ 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유형숙씨 (60세)와 남편 리희태씨(63세) 길림성 연변자치주 왕청진 쟈피구촌에 살고있는 리희태의 안해 유형숙은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즐기는 신혼생활은 깨알이 쏟아지고 행복이 넘쳤을 것이다. 두분도 역시 더이상 바랄것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그런 생활을 2년 밖에 하지 못했다.유형숙은 왕청현병원의 간호사로 사업하다 1986년 1월에 류풍습관절염으로 하신 신경이 마비되면서 근육이 굳어져 버려 대소변은 물론 모든것을 남편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 공비로 치료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자비로 내는 치료비가 엄청나 모아 두었던 저금이 거덜이 나고 빚이 산더미처럼 늘어만 갔다. 하지만 이런 역경속에서도 안해를 살리려는 책임감과 안해의 병이 꼭 나으리라는 남편의 신심은 꺾을 수 없었다. 안해의 병을 하루빨리 치료하기 위해 리희태는 안해를 업고 현병원은 물론 심양,안산,길림, 돈화,한국월툰병원 등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니며 병을 보였다.가는 곳마다 리희태는 쪽걸상에 앉아 새우잠을 자면서 병시중을 들었다. 욕창이 생길가봐 안해가 아침마다 일어나기 바쁘게 더운물로 안해를 목욕시켰고 반시간에 한번씩 돌려 눕혔으며 허리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안해의 두 다리 근육을 풀어 감각을 되찾게 하기 위해 남편은 매일같이 안마를 해 주었다. 의무일군이였던 안해의 병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고 죽는 날까지 완치가 불가능하다 해도 안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남편은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였으며 어떤 방법이든지 불사할 각오였다. 안해의 병치료에 돈푼이 될만한 가정기물까지 다 팔아도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힘든 내색없이 늘 밝게 웃는 남편이였다. 이렇게 안해의 병치료에 집 세채와 가정기물을 몽땅 밀어 넣고 세방살이를 하게 되자 1990년에 리희태는 처제의 도움으로 안해를 장모님과 나어린 딸애에게 맡겨놓고 단연히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안해의 병을 치료하려는 일념으로 힘 드는줄 모르고 억척스레 일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생각할 새가 없었지만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안해가 걱정되고 딸애가 보고 싶어 눈물은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6년동안 돈을 벌고 고향에 돌아온 리희태는 안해의 병시중을 들면서 뇌출혈로 쓰러진 장모를 자기집에 모셔다 여섯달 동안이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효성을 다해 장모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미소를 짓고 하늘 나라로 가게 하고 처가집 조카 둘을 자기집에 데려다 6년동안 공부시키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안해가 병상에 누운지 옹근 31년이 되던 2015년 1월의 어느날 점심때였다.밑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갖추려고 하는데 자기 눈을 못 믿을 정도로 뜻밖에 안해가 조심조심 벽을 짚고 위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적같은 이 광경을 본 남편은 너무도 좋아 환성을 올렸다. “31년동안 내등에 업혀 다니던 당신이 드디여 자기절로 위생실에 가는걸 보게 되였소. 여보, 용기를 내줘서 정말 고맙소. 이제 내가 조금만 더 시중들면 당신이 일어날수도 있을거요.” 남들앞에서 종래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남편이였지만 이 순간만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병석에 누워있는 안해였지만 남편에게는 큰 힘이 되여주었다. “결혼할 때 우리는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자고 언약을 맺었고 둘 중에 누군가 불구가 되더라고 서로를 버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돌보면서 함께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안해가 앉은뱅이라고 버릴수는 없었습니다. 부부로 맺어진 이상 안해는 내 몸이고 내살과 같습니다. 죽는날까지 내가 안해의 손발이 되여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 그는 안해의 간병을 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행여나 딸에게 상처가 될가봐 리희태는 힘들 때면 딸이 잠든 후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딸 추연이도 돈을 벌어 어머니 병치료에 보태 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해 장춘외국어어학원 독일어 학과를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는 상해독일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버지를 여러모로 돕고 있다. 경제생활이 급속히 발전하는 오늘날 외국나들이,연해도시 진출로 결혼도 쉽게 하고 이혼도 식은죽 먹기로 하면서 가족의 의미와 부부의 소중한 인연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 부부의 사랑이 메아리처럼 울려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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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함께 살자 … 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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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일조선족여성회 전정선 회장을 만나다
-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 재일조선족여성단체가 있다. 바로 2008년2월 10일에 설립되어 지난해 일반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친 재일조선족여성회(이사장 전정선)이다. 일본사회를 보다 알고 조선족들 사이의 교류를 넓히며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데 취지를 두고, 주체가 되어 일본사회에서의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의 고민과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작은 샘물이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의 소중한 참여가 힘이 됩니다.’ 2008년 이래 해마다 여성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예하면 설립된 당해에 어린이들에게는 우리말 배우기, 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와 같은 재능을 가르쳐 주고 어머니들에게는 김치 교실, 무용 교실, 꽂꽂이 교실, 등 활동을 조직했고, 2009년에는 온천여행, 민족무용 배우기, 초청강사 강연회, 실내스포츠 교실, 일본전통복장 교실, 배구활동, 요리 교실, 어린이 우리말, 중국어 교실 등 활동을, 2010년에는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정기적으로 운영했다. 2014년 11월 29일에는 일본국제홍백노래콩쿠르 "제4회 국제홍백가요제"에 참가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4가지 언어로 노래를 불러 장관상을 받아 일본사회에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지난해 10월 18일 오후, 도쿄올림픽기념 국제청소년센터에서 열린 일본 국제 홍백가요제에서 이 여성회 샘물어린이학교 조선족어린이들은 중국노래 ‘말리화’(茉莉花)와 한국노래 ‘참 좋은 말’을 불러 최우수 장관상까지 받았다. 또한 2015년 2월 1일에는 다년간 키워 온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샘물어린이학교로 개명하여 개학식을 가졌다. 도쿄주변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족을 대상으로 한국어·중국어 배워주기, 동요/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 그림그리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작년 8월달에 제1회 재일조선족운동회에서 여성회에서는 문화문예공연무대를 주최했으며 샘물한글학교 어린이합창, 여성들의 민족무용 부채춤이 주목받았다. 어린이들은 단체노력상도 받았다. 재일조선족여성회는 다년간 재일조선족각단체들과의 융합과 협력, 협조로 조선족사회의 일원으로 많은 역활을 해왔다. 작년에 2개반급으로부터 금년부터는 소학2학년반, 소학1학년반, 유아반등 세개 반급으로 한국어 중국어, 음악, 영어등 기타 교실을그림 그리기·색종이 접기·카드놀이·음악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일본에서 출생한 조선족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 민족언어 교육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4~12살 되는 130여명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13여명의 교직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전 회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신으로 일찍 연길시 정부와 상해에서 사업하다가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세계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사무국장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일본사회에서의 적응과 취직, 가정육아 등에 관련해 재일조선족 여성들과 상담을 하면서 함께 이러한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결국 조선족 여성의 일본 내 정착· 취업·출산·육아 등을 서로 돕자는 목적으로 이 여성회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에는 10만 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조선족에 대해 전혀 요해가 없는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족을 북한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족을 일본사회에 알리려는 결심을 가져 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앞으로 재일조선족들에게 어떠한 긍정적 영향과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전망하는가” 하는 물음에 전 회장은 “동포애와 민족공동체 의식 함량, 우리 글과 문화의 전파, 조선족들 간의 교류와 일본사회에서의 적응·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 고민과 난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확신있게 대답했다. ▲선생님과 함께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샘물한글학교 어린이들 한편 올해에는 자녀교육강좌, 도자기체험, 여성사업가 초청세미나, 다성식품에서 민족음식체험 요리교실, 재일조선족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농활체험교실, 재일조선족들과 함께하는 샘물한글학교 운동회, 동경한국교육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통예의 문화교육 한복입기 체험교실, 동경에서 열리는 홍백가요전 출연, 어린이들 작품발표회 등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 회장, 동시에 이러 저러한 애로사항도 많다고 토로했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활동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정부 그리고 단체와 지성인 그리고 기업인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 회장은 "자녀가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자신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또한 중국인인지 그 정체성 혼돈을 겪는 때가 많아요. 우리말이나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 중국에서 조부모가 오셔도 의사소통도 안되고 낯설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군 하기도 하구요. 중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의 대학·대학원으로 유학 온 경우가 대부분인 재일조선족은 고학력 지식인이 많지만 3개 언어와 문화를 아는 이런 균형 감각을 자녀가 이어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이어 "재작년부터 지난해 일본 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열린 국제홍백노래자랑에 여성회 후원으로 조선족어린이 합창단이 등단해 최우수상인 관광청 장관상, 파퍼먼스상을 받는 쾌거를 올린 적이 있다"면서 "이 어린이들이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유일하게 4개 언어로 노래해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수상 후 인사말을 일본말로 밖에 표현하지 못해 부끄러웠다"고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전 회장은 "부모와 달리 일본 사회에 동화돼 가는 자녀를 위해서는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며 "재외동포재단 등 고국(한국)의 기관에서 시행하는 재외동포 차세대 모국연수에 재일조선족 2세도 참여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 회장은 “여성회는 재일조선족 여성들이 헌신적인 봉사정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므로 계속 초심을 잃지 않고 여성회와 샘물어린이학교를 위해 헌신해 주기 바란다”고 강조하면서 “여성회가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친목도모와 생활, 그리고 현재의 어린이들이 우리 글과 문화 교육으로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는데 한 몫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또 “다년간 많은 지지와 도움을 주신 지성인 기업인들과 트팀 없이 참모 역할을 해 온 현 JTC일본어학교장 (50년 경력대학 교수), 아세아경제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조선족연구학회 고문이며 전임회장, 東アジア経済経営学会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편에게도 진심으로 되는 감사 드린다”덧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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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일조선족여성회 전정선 회장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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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 [동포투데이] 자녀를 둔 재외동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 교육이 아닐까 싶다. 자녀들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외동포 2세의 한국어(국어)와 한국의 역사(국사) 교육을 담당하는 홍콩한국토요학교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난 20일 홍콩한국국제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졸업식에서 “꿈이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큰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학생들을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하던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지난 2년간 토요학교를 운영해온 그를 만나 토요학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 2015학년도 한국토요학교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오계근 전 토요학교장 ― 임기를 마친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면. ▲ 2년 동안 토요학교장으로 봉사한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한인 2세들을 교육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봉사하려 노력했고 큰 보람을 갖고 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특히, 메르스(MERS) 사태 당시 학부모와 학생들의 감염 예방을 위해 한 달간 교사들과 학교 정문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감열 및 소독 활동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토요학교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2년 전 토요학교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과연 그 임무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주위에서 토요학교장은 명예직이고 장차 한인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느 분은 매주 출근할 필요는 없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나가서 결재만 하면 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일부 교사들도 토요학교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실제로 운영을 해 보니 토요학교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40 여 명의 교사와 600여 명 학생의 관리자, 학부모와 교사 간 문제 발생 시 조정자의 역할, 한국 국제학교 관계자들과의 협조체제 및 학교 시설물의 관리자 그리고 KIS의 이사 및 운영위원 등 할 일이 많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매주 토요일 오전 동안 정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재임 시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일을 말씀해 주신다면. ▲ 교사 풀(Pool)제를 도입한 것을 첫 번째로 꼽고 싶습니다. 토요학교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 채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인회 홈페이지, 한인 소식지 등에 상시 모집공고를 내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1차 서류심사, 2차 면접 및 시강을 통해 평가 후 교사로 선발했습니다. 특히, 시강 결과를 선발 기준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은 교육의 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선발된 교사들을 결원이 생길 시 우선 배정하고 대기 교사들은 정교사의 결강 시 대강을 통해 경험을 쌓게 하고 결원 시 채용하는 제도입니다. 두 번째, 교사의 고용계약서 작성 시기를 조정했습니다. 관례상 매년 3월에 작성하던 고용계약서를 1월 말부터 2월 중순(졸업식 전)까지 마무리해 교사들이 새 학년도 수업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3월부터 1년간 근무할 수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계약을 진행했으며, 채용 확정된 신임 교사의 경우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하고, 학기 시작 한 달 전에 교재 연구 및 수업 준비를 차질 없이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 번째, 출석률 향상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경우 재학 중인 학교 행사나 기타 특별활동 참가 등으로 인해 결석하는 학생이 많은 편입니다. 대응책으로 졸업 기준에 출석률(중등부의 경우 1/3 이상 출석)을 반영시켜 출석에 대한 의무감을 심어줬습니다. 결석하는 학생들이 많으면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출석률 관리 강화에 특별히 신경을 쎴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이 학생의 출석률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토요학교 ‘운영규칙안’ 설계를 마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관리되어 오던 제반 규정을 종합해 ‘홍콩 한국 토요학교 운영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토요학교의 기본 골격과 교육방침 그리고 교사들 근무지침 및 학생들의 상벌 규정까지 담고 있습니다. 임기 내에 마무리하려 했으나 정관 개정 문제, 한인회장 선거 등 한인회 제반 업무에 밀려 마무리를 짓지 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후임 교장이 조속한 시일 내에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 문제점이나 개선할 점이 있다면. ▲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토요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출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재임 시 교사들에게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인성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갖추기 위해 모국어 교육과 함께 한국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국제학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세계사와 함께 한국 역사를 가르치면 더욱 이해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교사들 간의 화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래 근무한 교사들의 경험과 새로 들어오는 교사들의 참신함이 잘 어우러져야 토요학교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 기득권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학생들도 토요학교에 애정이 생길 것이고, 교사들이 끈끈한 팀워크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쳐 면학 분위기 향상에도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 한인회 및 한인 사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 홍콩한국토요학교는 1960년 개설 이래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작은 의미의 학원이 아닌 학교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학교로서 독립성을 갖고 운영될 수 있도록 관심은 가져 주시되 지나친 간섭은 지양했으면 합니다. 토요학교 교사는 1주일에 한 번 수업하지만 내실 있는 지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2세 교육을 담당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교사들이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49대 한인회 회장단에서도 교사들에게 진심 어린 격려와 지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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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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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뷰티프로그램 , MC가 한국인이라고?
- [동포투데이]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임정은이 최근 ‘K-뷰티’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중국 상하이 SiTV에서 방송하는 신개념 뷰티 버라이어티 <시상가인(時尙佳人)>의 메인MC로 활동하고 있는 것. <시상가인>은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K-뷰티를 비롯한 알짜배기 한류 정보를 전하는 신개념 뷰티 프로그램으로, 한류스타를 직접 담당했던 뷰티 전문가들이 평소 쉽게 알 수 없었던 K-뷰티의 비법을 소개해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시상가인>은 상하이 SiTV, 베이징TV와 옌볜TV 등 중국 방송 뿐만아니라 태국 TVK, 미얀마 TV 등에도 방송되고 있어, ‘K-뷰티’를 아시아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상가인>을 진행하는 임정은은 현재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시상가인’을 비롯해서,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 텐센트와 한국 칸타라글로벌이 개최하는 생방송 한류콘서트 <텐센트케이팝라이브(Tencent K-POP LIve)>, 한류스타 인터뷰 프로그램인 <한위쑤디 인터뷰>, KTV의 여행정보 프로그램 <핫플레이스 코리아> 등을 진행하고 있고, tbs eFM의 중국어 프로그램 <서울생활가유참>에 매주 한국인 게스트로 출연해 입담을 뽐내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빅뱅, 소녀시대, 에이핑크, 포미닛, 씨스타, 비스트 등의 스타 아이돌과 한 무대에서 선 임정은은 2016년에도 자신을 설레게 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나고 싶다면서, 올해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 통역학과 2학년을 시작하는만큼, 진행과 통역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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