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3-03(수)

사람들
Home >  사람들

실시간뉴스
  • 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 사람들
    2020-10-20
  • 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동포투데이] ‘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 짜기 노래’,‘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붉은 해 변강 비추네’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친 원로가수 방초선 선생은 지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가 1급 성악가인 방초선 선생은 연변에서 북경, 전국, 나아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높은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특별예술가”칭호를 받은 방초선 선생은 “중국 예술가 사전”과 “중외 여성 명인 사전” 등 사전에 약력이 수록될 만큼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1932년 조선 김책시에서 출생한 방초선은 여덟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마을의 꾀꼴새로 불리던 그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많은 외국 노래를 배우고 불러 늘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5살 나이의 방초선은 길동군분구 문공단의 선전대원으로 성장하였다. 1949년 연변가무단 전신인 연변문공단이 세워지면서 방초선은 연변문공단에 전근하여 독창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1957년, 방초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연환축제 음악콩쿠르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삐어난 목청과 춤사위로 방초선은 ‘처녀의 노래’로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은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 후 방초선 선생은 공장, 광산, 병영, 향촌 그리고 변방의 방방곡곡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겼고 열정과 희망을 안고 북경 최고 음악학부에서 성악공부를 계속하였다. 방초선 선생의 음악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을 말하면 인생 동반자인 남편 왕개평 선생이다. 1975년 방초선 선생은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어 독창 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 분야를 넓혀갔다. 이 기간 방초선 선생은 북경, 연길 등 지역에서 개인 독창음악회를 가졌고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북경, 상해, 남경, 중경, 연길, 카나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를 순회하면서 80차의 음악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은 방초선 선생을 보고 선천적으로 좋은 목청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는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목소리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초선 선생은 음악은 자신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무대위에서 빛났던 그의 70여 년의 예술 생애를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그의 고운 목청을 타고 ‘명곡’으로 탄생했다.
    • 사람들
    2020-09-20
  • “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사람들
    2020-06-06
  • "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 철 민 “나의 일생은 축구의 일생이다. 인생의 청춘기에 들어서서 축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 이 때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박만복 원로가 늘 입버릇처럼 외우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와 더불어 장장 60여년간 고집스레 한우물만을 파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박만복 원로의 축구생애를 단계로 정리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네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단계 : 선수로 뛰던 나날 왕청현 태생인 박만복원로가 전업 축구선수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53년 3월, 그는 과외축구팀에 불과한 연변 축구팀의 주장으로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당시 연변팀은 그 경기에서 준우승을 따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연변이란 조선족집거지구가 있고 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심어 주었다. 그후 박만복은 중앙체육훈련반 축구팀에 선발됐고 뒤따라 인차 24명(조선족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중국 청년축구 유학대표단과 함께 헝가리로 향발, 유학시절에 중국 청년팀의 이름으로 루마니아, 폴란드, 동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등 나라 축구팀과 자주 평가전을 치르군 했다. 특히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연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에서 박만복을 포함한 중국청년팀 수비라인은 그 탄탄한 수비력으로 하여 “깨뜨릴 수 없는 만리장성”이란 별호를 갖게 됐는데 그 중앙수비가 바로 박만복이었다. 또한 유학시기 박만복은 헝가리국가팀 감독으로부터 중국청년팀의 “로켓”으로 불리우게 됐고 귀국 후에는 북경팀의 선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리그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들과 함께 건장칭호를 받게 됐다. 두번째 단계 : 축구팀 사령탑 잡던 나날 1959년 박만복 원로는 어느 한 경기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선수대오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뒤 북경팀의 감독조리로 2 - 3년간 있으면서 일정한 경험을 쌓자 팀의 사령탑을 잡을 야망이 생겼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의 축구부터 춰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여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발전전도 등을 그대로 뿌리치고 연변으로 달려왔는데 그 때가 바로 1962년 8월경이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은 박만복은 길림성팀 선수들이 속도가 빠르고 완강하고 체력이 왕성하지만 기전술이 차한 페단에 근거하여 유럽식기전술을 팀에 주입, 그 기전술을 당분간 받아물지 못한 팀이 1963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강급해 을급으로 내려가는 불운을 지니긴 했으나 그 뒤 반복적으로 기전술응용을 교정한 결과 1964년에 인차 을급리그 2등으로 갑급에 올라왔고 바로 올라온 그 해인 1965년엔 끝내 중국조선족축구력사에서 휘황찬란한 전국축구갑그리그의 우승이란 전과를 올리었다. 또한 그해에 박만복 감독은 허경수, 정종섭, 당봉상, 김정식, 이두근, 유명복 등 6명 선수를 국가팀에 수송해 냈을뿐만 아니라 지운봉, 정지승, 동경춘 등 10여명의 건장도 육성해냈다. 그것은 박만복 원로의 감독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었다. 그뒤 1971년 문화혁명의 가장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자 박만복 원로는 재차 길림성 청년 3팀을 조직, 이 팀은 1973년 전국축구청년연맹전에서 4등이란 영예를 지니게 됐으며 그 시기에 염승필, 이승범, 전석기, 우근화 등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냈다. 감독생애를 거치면서 박만복 원로는 도합 100여명의 우수한 선수와 10여명의 건장을 육성, 이는 중국축구 특히 우리 민족의 축구발전사에 있어서 거룩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단계 : 축구친목회 회장사업 맡던 나날 20세기 80연대에 이르러 중국축구의 발전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조선족축구는 그 보급과 발전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박만복 원로는 조선족축구로 하여금 연변을 벗어나 동북 3성 및 전국에 보급해야 할 사명감을 안고 중국조선족축구친목회를 구상, 그 것이 바로 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가민정부에 등록된 국가1급체육사회단체(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한 체육단체)인 중국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이다. 친목회가 설립된 후 박만복 원로는 직접 그 회장직을 맡고 많은 사업을 했다. 우선 동북3성 각 지구에 친목회사업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적극 발전시키는 기초상에서 200여차에 달하는 축구지도원 및 심판원 양성반을 조직하여 조선족축구발전의 템포를 다그쳤으며 근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청장년과 소년아동들을 축구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중국조선족 근 100년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중국 전국조선족축구운동회를 5차에 거쳐 조직했으며 매차례의 경기 때마다 한국축구연합회의 여러개 팀을 초청하여 경험교류를 하군 했다. 지금 동북조선족 축구친목회에는 20여개의 분회와 1000여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는바 10년간 걸어온 그 자취마다에는 창시인의 한분이신 박만복 전임회장의 노고가 역역히 슴배어 있다. 네번째단계 : 축구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 박만복 원로는 고래희를 훨씬 넘긴 몸이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박만복 원로는 여전히 연변축구를 관심하고 있다. 은퇴 뒤 한시기 박만복 원로는 연길시에 장백축구학교를 세워놓고 축구후비력육성에 여생의 정력을 쏟다붓기도 했다. 당시 그 목적은 각종 원인으로 기회를 놓쳐 체육학교같은 곳에 가지 못한 축구인재를 받아들이고 키워주는 것, 그러한 취지로 세운 학교이기에 박만복 원로는 돈벌이보다는 축구인재발견에 모를 박았으며 그 학교는 당시 상급 해당부문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직업고중행열에 들어서기도 했다.한편 박만복 원로는 지금도 현재의 연변팀을 몹시 관심하면서 경기장을 자주 찾는가 하면 구단내에 존재하는 문제점도 지적하고있으며 또한 가끔씩 매스컴에 축구에 관련된 글도 써서 발표하군 한다. 중국축구 및 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사심없이 일해온 중국축구계의 원로이며 도사이신 박만복 원로 – 그이가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그렇게도 자랑찬 긍지로 주렁져 있었다.
    • 사람들
    2020-01-25
  • 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제 77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미국의 뉴스전문방송(CNN)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의 골든 글로브 상은 정치대화의 무대로, 상을 발급하는 이와 수상하는 이 모두 여러 차례 목전의 국제 대사건들을 언급, 예하면 호주의 산불, 악천 기후의 위기, 여성의 낙태권 및 폭발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등이었다. 수상자들을 놓고 보면 브래드 피드가 영화 <할리우드 과거사>로 최우수 조연상을, 영화 <체르노빌>이 재차 최우수 한정 드라마(限定剧)로, <어리 광대>가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기생충>이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획득하였다… 이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은 아콰피나(Awkwafina)였다. 아콰피나는 코미디/뮤직 영화 <그녀한테 말하지 마(Do n't Tell Her)>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여 골든 글리브 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아콰피나는 그녀의 예명이고 진짜 이름은 린자쩐(林家珍)이며 1988 년 미국 뉴욕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콰피나는 4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줄곧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생활,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부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콰피나는 트롬벳을 배우기 시작,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6세 때 그녀는 영어단어 <어색한>에서 파생된 아콰피나란 이름을 자신에게 달아주면서 남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아콰피나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북경 언어대학교에 진학하여 2 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어 아콰피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와 올 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 및 여성연구를 전공, 졸업 후 여러 미디어업체에서 근무했다. 아콰피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지만 기실 랩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3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랩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튜브에 많은 노래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2014 년과 2018 년 각각 2 개의 개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랩 외에도 아콰피나는 배우로 경력을 바꾸었으며 영화 <놀라운 사랑(Amazing Love)> 및 <제동수 2 (Bravesman 2)> 그리고 <피크에 닿다(Reach the Peak)> 등에서 영화배우로서의 기질을 출중히 보이었으며 중국인 감독 왕즈이(王子逸)가 만드는 영화 <그녀에게 말하지 마(Do n't Tell Her)>를 촬영한 후에는 29 회 고담 독립영화상 최우수 여주연상을 받아 안았고 코미디/ 뮤직 영화에서 최우수 여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는 코미디/뮤직 영화 최우수 여배우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상까지 추켜올렸다. 아콰피나는 토크 쇼 사회자로 활동, 류위링(刘玉玲)의 뒤를 이어 <토요일 저녁 현장>을 사회하는 두 번째의 중국계 여성으로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반격 실제로 아콰피나의 많은 랩과 영화 및 TV 작품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공동체의 고정관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12년 아콰피나는 첫 번째 랩의 노래를 촬영, 이 노래의 초점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아시아 소녀들의 반항이었다. 2016 년 6 월 오카리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마르리트 조(Margaret Cao)와 협력하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의 고정관념을 조롱한 단일 <녹차>를 출시했다. 아콰피나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후 그 영화<그녀에게 말하지 마>를 보자 그 영화의 내용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 혼란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CNN의 보고서에 따르면 5일 저녁 무대 뒤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아콰피나는 “놀랍지만 아시아인이 더 많이 이길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콰피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후 처음으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2 년간 지명된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이다. 2019 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이자 <판타스틱 러브>의 배우 우텐민(吴恬敏)은 코미디/뮤직 부문 최우수 여배우로 지명되었지만 불행히도 최종 낙선되었다.
    • 사람들
    2020-01-0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에 나선 조선족 유학생
    ▲ 젊음과 열정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나선 재한조선족유학생 권진명 [동포투데이] 20대의 젊음과 열정이 느껴지는 그녀, 청년공동체 ‘세움’의 부대표로 활약하고 있으며 시각디자인이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전공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권진명(27세)씨를 만나보았다. Q 시각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한다면? ― 전공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다. 흔히 시각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는 視覺傳達라고 한다.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패션 디자인 쪽으로 많이들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들도 도대체 내가 무슨 디자인을 하는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컴퓨터 작업이나 명함, 상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가끔 무료로 명함이나 로고를 만들어달라는 지인들의 ‘일감부탁’이 많이 들어오고 있죠.” (웃음) 그만큼 시각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중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실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다 있는 것이여서 얼마든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거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하는 것이다. 평면디자인, 그래픽 디자인보다 폭이 훨씬 넓은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쁘게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 소통하고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에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다양한 방식의 디자인을 활용하여 리서치, 기획, 스케치, 디자인의 순서로 완성된다. 추상적인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내용을 더욱 쉽게 사람들한테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보면 된다. Q 그림과 다른 점이라면? ― 그림은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치중점을 둔다면, 시각디자인은 타인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다.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Q 졸업작품으로 조선족 관련 소재의 작품을 준비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기존의 재한조선족들에 대한 영상이나 댓글, 논문을 찾아봤다. 그러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재한조선족에 관한 영상들을 보면 주로 몇가지가 있다. 1, 현 재한조선족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2, .조선족 범죄사기 비판 영상. 3, 조선족에 관한 편견을 버리자는 캠페인 영상. 그 외에도 많은데 대다수 동정심 유발이나 심각하게 다룬 내용들이 많다. 두 번째는 조선족 관련 논문들을 보면, 그래도 민족성, 정체성, 한 민족 통일성, 재한조선족의 현황 등을 다룬 내용들이 대다수다. 자료수집을 위하여 이것 저것 많이 찾아보면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놀랐다. 한국인들에게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 조선족의 역사와, 조선족들이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많이 홍보하고 싶다. 작품으로 이런 걸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나왔던 논문식의 장황하고 엄숙한 거 말고, 다른 걸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가족사를 풀어놓고 우리 민족 역사를 더 쉽게 공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조선족은 중국현대사와 조선의 현대사가 결합된 민족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민족이다. 그래서 이런 설정을 해보았다. 나의 가족과 친구의 가족을 인물 설정을 해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의 88올림픽을 비교하는 방식.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친구의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같은 곳이다. 나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역사고리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을 그래픽, 사진, 동영상, 등 전시를 통해 대조적인 시각으로 보여준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전공에 더 열중해야겠다. 너무 힘들어서 디자인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몸에 배어있다는 걸 느꼈다. 한국이나 중국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글로벌한 시각과 마인드로 발전하고 싶다. 두 번째 목표는 ‘세움’ 공동체의 일에 더욱 정력을 기울이고 싶다. ‘세움’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세움동아리도 만들고 다양한 활동, 행사를 조직하고 싶다. 청년들이 맴버여서 신선한 아이디어뱅크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그런 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세 번째 꿈은, 나를 통해 주위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다. 고향에 가서, 고향을 위해서도 뭔가를 하고 싶다. 자그마한 변화일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의 마감에 그녀는 청년공동체 세움에 대해 특별히 홍보를 했다. “청년공동체 세움의 취지는 사람을 세우고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플랫폼과 네트워크를 하는 공동체죠. 기성세대의 것을 본받되, 청년들 스스로가 나서서 청년들의 힘을 합쳐서 세계적인 평화를 이룩하자는 글로벌한 마인드의 단체입니다.” 자체로 하는 행사도 있고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와 같이 하는 것도 있는데 중국조기유학생들, 각 대학교 중국유학생들에게 맨토링을 하고 있고 문화특강을 개최해 글짓기 특강을 하고 있다. 청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인재 영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운영진에는 북경, 상해, 서울, 서주, 남창 등 여러곳의 청년들이 있는데 위챗 회의를 통해서 소통을 하고 운영방침을 토론한다. 이제는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서 나설 시기이다. 전 세계 청년들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 /곽미란
    • 사람들
    2016-12-06
  • 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만(金曼)-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표현예술가이자 “오페라 여왕”으로 등극한 조선족 여가수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천부적인 재능과 자신의 피 타는 노력으로 중국 오페라무대에서 제3대의 “강누나(중국의 여혁명가 강설금)”역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중국 오페라 계를 들썽하게 하였으며 제10기 중국 전국 정치협상회 위원, 전국 정협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었다. 현재 김만은 중국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오페라분야에서의 인재양성 및 수준급 작품창작을 위해 모든 심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만- 그녀야말로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사업가임에 분명하다. 꿈의 스타트는 고향의 산간벽지서 어릴 때의 김만은 흑룡강성 소흥안령(小兴安岭)의 평정산(平顶山)하의 아름다운 산간벽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의 모든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푸른 산정을 맴도는 흰구름, 돌돌 흐르는 시내물과 울창한 임해-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절로 흥얼거리게 하였으며 때로는 목청껏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김만은 성악가로 될 수 있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녀의 첫 꿈 역시 가수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아주 수수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의 기억에 따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전 장차 커서 의사로 되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전 세계명작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란 책을 읽고 나라를 지키는 혁명가로 될 꿈을 가졌으며 또한 과학가로 될 이상도 가졌었지만 예술가로 될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노래와 춤은 역시 저와 연분이 있은 모양이었고 운명은 결국 저로 하여금 예술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죠. 현재 저는 제가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국의 오페라사업에 투신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페라 무대에서의 “강누나”- 김만 1981년 김만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정치부 문공단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예술생애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녀는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가요의 벗 음악회”에서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가 작곡한 가요 ‛금실 북과 은실 북(金梭和银梭)’을 불러 일거에 중국 음악계에서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한 중국의 유명한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주인공으로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981년- 예술계에 갓 입문한 김만은 첫 스타트부터 중국 국내의 유명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었다. “1984년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제3차로 오페라 ‛강누나’을 무대에 올릴 때 전 재차 주인공으로 선택받게 되었죠. 당시 시간이 긴장하고 임무가 막중하였기에 전 20여 일간이나 두문불출하고 주인공이 맡은 노래와 극본대사를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하고 또 하군 하였어요.” 그 20여 일이 지난 뒤 김만은 재차 ‛강누나’역을 성공적으로 맡아하였으며 1981년의 공연에 비해 더욱 성숙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과로 하여 1991년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제9회 매화상을 받아 안기도 하였다. 한편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김만은 늘 격정에 넘치군 했다. 그만큼 오페라 ‛강누나’가 그녀한테 주는 영향은 아주 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오페라의 매 인물과 내용에 대한 감수가 깊어질 수록 전 무대에서의 강설금에 대해 끈끈한 정을 느끼군 했어요. 강설금은 견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 혁명가인 한편 온화하고 위대한 어머니기도 했어요. 그의 매력은 늘 저를 감화시키군 했으며 그의 정신은 늘 저를 고무하기도 했었죠.” 무대를 떠나 단연히 “하해”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성공은 김만한테 예술생애에서의 크나큰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도전을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녀 김만은 단연히 “하해”의 길을 선택했다.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 전 공군정치부 문공단을 떠나 ‛하해(下海)’를 결심했어요. 제가 무대를 떠난 건 예술과 작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저의 예술생애에서 한번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 미쳤다고 했어요. 공군정치부 문공단은 저의 큰 밥그릇과 같은데 그곳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이었어요. ‛하해’- 그것으로 하여 확실히 저의 위치가 180도로 달라졌어요. 공군문공단에서의 저는 스타였으나 그 곳을 떠나니 일반인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기 시작했어요. 음식점을 차려보기도 하고 부동산업계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또한 국외의 대형그룹과 손잡고 일을 벌여 보기도 했었죠. 이 과정에 그야말로 인생의 희노애락이 많았었요.” 중국 대륙의 고풍격예술 전승인으로 2000년에 이르러 김만은 자신의 자금을 털어 문화산업회사를 차림과 동시에 오페라 “강누나”를 개편하여 한차원 업그레드화하였다. 한국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합창, 중창, 독창을 음악주체로 하였고 부드럽고도 소박한 무드속에서 “강누나”에 대한 예술적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김만은 뮤지컬의 형식과 오페라 “강누나”의 기질을 아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재현한다는 자체가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질의를 던졌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강누나’란 오페라에 대해 아주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거든요. 다음으로 전 중국오페라의 발전과 변혁을 위해 형식을 창신하고 내용을 잘 짜면 역시 상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였어요. 이전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공연할 때면 대부분 티켓을 선물하였지만 저희들 문화산업회사에서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였죠. 그리고 전통오페라는 배우와 악사가 많았고 게다가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원가가 들어갔지만 뮤지컬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니 원가가 적게 들었어요. 또한 전 적지 않은 생기발랄한 젊은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2년간 10여 만위안의 투자로 근 100회의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며 원가를 뽑고도 얼마간의 이윤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죠. 후에 우리는 이런 모식으로 또 ‛당의 딸’이란 뮤지컬 형식의 작품 등 여러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아주 좋은 사회적 효과를 보았었요.” 김만- 그녀가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사회 각 계의 뜨거운 찬양을 받았으며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김만을 “대륙에서 선참으로 고풍격의 문화산업을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조선족 원장 김만-오페라 공연 본분 지키며 중국오페라 발전시킨다 뮤지컬 형식의 무대작품을 성공시킨 동시에 김만은 적지 않은 우수한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각 오페라 극단의 기둥배우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힘들었다. “문화산업회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훈련할 때 저는 그들 모두가 성악기초가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달 동안 정도 훈련시키면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들어가니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학원생이 많은데다 그들의 수준차이가 컸으며 많은 학원생들은 클래식 창법으로 중국노래를 부를 때 발음이 똑똑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또한 표현상에서도 팔다리가 조화가 되지 못했죠. 오페라란 복잡한 예술이기에 완벽한 산업고리가 있어야 해요. 오페라에는 큰 부분으로 이론연구, 음악창작, 극본개편 및 배우선택, 연출, 무대미술, 조명 등이 따라가야 하고 또한 작은 부분으로는 관리, 녹음, 악보출판, 음향제품 발행, 선전판촉 등이 있어야 하며 매 고리마다 동시에 움직여야 해요. 헌데 이전에 중국 국내에는 오페라 배우를 전문 육성하는 전업이 없었거든요. 이는 저로 하여금 오페라 학원을 세워 중국식 클래식 창법과 중국식 오페라를 발전시킬 야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만의 생각과 베이징대학의 발전계획은 교묘하게도 일치하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6년 중국 베이징대학 학술위원회에서는 김만이 교부한 오페라연구학원 건립방안을 통과시켰으며 5년 뒤인 2010년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이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 학원을 세운 목적은 첫째 광범한 범위로부터 오페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 중국오페라의 획기적은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어요. 인재육성을 위하여 우리는 장일민(蒋一民), 대옥강(戴玉强) 등 국내외 우수한 성악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였으며 우선 오페라 및 뮤지컬학부, 오페라사론연구학부, 오페라제작 및 관리 학부 등 3개 전업을 설치하였어요.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페라창작, 연출, 무대미술 및 기술, 지휘 등 학부를 증설하여 비교적 완벽한 오페라 과학 및 교수과학연구 체계를 세울 타산이예요. 베이징대학의 우월한 학술환경하에서 우리는 이미 육속 ‛칭춘의노래(青春之歌)’, ‛전학삼(钱学森)’, ‛왕선(王选)’ , ‛송경령(宋庆龄) 등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내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형원형오페라 ‛무측천(武则天)’을 공연할 계획이예요,”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원장 직을 맡은 김만의 중임은 무겁고 압력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방면의 인재든 다 수요해요. 우리의 연구학원은 창립된지 금방 10년밖에 안되며 아직 성장기에 있어요. 때문에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발전도 거듭해야 하는 두 가지 부담이 얹혀 있어요. 하지만 멀지 않는 장래에 베이징대학 오페라 학원은 부단히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영예를 빛내일 것이고 중국 오페라 계에는 긍정코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출현할 것이며 중국오페라 또한 언젠가는 꼭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예요.” 그렇다! 조선족 여원장 김만의 꿈 역시 언젠가는 꼭 현실로 도래할 것이다.
    • 사람들
    2016-09-11
  •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가야하반에 자리 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조선족 무용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 무용을 계승, 발전시켜 왕청은 물론 연변에서 '민간무용가' 로 인정받는 여성이 있다. 그가 바로 올해 71세에 나는 김춘복씨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김춘복씨는 1946년 왕청진 삼합촌의 김씨네 가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953년에 왕청 2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왕청 2중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민간문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는 민간무용 연출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야학실에 다니면서 무용을 직접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민간무용에 대해 심후한 감정과 애착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 소학교를 다니면서 반급에서 줄곧 문예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 유치원 교양원으로 사업하면서 합창, 아동무용, 동화극을 창작해 어린이들에게 배워 주었다. 그리고 여유 시간이면 사그라져 가는 조선족 무용을 살리기 위해 문예공연대를 설립하고 수십차의 문예공연을 조직, 현성내 각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들에 조선족 무용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왕청현의 군중문화예술이 다시 활기를 띠게 하였다. 생활속에서 무용소재를 모색 1964년, 촌유치원과 촌문예대가 설립되면서부터 그녀는 안무를 담당하고 무용창작을 본격적으로 해나갔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사소한 장면도 그냥 지나치는 습관이 없고 늘 머리속에 춤을 생각하고 살았다.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제비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면 제비춤이 생각났고 남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허투루 볼 때가 없이 그 속에서 알맹이를 배워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동집게 같은 예리한 감각으로 작품의 령혼을 포착하면서 연변 특색이 짙은 무용을 창작해 대중들과 호흡을 나누었다. 대중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그는 공연 때마다 무대 뒤에 숨어 관람석을 관찰하면서 관람자들의 표정과 박수를 통해 자기의 작품에 대한 인정을 스스로 느끼군 하였다. 하기에 53년 동안의 무용창작에 대한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목이 꽉 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야무지게 펼쳐 나갈 수 있은 것은 그녀만의 신조 외에도 2006년에 한국에서 "전통공연문화학교"의 조선족무용기본공반에 입학해 한해에 학비 80만원씩 내면서 고급반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그를 대신해 밥을 짓고 옷을 씻는 등 전부의 가무 일을 전담해준 남편 정창도씨가 그녀의 예술 생애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었다고 한다. ▲ 왕청현 노년상모춤예술단 김춘복씨의 인생스토리 사심없는 노력은 사회의 인정을 53년 동안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창작한 무용 "장화꽃", "숲속의 아침", "장백산아래 우리집", "슬기로운 우리민족", "붉은해 변강비추네" 등 민족특색이 짙은 100여가지 무용들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김춘복씨의 사심 없는 노력은 각급 정부와 사회의 호평도 받았다. 칠순을 넘긴 김춘복씨는 취득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왕청현노년상모춤예술단에서 조선족 문화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보람찬 사업에 온갖 심혈을 몰부어 가면서 노후를 보람 있고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 사람들
    2016-09-06
  • 평생을 함께 살자 … 한 부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류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안해 유형숙씨 (60세)에 대한 남편 리희태(63세)의 헌신적인 사랑은 우리 주위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주고 원근 사람들에게 수없는 감동을 주고 있다. ▲ 풍습관절염으로 생활을 자립할수 없는 유형숙씨 (60세)와 남편 리희태씨(63세) 길림성 연변자치주 왕청진 쟈피구촌에 살고있는 리희태의 안해 유형숙은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즐기는 신혼생활은 깨알이 쏟아지고 행복이 넘쳤을 것이다. 두분도 역시 더이상 바랄것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그런 생활을 2년 밖에 하지 못했다.유형숙은 왕청현병원의 간호사로 사업하다 1986년 1월에 류풍습관절염으로 하신 신경이 마비되면서 근육이 굳어져 버려 대소변은 물론 모든것을 남편의 손에 의지해야 했다. 공비로 치료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자비로 내는 치료비가 엄청나 모아 두었던 저금이 거덜이 나고 빚이 산더미처럼 늘어만 갔다. 하지만 이런 역경속에서도 안해를 살리려는 책임감과 안해의 병이 꼭 나으리라는 남편의 신심은 꺾을 수 없었다. 안해의 병을 하루빨리 치료하기 위해 리희태는 안해를 업고 현병원은 물론 심양,안산,길림, 돈화,한국월툰병원 등 용하다는 병원은 다 찾아 다니며 병을 보였다.가는 곳마다 리희태는 쪽걸상에 앉아 새우잠을 자면서 병시중을 들었다. 욕창이 생길가봐 안해가 아침마다 일어나기 바쁘게 더운물로 안해를 목욕시켰고 반시간에 한번씩 돌려 눕혔으며 허리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안해의 두 다리 근육을 풀어 감각을 되찾게 하기 위해 남편은 매일같이 안마를 해 주었다. 의무일군이였던 안해의 병이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고 죽는 날까지 완치가 불가능하다 해도 안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다면 남편은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하였으며 어떤 방법이든지 불사할 각오였다. 안해의 병치료에 돈푼이 될만한 가정기물까지 다 팔아도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힘든 내색없이 늘 밝게 웃는 남편이였다. 이렇게 안해의 병치료에 집 세채와 가정기물을 몽땅 밀어 넣고 세방살이를 하게 되자 1990년에 리희태는 처제의 도움으로 안해를 장모님과 나어린 딸애에게 맡겨놓고 단연히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안해의 병을 치료하려는 일념으로 힘 드는줄 모르고 억척스레 일했다. 낮에는 일을 하느라 생각할 새가 없었지만 저녁에 자리에 누우면 안해가 걱정되고 딸애가 보고 싶어 눈물은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6년동안 돈을 벌고 고향에 돌아온 리희태는 안해의 병시중을 들면서 뇌출혈로 쓰러진 장모를 자기집에 모셔다 여섯달 동안이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효성을 다해 장모가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미소를 짓고 하늘 나라로 가게 하고 처가집 조카 둘을 자기집에 데려다 6년동안 공부시키며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안해가 병상에 누운지 옹근 31년이 되던 2015년 1월의 어느날 점심때였다.밑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갖추려고 하는데 자기 눈을 못 믿을 정도로 뜻밖에 안해가 조심조심 벽을 짚고 위생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적같은 이 광경을 본 남편은 너무도 좋아 환성을 올렸다. “31년동안 내등에 업혀 다니던 당신이 드디여 자기절로 위생실에 가는걸 보게 되였소. 여보, 용기를 내줘서 정말 고맙소. 이제 내가 조금만 더 시중들면 당신이 일어날수도 있을거요.” 남들앞에서 종래로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남편이였지만 이 순간만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비록 병석에 누워있는 안해였지만 남편에게는 큰 힘이 되여주었다. “결혼할 때 우리는 검은머리 백발이 되도록 사랑하자고 언약을 맺었고 둘 중에 누군가 불구가 되더라고 서로를 버리지 말고 마지막까지 돌보면서 함께 살자고 약속했습니다. 안해가 앉은뱅이라고 버릴수는 없었습니다. 부부로 맺어진 이상 안해는 내 몸이고 내살과 같습니다. 죽는날까지 내가 안해의 손발이 되여서 지켜주고 싶습니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 그는 안해의 간병을 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다.아버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 행여나 딸에게 상처가 될가봐 리희태는 힘들 때면 딸이 잠든 후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딸 추연이도 돈을 벌어 어머니 병치료에 보태 주려는 일념으로 열심히 공부해 장춘외국어어학원 독일어 학과를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현재는 상해독일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아버지를 여러모로 돕고 있다. 경제생활이 급속히 발전하는 오늘날 외국나들이,연해도시 진출로 결혼도 쉽게 하고 이혼도 식은죽 먹기로 하면서 가족의 의미와 부부의 소중한 인연을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이 부부의 사랑이 메아리처럼 울려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사람들
    2016-09-02
  • [인터뷰] 재일조선족여성회 전정선 회장을 만나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에서 활약하는 한 재일조선족여성단체가 있다. 바로 2008년2월 10일에 설립되어 지난해 일반사단법인 등록까지 마친 재일조선족여성회(이사장 전정선)이다. 일본사회를 보다 알고 조선족들 사이의 교류를 넓히며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는데 취지를 두고, 주체가 되어 일본사회에서의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의 고민과 난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단체이다. ‘작은 샘물이 바다를 이루듯이 우리의 소중한 참여가 힘이 됩니다.’ 2008년 이래 해마다 여성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예하면 설립된 당해에 어린이들에게는 우리말 배우기, 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와 같은 재능을 가르쳐 주고 어머니들에게는 김치 교실, 무용 교실, 꽂꽂이 교실, 등 활동을 조직했고, 2009년에는 온천여행, 민족무용 배우기, 초청강사 강연회, 실내스포츠 교실, 일본전통복장 교실, 배구활동, 요리 교실, 어린이 우리말, 중국어 교실 등 활동을, 2010년에는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정기적으로 운영했다. 2014년 11월 29일에는 일본국제홍백노래콩쿠르 "제4회 국제홍백가요제"에 참가하여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4가지 언어로 노래를 불러 장관상을 받아 일본사회에서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지난해 10월 18일 오후, 도쿄올림픽기념 국제청소년센터에서 열린 일본 국제 홍백가요제에서 이 여성회 샘물어린이학교 조선족어린이들은 중국노래 ‘말리화’(茉莉花)와 한국노래 ‘참 좋은 말’을 불러 최우수 장관상까지 받았다. 또한 2015년 2월 1일에는 다년간 키워 온 어린이 우리말 교실을 샘물어린이학교로 개명하여 개학식을 가졌다. 도쿄주변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족을 대상으로 한국어·중국어 배워주기, 동요/동화 들려주기 종이접기, 그림그리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작년 8월달에 제1회 재일조선족운동회에서 여성회에서는 문화문예공연무대를 주최했으며 샘물한글학교 어린이합창, 여성들의 민족무용 부채춤이 주목받았다. 어린이들은 단체노력상도 받았다. 재일조선족여성회는 다년간 재일조선족각단체들과의 융합과 협력, 협조로 조선족사회의 일원으로 많은 역활을 해왔다. 작년에 2개반급으로부터 금년부터는 소학2학년반, 소학1학년반, 유아반등 세개 반급으로 한국어 중국어, 음악, 영어등 기타 교실을그림 그리기·색종이 접기·카드놀이·음악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일본에서 출생한 조선족어린이들에게 전통문화 민족언어 교육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4~12살 되는 130여명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13여명의 교직원들이 봉사하고 있다. 전 회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신으로 일찍 연길시 정부와 상해에서 사업하다가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한동안 세계한인무역협회 치바지회 사무국장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일본사회에서의 적응과 취직, 가정육아 등에 관련해 재일조선족 여성들과 상담을 하면서 함께 이러한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결국 조선족 여성의 일본 내 정착· 취업·출산·육아 등을 서로 돕자는 목적으로 이 여성회를 만들었다. 또한 일본에는 10만 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지만 조선족에 대해 전혀 요해가 없는 많은 일본인들은 조선족을 북한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족을 일본사회에 알리려는 결심을 가져 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앞으로 재일조선족들에게 어떠한 긍정적 영향과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전망하는가” 하는 물음에 전 회장은 “동포애와 민족공동체 의식 함량, 우리 글과 문화의 전파, 조선족들 간의 교류와 일본사회에서의 적응· 취직·사업·육아·친목 등에서 고민과 난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확신있게 대답했다. ▲선생님과 함께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샘물한글학교 어린이들 한편 올해에는 자녀교육강좌, 도자기체험, 여성사업가 초청세미나, 다성식품에서 민족음식체험 요리교실, 재일조선족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농활체험교실, 재일조선족들과 함께하는 샘물한글학교 운동회, 동경한국교육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전통예의 문화교육 한복입기 체험교실, 동경에서 열리는 홍백가요전 출연, 어린이들 작품발표회 등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 회장, 동시에 이러 저러한 애로사항도 많다고 토로했다.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활동장소를 마련하는 것으로, 정부 그리고 단체와 지성인 그리고 기업인들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 회장은 "자녀가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자신이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또한 중국인인지 그 정체성 혼돈을 겪는 때가 많아요. 우리말이나 중국어를 배우지 못해 중국에서 조부모가 오셔도 의사소통도 안되고 낯설어하는 경우를 종종 보군 하기도 하구요. 중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의 대학·대학원으로 유학 온 경우가 대부분인 재일조선족은 고학력 지식인이 많지만 3개 언어와 문화를 아는 이런 균형 감각을 자녀가 이어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안타까운 심경을 밝혔다. 이어 "재작년부터 지난해 일본 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열린 국제홍백노래자랑에 여성회 후원으로 조선족어린이 합창단이 등단해 최우수상인 관광청 장관상, 파퍼먼스상을 받는 쾌거를 올린 적이 있다"면서 "이 어린이들이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유일하게 4개 언어로 노래해 큰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수상 후 인사말을 일본말로 밖에 표현하지 못해 부끄러웠다"고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전 회장은 "부모와 달리 일본 사회에 동화돼 가는 자녀를 위해서는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며 "재외동포재단 등 고국(한국)의 기관에서 시행하는 재외동포 차세대 모국연수에 재일조선족 2세도 참여하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전 회장은 “여성회는 재일조선족 여성들이 헌신적인 봉사정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므로 계속 초심을 잃지 않고 여성회와 샘물어린이학교를 위해 헌신해 주기 바란다”고 강조하면서 “여성회가 재일조선족 여성들의 친목도모와 생활, 그리고 현재의 어린이들이 우리 글과 문화 교육으로 글로벌 인재로 육성하는데 한 몫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전 회장은 또 “다년간 많은 지지와 도움을 주신 지성인 기업인들과 트팀 없이 참모 역할을 해 온 현 JTC일본어학교장 (50년 경력대학 교수), 아세아경제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 조선족연구학회 고문이며 전임회장, 東アジア経済経営学会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남편에게도 진심으로 되는 감사 드린다”덧 붙였다.
    • 사람들
    2016-08-06
  • [인터뷰]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동포투데이] 자녀를 둔 재외동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녀 교육이 아닐까 싶다. 자녀들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정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정체성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외동포 2세의 한국어(국어)와 한국의 역사(국사) 교육을 담당하는 홍콩한국토요학교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지난 20일 홍콩한국국제학교 강당에서 있었던 졸업식에서 “꿈이 있는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큰 꿈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학생들을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하던 오계근 전 홍콩한국토요학교장, 지난 2년간 토요학교를 운영해온 그를 만나 토요학교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 2015학년도 한국토요학교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오계근 전 토요학교장 ― 임기를 마친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면. ▲ 2년 동안 토요학교장으로 봉사한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한인 2세들을 교육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봉사하려 노력했고 큰 보람을 갖고 짐을 내려놓게 됐습니다. 특히, 메르스(MERS) 사태 당시 학부모와 학생들의 감염 예방을 위해 한 달간 교사들과 학교 정문에서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감열 및 소독 활동을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 토요학교장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 2년 전 토요학교장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지만 과연 그 임무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당시 주위에서 토요학교장은 명예직이고 장차 한인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느 분은 매주 출근할 필요는 없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나가서 결재만 하면 된다고 조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일부 교사들도 토요학교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현장에서 수고하는 교사들을 대변하기보다는 개인적 명예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실제로 운영을 해 보니 토요학교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40 여 명의 교사와 600여 명 학생의 관리자, 학부모와 교사 간 문제 발생 시 조정자의 역할, 한국 국제학교 관계자들과의 협조체제 및 학교 시설물의 관리자 그리고 KIS의 이사 및 운영위원 등 할 일이 많은 자리입니다. 따라서 매주 토요일 오전 동안 정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재임 시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일을 말씀해 주신다면. ▲ 교사 풀(Pool)제를 도입한 것을 첫 번째로 꼽고 싶습니다. 토요학교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 채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한인회 홈페이지, 한인 소식지 등에 상시 모집공고를 내서 지원자를 모집하고 1차 서류심사, 2차 면접 및 시강을 통해 평가 후 교사로 선발했습니다. 특히, 시강 결과를 선발 기준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은 교육의 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차를 거쳐 선발된 교사들을 결원이 생길 시 우선 배정하고 대기 교사들은 정교사의 결강 시 대강을 통해 경험을 쌓게 하고 결원 시 채용하는 제도입니다. 두 번째, 교사의 고용계약서 작성 시기를 조정했습니다. 관례상 매년 3월에 작성하던 고용계약서를 1월 말부터 2월 중순(졸업식 전)까지 마무리해 교사들이 새 학년도 수업준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3월부터 1년간 근무할 수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계약을 진행했으며, 채용 확정된 신임 교사의 경우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하고, 학기 시작 한 달 전에 교재 연구 및 수업 준비를 차질 없이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 번째, 출석률 향상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의 경우 재학 중인 학교 행사나 기타 특별활동 참가 등으로 인해 결석하는 학생이 많은 편입니다. 대응책으로 졸업 기준에 출석률(중등부의 경우 1/3 이상 출석)을 반영시켜 출석에 대한 의무감을 심어줬습니다. 결석하는 학생들이 많으면 열심히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출석률 관리 강화에 특별히 신경을 쎴습니다. 부모님의 관심이 학생의 출석률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토요학교 ‘운영규칙안’ 설계를 마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관리되어 오던 제반 규정을 종합해 ‘홍콩 한국 토요학교 운영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토요학교의 기본 골격과 교육방침 그리고 교사들 근무지침 및 학생들의 상벌 규정까지 담고 있습니다. 임기 내에 마무리하려 했으나 정관 개정 문제, 한인회장 선거 등 한인회 제반 업무에 밀려 마무리를 짓지 못해 못내 아쉽습니다. 후임 교장이 조속한 시일 내에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 문제점이나 개선할 점이 있다면. ▲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봅니다. 토요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출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교사와 학교 관계자들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재임 시 교사들에게 단순히 지식의 전달자가 아닌 인성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갖추기 위해 모국어 교육과 함께 한국 역사 교육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국제학교에서 수학하는 학생들의 경우 세계사와 함께 한국 역사를 가르치면 더욱 이해를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교사들 간의 화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래 근무한 교사들의 경험과 새로 들어오는 교사들의 참신함이 잘 어우러져야 토요학교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교육 현장에 기득권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학생들도 토요학교에 애정이 생길 것이고, 교사들이 끈끈한 팀워크로 일할 때 학생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쳐 면학 분위기 향상에도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 한인회 및 한인 사회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 홍콩한국토요학교는 1960년 개설 이래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글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작은 의미의 학원이 아닌 학교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학교로서 독립성을 갖고 운영될 수 있도록 관심은 가져 주시되 지나친 간섭은 지양했으면 합니다. 토요학교 교사는 1주일에 한 번 수업하지만 내실 있는 지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2세 교육을 담당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시는 교사들이 보람을 갖고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49대 한인회 회장단에서도 교사들에게 진심 어린 격려와 지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람들
    2016-03-07
  • 중국 뷰티프로그램 , MC가 한국인이라고?
    [동포투데이]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임정은이 최근 ‘K-뷰티’ 전도사로 활약 중이다. 중국 상하이 SiTV에서 방송하는 신개념 뷰티 버라이어티 <시상가인(時尙佳人)>의 메인MC로 활동하고 있는 것. <시상가인>은 중국과 아시아 각국에 K-뷰티를 비롯한 알짜배기 한류 정보를 전하는 신개념 뷰티 프로그램으로, 한류스타를 직접 담당했던 뷰티 전문가들이 평소 쉽게 알 수 없었던 K-뷰티의 비법을 소개해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시상가인>은 상하이 SiTV, 베이징TV와 옌볜TV 등 중국 방송 뿐만아니라 태국 TVK, 미얀마 TV 등에도 방송되고 있어, ‘K-뷰티’를 아시아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상가인>을 진행하는 임정은은 현재 한중 2개국어MC로 한국과 중국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시상가인’을 비롯해서, 중국 최대 인터넷기업 텐센트와 한국 칸타라글로벌이 개최하는 생방송 한류콘서트 <텐센트케이팝라이브(Tencent K-POP LIve)>, 한류스타 인터뷰 프로그램인 <한위쑤디 인터뷰>, KTV의 여행정보 프로그램 <핫플레이스 코리아> 등을 진행하고 있고, tbs eFM의 중국어 프로그램 <서울생활가유참>에 매주 한국인 게스트로 출연해 입담을 뽐내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빅뱅, 소녀시대, 에이핑크, 포미닛, 씨스타, 비스트 등의 스타 아이돌과 한 무대에서 선 임정은은 2016년에도 자신을 설레게 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나고 싶다면서, 올해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 통역학과 2학년을 시작하는만큼, 진행과 통역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사람들
    2016-02-1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