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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기에 접어든 조선족 음악거장- 장천일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2002년 9월 3일,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 창립 50주년을 경축하는 연길시 인민경기장에는 명절을 즐기는 시민들이 가득 운집한 가운데 김학봉이 부른 '장백송'이 스피카를 통해 경기장 상공에 울려 퍼지면서 경축활동의 막이 서서히 올랐다. 천년의 적설 왜 이렇듯 희느냐이는 순결한 민족의 깨끗한 마음이라바다의 비취빛 같은 천지의 파란 물이는 푸르른 하늘이 씻어준 흉금이라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는 조선족 중년작곡가 장천일 선생이 시인 김학천 선생과 합작하여 만든 '장백송(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 경축 헌례작품)'이다. 장천일- 조선족으로 1959년 9월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1976년 심양음악학원 관현악학부를 졸업, 그 이듬해부터 작곡사업에 종사하다가 지난 세기 80년대 초기 교향곡 영상(交响音画) <북방삼림>을 갖고 중국음악계에 데뷔했으며 그것을 계기로 많은 교향악, 실내악, 오페라음악, 뮤지컬 음악, 무용음악, 영화 및 드라마 음악을 창작하였으며 이 중 중국인들한테 친근하게 다가오는 가요들로는 '청장고원(青藏高原)', '패왕별희(霸王别姬)' 등이었고 특히 중국 조선족들한테는 '장백송'이 넓은 폭으로 가슴에 스며드는 가요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가요 '장백송'은 웅위롭고 높은 기상을 지니고 있는 장백산을 우리 민족의 슬기와 용맹 그리고 흉금과 비교하면서 폭이 넓고도 격앙적인 선율로 만들고 있으며 거기에 가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에 민족적 정서를 부여하면서 친절함에 '조미료'를 첨가하고 있다. 근 40년간 장천일이 창작한 음악 프로그램은 수백건에 달한다. 거기에는 '장백송'이나 '청장고원'과 같은 수준급의 가요가 있는가 여러 종류의 협주곡, 교향악과 오페라 음악과 같은 고품격, 고수준의 음악도 있으며 드라마 '조상지','해방', '태양설', '임해설원'. '칭키스칸' 등 수십편에 달하는 영화 및 드라마 음악도 포함되어 있다. 이 중 지난 중국 해방전쟁시기 조선족인민들의 전선지원 문사자료를 소재로 한 '전지 아리랑(战地阿里郎)'이 가장 대표적인 드라마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 중국 유명 작곡가 장천일(張千一) 장천일이 작곡한 가요들 중 많은 가요를 송조영(宋祖英), 대옥강(戴玉强), 담정(谭晶), 왕하(王霞) 등 중국의 유명가수들이 자주 무대에 올렸다는 것에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그만큼 장천일은 받아안은 굵직굵직한 국가급 상도 많다. 2000년, 2005년과 2007년 3번에 거쳐 중국영화절에는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획득했고 중공중앙 선전부, 중국 국가문화부, 중국군 총정치부로부터 각각 '5.1공정상', '문화대상', '해방군 문예상'을 받아 안았으며 중국음악가 협회, 중국 무용가 협회, 중국 연극가협회 등으로부터도 여러 가지 명목의 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 중국군 총정치부 가무단 단장으로 무거운 중임을 맡고 있는 장천일은 국무원 수당을 받는 작곡가인 한편 겸직으로 중국음악가협회 부주석도 맡고 있는 바쁜 몸임에도 연변대학 예술학원 석좌교수에 응해 우리민족의 음악발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사람들
    2017-05-12
  • 베이징 TV 조선족 미녀 사회자 양아기(杨雅淇)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여성들 중 이쁘고 훤칠한 미녀들이 많다. 또한 미모에 재능까지 겸비한 여성도 많다. 하지만 미모에 말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가 하면 영화배우에 서예까지 능한 이쁘고도 매력적인 여성, 그것도 중국 조선족 젊은 여성중에 이런 출중한 여성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중국 베이징TV방송국 사회자인 양아기(杨雅淇)이다. 중국 흑룡강성 가목사시 태생인 양아기는 베이징미디어대학 방송학부를 졸업, 1.68미터에 달하는 신장에 사진에서 보다싶이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베이징시 TV방송국의 조선족 사회자이다. 양아기가 사회한 유명 프로그램들로는 <지나온 청춘의 60년(青春走过六十年)-2009년>, <청춘대변인 찾기(寻找青春代言人)-2009년>, <"중화송¨ 거인컵 전국서예콩쿠르시상식(2010년)>, 베이징시 부녀연합회 주최 학교 들어가기 공익활동 및 베이징 캠퍼스공연시즌 개막식(2010년), <글로벌 새해맞이 생방송>(2012년), <환구춘만(环球春晚)-2013년> 생방송 등 베이징 TV방송프로가 있는가 하면 2010년에는 구이저우 위성방송에서 주최한 대형도박방지 공익프로인 <그대가 내보인 비장한 카드(亮出你的底牌)> 의 사회를 맡았었고 2011년에는 윈난 위성방송에서 주최한 <양생회(养生汇)> 프로의 사회를 성공적으로 맡았다. 그리고 한국 현지에서는 유창한 한국어로 사회를 맡아 한국 방송계의 절찬을 받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들로는 2008년 한국대형가정오락 프로그램인 <아빠힘내>와 2014년 한국 스타음악회 사회를 맡은 것 등이다. 양아기가 다재다능한 조선족 여성이라는 것은 아래와 같은 성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예 애호자인 양아기는 선후로 30여차에 거쳐 국제 및 국내의 서예상을 획득, 이 중에는 금상도 포함되고 있으며 그녀의 서예작품은 <당대 중국청소년 정영록(中国当代青少年精英录)> 제5부에 수록되었다 . 현재 양아기는 경필서예(硬笔书法) 최고단자인 9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중국 베이징TV방송국의 조선족 女사회자 양아기(杨雅淇) 이 외 양아기는 2016년에 가요 <봄날 그대를 기다릴거야(我在春天等你)>를 발표하여 가창실력을 과시했고 영화 <내일>, 연극 <리레이와 한메이메이(李雷和韩梅梅)>, 연극 <천세를 사랑하기(爱上千岁)>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회자인 양아기한테 있어서 2015년부터 최근 2년여간은 사회자로서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2015년 7월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반파쇼 전쟁 승리 70년 기념 시낭송회의 사회를 맡았고 그 해 10월에는 중국 국무원에서 주최하고 베이징시 화교연합회에서 대행한 <중화문화대낙원(中华文化大乐园)> 활동의 사회자로 독일과 네덜란드로, 2016년 10월 역시 국무원에서 주최하고 베이징시 화교연합회에서 대행한 <중화문화 대낙원> 우수재예학생교류단 공연야회 사회자로 북미방문을 하였다. 한편 사회 공익사업에 헌신적으로 나서기도 한 양아기는 흑룡강성 가목사시 홍보대사, 베이징시 3.8 홍기수, 세계무역연합회 애심대사 등많은 영예를 획득했으며 얼마전에는 중국 라디오TV협회 아나운서 위원회 100명 신세대 아나운서로 등극하기도 했다. 사회자로서 중국어와 한국어로 유창하게 사회를 담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예와 노래, 그리고 배우로서도 출중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족 미녀- 양아기는 전반 우리 한민족의 자랑으로 손색이 없다.
    • 사람들
    2017-05-11
  • 13세 北피아니스트, 눈부신 연주로 국제콩쿠르 우승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북한 피아니스트 최장홍(13세)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제 2회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 국제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날렸다고 러시아 언론 스푸트니크 통신이 전했다. 주북 러시아대사관 페이스북에 최장홍이 대회 주요상인 '발굴' 상을 수상했다고 공개됐다. 3월 30일 열린 본선대회에서 북한 어린이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으로 기막힌 연주를 선보이며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며 4월 6일 평양 순앙 국제공항에서 환영 속에 그를 맞이했다고 소개했다. 블라디미르 크라이네프(1944~2011)는 소련, 러시아, 독일 피아니스트로 불리며 음악교육자이자 사회활동가였다. 소련 국민예술인이자 소련, 러시아 국가공로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는 일찍이 1992년 크라이네프가 생전에 고안해 만들었으며 이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치러지다가 2년 전부터 모스크바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 사람들
    2017-04-08
  • 재한동포사회를 빛낸 중국동포 여성들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재한중국동포사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포여성들의 공로가 크다. 한중포커스신문은 UN이 정한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해 재한동포사회를 빛낸 봉사, 학자, 언론, 문화예술, 법률, 사업가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 리더들을 소개했다. 김영희 - 한중다문화봉사회 회장 무려 21년간 지역사회와 동포사회 이미지 개선을 위해 묵묵히 봉사활동을 해온 중국동포 출신인 한중다문화봉사회 김영희 회장이 동포사회는 물론, 한국사회에서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지난 1990년대 초 한국에 들어온 김영희 회장은 처음 정착지인 서울 마포구 신촌 동교동에서부터 인천 남동구, 부천 심곡동, 그리고 다시 서울 구로구 구로4동으로 이사하여 살아오면서 줄곧 봉사활동을 해왔다. 그는 매년 명절이나 어버이날, 삼복철 등이 오면 송편, 만두, 삼계탕 등 음식을 만들어 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식사대접과 불우이웃 후원금 전달과 김장나눔 봉사 등을 해오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지역 골목 청소를 해오고 있다. 그의 이같은 공로가 인정되어 서울시 모범 외국인주민 표창장, 국회의원상, 구청장상, 경찰청장상 등을 수두룩이 받았다. 한중다문화봉사회 사무실에는 상장과 상패, 사진들이 빼곡히 있다. 지난 21년간 김영희 회장이 해온 봉사활동을 증명해주는 증거물들이다. 김숙자 - 재한동포연합총회 회장재한동포총연합회 김숙자 회장은 재한 중국동포의 인권 보장과 복지·문화지원을 위해 노력해왔다. 연합회는 재한 중국동포가 겪는 고충 상담에서부터 ‘금천구 재한동포 경로당’ 등도 운영해오고 있다. 중국 연변에서 출판사에 근무하다 베이징에서 번역 일을 했던 김 회장은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에 지난 2004년 가족과 함께 귀화했다. 김 회장은 재한 중국동포들이 한국인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해응 - 前 서울시 명예부시장 “중국동포를 포함한 모든 이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발로 뛰겠습니다.” 지난 2014년 9일 서울시 외국인명예부시장으로 위촉된 중국동포 이해응씨의 각오였다. 실제로 그는 임기 중 중국동포들과 이주민들의 불편과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전달하여 시정에 적극 반영하도록 많은 정책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연변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 이화여대에서 여성학 석·박사과정을 마친 이해응씨는 이주민들의 한국 정착을 돕는 ‘생각나무 BB센터’ 공동대표, ‘한중커뮤니티리더스포럼’ 공동대표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민 - 서울국제학원 원장 서울국제학원 문민 원장은 중국 흑룡강성 출신으로 중국 현지 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지난 1995년 한국에 와 서울대학교 교육행정학 석사를 졸업한 뒤 귀화시험 대비교육, 중국동포 대상 취업교육 등을 해왔다. 지난 2014년 서울국제학원을 개원하고 현재 원장으로 있으며 또 어울림주말학교 교장, 재한동포교사협회 회장 등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동포어린이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교육활동 외에도 중국동포들을 위한 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그의 논문으로는 ‘중국 조선족학교 통폐합의 원인 분석’이 있으며 저서로는 ‘대한민국 귀화시험 한권으로 합격하기(2011. 크라운출판사)’, ‘이웃나라 생활문화 알기 중국 편’(2013. 생각나무, BB센터)공저 등이 있다. 이옥희 - 중국 국가1급 배우 중국 연변가무단의 국가1급 배우 이옥희씨가 지난 2014년 영화 ‘소리굽쇠(감독 추상록)’에 출연하면서 한국 스크린 진출 첫 중국동포 배우로 기록됐다. 그는 영화 ‘소리굽쇠’에서 일제강점기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는 거짓말에 속아 중국까지 끌려간 후 일본군 위안부로 극한의 고통을 겪은 귀임 할머니 역을 맡아 먹먹함을 안겨주며 관중을 매료시키기도 하였다. 현재 이옥희씨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각종 공연에 참가하며 한중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하는 한편 중국 ‘전국애심 공익기금회’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1인극으로는 ‘새시발 노친’, ‘응원대장’, ‘영감 내가왔소’, 등이 있으며 단막극으로는 ‘사촌언니’, ‘경계선’, ‘장 과부’, ‘가짜 일본사람’, ‘썩장’ 등이 있다. 이옥희 배우는 또 드라마 ‘몽당치마’와 ‘황혼무렵’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특히 그의 1인극 ‘새시발 노친’은 중국 CCTV에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안순화 - 생각나무 BB센터 대표 지난해 10월 서울시가 소외 이웃을 돕는 데 헌신한 시민 10명을 선정해 동판 부조상을 나란히 새겨넣은 공간으로 제막한 ‘서울시 명예의 전당’에 중국동포 출신인 ‘생각나무 BB센터’ 안순화 공동대표가 포함됐다. 100명이 넘는 후보 가운데 꼼꼼한 심사를 거쳐 ‘서울의 얼굴’로 뽑힌 안순화 공동대표는 올해로 12년째 결혼이주여성의 서울살이를 돕는 ‘맏언니’이자 한국 사회에 건강한 다문화 정책을 제안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12년째 외길을 걸어온 그는 각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지난 2014년 이주여성으로는 처음 ‘서울시 봉사상’ 대상을 받은 것을 포함해 2013년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2015년 ‘세계인의 날’ 법무부 장관상 등 민관을 넘나드는 수상 목록을 쌓았다. 현재 그는 서울시 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안유화 -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금융학 교수 중국 길림성성 연길시 출신인 안유화 박사는 길림화공대 화학공정학과를 졸업하고 연변호리대(현재 연변대 편입) 화학과 교수로 근무하다가 2001년 상하이 푸단대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연변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 2003년 서울로 건너왔고, 2013년 2월에 고려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안 박사는 현재 성균관대 중국대학원에서 금융학 교수로 재무관리, 중국 자본시장 이론, 금융 중국어, 금융 세미나 등 4과목을 가르친다. 한국예탁결제원 객원연구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지금까지 연구한 성과물의 제목들은 그가 ‘중국 금융 전문가’임을 한눈에 보여준다. ‘중국발 금융위기 어디로 갈 것인가?’, ‘위안화의 역외 사용 확대와 한국의 대응’, ‘중국 주식시장 특성과 외국기업의 활용방안’, ‘중국 지방채(국유기업 프로젝트 발행채권 포함)의 한국 내 발행과 유통 활성화에 관한 연구’ 등 60여 편을 발표했다, 그의 목표는 한국과 중국을 넘어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자산운용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박옥선 - 서울 구로구 상공인회 이사중국 식품 도매업으로 시작해 여행사와 학원, 매니지먼트사까지 운영하면서 재한동포사회의 여성사업가로 성장한 박옥선씨. 중국 흑룡강성 벌리(勃利)현 출신인 그는 1992년 11월 한국 땅을 밟았다. 지난해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 31번에 배정받았던 그는 비록 금배지는 달지 못했지만 ‘중국동포 출신 첫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는 지난 2012년 7월부터 2013년 6월까지 국제라이온스협회 354-D 지구 회장으로 활동해 오다가 2014년 12월 중국동포 출신 여성들로 구성된 ‘CK여성위원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해 오다가 지난해 말 임기를 마치고 현재 서울특별시 서남권 글로벌센터 명예센터장, 사단법인 서울 구로구 소상공인회 이사 등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경화 - 동포투데이 대표정경화 대표는 인터넷 매체인 ‘동포투데이’를 발행해 한국과 중국의 현지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으며, 남편 허을진 씨와 함께 재한중국인의 최대 커뮤니티 공간인 ‘중국조선족대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사)GK희망공동체를 설립해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고 상호 이해와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민간외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도전 골든벨’ 행사 등을 개최해서 한·중 양국 청소년들의 인성함양에도 기여하고 있다. 김애란 - 북경전화국 대표 올해로 10년째 ‘북경전화국’ 매장을 운영 중인 김애란 대표. 중국 훈춘 출신인 그는 1999년 한국에 와 한국인 남편과 가정을 꾸렸고 현재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영등포구 대림동 등에 6개의 매장을 운영중이다. 김 대표는 중국동포의 한국 정착을 돕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실제로 그는 남편 차재봉씨와 함께 2014년 400여 만 원을 기부해 대림동에 외국인자율방범연합회 초소를 지었고, ‘북경전화국배 장기대회’ 등도 여러번 개최하였으며 동포관련 행사에도 적극 후원 협찬하고 있다. 그는 또 2015년부터 영등포구청의 ‘푸드마켓’을 통해 저소득층 주민을 위한 식료품 나눔에도 동참하고 있다. 조은정 - 법무법인 정세 한중법률지원센터장 법무법인 정세의 한중법률지원센터를 이끄는 조은정 센터장은 국내 중국동포는 물론 한국에 진출하려는 중국 기업이나 중국으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한국 기업의 법률 도우미로 활약하고 있다. 법무법인에서 일하며 안타까운 사례를 많이 봤기 때문에 한중법률지원센터를 만들었다는 조은정 센터장. 올해는 생활에 필요한 법률 상식을 알려주는 법률 아카데미를 개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연변대학을 졸업한 조은정 센터장의 관심사는 중국동포들에 대한 법률 지원과 상담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기업과 중국 기업 간의 상호 교류나 공동 협력을 중개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장래 목표는 한중 기업 교류의 플랫폼을 만들어 모든 관련 서비스가 원스톱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다.
    • 사람들
    2017-02-19
  • 31년째 이어온 훈훈한 이웃사랑
    [동포투데이] 의지할 데가 없는 늙은 한족 부부를 장장 31년을 하루와 같이 친부모처럼 모시면서 미담을 엮어온 여성이 있는데 그가 바로 길림성 왕청현 서성가두 동진 사회구역에 살고있는 최해순(62세)이다. 1985년 11월, 최해순은 사업의 수요로 현성으로부터 서성가두 동진사회구역으로 전근해 리연청, 왕숙연 (李延清,王淑艳) 양주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으로 되었다. 리씨 노인은 귀가 왕씨 노인은 몇 년째 심한 골 결핵으로 앓아누워 있었다. 최해순은 그때부터 나무를 패고 집안을 거두는 일을 도와주고 부엌일까지 도맡아 해주면서 두 집은 한집처럼 지냈다. 리씨 노인네가 일이 있어 벽만 두드리면 최해순은 인차 달려나갔다. 한번은 너무 피곤해 일찍 잠들었던 최해순이 벽두드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깨어나 달려나가 보니 리씨 노인이 급성위장염에 걸려 아픔을 참지 못해 마구 뒹굴고 있었다. 급해난 최해순은 노인을 업고 병원에 달려가 호주머니를 털어 노인을 사경에서 구해냈다. 최해순 부부는 모두 일반 종업원인데다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고 이웃의 늙은 부부까지 부양하다보니 생활이 몹시 어려워 텔레비죤마저도 없었다. ▲31년째 늙은 한족 부부를 친부모처럼 모시면서 미담을 엮어온 최해순 씨 2001년에 아들애가 우수한 성적으로 중앙민족대학으로부터 입학통지서를 받았지만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애간장을 태웠다. 부모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잘 알고있는 아들애는 "어머니, 너무 속태우지 마세요. 전 대학에 가지 않겠어요."라며 그녀를 위안했다. 콧마루가 찡 해난 그녀는 "얘야 미안하다. 이번에는 내가 가산을 다 팔아서라도 널 대학에 보내겠다."고 아들에게 말하였다. 최해순은 보름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끝내 3,500위안의 학비를 마련해 아들애의 대학 꿈을 이루어줬다. 2002년 초, 리씨 노인은 간암으로 진단받았다. 최해순은 10 여리 되는 산속에 들어가 약재를 캐다가 노인의 병 치료를 하였다. 리씨 노인은 최해순의 효성에 받들려 치료 받다가 그해 3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하늘나라로 갔다. 리씨 노인이 세상뜨자 최해순의 부담은 더욱 과중해졌다. 척주결핵으로 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왕씨 노인은 아프거나 소변을 보아도 벽을 두드리고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파도 벽을 두드렸다. 그동안 최해순네는 아들 신세로 시내에다 아파트까지 사놓았다. 하지만 최해순녀성은 자기가 편안하자고 생활을 자립할 수 없는 왕씨 노인을 두고 갈 수 없었다. 가정토론을 거쳐 최해순은 현재 남편이 아빠트에서 살고 그는 아직도 왕씨 노인네와 벽을 하나 사이둔 단층집에서 살면서 노인을 보살피고 있다. 최해순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동진사회구역에서는 여러차례 왕씨 노인을 사회복리원이나 경로원에 보내려고 했지만 왕씨 노인은 "나는 친딸보다 더 지극한 해순이곁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 수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최해순 역시"나도 친부모와 같은 왕씨 노인을 절때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최해순은 이렇게 장장 30년을 하루와 같이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 이웃 한족 늙은 부부 돌봐주면서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미덕을 실천했고 민족단결의 미담을 엮어 가고 있다. 1994년부터 최해순은 선후하여 "길림성민족단결진보상", "전국경로아들딸금상", "왕청감동인물" 등 영예를 수여받았다.
    • 사람들
    2017-01-08
  • 아이들과 상모춤이 있어 행복한 그녀
    [동포투데이] “상모춤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진에는 아이들에게 상모춤을 전수해 가며 역경속에서도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켜가기 위해 애써 온 한 시골학교 여교원이 있다. 그녀가 바로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 제2소학교에서 30여년 동안 학생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쳐 온 김수금 교원이다. 교육사업에 종사한 이듬해인 1985년부터 아이들에게 상모춤을 가르치기 시작한 김수금 교원은 시골학교였기에 어쩔수 없이 겪어야 했던 고충이 많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교 학생수가 고작 50여 명밖에 안되는 시골학교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조직해 상모춤을 춰야 하는 일은 말 그대로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습 도중에 상모대에 맞혀 부상을 입는 아이들까지 하나, 둘 늘면 연습은 더 이상 진행키 어려운 일로 될 때도 있었다. 따라서 자식걱정에 공부에만 열중하면 된다는 보수적 관념을 가진 부모들의 반대 목소리도 커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한집 한집 가정방문을 다니며 민속문화를 지켜가야 하는 의미를 강조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 마음”으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경제형편이 어려운 시골학교였기에 어렵게 공연준비는 했지만 아이들에게 입힐 변변한 공연복장 한벌 없어 속상할 때도 많았다.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지만 아이들을 위해선 자존심까지 버리기로 했다. 워낙 신체가 허약한 그녀였지만 매일 왕복 몇시간의 노정을 버스로 오가며 도시학교들에 찾아가서는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빌어서 복장을 빌려왔다. 그런 자신이 때로는 보따리 장사로, “구걸”하는 사람으로 비참하게 느껴져 서럽게 혼자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빌려온 복장은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빛이 나지 않는 헌 옷들이었기에 그런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른 아이들을 촌놈들이라고 놀려주는 도시아이들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가르쳤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녀는 웬만한 도시학교들에서도 그저 바라만 보는 수두룩한 영예를 받아 안는다. 2005년 그녀가 인솔한 배초구제2소학교는 연변중소학생예술전시공연에서 유일한 향진 학교대표팀으로 단연 1등의 월계관을 받아 안았다. 그외 2008년 연변민족예술 전시공연에서 금상을, 2012년 7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 맞이 연변 제3차 중소학생예술전시공연에서 금상을, 2013년 12월, 길림성 왕청현 제3회 중국조선족상모춤경연에서 최우수상을 받아안았다. 상모춤의 최고지도교원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자 현성 학교들에서도 중요한 경연이 있으면 그녀를 찾아왔다. 2014년 4 월, 그녀는 왕청현 제2소학교로 전근했다. 상모춤 인재를 더 많이 육성하라는 상급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는 계속해 도시학교에서 상모춤을 전수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이끌고 크고 작은 경연에 참가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과 리허설을 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그녀는 새끼 병아리마냥 우루룩 모여와 자신의 품에 안기는 아이들로 밤잠을 설친다. 바로 자신과 오랜 시간 울고 웃으며 상모춤을 연습해 오던 시골학교 천진난만한 학생들이었다. “선생님, 다시 배초구에 와서 우리들을 가르치면 안됩니까? 우린 선생님이 없으니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후볐다. 그래, 다시 돌아가자! 도시학교는 내가 아니어도 다른 무용선생님이 계시는데 시골아이들은 내가 없으면 아예 춤을 배우지 못하니깐... 그녀는 도시의 우월한 대우를 뒤로 한채 2년반이란 시간을 보낸 도시학교를 떠나 꿈에도 그리던 시골학교 아이들 곁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떠난 2년반 사이, 시골학교는 학생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더는 상모춤을 조직하고 배워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30여년 동안 제대로 된 방학이 뭔지도 모른채 숨가쁘게 달려온 그녀지만 열정만 쏟아부어서는 안되는 “참혹한” 현실앞에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고민끝에 상모춤이 아닌 노래와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재간 하나 더 익혀 시골아이들도 도시아이들 못지 않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고 또 그들의 예술감성과 특기를 키워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춤이 전공인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 50이 넘는 나이에 그녀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피아노 공부를 한다. 그러는 그녀를 두고 지인들은 이제 상모춤을 배워줄 수 있는 날이 언제 또 오겠냐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도시학교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지만 그때마다 암 선고를 받고도 작곡가로 있으면서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곡을 쓰던, 살아만 있으면 뭘 못하겠냐며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열정을 다하라던 친정오빠의 말을 되새기며 끝까지 믿고 버텨보기로 결심한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시골아이들 마음속에 소중한 꿈 하나라도 더 심어주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노력 중인 그녀, 누군가의 눈에는 안타깝게 비쳐질 수도 있는 그녀의 값진 노력이 꼭 헛되지만은 않기를 기대해 본다.
    • 사람들
    2017-01-03
  • 中 영화계의 반짝이는 새별 양영
    ▲중국 영화계의 반짝이는 새별 양영 첫 연속극으로 인기몰이 중국 영화배우 양영(杨颖— 예명은 Angelababy)이 주역을 맡은 사극 《대한인연— 운중가(大汉情缘之云中歌)》가 방송된 후 양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특히 극중에서 선보인 내시분장이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전 작품에 비해 내시차림의 양영은 특별히 활발하고 영리해 보였다. 얼마전에 양영은 출연 중인 예능프로그램 《달려라, 형제(奔跑吧兄弟)》에도 내시차림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는 “나처럼 이렇게 영준하고 소탈하며 름름하고 씩씩한 내관을 본적이 있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한인연— 운중가》는 육의(陆毅)가 맡은 인물 유불릉이 동년시절에 초록색 옷차림의 소녀 운가(양영 분)으로부터 구원되고 두 사람은 10년후에 장안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이리저리 어긋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운가”라는 인물에 대해 양영은 “사랑을 굳건히 지키려는 운가한테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이런 약속을 줄곧 믿어왔다”면서 맡을 역할에 대한 사랑을 표시했다. 양영은 이런 극중인물 운가를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며 시청자들로부터 합격점을 받았다. 그는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또한 사랑에 대한 무기력함도 생동하게 그려내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유불릉역으로 함께 출연한 육의는 “대중들은 일반적으로 잘생긴 배우는 연기력이 별로이라고 하면서 이런저런 병집을 끄집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양영의 연기는 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그녀의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해 나와의 호흡도 아주 잘 맞아서 유쾌하게 촬영했다”고 밝혔다. 연예계 데뷔 양영은 1989년 2월 28일 상해서 출생, 13살에 향항으로 이민을 갔다. 2003년에 모델로 된 그는 일본의 한 중개회사와 계약을 맺고 시대잡지 《Ray》와 《Dear》의 전용모델로 활동했다. 2007년 12월, 주걸륜의 요청으로 《07-08 세계순회음악회향항(07-08世界巡回演唱会香港站)》에 무용배우로 출연한 양영은 2009년10월에 희극편 《화전경사2010(花田囍事2010)》에서 운명이 기구한 화전국 군주역을 맡으며 연예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2010년 7월 27일, 양영은 국제의류잡지 《VOGUE》의 총편집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에서 진행된 《Fashion's Night Out》국제대형패션쇼무대에 첫 향항모델로 섰고 일본 매체로부터 “향항녀신”으로 인정받았다. 7월 30일에는 일본 웹드라마 《사랑대화(恋爱对白)》에서 주역을 맡았다. 영화 촬영으로 바삐 보낸 5년 양영은 2011년에 처음으로 동작영화 《건달영웅— 전투를 개시(痞子英雄之全面开战)》에 출연했고 2월에는 영화 《전성이 뜨겁게 사랑하다(全城热恋)》에서 정백연과 호흡을 맞추었다. 9월에는 마촉성 감독의 영화 《느긋한 여름날(夏日乐悠悠)》에서 처음으로 여주역을 맡았다. 2012년 6월 양영은 화의형제그룹과 계약을 맺고 안젤라 베이비 작업실을 설립하고 량가휘(梁家辉), 팽우안(彭于晏)과 합작한 세편의 태극계열영화에 출연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해 양영은 한연 감독의 애정영화 《처음(第一次)》에 출연하면서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각막까지 다치기도 했다. 후에 그는 이 영화로 제13기 중국 영화대상에서 제일 주목을 받는 여배우상을 수상했다. 2013년 양영은 영화 《화조풍월이야기(一场风花雪月的事)》로 런던 국제 중국어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주역상을 수상했다. 그후에도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2013 시나블로그 년도여신(2013新浪微博年度女神)의 영예를 얻었다. 2014년 양영은 영화 《사랑은 점입가경(微爱之渐入佳境)》과 첫 할리우드진 영화 《번호47(代号47)》외에도 영화 《임시동거(临时同居)》 등 6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5월 10일에는 《적인걸: 신도룡왕》으로 제21기 북경대학생영화제에서 제일 환영받는 여배우로 선정되였다. 올해도 양영은 년초에 출연한 영화 《봉신방(封神榜)》을 시작으로 3편의 국내영화에 출연한 외에 두번째 할리우드영화 《독립일2(独立日2)》에도 출연했다. 연예계에 데뷔해서부터 양영은 자신의 각종 결함들을 고쳐서 만능연예인이 되려고 피타는 노력을 했다. 특히 그의 연기력은 언제나 지적받은 약점이었다. 그는 대량의 작품과 서적들을 보면서 연기력을 익히려고 했다. 연기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 “죽을 힘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기력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 영화 《임시동거》에서 양영은 못생긴 여자역을 맡았다. 그는 대중들이 자신의 못생긴 분장을 즐겁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감독이 입술연지를 바르지 못하게 하고 눈화장도 못하게 했을 뿐더러 반점을 만들어넣었다. 그리고 맡은 역할이 우편배달원이었기에 손에 많은 상처가 있어야 했다.” 그는 “촬영당시 감기에 걸려 코물범벅이 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코물감기에 걸리면 종이로 코구멍을 틀어막는 습관이 있었다. 한번은 촬영할 때 코안에 밀어넣은 종이를 꺼내지 않았는데 감독이 보고는 좋다고 했다. 우스운건 연기할 때 툭 튀어나왔지만 누구도 감히 줏지 못했다”고 회억했다. “이전과 달리 과감하게 못생긴 여자역할을 하게된 것은 남자친구를 찾지 못할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황효명의 못난 역할을 더욱 좋아한다. 그는 못생긴 이미지(《중국합작인》)로 상을 타기도 있다. 때문에 그의 추남형상이 미남형상보다 더욱 성공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럼에도 황효명(黄晓明)이 자신의 여신같은 모습을 더 좋아할 것이라고 여긴 양영은 언제나 남자친구앞에서 여신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양영과 황효명은 2014년 2월에 연인사이임을 밝히고 공개연애를 즐겼다. 당시 앙영은 “두 사람 모두 온정되었기에 연인사이를 공개했다. 몰래 만나는 것이 힘들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기로 마음먹었다”고 밝혔다. 2015년 10월 8일, 황효명과 양영은 상해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많은 연예계 동료들이 참가한 가운데 주례는 저명한 감독 오우삼이 맡았다. 《대한인연— 운중가》의 제작인 우정(于正) 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운가, “중국 제일 아름다운 여인” 양영를 위해 “양영이 남편 황선생과 영원히 행복하고 달콤하게 백년해로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 사람들
    2016-12-13
  •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 찾기에 나선 조선족 유학생
    ▲ 젊음과 열정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나선 재한조선족유학생 권진명 [동포투데이] 20대의 젊음과 열정이 느껴지는 그녀, 청년공동체 ‘세움’의 부대표로 활약하고 있으며 시각디자인이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전공으로 조선족과 한국인의 뿌리찾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권진명(27세)씨를 만나보았다. Q 시각디자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한다면? ― 전공은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다. 흔히 시각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중국어로는 視覺傳達라고 한다. 디자인을 한다고 하면 주위에서는 인테리어 디자인이나 패션 디자인 쪽으로 많이들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들도 도대체 내가 무슨 디자인을 하는지 잘 모른다. 친구들은 컴퓨터 작업이나 명함, 상표 만드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가끔 무료로 명함이나 로고를 만들어달라는 지인들의 ‘일감부탁’이 많이 들어오고 있죠.” (웃음) 그만큼 시각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중국의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다. 실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 다 있는 것이여서 얼마든지 보고 느낄 수 있는 거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커뮤니케이션 즉 소통을 하는 것이다. 평면디자인, 그래픽 디자인보다 폭이 훨씬 넓은데,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이쁘게 만들거나 장식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담아 소통하고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에 있다. 다양한 미디어와 다양한 방식의 디자인을 활용하여 리서치, 기획, 스케치, 디자인의 순서로 완성된다. 추상적인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내용을 더욱 쉽게 사람들한테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이라고 보면 된다. Q 그림과 다른 점이라면? ― 그림은 작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치중점을 둔다면, 시각디자인은 타인과의 소통에 중점을 둔다. 소통과 공감을 목적으로 하는 디자인이다. Q 졸업작품으로 조선족 관련 소재의 작품을 준비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기존의 재한조선족들에 대한 영상이나 댓글, 논문을 찾아봤다. 그러면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재한조선족에 관한 영상들을 보면 주로 몇가지가 있다. 1, 현 재한조선족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 2, .조선족 범죄사기 비판 영상. 3, 조선족에 관한 편견을 버리자는 캠페인 영상. 그 외에도 많은데 대다수 동정심 유발이나 심각하게 다룬 내용들이 많다. 두 번째는 조선족 관련 논문들을 보면, 그래도 민족성, 정체성, 한 민족 통일성, 재한조선족의 현황 등을 다룬 내용들이 대다수다. 자료수집을 위하여 이것 저것 많이 찾아보면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이라는 것에 놀랐다. 한국인들에게 영상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다. 조선족의 역사와, 조선족들이 어떤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많이 홍보하고 싶다. 작품으로 이런 걸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기존에 나왔던 논문식의 장황하고 엄숙한 거 말고, 다른 걸로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로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가족사를 풀어놓고 우리 민족 역사를 더 쉽게 공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조선족은 중국현대사와 조선의 현대사가 결합된 민족이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민족이다. 그래서 이런 설정을 해보았다. 나의 가족과 친구의 가족을 인물 설정을 해서 비교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과 한국의 88올림픽을 비교하는 방식.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친구의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같은 곳이다. 나와 친구는 각자 자신의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또 하나의 역사고리를 갖고 있다. 이런 것을 그래픽, 사진, 동영상, 등 전시를 통해 대조적인 시각으로 보여준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전공에 더 열중해야겠다. 너무 힘들어서 디자인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몸에 배어있다는 걸 느꼈다. 한국이나 중국 어느 한 곳에 매여있지 않고 글로벌한 시각과 마인드로 발전하고 싶다. 두 번째 목표는 ‘세움’ 공동체의 일에 더욱 정력을 기울이고 싶다. ‘세움’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 흥미로운 일들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세움동아리도 만들고 다양한 활동, 행사를 조직하고 싶다. 청년들이 맴버여서 신선한 아이디어뱅크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는, 그런 단체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세 번째 꿈은, 나를 통해 주위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다. 고향에 가서, 고향을 위해서도 뭔가를 하고 싶다. 자그마한 변화일지라도 그것이 언젠가는 나비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의 마감에 그녀는 청년공동체 세움에 대해 특별히 홍보를 했다. “청년공동체 세움의 취지는 사람을 세우고 문화를 세우는 것입니다. 청년들에게 플랫폼과 네트워크를 하는 공동체죠. 기성세대의 것을 본받되, 청년들 스스로가 나서서 청년들의 힘을 합쳐서 세계적인 평화를 이룩하자는 글로벌한 마인드의 단체입니다.” 자체로 하는 행사도 있고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와 같이 하는 것도 있는데 중국조기유학생들, 각 대학교 중국유학생들에게 맨토링을 하고 있고 문화특강을 개최해 글짓기 특강을 하고 있다. 청년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며 인재 영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운영진에는 북경, 상해, 서울, 서주, 남창 등 여러곳의 청년들이 있는데 위챗 회의를 통해서 소통을 하고 운영방침을 토론한다. 이제는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서 나설 시기이다. 전 세계 청년들의 평화와 발전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싶다. /곽미란
    • 사람들
    2016-12-06
  • 세계로 향한 중국 대륙의 조선족 오페라 여왕 김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만(金曼)-그녀는 중국의 저명한 표현예술가이자 “오페라 여왕”으로 등극한 조선족 여가수이다. 그녀는 노래를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천부적인 재능과 자신의 피 타는 노력으로 중국 오페라무대에서 제3대의 “강누나(중국의 여혁명가 강설금)”역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중국 오페라 계를 들썽하게 하였으며 제10기 중국 전국 정치협상회 위원, 전국 정협 과학·교육·문화·위생·체육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었다. 현재 김만은 중국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원 원장으로 중국 오페라분야에서의 인재양성 및 수준급 작품창작을 위해 모든 심혈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만- 그녀야말로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사업가임에 분명하다. 꿈의 스타트는 고향의 산간벽지서 어릴 때의 김만은 흑룡강성 소흥안령(小兴安岭)의 평정산(平顶山)하의 아름다운 산간벽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그 곳의 모든 것은 황홀하기만 했다. 푸른 산정을 맴도는 흰구름, 돌돌 흐르는 시내물과 울창한 임해- 모든 것은 그녀로 하여금 절로 흥얼거리게 하였으며 때로는 목청껏 외치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김만은 성악가로 될 수 있는 자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소녀의 첫 꿈 역시 가수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저는 아주 수수한 가정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의 기억에 따르면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기에 전 장차 커서 의사로 되려는 생각을 많이 가졌지요. 그러다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전 세계명작 ‛잔 다르크(1412년 1월 6일 ~ 1431년 5월 30일),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란 책을 읽고 나라를 지키는 혁명가로 될 꿈을 가졌으며 또한 과학가로 될 이상도 가졌었지만 예술가로 될 생각은 없었죠. 하지만 노래와 춤은 역시 저와 연분이 있은 모양이었고 운명은 결국 저로 하여금 예술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죠. 현재 저는 제가 예술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중국의 오페라사업에 투신한 것에 대해 행운으로 느끼고 있어요.” 오페라 무대에서의 “강누나”- 김만 1981년 김만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정치부 문공단 시험에 합격되어 자신의 예술생애를 시작하였다. 한편 이 해에 그녀는 베이징 수도체육관에서 열린 제4회 “가요의 벗 음악회”에서 저명한 조선족 작곡가 김봉호가 작곡한 가요 ‛금실 북과 은실 북(金梭和银梭)’을 불러 일거에 중국 음악계에서의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또한 중국의 유명한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주인공으로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981년- 예술계에 갓 입문한 김만은 첫 스타트부터 중국 국내의 유명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가 있었다. “1984년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제3차로 오페라 ‛강누나’을 무대에 올릴 때 전 재차 주인공으로 선택받게 되었죠. 당시 시간이 긴장하고 임무가 막중하였기에 전 20여 일간이나 두문불출하고 주인공이 맡은 노래와 극본대사를 익히기 위해 연습을 하고 또 하군 하였어요.” 그 20여 일이 지난 뒤 김만은 재차 ‛강누나’역을 성공적으로 맡아하였으며 1981년의 공연에 비해 더욱 성숙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이 성과로 하여 1991년 중국 희곡계의 최고상인 제9회 매화상을 받아 안기도 하였다. 한편 이 오페라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김만은 늘 격정에 넘치군 했다. 그만큼 오페라 ‛강누나’가 그녀한테 주는 영향은 아주 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 오페라의 매 인물과 내용에 대한 감수가 깊어질 수록 전 무대에서의 강설금에 대해 끈끈한 정을 느끼군 했어요. 강설금은 견정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 혁명가인 한편 온화하고 위대한 어머니기도 했어요. 그의 매력은 늘 저를 감화시키군 했으며 그의 정신은 늘 저를 고무하기도 했었죠.” 무대를 떠나 단연히 “하해” 오페라 ‛강누나’에서의 성공은 김만한테 예술생애에서의 크나큰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도전을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녀 김만은 단연히 “하해”의 길을 선택했다. “지난 세기 90연대 초기 전 공군정치부 문공단을 떠나 ‛하해(下海)’를 결심했어요. 제가 무대를 떠난 건 예술과 작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저의 예술생애에서 한번 중국오페라의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절 미쳤다고 했어요. 공군정치부 문공단은 저의 큰 밥그릇과 같은데 그곳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느냐 말이었어요. ‛하해’- 그것으로 하여 확실히 저의 위치가 180도로 달라졌어요. 공군문공단에서의 저는 스타였으나 그 곳을 떠나니 일반인에 불과했어요. 하지만 저는 꿈을 위해 악전고투하기 시작했어요. 음식점을 차려보기도 하고 부동산업계에 투신하기도 했으며 또한 국외의 대형그룹과 손잡고 일을 벌여 보기도 했었죠. 이 과정에 그야말로 인생의 희노애락이 많았었요.” 중국 대륙의 고풍격예술 전승인으로 2000년에 이르러 김만은 자신의 자금을 털어 문화산업회사를 차림과 동시에 오페라 “강누나”를 개편하여 한차원 업그레드화하였다. 한국의 뮤지컬과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었다. 이는 합창, 중창, 독창을 음악주체로 하였고 부드럽고도 소박한 무드속에서 “강누나”에 대한 예술적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었다. 김만은 뮤지컬의 형식과 오페라 “강누나”의 기질을 아주 유기적으로 잘 배합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미 무대에 올렸던 작품을 재현한다는 자체가 실패작이라고 하면서 많은 질의를 던졌어요. 하지만 저는 우선 ‛강누나’란 오페라에 대해 아주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거든요. 다음으로 전 중국오페라의 발전과 변혁을 위해 형식을 창신하고 내용을 잘 짜면 역시 상상밖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확신하였어요. 이전에 공군정치부 문공단에서 공연할 때면 대부분 티켓을 선물하였지만 저희들 문화산업회사에서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티켓을 판매하였죠. 그리고 전통오페라는 배우와 악사가 많았고 게다가 무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원가가 들어갔지만 뮤지컬 형식으로 작품을 만드니 원가가 적게 들었어요. 또한 전 적지 않은 생기발랄한 젊은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하기도 하였으며 2년간 10여 만위안의 투자로 근 100회의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며 원가를 뽑고도 얼마간의 이윤을 올리기도 했어요. 이는 당시로서는 진짜 쉽지 않은 일이었죠. 후에 우리는 이런 모식으로 또 ‛당의 딸’이란 뮤지컬 형식의 작품 등 여러 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아주 좋은 사회적 효과를 보았었요.” 김만- 그녀가 시장경제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낸 독특한 무대는 사회 각 계의 뜨거운 찬양을 받았으며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김만을 “대륙에서 선참으로 고풍격의 문화산업을 창출해낸 사람”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조선족 원장 김만-오페라 공연 본분 지키며 중국오페라 발전시킨다 뮤지컬 형식의 무대작품을 성공시킨 동시에 김만은 적지 않은 우수한 오페라 배우들을 육성시켰으며 그들은 모두가 각 오페라 극단의 기둥배우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은 험난하고도 힘들었다. “문화산업회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훈련할 때 저는 그들 모두가 성악기초가 있으리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달 동안 정도 훈련시키면 모두 무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여겼어요. 하지만 실제로 실천에 들어가니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학원생이 많은데다 그들의 수준차이가 컸으며 많은 학원생들은 클래식 창법으로 중국노래를 부를 때 발음이 똑똑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으며 또한 표현상에서도 팔다리가 조화가 되지 못했죠. 오페라란 복잡한 예술이기에 완벽한 산업고리가 있어야 해요. 오페라에는 큰 부분으로 이론연구, 음악창작, 극본개편 및 배우선택, 연출, 무대미술, 조명 등이 따라가야 하고 또한 작은 부분으로는 관리, 녹음, 악보출판, 음향제품 발행, 선전판촉 등이 있어야 하며 매 고리마다 동시에 움직여야 해요. 헌데 이전에 중국 국내에는 오페라 배우를 전문 육성하는 전업이 없었거든요. 이는 저로 하여금 오페라 학원을 세워 중국식 클래식 창법과 중국식 오페라를 발전시킬 야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김만의 생각과 베이징대학의 발전계획은 교묘하게도 일치하였다.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2006년 중국 베이징대학 학술위원회에서는 김만이 교부한 오페라연구학원 건립방안을 통과시켰으며 5년 뒤인 2010년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이 드디어 고고성을 울렸다. “우리가 이 학원을 세운 목적은 첫째 광범한 범위로부터 오페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고 둘째 중국오페라의 획기적은 발전을 가져오자는 것이었어요. 인재육성을 위하여 우리는 장일민(蒋一民), 대옥강(戴玉强) 등 국내외 우수한 성악가들을 교사로 초빙하였으며 우선 오페라 및 뮤지컬학부, 오페라사론연구학부, 오페라제작 및 관리 학부 등 3개 전업을 설치하였어요. 앞으로 우리는 계속하여 오페라창작, 연출, 무대미술 및 기술, 지휘 등 학부를 증설하여 비교적 완벽한 오페라 과학 및 교수과학연구 체계를 세울 타산이예요. 베이징대학의 우월한 학술환경하에서 우리는 이미 육속 ‛칭춘의노래(青春之歌)’, ‛전학삼(钱学森)’, ‛왕선(王选)’ , ‛송경령(宋庆龄) 등 작품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렸으며 올해 내로 이탈리아 로마에서 대형원형오페라 ‛무측천(武则天)’을 공연할 계획이예요,” 베이징대학 오페라연구학원 원장 직을 맡은 김만의 중임은 무겁고 압력은 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어떤 방면의 인재든 다 수요해요. 우리의 연구학원은 창립된지 금방 10년밖에 안되며 아직 성장기에 있어요. 때문에 사회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발전도 거듭해야 하는 두 가지 부담이 얹혀 있어요. 하지만 멀지 않는 장래에 베이징대학 오페라 학원은 부단히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대학의 영예를 빛내일 것이고 중국 오페라 계에는 긍정코 많은 우수한 인재들이 출현할 것이며 중국오페라 또한 언젠가는 꼭 세계정상에 오를 것이예요.” 그렇다! 조선족 여원장 김만의 꿈 역시 언젠가는 꼭 현실로 도래할 것이다.
    • 사람들
    2016-09-11
  •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가야하반에 자리 잡은 연변주 왕청현에는 평생을 민간무용과 함께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조선족 무용에 대한 사랑과 집념으로 천부적인 장끼를 서슴없이 발휘하여 조선족 무용을 계승, 발전시켜 왕청은 물론 연변에서 '민간무용가' 로 인정받는 여성이 있다. 그가 바로 올해 71세에 나는 김춘복씨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김춘복씨는 1946년 왕청진 삼합촌의 김씨네 가문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1953년에 왕청 2교를 졸업하고 1963년에 왕청 2중을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민간문예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치원에 다닐 때 그는 민간무용 연출인 어머니의 등에 업혀 야학실에 다니면서 무용을 직접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민간무용에 대해 심후한 감정과 애착심을 가지게 되었다. 중, 소학교를 다니면서 반급에서 줄곧 문예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 유치원 교양원으로 사업하면서 합창, 아동무용, 동화극을 창작해 어린이들에게 배워 주었다. 그리고 여유 시간이면 사그라져 가는 조선족 무용을 살리기 위해 문예공연대를 설립하고 수십차의 문예공연을 조직, 현성내 각 기업, 사업단위와 중소학교들에 조선족 무용을 널리 보급함으로써 왕청현의 군중문화예술이 다시 활기를 띠게 하였다. 생활속에서 무용소재를 모색 1964년, 촌유치원과 촌문예대가 설립되면서부터 그녀는 안무를 담당하고 무용창작을 본격적으로 해나갔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사소한 장면도 그냥 지나치는 습관이 없고 늘 머리속에 춤을 생각하고 살았다. 어미제비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제비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면 제비춤이 생각났고 남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허투루 볼 때가 없이 그 속에서 알맹이를 배워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동집게 같은 예리한 감각으로 작품의 령혼을 포착하면서 연변 특색이 짙은 무용을 창작해 대중들과 호흡을 나누었다. 대중의 반응을 피부로 느끼기 위해 그는 공연 때마다 무대 뒤에 숨어 관람석을 관찰하면서 관람자들의 표정과 박수를 통해 자기의 작품에 대한 인정을 스스로 느끼군 하였다. 하기에 53년 동안의 무용창작에 대한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면 그녀는 목이 꽉 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야무지게 펼쳐 나갈 수 있은 것은 그녀만의 신조 외에도 2006년에 한국에서 "전통공연문화학교"의 조선족무용기본공반에 입학해 한해에 학비 80만원씩 내면서 고급반까지 졸업할 수 있도록 그를 대신해 밥을 짓고 옷을 씻는 등 전부의 가무 일을 전담해준 남편 정창도씨가 그녀의 예술 생애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으로 되었다고 한다. ▲ 왕청현 노년상모춤예술단 김춘복씨의 인생스토리 사심없는 노력은 사회의 인정을 53년 동안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창작한 무용 "장화꽃", "숲속의 아침", "장백산아래 우리집", "슬기로운 우리민족", "붉은해 변강비추네" 등 민족특색이 짙은 100여가지 무용들은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았다. 김춘복씨의 사심 없는 노력은 각급 정부와 사회의 호평도 받았다. 칠순을 넘긴 김춘복씨는 취득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도 왕청현노년상모춤예술단에서 조선족 문화예술을 계승, 발전시키는 보람찬 사업에 온갖 심혈을 몰부어 가면서 노후를 보람 있고 아름답게 수놓아가고 있다.
    • 사람들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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