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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 사람들
    2020-10-20
  • 中 성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전설의 조선족 원로가수 방초선. [동포투데이] ‘처녀의 노래’, ‘사과배 따는 처녀’, ‘베 짜기 노래’,‘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붉은 해 변강 비추네’ 등 명곡을 불러 이름을 떨친 원로가수 방초선 선생은 지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국가 1급 성악가인 방초선 선생은 연변에서 북경, 전국, 나아가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높은 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무원에서 수여하는 “정부 특별예술가”칭호를 받은 방초선 선생은 “중국 예술가 사전”과 “중외 여성 명인 사전” 등 사전에 약력이 수록될 만큼 전문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1932년 조선 김책시에서 출생한 방초선은 여덟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길림성 왕청현으로 이주했다. 마을의 꾀꼴새로 불리던 그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많은 외국 노래를 배우고 불러 늘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15살 나이의 방초선은 길동군분구 문공단의 선전대원으로 성장하였다. 1949년 연변가무단 전신인 연변문공단이 세워지면서 방초선은 연변문공단에 전근하여 독창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방초선은 연변가무단에서 화려한 데뷔를 했다. 1957년, 방초선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연환축제 음악콩쿠르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삐어난 목청과 춤사위로 방초선은 ‘처녀의 노래’로 수백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은상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 후 방초선 선생은 공장, 광산, 병영, 향촌 그리고 변방의 방방곡곡에 무수한 발자국을 남겼고 열정과 희망을 안고 북경 최고 음악학부에서 성악공부를 계속하였다. 방초선 선생의 음악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분을 말하면 인생 동반자인 남편 왕개평 선생이다. 1975년 방초선 선생은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중앙방송예술단에 전근되어 독창 가수와 성악교원으로 활동 분야를 넓혀갔다. 이 기간 방초선 선생은 북경, 연길 등 지역에서 개인 독창음악회를 가졌고 성악가인 남편 왕개평과 함께 북경, 상해, 남경, 중경, 연길, 카나다, 미국, 일본, 한국 등 국내외를 순회하면서 80차의 음악회를 개최했다. 많은 사람들은 방초선 선생을 보고 선천적으로 좋은 목청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는 한시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목소리 가꾸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방초선 선생은 음악은 자신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무대위에서 빛났던 그의 70여 년의 예술 생애를 돌이켜보면 실로 수많은 아름다운 멜로디들이 그의 고운 목청을 타고 ‘명곡’으로 탄생했다.
    • 사람들
    2020-09-20
  • “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사람들
    2020-06-06
  • "장장 60여년 축구와 더불어"
    ● 철 민 “나의 일생은 축구의 일생이다. 인생의 청춘기에 들어서서 축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 이 때까지 이르게 됐다.” 이는 중국 조선족축구계의 박만복 원로가 늘 입버릇처럼 외우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와 더불어 장장 60여년간 고집스레 한우물만을 파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박만복 원로의 축구생애를 단계로 정리해 본다면 대체적으로 네개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단계 : 선수로 뛰던 나날 왕청현 태생인 박만복원로가 전업 축구선수생활을 시작하기 전인 1953년 3월, 그는 과외축구팀에 불과한 연변 축구팀의 주장으로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 당시 연변팀은 그 경기에서 준우승을 따내 공화국 창건 이래 처음으로 중국에 연변이란 조선족집거지구가 있고 축구도 아주 잘한다는 이미지를 전국 각지에 심어 주었다. 그후 박만복은 중앙체육훈련반 축구팀에 선발됐고 뒤따라 인차 24명(조선족 7명)으로 구성된 제1기 중국 청년축구 유학대표단과 함께 헝가리로 향발, 유학시절에 중국 청년팀의 이름으로 루마니아, 폴란드, 동부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등 나라 축구팀과 자주 평가전을 치르군 했다. 특히 1955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와에서 열린 제5회 세계청년연환절 개막식 축구경기에서 박만복을 포함한 중국청년팀 수비라인은 그 탄탄한 수비력으로 하여 “깨뜨릴 수 없는 만리장성”이란 별호를 갖게 됐는데 그 중앙수비가 바로 박만복이었다. 또한 유학시기 박만복은 헝가리국가팀 감독으로부터 중국청년팀의 “로켓”으로 불리우게 됐고 귀국 후에는 북경팀의 선수로 뛰면서 1957년 전국축구갑급리그 우승과 1959년 제1회 전국운동회 축구경기 3등을 하는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리하여 1957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건장제를 실시할 때 중국축구계의 17명 동료들과 함께 건장칭호를 받게 됐다. 두번째 단계 : 축구팀 사령탑 잡던 나날 1959년 박만복 원로는 어느 한 경기에서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선수대오에서 물러나게 됐다. 그뒤 북경팀의 감독조리로 2 - 3년간 있으면서 일정한 경험을 쌓자 팀의 사령탑을 잡을 야망이 생겼고 따라서 우리 민족이 집거해 사는 연변의 축구부터 춰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하여 북경의 우월한 대우, 훈련시설, 개인발전전도 등을 그대로 뿌리치고 연변으로 달려왔는데 그 때가 바로 1962년 8월경이었다. 길림성축구팀의 사령탑을 잡은 박만복은 길림성팀 선수들이 속도가 빠르고 완강하고 체력이 왕성하지만 기전술이 차한 페단에 근거하여 유럽식기전술을 팀에 주입, 그 기전술을 당분간 받아물지 못한 팀이 1963년 전국축구갑급리그에서 강급해 을급으로 내려가는 불운을 지니긴 했으나 그 뒤 반복적으로 기전술응용을 교정한 결과 1964년에 인차 을급리그 2등으로 갑급에 올라왔고 바로 올라온 그 해인 1965년엔 끝내 중국조선족축구력사에서 휘황찬란한 전국축구갑그리그의 우승이란 전과를 올리었다. 또한 그해에 박만복 감독은 허경수, 정종섭, 당봉상, 김정식, 이두근, 유명복 등 6명 선수를 국가팀에 수송해 냈을뿐만 아니라 지운봉, 정지승, 동경춘 등 10여명의 건장도 육성해냈다. 그것은 박만복 원로의 감독생애에서 가장 눈부신 전성기었다. 그뒤 1971년 문화혁명의 가장 거센 폭풍우가 지나가자 박만복 원로는 재차 길림성 청년 3팀을 조직, 이 팀은 1973년 전국축구청년연맹전에서 4등이란 영예를 지니게 됐으며 그 시기에 염승필, 이승범, 전석기, 우근화 등 많은 우수한 선수들을 육성해냈다. 감독생애를 거치면서 박만복 원로는 도합 100여명의 우수한 선수와 10여명의 건장을 육성, 이는 중국축구 특히 우리 민족의 축구발전사에 있어서 거룩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번째단계 : 축구친목회 회장사업 맡던 나날 20세기 80연대에 이르러 중국축구의 발전템포가 빨라짐에 따라 조선족축구는 그 보급과 발전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박만복 원로는 조선족축구로 하여금 연변을 벗어나 동북 3성 및 전국에 보급해야 할 사명감을 안고 중국조선족축구친목회를 구상, 그 것이 바로 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가민정부에 등록된 국가1급체육사회단체(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유일한 체육단체)인 중국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이다. 친목회가 설립된 후 박만복 원로는 직접 그 회장직을 맡고 많은 사업을 했다. 우선 동북3성 각 지구에 친목회사업위원회를 설치하고 회원들을 적극 발전시키는 기초상에서 200여차에 달하는 축구지도원 및 심판원 양성반을 조직하여 조선족축구발전의 템포를 다그쳤으며 근 10만명에 달하는 조선족 청장년과 소년아동들을 축구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한편 중국조선족 근 100년사에 있어본 적이 없는 중국 전국조선족축구운동회를 5차에 거쳐 조직했으며 매차례의 경기 때마다 한국축구연합회의 여러개 팀을 초청하여 경험교류를 하군 했다. 지금 동북조선족 축구친목회에는 20여개의 분회와 1000여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는바 10년간 걸어온 그 자취마다에는 창시인의 한분이신 박만복 전임회장의 노고가 역역히 슴배어 있다. 네번째단계 : 축구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 박만복 원로는 고래희를 훨씬 넘긴 몸이다. 하지만 여전히 축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박만복 원로는 여전히 연변축구를 관심하고 있다. 은퇴 뒤 한시기 박만복 원로는 연길시에 장백축구학교를 세워놓고 축구후비력육성에 여생의 정력을 쏟다붓기도 했다. 당시 그 목적은 각종 원인으로 기회를 놓쳐 체육학교같은 곳에 가지 못한 축구인재를 받아들이고 키워주는 것, 그러한 취지로 세운 학교이기에 박만복 원로는 돈벌이보다는 축구인재발견에 모를 박았으며 그 학교는 당시 상급 해당부문의 비준을 거쳐 정식으로 직업고중행열에 들어서기도 했다.한편 박만복 원로는 지금도 현재의 연변팀을 몹시 관심하면서 경기장을 자주 찾는가 하면 구단내에 존재하는 문제점도 지적하고있으며 또한 가끔씩 매스컴에 축구에 관련된 글도 써서 발표하군 한다. 중국축구 및 조선족축구의 발전을 위해 사심없이 일해온 중국축구계의 원로이며 도사이신 박만복 원로 – 그이가 걸어온 발자취마다에는 그렇게도 자랑찬 긍지로 주렁져 있었다.
    • 사람들
    2020-01-25
  • 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제 77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미국의 뉴스전문방송(CNN)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의 골든 글로브 상은 정치대화의 무대로, 상을 발급하는 이와 수상하는 이 모두 여러 차례 목전의 국제 대사건들을 언급, 예하면 호주의 산불, 악천 기후의 위기, 여성의 낙태권 및 폭발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등이었다. 수상자들을 놓고 보면 브래드 피드가 영화 <할리우드 과거사>로 최우수 조연상을, 영화 <체르노빌>이 재차 최우수 한정 드라마(限定剧)로, <어리 광대>가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기생충>이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획득하였다… 이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은 아콰피나(Awkwafina)였다. 아콰피나는 코미디/뮤직 영화 <그녀한테 말하지 마(Do n't Tell Her)>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여 골든 글리브 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아콰피나는 그녀의 예명이고 진짜 이름은 린자쩐(林家珍)이며 1988 년 미국 뉴욕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콰피나는 4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줄곧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생활,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부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콰피나는 트롬벳을 배우기 시작,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6세 때 그녀는 영어단어 <어색한>에서 파생된 아콰피나란 이름을 자신에게 달아주면서 남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아콰피나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북경 언어대학교에 진학하여 2 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어 아콰피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와 올 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 및 여성연구를 전공, 졸업 후 여러 미디어업체에서 근무했다. 아콰피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지만 기실 랩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3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랩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튜브에 많은 노래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2014 년과 2018 년 각각 2 개의 개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랩 외에도 아콰피나는 배우로 경력을 바꾸었으며 영화 <놀라운 사랑(Amazing Love)> 및 <제동수 2 (Bravesman 2)> 그리고 <피크에 닿다(Reach the Peak)> 등에서 영화배우로서의 기질을 출중히 보이었으며 중국인 감독 왕즈이(王子逸)가 만드는 영화 <그녀에게 말하지 마(Do n't Tell Her)>를 촬영한 후에는 29 회 고담 독립영화상 최우수 여주연상을 받아 안았고 코미디/ 뮤직 영화에서 최우수 여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는 코미디/뮤직 영화 최우수 여배우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상까지 추켜올렸다. 아콰피나는 토크 쇼 사회자로 활동, 류위링(刘玉玲)의 뒤를 이어 <토요일 저녁 현장>을 사회하는 두 번째의 중국계 여성으로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반격 실제로 아콰피나의 많은 랩과 영화 및 TV 작품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공동체의 고정관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12년 아콰피나는 첫 번째 랩의 노래를 촬영, 이 노래의 초점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아시아 소녀들의 반항이었다. 2016 년 6 월 오카리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마르리트 조(Margaret Cao)와 협력하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의 고정관념을 조롱한 단일 <녹차>를 출시했다. 아콰피나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후 그 영화<그녀에게 말하지 마>를 보자 그 영화의 내용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 혼란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CNN의 보고서에 따르면 5일 저녁 무대 뒤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아콰피나는 “놀랍지만 아시아인이 더 많이 이길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콰피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후 처음으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2 년간 지명된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이다. 2019 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이자 <판타스틱 러브>의 배우 우텐민(吴恬敏)은 코미디/뮤직 부문 최우수 여배우로 지명되었지만 불행히도 최종 낙선되었다.
    • 사람들
    2020-01-0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중국 가요계에 또 한명의 조선족가수 탄생?
    [동포투데이] 5월 28일 저녁, 안휘위성(安徽卫视) 농민노래자랑 리얼리티쇼 “중국농민가요대회(中国农民歌会)” 첫 회가 방송을 탔다. 북부 구역의 동북, 내몽골 등 지역에서 온 선수들 중 연변 화룡시 팔가자촌에서 온 조선족 박혜자(朴慧子)가 아담한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왕봉의 “바람처럼 자유롭게(像风一样自由)”를 불러 관중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박혜자의 뛰어난 가창력에 채국경(蔡国庆), 텅거얼(腾格尔), 봉황전설(凤凰传奇)등 맨토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텅거얼은 박혜자씨를 “작은 대포”와 같은 목소리를 갖고있다고 칭찬했다. 박혜자씨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졸업생이다. 2012년 음악교육전업을 졸업하고 예술양성학원에서 일년간 피아노를 가르쳤고 후에는 연변을 떠나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며 최근에 집안사정때문에 연변에 돌아왔다가 지인의 소개로 이 프로에 참가하게 되었다.
    • 사람들
    2015-06-02
  • 김순옥 화백, 휴머니즘과 자연주의 감성을 화폭에 담아 세계 일주
    [동포투데이] 휴머니즘과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행복을 표현해온 김순옥 화백은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파라과이를 중심으로 중남미 교류는 물론 미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전역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하면서 문화외교관으로 인정받아왔다. 김순옥 화백은 한국문화를 널리 알린다는 사명감을 바탕으로 본인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외 유명장소에서 김 화백의 작품 소장 김 화백의 작품은 해외의 국립미술관, 박물관 및 주요기관과 공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내에도 서울시립미술관, 전주역사박물관, 국회, 청남대, 경희대, 서울대병원 등 주요장소에 소장되어 있다, 그중에 외교부에서 소장하여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인터뷰를 한 배경으로도 유명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 소나무(700호)는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의 굳건한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유연성 있게 상대와 협상하면서도 원칙 있게 국익을 추구하는 외교관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이 그림 외에도 맥(脈 120호)은 썩거나 찢어지지 않는 전통소재인 닥나무를 활용, 자연주의 작가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휴머니즘 작가로 발전해 가는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경희대에 소장되어 있는 이과수폭포(2000호)와 금강산(2000호)는 거대한 자연의 모습을 웅장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왔다. ◇재료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운 작품 활동 김순옥 화백은 오래전에 수년간 몰두하다 손목 인대손상으로 접어뒀던 입체작업을 최근에 다시 시작하였다. 재료의 벽을 뛰어넘어 평면과 입체작품을 동시에 작업하는 김 화백의 작품에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게 스며 있다. "창의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재료의 활용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상을 참신한 소재를 통해 아름답게 승화시키는데 열정을 다하고 있는 김 화백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기본적인 베이스 아래 색의 조화 및 배려·존중을 통하여 작품의 완성미를 더하는데 노력해 오고 있다. ◇남미의 정열을 담은 대표작품 '이과수 폭포', 그림은 나의 운명이자 열정의 원천 평화의료재단 이사로 재직 당시 작품판매수익금을 바탕으로 스와질란드에 자선병원을 설립,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환자들을 위한 무상 치료 환경을 마련한 것은 그녀에게 있어 특히 의미 깊은 활동이 되었다. 또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전시회 개최와 지난 2005년 대한민국 독도전 등은 그녀에게 잊지 못할 기억 중 하나라고.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데 몰입하다 보면 자칫 주위에 소홀해지고 고립될 수도 있지만 김화백은 쉼 없이 움직이며 늘 주변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그림은 저에게 있어 운명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일주하며 해외전시는 계속할 것 김 화백은 동양인 최초로 파라과이 대통령궁에서 초대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으며 중남미 가장 큰 전시장소인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 초대개인전, 뉴욕 유엔본부와 워싱턴 국립박물관 등에서의 초대개인전을 통해 세계에 널리 그의 작품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에서 전시하며 한국문화를 알리겠다는 김 화백은 한류의 품격을 높이며 세계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순옥 화백은 Norte대학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홍익대학교 겸임교수, 경향신문사 갤러리관장과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현재 서울시 미술심의를 맡고 있으며 해외교류작가회 대표로서 세계 일주를 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사람들
    2015-06-02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③]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 고양에 앞장서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윤동주시인은 천고절창의 주옥같은 시들을 창작하여 우리한테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윤동주의 삶과 그 작품은 시공간과 여러 계층을 초월하여 현대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 김혁은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에 심취되고 윤동주에 관련된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두고 “생래적(生来, 天生的)”에 가깝다 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중국 연변 용정에서 태어나고 또 학창시절을 포함하여 스무살까지의 많은 시간을 용정에서 보냈던 김혁,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후에 조선족 최초로 윤동주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창작하고 윤동주 관련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그는 용정에서 어려서 신안소학교(지금의 북안소학교)를 다녔는데 그 전신이 바로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학교였다. 그후 용정중학에서 초중과 고중을 마쳤는데 용정중학교는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 대성, 동흥 등 학교가 합병한 학교로 지금 교정에 윤동주의 시비가 우뚝 서있다. 이렇게 윤동주와 ‘지연’, ‘학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기자로 뛰면서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 학술회, 시비 건립, 윤동주 관련 학술저서 출간, 관령 활동들을 빠침없이 취재하였고 윤동주를 중국에 맨 처음 알린 오오무라 마스오, 윤동주의 시를 일본에 번역한 아이자와 가쿠,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녀사 등 관련 친지, 연구가들도 지난 세기90년대에 이미 만나 많은 교류를 했다. 시인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오래전에 벌써 윤동주 관련 카페도 개설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논문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딴 된 사람만도 50명이 넘고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론문도 수백편이 나왔다. 평전이나 위인전기물도 여러 권 나왔다. 이렇게 논픽션 작품은 많이 나왔는데 그에 비해 픽션작품 즉 소설과 같은 창작물은 전무했다. 너무나 알려져 있는 시인이었지만 그 높은 위상 때문이었던지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작품화한 사례가 극히 적었다. 소설로는 1992년 경, 한국에서 방송드라마의 시나리오를 개작하여 한부가 나왔다. 그후 구효서와 이정명에 의해 나왔지만 작가 김혁이 장편 “시인 윤동주”를 2010년에 발표한 후의 일이다. 그리고 윤동주의 숨결은 현재에도 용정의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이 곳에서의 윤동주에 대한 추모와 연구작업은 미비한 상태. 그같은 공백들은 시인 윤종주의 고향에서 태어나고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에서 공부했던 작가 김혁에게 그 어떤 사명감과 창작의 충동을 주었다. 작가 김혁은 본격적으로 윤동주를 소설화 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연변작가협회에는 “계약작가”라는 창작제도가 있다. 작가들이 창작기획서(스토리와 창작취지)를 작성해 제출하면 연변의 유명 대학교수들과 평론가, 원로작가들로 구성된 평심단이 제출된 많은 기획서들 중에서 가능성 있는 작품을 엄선해내 1년간 창작기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김혁은 윤동주에 대한 스토리만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조선족 작가들중 유일하게 두 차례나 이같은 계약작가에 선정되었다. 이렇게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가 2010년 조선족의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1년간 연재되었다. 한편, 지난해 9월에는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사단법인 “용정·윤동주연구회”를 발족시켰다. “용정·윤동주연구회”는 조선족의 작가, 학자, 교직원들로 무어졌으며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선양하는데 그 취지를 두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내 삶속에 깊게 들어와 있다”고 작가 김혁은 말한다. 윤동주의 민족애와 문학정신 고양에 앞장서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으로서의 김혁은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윤동주가 선양하려 했던 민족애와 문학정신을 널리 계승, 발양하기 위해 지난해 9월, 용정윤동주연구회를 설립한 후 짧디짧은 시간내에 많은 일들을 해왔다. 2014년 12월 20일,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서 윤동주 탄신 97돐 기념행사를 가졌고 2015년 2월 16일에는 윤동주 옥사 70주기를 기념하여 “항일 시인 윤동주 70주기 기념행사”를 가졌다. 또 용정·윤동주연구회의 편찬으로 문화총서 “룡두레”를 출간하기도 했다. 용정·윤동주연구회의 년중행사의 중요한 일환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펴내게 될 이 문화총서 “룡두레”는 문단의 각 장르에서 뛰어난 실적을 올린 작가들과 대학 교수들로 편집진을 뭇고 그 첫 기를 윤동주 추모특집으로 꾸몄다. 향후 지속적으로 출간하게 될 “룡두레” 총서는 윤동주를 연구하고 그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잇는 문헌들과 회원들의 다채로운 창작품들들을 게재할 뿐더러 용정의 역사, 룡정이 배출한 인걸들을 조명하고 진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공동체의 이슈와 현안에 대해 진맥하며 나아가 우리 민족의 비전에 대한 제안 등의 알쭌한 내용들을 여러 코너를 개설해 다양한 문체로 꾸며나갈 계획이다. 올 4월 4일, 청명을 맞아 장춘에서 꾸리는 조선족의 순수문학지 “장백산” 잡지사와 손잡고 윤동주의 묘소를 새롭게 단장했다. 이어 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을 윤동주의 자취가 서린 용정의 자택 자리에 오픈, 오픈식을 가지고 본격적인 사무에 착수했다. 뿐만 아리라 용정·윤동주연구회에서 주관, 운영하는 사이트가 현재 개설중에 있다. 이 사이트는 윤동주에 대한 연구, 선양과 더불어 그 의미를 넓혀 용정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조명하고 오늘의 이슈와 뉴스를 시효성 있게 다루며 중국조선족공동체의 비전을 알리는 뉴스성, 전문성 종합사이트로 거듭나려 한다. 이제 용정·윤동주연구회 성원들로 구성된 역사답사팀이 본격적으로 역사답사에 나선다. 윤동주의 발자취가 어린 명동, 나아가 조선족역사의 “박물관” 격인 용정 유적지에 대한 계획적인 답사다. 보름에 한번 꼴로 정규적인 답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김혁은 밝혔다. 또 조선족문학의 순문학지인 “도라지” 잡지사, 문화종합지 “문화시대” 등 잡지들과 손잡고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원 특집을 마련했다. 금후에도 여러 간행물과 손잡고 회원들의 우수한 문학작품들을 그에 걸맞는 우수한 지면에 소개할 타산도 해본다. 현재 연구회 회장 김혁이 창작한 조선족 최초의 “윤동주평전”이 대형문학지 “장백산”에 연재중이다.올 하반년에는 윤동주를 위한 인물연구서 “윤동주 코드”를 출간하게 된다. 이 외에도 해당 부문과 손잡고 윤동주 백일장, 윤동주 시랑송대회 등 유익한 행사들을 대거 펼쳐 나갈 예정이다. 에필로그 현재 김혁은 30년 가까이 근무하며 지내왔던 자치주 수부 연길시를 떠나 고향 용정으로 돌아왔다. 윤동주 시인의 용정자택 자리에 앉힌 연구회 사무실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경쟁과 명리만이 난무하는 도시에서 탈출하고 싶었고 수십년 내내 문인들의 “문인상경”의 풍토로 얼룩진 문단에서 탈출해 참된 작가의 기본적인 자세를 갖추고 싶었다. 또 중국조선족 역사와 문화의 발원지인 용정에서 조선족의 역사를 직접 밟아보면서 관련 연구물과 작품 쓰기를 창작성향으로 삼고 십여년간 매일 꼬박 십여시간 가까이 창작과 독서를 견지하고 있다. “종당에는 중국조선족의 생성에 대한 호흡이 긴 소설, 이주와 정착, 개척과 항일, 건국과 ‘문혁’과 개혁, 출국과 이산의 수백년의 역사를 대하소설로 창작하는 것으로 만년을 장식하고 싶다”. “진정성을 가지고 영혼의 울림이 있는 큰 글을 쓰고 싶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아닌 항상심(恒常心) 하나 가슴에 품고 길을 가려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민족작가’라는 타이틀로 남고 싶다. 단지 유행을 쫓는 소설가나 칼럼니스트가 아닌 역사에 천착하고 민족을 위해 한 목청 내였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 그의 창작에 대한 지론이다. 김혁 그의 30여년의 작가생애, 그간 그는 실로 우리들 앞에, 우리의 역사 앞에 너무나 많은 작품들을 펼쳐보였고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해왔다. 또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오늘도 쉼모르고 달리고 있다. 재중동포 작가 김혁, 조선족 문단의 갈피에 우렷이 남을 중후한 큰 작가의 앞날을 기대해 본다.
    • 사람들
    2015-06-01
  • 미소가 아름다운 김춘희! 그녀는 우리가 몰랐던 쥬얼리전문가
    [동포투데이] 20여년간 한길만 걸어온 김춘희! 그녀는 우리가 몰랐던 조선족 쥬얼리전문가입니다. 조선족사회에서 외면당한 한 '우물'을 20여년간 파는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이런 명언이 떠오릅니다. "성공은 높은 점프도 긴 점프도 아니다. 성공은 마라톤의 발걸음들이다.'...그녀 김춘희(41세)씨가 바로 이 성공의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994년 연변대학 리공학원 기능학과 귀금속전문학과를 다닌 그녀는 그때 배운 전문지식을 이순간까지 놓은적 한번도 없습니다. 한창 려행업, 외국어학과, 컴퓨터학과, 회계학과 등등이 인기학과라고 온 중국이 떠들썩하는 90년대에 김춘희씨는 오히려 귀금속전문학과를 선택했고 그 선택에 따라 오늘까지 달려왔습니다. 미래에 대한 100%의 확신이 선것은 결코 아니였습니다. 먼 바다길에 나선 항행사처럼 예측할수 없는 삶의 '바다길'을 그녀는 오직 성실, 노력, 근면함으로 선택을 반복하면서 조심스럽게 헤쳐나왔습니다. 언제 부딛칠지 모르는 삶의 "암초"를 내심 두려워하면서도 한걸음한걸음 열심히 걸어왔습니다. 참으로 참답게 한발한발 걸어온 그녀였습니다. 2000년 류학 떠난 남편 따라 한국으로간 그녀는 자신의 배운 전문지식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전세이백화점 쥬얼리전문점에 취직한 리유도 쥬얼리탐구를 위한것이였습니다. 귀금속세공, 보석감별을 배웠던 그녀였기에 대전세이백화점에서의 8년동안 근무에서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매니저직을 마무리로 그녀는 8년동안 머물었던 쥬얼리전문점을 떠나 2008년 귀국하면서 그녀는 차츰 작품연구에 몰입하게 되였습니다. "모든 준비는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작품만을 연구하고 진주리폼을 하면서 꾸준히 작품만 완성했습니다. 그러다가 번화한 백화점이 아닌 조용하지만 나름 공방으로 리용 가능한 신세기광장 11층 33호에 소은방쥬얼리디자인작업실을 오픈하게 되였습니다. 첨에는 아는 지인분만 찾아오는 작업실이였습니다. 지금은 동호회도 운영하면서 차츰 고객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혼수장만하는 분들도 저의 작업실에 찾아오셔서 진정한 명품을 구입하시기도 하고 또 제가 여러가지 문의하신 전문지식을 알려드리기도 합니다. 돈보다는 쥬얼리에대하여 우리 조선족들이 좀 더 많이 알고 정확하게 알기를 바라는게 제 소망입니다. " 연변! 쥬얼리문화전파에 평생을 기여할터 "연변 쥬얼리는 아직 원점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남방의 상인이나 한국인들이 하는게 그게 전부인데다가 연변조선족분들은 쥬얼리를 마냥 어려운 상식으로 알고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알아야 하는 쥬얼리지식마저도 우리조선족들은 모르는 실정입니다. 비싼 진주목걸이는 좀 더 이쁘게 착용하면 미적효과를 극대화시킬수 있지만 그냥 년세가 지극한 로인분들이나 착용하는걸로 압니다. 안타까울때 많습니다. " 맹목적인 고가구입을 반대하는 리유도 바로 그것이였습니다. "기본상식이라도 알고 사면 사기를 당하는 일이 적지만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가격에 따라 맹목적으로 구입을 하면 손해를 보는것은 조선족들입니다. " "혼수구입하는 분들은 돈을 아끼지 않더라구요. 관련 쥬얼리지식은 거의 백지라고 봐야하죠. 거금을 쓰면서 준비하는 혼수쥬얼리인만큼 먼저 기본상식이라고 알고 구입을 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금만 신경쓰고 조금만 귀기울이면 충분히 가능한 지식습득이니 말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에 찾아온 고객들에게 커피 한잔 드리고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재를 방불케하는 그곳은 쥬얼리를 학습하는 공부방이기도 합니다. 진주관련에 질문을 하자 막힘없이 진주 종류와 간단한 구별법, 진주제품 관리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그녀입니다. 천연진주, 양식진주, 모패진주, 모조진주 우리가 일상에서 몰랐던 용어들이 쏟아져나옵니다. 김춘희씨는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하게 설명합니다. "상식이 번거로운것 같지만 한번두번 자주 들으면 듣기만 해도 금방 알수 있는 상식들입니다. 저의 작업실이 신세기 11층 33호에 자리를 잡은것도 바로 그 리유입니다. 일보러 나오셨던 분들이 다리쉼도 할겸 물 한잔 마실겸 저의 작업실에 들려 쥬얼리관련 이야기도 듣는 기회를 교통적으로 보다 편하게 만들어들이고저 하는데 있었습니다. 이젠 입소문을 타서 꽤 많은 분들이 찾아오십니다. 쥬얼리를 모르는 분들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찾아오셔서 쥬얼리상식을 자신의 지식으로 만들어서 일상에 피해가 없고 더 잘 활용하시길 진심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작업실 이름에도 그대로 묻어납니다. 소은방이라는 이름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여있습니다. "소박한 은혜가 사방에 날리다" 김춘희씨는 큰 욕심이 없다고 합니다. 또 실제로 소은방쥬얼리작업실에 다니셨던 고객분들과 상담을 받아본 분들은 그 부분에 대하여 인정을 합니다. "돈이라는데 초점을 두었다기보다는 그 분야를 즐기는 편이 더 적절한것 같습니다. 정직하고 따듯하게 알려주고 쥬얼리관련 무료상담도 해드립니다. 혼수예물과 진주제품 위주로 주로 맞춤 주문,판매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 맞춤 주문, 판매에 대하여 김춘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객들에게 거품가가 없는 가격을 제시할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름길입니다. 소자본창업이라는 장점도 갖고 있지만 깔린 제품이 많다보면은 거품가격을 선정할 확률이 높습니다. 금, 은, 보석쥬얼리 제품을 판매하지만 주료 맞춤 주문 판매를 하는 리유는 불필요한 자본류실을 줄여 고객부담을 확 줄일수 있을뿐만아니라 천차만별이 고객들에게는 맞춤제품이 최상의 선택이기때문이지요." 오도가다 한번쯤은 발길을 돌려 쥬얼리DTY설계,제작, 수리, 리폼, 리셋팅 분야에서 월등한 전문기술력을 지낸 조선족 그녀 김춘희 소은방쥬얼리작업실(위챗 18943365900)에 찾아가보세요. 누구든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쥬얼리DTY설계, 제작하여 나만의 쥬얼리를 만들어보는것도 삶의 묘미는 아닐까 생각듭니다. 한우물만 판 조선족쥬얼리전문가 그녀가 착한 심성으로 연변사람들에게 다가온건 우리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행운이고 행복인것 같습니다. 하물며 평생을 쥬얼리문화전파에 올인한 그녀이지 않습니까? 20여년전 확신이 서지 않았던 귀금속전문학과를 전공했던 20살 애숭이 처녀가 지금은 40대 아름다운 녀인이 되여서 조선족들에게 쥬얼리문화를 정확하게 전파하고 있습니다다. 긴 세월만큼 그녀의 노력과 인내가 오늘날의 쥬얼리전문가라는 막강한 초능력을 가져다준건 당연한 결과인것입니다. 그녀의 바램대로 조선족분들이 쥬얼리 진품명품에 관한 정확한 상식을 모두가 다 아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단비
    • 사람들
    2015-05-30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②] 필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인물들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밑바닥인생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추구와 아픔에 대한 묘파는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 양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때를 두고 작가는 다음과 같이 회억한다. “나의 육신밖의 아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피부로 느끼면서 갓길에 섰던 나의 필봉은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중국조선족 한국초청사기 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다”, 도시와 외국으로의 진출 과정에서 조선족 여성들이 겪는 아픔을 다룬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중국조선족 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하에 변혁기 중국조선족의 고뇌를 취급한 작품들을 연이어 펴냈다. 특히 1990년대 말의 한국초청사기 사건을 전방위로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조선어 출판 풍토에서 가장 짧은 시간내에 수천권이 판매되는 기록을 냈다. 그 후, 조선족공동체의 정체성과 위기를 다룬 작품창작이 작가의 창작 주선을 이룬다. 십여년간 “중국조선족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그 시리즈물을 수십편 펴냈다. 올해에는 그 특집을 한데 묶은 소설집이 발간된다. 작가는 여섯 부의 장편소설을 연재, 출간했는데 모두다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묵직한 소재의 작품들이다. 그 가운데서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문화대혁명에 관한 아픈 기억을,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흔들리고 있는 조선족공동체의 아픔속에 스러져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장편소설 “춘자의 남경” 조선족 최초 연변지역 위안부의 시선에서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제재를 다루고 있다. 김혁 작가의 상술한 작품들을 두고 평론가들은 “묵직한 사건과 인물들을 소재로 서사적 사건 전개의 구조가 선명하고 극적인 이야기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고 높이 평가했다. ↑김혁작가가 펼쳐낸 청소년을 위한 조선족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 작가의 필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인물들 김혁은 다각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역사와 면면을 보여주기 위해 소설, 창작 외에도 기행, 칼럼, 영화론문 등 여러 장르를 충분히 동원하여 수년간 관련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그 중 5년간의 답사를 거쳐 용정의 역사를 60여만자로 다룬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푸른 솔, 해란강 깊은 물”은 조선족문화의 발상지 용정의 생성과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완결판 같은 작품이라고 격찬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중문으로도 번역되여 출간을 앞두고 있다. 3년반 째 연재되고있는 문화역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은 스크린의 각도에서 조선족의 백여년 역사를 다른 텍스트로 연구한 작품이다. 2년째 연재되고 있는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는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작가는 근년래 인물전기 창작에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다.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사회와 약속하고 그 결과물들을 육속 펴내고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제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주덕해, 한락연, 김염, 김약연, 윤동주, 김학철, 리홍광, 리화림, 양림, 정판룡 등 우수한 인걸들의 전기를 이미 펴냈거니와 앞으로도 지속 펴내는 작업을 그의 창작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있다. 한편, 그는 기행문, 인물전이라는 논픽션물 외에도 소설이라는 픽션으로 조선족 인걸들을 조명하는 작업을 펼쳐나가고 있다.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한 “시인 윤동주”는 연변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시인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완용 황후”는 연변에서 숨진 청나라 황후를 통해 근대 동북의 근대사를 조명하고 있다. 현재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는 “무성시대”는 “중국 영화의 황제” 김염의 영화인생을 그린 장편소설로서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 지지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매체의 기자와 소설가로서의 삶을 병행해 살았던 김혁에게 있어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창작성향이다. “대서사적인 작품을 다루는 것이 나의 근년래 그리고 향후의 창작방향”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끊임없는 창작과 그 작품들 작가 김혁, 올해만도 여러 권의 작품이 나오게 된다. 그의 수백편의 칼럼중에서 역사칼럼만 추려 묶은 칼럼집 “리얼하게 그리고 치열하게”가 곧 출판된다. 윤동주 연구서인 “윤동주 코드”의 집필을 이미 마무리했다. 조선의용대 분대장 김학철에 관한 청소년 전기도 년내로 출판되게 된다. 현재 연재중인 “윤동주평전”의 집필과 병행한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에 관한 평전 “규암 김약연전”도 집필중이다. 빠르면 년내로 출간되게 된다. 연변대학교 교수들과의 공저로 연변대학의 정초자 “정판룡평전”도 몇해 전에 이미 집필에 착수, 곧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10여년 지내면서 용정체험을 소설로 펴냈던 녀류작가 강경애의 일대기도 소설화하는 중이다. 연변의 첫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의 설립자이자 고종황제의 밀사였고 독립운동가였던 보재 이상설에 관한 장편소설도 그이의 타계 100주년을 맞아 출간 예정이다. 특히 지난 몇년간 김구의 비서로 지냈고 윤봉길과 이봉창의 작탄의거를 도왔지만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해외에 알려지지 못했던 의용대 출신의 여걸 리화림에 대한 전기물 집필작업을 몇해간 꾸준히 해왔다. “꼭 그 결과물을 내놓으련다”고 김혁은 말한다.
    • 사람들
    2015-05-28
  • [재중동포 작가 김혁①] 작가의 성장과 탐색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김혁 1965년 중국 룡정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석사연구생, 북경 로신문학원을 졸업(수료). 열하홉살이 되던 해,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 “노아의 방주” 등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그로써 문재를 인정받고 스무살 어린 나이에 “길림신문”의 기자로 파격 발탁되였고 그 후로 “길림신문”, “연변일보” 등 조선족의 주요 매체와 인터넷 미디어에서 25년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십대에 데뷔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25년간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춘자의 남경” 등 장편소설과 “천재 죽이기”,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불의 제전”, “뼈”, “피안교” 등 중단편소설 수십편,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윤동주 평전” 등 인물전기, 평전, 장편역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역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등 역사문화연구저서 외에 시 수백수, 칼럼 200여편을 창작, 발표해 “쟝르를 초월하는 작가”, “조선족 다산작가”로 불리고 있다. 상술한 성과와 기여로 하여 윤동주문학상, 김학철문학상, 연변문학상, “해란강” 문학상, 자치주정부 “진달래” 문학상 등 각종 묵직한 문학상을 30여회 수상했다. 현재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이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위원장),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무를 맡고있다. 원로 평론가가 평가하는 김혁 전임 연변작가협회 주석이며 원로 평론가인 조성일 선생은 재중 동포 대형문학지 “장백산” 2014년 2월호에 게재한 글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작가 김혁 인상기”에서 김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이 김혁이 누구냐고 물으면 소설가 하나의 타이틀로는 부족하다. 그의 문학은 소재나 형식, 그 어느 면에서나 문학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그는 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 이를테면 소설, 시, 수필, 칼럼, 르포, 다큐멘터리, 아동문학…등을 섭렵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해 왔고 문학이라는 전당의 구석구석에 이름을 남겨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그는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아동문학가이고 지어 ‘이디어 뱅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가 김혁’이보다 ‘작가 김혁’이 더 잘 어울린다. 그는 다쟝르작가로,다면수로 우리 앞에 당당하게 서 있으며 그만큼 우리 조선족문학예술에 대한 기여가 다방위적이다.” 작가의 성장과 탐색 작가 김혁은 1985년에 데뷔하여 소설과 시를 발표, 신출내기 기자, 문학도로서의 습작기를 걸쳐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그야말로 맹렬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남에 비해 불운한 특유의 인생경력과 오래동안 언론사에 근무했던 언론인의 안광을 지녔던 관계로 애초의 작품부터 무거운 소재에 천착하게 되었다. 창작 작법을 잘 모르고 썼던 초기의 작품부터라도 그는 시종 그 “무거움”을 의식해 왔었다. 열아홉에 낸 두 편의 처녀작품 역시 중국 개혁개방 초기, 변혁기의 취업대기 청년들의 문제를 반영했고 거기에 제목이 종교색채까지 띠어 화제가 됐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기 자신의 불우한 운명과 처절한 인생체험을 회피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자기 작품에 반영했다. 이 비정한 세계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성장기에 자기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체험들을 독자들에게 설파했으며 가슴속에 고여있는 한과 서러움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작가의 소설 “적”, “바람속에 지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천재 죽이기”, “불의 제전”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보면 그 소설들에 부각되고 있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죄다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근원적인 아픔에 시달리면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런 인물형상들을 통해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의 정조” 속에서 비장한 혈투로 몸부림치는 사회의 저층에 깔린 인간들의 영혼을 보여주려 했고 자기의 실존을 위해 약속 없는 미래를 향해 힘겨운 행보를 하고 있는 “소인물”들의 불안과 실망, 소외와 고독, 아픔과 슬픔을 반영하려 했으며 나아가 빛에 가려진 어둠속 약자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이야기 하려 했다. 이 모든것은 남과 다른 작가의 불우했던 인생경력과 밑바닥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다. 한편, 작가는 새 것에 부단히 도전하며 과감하게 새로운 실험을 한다. 작가는 국내외 문학사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기 나름의 개성적인 작품을 창출해 냈다. “천재 죽이기”, “신오감도”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계열시, 신사실주의 소설 “라이프 스페이스”, 황당파 소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사이버 소설 “병독”, 판타지 소설 “불의 제전” 등 동포 문단에서 쟝르와 문체실험을 가장 많이 하고 가장 먼저 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김혁은 한국 작가 박경리를 흠모한 나머지 십여년 전, 사비를 팔아가며 그이를 찾아 한국 원주로 가기도 했다. 좋아하는 작가를 단 한사람 뽑는다면 단연 “중국 조선족 문학의 대부” 김학철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칼럼이라는 장르에 환혹되여 거의 일주일에 두세편꼴씩 수백편을 써 나가고 있는 것도 기자생활이라는 체질화된 문체의 작법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김학철 선생의 창작중에 가장 빛나는 다량의 잡문에 매료되여서 부터이다. 작가 김혁은 말한다. “김학철 선생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해 주고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며 노는 법을 일러주신 분이다. 나에게 있어 그 분은 너무나 아득해서 도저히 흉내낼수 없이 높은 경외의 대상이다. 그이의 넓이와 깊이의 사범(師範)은 내가 영원히 본받고 내가 궁극적으로 닿고저 하는 목표이다.” 김혁은 현재 김학철 관련 인물전기 집필을 마무리, 출간을 앞두고 있다.
    • 사람들
    2015-05-24
  • [인터뷰]“아시아를 잇는 재일 조선족 여가수 김경자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지난 세기 80년대 중반,개혁개방의 중국대륙은 외국을 향해 문을 열면서 가요분야에서도 미국노래, 일본노래, 인도의 노래와 홍콩, 마카오의 노래들이 쓸어들어 왔고 당시 국교가 없었던 나라인 한국의 노래들도 중국 대륙에 상륙하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홍색중국”에서도 철저하기로 두번째라면 서러워 할 연변의 가요계는 중앙과 주변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많은 가요들이 창작되고 방송과 무대를 통해 선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질, 형식과 종류상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 가요창작 일꾼들은 한국의 트롯트 가요를 좋아하면서도 그런 노래를 창작할 엄두를 크게 내지 못했다. 특히 가요창작에 있어서 남녀간의 화끈한 사랑을 취급한 노래는 별반 만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그럴 즈음, 프로가수도 아닌 중국 연변의 한 여대생이 “살구나무”란 노래를 갖고 라디오방송국의 마이크를 잡으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당시 연변대 조선문학부에서 작가지망생으로 공부하고 있을 때었던지라 한번은 제가 ‘소녀의 사랑’이란 가사를 쓰고 연변대학 예술학부의 이정씨가 곡을 붙인 노래를 갖고 연변방송국으로 찾아갔었지요. 저 자신이 직접 불러보고 싶어서요. 그 때 방송국 음악편집 선생님들이 저의 노래를 들어보시고는 목소리가 참 맑지다면서 가수로 데뷔하면 좋겠다고들 했었고 저는 그 제의를 숙명처럼 받아들였어요…” 이를 계기로 김경자씨는 “산향길”, “돌다리”, “물소리” 등 여러 수의 노래를 연속 불러 방송전파를 타면서 “살구꽃 소녀”로 불리면서 일약 대학가요제의 스타로 성장하였다. 하긴 어릴 적부터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했던 김경자씨가 대학입학 전까지 무대에 오르는 차수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가수로 데뷔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녹음이 된 음악으로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노래만 맞추면서 감각적으로 고창모 선생이 편곡한 반주가 너무 황홀하여 저도 몰래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는 김경자씨었다. “이렇게 저의 데뷔는 라디오방송국 취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 그녀한테는 많은 팬들이 생겼는데 제일 처음으로 받은 팬의 레터는 바로 일본에서 날아온 것이었으며 그 팬의 이름은 사쿠라이 키요코였다. 이는 신인가수였던 김경자씨한테 무궁무진한 자신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아래의 내용은 김경자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Q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즐겨 들었던 가요는? -제가 데뷔하던 지난 세기 80년대는 라디오를 통해 한국음악을 몰래 듣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어요. 다른 외국 음악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그 때는 한국 가요무대 방송을 제일 기다렸고 그 중 흘러간 옛노래들에 되취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미자 가수의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같은 트로트가요가 가슴에 감동을 많이 주었어요. Q 가수로써 항상 마음(신경)을 쓰고 있는 부분은? -저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고 문학을 전공하였어요. 목소리는 아마 천성적인 것이라 생각되었기에 발성연습은 따로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노래는 소리보다는 마음을 전하는 예술이라 생각되었으며 가사 한마디 한마디를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전하려고 많이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관중들에게 표현예술의 즐거움도 선물하고 싶어 율동표현도 많이하고 있습니다. Q 가수를 하면서 가장 잘했다 싶을 때는? 역시 무대에서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때 제일 행복하고 저에게 노래할 수 있는 목소리를 주신 부모님한테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2011년 2월 일본 “아사히신붕” 1면 2면 기사에 “아시아를 이어주는 가수”로 소개되었을 때 제일 가슴이 벅찼습니다. Q 반대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노래는 저에게 있어서 아마 하느님이 주신 제일 훌륭한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냥 좋아서 즐기고 있습니다. 노래에 특별한 욕심도 없기에 별로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요. Q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꿈꾸는 뮤지션은?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역시 국경을 넘어서 민족을 넘어서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는 것이겠지요. 꿈꾸는 뮤지션은 항상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가까이에서 음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이 3국의 훌륭한 음악을 서로 서로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한편, 현재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경자씨의 스켓쥴을 빽빽했다. 연간 10회 정도의 공연활동에 참가하며 기자의 인터뷰를 접수하던 전날 밤에서 사쿠라 마츠리에서 일본가요, 중국가요와 한국가요 이렇게 몇 수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 오는 6월 13일에는 일본 유명가수들과 함께 “꿈의 광장 가요제”에 출연, 오는 9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진행되는 일본문화제 공연에도 참가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외 일본에 건너간 뒤 2011년 “살구나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출판, 주로 중국에 있을 때의 힛트곡들을 리메이크 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타이틀로 앨범을 출판, 주로 일본명곡들을 우리말로 리메이크 하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기도 했다. 현재 가수생활외 김경자씨는 일본 도쿄 히나타상사를 운영, 한국화장품, 건강식품 판매를 하면서 겸하여 중국어교실을 운영하기도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1992년 재일교포출신 남성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현재 남편은 대학교수로, 딸은 에이지약과대학에 재학중이다. 1988년 중국 연변라디오방송국에서 선정한 제일 좋아하는 노래(10년간의 노래) 10곡 중 1위(산향길), 2위(살구나무), 4위(돌다리)를 하면서 연변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수로 부상했었던 김경자씨ㅡ 현재 그녀는 그 어떤 상이나 순위보다는 도쿄돔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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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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