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머리말

나는 동년을 회억하여란 제목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숙부들에 대하여 쓰려한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큰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천지개벽의 년대에 우리 집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억척같이 일하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정은 바로 연변 근대사 120 여년간에 우리민족 선배들이 연변땅에 이민하여 피땀을 흘려가며 개척하던 그 모습의 숙영이라고 생각하기에 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이 너무나 비장하기에 이를 우리의 후세에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가 너무 나이가 어리기에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유감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시대배경: 기사년에 기근과 이민 간토(墾土)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여 나의 귀에까지 익숙한 기사년 재황과 이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려 한다. 기사년 재황은 전례없는 특대 재황으로 이 재황은 조선 이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청나라때에 興京이동 伊通이남 두만강 이북 연변땅을 포함하여 동북의 동남 쪽 장백산 지구를 청나라가 흥기한 구역 성지라 봉쇄하여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200여년간 비어있었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 11년사이에 조선북부에는 대 한재와 대 충재가 련이 어 들었다. 특히 1869년(기사년)에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등6읍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보지못한 특대 한재였다. 이리하여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는 대폭 이민이 발단이었다. 10여년간 련속된 재해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이 유일한 삶이 길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 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워놓고 월강을 금지시키며 월강하다 잡힌 사람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 버렸다. 그러나 계속 이민자들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에서 월강금지령을 페하고 청정부에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며 강북으로 이주를 승인하라 요구했다. 1881년에 청 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招墾總國을 설치하고 이민 실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청정부는 연변지구에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사람을 축출할 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 수도 없다고 여겨 집조를 발급하며 조선 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또 황무지 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초기에는 ‘훈춘 녕고탑조간(照垦)장정’을 반포하고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이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00문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 후에 갚게하며 그 나머지는 한 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간민들에게 부림 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빛을 갚게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1885년에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 천 수 만이 조선인들이 터진 조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났다. 청나라 는 변방보위 수요로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관리 기구인 월간국을 세우고 지금 龍井市 智新郷에 和龍峪(화룡욕)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 이북 길이 700여 리 너비50여 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 간민의 개간 구역 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는 연변 역사와 조선족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간민들은 두만강 연안으로부터 해란강이북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200리 땅이 전부 간민들에 의하여 개간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해란강이북 지역과 가야하 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아는 동청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에 처들어 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하고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 질색한 연변 지방 관리들과 군관들은 길림으로 도망했다. 그 기회에 연변지구에 더 많은 이민들이 이주하였다.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외지에 관리들과 군벌 대 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그들은 권세를 등대고 청장(토지를 재주는)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무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박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또 어떤 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 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했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 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 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 상인들을 점산호(占山戶) 라하였는데 기실은 占山虎였다. 이 기회에 외지에 한족들이 관청과 점산호들에게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이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점산호들로부터 몇 백상이 황무지를 얻어 이민들게 주어 개간하여 대 지주가 되었다. 또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 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 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그 중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였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인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서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유혹되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 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이주하여 일약 수 십 상의 토지를 소유 한 지주로 되였다.

봉금령이 페지로 손에 한푼 땅도 없는 조선 농민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이 “주인 없는” 땅에 몰려와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앞에서 언급 하다 십히 외지에 한족들이 연변에 들어와 관리들에게 뢰물을 처먹이고 땅을 차지 하였다. 뢰물을 처먹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 땅인 것처럼 저 벌판은 마씨의 땅이오 저 산골 짜기는 장씨의 땅이라 하면서 말뚝을 밖아 지역(地畔)을 정해주고 명함을 찍어주어 땅이 주인이라 하였다. 이렇게 그자들은 하루 아침에 거대한 땅을 차지한 폭팔호로 둔갑되여 적수 공권으로 고향을 버리고 생계를 찾아 온 이민들이 피땀을 빨아 먹기 시작 했다. 이 신생 지주들은 땅의 정도에 따라 6할5할4할을 정하여 이민들에게 개발권을 주었다. 례를 들어 6할이면 한상을 개간하면 60% 를 5할이면 50%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민들은 계속 이 땅을 개간했다. 이 신생지주들은 이민들에게서 받아들인 땅을 다시 이민들에게 팔아 먹고 또 다른 곳에가 이와 같은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어떤 곳에서는 이민들이 땅을 개간해도 자신의 땅은 한푼도 없이 모두 지주의 땅으로 되여 이민들은 자신이 개간한 땅에서 소작짓고 살아야 했다.이러한 폭발호(暴發戶)의 전형은 태양벌을 독점한 악패지주 한씨다. 해방 후 그놈은 인민들이 손에 처단되였다. 연변땅에 지주는 대 다수 이렇게 산생되였으며 성남의 마통새도 번씨도 장씨도 모두다 이러한 지주다. 이것이 연변에 조선족 지주가 아주 적은 원인의 하나다.

이렇게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민하는 조선 사람들이 행렬은 처음에 는 기황으로 시작되였으나 그후에는 일본놈들이 착취와 압박으로 그 규모가 점점 더 크게 전국적으로 계속되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도보로 연변과 장백현 집안현 경내로, 평안도 사람들도 도보로 료녕성 동부로, 그리고 배를 타고 이민한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료녕성내지로, 강원도 경상도 사람들은 길림성 흑룡강 성내지에 집단 이민하고 그곳에 부락으로 정착해 살았다. 이 이민 조선 사람들은 그후 동북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싸우며 가송찬미할 력사의 한 페지를 썼고 또 중국 해방전쟁에서도 역시 커다란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

여기서 지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몇가지 첨가하면 이민들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연변땅은 인연 없는 산구로 이름(지명)없는 곳이었다. 이민들이 대량 몰려 오기 시작하자 청정부는 길림성에 이민국을 설치하고 이 땅을 관리하 려고 이민국 관리 몇 명을 보냈다. 이들이 연변에 월간국을 세울 교통이 편리하 고 관리가 편리한 곳을 찾다가 ‘국자가’을 지정하고 지명을 다시 지으려고 고심하던중 한 관리가 길림성이 연장이라 연자에 길림성이 길자를 붙이여 연길이라 함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모두들 그 이름이 의미있고 신통하다 하여 연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 그리고 연길은 그때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인 분지인데 바람이 불지 안는 고요한 때면 연기와 안개가 덮인 곳이라 煙集崗이라 하였는데 훈춘에 있던 招垦总局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土地局있는 거리라 하여 局子街 라 하였다가 다시 煙集을 한어의 동음자로 延吉(연길)이라 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여하튼 연길이라는 지명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름이다. 마치 최근 烟集河를  延吉河라고 하듯이 고친것이다.

또 하나 왕청이라는 이름은 그때 왕청땅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는데 함경도의 하천들은 모두 동이나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 왕청의 하천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왕청같이 강하천이 흐른다 하여 왕청이라 지었다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들이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 많은데 이런 이름로는 나의 고향에 룡정 성남 성동 회령촌 장풍동 샛골등이다. 여하튼 급시에 관리들이 기발한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나 민간에서 지역의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나 모두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또 이 지명들만 들어도 이 땅의 력사에는 모두 이민들이 발자취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는 비장한 땅이며 이 땅의 력사는 이민들이 력사며 이 땅의 주인 역시 이 땅의 력사를 창조한 그들이였다. 

그리고 하나 더 쓰면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내려 오다가 자신이 홍수시에 만들어낸 충적사 틈으로 새여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도망가 몇 십리 흐르다가 다시 돌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진면모를 자랑하며 700리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최초의 두만강의 이름은 도망 갔다고 도망강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가상하지 않다고 여겨 한 선비가 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이름은 조선민족이 아닌 어떤 민족이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지만 백년 남짓한 이민사에 깃든 이야기로 誤傳되거나 무중생유(無中生有)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력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이땅의 력사를 모두 소중이 여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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