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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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사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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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가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한번 드래곤 소재가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어필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며칠전 드래곤을 소재로 한3D 애니메이션 “드래곤네스트 (龍之谷)” 가 개봉, 흥행을 보이고있다.

드래곤 소설도 다시 강세를 보여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의 해외 인세 수입이 5억원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98년 출간돼 한국 판타지 문학 붐을 주도, 지금까지 모두 13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 드래곤 소설 은2005년 일본에서 출간돼 50만부, 2007년 타이완에 출간돼 30만부가 팔렸으며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과 함께 “올해의 해외 인기작가 20인”에 선정되였다. 게임, 만화,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된 데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드래곤은 소설과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용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쉽다는 특징으로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에까지도 단골소재로 등장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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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년전에 이미 우리 작가가 쓴 드래곤 소설이 있다.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제목의 신채호(申采浩)의 장편소설, 1928년에 창작되었다.

신채호가 베이징에서 망명 생활 말기에 유고로 남긴 이 작품은 우화형태의 혁명소설로아나키즘(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의 교본(敎本)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의 드래곤과 서양의 드래곤이 격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민중의 편에서 동양의 용 미리와 맞서 싸우는 서양의 용 드래곤. 미리가 끊임없이 민중을 억누르는 봉건주의 압제자의 대표라면, 드래곤은 지상의 민중혁명을 구현해 가는 지도자로 상징된다.

조선 말기의 무력한 봉건왕조와 사대부에 실망한 단재 선생은 룡의 꿈틀임에 빗대어 민족의 활로를 소망하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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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21일은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인 등 팔방에서 이름을 떨친 단재 신채호선생의 79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이의 일대기를 반추해 보았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단재(丹齋), 한놈, 연시몽인 등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9세에 나던 해인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이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과 전기를 다수 출판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다.

1922년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3년 신채호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가지러 5월 8일 대만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갈파하였다.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사흘 뒤 사망하였다.
 
용띠로 태어나 평생 민족을 위한 용틀임을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그의 행동과 오래된 판타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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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드래곤”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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