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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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 최인호의 많은 수작들중에 “할”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특별하고 의미가 있는 건 작가가 암 투병 중 타계를 앞두고 재판 된 작품이기때문,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쓴 불교관련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3년, 출간된 장편 “길 없는 길”을 재구성 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호평 받으며 지난 10년 간 150만부나 판매되었다. “단순한 구도소설의 한계를 뛰어 넘은 최인호 인간주의 문학의 백미”라는 평도 뒤따랐다.


책은 근대 불교선풍을 일으킨 불교 증흥조 경허(鏡虛) 대선사가 열반에 드신100년기념으로 재 구성해 내놓았다.


책에는 경허 대선사의 수법제자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중에는 법호 그대로  세속 뿐 아니라 불가에 조차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물 속의 달처럼 조용히 사라 진 수월 스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수월 스님, 누구이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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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스님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구전으로 그 행적이 전해져오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불자들이 수월정사(水月精舍)라는 조그만 법당을 차린 것을 시작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가을, 중국 연변 도문시에서는 일광산에서 “일광산 화엄사 대웅보전 락성 및 불상 개안 경축법회”가 열렸는데 중국불교협회와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에서 온 불자 등 2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연변의 첫 불학대사 수월스님을 선양하는 불사가 봉행됐다.


이날 수월스님이 머물렀던 일광산 중턱에 수월스님의 옛 거처를 복원하는 기공식도 더불어 열렸다.


화엄사 불사를 주도하고 있는 오덕 스님은 조선족 출신이다. 화엄사는 중국, 한국, 북한 등 3국이 합작으로 조성한 사찰로서 가람은 중국식에 한국의 전문가들이 단청을 입혔다. 불상과 탱화는 북한 만수대 창작사 화공들이 조성했다.


오덕 스님은 “화엄사는 조선족의 첫 사찰이자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한 사찰이어서 의미가 크다”며 “남북통일과 한·중 양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가람이 될 수 있도록 불사를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연변 지역에서 늦게나마 회자되고 있는 수월스님(水月)은 한국 충남 홍성 출신으로 알려졌다.


1885년경에 태어난 스님은 속성 조차 정확하지 않다. 전(田)씨라고 알려졌지만 일부에서는 전(全)씨, 김씨, 제(祭)씨, 최씨라는 설도 있다.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고아로 남은 스님은 머슴살이를 하며 연명했다.


어느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 받고 1883년 늦가을 서산군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을 찾아갔다. 

당시 천장암에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 스님이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다. 이곳에서 수월은 나이 서른이 다 되여 행자로서 나무꾼 생활을 했다.


어느 한번, 수월은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당시 수월은 특히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외웠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고 급히 끌어냈다. 이때 그의 순전한 수행력을 인정한 태허는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그는 보임공부를 위해 금강산 등지에서 신분을 숨긴채 정진하면서 지냈다. 경허스님이 열반한 후 수월스님은 1912년 북간도로 건너왔다.


회막동(지금의 도문시의 옛 이름)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꾼 노릇을 했다. 이때 수월은 자기가 소를 먹여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간도로 건너 오는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것이다.


1915년 회막동을 떠나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 채 몰지각한 젊은 스님에게서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1921년 봄부터는 두만강이 내려다 보이는 지금의 도문시 일광(一光)산의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스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종일 말없이 일했고, 탁발(托鉢)을 다녔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오, 효봉, 청담 등이 수월을 찾아와 몇 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 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수월스님의 법은 묵언스님을 거쳐 도천.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화엄사에서 지내기를 8년철이 되던 해인 1928년, 입적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친 후 절 뒷편에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컬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한 채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스님은 자화장(自火葬)으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불교에서 수월(水月)이란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달이 강을 비추더라도 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이 수월스님은 자신이 없는 선행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실천하였다.


수월은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로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여난 수행력으로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일제의 수탈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한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다.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흔적없는 바람같이 살다 간 그는 오직 행동으로 소임을 다 해 온 숨은 성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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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가 지은 책의 제목 “할”은 사찰과 선원에서 학인을 꾸짖거나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나타내 보일 때 내뱉는 소리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수월스님의 법문은 전해오는 것이 많지못하다. 다음은 구전을 통해 전하는 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허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집을 나와서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뭐여…


사람 몸 받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 이보다 더 큰 한(恨)이 어딨어.”


법기와 수련이 높은 “깨달은 자”들의 소리가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우리 민족 공동체에 지혜와 기운 넘치는 “할”을 날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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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북간도의 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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