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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틴 유엔 안보이사회 5개 상무이사국 정상모임 再제안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12일,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현재 국제사무에서 많은 불확정성 일들이 누적되었기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 정상모임을 가질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는 당일 중국관영 신화통신을 비롯한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당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TV 프로그램에 출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은 불정확성으로 가득한 국제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주묵해야 하며 5개 상임이사국 정상이 만나야 유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1월 23일, 푸틴은 예루살렘에서 열린 제5회 세계대도살 세미나 때에 처음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정상모임을 제의했었고 이번에 재차 이 뜻을 제의하면서 세계평화를 수호하고 세계와 지역의 안전을 강화하며 손잡고 테러와 극단주의 및 중대 도전과 위협을 반대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에 반드시 유엔 안전보장이사국 상임이사국 정상들간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안전보장이사회의 기타 4개의 상임이사국은 모두 5개국 정상들의 만남에 뜻을 같이 했으며 러시아 외교부는 각 상임이사국 측과 협상한 후 그 날짜와 지점을 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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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중앙대학교동문회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에 장학금 기탁
    [동포투데이]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교장 신선호)는 2020. 7. 13.(월) 본교 반얀트리홀(발전기금 명예의 전당)에서 호치민 중앙대학교 동문회(회장 이성민)로부터 1억 5천만 동의 장학금을 기탁 받았다고 밝혔다. 중앙대학교 동문회는 이전부터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에 꾸준히 발전기금을 기탁하여 이미 반얀트리홀에 헌액되었으며 최근 코로나19로 학교 수업료 미납률이 작년 대비 100% 이상 증가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을 지원하기 위해 이날 소중한 장학금을 기탁하였다. 신선호 교장은 “교육부의 저소득층 지원금이 지난해에 비해 증가되었음에도 예산 신청한 금액보다 많이 부족하여 충분한 지원이 어려운 상황이고 학교 또한 수업료 미납으로 인해 계획했던 여러 교육환경 개선 공사를 취소하는 등 어려움이 많다.”며 “교민사회 특히 대학 동문회 중심으로 장학금을 모아주시면 학생들과 학교에 큰 도움이 된다. 기탁하신 장학금은 소중히 사용하겠다.”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중앙대학교 동문회 이성민 회장은 “그 동안 베트남 학교 위주로 지원을 많이 했지만 한국 학교와 학생들의 어려움을 알았으니 앞으로는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에 정기적으로 지원을 하겠다.”며 “동문회 회원들도 경제적 상황이 여유 있지는 않으나 한국인은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협력하여 잘 극복했던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코로나로 인한 위기도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늘 장학금을 받는 학생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훌륭히 성장하여 어려울 때 자신이 도움 받았던 기억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도울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한길 바란다.” 고 기탁의 뜻을 전했다. 한편,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에서는 개인, 단체, 기업으로부터 상시로 학교발전기금(금전 또는 물품)을 접수하고 있으며, 기부자는 반얀트리홀(명예의 전당)에 영구히 헌액된다. 기부를 희망하는 개인이나 단체(기업)는 학교 행정실에 직접 기부하거나 계좌 입금을 통해 후원할 수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학교 행정실(028-5417-9021) 또는 홈페이지(http://kshcm.net/)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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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3
  • 12일 베이징 코로나 19 확진사례 0으로 나타나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지난 12일 0시부터 24시까지 중국 베이징의 코로나 19 확진사례가 0으로 나타났다고 13일 중국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당일 베이징에서는 코로나 19 확진사례가 0으로 나타난 것은 해외유입사례 및 의심사례와 무증상 감염자를 포함한 것이며 당일 완치퇴원 사례는 14건이었다. 6월 11일 0시부터 7월 12일 24일까지 베이징에서 보고된 본지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335건, 입원사례는 226건, 완치 퇴원사례는 109건이었고 관찰 중의 무증상 감염사례는 18건, 해외에서 유입된 코로나 19 확진사례와 의심사례 및 무증상사례는 없었다. 한편 베이징 본지에서 코로나 19 확진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구역의 날짜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옌칭구(延庆区) 171일, 화이러우구(怀柔区) 157일, 쑨의구(顺义区) 155일, 미윈구(密云区) 152일, 스징산구(石景山区) 28일, 팡산구(房山区) 27일, 먼터우거우구(门头沟) 27일, 둥청구(东城区) 26일, 퉁저우구(通州区) 22일, 초우양구(朝阳区) 21일, 시청구(西城区) 20일, 하이딩구(海淀区) 17일, 창핑구(昌平区) 17일, 다싱구(大兴区), 펑타이구(丰台区) 7일이다. 그리고 7월 11아르 0시부터 24시까지 펑타이구 루거우교(卢沟桥) 향, 다싱구 워이산좡진(大兴区魏善庄镇), 고미덴(高米店) 가두가 중 위험지구로부터 저 위험지구로 하향조절되었다. 또한 7월 11일 0시부터 24시까지 고 위험지구는 펑타이구 화향(丰台区花乡) 1개뿐이었고 중 위험지구는 펑타이구 펑타이 가두(丰台区丰台街道), 루거우교 가두, 마자보 가두(马家堡街道), 신춘 가두(新村街道), 다싱구 베이장춘 진(大兴区北臧村镇) 황춘 진(黄村镇), 칭윈덴 진(青云店镇), 싱펑가두(兴丰街道), 시훙먼 진(西红门镇) 등 9개가 지정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0일, 중국 국가질병예방 통제센터는 베이징시 신파디시장(新发地市场)과 관련된 코로나 19는 이미 기본상 통제되었으며 신파디 시장으로 인해 파급되었던 허베이(河北), 랴오닝(辽宁), 허난(河南), 저장(浙江), 쓰촨(四川)과 텐진(天津)의 코로나 19도 효과적으로 통제되었다고 공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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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3
  • 中 아시아 태평양 지구 6D 통신위성 발사 성공
    ▲중국 <창정 3호 을(长征三号乙)> 운반포켓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6D 통신위성 발사 성공.ⓒ중신망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중신망에 따르면 9일 오후 8시 11분, 중국은 시창(西昌) 위성발사 센터에서 <창정 3호 을(长征三号乙)> 운반포켓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6D 통신위성을 발사하여 예정궤도에 들어가게 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6D 통신위성은 중국항천 과학기술 그룹 제5 분원에서 연구제작한 것으로 중국에서 처음으로 발사한 Ku 주파수 주간의 <고 유량 브로드밴드 위성통신 시스템> 위성이다. 이 통신위성은 그 중량이 5550킬르그램, 태공에서의 복무수명은 15년이다. 아시아 태평양 6D 통신위성은 상규적인 통신위성에 비해 수십배 많은 용량을 갖고 있으며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사용호에 양질적이고도 고효능의 봉사를 제공하게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6D 통신위성은 중국에서 창정 계열 운반로켓으로 제339번째로 발사한 위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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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0
  • 안산 땟골에서 '고려인 동포와 함께하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캠페인' 열려
    ▲사진제공 : 사단법인 너머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국내거주 고려인지원단체 사단법인 너머(이하 너머)는 2020년 7월 3일, 대한고려인협회와 안산시고려인문화센터와 함께 안산 땟골마을 일원(선부2동)에서 「고려인 동포와 함께하는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방지 캠페인」을 펼쳤다. 이번 캠페인에는 대한고려인협회 소속 고려인 동포들과 고려인 노년 여성들로 이루어진 고려인어머니봉사단, 너머 고려인청소년경찰단 등 다양한 연령대의 고려인 동포 30여명이 참가했다. 캠페인은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방지 위해 고려인 동포와 외국인 주민들에게 예방수칙과 사회적 거리두기 등 정보 전달과 생활습관 개선을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금요일 저녁 시간에 맞춰 땟골 삼거리 주변의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소독과 고려인 동포와 외국인 주민들에게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수칙과 마스크 착용의 중요성에 대해 안내했으며 마스크를 구비하지 못한 주민들에게 마스크를 배포하였다. 이날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예방 캠페인에 참여한 고려인 동포들은 국민참여형 의료진 응원 캠페인 ‘덕분에 챌린지’에도 참여하여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애쓴 의료진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한 시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러시아 국적의 텐 타마라(고려인어머니봉사단 제비 단장)은 “요즘 러시아,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코로나19가 많이 확산되고 있어많이들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안산에 있으면 우리 가족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고 많이 감사하다.”라고 감사의 마음을 밝혔다. 캠페인을 주최한 안산시고려인문화센터 김영숙 센터장은 “코로나19로 인해 외국인 주민들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의 정서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내․외국인 모두 다함께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마음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고려인 동포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된 캠페인을 통해 우리 이웃과 가족들이 건강하게 코로나19 위기를 잘 이겨내자고 다짐하고 독려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소독 및 예방 활동과 교육에 앞장서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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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9
  • 전 세계 코로나 19 확진 사례 1100만 건 초과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7일, 베이징에서의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따르면 그 전날 0시부터 24시까지 전 세계 코로나 19 만연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외 세계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누계로 1124만 2470건, 이 중 미국은 확진사례가 291만 건, 사망사례는 13만 건에 달했고 러시아는 누계로 확진사례가 68만 7862건, 당일 확진사례는 6611명이었다. 이 외 이탈리아의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소폭 증가했고 독일 연방정부는 지속적인 <마스크 강제 착용령>을 지지한다고 표했다. 이상의 상황을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미국 존스 홈킨스 대학이 발표한 코로나 19 감염 실시간 통계에 따르면 미국 동부 시간으로 7월 6일 오후 3시 33분까지 미국 내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누계로 291만 1888건, 사망사례는 누계로 13만 10 건, 미국은 여전히 코로나 19가 대 유행 중에 있으며 지난 주 일일 확진사례가 5만 건을 초과한 날짜가 몇 차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러시아 코로나 19 예방 통제 지휘부가 6일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그 전날 0시부터 24시까지 러시아의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6611건이었고 누계로 확진사례는 687862건이었으며 같은 시간동안 코로나 19로 사망한 사례는 135건, 누계로 사망한 사례는 1만 296건이었고 당일 하루의 완치퇴원사례는 3579명이었고 누계로 완치퇴원사례는 45만 4329건이었다. 이탈리아를 보면 현유의 코로나 19 환자는 4만 4709명으로 전날보다 67명이 증가, 이는 2개월 이상 하강상태를 보이다가 연속 2일간 다시 증가세를 보인 데이터였다. 한편 독일연방의 상황을 보면 당지 시간으로 독일의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누계로 19만 6554건이었고 누계로 사망한 사례는 9016건, 누계로 완치사례는 18만 2200건이었다. 독일은 공공버스 및 쇼핑센터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는 <마스크 강제 착용령>을 실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의 것은 몇몇 부분적 나라의 코로나 19 확진 사례이다. 당지 시간으로 지난 6일, 필리핀의 24시간 내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2099건, 연속 2일간 2000건을 돌파하였고 같은 날 오스트레일리아의 24시간 내 확진사례는 138건, 누계로 확진사례는 8380건이었으며 역시 같은 날 인도네시아의 24시간 내 코로나 19 확진사례는 1209건, 누계로 확진사례는 6만 4958건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중동의 카타르의 24시간 내 확진사례는 546건, 누계로 확진사례는 10만 345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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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8
  • 재외동포재단, 춘천교육대학교와 MOU 체결
    ▲재외동포재단은 내국민의 재외동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춘천교육대학교와 7월 8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재외동포재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재외동포재단(이사장 한우성)은 내국민의 재외동포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춘천교육대학교(총장 이환기)와 7월 8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협약식에는 재외동포재단 한우성 이사장, 김봉섭 전문위원, 춘천교육대학교 이환기 총장, 박미대 대외협력처장, 추병완 교수 등이 참석했다. 양 기관은 ▲재외동포 관련 내용의 초·중등 교육과정 및 교과서 반영을 위한 공동 노력, ▲재외동포 이해교육을 위한 『재외동포 이해교육 매뉴얼』 개발 및 교수학습법 공동 연구, ▲ 재외동포 관련 교육 자료 공동 연구 및 인적 교류 등 재외동포 이해활동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협력 프로그램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우성 이사장은 “대한민국 독립, 6·25 전쟁 극복,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재외동포들의 엄청난 기여가 있었음에도 국민들은 잘 모르는 실정”이며, “이번 계기를 통해 5,200만 내국민과 750만 재외동포가 서로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민족적 에너지가 극대화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교육부는 2019년 발간 국정교과서에 재외동포 주요 인물을 수록하기 시작했으며 재외동포 이해 제고를 위한 부처 협업형 고등학교 인정 교과서 “세계 속의 한인”과 중학교 인정 교과서 “동행해요! 세계 속의 한인”을 연 내에 발간, 집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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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8
  • 獨 청소년 흡연율 수십년래 최저치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독일연방 건강교육 센터가 발표한 독일 청소년 흡연행위 조사보고에 따르면 독일 청소년 흡연율은 수 십 년래 최저수준으로 내려갔다고 일전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있은 조사에는 도합 7000명에 달하는 12세부터 25세까지의 독일 청소년들이 참가, 12세부터 17세까지의 청소년 중 5.6%가 가끔 혹은 경상적으로 흡연했고 18세부터 25세까지의 청소년의 흡연율은 21.2%였으며 이상 두 연령단계의 수치는 독일 해당 조사기록이 작성되기 시작해서의 최저 수치였다. 동시에 독일에서 12세부터 17세까지의 청소년 중 85.1%는 종래로 흡연한적이 없다고 표했고 18세부터 25세까지의 청소년 중 미흡연자의 비율은 45.9%였으며 이상 두 수치는 독일에서 해당 기록이 작성되기 시작해서부터의 최고 수치였다. 일전 독일연방 마약방지 사무전원 루트비히는 연방의회가 법규를 출범하여 담배 판매광고에 대한 제한을 진일보 강화해야 한다면서 독일 청소년 흡연율이 장시기 동안 저 수준으로 유지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독일연방 건강교육센터 책임자인 다이스는 독일 청소년 흡연율이 하강하는 동시에 청소년 중에서 대마초 흡입율은 상승하여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면서 대마초 흡입은 청소년의 신체발육과 신심건강에 불리하다고 언급하였다. 독일에서는 1973년부터 정기적으로 청소년 흡연상황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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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6
  • 바이든 대선경쟁 자금조달 연 2개월 트럼프 추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미국에서 앞당겨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조 바이든의 6월 분 대선경쟁 자금조달은 1.41억달러, 연속 2개월 도널드 트럼프를 초과하고 있다고 3일 워싱턴에서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지난 5월, 바이든의 대선경쟁 자금조달은 트럼프에 비해 약 100분의 10%를 초과하였고 6월의 자금조달은 그가 올해 이래 월 자금조달을 받은 최고기록을 냈다. 한편 트럼프의 대선경쟁팀과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설립한 연합위원회는 트럼프 팀과 공화당 전국위원회의 제2분기 공동 자금조달은 2.66억 달러로 이 중 6월의 자금조달이 1.31억 달러였으며 이 역시 올해 이래 트럼프의 월 자금조달의 최고기록이었다. 지난 6월 초, 바이든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트럼프는 지난 3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트럼프는 3년간의 모금 노력으로 거대한 대선자금 우세가 있었다. 지난 2분기까지 트럼프와 공화당이 장악한 대선경쟁 자금조달은 2.95억 달러였다. 바이든은 후보로 지명된 후부터 트럼프와의 자금조달 차이를 축소하는 속도를 다그쳤다.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6월 23일 처음으로 바이든과 함께 모금활동에 참가, 바이든을 위해 1100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받게 해주었다. 그리고 지난 6월 30일, 바이든은 코로나 19의 유행기간 대선집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영상을 통해 언급하기를 일부 범위와 관건 주의 민의조사에서 자신이 트럼프 지지율을 앞섰다고 하면서 자신의 민의조사 데이터가 괜찮지만 현재 함부로 판단하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겸손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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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3
  • 친구와 놀면서 배워요!
    [동포투데이] 호치민시한국국제학교(교장 신선호)는 2020년부터 초등 교육과정을 개편하여 ‘중간놀이’ 시간을 새롭게 도입하였다. 이는 1~2학년 교육과정 재구성을 통한 중간놀이(2교시 후, 매일 30분)시간 확보를 통해 초등 저학년 학생들의 보다 안정적인 인성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학교에서는 약 1억 원을 투자하여 놀이 공간을 확충. 건축자재 보관 공간을 재정비하고 천연잔디를 심어 운동장을 조성하였으며, 인조 잔디를 깔은 풋살장을 별도로 만들어 6월 11일에 개장하였다. 실내 활동중심수업 공간 확보를 위해 소체육실과 다목적실을 만들고, 안전 보강 공사를 6월 28일에 완료하였다. 작업장이 있던 창고는 다문화의 상징인 무지개색 지붕‧기둥과 바닥에 사방치기 그림이 있는 무지개놀이터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1학기를 마무리하며 교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만족도 조사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가 행복한 중간놀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 95%의 학생들이 중간놀이에 만족한다고 답하였고, 교사들 역시 중간놀이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다. 중간놀이 운영을 담당하는 이효순 교사는 “학생들이 친구들과 서로 협동하며 성장하고, 기발한 놀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라고 운영 소감을 밝혔다. 신선호 교장은 “중간놀이 시간을 도입한 것은 학생들의 상호 역동을 통해서 리더십, 협업 능력, 의사소통 능력, 공동체성, 문제해결능력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미래 인재가 갖춰야 할 중요한 역량을 키워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도입 취지를 밝히며, “중간놀이는 어쩌면 그 어떤 수업보다도 우리 아이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내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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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2

오피니언 검색결과

  • 민국의 제일자객 왕아초
    ●김수희 왕아초(王亚樵), 장개석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틀 이가 시큰거렸고 대립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문을 든든히 잠갔는가 검사했어?”하고 소리쳤다. 구상해탄의 3거두인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도 길에서 왕아초를 만나기만 하면 급히 길을 되돌아 다른 길로 가군 했고 늘 부하들에게 절대 왕아초의 기분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원 국민당 군통의 핵심 인물인 심취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귀를 두려워하지만 마귀는 왕아초를 두려워한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별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있던 민국의 난세에 위세가 등등한 신비한 인물 왕아초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예가 뛰어나고 경공(轻功)이 탁월하며 신출귀몰하고 행방이 묘연하며 올 때는 소리 없이 왔다가 갈 때는 흔적 없이 사라지군 했다. 그는 전문 상층사회의 고관 요인들과 일본군 고급 관리들을 암살했다. 그는 늘 상해, 남경, 무한, 복주, 홍콩, 난닝 등지를 귀신같이 달려 다니며 어디에 탐관, 한 간, 일본군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제거해버리군 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번쩍하면 악인들의 머리가 날아갔고 그의 손에서 총이 “땅”하고 울리면 악인들의 심장이 멎어버리군 했다. 그는 몸매가 왜소했는데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다녀서 매우 점잖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살기등등한 도끼방(斧头帮) 방주, 항일철혈한간제거퇀 퇀장이였다. 그는 “강회대협(江淮大侠)”, “암살 대왕”, “민국제일자객”, “원동제일자객” 등으로 불리면서 강호에서 위세를 떨쳤고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 한번 왕아초와 상해경비사령 양호는 무슨 문제 때문에 상의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게 되였다. 화가 난 왕아초는 키가 작기에 걸상에 올라가서 양호의 양쪽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양호였지만 왕아초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찍소리 못하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여기서 왕아초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보아낼 수 있다. 1889년에 합비에서 출생한 왕아초는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후에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당안휘지부 부장을 담임했다. 1913년 겨울에 환계군벌 예사충(倪嗣冲)이 안휘의 정권을 빼앗고 사회당을 “난당(乱党)”이라고 하면서 진압했기에 왕아초는 상해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안휘노동자동향회”를 조직하고 암살 테러조직인 도끼방을 묶어세웠다. 도끼방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높아졌고 왕아초의 이름은 상해를 진동했다. 그가 통제하고 있는 “상해노동자총회”의 회원은 가장 많을 때 10만 명에 달했다. 왕아초와 그의 암살조직은 시종일관하게 “장개석을 반대하고 항일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암살을 통해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다. 왕아초는 상해 포동에 들어선 일본 해군 제3함대의 “출운호”를 폭발해버렸고 매국협정을 맺은 왕정위 괴뢰정부 외교부 부부장 당유임, 온갖 나쁜 짓을 다 저리른 송호경찰청 청장 서국량 등을 암살했다. 장개석, 왕정위, 송자문 등도 하마터면 왕아초의 손에 죽을번 했다. 왕아초는 여산에서 장개석을 암살하려고 했고 남경에서 왕정위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북경역에서 송자문을 암살하려고 했다. 장학량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사직하고 상해로 갔을 때 그를 맞아준 것은 기폭장치를 빼버린 작탄 이였다. 이것은 왕아초가 동북의 3000만 동포를 망국노로 만든 민족죄인 장학량에게 보낸 경고였다. 왕아초는 장학량이 정신을 차려 다시 항일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일본군, 왕정위 괴뢰특무, 군통특무, 검은 패거리 등 여러 세력들이 여러 번이나 왕아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다. 장개석은 왕아초의 머리에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었고 왕정위 괴뢰특무들은 층층이 병력을 배치하고 왕아초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으며 일본첩보기관은 덫을 놓고 왕아초를 유혹하여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기민하고 용감한 왕아초는 번마다 위험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 계속 악세력과 완강하게 싸웠다. 1933년 가을에 장개석은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왕아초의 목숨을 끊어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장개석은 왕아초의 도끼에 목숨을 잃을가봐 몹시 두려워했다. 장개석이 현상금을 내건 명단 중에 임표, 서해동 등이 있었는데 현상금은 10만원을 초과하지 않았다. 군통특무들과 경찰들이 전면 수색에 나서자 왕아초는 교묘하게 부두노동자로 변장하여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도망쳤다. 1935년에 리제심, 진명추, 왕아초 등은 홍콩에서 비밀회의를 가지고 국민당 제4기 6중전회에서 장개석과 왕정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왕아초는 화극지를 남경에 파견하여 암살을 책임지게 하고 하파광과 장옥화가 옆에서 협조하며 기자신분을 얻은 손봉명이 구체적 암살행동을 맡기로 했다. 그해 11월 1일에 손봉명은 권총을 사진기 안에 감추고 예당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개막된 후 대표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왕정위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보이지 않았다. 손봉명은 권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사격했다. 왕정위는 몸에 총알 세발을 맞았는데 한발은 몸속에 숨어있다가 9년 후에 왕정위를 일본도쿄 제국대학병원의 수술대에서 죽게 만들었다. 왕정위 암살을 왕아초가 지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장개석은 두려워서 대립을 불러놓고 명령했다. “빠른 시일 내에 왕아초를 잡아와! 산채로 잡지 못하면 죽여도 좋아. 왕아초를 잡아오기 전에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대립과 정개민은 왕아초를 잡으려고 수백 명의 군통특무를 홍콩에 파견했지만 헛물만 켜고 말았다. 1936년 2월에 왕아초는 군통특무들의 추격을 피하여 몇몇 부하들과 함께 광서의 오주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이종인과 백숭희를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를 동원해 장개석을 토벌하라고 건의했지만 이종인과 백숭희는 거절했다. 오주에 거주하면서 왕아초는 궁지에 빠졌다. 홍콩에서 왕아초를 붙잡지 못한 대립은 왕아초가 의협심이 강해 부하들에 대한 보살핌이 매우 지극하다는 것을 알고 왕아초의 부하 여립규를 붙잡아 남경의 감옥에 처넣었다. 여립규가 죽어도 왕아초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자 대립은 여립규의 처 여완군을 찾아가서 “우리가 너의 남편 여립규를 놓아주고 상금을 톡톡히 주겠으니 왕아초한테 연계하여 경제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해라"며 구슬렸다. 1936년 10월초에 여완군은 갑자기 홍콩에서 오주로 와서 왕아초의 부하들과 연계를 가진 후 왕아초에게 전화를 하여 “홍콩에서 경제형편이 힘들어 오주로 왔다”고 말했다. 그때 여완군은 이미 대립에게 회유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오주에 온후 즉시 군통 주요책임자의 한 사람인 정개민과 연계를 가졌다. 10월 20일에 그녀는 일이 있어 상의하자고 하면서 왕아초를 자기의 거처로 청했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는 여완군을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여완군의 거처에 도착한 왕아초는 수십 명의 특무들이 매복해 있는 줄도 모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왕아초가 들어서자 방안에 매복해있던 특무들이 석회가루를 그의 얼굴에 뿌렸다. 왕아초는 석회가루가 눈에 들어가 눈을 뜰수 없었지만 원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몇몇 특무들을 쓸어 눕혔다. 하지만 특무들의 쏜 총이 다섯 발이나 그의 가슴에 명중되었고 세 곳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특무들은 잔인하게 왕아초의 얼굴가죽을 벗겨버렸고 살인멸구하기 위해 여완군까지 죽여 버렸다. 대립은 1923년에 호종남, 호포일과 함께 왕아초와 의형제를 맺었지만 의리를 저버리고 왕아초를 살해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의 약점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고 소리 없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암살대왕” 왕아초를 살해했다. 일본 놈들의 손에도 넘어지지 않던 일대의 민족영웅은 처참하게 장개석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아초는 길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서슴없이 칼을 뽑아 도와주는 호한이었고 탐관오리, 악당, 일본군을 보면 처단해버리는 영웅호걸 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05
  • 조선족,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김희수(중국) 고국(한국과 조선)이 있어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사실 중국 조선족은 지금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주류 민족에 서서히 동화되여가고 있다. 농촌에서는 이농현상으로 농촌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에서도 조선족의 민영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물론 대도시에는 비교적 큰 조선족 기업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굴지의 기업이 없다. 더구나 연변에는 조선족 사회의 견고한 토대로 될 중대형 기업이 별로 없다. 조선족 대부분은 외국 돈벌이에 의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경제의 취약한 상태는 경제동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족의 취업,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 민족이 문화 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을 지키고 중국 땅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중국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면서 인구이동, 인구감소로 민족교육체계가 붕괴되고 민족문화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동화를 막는데 가장 중요한 조선족 학교도 줄어들고 있다. 농촌학교는 물론 도시학교도 하나둘씩 폐교되고 있다. 조선족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인구도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말과 글보다 한족 말과 글을 더 잘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 신문, 잡지도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조선족 사회가 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세대만큼은 동화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동화되지 않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류 민족에 동회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 앞으로 우리의 아들이거나 손자, 증손자가 학부모가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때에 가서 중국 조선족 인구가 줄고 줄어 자치주가 없어지고 조선족 학교도 폐교되고 우리 말로 된 방송, 텔레비전 방송도 없어지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도 자취를 감춘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학교도 없는 우리글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신문 잡지도 없는 우리글을 사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때 가서 우리글은 완전히 외국어(한국, 조선)로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어를 배운데 해도 고 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은 또 그때 가서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조선으로 이민 가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조선족들이 모두 고국(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그때 가서 고국으로 가서 사는 조선족들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중국에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도 적이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고국이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중국 땅에 계속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 땅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고국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만족처럼 동화될 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말을 하고 중국어를 써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미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서 관념도 점점 희박해지면서 결국에는 동화되고 말 것이다. 만주족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금 만주족은 말로는 만주족이지 한족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20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과거를 자랑하면서 “나는 만주족이다”라고 하는 만주족은 없다. 대부분 만주족은 자신이 만주족이란 관념도 상실하고 있다. 동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 있고 자기의 자치주를 갖고 있고 자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갖고 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 가듯이 고국만 믿고 동회 위기에 철저히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완전히 동화될 수 있다. 그때 가서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할 사람, 불러줄 사람이 있을까?
    • 오피니언
    • 칼럼
    2020-07-05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②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 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 시위를 펼치고자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 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열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어나가 지니고 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 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定差)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 채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으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 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 들어 짐짝처럼 차 뒷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육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되었음. 처형 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 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 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 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 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었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 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 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역사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 양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코, 쿠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 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 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 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 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 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이다. 상해의거로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 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립 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 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 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 의한 의열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임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임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연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완바오산 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 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 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 만큼 상해전쟁 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 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 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양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 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 세계의 각광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 세계가 놀랐다. 임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과시한 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 성과는 가히 짐작될 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랫동안 친일노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 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역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 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 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 음 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 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역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었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양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양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 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 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 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를 세운 열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역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①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 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 있던 숨 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역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뒷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어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었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어난 집안은 몰락한 양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 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 살 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어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 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역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 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 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 수 있었다. 1926년 19세 되던 해 “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 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 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이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었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이었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양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이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임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 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 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 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 앞" 역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내왕하면서 듣고 본 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 죽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숲속에 자고 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 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내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 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 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 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 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플러스 검색결과

  • 법무부, 자가격리 위반 등 외국인 3명 추가 출국 조치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격리시설에서 무단 이탈하고 자가격리 조치를 위반한 외국인 3명에게 출국조치가 내려졌다. 법무부는 26일 격리시설에서 무단 이탈한 한국계 미국인 1명과 자가격리 조치를 위반한 외국인 2명을 출국조치했다고 밝혔다. 시설에서 무단 이탈한 미국인(한국계) A씨는 6월 21일 입국하여 격리시설에 입소한 뒤 당일 밤에 인근 편의점을 방문하는 등 약 20분 가량 거리를 배회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자가격리 조치를 위반한 칠레인 B씨는 이태원 클럽 방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자가격리 조치 당시 격리장소를 과거 체류지로 허위로 신고하고 방역당국의 자가격리 확인 전화도 고의로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스페인인 C씨는 자가격리 중 3일 동안 10 ~ 20분씩 5회에 걸쳐 격리지를 이탈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지난 23일 출국조치를 받은 한국계 미국인 A씨는 출국한 상태이며, 칠레인 B씨와 스페인 C씨도 항공편이 마련되는 대로 출국하게 될 예정이다. 한편 모든 입국자에 대한 의무적 격리가 시행된 4월 1일 이후 현재까지 공항만의 특별입국절차에서 격리에 동의하지 않아 강제송환된 외국인은 40명이고 격리시설 입소를 거부하거나 입국후 자가격리 의무를 위반해 추방된 외국인은 28명이다. <사진=법무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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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입국·외국인정책
    2020-06-26
  • 이달 22일부터 재입국 허가 신청 온라인으로 가능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국내 체류 외국인의 재입국 허가 신청이 온라인으로도 가능해진다. 법무부는 22일부터 국내 체류 외국인 '온라인 재입국 허가 신청 시스템'을 운영 개시한다고 19일 밝혔다. 이에 따라 모든 등록외국인은 '하이코리아' 사이트에서 재입국 허가 신청을 할 수 있고, 신청서류 제출, 수수료 결제, 재입국허가서 발급이 모두 가능하다. 특히,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할 경우 신청 수수료도 기존 3만 원에서 2만 4천 원으로 20% 경감된다. 현재는 전국 출입국·외국인청(사무소·출장소)과 공항만 출입국민원센터에서 재입국 허가서를 발급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국민과 체류 외국인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도입된 '재입국 허가제'를 안정적으로 시행하는 한편, 제도 시행에 따른 국내 체류 외국인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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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입국·외국인정책
    2020-06-19
  • 국적 신청, 방문 전에 예약하세요.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7월 15일부터 국적 신청 민원에 '방문 예약제'가 도입된다. 법무부는 민원인들이 장시간 대기하는 불편을 줄이고, 민원실 혼잡에 따른 코로나19 확산 등을 차단하기 위해 7월 15일부터 국적 신청에 대해서도 방문 예약제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방문 예약 대상 업무는 각종 허가(귀화허가,국적회복허가), 각종 신고(국적상실신고,국적선택신고,국적보유신고, 인지에 의한 국적취득신고,국적재취득신고), 확인서 발급(외국국적포기확인서,외국국적불행사서약확인서) 및 국적판정 등이다. 이에 따라 7월 15일 이후 국적을 신청하려는 사람들은 방문 전에 ‘하이코리아(www.hikorea.go.kr)’에 접속하여 방문 시기와 방문 기관을 예약하고 해당 기관을 방문하면 전용 창구에서 민원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 법무부는 이번 방문 예약제를 연말까지 시범 운영하여 제기된 민원인 불편 사항 등을 개선한 후,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전면 예약제를 국적 업무에 도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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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입국·외국인정책
    2020-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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