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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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설명: 1948년 남경에서 찍은 심안나와 화명지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모택동의 공산당군에 패해 섬도 대만으로 쫓겨간 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로 되었다. 하다면 월등한 미국 군장비로 무장하고 거기에 수많은 출중한 군 고급 지휘관들이 있는 장개석 군이 왜 <좁쌀에 보총>에 불과한 공산당군에 여지가 없이 완패해 그런 꼬락서니로 되었을까? 여기에는 국민당군이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얻지 못하고 많은 군장령들의 부패상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공산당의 첩보전이 국민당군의 비밀을 수많이 수집하여 공산당군에 넘기어 남경의 일거일동을 연안에서 손금보 듯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공산당의 지하공작 즉 첩보 사업은 그 인원수와 사업의 완성도 방면에서 국민당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안나(沈安娜)―그녀는 출중한 홍색 여첩보원으로, 장시기 동안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速记员)으로 국민당 통치구에 잠복해 있으면서 국민당 최고급별의 당, 정, 군 특별회의 정보들을 대량 수집하여 중공 측에 넘기면서도 단 한번의 실수가 없었고 그 신분도 폭로되지 않아 국내외 첩보계의 경탄을 자아냈다.

1915년 심안나는 절강성 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7살이 되던 해 그녀는 여차여차한 사연으로 당시 중공의 특공일군이었던 화명지(华明之)를 알게 되었다. 당시 심안나는 점잖으면서도 여러모로 박식한 화명지를 곧 잘 따랐고 알게 모르게 심안나와 화명지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결국 그녀는 화명지의 영향을 받아 첩보 사업이란 이 길을 선택했다. 1934년, 자신의 첩보업무의 전업을 선택할 때 심안나는 가정의 경제사정으로 상대적으로 학비가 적은 스피드 기록반을 골랐다. 이는 향후 그녀가 하는 사업을 위해 양호한 토대를 닦았다.

스피드 기록반을 졸업한 후 심안나는 조직의 지령에 의해 민국 절강성 정부에 들어가 기록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녹음펜이 없는 당시엔 모든 회의기록은 전적으로 종이와 필에 의거해야 했다. 각종 회의로 매일 매일이 이어지는 정부기관에서는 반응이 빠르고 각종 기교가 겸비된 기록원일수록 상급의 총애를 받기 마련이다. 심안나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참답게 일하는 성실한 일군이었고 거기에 민첩하고 업무수준도 높았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절강성 주석 주가화(朱家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화명지의 도움으로 대량의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요령도 장악하게 되었다.

자주 만나고 여러모로 교류하는 과정에 심안나와 화명지 사이의 <혁명적 동지의 관계>는 애정관계로 승화되어 사업과 생활에서 모두 편리하였다.

1935년 가을, 조직의 비준으로 심안나와 화명지는 상해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 후 조직의 지령으로 잠시 첩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남편의 뒤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다가 1938년 원 국민당 절강성 주석이던 주가화가 당시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으로 진급하자 심안나한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주가화한테 재차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찍 심안나의 총명과 업무능력을 인정했던 주가화는 심안나가 남경으로 찾아가자 그녀를 아주 반겨맞아 주었다. 주가화의 추천으로 심안나는 아주 쉽게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으로 될 수 있었다.

그 때로부터 심안나는 자신의 총명과 숙련된 기능을 보여주면서 선후로 각종의 많은 고위층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서는 남편 화명지를 통해 당조직에 제공하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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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국민당 고위층 회의에서 장개석이 연설할 때 뒷줄 오른쪽 기록하고 있는 심안나

한편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국민당 중앙 급의 여러 계층 고위 관리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그들의 추천에 의해 하마터면 국민당 중앙의 <입법위원>으로 될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듯 높은 <벼슬자리>도 결코 심안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편리한 직업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국민당의 중요정보를 수집해 공산당에 제공하기 위하여 그녀는 “아직은 나이도 젊고 자격과 능력도 부족하다”고 겸손한 체 하면서 그 <벼슬자리>를 사절하였다. 이는 많은 국민당 고위급 관리들의 감동을 더욱 자아냈다. 심안나의 사진 자료들을 보노라면 한 장의 사진이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그 사진 한 장이 그만큼 여러 가지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은 1948년 4월, 남경 정가교(丁家桥)의 국민당 당부 예당에서 장개석이 회의를 주최하는 것을 촬영한 것으로 일찍 국민정부의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이었다. 사진에는 장개석이 주석대 중앙에 서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주석대 뒷줄 오른쪽 즉 장개석과 약 5미터 거리를 두고 1남 1녀가 회의기록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 머리를 숙이고 기록하고 있는 여성이 바로 적의 핵심부에 잠복해 있었던 심안나였다. 그러니 이 사진이야말로 심안나의 첩보사업 생애에서의 아주 진귀한 견증으로 되고 있다.

장장 14년에 달하는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잠복사업 중 심안나와 그의 남편 화명지는 수많은 위험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서로 밀접히 배합하면서 번마다 안전하게 그런 위험고비를 넘기었다. 이는 중공의 비밀사업 전선에서 부부합작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되고 있다.

1949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100만 대군이 장강을 뛰어넘어 남경을 함락하자 심안나와 화명지는 해방군 대오와 합류하는 것으로 장장 14년에 달하는 지하첩보원 생애을 완벽하게 마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심안나는 국가안전국에 배치되어 정년이직을 할 때까지 새 중국의 안전을 지키는 사업에 그 심혈을 몰부었다.

1989년 중국 국가안전부에서는 심안나에게 영예상장 및 영예증서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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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신변의 홍색 여첩보원 ― 심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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