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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묘한 세계 대백과 (31)
    만약 태공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면 지구는 하나의 푸른 색을 띤 성구이다. 왜냐하면 지구표면의 7/10 이상이 바다무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넓고도 신비한 해양세계에는 형형색색의 해양생물들이 생활하는데 거기에는 육지에 비해 더욱 풍부한 자연자원이 있어 바다는 그야말로 하나의 푸른 보물고임에 틀림 없다. 해양에는 대량의 물자원이 축적돼 있으면서 아울러 우리에게 영양가치가 높고도 맛이 있는 물고기, 게, 등 해양식품을 공급하고 있다. 그 외 해양에는 풍부한 광산자원이 깔려 있으며 그 종류와 저축량은 아주 놀라운바 빈해의 돌광산, 해저석유, 린칼시움석(磷钙石)과 해록석 등이 아주 많아 인류의 후비자원고로 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조석(潮汐)발전과 해수담화, 해양약업 등 산업을 진일보 발전시키고 있으며 해양은 인류를 위해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어 인류를 위해 사심없이 기여하는 “백보상(百宝箱)”과도 같다. 바다물의 담화와 바다물의 직접 이용은 많은 담수자원을 절약할 수 있게 한다. 바다물의 담화기술은 20세기 50연대부터 시작되였는데 목전 가장 성숙된 담화방법은 증류법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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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3-2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1)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릉 병마용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섬서성 임동현 경내 함의: 진시황릉 병마용은 세계 8대 기적임 진시황릉은 중국 역사상 제일 첫 황제인 진시황의 능묘로 기원 전 248년부터 기원전 208년에 수건한 것이다. 이 거대한 황제릉이 기타의 능묘와 가장 큰 다른 점이라면 그것은 방대한 지하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하여 세계 8대기적으로 된 진시황를 병마용이다. 여기의 군대는 사병과 말과 전차 등이 있는데 도자기모형으로 조성되었으므로 실물의 크기가 같았고 그것들은 순장품으로 지하황릉을 지키는 것이었다.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당당하기로 이름있는 진시황릉 병마용이다. 지하황궁 진시황의 황릉은 설계와 수건에 있어서 흡사 진시황이 생전에 살던 궁전을 방불케 한다. 전반 능원은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 쌓이었는데 하나의 “回”자형을 이루며 황성과 궁성을 상징한다. 능원의 핵심은 지궁(地宮)이며 기타의 건축물은 담장, 배장갱(陪葬坑) 등으로 모두 지궁을 둘러싸고 건축되었다. “사기”에서 진시황릉의 지궁을 묘사한데 따르면 지궁의 천정에는 해와 달 그리고 별무리가 그려져 있었고 또한 인조대지가 있었는데 대지에는 산봉과 하류가 흐르기도 했다. 하류는 수은으로 만들어졌는데 반짝반짝 빛을 발산해 매우 아름답다. 지하군대 고고학자들이 발견한데 따르면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은 세 곳에 있는데 “品”자형으로 배열, 도합 8000건의 도용(陶俑)이 출토되었고 전차 100여대와 수만건의 실물병기 등 문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중 1호갱은 “우군”으로 도용과 도자기 말이 6000건이 되었고 2호갱은 “좌군”으로 보병, 기병, 전차 등 3개 병종으로 혼합편성된 진을 이루어 이 병마용갱의 “정규군소재지”었으며 3호 갱은 무사용(武士俑), 전차, 도자기말로 지하대군을 통솔하던 지휘부였다. 이 군대의 진영은 그야말로 진나라 군대 편성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5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7)
    ■ 김철균 2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영이는 늘 수심에 잠겨있던 지난날과는 달리 활달한 모습을 보이었다. 자신을 낳은 친 어머니는 없지만 자신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새로운 조선족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는 영애를 비롯한 순자네 자식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알고 보니 순자의 딸들 역시 착하고 친절했으며 문영이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자매들이었고 점점 나날이 지나면서 오빠들 또한 모두 점잖고 유식했으며 동정심도 많은 형제들이었다. 문영이는 일요일마다 “북해상점”에 와서 순자와 어울려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상점옆에 있는 영옥이네 집에 들어가 영옥이네 아들애와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순자의 일을 거들어주면서 김치와 장을 담그는 재간과 기타 주방일을 배웠다. 일이란 내켜서 하는 것이라 재미있기 마련이었고 문영이는 열심히 조선족주방일을 배웠으며 얼마 안있어서는 제법 조선족 여성에 못지 않게 주방일을 척척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담근 김치도 제법 맛있다는 평가를 받아보기도 하였다. 문영이가 기뻐하며 기를 펴고 나다니자 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 또한 흐뭇하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순자의 남편 김용환 교원도 상점에서 문영이를 만나보고는 자신도 어렵게 자라면서 공부를 해온터라 문영이에 대해 진정으로 아껴주면서 친딸처럼 대했다. 그 해 겨울방학이 되자 문영이는 연길을 떠나 돈화에 있는 아버지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순자의 곁에 있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었지만 문영이는 가야만 했다. 방학기간만이라도 장애자인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문영이를 돈화로 보내는 것 이는 또한 순자의 뜻이기도 했다. 문영이가 떠날 때 순자는 과자, 사탕, 과일, 술 등 먹을 것을 한아름이나 사서 문영의 가방안에 넣어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문영이를 돈화의 시골로 보내긴 했지만 이는 가슴의 살을 도려내듯 저리고 아픈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문영이가 떠난 이튿날부터 순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으로 끙끙 속을 앓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돈화의 농촌은 이곳 연길보다 많이 더 춥겠는데 얘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는지?…얘 영순아, 문영이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또 앓지나 않는지 전보라도 한통 쳐보려므나.” “어머니, 우리가 자랄 때는 막 굴러다니며 자라게 하더니 이번에 한족딸을 삼으니 제법 정성이 지극하구만요.” 큰 딸 영순이의 악의없는 농담에 순자는 제법 정색을 했다. “너희들 그렇게 생각하면 못쓴다. 걔는 에미가 없는 애란다. 너희들과는 달라. 너희들도 걔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알겠습니다. 한족딸의 어머니, 이 조선족딸들은 그 영을 받들어 따르겠나이다.” 막내 딸 영애도 한술 더 뜨며 말참견을 했다. “에끼, 이것들 너희들도 자식을 키워보면서 그것도 몰라?” 순자 역시 악의없이 딸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순자의 뇌리속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뿐, 요즘 세월처럼 전화 한통이라도 할 수도 없었고 다만 편지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 어느 덧 음력설과 정월보름이 지나고 위생학교 울안의 백양나무에 까치가 앉아서 우는가 싶더니 개학을 앞둔 어느 날 문영이가 나타났다. “어머니!” “문영아!…” 모녀는 대뜸 한덩어리가 되었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문영아, 나도 그랬어. 나도 네가 보고 싶어 죽는줄 알았다.” 모녀는 다시 한덩어리가 되었다. 이윽고 문영이의 손을 잡아보는 순간 순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구, 네 이 손이 뭐냐?” 그도 그럴 것이 문영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거웠고 손등은 얼기설기 갈라터지기까지 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집에 가있는 동안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찬물에 밥을 하고 빨래하고 하면서 무척 고생한 것이 분명했다. 순자는 문영이의 언손을 가슴속에 꼭 품어 주었다. 순자의 따뜻한 살결이 손에 닿는 순간 문영이는 뜨거운 모성애에 눈앞이 흐려났다. 아, 모성애란 바로 이런 것인가?! 순자의 가슴팍에 안긴 문영이는 7-8살이 어린애가 되고 싶었고 그대로 발버둥이질을 치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으며 아니, 그대로 영영 떨어지고 싶지를 아니했다. 때마침 이들의 상봉을 알아주기라도 하는듯 당시 중국대륙에서 많이 유행되던 대만가요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대만영화-‘어머니 다시 한번 더 사랑해 주세요’에서의 주제곡)”가 “북해상점”의 반도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같지요// 엄마품에 안기어 행복 끝없어라… 한편 순자와 문영이가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 있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는 영순이와 영애마저도 눈시울이 뜨거워나게 했다. 3 봄이 왔다. 뒤늦게 찾아오는 북국의 봄이지만 봄이 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해빛은 포근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매섭지 않았으며 사람마다 봄이 좋다고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아니 이 시각, 자연계에 찾아오는 봄도 좋았지만 문영의 가슴에 스며드는 인생의 봄은 더욱 따뜻하고 좋았다. 봄을 맞는 마음은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그 해는 한족딸 문영이와 인연을 맺은 뒤 맞는 봄이라서인지 더욱 즐겁기만 했다. 문영이는 자주 “북해상점”으로 찾아왔다. 또한 문영이가 오지 않으면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이틀만 서로 보지 못해도 그리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어느 덧 “3.8절”이 다가왔다. 그 날 학교에서는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전체 사생들을 휴식시키기로 했다. 그러자 집으로부터 용돈을 좀 넉넉히 받아쓰는 학생들은 기숙사식당의 밥은 먹지 않고 외출준비에 서둘렀다. 밖에 나가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옷도 사입으면서 유쾌하게 “3.8절”을 쇠려고 말이다. 그러나 문영이를 비롯한 가난한 가정의 애들 몇몇은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외출하는 애들이 함께 나가 식사라도 한끼를 같이 하자고 했으나 일일이 거절했다. 그 애들도 집에서 보내오는 돈을 쓰기에 남을 도우면서까지 쓰기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까닭없이 남의 배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긴 문영이는 순자네 “북해상점”으로 찾아가 맛있는 것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늘 함께 어울리던 애들을 떼놓고 혼자 가기도 미안했고 그렇다고 그 애들을 몽땅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순자가 헐레벌떡 기숙사로 찾아왔다. “문영이 있구나. 내가 좀 늦었구나. 아직 밥먹기 전이지? 오늘은 ‘3.8절’이니 상점에 가서 물만두나 빚어먹자꾸나.” “어머니, 전 괜찮아요. 기숙사식당에도 밥이 있는데요 뭘…” “얘, ‘3.8절’날에 왜 고독하게 기숙사식당에서 밥을 먹겠니? 자, 그러지 말고 함께 가자꾸나. 오후에 수업도 없다면서…” “그런데…” 문영이는 함께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던 얘들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순자는 눈치를 인차 알아 차렸다. “너, 저 애들 때문에 그러는구나. 그럼 저 애들도 함께 데리고 가면 될게 아니냐?!” “어머니 정말요?…” 문영이는 기쁜 나머지 순자의 목을 끌어 안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북해상점서 한족딸 문영이와 장려(안경을 낀 사람 장려임)한테 일본어를 배워주는 김순자(흰위생복을 입은 사람 김순자임) 그 날 문영이와 몇몇 가난한 집의 자녀들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만들어준 물만두와 몇가지 맛있는 밑반찬과 볶음채를 먹으면서 “3.8절”을 기념했다. 음식을 다 먹자 천진난만한 여자애들은 자기네들이 보고들은 학교얘기와 기타 사생활을 화제에 올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와 중 어느 한 애가 학교과목 중 일본어가 배우기 가장 힘들다고 했다. 이에 문영이도 한마디 동조했다. “그래 나 역시 일본어가 힘들긴 마찬가지야. 선생님들이 말하기를 발음상에서 조선족들은 일본어를 배우기가 쉽대. 한족은 영어를 배우기가 쉽고 말이야.” 순자는 설겆이를 하다가 엉결에 그 애들이 주고 받는 말을 엿들었다. “얘 문영아, 일본어가 배우기 힘들다구?” “그래요, 어머니. 가장 힘든 것이 일본어예요.” “음, 그랬구나. 그럼 진작 이 엄마한테 얘기할 것이지.” “뭐예요?! 그럼 어머니가 일본어를 배워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그래, 안믿어?! 이래뵈두 난 해방전 일본인이 교장하는 학교에서 전문 일본말로 대화하며 공부한 사람이란 말이다. 일본어를 모른다면 아주 섭섭한 일이지.” “야 ㅡ 정말……” 여자애들은 탄성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가 한 말은 결코 제 자랑을 늘여놓는 것이 아니었다. 소학교 시절의 6년간 일본의 노화교육을 받았던 그는 일본어의 회화나 문자 실력이 당시 연변 내의 웬간한 일본어 교원은 뺨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상점벽에 자그마한 흑판 하나를 걸어 놓고는 문영이를 비롯한 몇몇 위생학교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일본어실력은 대단했다. 한낱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여겼던 순자한테 그렇듯 놀라운 일본어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문영이와 기타 학생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 틈만 나면 순자한테로 찾아와서 모를 것을 물어보군 하면서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군 했다. 순자의 보충교수로 문영이를 비롯한 애들의 일본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제고돼 갔다. 문영이는 순자와 자기 자신의 인생이 함께 엉키게 된데 대해 진정으로 고마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하늘에 하느님이 있다면 문영이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배려라고 인정하고 싶기도 했다. 연변위생학교ㅡ “북해상점”ㅡ 김순자어머니ㅡ그리고…만약 자신의 인생에 연변위생학교, “북해상점”과 김순자어머니가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까 하고 문영이는 자주 반문해 보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의 사랑과 도움에 고마워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뭔가 어머니한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는 것으로 어머니가 기뻐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것이 후날 문영이가 작가로 되는 취지가 되기도 했다. 평소에 그림그리기를 즐겼고 또 어느 정도 “미술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를 노래하는 첫 스타트로 “꿈속의 어머니”란 제목으로 된 그림 한장을 그렸다. 홀로 상상해서 그렸으니 어떻게 보면 이는 창작이기도 했다. 그림속에는 술병, 간장병과 기타 상품들이 있는 가운데 새하얀 위생모자를 쓴 순자가 벽에 걸린 작은 흑판을 이용하여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의 수준을 떠나 그 속에는 순자에 대한 문영이의 고마움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4 “3.8절”이 지난 후 3일 뒤, 이른 봄이었지만 그날은 날씨가 제법 더웠다. 그 날 물건구입을 나갔던 순자는 행인들의 옷차림과 자신의 옷차림을 비교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겨울옷을 걸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행인들 거의 모두가 가볍고도 환한 봄철 옷으로 단장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연길복무청사 냉면부의 출입문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오자 목에 갈증이 생기면서 냉면생각들이 난 모양이었다. 순간 순자는 또 문영이가 생각났다. 문영이를 보지 못한지도 사흘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기숙사밥으로 끼니를 에우며 공부를 하고 있을 문영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알짝지큰해났다. 순자는 문영이한테 냉면 한그릇 사먹이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별로 늦지는 않았다. 순자는 종종걸음으로 문영이의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는 마침 문영이가 있었고 점심밥을 먹기 전이었다. “문영아, 오늘 무척 덥구나. 나와 함께 냉면 한그릇씩 먹지 않을래?” “냉면?! 어머니 저한테 냉면 사줄래요? 오케이, 야 신난다. 오늘 냉면 먹게 됐구나!” 키만 컸지 문영이는 여전히 애나 다름이 없었다. 냉면을 먹는다고 하니 그렇게 뛸듯이 좋아하는 문영이를 보며 순자는 저런 철부지를 두고 에미가 어떻게 눈을 감았느냐 싶었다. 순간 또 가슴이 뭉클해 나며 눈물이 나왔다. 하긴 기숙사생활을 오래 하노라면 어른들도 항상 속이 출출한 법이라 이는 결코 문영이가 철부지래서만이 아니었다. 미구하여 함께 복무청사 냉면부에 들어가 사람들 속을 비집고 겨우 식탁에 마주앉은 순자와 문영이ㅡ 헌데 순자는 문영의 몫으로 냉면 한그릇만을 샀다. “어머니, 왜 한그릇만 샀어요? 어머니는요?” “기실 난 아까 나왔던 김에 한그릇 먹었다. 미안하다. 혼자서 먹다가 그만 네생각이 나서 너한테로 간거다. 어서 먹어라.” “그랬어요? 기실 전 안먹어도 괜찮은데…” 문영이는 순자의 말을 그냥 그대로 믿었다. 쫄깃쫄깃한 냉면오리와 시원한 냉면국물,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 있는 문영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그러나 두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머니, 울잖아요? 왜 그래요, 어머니?” “아니다. 네가 먹는 걸 보니까 흐뭇해서 그런다. 앞으로는 냉면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엄마한테로 오거라.” 천진한 문영이는 오늘 어머니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점심을 굶어가며 자기한테 냉면을 사주고 있다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날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이다 보니 순자는 손님이 가장 많이 들이닥칠 점심시간에 상점문을 닫아야만 했다. 하루 매출액이 100여위안이라 할 때 점심시간에 그 50% 이상의 매출액은 그 시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은 모든 상점주인들이 다 알고 있는 상업법칙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 날 순자는 주먹구구로 아무리 적게 계산해도 70원 정도는 적게 번 셈이었고 또한 적지 않은 단골을 다른 상점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후에 단골로 “북해상점”에 드나들던 맥주애호가 몇몇이 그 날 점심에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섰다며 섭섭해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생필품을 사러 다니는 위생학교 교직원과 학생들과 그냥 길가다 찾아들어오는 행인손님들, 그 날 순자가 놓친 손님은 과연 얼마나 되였을까? 하지만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인 것에 대해 순자는 꼬물만치도 후회가 없었다. 아니, 자기가 문영이한테 등한히 대한 적이 있을가봐 항상 신경을 기울였으며 2-3일만 문영이를 보지 못해도 얘가 앓지나 않는가 하고 마음을 졸이군 했다. 그랬다. 순자가 문영이에 대한 사랑은 친 딸들에 대한 사랑 그 이상에 달했다. 이는 그 사랑을 직접 받고 있는 문영이 자신도 다는 알 수가 없었으니 타남들이야 그것을 알아줄리 더욱 만무했다. 사례로 한가지만은 꼭 적고 싶다. 그해의 여름,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면서 순자한테 값진 양털적삼, 속내의와 신 등을 기념으로 사왔다. 이런 옷과 신 등은 평소에 순자가 별로 보지도 못하던 것들이었다. 좋은 옷을 보면 입고 싶어하는 것이 여성들의 천성이라고 할까?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아들 며느리가 사다준 옷을 입어보고 신을 신어보고 하던 순자는 기쁘기 한량 없었다. “고진감래(苦尽甜来)”라고 자식들 효도에 이젠 복을 누리는가 싶었고 또한 옷이 날개라고 그 옷을 입으니 20년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순자는 그 옷을 입고 거울앞에서 이리 저리 비춰보기도 했다. 결혼한 뒤 수십년간 영감한테서는 이런 옷을 한번도 선물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자식한테서 이런 복을 받아 보다니 어쩐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또 문영이가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애는 지금 한창 피여나는 꽃나이인데 반반한 옷 한벌 없지 않은가?!) 순자는 아쉬운대로 입었던 새옷을 벗어 다시 포장했다. 순자는 문영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느 날 그가 나타나자 아들 내외한테서 선물받은 옷을 내놓았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너 큰 오빠네 내외가 북경에 갔다가 나한테 선물로 사온 것이다. 아마도 네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다.” 그러자 문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니, 전 받을 수 없어요. 어머니한테 선물한 것을 제가 어떻게 받아요.” “얘, 큰 오빠가 뭐 남이냐? 그리고 기실 그 옷들이 너무 환해서 나한테는 좀 어울리지도 않는다.” 순자는 짐짓 맘에 없는 말을 했다. 순자는 막무가내로 옷과 신 등을 문영이한테 밀어맡겼다. 기실 문영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러면서도 짐짓 그 심정을 감추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한테서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전 어머니한테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데 앞으로 왜 기회가 없겠느냐! 그리고 이 엄마가 널 해주는 건 너한테서 뭘 보답받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란다.” “어머니ㅡ” 문영이는 재차 순자의 목을 끌어 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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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3
  • 중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마오저둥의 예언
    “학문이 있다는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 남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것과 같으며 학문이 없다는것은 마치 암흑속에서 걷는 것과 같이 한치앞을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예언은 억측이 아니였다. 우연의 일치는 더구나 아니였다. 그것은 풍부한 실천경험과 연박한 지식 그리고 비범한 통찰력과 현실속에 깊이 침투해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쌓은 경험적 결론이였다. 중국공산당제7차전원회의에서 마오저둥은 이같은 발언을 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영도가 아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수면우에 드러난 보편적인 상황들만 본다면 이 역시 진정한 영도자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기전에 바야흐로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견하고 멀리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도자이다!” 1916년 7월 25일 예언 “앞으로 20년사이에 중국과 일본간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을 알리는 첫 총성이 드디여 항일전쟁의 서막을 열어제꼈고 이 한방의 총소리는 20년전 24살난 한 사범생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1919년 7월 21일 예언 “20년후, 프랑스인들에게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인민들앞에 크나큰 치욕이 생겼다. 히틀러는1918년에 독일이 투항을 선포한적 있는 바로 그 지점, 같은 기차, 같은 차바곤에서 프랑스가 투항서에 싸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1919년 7월 28일 예언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인 화를 불러올 것이다!” 마오저둥은 놀랄만한 관찰력으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장장 20년을 앞당겨 “추축국( 心 )”의 2대 파쑈마왕들이 한통속이 되여 세계에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폭발이 바로 이러한 예언의 철같은 립증으로 되였다. 1933년 11월 예언 “우리는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지구를 상대로 제5차 포위토벌을 발동하고 있을 때 마침 마오저둥은 정치생애의 궁지(低谷)에 처해있었다. 쏘베트구역과 홍군의 안위를 위해 마오저둥이 계략을 내놓았지만 중앙에서는 결국 마오저둥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1934년 12월 12일 예언 “적들이 준비해둔 ‘주머니’속에 기여들어가서는 안된다! ” 마오저둥은 “주머니”전문가이다. 그는 항상 계략의 주머니를 풀어 장개석이 스스로 기여들어오도록 했었다. 그런 그가 어찌 달갑게 장개석이 풀어놓은 주머니에 기여들어간단 말인가! 류백승이 말했다. “마오저둥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당시 3만홍군의 앞길은 훼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5월 24일 예언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 우리가 반드시 뚫고만다!” 태평천국은 증국번(曾 藩)이 이끄는 상서군의 수하에 의해 최종패배를 당했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아주 숭배했는데 늘 증국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장개석은 마오저둥이 “제2의 석달개”로 되기를 바랐지만 마오저둥은 홍군을 령솔해 겹겹한 포위를 뚫고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을 뚫는데 성공했다. 1935년 9월 예언 “남하하는것은 출로가 없다. 1년후 당신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오저둥과 장국도(   )는 함께 “중국공산당제1차대표대회”에 참석한적 있는 원로이다. 이들은 장정의 길에서 회합한후 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각기 제 갈길을 갔다. 장국도와의 분렬로 인해 마오저둥은 장개석의 포위권을 뚫고난후 일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를 보냈다. 1936년 10월 9일, 홍군의 3대주력이 합류하고 장정은 결속되였다. 1936년 7월 15일 예언 “중국은 독립된후 대규모로 외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끌어들인 외자는 쏘련정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부금 3억딸라였다. 그후 중국인들은 국제적채무를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은 후일 등소평에 의해 실현되였다. 1994년,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외자를 많이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38년 5월 예언 “중국의 항전은 7~8년이 소모될것이다!” 성사원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저둥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문장이 발표되기전, 주은래는 이미 문장의 기본정신을 백숭희에게 소개했다. 백숭희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략방침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전을 론함》을 두고 백숭희는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끌어내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라고 규납했다. 이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전국에 널리 전파되였고 항일전쟁중의 전략적지도사상으로 되였다. 과연 8년의 간고분투끝에 일본은 종국적으로 투항을 선포했다. 1938년 10월 예언 “장백륜은 반드시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깔 것이다!” 2차대전전, 영국의 수상인 장백륜은 정치가의 리성과 상인의 자사자리를 내세워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를 대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백륜이 들어올린 돌멩이는 쏘련인들의 머리꼭대기에 던져진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격이 되고말았으며 그의 정치생명도 뿌리채 뽑히우는 격이 되여버렸다. 1939년 9월 23일 예언 “루즈벨트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할 것이다!” 연안의 작은 움막에서 마오저둥은 2년이나 앞당겨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는 중국인민들이 항전에 대한 필승신념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의의로 되였다. 1959년 3월 16일 예언 “우리 군의 장래 출로는 중원에 있다!” 7년후, 마오저둥은 3갈래 대군을 중원에 파견해 정권쟁탈에 나섰으며 전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확고히 다졌다. 1942년 7월 2일 예언 “제2전쟁터가 있으면 1년내에 독일을 물리칠수 있다!” 구라파대륙이 제2의 전쟁터를 개척하기만 하면 독일을 물리치는데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될 것이라는 마오저둥의 예언대로 제2의 전쟁터는 1944년 6월에 개척되였고 독일은 이듬해인 1945년 5월에 패배를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예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  )에 첫 원자탄을 투척한 7일후, 마오저둥은 단언했다. “원자탄은 결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마오저둥의 예언은 헛된 것이 아니였다. 오늘날까지 원자탄의 습격을 받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 나라이다. 1949년 12월 9일 예언“향항문제는 협상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다!” 40년대부터 마오저둥은 향항과 오문 나아가서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기본사로를 세우고있었다. 즉 문제의 해결에 급급해하지 않고 향항과 오문의 력사와 현상태를 충분히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공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였다. 오늘날, 향항과 오문이 순조롭게 회귀한 것은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을 잘 반영하고있다. 1949년 3월 예언 “일부 공산당원들은 사탕포탄앞에 무너질 것이다!” 1952년 2월 10일, 사탕포탄의 유혹을 못이긴 류청산, 장자선이 드디여 정의의 총구앞에 쓰러졌다. 이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창도하는 전형으로 손꼽히고있다. 1955년 1월 15일 예언 “기본립자도 분해할수 있다!” 물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었지만 마오저둥은 신기하에도 20년후 물리학의 발전추세를 예측했다. 1978년, 하와이에서 거행된 “제7기 세계립자물리학토론회”에서 노벨물리상획득자는 기본립자의 이름을 “모립자”로 지을 것을 제의했다. 1956년 6월 예언 “높은 협곡은 호수에서 시작된다!( 高 出平湖)” 마오저둥은 장강삼협에 관한 전망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것을 보지 못한채 서거되였다. 1992년 4월 3일, 제7기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절대적인 우세로 “삼협공사의안”이 통과되였다. 현재 삼협공사는 시공중에 있다. 1958년 6월 21일 예언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유도탄은 10년내에 만들어낼수 있을것이다!” 1960년, 쏘련에서 전문가를 철수하고 설계도를 가져가자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은 20년사이에 아무런 원자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사이에 원자탄뿐만아니라 수소탄, 중성자탄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58년 9월 5일 예언 “대고락이 나서면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대고락(戴高 )은 경상적으로 프랑스의 해외식민정책을 위해 변호하며 적극적으로 랭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국제여론은 보편적으로 이같은 정치국면의 변화에 의해 구라파가 우회전할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마오저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고락이 나섬으로 하여 구라파중립주의의 발전을 추동하고 구라파가 미국을 떨쳐버릴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발전은 드디여 마오저둥의 이같은 예언을 실증했다. 1962년 1월 30일 예언 “중국이 세계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오저둥이 1962년 “7차인민대표대회”에서 예견했던 발전속도는 제2대 영도자가 제정한“3보(三步走)”전략과 묘한 일치를 가져왔다. 동포투데이 편집국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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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1
  • 깡패두목이 운영하는 호텔 “소탕”한 장군
    [동포투데이]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은 사실이다. 친장군의 행동은 뭔가를 시사하는 바가 많다. 허나 이 사건이 공개되자 중국의 네티즌들 중 친장군을 칭찬하는 비율이 70%나 되었다. 아래 그 이야기를 소개한다.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시좌장(石家庄)시에 “진버빤(金伯帆)”이라는 유명한 4성급 호텔이 있다. 사건은 이 호텔에서 일어났다. 2013년 7월 26일 이 호텔에 양복을 입은 두 남자가 왔다. 한명은 50여세이고 한명은 30여세로 되어 보이었다. 두 사람은 목욕을 마치고 방에서 휴식하면서 한담하다가 중년 남성이 부주의로 탁자위의 유리컵을 땅에 떨어뜨려 깨뜨렸다. 중년 남성은 젊은이에게 결산할 때 유리컵 값을 배상하라고 말하였다. 결산시 젊은이가 아주 공손하게 부주의로 방안의 컵을 깼으니 함께 계산해 달라고 하자 복무원은 머리도 들지 않고 “유리컵은 50위안입니다”라고 대꾸하였다. 이에 젊은이는 유리컵 하나에 10위안도 안하는데 50위안은 너무 비싸다고 하였다. 이에 복무원이 젊은이를 힐끗 쳐다 보더니 “비싸다구? 그럼 100위안을 내세요”라고 하였다. 이에 젊은이는 대노하여 “이게 무슨 태도냐? 경리를 불러 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복무원은 “경리를 부르면 500위안을 내야 해!”라고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0대쯤으로 되어 보이는 남성이 나타나더니 “누가 경리를 찾느냐? 내가 경리다. 무슨 일이냐? ”는 식으로 말을 걸었다. 젊은이가 아까 있었던 일을 꺼내자 경리라는 사람은 귀찮다는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500위안 내세요 이는 우리 호텔의 규정입니다.” 이러자 젊은이는 화가 나서 “이게 무슨 규정입니까? 강도의 논리가 아닙니까? 당신들 깡패입니까?”라고 말했고 그 경리라는 사람은 젊은이의 코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그래, 우린 깡패 맞아. 나 깡패두목이야. 어쩔래?” 젊은이는 화김에 옆에 서있는 중년을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당신들에게 경고하는거요, 이 분은 우리들의 수장(首长)인거야!” 이 말을 들은 경리는 중년남성을을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흥하고 냉소하더니 여전히 쓴소리를 했다. “우리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다 수장이야, 돈을 낼거야 말거야? 안 내면 사람들을 부르겠다.” “이 분은 27집단군 군장이시다!” 젊은이는 화가 꼭두기까지 치밀어올라 급히 외쳤다. 하지만 경리는 한술 더 떴다. 경리는 중년의 곁으로 다가와 한바퀴 돌면서 중년의 아래위를 훑어 보더니 한마디 한다. “얘가 군장이면 나는 군장의 애비다!” 이 때 중년이 한마디 하였다. “우리 돈 주고 가자!” 젊은이는 500위안을 카운터에 던져 주면서 경리에게 한마디 충고했다. “넌 네가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말을 마친 젊은이는 중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온 중년 남성은 젊은이게 지시했다. “딩참모(丁参谋, 장여단장(张旅长)에게 전화하여 내 명령을 전하여라! 한개 영(营)의 병력을 전부 무장시켜 전차로 30분후 이 진버빤 호텔로 오라고 해라!” 30분 후 20대의 전차가 한줄로 서서 굉음을 울리며 진버빤 호텔앞에 나타났다. 27군 보병 여단장이 직접 500명의 무장군인들을 지휘하여 달려왔던 것이다. 여단장은 차에서 뛰어 내려 중년 남성에게로 다가오더니 거수경례를 붙이었다. “보고 군단장동지! 장명이 명을 받고 왔습니다. 보병여단 정찰영의 전체 장병들이 전투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중년 남성은 “진버빤(金伯帆)”이라 쓴 호텔 간판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이 호텔은 깡패집단이 경영하는 호텔이다. 지금 명령한다. 모두 부셔버려라! 명심해라! 기물은 모두 부시되 사람이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 장여단장은 곧바로 명령을 전달했다. “1련은 호텔을 포위하고 경계임무를 수행한다, 2련은 즉시 호텔로 들어가 모든 직원들을 한 곳에 집합시켜 감시하고 손님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3련은 대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리가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 나왔다. 군단장(중년 남자)은 접시 하나를 들고 “이거는 얼마냐?”라고 묻더니 바닥으로 내리친다. 이어 “모조리 부셔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삽과 괭이를 든 200여명의 군인들이 호텔 1층부터 4층까지 모조리 부수기 시작했다. 경리는 무릎 꿇고 자기의 뺨을 치며 군단장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군단장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곁에 있는 젊은이(딩참모)에게 명령한다. “이 놈에게 귀뺨 몇매 선물하여 사람을 욕한 대가가 뭔지 알게 하여라!” 딩참모는 즉시 경리의 멱살을 잡고 버쩍 들어 올리더니 좌우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 쳤다. 경리의 입가에는 피가 흘렀다. 딩참모는 경리를 힘껏 땅에 멨다 치고는 “꺼져!”하고 외쳤다. 깡패조직이 운영하는 진버빤 호텔은 석가장에서 유흥을 즐기는 가장 크고 세력 있는 호텔이다. 이 호텔 사장은 우디(吴迪)라는 사람으로 당시 마침 호텔에 없었다. 그는 군인들이 호텔을 부순다는 소식을 접하자 몇통의 전화를 하여 부하들을 소집하였다. 이 우디라는 사람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는 사회관계망이 복잡하며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권총을 꺼내 호주머니에 넣고 차에 올랐다. … 중년 남성이 호텔문앞에 서있을 때 외곽경계를 담당한 보초병 한명이 달려 오더니 몇십대의 경찰차에 150여명의 경찰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속에는 공안국국장도 있었다. 그는 친군단장이 직접 지휘하는 것을 보자 그만 그 자리에서 어안이 벙벙하게 되였다. 그는 군단장에게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하십시오." 한마디 남긴 경찰국장은 경찰병력을 모두 철수시켰다. 경찰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경찰(武警)이 왔다. 10여대의 차량이 군인들 차량앞에 멈춰섰다. 이 때 200여명의 신분이 불명한 장정들을 태운 트럭 4대도 도착하였다. 트럭위의 장정들은 모두 칼과 사제총을 들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냉소하면서 장여단장에게 전투준비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명령이 떨어지자 경계를 책임진 병사들이 하늘을 향해 있던 가슴앞의 95식 자동소총의 총구를 일제히 밖으로 돌렸다. 이 때 병사 한명이 무장경찰 대대장 리광(李光)이 친군단장을 뵙기를 청한다고 보고 하였다. 친군단장은 들여 보내라고 하였다. 이어 전신무장을 한 무장경찰대장이 달려 오더니 거수경례를 하였다. “보고! 옛부하 리광이 군단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이에 중년 남자는 “리광, 네 이놈! 감히 부대를 거느리고 깡패들을 도우러 와? 그 껍데기를 벗겨 버리기 전에 썩 꺼져라!” 리광은 이전에 이 중년남자의 밑에서 퇀장(团长)을 한 적이 있으므로 자신의 옛 수장을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이렇게 무장경찰도 떠났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호텔사장 우디는 이제야 자기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호텔을 부수고 난 다음 중년 남자는 재개업을 하면 또 부셔버릴 것이니 재개업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사후 우디는 현금 200만위안을 갖고 중년을 만나려고 군영에 몇차례 갔다가 매번 쫓겨나곤 하였다. 우디는 하는 수 없이 허베이 성위의 고위급 인사에게 전화를 넣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 고위급 관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이 일만은 내가 도울 수 없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을 건드렸느냐? 그 사람의 아버지가 누군지 아느냐? 바로 전 북경군구 사령관, 국방부 부장 친지워이(秦基伟) 상장이다. 그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후진토우 주석도 친히 화환을 보냈다. 그는 친워이장(秦卫江) 이라 하는데 27집단군 군단장이다.” 호텔사장 우디는 손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진버빤(金伯帆)호텔은 아직도 폐업상태이다. 친워이장(秦卫江) 1955. 12년 생, 후난성 훙안현 사람(湖南省红安县)산시성 군구사령관, 제65 집단군 부군단장, 북경군구 부참모장, 제27집단군 군단장, 2010, 12년 남경군구 부사령관, 2000년 소장, 2012년 중장으로 진급, 현재 남경군구 부사령관임 친워이장(秦卫江)의 부친 친지워이(秦基伟). 1914년 11월 16일 생, 1997년 2월 2일 타계.윈난(云南)군구 사령관, 쿤밍(昆明)군구 부사령관, 청두(成都)군구 사령관, 베이징(北京)군구 사령관,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 등 역임 본문편집: 동포투데이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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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0)
    팔미라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시리아, 지점: 수리아 중부의 한 오아시스함의: 수리아경내 “비단의 길”에서의 저명한 고대도시임 팔미라(巴尔米拉)는 동서의 상업무역통로에 있다. 서기 2-3세기 시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부유하고 휘황한 궁전은 바로 그 시기에 수건한 것이다. 기원 3세기에 들어 로마인들은 이 팔미라성을 공략한 후 대대적으로 빼앗아 냈으며 마지막엔 불을 질러 이 이름난 도시로 하여금 훼멸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팔미라성은 꽃과 같은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종말짓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는 페허만이 남아 당년의 그 위대하고 화려함을 말해주면서 묵묵히 서있다. 방불히 세인들한테 하나의 오랜 문명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는듯 하다. 여왕의 전기 서기 267년, 팔미라국왕이 암살당하자 그의 미망인 자누비아 여왕은 유공자를 대신하여 집정, 자신을 “동방여왕”으로 자칭하였다. 여왕의 통치하에 나라의 변강지역은 부단히 확대발전하였다. 팔미라가 강대해지자 이는 로마제국의 경각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뒷따라 팔미라는 로마군사에 의해 함락됐고 여왕은 포로되었다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후에 시리아국민들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화폐에 여왕의 초상화를 새겨넣었다. 아름다운 문명잔해 팔미라가 다종문화의 집중지방에 위치해 있기에 이 곳의 건축물들은 고대그리스풍격, 로마풍격, 이란풍격 및 당지의 전통풍격 등으로 완미하게 융합되었으며 신비하고도 화려하다. 팔미라유적에는 아직도 중앙거리, 석각개선문, 패륵신(贝勒神)무덤, 기둥복도, 왕궁 등 유적이 남아있다. 유적의 중심에 서있는 석각개선문은 “山”자형으로 정문과 부문이 모두 큰 방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중앙거리는 길이가 약 2000미터에 달하는데 거리 양측에는 750개의 원형돌기둥으로 구성된 기둥복도가 있어 웅위롭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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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오묘한 세계 대백과(30)
    “곧추 날아예서 3000자요, 구천에 떨어지는 은하 믿기 어려워라.” 이는 중국 당조시의 대시인 이백이 폭포를 묘사한 저명한 시이다. 결백한 물이 고공중에서 날아떨어지며 폭포를 형성하는 것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대와도 같아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럼 폭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폭포란 물흐름이 높은 곳에서 지세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낙차가 비교적 큰 지세는 흔히 자연계 중의 높고도 큰 암석이 단렬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단렬된 암석은 마치 층계와도 같아 한층은 높고 한층은 낮은바 물이 이 곳을 흘러서 지날 때면 날아 떨어지면서 아주 장관을 이루는 폭포가 형성된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충격력이 매우 크게 되면서 그 물기둥이 아래의 암석을 호되게 내리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에는 큰 “凹”자형 구명이 생기며 점차 이 것이 깊은 담으로 되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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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6)
    ■ 김철균 3 순자가 문영이란 애를 한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기다리던 그 애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 물어보아도 그저 그애는 밖에 나다니기를 썩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줄뿐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순자는 한번 위생학교 기숙사를 찾아갈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찾아갈 명목도 없었다. 무턱대고 찾아가면 문영이란 애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란 날자가 또 훌쩍 지나갔다. 순자는 이제 하루만 기다려서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이유라도 달고 찾아가려고 했다. 순자가 이렇게 궁리하고 있던 찰라 마침 문영이가 찾아왔다. 순자가 “또 우표와 편지봉투를 사려는가”고 물으려 하는데 생각밖에도 문영이는 싸구려 빵 하나를 사려고 했다. 점심을 굶었는지 무척 허기진 모양이었다. “학생, 빵갖고 요기나 하겠어? 마침 상점에 금방 해놓은 뜨근뜨근한 밥과 국이 있으니 그걸 먹으라우.” 이에 문영이는 아주 놀라하며 순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점에서 국밥도 파는가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돈을 받지 않을테니 근심마우. 워낙 내가 먹자고 지었는데 좀 많이 했수다. 다 딸같은 애들인데 그냥 학생한테 먹이고 싶어서 그런다오.” 그제야 문영이는 이것저것 눈치를 보면서 순자가 차려주는 밥과 국에 수저를 대였다. 그러나 의연히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눈치보지 말고 그냥 먹수. 쯧쯧 얼마나 배고겠수?!” 진짜 몹시 배가 고팠는지 문영이는 제법 밥과 국을 맛스레 먹었다. “이름이 문영이라지? 우리 좀 얘기를 해볼까?” 문영이가 어느 정도 배가 찼겠다고 생각되자 순자는 문영이곁에 다가앉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문영이도 다소 안심이 되는지 순자를 향해 약간 방그레 웃어보였다. 크게 접촉해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순자가 착해보였던 모양이었다. “돈화에서 왔다지?” “예, 돈화 사하연의 산골에서 왔어요.” “집에는 어떤 식구들이 있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고 아버지는 장기환자로 힘든 일은 못하고 있어요.” 문영이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쯧쯧, 농촌살림에 안사람도 없고 거기에 병까지 있다니… 그러구보니 학생도 몹시 외롭구 불쌍하구만.” 문영이를 보니 순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왔다. 순자는 문영이더러 많이 먹으라며 밥과 국을 더 떠주었다. 문영이가 돌아갈 때 순자는 그녀한테 과자, 사탕 등 먹을 것을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주었다. 문영이가 뿌리치는 것도 “저녁에 허기질 때 요기하라”며 억지로 밀어넣었다. 한편 기숙사로 돌아온 문영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맘씨고운 사람이 많다지만 “북해상점” 조선족 할머니의 거동은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저 어머니가 다른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선족 여인들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강하다더니 그렇다면 저 어머니가 서양의 명절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는 산타클로스 노인같은 분이 아닐까? 그렇찮으면 조선족 여인들중에서도 남을 즐겨돕는 뇌봉같은 어머니? 맞아 꼭 뇌봉같은 어머니일것야…… 결국 문영이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박하다 해도 어디에 가든지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문영이는 저도 몰래 순자한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 뒤에도 문영이는 몇번 “북해상점”으로 찾아갔다. 웬간해서는 외출하기 싫어하는 그녀었건만 “북해상점”의 김순자를 알고난 뒤에는 틈만 있으면 절로 그 쪽으로 발길이 돌려지군 하는 문영이었다.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북해상점”에 가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순자와 마주할 때마다 문영이는 까마득히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던 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면서 무척 따사로움이 느껴지군 했다. 한편 문영이가 찾아갈 때마다 순자는 맛갈스러운 음식을 내놓군 했다. 문영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몰래 남겨 놓은듯이 말이다. 그것은 문영이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 문영이는 흔히 주말 저녁이면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 찾아갔고 이에 순자 또한 문영이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여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는 남겨놓군 했다. 그러면 문영이가 와서 그 음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일과 책에서 읽은 장면들을 웃고 떠들고 손질발질하며 이야기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영이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순자는 어김없이 호주머니에 당과류같은 것을 불룩하게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12 회 모성애 1 고생스레 자란 애들이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런 애들이 자라온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애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쉽게 남을 오해할 때도 많은 법이다. 이 면에서 흔히 여자애들이 더 심한 양상을 보이군 한다. 문영이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영이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해준 국밥을 먹고있을 때 순자의 셋째 딸 영애가 시내로 일보러 나왔던 김에 친정 어머니가 차린 상점에 들렸다. 영애는 밥을 먹고있는 문영이를 보고는 이상해하며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누구세요?” 하긴 순자가 문영이를 딸처럼 대하면서 자주 밥을 먹이는 것 등에 대해 영감과 자식들한테 일언반구도 한적이 없는지라 영애가 알리 만무했다. “오, 위생학교 학생인데 엄마가 없고 아버지는 장애인으로서 몹시 불쌍한 애란다.” “그래요? 거 참 안됐구나.” 영애는 몹시 놀라는듯 하다가 인차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문영이한테 다가 앉으며 살갑게 굴었다.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기는 영애 역시 마찬가지었다. “얘, 너 올해 몇살이지? 우리 한번 친해보자꾸나!” 하지만 영애가 낯설어서인지 문영이는 물어보는 대답이나 겨우 할 정도였다. 문영이는 어쩐지 순자한테는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지만 순자의 딸임에도 영애한테만은 저으기 눈치가 보였다. 자기가 불시에 나타났기에 문영이가 불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애가 문영이더러 시름놓고 밥을 먹으라고 자리를 피해주었지만 문영이는 그것마저 미안했다. 자기가 상점에 와서 밥같은 것을 먹으면 상점주인의 자식들이 좋아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문영이가 “북해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차츰 뜸해졌다. 순자가 잘 대해줄수록 문영이는 자주 다니기가 더욱 무엇했다. 그럴수록 자기를 두고 영애네 형제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웬간해서는 “북해상점”에 가서 밥같은것을 먹지 않기로 작심했다. 일부러 자제하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문영이가 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뜸해지고 어쩌다 와서도 웬간해서는 밥술을 들지 않자 순자는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혹시 그날 영애가 문영이한테 그 무슨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셋째 딸한테 따져 묻기도 했다. 셋째 딸 영애는 그 날 절대 문영이한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재삼 설명했다. 순자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했다. “너희들이 앞으로 이 어미가 하는 일에 절대 참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줄 모르면 그것은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느리라.” 영애 역시 착하기는 형제들 중 둘째로 가라고 하면 서운해 할 사람이라 어머니의 말뜻을 너무나 잘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뜩이나 발길이 뜸해지던 문영이는 언제부터인가 일주일 가량 지났어도 상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애도 그애한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데…아무렴 영애가 그런 싫은 소리를 할 애가 아니지. 그런데 문영인 웬일일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문영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느 날 순자는 상점에 온 학생들한테 문영이가 왜 상점에 오지 않는가고 물었다. “문영이 말인가요? 그앤 요사이에 된감기에 걸렸답니다. 기숙사가 추운데다 입은 옷까지 얇아 감기에 걸린 것이지요.” 그 학생의 말에 순자는 갑자기 속에 맺히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애가 분명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면서도 말이야. 문영이의 엄마로 돼주겠다고 하면서도 애한테 밥이나 먹이는데만 만족하고…) 순자는 등한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내일엔 상점을 딸들한테 맡기고는 기어코 문영이한테 동복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자는 무심중 밖을 내다 보았는데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되겠군. 오늘 눈이 내리면 내일은 긍정코 눈보라가 터질 것이고 그러면 날씨가 더 맵짜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순자는 더이상 지체할세라 상점문을 잠그고는 그 길로 백화상점으로 향했다. 백화상점에서 순자는 문영이가 입을 두터운 솜옷을 샀고 또한 돌아오는 길에 연변병원에 들려 문영이가 먹을 감기약을 샀다. … 그 날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운채 눈도 겨우 뜨고 있으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문영이는 불현듯 앓던 사람이 같지 않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순자의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마마(어머니),” “너, 정말 멍청하구나. 이렇게 된감기에 걸려갖고도 왜 엄마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 너 아직도 이 엄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문영이를 껴안은 순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순자가 눈물을 흘리자 문영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찾아갈 용기가 없었어요.” 문영이는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탓하며 더욱 소리내여 울었다. 그 날 순자가 문영이한테 가져간건 단지 한벌의 솜옷이나 한봉지의 감기약만이 아니었다. 문영이가 여태껏 받아보지 못했고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모성애였다. 그 날 문영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자기는 행운아라고 자부해보았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06
  • “나 공산당과 함께 널 토벌할테다”
    1941년 여름, 중국의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염석산이 담당구역인 중원지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염석산의 병력이 약해서보다는 이 전구장관인 염석산이 항일에 대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 염석산의 꿍꿍이를 미리 보아낸 장개석은 자신의 특사 서영창을 제2 전구 즉 염석산이 맡은 전구를 시찰하게 하였다. 이 해 8월 25일, 중경으로 돌아온 서영창은 장개석한테 몇가지 중요한 것을 회보하였다. 첫째, 염석산이 일본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둘째, 산서의 염석산이 중앙과 오해가 생겨 다른 정권을 세울 우려가 있다. 셋째, 공산당에 대한 염석산이 증오가 극도로 달해 일본군과 함께 공산당을 제거할 가능성이 크다. 8월 29일,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존경과 위안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서영창이 염석산의 방위지역인 산서성 길현지구를 방문할 때 염석산은 일본과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 얼마 후 과연 일본과 염석산은 모종의 협의를 달성했는데 당시 협의내용에는 일본측에 기울여지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또한 염석산은 한편으로는 장개석의 동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일본과 연합해 공산당을 토벌하려고 시도했다. 이 해 9~10월 기간 염석산은 연속 3차례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본인은 그 어떤 희생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위원장께서 공산당을 토벌하려면 공산당 소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기에 일본의 힘을 빌어 공산당을 제거하면 위원장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다르게 생각했다. 즉 염석산이 일본과 연합해 중공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이며 가짜로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기의 진정한 목적을 가리려는데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당시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분석은 매우 적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대해 염석산은 기본상 저항을 포기하려는 태도였다. 당시 국군이 여러 전선에 거쳐 전면 패하고 있을 때 상당 부분의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염석산의 음모는 장개석의 중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6일, 장개석은 일기를 통해 염석산을 호되게 질책했다. “비열하고 교활한 한간, 왕정위 역도보다 다를바 없도다.” 하지만 장개석은 그냥 혼자서 이빨만 갈뿐 공개적으로 염석산을 질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염석산의 수십만 대군이 일제한테로 넘어가는 날이면 더욱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황하 동안 용문산에 있는 국군을 향해 공격을 발동, 호종남은 한개 사의 병력을 도하시켜 지원하려고 하였다가 염석산의 거절을 당했다. 이유는 중앙군이 도하해오면 후방질서가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 당시 중앙군이 황하를 도하하여 협력하면 염석산과 일본과의 협의가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보아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판단은 적중했다. 1월 6일, 장개석은 염석산에게 명령하여 “중앙군 61사를 반드시 도하시키며 상론한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장개석은 또 자기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최종 이 한간이 적에게 투항할 경우 나 이 중정은 극단의 조치로 한간을 처단하겠노라 한편 장개석은 중앙군 61사를 기어코 도하시킬 결심을 굳히었다. 그 중요한 목적은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막부득한 경우 공산당의 팔로군과 협력하여 염석산을 토벌하려는데 있었다. 이어 장개석은 재차 가경덕을 염석산이 맡은 전구에 파견하여 섬서 혹은 감숙 등지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경우 염석산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며 만약 염석산이 일본과 손잡고 공산당을 토벌할 경우 자신이 더욱 큰 토벌대상으로 될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그 때는 장개석이 직접 공산당을 거느리고 염석산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당시 장개석은 민족의 운명아에서 추호의 여지도 없이 중공과 함께 한간을 토벌할 것이며 적아사이에는 그 어떤 투기적인 수작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염석산이 문무관원 중에는 일본과 결탁하려는 극소수의 투항주의파 외 대다수 장병들은 모두 항전으로 출로를 찾고 태원을 수복하여 산서군벌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결의로 충만되어 있었다. 거기에 1941년 말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염석산은 자기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식, 1942년 1월 초,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서는 “위원장과 함께 공산당과 손잡고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겠노라”고 표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염석산의 큰 태도변화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장개석한테 완전히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해 3월 하순,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서안에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전방이 긴장하여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이해 8월 14일에도 장개석이 서안에서 재차 염석산과 만나자고 제의했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각종 이유로 조승수와 왕정국 두사람을 서안에 보내어 장개석과 만나도록 했을뿐이었다. 1943년 12월 29일, 산서성 주석 조대문이 타계하자 이듬해 1월 6일, 장개석은 자기의 일기에서 반간첩 전략에서 큰 기여를 한 조대문을 추모하는 글을 적어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대문은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당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 시도를 파괴시겼을 뿐만 아니라 한편 염석산을 설득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염석산과 일본의 관계는 점차 냉담해지기 시작하였고 장개석도 더는 특별조치를 취하자던 결심을 포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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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8
  • 오묘한 세계 대백과(29)
    혹시 그대는 잘 모를 것이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 즉 상해, 북경, 천진,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오사카, 도쿄 등 도시의 지면은 지금도 꺼져내려가고 있으며 그 꺼져 내려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국의 상해는 1921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면이 줄곧 꺼져 내려갔는데 어떤 지구는 이미 2미터까지 꺼져 내려 앉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도시들의 지면이 쉼없이 꺼져 내려 앉을가? 이는 우리 인류 자체를 탓해야 한다. 즉 지하수를 과도하게 뽑아 올리는 것이 도시의 지면이 내려가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다. 지하수란 인류생존의 자원일뿐만 아니라 지면을 평형을 잡아주는 작용도 한다. 만약 인류가 과도하게 지하수를 뽑아 올린다면 충족한 물로 지면을 도와 도시의 압력을 담당할 수 없게 되며 도시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거져 내려앉게 된다. 지면이 내려 앉으면 위해성이 크다. 일단 도시가 내려 앉는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의 생산과 생활에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하면 시정 기초시설, 도로와 교량 및 항구와 부두, 지하케이블의 손해와 깊은 우물의 사고 및 지면의 갈라지는 등 위해성을 갖다 주게 된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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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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