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0(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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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지난해 중국의 건국기념일 기간 백발로 뒤덮인 조본산은 금방 자신의 57세의 생일을 쇠었다. 하지만 그 축하의 소리가 귀에서 채 사라지기 전에 조본산은 돌연히 여론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되었다.
 
뒤이어 조본산은 중앙, 요녕성과 철령시에서 있은 문예좌담회에 참가하지 않음과 동시에 선후로 청화대학 교수 및 여러 전문가들의 필끝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며 동시에 처와 딸이 이민을 갔다는 등 유언비어가 난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경 조본산은 15년 가까이 중국의 정협과 인대 등 “양회”의 대표었고 무릇 CCTV 무대와 보도계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던 인물이었다.
 
조본산의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면 도대체 누가 그를 도왔고 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또한 이른바 그의 “의부(干爹)”가 누구인가를 알 수가 있다.
 …
1982년 가을, 요녕성 문화청에서는 한차례 농촌희곡 합동공연을 펼치게 되었다. 당시 이 합동공연의 심사위 주임이었던 이충당(李忠堂)은 불현듯 원 연화 만족향의 농민 조본산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다. 조본산을 데려다 “솔삼현(摔三弦)”을 부르게 하면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2년전 철령지구에서 희곡 합동공연을 할 때 조본산이 얼런좐(二人转) “포공단후(包公断后)”를 불러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본산의 얼런좐은 이충당으로 하여금 얼런좐이 대를 잇을 사람이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였었다.
 
그 뒤 조본산은 이충당의 추천에 의해 서풍현 극단의 초빙단원으로 되었다. 그 때로부터 조본산의 재능은 나래가 돛힌듯 승승장구였다. 특히 이충당은 연극 “대관등(大观灯)”에서 조본산이 맡은 맹인 백연등역을 즐겨보았었다.
 
이렇듯 조본산에 대해 인상이 깊었기에 이충당은 조본산을 불러 “솔삼현”을 부르게 하기로 결정지었다.
 
얼마 후 조본산이 철령지구 군중예술관으로 찾아오자 이충당은 그에게 그를 찾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이러자 조본산은 무등 기뻐하며 대뜸 잘해보겠노라고 답보했다.
 
합의가 이뤄지자 이충당은 자기의 집에서 이부자리 등을 가져와서는 예술관 관장 사무실에서 조본산이 숙식을 하게 하면서 전문 리허설(排戏)을 하게 했다.
 
3일 후 이충당은 조본산을 불러놓고는 그동안 리허설을 한 것을 표현해보라고 지시, 잘 부르면 남게 되고 잘 부르지 못하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조본산은 아주 진지하게 “솔삼현”을 불렀으며 엄숙하던 이충당의 얼굴은 점차 흐뭇해나더니 나중에는 아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참 개성이 있게 잘 불렀수. 표현력도 강하고 말이우. 바로 이렇게 불러야 하오. 자 그럼 당신이 ‘솔삼현’을 부리기로 결정하겠수.”
 
아니나 다를가 요녕성 농촌희곡 합동공연에서 조본산은 “솔삼현”을 불러 일약 소문을 놓게 되었고 이 때로부터 조본산은 이충당을 의부로 모시기로 했다.
 
그 뒤 조본산은 계속하여 “쌍구문(双叩门)”, “쌍송압(双送鸭)”, “솔호로(摔葫芦)” 등을 부름과 동시에 소품 “강습반”, “자동차 파견” 등에 출연하였으며 참여한 종목마다 히트를 쳤다.
 
이렇게 되자 조본산에 향해 러브콜하는 예술단체들이 줄을 이었다. 이 중 길림시의 어느 한 극단에서는 그에게 아파트 한채를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하지만 이충당은 조본산이 타지방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면서 철령에 발을 든든히 붙이고 얼런좐 전문가로 되어야 한다고 당수, 과연 조본산은 의부 이충당의 뜻을 따라 주었으며 얼마 뒤 철령시 민간예술단에 가입하엿다.
 
1991년 7월 29일, 철령시 인민정부에서는 국가 문화부의 표창결정에 따라 곧 서장행 공연을 떠나는 조본산을 표창하는 대회를 열었다. 회의에서 조본산은 이충당과 서로 포옹하기도 했다.
 
조본산은 발언에서 “오늘날 이관장은 저의 부친마냥 저를 대해주었고 도와주었으며 교육해 왔습니다. 당시 제가 서풍현 극단의 임시단원으로 있을 때 이관장이 저를 발견해 ‘솔삼현’을 부르게 하여 저의 오늘날이 있게 했습니다. 저는 절대 이관장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꼭 보답할 것입니다. 물 한방울과 같은 은혜도 용솟음치는 한통의 물로 갚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때로부터 3년이 지난 뒤 조본산은 “1982년에 나는‘솔삼현’을 통해 팔자를 고치게 되었다. 나는 우선 은사 이충당 선생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의 인품과 능력은 내가 반드시 따라배워야 할 바이다. 앞으로 나는 이충당 선생처럼 참다운 사람이 되어 예술기능을 연마하련다”고 언급했다.
 
조본산의 의부 이충당은 1935년 8월 요녕성 법고현에서 출생, 1855년 철령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선후로 교사, 현문화관 관장, 철령시 군중예술관 관장, 철령시 정협위원, 중국희곡가협회 회원, 요녕성 희곡가협회 이사, 철령시 희곡가협회 주석 등 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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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본산의 운명을 개변시켜준 의부 이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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