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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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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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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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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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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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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목 차 1. 민족정체성이란?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3. 조선족사회의 형성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5. 조선족의 미래전망 요약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활발한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한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은 민족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동시에 급속한 인구이동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민족적 정체성유지와 강화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이 살아남려으면 정체성을 상실하여서는 않된다. 그러면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으며 현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겠는지? 본 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간략한 답이라고 할수 있다. 주제어: 조선족, 조선반도, 민족정체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온 이민자 및 그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원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민 온 지역의 상황에 의하며 일정한 변의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중국적 요소가 많이 첨가된 탈조선반도적인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이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반도주민과의 “同源”이라는 전통적인 연대성은 무시할 수 없다. 1. 민족정체성이란?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개념으로 영어 “identity”와 중국어 “認同”과 서로 통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많으나 주요하게 신분 및 자아동일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 뜻인즉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또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으로 한마디로 귀납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민족정체성이란 무엇인가? J.Carla와 J.Reginald는 민족정체성은 개인이 자기민족에 대한 신념, 태도 및 민족신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①]J.Phinney는 민족정체성은 복잡한 구조의 하나로 민족에 대한 귀속감와 승낙,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및 민족활동에 참여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②] 종합하면 보면 민족정체성이란 인간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에 대한 깨달음과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과 믿음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세상은 종족, 민족 등 여러 인간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바 민족은 여러 공동체가운데서 제일 상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은 혈통적인 연대감과 같은 언어, 같은 경제, 같은 지역 그리고 동일한 문화기초위의 같은 의식 등 여러 공동적 요소를 구비한 인간공동체이다. 그리고 민족이 형성되기까지는 오래 역사를 경과하였기때문에 민족은 상대적인 안정성을 갖고 있다. 매개 민족은 자아민족이 소유한 특징으로 기타 민족과 구별된다. 여기서 민족정체성이 거론되는데 그 뜻인즉 주요하게 자아민족에 대한 깨달음으로 소속 성원들이 본인은 어느 민족에 귀속한다는 의식 또는 태도을 말한다. 민족정체성은 타민족과의 만남과 부딪침에서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민족정체성은 자아민족에 대한 신념과 귀속감이 커가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민족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발전과 민족이 처한 상황의 변화함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되고 해체되어 새롭게 생성될 수도 있다.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국가정체성은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고 민족정체성은 민족성원들이 자아민족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적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대 국가는 서방 자산계급의 힘에 의하여 처음 수립되었다. 당시 봉건사회말기에 산생하여 성장한 자산계급은 “자유”, “민주”, “박애” 등 정치적 구호로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건세력을 뒤엎고 근대적 국가건립에 성공하였다. 이 때 출현한 국가는 근대 민족주의기치하에 세운 단일민족의 국가로 민족국가라고도 한다. 이러한 민족국가정체성은 민족정체성과 통일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이후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폭발한 민주, 민족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국가이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이 꼭 일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민으로서 그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 등은 여러 민족들이 모두 소유하고 있으나 개별 민족으로서는 그 민족에 대한 귀속감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국가정체성은 상위이고 민족정체성은 하위이며 민족정체성은 반드시 국가정체성에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다민족국가의 분열 또는 동란 등이 생길 수도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아도 일부 민족내부의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경향하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모순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민족국가의 차원에서는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정체성을 약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③] 3. 조선족사회의 형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 이민에 의하여 형성된 조선민족의 한 갈래이다. 지연적 관계로 중국과 조선반도국가와의 왕래는 오래전부터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 인적교류도 아주 활발하였으며 많은 경우는 그들이 상대방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점차 그 지역 민족공동체에 동화되어 원래 소속된 민족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현재 조선족의 대부분은 19세기 중엽이후 중국동북에 이동,이주와 더불어 정착한 조선인 및 그들의 후손들이다. 특히 청나라의 봉금정책해제와 일본제국주의 조선침략은 더 많은 조선인들의 중국진출을 부추겼다. 하여 중국재류의 조선인이 제일 많을 때 200만명을 초과하였다. 1945년 8월 일본패전이후 광복의 환희속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 귀환하였다. 동시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계속 남게되었다. 이 부분의 조선인들이 중국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을 겪어면서 중국정착의 경향이 날로 강해졌다. 당시 그들은 토지를 배분받았고 지방정부의 관리간부로 많이 발탁받았다. 예컨대 중화인민공화국설립직전에 “동북조선인민의 95%이상을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가지었다.” 그리고 “전동북조선인민의 74%을 차지한 길림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④]이와같이 동북재류의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법적으로 중국조선족에로의 전환을 완성하였다. 조선족 선조들은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동북변강지역을 개척하였고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섰으며 국내해방전쟁에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족이 중국 다민족국가의 일원으로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원의 하나인 동북조선민족은 바로 간고한 30-40년 반침략의 혁명역사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은 피를 흘렸고 수 많은 생명을 희생하였으며 부지런히 생산하고 열심히 전선을 지원하여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⑤]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과 확립은 일정한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이란 불안정한 이동, 이주에서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실현된 안정적인 정착까지를 말할수 있다. (1) 이동,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조선족정체성의 형성 조선족선조들이 두망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오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우선 생활난이었다. 당시 만주의 넓은 땅과 풍부한 물산이 그들을 유혹했을 뿐 언제는 꼭 조선반도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체성은 원천적인 조선반도적인 성향, 즉 “나는 조선인이다”는 관념이 아주 농후하였다. 그 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중국에 “귀화입적”한 경우도 있어 점차 정착성향도 뚜렷해 졌다.[⑥] 하지만 민족정체성은 여전히 조선반도적인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중국땅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면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가 조선반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하여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재류조선인들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국광복의 기쁨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조선반도로 돌아간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 체류한 조선인들의 중국적인 요소도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신문기사을 통하여 중국체류 조선인들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전의 중국정착취향을 볼 수 있었다.[⑦] 특히 일본패망이후 귀환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국국내해방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토지개혁과정에서 토지를 부여받으면서 중국정착을 고정화시켰으며 민족정체성도 탈조선반도적인 중국적 경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조선족 국적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중공중앙 東北局은 1945년 9월말에 조선족의 상황을 역사적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곳의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들은 한족과 같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⑧] 1946년1월1일, 당시 연변전원공서 부 전원인 동곤일은 새해《신년헌사》에서 “현재 우리 연변지역의 민주정권은 이미 건립되었다. 의심할 바없이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반드시 정부의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중국국적에 가입하려는 한국인은 입적할수 있으며 중화민국 국민으로 될수 있다. 이렇게 조족(朝族)은 중화민족가운데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될수 있다. 우리정부는 민족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와 문화상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며 민족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똑같이 존중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⑨] 1948년 8월 중공 연변지역 위원회에서는 <연변민족문제>결의문을 작성하고 연변 조선민족인민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다. 이 결의문에서 “우리 당과 정부가 연변조선민족인민을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지위를 비준한 이 정책은 어디까지나 옳다”고 강조함과 동시에 “이 민족은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의 특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승인하여야 한다”고 하였다.[⑩] 그리고 조선족과 조선 僑民간의 구별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인민으로서 호적이 있는 사람은 공민이며 잠시 내왕하는 처지로서 호적이 없는 사람은 교민이다. 정부의 허가를 거쳐 이주해 갔다가 다시돌아 온 사람, 우리측 고급정부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최근에) 이주해온 자는 교민이다. 가족이 조선에 있지만 가장과 재산이 연변에 있는자는 정부의 허가를 거쳐 공민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공민과 교민은 권리 및 의무상에서 구별되어야 한다.”[11] 결의문에서 중국조선족과 조선교민의 표준에 대한 명확한 지적은 중국조선족정체성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조선족정체성의 확립 1949년 10월1일 북경천안문성루에서 모택동주석은 전세계를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포하였다. 이 직전에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가 동북조선인민대표로 1949년9월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권리대행 기구) 제1차회의에서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까지 참석하였다. 동시에 동북지역의 조선인 사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동북의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족간부들이 많이 발탁되었고 연변대학, 연변조선족 고급중학교 등 조선족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더우기 1952년 “연변조선민족 자치구”설립과 더불어 기타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민족 자치향, 자치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선족이 이미 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법적 확립은 되었으나 관념적으로나 실지적으로는 좀 늦었다. 당시 조선과의 연계도 밀접하였고 “조선인”, “조선인민”, “조선민족” 등 칭호가 “조선족”보다 더 많이 사용하였다. 1948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건립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에 간 중국동북조선인민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주석은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기원하는 중국동북 재류동포들의 성원과 대표단일행의 래조를 환영”한다고 하였고[12] 12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조선민주건설사진전”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는 “조선관중들은 조국의 승리적 발전에 무한한 감격과 흥분을 느끼게 되었고 중국관중들도 세계민주진영의 일환으로소 조선의 비약적 발전에 경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13] 연변대학을 창설할 때 이를 “동북조선인민대학”으로 가칭하였고 “동북경내 재주조선인 최고학부”라고 일컸다. [14] 그리고 조선을 “동북에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조국이면 세계화평민주진영의 일환”이라는 기사보도가 있었고[15]조선전쟁시기 “동북의 수많은 조선인민들 조국의 자유독립을 보위키 위해 조선전장에 자동적으로 떠났다”[16]는 기사도 우리말 신문에 보였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 조선족은 “조국”문제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특히 조선전쟁시기 중, 조 양국의 조선민족사이에 있은 빈번한 이동은 “고국”, “모국”과 “조국”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였고 “중국은 인민 조국이요 조선은 민족조국이다”말도 있었다. 하지만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조국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을 통하여 조선족가운데 존재하는 “다 조국론”, “민족조국”, “법률조국” 등 모호한 이해를 기본상 해결하였고[17] 기타 조선족지역에서도 조국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비판함에 따라 조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였다.[18] 이러한 것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확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농업합작화 운동, 사회주의 개조와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면서 자신의 중국국민성과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수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에게는 탈조선반도적인 중국국민의식과 중국다민족가정의 일원인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보다 강하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반도주민과의 “同一源流”의 전통적인 연대감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다. 20세기 90년대말 필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이상의 응답자가 조국을 “중국”이라고 적었고 “중국 조선족의 귀속”이란 물음에서는 응답자의 73%가 “중국”이라고 하였다.그리고 “기타 민족과의 교류에서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점을 표명하는가”하는 물음에서 79%의 응답자가 “떳떳히 밝힌다”다고 하였고 신문매체에서 기타 민족이 조선족의 우수성을 언급할 때 응답자의 97%이상이 “자긍심을 느낀다”고 답하였다. [19] 이와 같이 조선족에게는 중국국민이란 의식과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이미 깊어졌다. 이러한 의식속에서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 중국사회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주류사회진출에도 게으러지 않았다. 조선족가운데 중국국가급 영도자가 나오고 정부장관이 나왔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장, 소장 등 장군계급을 지닌 사람들도 10여명 산생하였고 또 10여명의 정부 차관급과 수 백명의 국장급 인물들이 나왔으며 또 수천, 수만명의 대학 교수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와 기술인원들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우주선발사, 위성발사 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족과학자도 있었다. 조선족은 민족적 긍지감를 갖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평등한 중국의 민족정책하에 민족언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키워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는 공식사용문자를 조선어로 규정하였고 수 십개 민족향에서도 민족자치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집결한 동북 3성과 내몽골에서 수백, 수천개의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으며 조선글 출판사, 조선어 방송국, 조선족 문화관 등이 설립되 있다. 이러한 것은 민족언어 유지와 민족문화 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민족정체성 강화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조선족은 중국사회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까지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3)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정체성의 변화양상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인구이동에 따른 거주 분산화, 민족집거지역의 슬럼화, 민족교육의 급속한 축소, 한국과의 교류 등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다중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강화-약화-강화의 교체가 반복되었다. 하나는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중국 기타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당사자들의 기타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더욱 체감하였고 또 사업과정에서는 민족적 차별감도 느끼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면 의식적으로 민족성을 감추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족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한국의 성장과 중국진출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정체성 약화의 돌출한 현상은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민족교육을 받을 여건과 기회가 없어 민족언어과 민족문화를 터득하지 못하고 민족의식이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민족에 대한 애착이 날로 멀어져 가고 민족정체성도 약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이들에게 처음에는 중국국민의식보다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앞섰고 코리안 드림에 많이 기대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한국에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심각한 차별과 편견을 느끼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는 날로 약해지고 한민족이라는 의식보다 중국인, 그리고 중국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경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느끼면서 돈을 벌려고, 좀 더 자유로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친척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한국국적가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중국국민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보다 생존과 이익이 더 우선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도 매 개인의 실제적 이익앞에서는 한순간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조선반도적인 특징과 중국적인 특징으로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현재 논란도 일고 있다.[20] 일부에서는 조선족정체성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소위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서 언급한 “중국공민”과 “조선민족”의 개념은 동차원의 개념이 아니며 특히 중국에서는 상하위 개념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등하지 않은 두 개념을 합쳐서 조선족의 “이중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것이 성립되면 중국의 56개 민족이 모두 “이중성”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않겠는가? 5. 조선족의 미래전망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과도 연관된다. 조선족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입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민족정체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민족적 지혜가 필요하면 민족적 힘을 키워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볼 때 조선반도주민들과의 연대감도 강화하여야 한다. 도시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은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발맞추어 과거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하고 세계화의 흐름속에 고국인 한국과의 유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쌓고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의 많은 부정적 결과는 한국을 향한 코리안 드림이 아주 큰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또는 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한국정부는 명확하고 무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현재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조선족입지를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다음 조선족자신도 경제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 경제력에 커짐에 따라 도시의 집거지역도 조성할 수도 있고 민족학교도 세울수 있으며 문화활동장소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것 모두가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는 우리 모두 “한 민족”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체성, 한국과 조선의 민족정체성, 제일 조선인의 정체성 등을 떠나서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세계적인 민족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재외동포들이 더욱 많이 한국에 진출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로 진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조선족” 또는 “재일 korean”이다고 따지지 말고 현지에서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여 공통적인 민족전통문화를 살려서 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중국의 예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진출한 사람들이 수십만이 된다. 앞으로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도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으로 수 십만명이 진출하였다. 도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민족집거지역 형성이 아주 중요하다. 일정한 민족인구의 집거지역이 생기면 민족교육의 장소가 점차 형성될 것이고 민족교육이 가능하면 더 많은 조선족이 몰려 올 것이 당연하고 한국인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시에서도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돈득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은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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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5
  • 글 쓰기에 집착하는 이유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오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그 중에서 경험을 쌓고 그 과정을 총결하고 보귀한 재산을 글로써 전함으로써 살기 편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한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수하여 정신세계를 촉진하게 하고 예리한 필치로 사회의 현상을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글은 어지러운 기풍을 바로잡고 새길로 들어서게 한다. 필자의 소녀 시절은 중국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그렇듯 하고픈 공부를 일짜가 된서리를 맞았고 그한을 달래려고 자기를 찾아 헤매였고 나이 들어 가정을 이룩한 후에는 힘들고 고된 농사일에 지친 마음과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 문화 생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짧은 글이나마 마음의 빈 구석을 달래보려 썼었고 그후 <연변일보>통신원이 된 후로는 사회에 저그마한 기여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고무하면서 글을 쓰느라 애썼다. 한중 간의 교류도 활발하고 저도 2008년도에 무연고 방문 취업의 수혜자로 입국하여 처음에 한국 식당에서 일했다. 처음 주방에서 하는 일이라 서툴고 말도 잘 알아 듣지 못하여 사장님이 저에게 <아줌마. 초등 교육이나 받았어?>하고 한마디 말이 그때는 억울하고 분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분발하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되였고 나에게 사고의 기회를 준 사장님이 고맙게 생각한다 글 쓰기는 힘 들때엔 힘의 원천이 되고 마음이 산란할 때에는 글로써 마음의 실 타래를 풀어 나가며 자기의 생각을 글로 적어 가노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생각한 것을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 하며 기쁜 마음으로 오늘도 힘 있게 적어 내려간다. 글 쓰기는 나의 애호고 나의 천직이고 나이와 무관한 평생 직업이고 글을 쓰느라면 뇌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어 좋은 일거리다. 이런 직업을 애호하지 않을 그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오늘도 소중한 하루로 맡은 바 일을 끝내고 주룩주룩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로써 하루를 맺는다. 즐거운 여가 생활은 사람들에게 활력소를 주입하여 이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 감천 201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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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5
  •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3 )
     나는 나의 이번 결정이 어떠한 후과를 초래할런지 잘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 내가 감수 해야 할 그 부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는 상상만 해도 끔직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선택한것은 그가 내 인생의 소중한것들을 전부 걸고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교적륜리도덕이 두눈을 새파랗게 뜨고 살아 있는 현 시대에 내가 일명 사랑이라고 들먹이는 이 불륜이 사회적으로 비난과 조롱을 받기는 쉽상이다. 그 누군가가 <바람난 주제에 어쩜 저렇게 뻔뻔스러울까>라고 말을 한다해도 나는 단지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 사람이였다. <잘 생각했어~ 정말 너무 고마워! 사랑한다~>흥분하다 못해 떨리기까지 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듯 싶었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틈만 나면 벼룩시장이며 인터넷을 뒤지면서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사장님께 사람 구하시라고 말씀 드렸더니 요번달부터 월급을 올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하라고 사정사정하시는것이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야간근무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것이다. 언니한테도 방을 얻어 나가겠다고 말했더니 펄쩍 뛰는것이였다. 여자 혼자 몸으로 어쩌냐구… 부모님도 소식을 전해들으시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나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수 없었다. 다른것은 제쳐놓고라도 무엇보다도 이미 그 사람한테 약속을 했고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되돌이킬수 없었다. 며칠 뒤 그의 직장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모시에서 보증금 50만 월세 17만짜리 방 하나를 얻었다. 나는 식당일을 아무데서나 찾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는 연장근무할 때가 많기때문에 그렇게 결정했다. 회사에서 연장근무를 하지 않으면 돈을 벌수 없었다. 3층짜리 단독주택이였는데 맨 윗층에서 주인량주가 살고 계셨고 1, 2층은 일부러 세를 놓기 위해 기숙사식으로 지은것 같았다. 1층에 있는 방이 좀 저렴하긴 했지만 나는 굳이 햇볕이 잘 드는 2층방을 고집했다. 총 10평방메터 되나마나한 다락이 달린 작은 방이 였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방겸 샤워실이였는데 한켠에 일회용부탄가스가 놓여져 있었고 그 위로 널판으로 그릇같은것 올려놓을수 있도록 다락을 만들어놓은것이 보였다. 방은 비좁게 세사람까지는 누울 수 있을것 같았고 누우면 발끝이 닿을만한 너비였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좀 불편할것 같았다. 방이 비록 작긴 했지만 주인할머니가 깨끗하게 도배를 해서 그런지 그냥 아담하다는 그 자체였다. 주인할머니는 물건 많지 않으면 부부가 살기에는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어느 중국부부도 이 방에서 돈 많이 벌고 나갔다고 말하는걸 잊지 않았다. 이사하는 날 언니가 몇가지 생활용품들을 트렁크에 챙겨서 넣어주고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쉬는 날이 아니라서 같이 와주지 못하는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면서 언니는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혼자서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고 당부하는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안쓰러워 하거나 말거나 나는 마냥 신나기만 하는걸 주체할수 없었다. 다행이도 원래 살던 부부가 버리고 간 물건이 있어서 쓸만한것들을 골라다가 깨끗이 닦아서 얹었더니 제법 그럴듯 하였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한국에 와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도 귀국할 때는 다 버리고 가야 하는게 현실이기때문에 나같은 사람들이 그 덕을 보는게 아닌가 싶다. 길 건너에 있는 슈퍼에서 쌀이랑 야채 소금 간장같은것을 사왔다. 이불은 언니네 집에서 갖고 왔고 이제 그 사람이 퇴근하면 시장에서 베개랑 슬리퍼랑 당장 필요한 물건만 사기로 했다. 고작 방안 정리라고 해봤자 머 별거 없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주어다가 놓은 덕분에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 싶었다. 이렇게 나와 그 사람의 동거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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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17
  • [연재]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2 )
    살다보면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날것인데 과연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난제들을 잘 풀어갈수 있을지도 고민이였다.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필경은 인생의 끝까지 갈수없는 사이인지라 살면서 나타나는 어려운 고비들을 재치있게 넘길수 있을까. 사랑은 랑만적이지만 현실은 랭정한 것이니깐. 첫번의 만남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시작이라고 하겠다. 어쨋든 그번의 만남이 있은 후로 그는 나한테 더욱더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핸드폰메세지는 전화통에 불이 달릴 지경으로 오갔다. 그는 자기의 일상을 시시콜콜 어느 한가지라도 빠뜨릴세라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었다… 첫번의 만남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시작이라고 하겠다. 어쨋든 그번의 만남이 있은 후로 그는 나한테 더욱더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핸드폰메세지는 전화통에 불이 달릴 지경으로 오갔다. 그는 자기의 일상을 시시콜콜 어느 한가지라도 빠뜨릴세라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었다… 오늘은 무엇때문에 부장님께 혼났다는지, 퇴근길에 사과 네알을 샀는데 2000원이나 하더라는지, 월급이 나왔는데 다음에 만날때 맛잇는거 사주겠다는지 하는등 문자메세지를 하다가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아예 전화를 걸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시름을 놓았다. 그는 일요일을 격주로 쉬고 있었는데 쉬는 날이면 왕복 세시간씩 지하철을 타면서 나를 만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 너랑 같이 있고 싶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리 지금 같이 잇잼까?>라고 했다. 그는 자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어이없다는듯이 피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이렇게 말고 너랑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뭐든지 너랑 함께 하고 싶단 말이다.> 나는 뜻밖의 그의 제안에 뭐라고 딱히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함까? 누가 알게 되면 큰일 남다.> 그는 내 손을 꼬오옥 잡으면서 <어차피 너도 언니네 집에 쭈우욱 눌러있을수는 없는거 잖니? 갑작스럽겠지만 긍정적인 판단을 내려줬으면 좋겠어 … 부부의 연을 못 맺는다해도 한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너한테 잘해주고 싶고 후회없이 살아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너무도 솔직하고 절실한 고백에 잠시나마 이 남자라면 내 인생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솔찍히 언니네랑 같이 한집에 산다는게 불편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다른건 다 제쳐놓고라도 형부가 현장 쉬는 날이면 야근을 하고 낮잠을 자는 나때문에 낮이면 늘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술만 마셨다. 이것때문에 언니랑 형부가 다툰적도 있었다. 그리고 야근이라는것이 대낮에는 아무리 잠을 잔다고 해도 밤처럼 깊은 잠을 잘수가 없어서 지칠대로 지친 내 다크써클은 아닌게 아니라 무릎까지 내려오게 생겼다. 그래서 언니네 집에서 몇개월간 얹혀 살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도 좀 생겼던지라 사실은 나도 방을 얻어서 나갈 생각은 있었지만 남자랑은 절대 아니였다. 남자랑의 동거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다. 그맘때쯤 연길에서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자기랑 같이 지냈으면 하고 전화가 왔길래 그럴까 아니면 고시원으로 갈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중이였다. 혼자서 세방을 얻기보다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다소 불편하긴 하겠지만 서로 의지가 되고 지출은 많이 줄일수 있을것 같았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한테 말했더니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한식경이나 아무 말도 없었다.한참이나 애꿎은 담배연기만 내뿜던 그가 꾹 닫았던 입을 열었다.<비록 우리가 가깝게 만난 시간은 몇개월 안되지만 내 마음속엔 이미 니가 꽉 들어앉아서 누가 비집고 들어올수 없게 되였다. 근데 넌 아닌가보구나… 섭섭하다. 하지만 어쩌겠니? 니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수 없는거지. 그동안 내가 너한테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한걸…> 그의 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을 들으면서 <아! 내가 너무 했나?>하는 자책감만 들기만 할뿐 다른 생각은 할수가 없었다. <니가 그 언니랑 같이 살게 되면 앞으로 너를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랑 있으면 더없이 편하고 좋아. 나 진짜 너를 너무 사랑해...자는 시간 빼고 단 일초라도 니 생각 안해본적이 없어.다시 한번 잘 생각해주면 안되겠니?>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간절하다못해서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 남자가 이렇듯 간절하게 날 원하는데 나는어떡해야하지?>를 수없이 되뇌이면서 도저히 갈피를 종잡을수 없어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손톱눈만 뜯고 앉아있었다. 나는 A형이라서 그런지 가끔은 이렇게 우유부단 할때가 있었다 그날 그는 나한테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채 여름날 정오의 시든 화초마냥 추우욱 처져서 돌아갔다. 량쪽어깨가 축 처져서 지하철 플랫트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련며칠 나는 잠을 설쳐가면서 고민을 하고 또 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건 잠시적인것이다 라고 개인적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의 시작에는 사랑때문에 만났다하지만 살다보면 사랑보다 끈끈한건 정이다. 나중에는 그 정때문에 울고 불고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살다보면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날것인데 과연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난제들을 잘 풀어갈수 있을지도 고민이였다.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필경은 인생의 끝까지 갈수없는 사이인지라 살면서 나타나는 어려운 고비들을 재치있게 넘길수 있을까. 사랑은 랑만적이지만 현실은 랭정한것이니깐. 그때쯤 그도 한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던지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였다. 짧은 경력이였지만 이혼사가 있었고 년로하신 어머님이 한국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계셨고 연길에 있는 막내 남동생네 애기 그 집안의 유일한 후손에게 다달이 우유도 보내줘야 했고(그때쯤 중국의 우유에서 멜라민논란이 일고 있었음) 한국에 온지 10년이 넘도록 도박에 빠져서 땡전한푼 없는데다가 기계사고로 손을 다쳐서 놀고 있는 작은 동생의 생활비와 집세도 부담해야 하는 그런 처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들노릇 형님노릇하느라 등허리가 휘여질 지경이였다. 그의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측은 지심 또 모성애비슷한 그 무엇을 자극하여 그를 더욱더 사랑하게 했을 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주린 배를 안고 출근하는 그를 위해서 따뜻한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어지고 양말 한짝이라도 내 손으로 손수 빨아주고 싶었다. 며칠동안 참기름 쥐여짜듯 고민고민을 하다가 그한테 문자를 날렸다. <나 매일 해뜨는 아침을 자기랑 함께 맞이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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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17
  • [연재]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1 )
    그는 불륜의 상대이지만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삶의 의욕이 생긴다.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1 ) 언제부터 쓰려고 했던 아니, 써보고 싶었던 나의 한국생활이였다.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인제서야 결정을 하게 된것은 다름 아닌 내가 쓰고저 했던 것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한 성공사가 아니라 뭇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을수 있는 불륜사였기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내가 여직껏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였고 힘들고 고되였던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이기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쓴다. 처음에 그 사람을 알게 된것은 우연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우리 두사람은 너무 우연하게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도 나도 첫 방문취업제시험에 참가했고, 장춘으로 방취제시험 치러 갔을때 같은 호텔에 들었었고,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었다. 내가 한국에 행장을 푼 곳은 언니네 부부가 살고 있었던 단칸 지하방이였다. 부모님도 한국에 계셨지만 아버지는 현장근처의 고시원에 계셨고 엄마는 가정집에서 일하고 계셨다. 그러니 내가 갈만한곳이 언니네 집밖에 없었다. 나는 언니네 부부와 같은 방을 써야 했기때문에 야간일을 찾았다. 마침 동네의 감자탕집에서 홀서빙을 구한다고 써붙인것을 보고 면접을 봤더니 이튿날부터 출근 하라고 했다. 야간일은 취직이 쉽게 되는것 같았다. 많은 동포분들이 한국에 금방 와서 겪었던것처럼 나도 고장의 낯설음에,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그리고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딸애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훌쩍거렸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럴 때마다 그가 보내오는 핸드폰 문자메세지에서 용기를 얻고 눈물을 쓰윽 닦으면서 일을 하군 하였다. 어느날, 잠에서 깨여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사람이였다. 웬만해선 전화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웬일일까 하는 의혹을 품은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나요, 나 취직했소. 자동차부품회사인데 조건이 좋소. 퇴직금도 있고 4대보험도 해준다오.> 흥분에 들뜬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여 오는것 같았다.<어머나, 진짜 잘 댔슴다. 축하함다!><양, 고맙소. 면접통과됐다고 전화받자마자 제일먼저 제한테 전화하고 싶은걸 꾹 참았소. 야간하고 자고 있는 저를 깨울까바… 헤헤>그 남자의 솔직하고 소박한 고백을 듣는 순간 나의 가슴속엔 이름 못할 그 무엇이 뭉클해왔다. 나도 누구에겐가 그런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라고 해야 하는지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런 위안감이 들면서 우리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인것처럼 느껴졌다.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하루에도 수십통씩 왔다갔다 하는 문자메세지를 통해 우리 두 사람사이는 더없이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서로에 대해 하나둘씩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였다. 나도 내 처지에 걸맞지 않은 뒤늦은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내가 이러면 안돼… 안돼하면서도 사랑의 유혹을 물리치려 하면 할수록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보이지 않는 끈끈한 그 힘을 도저히 당해낼수가 없었다. 어느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둘다 한국은 낯설어서 장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 언니네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사람이 쉬는 날 언니네 집으로 왔다. 그렇듯 가까워진것 같았지만 정작 만나니 좀 어색했다. 내가 아래목에 깔고있던 담요를 들면서 추운데 따뜻하게 몸 좀 덥히라고 했다. 그는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가 시키는대로 나를 마주 향해 앉았다. 숨막히는듯한 작은 공간에서 단둘이 있으니 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쿵쿵하는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살살 내 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키스해도 돼?>라고 내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달콤한 키스의 황홀함에 취해서 나는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내 몸을 맡겨버렸다. 폭풍우만 같았던 한차례의 정사가 끝나고 그는 나의 곁에 벌렁 누워 내 머리밑으로 팔을 넣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주르륵 하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섹스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불륜을 저지른데 대한 후회의 눈물인지 나도 알수가 없었다. 사람은 때론 심정이 착잡할때도 눈물이 흐르는가보다. 뜨끈한 액체의 흐름을 느끼고 의아한듯 <왜??>하고 묻는다. <후회하니?> <아님다. 그런게 아님다.> 그는 더욱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사랑해~>하고 속삭였다. /김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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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05
  • "연변조선족자치주 해체설"에 관하여
    ●허 훈 [동포투데이]요즘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 매체에서 한국 언론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해체위기”에 대한 기사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민족정책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인구 비율 감소는 자치주 수부 도시 연길의 도시 면모를 바꾸고 있다. 원래는 연길시내의 광고판을 모두 조선어와 한어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으나 관련부문의 단속에도 중국어로만 쓴 광고판으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녕파와 온주 등 한족기업들이 육속 연길에 진입해 백화점을 설립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예 건축물 밖의 전체 벽을 모두 중국어로만 된 광고판으로 커버하고 있다.. 공항안내도 점점 조선어사용이 감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북경과 연길을 연결한 동방항공회사도 중국어와 영어를 두 가지 언어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상가나 식당가게주인, 종업원은 조선족을 찾아보가 힘들 정도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보아온 연길의 최근 몇 년의 변화이다. 한국 언론은 “1952년 설립돼 이미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해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뿌린 돌멩이 하나가 일파만파를 일으킨다고 인터넷상에서도 이 소식이 광범하게 전해졌다. 중국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는 기자에게 “우리는 이 소식을 모른다.”고 말했다. 기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연변 조선족자치주 해체에 관한 소식은 정확하지 않은 걸로 판명났다. 하지만 조선족자치주는 그동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때 전체 인구의 70%에 달했던 자치주조선족 인구는 최근 36%대로 뚝 떨어져 현지 조선족인구하락세는 사실로 밝혀졌다.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1952년 자치구 설립초기만 해도 지역 총인구의 62%를 점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시작하여 조선족인구 비율은 급한 하락세를 보였다. 2000년에는 84.2135만 명으로 자치주총인구의 38%를 점했으나 2005년에는 33%로 계속 하락세를 보이였다. 한국언론은 중국 현지 동포 언론에 게재한 문장을 인용해 “중국 국내 조선족인구가 계속하여 감소되고 있다 만약 이런 추세로 계속 내려간다면 2050년에는 50.1397만 명이 감소될 것이며 2090년에는 19,4227명으로 감소될 것이다. 22세기에 가서는 중국 국내 조선민족은 철저하게 사라질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조사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구증가율은 국내 56 개 민족 가운데서 제일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6년부터 마이너스 증가추세가 나타났는 바 조선족이 제일 많이 집중한 룡정시, 화룡시, 도문시의 조선족인구 감소폭도가 아주 컸다. 조선족인구 하락세원인을 분석할 때 연변당지매체의 관계자는 기자에게 “연변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주요하게 조선족은 받은 문화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고 또한 교육을 중시하고 아이를 많이 낳기 싫어하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은 자고로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1949년, 중국의 첫 번째로는 되는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설립되였으며 자체로 모금하여 100여 개의 소학교를 건설해 1952년에 벌써 소학교육을 보급했다. 다음으로 조선족인구 유동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조선족 거주지 중국의 제일 북쪽인 흑룡강(黑龍江省)으로부터 남쪽 끝인 해남성(海南省)까지는 S형으로 확산되어갔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삼성의 농촌지역 조선족들은 한국기업군단의 중국 대도시 진출을 따라 중국의 각 대도시들에 확산되여짐을 풀고 있다. 현재 내지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 음식점에 갈수록 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취업하고 있다. 이런 여성들은 대부분 생육기에 처한 부녀들로 이는 조선족인구가 감소되는 한 개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90년대 이후 해마다 2000 ~ 3000명의 조선족들이 출국하던데로부터 2007년 방문 취업제가 시행됨에 따라 해마다 수만 명의 조선족이 출국하고 있다. 이중에는 조선족 여성들도 적지 않다. 일본에 유학가는 여성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현재 취업을 목적으로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58만 7천732명 가운데 방문 취업 중인 조선족 수는 28만 9천981명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해 한국언론은 소수민족 자치주내 소수민족 인구가 전체의 30%를 밑돌면 자치행정권이 취소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중국에는 정말 30% 최저선이 있는가? 통상적으로 말하면 한 개 민족자치지방의 설립은 특수한 역사원인으로 인한 것이며 또 당지 소수민족결구도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북경경제무역대학인구경제연구소 소장 황 룽칭(黄荣清)은 기자에게 중국은 30% 최저선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자치구, 자치주를 건립할 때 당연이 소수민족이 점하고 있는 인구 비례를 고려하며 역사인소, 및 기타 정황도 종합적으로 돌본다”고 말했다. 민족자치구, 민족자치주는 단순이 인구 비례만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인구가 보편적으로 많은 민족은 능이 자치를 할 수 있으며 인구가 비교적 적은 민족도 능이 자치를 할 수 있다. 즉 인구가 많은 민족만이 자치권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된다. 중국의 민족자치지방은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3개 등급으로 나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전의 1947년, 중국 몽고족 거주 지역에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성급에 해당되는 내몽골 자치구가 건립되었다. 지금까지 중국은 155개의 자치정부를 건립하였는 바 여기에는 5개 자치구, 30개 자치주, 120개 자치현(기)이 포함된다. 중국 민족사무위원회관 방사이트에서 공포한 통계에 따르면 내몽고자치구의 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18.6%, 녕하회족자치구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34.1%, 광서 자치구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38%를 차지한다. 이 세 개 자치구 중 한족은 인구점유율에서 절대적 우세를 차지한다. 그러나 의연히 자치구로 남아 있다. 연길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 한국인은 “연변의 면적은 4만여평방키로메터로서 한국국토의 절반에 해당된다. 만약 연변이 해체되면 우리 민족이 중국 동북지구에서 유구했던 역사, 근거지가 영원이 소실되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인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언론은 또 “중국 당국은 현재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를 포함한 8개현시로 구성된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해체해 연길, 룡정, 도문을 연결한 ‘연룡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한적 있다. . 하지만 중국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는 “연변 자치주 해체에 관한 소식을 모른다. 하기에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변동은 모두 국무원에 보고하여 동의를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알다 싶이 1983년, 연길현을 룡정현으로 개명할 때, 그리고 1985년, 돈화현을 돈화시로 개명할 때 모두 국무원의 심사비준을 거쳤다. 연변 자치주를 해체하는 것은 아주 큰 대사이다 “연룡도 통합” 프로젝트 추진은 또한 아주 큰 대사이다. 연변 한 지명인사는 기자에게 “연룡도 통합 프로젝트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구상해 왔으며 주요하게 지역경제발전을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며 자원을 합리하게 이용하고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경쟁력을 강화해 대기업의 투자를 흡인하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연변 자치주 당위원회에서는 “11.5” 계획을 연구 토의할 때 “11.5” 기간 연룡도를 통합해 하나의 경제연합체를 만든다고 명확하게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연길, 도문, 룡정은 원래 하나의 행정단위였으며 3 개시의 인구결구도 조선족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 집거지이다. 연길, 룡정, 도문의 조선족인구는 각각 전시 인구의 58.4%, 67.6%, 57%를 점한다. 조선족들의 자치주에 대한 감정은 아주 깊다. 조선족인구 하락세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당지의 노인들도 있다. 민족 감정상으로 보아도 자치주를 해체하는 것은 현실적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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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2-09-05
  • 중국동포의 “주폭”,이대로 가선 안돼
    중국동포의 “주폭”,이대로 가선 안돼 [동포투데이]지난 6월20일,서울 지방경찰청에서 열린 “중국동포 언론사 대표 및 단체장 초청 간담회”에서 중국동포를 포함한 외국인들의 “주폭”으로 인한 범죄 실정과 대책이 주로 논의됐다. 물론 한국내에서 '중국인 혐오증'로 확산될 수도 있는 우려를 차단하자는 취지에서 열린 간담회로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체류 함에 있어서 삶의 질을 높이고 한국 국민들과 더 불어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 갈 수 있게 하려는데 목적을 뒀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날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 수치에서 나타난 중국동포의 “주폭”문제는 매우 심각하다는 점이다.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체5대 외국인 범죄의 38.5%가 살인․강도․폭력 등 강폭력범죄로서 폭력범죄가 대부분 차지하는 가운데 중국인 범죄가 63.8%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외국인의 주취상태 범죄가 내국인보다 높은 편인 가운데 경찰관서 상대 주폭은 많지 않지만 외국인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이웃이나 주점 등에서 행패부리는 주폭은 상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목할 것은 출신지역별 규합이나 각종 이권다툼에 간여하는 소규모 폭력배도 일부 존재하지만 대부분 주취중 사소한 시비로 인한 우발범이라는 점이다. 이날 동포세계신문 김용필편집국장은 중국 동포들의 음주 폭력은 우발적인 만큼 상습적인 내국인 음주폭력과 다른바 인권침해 등 요소를 고려하여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간담회에서 참석한 중국동포 단체장들도 임금 체불. 장기간 가족과의 이별로 독신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독감, 고용주와의 마찰 등의 스트레스가 싸인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이밖에 다른 한 참석자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가리봉 주변에 ‘주폭’자가 많다면서 “소주병 깨고 서로 머리 까는 거 하루에도 수없이 본다. 술은 이성을 무디게 하고 순간적인 초조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장기화하면 주폭이 되고, 이들이 범죄자가 되지 않으리란 법 없다. 이들에게 법제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발적인 ‘주폭’자라도 상습적인 “주폭”자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강폭력 범죄를 저질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중국동포 단체장들과 중국동포 주요 언론사 대표들의 가장 궁금한 문제는 외국인범죄 처벌 기준이었지만 아쉽게도 경찰측은 명확한 답안을 주지 못했다. 지난 5월10일, 서울지방경찰청은 주민의 입장에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치안복지’구현의 일환으로 ‘주폭수사전담팀’을 편성한 이래 서울에서만 116명의 ‘주폭’자를 구속했고 그중에는 중국 동포도 몇몇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범죄에 관련되면 경찰에 입건될지라도 이내 각 지역 출입국관리소로 인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담회 한 참석자는 술먹고 사람을 때리면 감옥을 간다든가 강도 짓을 하면 강제추방을 준다든가 등의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한다면서 “주폭”자에 대한 모호한 처벌 기준을 꼬집었다. 한편 경찰측은 경찰관 기동대를 동원한 외국인 폭력범죄에 대한 특별 단속과 예방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기능별 전문 경찰관을 강사로 지정, 결혼이주여성ㆍ외국인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국내법규 및 한국생활 적응교육 실시하고 산업인력공단 등 협의, 범죄에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국내법규 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내실화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중국동포들을 위한 ‘문화공간’ 및 ‘여가 프로그램’을 마련해 잠재적 불안요인을 해소하는 목적에서 구청 등 지자체와 협의해 중국동포들이 놀이・오락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 확충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허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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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23
  • 결혼사진에 맺힌 한
    오늘도 구질 구질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는날 저는 어머님 생각을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조용이 되뇌입니다. " 어머님 하늘 나라에서 부디 평안하시고 더는 가난때문에 속끓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며느리도 이젠 결혼 사직을 찍어주지못한 어머님의 아픈 마음을 충분이 이해할 수 있으며 더는 이 일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어머님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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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 [수필]시어머니의 자식사랑
    양로원에 당도하니 호리원인듯한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를 안내해주시는것이였다. 퍼그나 널직한 주방겸 활동실인듯한 방에 머리결이 하얀 노인들이 앉아서 한담을 하고 계셨다. 그 속에서 체구가 왜소한 어머님을 대뜸 알아보고 뛰여가서 부둥켜 안으면서 하고 불렀다. 예고도 없이 찾아간 나를 두고 꿈이냐 생시냐 싶은듯 라고 하시면서 원래 노화되여 잘 보이지 않은 눈을 부비고 또 부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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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 [수필]옥이할머니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옥이와 내가 우리 집에서 숙제를 하는데 불시에 밖에서 징소리, 꽹꽈리소리와 사람들의 웨침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옥이네 마당에 홍위병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몰려와있었고 옥이 할아버지가 그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옥이 할아버지 목에는 "자위단 단장 박중삼을 타도하자!" 라고 쓴 개패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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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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