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05-31(일)

사람들
Home >  사람들

실시간뉴스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인터뷰]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미자- 그녀는 한국생활 19년이 된다. 19년을 사사오입하면 20년이 되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생활 20년이 가까운 최미자씨한테 있어서 어떤 변화들이 생긴 20년이었을까? 2001년 최미자씨가 한국행을 할 적엔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경제생활 수준 차이가 크게 날 때였다. 거기다 중국에서도 동북쪽 오지라 불리는 연변과 한국 사이의 차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연변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은 일종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하다면 최미자씨 역시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수많은 중국 조선족 중의 한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저의 고향은 중국 연변이구요. 한국은 2001년에 나왔어요. 중국에 있을 때 부자란 소리는 못 들었지만 그렇다고 매일 의식주를 걱정할 사정은 아니었어요. 한국으로 나온 건 한국의 선진적인 문화를 배우고 또한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물론 돈도 벌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죠.” 어찌 보면 최미자씨는 <코리안 드림>으로 한국으로 진출한 여느 중국 조선족들과 다른 곳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디를 보나 그냥 보통 여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한테는 꿈이 있었다. 꿈이란 타인한테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 한국에 온 뒤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그것보다는 배울 것이 많았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동방의 예의지국(东方礼仪之国)>라는 한국에서는 가정예의 외에도 밖에서의 <인사예의>, <봉사예의> 그리고 남녀 사이에서의 이성을 대하는 예의 등으로 예의범절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같은 민족이라 해도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차이가 아주 많았다. 총체적으로 자질 상 한국인은 중국 조선족에 비해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의 티>라고나 할까?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시각에는 어딘가 <색깔>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동족인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한가정의 부부 중 한쪽이 한국인이고 한쪽이 외국인일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사례로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쯤 한국에는 일본에 있는 한인 동포에 대해서는 <돈포>라 했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에 대해서는 <똥포>란 당시의 <신조어>가 유행될 정도였다. 최미자씨는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저는 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가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아이>들입니다. 그러자 다가정 문화 가정의 아이란 자체가 색깔적인 시각인 거지요…현재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다문화 가정>이 아주 많으며 그것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8년 <인구 주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다문화 가구원>은 33만 5000가구에 인구는 100만 9000여명으로 총 인구 5136만명 중 2%를 차지합니다.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이런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이 없는 올바른 정의(定义)를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최미자씨는 생각은 굴뚝 같았으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발기해 낸 것이 몇몇 중국 출신 여성들과 함께 만들어낸 자조모임(自助聚会)이었다. 그런데 정작 활동을 벌이자고 보니 언어의 불편, 서류 작성 미숙 및 통역 곤란 등 이런저런 애로가 적지 않았다. 이런 애로사항을 극복하자면 몇몇이 아닌 일정 규모가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최미자씨는 뭘 하려면 체계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을 털어놓자 기타 자매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2010년 충남의 다문화가족협회가 고고성, 본 협회는 공주에 두었고 지회는 공주, 계룡, 논산과 보령에 두었으며 최미자씨는 보령시지회장을 맡게 됐다. 지난해 6월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 <국적 미취득 결혼 이주여성 대상 연구 조사 발표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회의에서는 많은 것들이 제기됐다. 한국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이 어려운 것, 이로 인해 인구감소가 초래되고 지어는 인구절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것,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하고 저 정부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동남아 여성들과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의 필요에 의해 이주해온 여성에 대한 한국의 차별 인식과 대우에 문제가 있다는 것 등으로 어떤 이들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문제는 이주 여성뿐 아니라 이주 여성의 자녀들까지 겪어야 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파헤치기도 했다. 회의에서 최미자씨는“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도 차별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아이들이다. 그야말로 다문화 가정 아이라고 호칭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다문화가정의 여성 및 그 자녀들에 대한 차별과 기시,이는 이주 여성들의 말없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충청남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결혼이주여성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주 여성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 107명 중20%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본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 같아서”란 응답도 16%였다.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서 보면 결혼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깊이 적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최미자씨 역시 한시기 중국 국적을 포기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후회가 없지 않았었다. 그녀가 한국에 나올 때에 비해 현재 중국이 경제적으로 엄청 살기가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한국에 비해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미자씨는 인차 그 후회를 접기로 했다. 같은 동포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한 정이 그 후회를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던 간 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한국행이었고 또한 그 선택이 딱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기에 애써 자아위안을 하면서 내가 선택한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한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더듬게 됐고 결국 이주 여성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거예요. 이렇게 마음을 굳히니 두루두루 할 일이 생기더군요. 협회 일을 보는 한편 주민들을 위한 영어와 중국어 가르치기, 자녀를 위한 방과 후 수업, 노인복지관의 배식 봉사 등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활동은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한 것이고 그 행사에서 최고의 만족도를 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었죠. 거기서 전 크나큰 자신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우리 이주 여성들도 본토 한국여성들처럼 잘 살 수 있고 떳떳이 살 수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을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심을 말입니다.” 한국인이 올바른 주인의식과 책임감으로 이웃인 다문화 가정을 좀 더 세심하게 보듬어주고 바른길로 이끌어 ‘화목한 이웃’이 되기를 희망하는 최미자 씨. 그의 바람처럼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없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그려본다.
    • 사람들
    2020-04-20
  • 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제 77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미국의 뉴스전문방송(CNN)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의 골든 글로브 상은 정치대화의 무대로, 상을 발급하는 이와 수상하는 이 모두 여러 차례 목전의 국제 대사건들을 언급, 예하면 호주의 산불, 악천 기후의 위기, 여성의 낙태권 및 폭발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등이었다. 수상자들을 놓고 보면 브래드 피드가 영화 <할리우드 과거사>로 최우수 조연상을, 영화 <체르노빌>이 재차 최우수 한정 드라마(限定剧)로, <어리 광대>가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기생충>이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획득하였다… 이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은 아콰피나(Awkwafina)였다. 아콰피나는 코미디/뮤직 영화 <그녀한테 말하지 마(Do n't Tell Her)>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여 골든 글리브 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아콰피나는 그녀의 예명이고 진짜 이름은 린자쩐(林家珍)이며 1988 년 미국 뉴욕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콰피나는 4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줄곧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생활,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부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콰피나는 트롬벳을 배우기 시작,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6세 때 그녀는 영어단어 <어색한>에서 파생된 아콰피나란 이름을 자신에게 달아주면서 남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아콰피나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북경 언어대학교에 진학하여 2 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어 아콰피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와 올 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 및 여성연구를 전공, 졸업 후 여러 미디어업체에서 근무했다. 아콰피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지만 기실 랩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3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랩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튜브에 많은 노래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2014 년과 2018 년 각각 2 개의 개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랩 외에도 아콰피나는 배우로 경력을 바꾸었으며 영화 <놀라운 사랑(Amazing Love)> 및 <제동수 2 (Bravesman 2)> 그리고 <피크에 닿다(Reach the Peak)> 등에서 영화배우로서의 기질을 출중히 보이었으며 중국인 감독 왕즈이(王子逸)가 만드는 영화 <그녀에게 말하지 마(Do n't Tell Her)>를 촬영한 후에는 29 회 고담 독립영화상 최우수 여주연상을 받아 안았고 코미디/ 뮤직 영화에서 최우수 여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는 코미디/뮤직 영화 최우수 여배우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상까지 추켜올렸다. 아콰피나는 토크 쇼 사회자로 활동, 류위링(刘玉玲)의 뒤를 이어 <토요일 저녁 현장>을 사회하는 두 번째의 중국계 여성으로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반격 실제로 아콰피나의 많은 랩과 영화 및 TV 작품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공동체의 고정관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12년 아콰피나는 첫 번째 랩의 노래를 촬영, 이 노래의 초점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아시아 소녀들의 반항이었다. 2016 년 6 월 오카리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마르리트 조(Margaret Cao)와 협력하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의 고정관념을 조롱한 단일 <녹차>를 출시했다. 아콰피나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후 그 영화<그녀에게 말하지 마>를 보자 그 영화의 내용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 혼란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CNN의 보고서에 따르면 5일 저녁 무대 뒤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아콰피나는 “놀랍지만 아시아인이 더 많이 이길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콰피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후 처음으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2 년간 지명된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이다. 2019 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이자 <판타스틱 러브>의 배우 우텐민(吴恬敏)은 코미디/뮤직 부문 최우수 여배우로 지명되었지만 불행히도 최종 낙선되었다.
    • 사람들
    2020-01-08
  • 중국과 세계가 공인하는 조선족 테너 왕 – 김영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07년 12월 12일, 한국 부산시 시민회관 대극장에서는 북경에서 온 중국조선족 테너 김영철의 개인 콘서트가 열렸다. 그가 첫 가곡을 부르기 전까지만 해도 관중들은 “중국동포가 성악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라고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중국조선족한테도 클래식 음악을 잘하는 인재가 많으며 더욱이 이날 무대에 오른 중국조선족 성악가는 세계 급의 터너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았으랴?! 잘해도 너무 잘했고 아주 대단한 테너였다. 이날 무대에서 김영철이 세계 유명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투란도트> 등 아리아와 연변가곡 <어머니> 그리고 한국가곡 <그리운 금강산> 등을 불렀다. 동양인이었지만 그리고 중국조선족이었지만 서양의 클래식 가곡을 부를 때는 유럽의 그 어느 유명 테너와 비해도 손색이 없었고 특히 한국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를 때는 한국에 이 노래를 김영철보다 저 잘 부를 테너가 몇 명이나 있을까 할 정도였다. 분위기는 돌변했다. 그가 부르는 가곡이 한곡, 한곡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들은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고 공연이 끝나자 프로그램 책자에 사인을 받으려는 관중들이 줄 서기도 했다. 중국성악계의 세계 급 테너 김영철- 이렇듯 중국조선족과 전반 한민족 그리고 중국의 자랑이었다. 일찍 1964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 진에서 태어난 김영철은 어려서부터 꿈이 컸다. 음악도 즐겼지만 당시 그의 진짜 이상은 배구선수로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 배구경기 중에서 허리를 다친 김영철은 부득불 선수생활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장래를 두고 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김영철의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발견한 음악선생님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음악선생님은 그의 목소리에 알맞은 노래를 선정해 주면서 연습하게 했다. <북경송가(北京颂歌)>, <송화강반에서(松花江上)>, <나는 오지산을 사랑하네 나는 만천하를 사랑하네(我爱五指山我爱万泉河)>, <물길 따라 천리길(연변노래)> 등으로 김영철은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원체 구성진 목청에 노력까지 합세하니 그의 실력은 밤만 자면 달라졌다. 그 음악선생님이 적극 이끌어준 덕분에 다소 늦은 나이었지만 그는 17살의 나이에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86년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김영철은 다시 2년 뒤 아주 출중한 성적으로 중국음악의 최고학부인 중앙음악학원에 합격, 연변예술학교를 나무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편벽한 지구에 있는 규모가 작은 학교라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중앙음악학원의 시절 김영철은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 시골출신의 자기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음악적 토대를 쌓는 분야와 음악의 폭을 넓히는 분야에 더욱 모를 박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하자 김영철은 아무런 개인적인 배경이 없는 상황에서 순 자신의 실력으로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고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었다. 그것이 1992년, 그 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그냥 편하게 출근하면서 교편만을 잡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 나이었다. 김영철은 분발하고 싶었다. 각종 콩쿠르에 참가하여 묵직한 상도 타고 세계음악계의 흐름 새도 요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탄탄해야 경력이 학생들 앞에서도 떳떳하게 가르칠 수 있고 또한 인정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외에서 개최된 여러 명목의 콩쿠 마당은 김영철의 실력을 충분히 증명해 주었다. 1990년과 1992년 중국 전국 청년가수 TV 성악 콩쿠르에서 3등상을, 1991년 전국소수민족성악콩쿠르에서 2등상을, 1995년 중국 문화부 주최한 전국 제2회 성악 콩쿠르에서 2등상을 수상했고, 1996년 프랑스 국제성악 콩쿠르에서 남성 조 우수상을, 같은 해에 스페인 국제성악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성악가로 스타덤에 올라섰다. 성악가로서 끊임없이 노력해 세계정상에 선 김영철은 1997년 스페인에서 있은 오페라 <동백 아가씨>에서 단연 주인공을 꿰찼고 같은 해에 스페인에서 개인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또 그 해 12월에는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성악 콩쿠르 수상자 음악회무대에 서면서 성악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혀 나갔다. 한시기 서양문화의 중심이라는 오페라를 접하면서 김영철은 어려움이 많았다.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석으로 밀려날 때도 여러 번 되었다. 결국 자신의 음악적인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제음악계에 진출하기까지 쉽지 않았음을 털어놓았다. 동시에 음악을 전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짚었다. 성악의 길로 들어선 김영철에게는 여러 가지의 성공요인이 뒤따랐다. 그의 스승인 왕병예 교수는 김영철의 성공비결을 두고 “우선 타고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색과 폭발적인 음량, 뛰어난 고음처리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악가로서 관객과 공연에 대한 책임감 역시 김영철이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 것이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현재 중국음악학원 부교수로 있는 그는 지도교수로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무대에서 쌓은 경험과 실력을 교수에 보탠 것이다. 그의 제자들 역시 전국성악대회와 국제오페라무대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따내고 있다. … 김영철은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50대 중반, 음악생애를 볼 때 이 나이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아니 황금기라고 할 수도 있다. 희망컨대 그가 개인의 음악생애에서 더욱 휘황찬 성과를 올리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무대에 세울 것을 더욱이는 조선족 가수들한테서 제2, 제3의 <김영철>을 발견하고 키워주기를 간곡히 기대하는 바이다.
    • 사람들
    2020-01-07
  • 조선족 女장군 이현옥, 중국공정원 원사로 당선
    ▲이현옥 중국인민해방군 로켓부대 연구원 총공정사 [동포투데이] 흑룡강성 목단강시 출신인 조선족 이현옥 장군(54세)이 중국공정원 원사로 당선됐다고 현지 매체들이 보도했다. 이현옥은 중국인민해방군 로켓부대 연구원 모 연구소의 총공정사이다. 헤이룽장성 무단장시(黑龙江牡丹江市) 출신인 이현옥(1964년생)은 1982년 헤이룽장성 대학입시에서 이과 장원으로 베이징대학 무선전물리전업에 입학, 후에 석사연구생으로 추천받았으며 졸업후 군에 입대하여 제2포병부대의 연구일군으로 되었다. 그는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상 1차, 2등상 1차를 획득하여 일찍 제2포병부대 수장으로부터 “미사일부대 여단장(旅长) 몇명을 담당할 수 있는 여성인재”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현옥은 수차 전국과학기술사업자로 평선되었고 전군 우수첨단과학기술인재 육성대상으로 되었으며 중국정부의 특수수당을 받는 여과학기술일군으로 되기도 했다. 현재 중국 공정원 조선족 원사로는 남성 3명, 여성 1명이 있다. 강경산, 김홍광, 김녕일 그리고 이번에 당선된 이현옥이다.
    • 사람들
    2019-11-17
  • “조선족 정신풍모 잘 보여주고 싶어요”
    [동포투데이] 제11회 중국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성화봉송식과 개막식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한 조선족대표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이번 운동회에 길림성대표단의 조선족대표로 참가한 원예련이다. 원예련은 매체를 통해 조선족 대표로 선발되여 운동회에 참가할 수 있어 너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조선족의 정신풍모를 잘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이 석류 씨처럼 단단히 뭉쳐 단결하고 새 중국이 창립 70주년을 맞아 더욱 번영부강하길 바란다면서 조국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원예련은 중국음악학원 성악가극학부를 졸업한 연구생이다. 그는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5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9살 때에 이미 전국피아노등급시험 9급을 통과했고 성급 및 전국 대회에서 금상을 여러번 수상했다. 또한 중앙텔레비죤 ‘오월의 생화’ 5.4운동 10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해 조선족을 대표해 선창했으며 여러개 조선족 문화기구의 홍보대사를 담당했다. 대표작에는 ‘행복한 새 시대’, ‘꿈을 쫓는 아리랑’, ‘아, 고향’ 등이 있다. 한편 제11회 중국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는 지난 8일 저녁 한족과 조선족 등 중국 내 56개 민족이 참석한 가운데 허난성 정저우(鄭州) 올림픽체육센터 스타디움에서 개막했다.
    • 사람들
    2019-09-12
  • [인터뷰] 현대무용 공연의 주역·무용가 최효진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현대무용가 최효진 교수(한양대 무용학과)는 현대무용의 인재 양성과 정기공연 활성화에 기여해온 대표적인 대한민국 무용계의 한 사람이다. 20여년이 넘도록, 현대무용계의 발전과 후학양성의 길을 걸어온 최효진 교수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 제자들과 함께하는 정기공연으로 6년째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9년, 한국의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쉴 틈 없이 달려온 최효진 교수는, 앞으로도 무용인의 예술혼과 젊은 제자들의 열정을 모아, 현대무용 예술의 정점을 춤의 미를 통해 관객의 마음 속으로 전달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Q. 정기공연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A. 어릴 적부터 무용을 배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까지 긴 시간 동안 문화예술과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나이가 들고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현대무용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자 하였기에, 정기공연으로 관객에게 찾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무대를 준비 하는 것이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지만,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이 뜻을 지키기 위해 매년 무용단 정기공연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오늘도 초심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Q. 공연 내용이 궁금하다. A. 공연은 어린 제자들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됩니다. “Happy Day”라는 작품을 통해 어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소녀들이 성장하여, 소외된 계층을 위해 손을 내밀며 “선물”처럼 다가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여성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중 놓치고 살아가 “유실” 된 것에 대하여, 저와 제자들이 여성들의 일과 꿈에 정체성에 대해 춤으로 표현합니다. Q. 공연 제목이 왜 ‘The Lost유실’인가 A. 이번 공연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놓쳐 유실된 것>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공연에 제목은 몇 년 전 폭우로 인한 우면산 산사태에서 얻어졌는데, 그 시기에 저에게 춤에 대해 유익한 조언을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 제목을 제안하셨습니다. 춤으로 다루기 어려워 고민하던 차에, 한 편의 시를 읽고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는 어딘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증폭되는 가사일과 일상의 부조리함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감을 받았고, 저의 삶 또한 이처럼 유실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며 이 공연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열고 닫는 냉장고, 부르릉거리는 세탁기와 청소기 소리, TV에서 나오는 뉴스와 나도 모르는 라디오 음악,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잡동사니 그리고 아파트 문간에 쌓여만 가는 배달박스들 등. 우리 모두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둘러싸여 있고, 저마다 조금씩 나를 유실하고 있는 건 아닐 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 현대무용가 최효진교수, 한양대 무용학과,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이사 Q. 마지막으로 감사한 분들이 있나 A. 저에게 춤을 처음 알게 해주신 장연향 선생님, 또 제 삶을 무용에 대한 신념 하나로 무용가와 교육자를 만들어 주신 이숙재 교수님, 공연 때마다 항상 저를 찾아와 응원해주시고, 한국문화예술발전에 열정을 가르쳐주시는 문예총 장유리 이사장님 등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특히, 이번 “유실”이라는 타이틀을 후배, 제자라는 보물들과 함께 하게 됨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추운 겨울, 김이 서리는 무용실에서 추위를 잊을 만큼 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제자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합니다.
    • 사람들
    2019-02-15
  • 조선족 오페라가수 최경해, 국제음악콩클에서 2등상 수상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지난 10월 25일 저녁에 막을 내린 2018녕파국제성악콩클 무대에서 중국국립오페라단의 전속오페라가수인 최경해가 뛰어난 노래실력으로 2등을 따내여 중국조선족 음악인의 우수성을 또 한번 만방에 자랑했다고 현지 매체 길림신문이 전했다. 2000년도부터 시작된 중국국제성악콩클은 국제음악콩클 세계연맹의 성원행사이고 3년에 한차례씩 개최되는 국제음악행사이다. 다년래 최경해는 풍부한 표현력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국내외 여러 음악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경해는 2011년 제15회 CCTV 청년가수상에 입상되였으며 39회 이딸리아 벨리니국제성악콩클 중국구 경연에서 3등, 2011년 평양 ‘4월의 봄’ 국제예술축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민족국제예술축전에서는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금상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연길태생인 최경해는 중국조선족 소프라노 림정교수(현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부원장)의 가르침과 추천으로 선후로 연변대학 예술학원과 중국음악학원 (진연교수 사사)성악학부를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한국국립예술종합대학 오페라과와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최경해는 2014년부터 중국국립중앙오페라단 전속오페라가수로 발탁되면서 중국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메조소프라노로 성장하였고 2016년에는 중국문화부로부터 청년오페라인재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최경해는 수십편의 오페라 주역으로 국가대극원에서 공연하였으며, 천진, 항주,신강, 할빈 등 성시 국내유명필하모니와 성공적으로 협연하였으며, 북경, 상해,천진,장춘 등 중국 주요도시들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 사람들
    2018-10-30
  • ‘몬스터 헌터: 월드’ 게임 BGM 작곡가 강정란 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의 유명한 컴퓨터게임기업 캡콤(Capcom)이 야심차게 개발한 신작 ‘몬스터헌터: 월드’(MHW)가 발매된지도 벌써 7개월이 훌쩍 지났다. 갈수록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게임은 기존의 게임에 비해 혁신적이란 호평을 받고 있는데 배경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게임속의 BGM 상당수가 한 조선족 작곡가의 손을 직접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 출신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강정란(康贞兰) 씨, 2006년 지린성 연변1중을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서 “조경디자인(景观设计)”을 전공한 후 일본 규슈대학에 유학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음악감각이 탁월했고 일본어 실력도 뛰어난 그는 캠퍼스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매우 빠르게 유학생활에 적응했다. 강정란 씨는 캑콤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편곡 맡은 게임 BGM은 ‘몬스터 헌터 : 월드’(MHW) ‘영웅의 증거’였다. 그는 나리타 아키히코 씨 밑에서 수행을 하며 제작하였고, 하나의 큰 과제인 "영웅의 증거"의 편곡을 맡았다. 나리타는 작곡가들의 특징과 개성을 파악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지휘를 항상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부담감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의미를 생각하며 제작에 임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난 6월 일본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 앨범상과 음악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은 인기 게임 사운드 트랙을 스포티하이(Spotify).내 재생횟수와 유저들의 투표수로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강정란 씨는 “금번 이런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많은 유저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이 타이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큰 호평을 받아서 매우 놀랐다”며“트로피를 손에 들었을 때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몬스터 헌터: 월드’의 음악을 들어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감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 사람들
    2018-08-03
  • 中 90后 몽골족 인기 여가수 울란투아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소수민족인 몽골족은 우리 조선족과 더불어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민족으로 그 소문이 높다. 몽골족 중에는 명망 높은 가수들이 많다. 푸런파야얼(布仁巴雅尔), 울란치치걸(乌兰齐齐格), 쟝잉줘마(降央卓玛), 쓰친파투(斯琴巴图), 몽골나라(蒙古娜拉)…이들 중 최근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가수가 있다면 아마 섹시한 몸매와 이쁜 얼굴을 가진 여가수 울란투아(乌兰图雅)를 꼽아야 할 것 같다. 울란투아는 1990년 9월 9일, 내몽골 커얼친(科尔沁) 초원에서 태어난 90허우 여성으로 중앙민족대학 학력이다. 일찍 2011년 6월 21살 소녀인 울란투아는 가요 <토우마간(套马杆)>로 가요계에 데뷔, 그 이듬해인 2012년 12월 7일 <초원에서 북경을 바라보며(站在草原望北京)>를 열창해 인기가 급상승했으며 그해 이 노래는 중공중앙 선전부로부터 <중국몽(中国梦)> 우수가요로 선정되었다. 그 뒤 얼짱 소녀가수인 울란투어는 연속 흿트곡을 발표, 2013년에는 <나의 몽골말(我的蒙古马)>, 2014년에는 <초원에 정든 오빠(草原情哥哥)>, 2015년에는 <아얼산의 처녀(阿尔山的姑娘)>를 불러 관중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말아올렸다. 이 중 <아얼산의 처녀>는 중국문예지원자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었고 울란투어 또한 관광명승지 아얼산의 형상대사로 위촉받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울란투아는 중국 각지에서 각광받는 초대가수로 발 돋음, 2016년에는 상해에서 출발해 전국의 10개 대도시를 순회하며 열창했고 2017년에는 <사계절 피는 꽃>이란 제목을 갖고 전국의 17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의 막을 올리기도 했다. 혈형 O형에 1.68미터인 훤칠한 키, 그리고 더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얼짱 미모인 몽골족 여가수 울란투아- 그 어디를 평해도 만점이다. 또한 최근 몇 년간의 폭발적인 인기로 향후 한동안 몽골족 가요계에서 울란투아의 시대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사람들
    2018-02-26
  • 중국 성악계의 조선족 거장- 최경호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성악계에서 조선족 남성거장들로 보면 김영철, 송일 등 몇 명을 손꼽을 수 있다. 최경호도 이 중 일원으로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중 김영철, 송일은 테너와 베이스라면 최경호는 통속적인 대중가요로 인기몰이를 한 성악계의 거장이며 중국의 영화거나 TV드라마의 주제가 혹은 삽곡에서는 절대로 최경호를 외면할 수 없는 인물이다. 1972년 4월, 중국 흑룡강 성 목릉현의 한 보통 농민가정에서 태어난 최경호의 노래인생은 전문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극히 어렵고 힘든 가정환경에서 각고한 노력을 경주해온 노래인생이었다. 일찍 어린 시절, 천부적인 예술적 자질을 갖고 있었던 최경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즐겨들으면서 그것을 따라 불러 인근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경호가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불치의 병으로 돌아갔고 가뜩이나 어렵던 가정은 자식 6남매를 거느린 나약한 어머니 혼자의 어깨위에 놓여지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최경호는 장차 커서 가수로 되려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궁핍한 가정환경은 그로 하여금 예술학교꿈을 접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1981년 최경호는 군에 입대, 그한테 있어서 군 생활은 자신의 장끼를 드러낼 훌륭한 활무대였다. 그는 연대에서 전사들 앞에서 음악지도로 활약했고 자주 군민연환모임(军民联欢会)에서 열창하여 인기몰이를 했는가 하면 사단에서 조직하는 문예콩쿠르에서도 여러 번 상을 받아 안았다. 1984년 군에서 제대하자 당시 중국의 호적원인으로 최경호는 본적지인 목릉현 농촌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수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그는 다시 농촌을 활무대로 노력을 경주, 그해 12월에 있은 현성 문예콩쿠르에서 <전사의 제2고향>과 일본 흑까이도 민요 <그물 당기기(拉网小调)> 등을 불러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으며 당시 현 문화국 국장이던 형탁(邢铎)의 특별 인가로 현문공단에 입단했다. 이어 그는 문공단을 따라 목단강 지구에서 여러 차례 순회공연에 나서는 한편 성급 콩쿠르에도 수차 참가하여 음악전문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1987년에는 흑룡강성 조선족예술관 성악지도로 발탁되었다. 한편 이 시기 최경호한테는 한차례의 풍파가 닥쳐왔다. 당시 중국 내지에서는 기업들에서 예술단을 창립하는 기풍이 불었으며 이는 예술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불타던 그한테 있어서 일종 매혹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갖가지 유혹으로 모 기업의 예술단에 입단한 결과, 이 예술단은 예술보다는 모 기업의 홍보작용으로 이용될 때가 많았으며 지어는 몇몇 기업일군들의 적적함을 달래주는 도구에 불과하기도 했다. 몇 번의 실망고비를 넘긴 최경호는 1992년 단연히 모 기업 예술단에서 사퇴하고는 다시 원 사업터였던 할빈시 조선족예술관으로 돌아왔으며 그해인즉 그한테 있어서 가장 많은 성과로 가장 묵직한 상들을 걸머쥐던 해이기도 했다. 최경호한테 있어서 1992년은 성악생애에서 많은 수확을 거둔 한해인 한편 중국의 저명한 작곡가 곡건분(谷建芬) 선생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어 성악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 한해이기도 했다. 바로 곡건분 여사의 알선으로 1993년 홍콩에서 <93중국풍>으로 명명된 대형공연에 참가하게 되었고 후에 중국의 10대 작곡가로 평선된 서패동(徐沛东) 선생을 알게 되었으며 곡건분 여사와 서패동 선생을 통해 최경호는 예술수준이 큰 폭으로 제고된 한편 인생의 철리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 때로부터 최경호는 중국 영화와 TV드라마의 주제가 혹은 삽곡을 부르기 시작, <조상지(赵尚志)>, <우리의 아빠와 엄마(咱爸咱妈)>, <삼국연의<三国演义>, <서유기 속집(西游记续集)>, <평화연대(和平年代)> 등 30여부의 영화 및 드라마의 열창가수로 선정되었다. 한편 최경호는 각종 명목의 성금활동에도 적극 참가, 1996년 할빈시 조선족예술관의 주최로 개최된 <최경호 음악콘서트>가 끝난 후 자신한테 차례진 수익금 전부를 흑룡강성 오상시 사범학교에 기부했고, 1998년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있은 <이재민 돕기 최경호 콘서트>에서 모금된 200만위안 그 전부를 재해구에 보내주어 국가재해구제사업 선진개인으로 평선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 연변에서 있은 <우애의 손 내밀기(伸出友爱之手) 최경호 개인콘서트>에서 최경호는 수익금 그 전부를 연변지구의 빈곤학생 1248에게 기부해 조선족 집거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달, 그 중에는 그해 본기 대학신입생 215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자가 최경호 가수를 처음 만나 취재를 한 것은 1998년 9월, 연변축구팬협회의 초청으로 연변체육관에서 <최경호 개인 콘서트> 열릴 무렵이었다. 콘서트가 열리기 전날 기자는 몇몇 축구팬들과 함께 연길시내의 한 규모가 작은 <개고기 전문점>에서 최경호와 만났다. 당시 그는 외관상으로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지만 성격상에서는 너무나도 시원시원한 남성으로 보였다. 그는 목청을 보호해야 하는 가수의 신분임에도 열혈축구팬들을 만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배갈 몇 잔 굽 내기도 했으며 “저의 목청을 보호하는 건 저 개인의 사정이고 연변축구를 밀어주는 건 우리 모두의 사정”이라고 하면서 조선족 축구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했다. 그리고 당시 연변오동팀의 감독 고훈과 선수단 전체가 참가한 가운데 콘서트 막이 오르자 중국가무단 가수(1996년 중국가무단 입단)로서 잘 부르는 한족노래가 많았으련만 그가 부른 첫 곡부터 마지막까지 <손에 손잡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한국가요와 <엄마생각> 등 조선족 가요 일색이어서 각별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최경호가 부른 <엄마생각>은 어릴 때 남편 없이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어머니를 그리며 부른 <사모곡>이어서 기자의 가슴을 허비면서 파고 들어서 코마루가 시큰해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최경호는 지난 30여년간 12회에 달하는 개인콘서트를 가졌으며 명실에 부합되는 중국의 성악대가로 부상하였다. 최경호는 아직 40대 가수에 속한다. 40대라고 하면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최경호가 이제 재차 가수생애의 황금기를 맞이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 사람들
    2018-02-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