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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년의 젊음을 과외교육에 바친 오미화 씨
    [동포투데이] 오미화 교원(41세)은 조선족 교육사업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의력으로 장장 12년동안 과외교육에 몸과 마음을 이바지하고 있다. 1997년 9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사범분원 한어문(중국어)전업을 졸업한 오미화는 선후로 왕청림업국 조선족학교에서 4년,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로 6년동안 활약하면서 번 돈으로 연변자치주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대한 일편단심과 전력투구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어 학부모와 어린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왕청현좋은미래과외학습센터 오미화 교원 과외학습센터를 설립한 첫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그중 양부모가 없는 어린이 8명, 홀부모어린이 10명, 한족 어린이 9명으로서 한족, 결손가정 어린이는 인수의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결손가정 어린이들은 친척 집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서 유치원에 다니고 있으며 성격이 활달하지 못하고 소극적이며 우울하고 괴벽했다. 오미화는 결손가정 어린이들에게 늘 사랑으로 어린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하나하나 녹여주고 부모들이 외국으로 돈벌이를 가고 외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늘 집에 가 거짓말을 하여 노인이 교원을 오해하게 하였고 노인이 간혹 어린이의 필기장을 들여다보고는 전후를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담임교원만 탓했다. 오미화는 노인과 어린이에 대한 고까운 생각보다 우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부터 찾기에 노력했으며 정황을 상세히 요해한 후에는 평소보다 더 따뜻한 사랑을 몰 부었다. 차츰 우울하던 어린이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 선생님을 잘 따르고 학급활동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하루는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오면 꼭 선생님께 고운 옷을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 오미화의 마음을 울려놓기도 하였다. 오미화는 어린이들의 정황을 요해하기 위해 늘 여유시간을 이용해 어린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린이들 특히 결손가정 어린이들의 심리를 장악하였으며 자그마한 우점이라고 보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주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한 남자애는 주먹이 세고 남의 음식을 잘 빼앗아먹고 수업시간 규율을 지키지 않았으며 다른 애들이 벗어놓은 신을 변기에 처넣기도 했다. 하지만 이 어린이는 반급 청소와 좋은 일을 하는 습관도 있어 오미화는 이와 같은 우점을 칭찬하면서 남을 때리고 욕하는 나쁜 습관만 고치면 반장감이라고 하였더니 그 애는 신심과 용기가 생겨 나쁜 습관을 차차 고치기 시작하였다. 그 어린이가 된 감기에 걸려 학습센터에 오지 못했을 때에도 오미화는 학급 어린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은 과일 구럭을 들고 찾아가 집단의 사랑을 느끼게 하였다. 하여 이 어린이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많은 진보를 가져왔으며 소학교에 입학해서는 이제껏 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오미화의 엄마와도 같은 사랑에 받들려 많은 결손가정 어린이들이 제 궤도에 들어섰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어린이들의 매 하나의 성적과 진보에 학부모들은 너무도 고마워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미화의 좋은미래강습과외학습센터는 처음의 50평방미터로부터 300평방미터로 늘어나고 어린이도 처음의 50명으로부터 지금의 150명으로 늘어났으며 교원대오도 처음의 2명으로부터 지금은 10명으로 늘어났다. 이외에도 오미화는 빈곤 어린이들의 학비는 면제해 주거나 1년에 300, 500위안씩 면제해 주어 학부모들의 뒷근심을 덜어주고 있으며 왕청현회중아동애심협회, 왕청현애심어머니협회에도 해마다 500, 1000위안씩 기부하고 있다. 오미화는“학부모들의 인정을 받을 때마다 교원 사업의 신성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백배로, 천배로 되는 힘을 얻게 된다”라고 하면서 오늘도 후대 양성사업에 혼신을 다 바쳐가고 있다.
    • 사람들
    2020-07-11
  • “결혼이주 여성도 한국인 ㅡ 이들 위한 대변도 필요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차홍숙 ㅡ 한글로 그녀의 이름은 차홍숙, 국제결혼으로 한국으로 나오기 전엔 중국말 발음으로 그녀의 이름은 처훙수(车红淑)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영어로 부르면 'Hong Sook Cha(홍숙 차)' 불린다.뭐 율무차, 보리차가 있다더니 홍숙차도 있담? 이렇게 같은 사람의 이름이지만 여러 나라의 말로 부르면 달라진다. 그리고 불리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표정도, 그 말투도 달라질 수 있다. 한 남자의 이름을 김영철이라고 하자. 이 이름은 중국에서도 같은 조선족끼리는 김영철이라고 불리지만 그 남자가 한국에 나오면 김영철이 아닌 진융저(JINYONGZHE)로 불렸었다. 이에 김영철이란 남자는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 와서까지 중국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ㅡ 한국인의 시각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문명하고 가장 살기좋은 나라로 보여질지는 모르나 제3국에서 온 사람들의 시각 즉 제 3 자한테서는 한국에 대한 시각이 좀 다르다. 좀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또 한국으로 오기 전에 보던 한국과 정작 한국땅을 밟은 후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이 달라도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 3 국에서 온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한국말인가 하면 또 세계에서 가장 거칠고도 쌍스러운 말이 한국말이다”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 예를 들면 한국 서울이나 여느 대도시의 은행같은 곳에 가서 그런 곳의 직원들의 말씨를 들어보면 얼었던 마음도 다 녹아내릴 정도이다. 친절하고 예의스러우며 거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구체적인 봉사성…이러한 언행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찾아오고 싶어지고 그 직원이 총각이라면 사위로 삼을 생각이 들고 미스라면 며느리로 맞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반대로 한국의 노가다판이라고 하는 작업현장 즉 건설현장이나 바다에서 작업하는 어선현장 같은 곳에 가면 <개새끼>. <씹팔 놈>…벼라별 추한 말들이 다 오간다. 은행창구의 봉사성과 작업현장에서 오가는 말투, 너무나도 모순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한편 한국은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이다. 상하 급 사이의 차별, 남녀 사이의 차별 그리고 내국인과 외국인과의 차별, 특히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 … 차홍숙 그녀는 이런 차별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일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는 자신이 이주여성이어서 더욱 강했을지도 모른다. 1971년생인 차홍숙씨가 중국 헤이룽장성 치치할시(黑龙江省齐齐哈尔市)에서 국제결혼으로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수준 차이가 엄청 크게 나던 시기였고 차홍숙씨를 비롯한 많은 중국 조선족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결혼의 선망대상으로 쳐다보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으로 와서 보니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달았다. 한국사회는 차별이 심했다. 심해도 너무 심했다. 중국출신 동포라고 기시하고 업신 보고 비웃고, 또한 이주여성이 낳은 자녀까지도 이런 불행을 당하군 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과 중국은 사회와 문화가 서로 다르기에 웬간하면 참으면서 한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여성들이 많았어요. 헌데 서로 문화가 다른 차원이 아니라 너무 심하고 억지였어요. 한국에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폭언 폭행이 비일비재로 나타나고 있었지요. 돈 주고 사왔으니 폭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한국인 남성들이 많았고 아니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어요. 그러다보니 맞아서 얼굴에 멍이 든 여성,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으로 실려간 여성 등으로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만거죠.” 하다면 중국에서 남녀평등과 <절반 하늘(半边天)>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또 그 가치관으로 인생을 영위해오던 차홍숙한테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어디까지고 참고 넘어갈 것도, 그냥 보고 지나쳐 버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엔 순 자신만을 위해 적당히 참기도 하고 적당히 반발하기도 하였으며 또 적당히 타협하면서 이른바 <이주여성 인권찾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헌데 이렇게 나서고 보니 주변에는 이렇게 당하며 살고 있는 결혼이주 여성이 너무도 많았다. ● 70대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결혼 후 수시로 언어폭행에 시달렸으며 수시로 생활비를 바쳐야 했고 지어는 여성의 동생한테도 생활비를 강요하는 일이 생겼다. 또 겨울에는 뜨거운 물도 못쓰게 했다… ● 2007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캄보디아 출신 여성 쏙카(가명)는 결혼생활 3년부터 남편의 폭력에 시달렸다. 남편은 결혼 초부터 “밭에서 같이 일하려고 내가 돈 주고 널 데려왔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다 그녀가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 친정에 다녀온 뒤부터 머리카락을 걸머지고 벽에 밀거나 손에 잡히는대로 물건을 던지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가 울면서 말리자 남편은 밖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티브이(TV) 볼륨을 크게 높혀 놓고 쏙카를 때리기까지 했다. … 한국인 남성ㅡ 위의 첫 번째 사례로 70대로서 30대 여성을 아내로 맞았으면 오히려 감지덕지 해야 할 일이지 그런 아내를 학대하고 생활비까지 내라고 억지 부리다니?!…그럼 한국 남성은 그렇게 대단한가? 요즘 세월에 한국인 남성이 중국 조선족 여성한테 장가들자고 해보라. 턱도 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아마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부분적 한국인 남성들한테는 <삼척> 경향이 아주 농후하다고 한다. 강원도의 삼척이 아니라 이런 남성들한테는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 <없어도 있는 척>이라는 <삼척>을 말한다. 자기가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한가?! 팔이 네 개가 달린 것도 아니고 하루 열끼씩 잘 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고 한 것이고 눈이란 살가죽이 모자라 박아넣은 장식품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조 이삭은 염글수록 머리를 숙인다고 했다. 다시 원 화제로 돌아와 이상 두 가지 사례는 전반 한국사회로 놓고 볼 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으며 결코 남의 가정의 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차홍숙씨는 자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는 이런 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현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충동을 가지게 됐다. 현재 차홍숙씨는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찾아가는 봉사단)원으로 활동,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관악구을 다문화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찾봉사단은 주로 중국동포와 결혼이주여성으로 구성 지역사회에서 찾아가는 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10년간의 다문화 봉사, 문화활동을 통해 차홍숙씨는 이주여성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고충과 상처를 알게 됐고 그녀 역시 이주여성으로 그들과 똑같은 불행을 겪은 여성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차홍숙씨는 결혼이주 여성들도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질향상에도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현재 60% 이상의 이주여성들은 한국어를 보고 쓰고 읽을 줄은 알지만 그 뜻을 몰라요. 예하면 알림장이 오면 읽지만 내용은 몰라요.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통지서같은 것이 와도 자녀들의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거죠. 그러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왕따당하거나 심지어 폭행당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한테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아주지 않아요. 마음을 열지 않는거죠. 어찌보면 외국인이라서 소외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한거죠. 즉 외국인이라서 가정에서도 차별받는데 사회에 나가서야 더 이를데 있냐 하는 것이죠.” 이렇게 언급한 차홍숙씨는 이주여성 즉 다문화 가정과의 1 대1의 맨토링(助言)하면서 1대 1로 그들과 대화하고 김치 등 반찬 만드는 방법같은 것을 가르쳐 주면서 끈질기게 손을 내밀면 그들도 언제가는 마음을 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고민을 해보군 한단다. “1 : 1 멘토링은 폭언, 폭행과 고부갈등 및 자녀의 진로 해결 그리고 어려운 가정형편을 복지로 연결시켜 주는 주요한 <그린 통로>이죠. 자녀들의 진로문제 등 공지사항을 단톡방에 올리면 일부 한국인 남편들은 ‘이런데는 우린 안가도 돼, 이런데는 못사는 사람만 가는데야’하고 으스대는데 이건 아주 잘못된 생각이예요. 기실 자신도 최하층에서 겨우 버티며 살면서 말이죠. 일각에서는 다문화가정이란 호칭부터가 차별이라고 주장하는데 일리는 있지만 저의 관점은 달라요. 홍길동이면 어떻고 홍길남이면 어떻냐구요. 호칭이 바뀌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인식이 개선되지 않으면 차별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잖아요?!” 요즘들어 자주 이주여성이나 중국동포 출신 여성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마 등 정치참여가 아주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차홍숙씨이다. “앞으로 철저한 선별과 검증을 거쳐 진짜로 자격이 있는 이주여성 후보들이 많이 나와 단 한 분이라도 구의원, 시의원과 더 나아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동포나 이주민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우리 또한 스스로가 이미지 개선에 힘써야 해야죠. 공익행사, 봉사활동에도 자주 참가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또한 동포라서 외국인이라서 깔본다는 등 소외된 감정과 차별과 무시를 받는다는 억울함이 있더라도 당당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차홍숙씨는 각 국의 문화나 생활을 체험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가까워질 수 있는 이주여성들의 시부모 혹은 친정 부모들로 주축이 된 경로당 설립과 그 활성화, 동포나 이주여성들만 끼리끼리 어울리지 말고 본토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서로 도우면서 살았으면 하는 등 이런저런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기도 했다. 일개의 결혼이주 여성으로부터 서울시 관악구 찾봉사단 단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다문화부 위원장으로 되기까지 처음부터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욕심>을 부린 건 아닌 것 같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저러한 뜻하지 않던 일에 자주 맞다들게 되고 그것을 타개하면서 사노라니 오늘까지에 이른 게 아닐까? 여하튼 차홍숙씨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부분적 한국인들에게 따끔한 말 몇 마디 하고 싶다. 이는 이 글의 주인공 차홍숙씨의 말이 아니다. 대한민국 ㅡ 역사가 깊고 찬란한 문화도 있다. 하지만 굴욕의 역사도 많다. 특히 근대에 와서 일본한테 36년간이나 짓밟히면서도, 아들딸들이 학도병이나 정신대에 끌려가도 그걸 막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조상들이다. 광복, 그것도 대한민국 자체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그 댓가로 나라가 두 동강으로 토막 나기도 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견으로 되고 있는 한국남성들은 떳떳해야 하지만 거들먹 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특히 적어도 힘없고 나약한 여성들한테 큰 소리 치지 말고 주먹을 휘두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한국인? 그렇게 대단하고 우월한 것일가. 그제날의 굴욕의 역사는 그만 두고라도 오늘의 한국도 그렇게 행복한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집계에 따르면 2017년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1개 회원국 중 23위였고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꼴지였으며 한국인의 자살률은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 사람들
    2020-06-06
  • [인터뷰]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최미자- 그녀는 한국생활 19년이 된다. 19년을 사사오입하면 20년이 되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생활 20년이 가까운 최미자씨한테 있어서 어떤 변화들이 생긴 20년이었을까? 2001년 최미자씨가 한국행을 할 적엔 중국과 한국 사이의 경제생활 수준 차이가 크게 날 때였다. 거기다 중국에서도 동북쪽 오지라 불리는 연변과 한국 사이의 차이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연변조선족의 <코리안 드림>은 일종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었다. 하다면 최미자씨 역시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수많은 중국 조선족 중의 한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저의 고향은 중국 연변이구요. 한국은 2001년에 나왔어요. 중국에 있을 때 부자란 소리는 못 들었지만 그렇다고 매일 의식주를 걱정할 사정은 아니었어요. 한국으로 나온 건 한국의 선진적인 문화를 배우고 또한 생활환경을 바꾸고 싶은 것도 있었어요. 물론 돈도 벌고 싶다는 욕망도 강했죠.” 어찌 보면 최미자씨는 <코리안 드림>으로 한국으로 진출한 여느 중국 조선족들과 다른 곳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 어디를 보나 그냥 보통 여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한테는 꿈이 있었다. 꿈이란 타인한테 보이지 않는 것이다. ▲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최미자 충남다문화가정협회 보령시지회장.ⓒ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 한국에 온 뒤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그것보다는 배울 것이 많았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동방의 예의지국(东方礼仪之国)>라는 한국에서는 가정예의 외에도 밖에서의 <인사예의>, <봉사예의> 그리고 남녀 사이에서의 이성을 대하는 예의 등으로 예의범절만 해도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같은 민족이라 해도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차이가 아주 많았다. 총체적으로 자질 상 한국인은 중국 조선족에 비해 한 수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옥의 티>라고나 할까? 외국인을 대하는 한국인의 시각에는 어딘가 <색깔>이 깔려 있었다. 여기에는 동족인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한가정의 부부 중 한쪽이 한국인이고 한쪽이 외국인일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사례로 지난 세기 90년대 중기쯤 한국에는 일본에 있는 한인 동포에 대해서는 <돈포>라 했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에 대해서는 <똥포>란 당시의 <신조어>가 유행될 정도였다. 최미자씨는 그런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저는 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가 차별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한국 아이>들입니다. 그러자 다가정 문화 가정의 아이란 자체가 색깔적인 시각인 거지요…현재 한국 사회에는 이른바 <다문화 가정>이 아주 많으며 그것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18년 <인구 주택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다문화 가구원>은 33만 5000가구에 인구는 100만 9000여명으로 총 인구 5136만명 중 2%를 차지합니다.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이런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이 없는 올바른 정의(定义)를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최미자씨는 생각은 굴뚝 같았으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발기해 낸 것이 몇몇 중국 출신 여성들과 함께 만들어낸 자조모임(自助聚会)이었다. 그런데 정작 활동을 벌이자고 보니 언어의 불편, 서류 작성 미숙 및 통역 곤란 등 이런저런 애로가 적지 않았다. 이런 애로사항을 극복하자면 몇몇이 아닌 일정 규모가 있는 단체가 필요했다. 최미자씨는 뭘 하려면 체계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생각을 털어놓자 기타 자매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2010년 충남의 다문화가족협회가 고고성, 본 협회는 공주에 두었고 지회는 공주, 계룡, 논산과 보령에 두었으며 최미자씨는 보령시지회장을 맡게 됐다. 지난해 6월 충남지속가능발전협의회는 <국적 미취득 결혼 이주여성 대상 연구 조사 발표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회의에서는 많은 것들이 제기됐다. 한국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이 어려운 것, 이로 인해 인구감소가 초래되고 지어는 인구절벽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것, 농어촌 총각들의 결혼문제를 해결하고 저 정부는 한국 남성과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동남아 여성들과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지만 한국의 필요에 의해 이주해온 여성에 대한 한국의 차별 인식과 대우에 문제가 있다는 것 등으로 어떤 이들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차별문제는 이주 여성뿐 아니라 이주 여성의 자녀들까지 겪어야 하는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파헤치기도 했다. 회의에서 최미자씨는“다문화 가정이란 말 자체도 차별이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 아이들이다. 그야말로 다문화 가정 아이라고 호칭하는 것 자체가 차별이다”라고 신랄하게 지적했다. 다문화가정의 여성 및 그 자녀들에 대한 차별과 기시,이는 이주 여성들의 말없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충청남도 지속가능발전협의회가 결혼이주여성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주 여성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응답자 107명 중20%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본국 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더 유리할 것 같아서”란 응답도 16%였다.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서 보면 결혼이주 여성들이 한국사회에 깊이 적응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최미자씨 역시 한시기 중국 국적을 포기한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후회가 없지 않았었다. 그녀가 한국에 나올 때에 비해 현재 중국이 경제적으로 엄청 살기가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한국에 비해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미자씨는 인차 그 후회를 접기로 했다. 같은 동포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한 정이 그 후회를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던 간 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한국행이었고 또한 그 선택이 딱 잘못된 것만은 아니었기에 애써 자아위안을 하면서 내가 선택한 인생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한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더듬게 됐고 결국 이주 여성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거예요. 이렇게 마음을 굳히니 두루두루 할 일이 생기더군요. 협회 일을 보는 한편 주민들을 위한 영어와 중국어 가르치기, 자녀를 위한 방과 후 수업, 노인복지관의 배식 봉사 등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중 가장 인상 깊었던 활동은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한 것이고 그 행사에서 최고의 만족도를 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었죠. 거기서 전 크나큰 자신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우리 이주 여성들도 본토 한국여성들처럼 잘 살 수 있고 떳떳이 살 수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을 우리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잘 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심을 말입니다.” 한국인이 올바른 주인의식과 책임감으로 이웃인 다문화 가정을 좀 더 세심하게 보듬어주고 바른길로 이끌어 ‘화목한 이웃’이 되기를 희망하는 최미자 씨. 그의 바람처럼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과 차별없는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그려본다.
    • 사람들
    2020-04-20
  • 한중혼혈 배우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여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일, 제 77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있었다. 미국의 뉴스전문방송(CNN)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의 골든 글로브 상은 정치대화의 무대로, 상을 발급하는 이와 수상하는 이 모두 여러 차례 목전의 국제 대사건들을 언급, 예하면 호주의 산불, 악천 기후의 위기, 여성의 낙태권 및 폭발 위험성이 있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전쟁 등이었다. 수상자들을 놓고 보면 브래드 피드가 영화 <할리우드 과거사>로 최우수 조연상을, 영화 <체르노빌>이 재차 최우수 한정 드라마(限定剧)로, <어리 광대>가 최우수 음악창작상을, <기생충>이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획득하였다… 이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아시아계 배우로 처음으로 골든 글로브상을 받은 아콰피나(Awkwafina)였다. 아콰피나는 코미디/뮤직 영화 <그녀한테 말하지 마(Do n't Tell Her)>의 여주인공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여 골든 글리브 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아콰피나는 그녀의 예명이고 진짜 이름은 린자쩐(林家珍)이며 1988 년 미국 뉴욕에서 중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콰피나는 4살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줄곧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생활, 그래서일까? 그녀는 조부모와의 사이가 아주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콰피나는 트롬벳을 배우기 시작, 아울러 클래식 음악과 재즈에 대해서도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6세 때 그녀는 영어단어 <어색한>에서 파생된 아콰피나란 이름을 자신에게 달아주면서 남다른 개성을 나타냈다. 아콰피나는 2006 년부터 2008 년까지 북경 언어대학교에 진학하여 2 년간 중국어를 공부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할머니와의 의사소통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어 아콰피나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와 올 버니에 있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저널리즘 및 여성연구를 전공, 졸업 후 여러 미디어업체에서 근무했다. 아콰피나는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지만 기실 랩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13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랩을 배우기 시작했고 유튜브에 많은 노래를 발표하여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2014 년과 2018 년 각각 2 개의 개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랩 외에도 아콰피나는 배우로 경력을 바꾸었으며 영화 <놀라운 사랑(Amazing Love)> 및 <제동수 2 (Bravesman 2)> 그리고 <피크에 닿다(Reach the Peak)> 등에서 영화배우로서의 기질을 출중히 보이었으며 중국인 감독 왕즈이(王子逸)가 만드는 영화 <그녀에게 말하지 마(Do n't Tell Her)>를 촬영한 후에는 29 회 고담 독립영화상 최우수 여주연상을 받아 안았고 코미디/ 뮤직 영화에서 최우수 여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는 코미디/뮤직 영화 최우수 여배우로 제77회 골든 글로브 상까지 추켜올렸다. 아콰피나는 토크 쇼 사회자로 활동, 류위링(刘玉玲)의 뒤를 이어 <토요일 저녁 현장>을 사회하는 두 번째의 중국계 여성으로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반격 실제로 아콰피나의 많은 랩과 영화 및 TV 작품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공동체의 고정관념에 중점을 두고 있다. 2012년 아콰피나는 첫 번째 랩의 노래를 촬영, 이 노래의 초점은 미국사회에서 아시아계 고정관념에 대한 아시아 소녀들의 반항이었다. 2016 년 6 월 오카리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 마르리트 조(Margaret Cao)와 협력하여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의 고정관념을 조롱한 단일 <녹차>를 출시했다. 아콰피나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은 후 그 영화<그녀에게 말하지 마>를 보자 그 영화의 내용은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정체성 혼란의 감각을 보여준 것이었다. CNN의 보고서에 따르면 5일 저녁 무대 뒤에서 있은 인터뷰에서 아콰피나는 “놀랍지만 아시아인이 더 많이 이길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콰피나는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한 후 처음으로 지명되었으며, 지난 2 년간 지명된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이다. 2019 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이자 <판타스틱 러브>의 배우 우텐민(吴恬敏)은 코미디/뮤직 부문 최우수 여배우로 지명되었지만 불행히도 최종 낙선되었다.
    • 사람들
    2020-01-08
  • 중국과 세계가 공인하는 조선족 테너 왕 – 김영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07년 12월 12일, 한국 부산시 시민회관 대극장에서는 북경에서 온 중국조선족 테너 김영철의 개인 콘서트가 열렸다. 그가 첫 가곡을 부르기 전까지만 해도 관중들은 “중국동포가 성악을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라고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중국조선족한테도 클래식 음악을 잘하는 인재가 많으며 더욱이 이날 무대에 오른 중국조선족 성악가는 세계 급의 터너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알았으랴?! 잘해도 너무 잘했고 아주 대단한 테너였다. 이날 무대에서 김영철이 세계 유명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투란도트> 등 아리아와 연변가곡 <어머니> 그리고 한국가곡 <그리운 금강산> 등을 불렀다. 동양인이었지만 그리고 중국조선족이었지만 서양의 클래식 가곡을 부를 때는 유럽의 그 어느 유명 테너와 비해도 손색이 없었고 특히 한국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부를 때는 한국에 이 노래를 김영철보다 저 잘 부를 테너가 몇 명이나 있을까 할 정도였다. 분위기는 돌변했다. 그가 부르는 가곡이 한곡, 한곡이 끝나기 무섭게 관중들은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고 공연이 끝나자 프로그램 책자에 사인을 받으려는 관중들이 줄 서기도 했다. 중국성악계의 세계 급 테너 김영철- 이렇듯 중국조선족과 전반 한민족 그리고 중국의 자랑이었다. 일찍 1964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 진에서 태어난 김영철은 어려서부터 꿈이 컸다. 음악도 즐겼지만 당시 그의 진짜 이상은 배구선수로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한 배구경기 중에서 허리를 다친 김영철은 부득불 선수생활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장래를 두고 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김영철의 천부적인 음악재능을 발견한 음악선생님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음악선생님은 그의 목소리에 알맞은 노래를 선정해 주면서 연습하게 했다. <북경송가(北京颂歌)>, <송화강반에서(松花江上)>, <나는 오지산을 사랑하네 나는 만천하를 사랑하네(我爱五指山我爱万泉河)>, <물길 따라 천리길(연변노래)> 등으로 김영철은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원체 구성진 목청에 노력까지 합세하니 그의 실력은 밤만 자면 달라졌다. 그 음악선생님이 적극 이끌어준 덕분에 다소 늦은 나이었지만 그는 17살의 나이에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86년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김영철은 다시 2년 뒤 아주 출중한 성적으로 중국음악의 최고학부인 중앙음악학원에 합격, 연변예술학교를 나무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편벽한 지구에 있는 규모가 작은 학교라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중앙음악학원의 시절 김영철은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 시골출신의 자기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음악적 토대를 쌓는 분야와 음악의 폭을 넓히는 분야에 더욱 모를 박았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고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하자 김영철은 아무런 개인적인 배경이 없는 상황에서 순 자신의 실력으로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고 후배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었다. 그것이 1992년, 그 때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그냥 편하게 출근하면서 교편만을 잡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 나이었다. 김영철은 분발하고 싶었다. 각종 콩쿠르에 참가하여 묵직한 상도 타고 세계음악계의 흐름 새도 요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탄탄해야 경력이 학생들 앞에서도 떳떳하게 가르칠 수 있고 또한 인정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외에서 개최된 여러 명목의 콩쿠 마당은 김영철의 실력을 충분히 증명해 주었다. 1990년과 1992년 중국 전국 청년가수 TV 성악 콩쿠르에서 3등상을, 1991년 전국소수민족성악콩쿠르에서 2등상을, 1995년 중국 문화부 주최한 전국 제2회 성악 콩쿠르에서 2등상을 수상했고, 1996년 프랑스 국제성악 콩쿠르에서 남성 조 우수상을, 같은 해에 스페인 국제성악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성악가로 스타덤에 올라섰다. 성악가로서 끊임없이 노력해 세계정상에 선 김영철은 1997년 스페인에서 있은 오페라 <동백 아가씨>에서 단연 주인공을 꿰찼고 같은 해에 스페인에서 개인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또 그 해 12월에는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열린 국제성악 콩쿠르 수상자 음악회무대에 서면서 성악가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혀 나갔다. 한시기 서양문화의 중심이라는 오페라를 접하면서 김영철은 어려움이 많았다.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석으로 밀려날 때도 여러 번 되었다. 결국 자신의 음악적인 노력과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국제음악계에 진출하기까지 쉽지 않았음을 털어놓았다. 동시에 음악을 전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할 수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짚었다. 성악의 길로 들어선 김영철에게는 여러 가지의 성공요인이 뒤따랐다. 그의 스승인 왕병예 교수는 김영철의 성공비결을 두고 “우선 타고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음색과 폭발적인 음량, 뛰어난 고음처리 능력을 지니고 있다. 성악가로서 관객과 공연에 대한 책임감 역시 김영철이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 것이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현재 중국음악학원 부교수로 있는 그는 지도교수로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무대에서 쌓은 경험과 실력을 교수에 보탠 것이다. 그의 제자들 역시 전국성악대회와 국제오페라무대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따내고 있다. … 김영철은 이미 5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50대 중반, 음악생애를 볼 때 이 나이는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 아니 황금기라고 할 수도 있다. 희망컨대 그가 개인의 음악생애에서 더욱 휘황찬 성과를 올리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무대에 세울 것을 더욱이는 조선족 가수들한테서 제2, 제3의 <김영철>을 발견하고 키워주기를 간곡히 기대하는 바이다.
    • 사람들
    2020-01-07
  • 조선족 女장군 이현옥, 중국공정원 원사로 당선
    ▲이현옥 중국인민해방군 로켓부대 연구원 총공정사 [동포투데이] 흑룡강성 목단강시 출신인 조선족 이현옥 장군(54세)이 중국공정원 원사로 당선됐다고 현지 매체들이 보도했다. 이현옥은 중국인민해방군 로켓부대 연구원 모 연구소의 총공정사이다. 헤이룽장성 무단장시(黑龙江牡丹江市) 출신인 이현옥(1964년생)은 1982년 헤이룽장성 대학입시에서 이과 장원으로 베이징대학 무선전물리전업에 입학, 후에 석사연구생으로 추천받았으며 졸업후 군에 입대하여 제2포병부대의 연구일군으로 되었다. 그는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상 1차, 2등상 1차를 획득하여 일찍 제2포병부대 수장으로부터 “미사일부대 여단장(旅长) 몇명을 담당할 수 있는 여성인재”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현옥은 수차 전국과학기술사업자로 평선되었고 전군 우수첨단과학기술인재 육성대상으로 되었으며 중국정부의 특수수당을 받는 여과학기술일군으로 되기도 했다. 현재 중국 공정원 조선족 원사로는 남성 3명, 여성 1명이 있다. 강경산, 김홍광, 김녕일 그리고 이번에 당선된 이현옥이다.
    • 사람들
    2019-11-17
  • “조선족 정신풍모 잘 보여주고 싶어요”
    [동포투데이] 제11회 중국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성화봉송식과 개막식에서 유난히 눈길을 끈 한 조선족대표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이번 운동회에 길림성대표단의 조선족대표로 참가한 원예련이다. 원예련은 매체를 통해 조선족 대표로 선발되여 운동회에 참가할 수 있어 너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조선족의 정신풍모를 잘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전국 여러 민족 인민이 석류 씨처럼 단단히 뭉쳐 단결하고 새 중국이 창립 70주년을 맞아 더욱 번영부강하길 바란다면서 조국을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원예련은 중국음악학원 성악가극학부를 졸업한 연구생이다. 그는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5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9살 때에 이미 전국피아노등급시험 9급을 통과했고 성급 및 전국 대회에서 금상을 여러번 수상했다. 또한 중앙텔레비죤 ‘오월의 생화’ 5.4운동 100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해 조선족을 대표해 선창했으며 여러개 조선족 문화기구의 홍보대사를 담당했다. 대표작에는 ‘행복한 새 시대’, ‘꿈을 쫓는 아리랑’, ‘아, 고향’ 등이 있다. 한편 제11회 중국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는 지난 8일 저녁 한족과 조선족 등 중국 내 56개 민족이 참석한 가운데 허난성 정저우(鄭州) 올림픽체육센터 스타디움에서 개막했다.
    • 사람들
    2019-09-12
  • [인터뷰] 현대무용 공연의 주역·무용가 최효진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현대무용가 최효진 교수(한양대 무용학과)는 현대무용의 인재 양성과 정기공연 활성화에 기여해온 대표적인 대한민국 무용계의 한 사람이다. 20여년이 넘도록, 현대무용계의 발전과 후학양성의 길을 걸어온 최효진 교수는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쯤, 제자들과 함께하는 정기공연으로 6년째 우리 곁으로 찾아오고 있다. 2019년, 한국의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쉴 틈 없이 달려온 최효진 교수는, 앞으로도 무용인의 예술혼과 젊은 제자들의 열정을 모아, 현대무용 예술의 정점을 춤의 미를 통해 관객의 마음 속으로 전달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Q. 정기공연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 A. 어릴 적부터 무용을 배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까지 긴 시간 동안 문화예술과 현대무용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나이가 들고 한 해가 지나갈 때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현대무용 발전을 위해 열심히 달리고자 하였기에, 정기공연으로 관객에게 찾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무대를 준비 하는 것이 결코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님을 알지만,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고 이 뜻을 지키기 위해 매년 무용단 정기공연으로 한 해를 시작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오늘도 초심을 향하여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Q. 공연 내용이 궁금하다. A. 공연은 어린 제자들의 축하공연으로 시작됩니다. “Happy Day”라는 작품을 통해 어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소녀들이 성장하여, 소외된 계층을 위해 손을 내밀며 “선물”처럼 다가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여성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 중 놓치고 살아가 “유실” 된 것에 대하여, 저와 제자들이 여성들의 일과 꿈에 정체성에 대해 춤으로 표현합니다. Q. 공연 제목이 왜 ‘The Lost유실’인가 A. 이번 공연은 <너무나 익숙한 일상에서 놓쳐 유실된 것>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 공연에 제목은 몇 년 전 폭우로 인한 우면산 산사태에서 얻어졌는데, 그 시기에 저에게 춤에 대해 유익한 조언을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 제목을 제안하셨습니다. 춤으로 다루기 어려워 고민하던 차에, 한 편의 시를 읽고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시는 어딘가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증폭되는 가사일과 일상의 부조리함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감을 받았고, 저의 삶 또한 이처럼 유실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하며 이 공연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열고 닫는 냉장고, 부르릉거리는 세탁기와 청소기 소리, TV에서 나오는 뉴스와 나도 모르는 라디오 음악,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잡동사니 그리고 아파트 문간에 쌓여만 가는 배달박스들 등. 우리 모두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둘러싸여 있고, 저마다 조금씩 나를 유실하고 있는 건 아닐 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 현대무용가 최효진교수, 한양대 무용학과,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이사 Q. 마지막으로 감사한 분들이 있나 A. 저에게 춤을 처음 알게 해주신 장연향 선생님, 또 제 삶을 무용에 대한 신념 하나로 무용가와 교육자를 만들어 주신 이숙재 교수님, 공연 때마다 항상 저를 찾아와 응원해주시고, 한국문화예술발전에 열정을 가르쳐주시는 문예총 장유리 이사장님 등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특히, 이번 “유실”이라는 타이틀을 후배, 제자라는 보물들과 함께 하게 됨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추운 겨울, 김이 서리는 무용실에서 추위를 잊을 만큼 땀을 흘리며 연습했던 제자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합니다.
    • 사람들
    2019-02-15
  • 조선족 오페라가수 최경해, 국제음악콩클에서 2등상 수상
    [동포투데이 김나래 기자] 지난 10월 25일 저녁에 막을 내린 2018녕파국제성악콩클 무대에서 중국국립오페라단의 전속오페라가수인 최경해가 뛰어난 노래실력으로 2등을 따내여 중국조선족 음악인의 우수성을 또 한번 만방에 자랑했다고 현지 매체 길림신문이 전했다. 2000년도부터 시작된 중국국제성악콩클은 국제음악콩클 세계연맹의 성원행사이고 3년에 한차례씩 개최되는 국제음악행사이다. 다년래 최경해는 풍부한 표현력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국내외 여러 음악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경해는 2011년 제15회 CCTV 청년가수상에 입상되였으며 39회 이딸리아 벨리니국제성악콩클 중국구 경연에서 3등, 2011년 평양 ‘4월의 봄’ 국제예술축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2011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한민족국제예술축전에서는 중국 대표로 참석하여 금상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연길태생인 최경해는 중국조선족 소프라노 림정교수(현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부원장)의 가르침과 추천으로 선후로 연변대학 예술학원과 중국음악학원 (진연교수 사사)성악학부를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한국국립예술종합대학 오페라과와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최경해는 2014년부터 중국국립중앙오페라단 전속오페라가수로 발탁되면서 중국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메조소프라노로 성장하였고 2016년에는 중국문화부로부터 청년오페라인재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최경해는 수십편의 오페라 주역으로 국가대극원에서 공연하였으며, 천진, 항주,신강, 할빈 등 성시 국내유명필하모니와 성공적으로 협연하였으며, 북경, 상해,천진,장춘 등 중국 주요도시들에서 개인 콘서트를 열어 주목받기도 했다.
    • 사람들
    2018-10-30
  • ‘몬스터 헌터: 월드’ 게임 BGM 작곡가 강정란 씨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일본의 유명한 컴퓨터게임기업 캡콤(Capcom)이 야심차게 개발한 신작 ‘몬스터헌터: 월드’(MHW)가 발매된지도 벌써 7개월이 훌쩍 지났다. 갈수록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게임은 기존의 게임에 비해 혁신적이란 호평을 받고 있는데 배경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게임속의 BGM 상당수가 한 조선족 작곡가의 손을 직접 거쳐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 출신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강정란(康贞兰) 씨, 2006년 지린성 연변1중을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서 “조경디자인(景观设计)”을 전공한 후 일본 규슈대학에 유학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음악감각이 탁월했고 일본어 실력도 뛰어난 그는 캠퍼스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매우 빠르게 유학생활에 적응했다. 강정란 씨는 캑콤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편곡 맡은 게임 BGM은 ‘몬스터 헌터 : 월드’(MHW) ‘영웅의 증거’였다. 그는 나리타 아키히코 씨 밑에서 수행을 하며 제작하였고, 하나의 큰 과제인 "영웅의 증거"의 편곡을 맡았다. 나리타는 작곡가들의 특징과 개성을 파악하여 이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지휘를 항상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부담감은 있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의미를 생각하며 제작에 임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지난 6월 일본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 앨범상과 음악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 뮤직 大賞”은 인기 게임 사운드 트랙을 스포티하이(Spotify).내 재생횟수와 유저들의 투표수로 선정해 수여하는 상이다. 강정란 씨는 “금번 이런 영예로운 상을 주셔서 분에 넘치는 영광이라 생각한다. 많은 유저로부터 사랑 받고 있는 이 타이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기쁘지만, 큰 호평을 받아서 매우 놀랐다”며“트로피를 손에 들었을 때 소중한 시간을 내어 ‘몬스터 헌터: 월드’의 음악을 들어주신 여러분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 감동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 사람들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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