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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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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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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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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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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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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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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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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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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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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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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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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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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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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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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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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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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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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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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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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0)
- ■ 김철균 제9회 역경의 지속 1968년 말에 접어들면서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문화혁명의 기세는 한풀 꺾이는듯 싶었다. 거리에서 조직과 조직사이의 무단적 폭력투쟁은 가라 앉았고 “독재대상”이 되었던 김용환도 풀려나왔다.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듯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문화혁명의 동난은 계속됐다. 김용환은 일단 구금생활에서 풀려나왔지만 얼마 안있어 돈화의 어느 한 산골로 노동개조를 가야 했다. 말로는 “5.7간부학교”라고 했으나 기실 정배살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어서 초고중을 졸업한 큰 아들 영남이와 큰 딸 영순이가 같은 날 동시에 농촌으로 내려가 집체호생활을 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순자네 부부와 자녀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 때 그 세월, 이렇게 한집식구가 흩어져사는 가정이 어찌 순자네 가정 한집뿐이었으련만 그 당시 정신상, 경제상에서 순자가 받는 압력은 여느 가정과는 비할 수도 없었다. 한가지 실례를 들고 봐도 한꺼번에 식구 3명이 집에서 나가니 적어도 이불과 요 3채씩은 있어야 했다. 당시 집에 이불이라고는 고작 3채뿐이었다. 그러면 남편과 두 자녀한테 새 이불을 해주어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다른 집들에서는 자식이 농촌집체호로 간다고 하니 모두 새 이불을 해주는 바람이 일다싶이 했다. 그러다보니 연길시내의 몇몇 백화상점들에는 이불등과 이불안감 그리고 이불솜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에서는 자식들한테 이불을 해주어야겠는데 천표와 솜표가 없어서 긍긍 속을 앓기도 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순자네는 천표와 솜표가 남아돌았으나 돈이 없어 새 이불 3채씩이나 할 수 없었다. 순자는 남들이나 자식들한테 새 이불을 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집에 있는 천표와 솜표를 몽땅 남들더러 쓰라고 줘버렸다. 이를 두고 남들이 “다문 얼마씩이라도 돈을 받고 천표와 솜표를 팔 것이지 왜 그냥 주고 말았느냐?”, “나 같으면 찢어버리거나 부억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릴지언정 남한테 그냥 공짜로 안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썩 후에 있은 일이다. 집에 있는 이불 3채는 남편과 영남, 영순이가 각각 한채씩 가지고 갔다. 그러자 집에는 이불 한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구 누님, 집에 이불 한채도 없이 밤에 어떻게 잔다고 그러오?!” 어느 날 순자네 집에 왔던 남동생이 기가 막혀하며 혀를 끌끌 차다가 이불천과 솜을 사줄터니 천표와 솜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자가 하는 말이 천표와 솜표는 또 남들한테 몽땅 줬다는 것이 아닌가. 남동생은 너무 한심하여 머리를 흔들었다. “누님, 그 것까지 남들한테 줘버리면 어떡하겠다는거요? 그렇게 마음이 헐하니 가난밖에 차례지지 않는거요.” 남동생은 누나를 책망하면서도 자기의 집에 가서 천표와 솜표를 가져다서는 돈과 함께 이불감을 사라면서 순자앞에 내놓았다. 그날 순자는 반나절 눈물을 흘렸다. 남동생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고 자식과 남편한테 잘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토록 인심이 헤푼 자신을 탓하면서도 밤만 자면 또 남한테 뭔가를 주지 못해 속을 앓군 하는 순자였으니 이는 곧바로 그의 천성이었다. 2 착한 순자한테 세월은 무정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영남이가 하향한 안도현의 ××산골과 영순이가 하향한 의란공사 ××촌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었다. 죽도록 일해도 한공에 20여전밖에 가지 않는 고장이라 벌어서 집을 돕기는커녕 자립조차 할 수 없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는 “돈 5원만 보내주오”, “털모자가 없어서 겨울에 일할 수가 없소”,“신이 다 판났는데 발이 시려서 일하러 다닐 수가 없소” 하며 한달이 멀다하게 찾아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자식들뿐이 아니었다. 돈화에서 노동개조를 하는 남편 김용환도 인편에 신과 장갑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당시 집에서는 순자는 물론 영옥이, 영애와 경남이, 김진 모두가 동복과 겨울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탄을 절약하느라고 불을 적게 때다 보니 집이 춥기로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독의 물에 살얼음이 낄 지경이었다. 남편과 자식 모두가 헐벗는 판에 과연 누구부터 돌봐야 하는가? 결국 순자는 손수 자기의 손으로 손장갑 몇컬레를 만들고 아끼고 아꼈던 생활비로 겨울신과 두꺼운 양말 등을 사서는 남편한테부터 보내주었다. 왜서였던가! 당시 순자는 그저 가정의 세대주인 남편만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남편이 건강하게 살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야 이 가정의 앞날도 운운할 수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자는 역경일수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자식들한테 자신감을 주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자의 말마따나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니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우어주는 것이었다. 1968년 12월 19일, 순자가 큰 아들 영남이한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아들 지식청년 영남아,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의 간고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농촌에서 살아보았기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간고분투하는 뇌봉정신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영남아, “뇌봉일기”의 77페지에는 다음과 같은 몇개 구절이 씌어져있다. 가장 곤난하고 간고한 사업을 할 때에 황계광을 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솟구치고 투지가 억세어진다. 임무를 수행할 때 구소운을 생각하면 자기한테 엄격히 요구하게 되고 규율을 잘 지키게 된다. 향수를 받게 될 때마다 베쮼동지를 생각하기만 하면 먼저 남을 돌보고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된다. …… 영남아, 이러한 영웅들의 일기를 잘 학습하여라. 영웅들이 한 말들은 흔히 평소에 사람들한테 많은 힘을 주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거울이 되고 등대로 될 때가 많으니 이를 항상 명심하거라. …… 순자는 이런 편지를 큰 아들 영남이한테만 쓴 것이 아니라 선후로 집체호에 나간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 등 모든 자녀들에게 써보냈다. 그 당시 순자는 모든 자녀들의 “거울”이였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여겼고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100%로 잘 따라주었다. 농촌에 내려간 자녀 3명은 비록 생활적으로는 아주 가난하게 보냈지만 농촌의 각종 활동에서 모범을 보였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의학지식을 토대로 생산대 사원들의 병을 떼주기도 하여 “맨발의사”라며 큰 호평을 받았고 영순이도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 결과 집체호에 나간지 얼마 안되어 생산대의 부녀대장과 총 보도원으로 되었다. 이렇듯 어머니인 순자한테서 남다른 교양을 받아서인지 영남이와 영순이는 물론 후에 집체로로 내려간 영옥이와 영애 또한 부지런하고도 착하고 남을 잘 도와주어 항상 사원들의 입에 올라 칭찬을 받군 했다. 그중 1973년에 연길시 흥안공사 대성촌의 집체호로 내려간 영애한테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영애가 판난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순자는 그 것이 가슴아파 큰 결심을 내리고 새신 한컬레를 사주면서 시내로 오거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싣으라고 했다. 헌데 후에 집으로 온 영애를 보니 여전히 그 해진 신을 신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영애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욕하지 말아주세요. 기실 우리 생산대에 저보다도 엄청 더 가난하게 보내는 가정이 있어요. 그래서 그집에 있는 제 또래의 친구한테 그만 그 새신을 주고 말았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순간 순자는 어이가 없었다. 큰 결심을 내리고 사준 새신을 남한테 훌쩍 줘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영애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기 자신이 자식한테 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자녀들한테 교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녀들 또한 모두 자기를 닮아 저렇게 마음이 헐하고 착한데야 어찌하랴. 한편 당시 돈이 없어 영애한테 재차 신을 사주지 못한 것으로 하여 순자는 지금까지 그 때의 일을 가슴아파하며 늘 입에 올리군 한다. 1969년의 음력설전야, 남편 김용환은 “5.7간부학교”에서 특별허가를 해주었기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도 음력설을 쇠러 집으로 왔다. 음력설 날 아침, 순자는 돼지고기에 감자를 섞어서 볶은 채와 통채로 덥힌 두부 등을 밥상에 차려놓고 전날 줄을 서서 받아온 술도 주전자에 덥혀갖고 남편한테 내놓았다. 아내가 부어준 술을 서너잔 마시더니 남편은 급기야 낙루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지 당신한테 뭐가 있다고 손을 내밀었담. 아무렴 내가 나쁜 놈이구 말구…” 그도 그럴 것이 설전날 집이라고 찾아온 영남이와 영순이가 입은 모습을 보니 남루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판나서 솜이 삐죽히 나온 솜바지에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험하게 판난 솜신을 신고 나타났던 것이다. 억이 막힌 용환이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않았지만 그 동안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기한테 죄가 있어서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 모두가 고생한다는 것을 용환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참고 참았던 모든 것이 음력설 아침 술이 몇잔 들어가자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한테 부담만 가득 안겨준 내가 정말 당신을 볼 면목이 없구려. 아이구 내가 못난 놈이지.” “여보, 설날인데 왜 눈물을 보이는거예요. 골란은 잠시적인 것이예요. 당신은 청백한 사람이고 앞으로 꼭 모든 것이 좋아질 날이 있을거예요.” “아버지, 저희들도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진 훌륭하고 양심있는 인민교원이예요. 저희들도 잠시 고생하는 건 모두 참을 수 있어요.” 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와 영옥이도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 아비는 청백하다.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당과 국가에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자, 설날인데 우리 함께 설음식을 먹자구나. 그리고 영남아, 너도 이젠 사회로 나왔으니 어른이 되었다. 자, 이 아비가 부어주는 술 한잔 받거라.”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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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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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령과 월키 사이에 진짜 부당관계 있었을까?
- 1942년 늦여름, 당시 동맹군은 많은 전쟁터에서 저조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미국인은 전쟁중에서 반드시 단결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그는 194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된 월키 루이스를 여러 나라들을 방문시키면서 미국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준엄한 전쟁시련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 알리려 계획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송미령은 어느 날 공상희의 거처에서 중국을 돕고 있는 미국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회를 차렸다. 연회에서 월키는 송미령과 송경령의 중간에 앉았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미령은 월키의 팔을 잡으면서 “제가 당신한테 나의 다른 한 언니를 만나게 할게요. 언니는 신경통이 있기에 오늘 연회에 오지 못했어요.” 연회도중 송미령과 월키가 자리를 뜨자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연회에서 공상희는 송미령과 월키가 없어지자 매우 황당해하며 두 남녀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그 해 10월 중순, 장개석은 중국방문을 마친 월키를 위해 송별모임을 조직했다. 송별모임은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당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장개석과 송미령이 모임에 나타나자 모임의식이 시작되었고 장개석과 송미령은 특별의자에 앉았다. 축사가 끝나나 장개석과 송미령은 월키와 기타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 약 1시간 뒤 월키는 헨리 챈들러(당시의 수행인원)를 불렀다. 그는 몰래 헨리한테 잠시후 자기가 송미령과 함께 모임장소를 떠날테니 자신을 대신해 장개석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월키와 송미령이 몰래 장소를 떠나자 헨리는 장개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것 저것 물음을 제기하면서 장개석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에 노력했다. 행사를 마치고 헨리가 거처에 돌아온 뒤 한밤중이 되자 장개석이 노기등등해 들어왔으며 자동소총을 잡은 3명의 사병이 뒤를 따랐다. 장개석은 가까스로 노기를 억제하며 헨리한테 물었다. “헨리선생, 당신 빌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요?” “전 모르는데요.” 헨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장개석은 방안의 모든 것을 수색했다. 침대밑을 들여다 보고 옷궤도 열어본 뒤 맨 나중에 방안에서 나갔다. 월키는 새벽 4시경에야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송미령과 함께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면서 이미 송미령을 미국으로 초청하였다고 자랑했다. 이에 헨리는 “바보!” 라고 월키를 꾸중한 뒤 이제 귀국하면 부인과 아들이 공항에 마중나올텐데 장부인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면 서로 입장만 곤난하게 된다면서 또한 이제 1944년이 되면 재차 대통령 선거경쟁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니냐며 충고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 헨리와 송미령은 어느 한 비밀거처에서 만났다. 이는 이전에 그들이 자주 만나던 거처였다. 이날 헨리는 송미령한테 월키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누가 안된다고 해요?” “바로 나요.” 이러자 송미령은 즉각 손톱을 날카롭게 살려서는 헨리의 얼굴을 긁어놓았다. 그 뒤 송미령은 미국인 클라라한테 쓴 편지에서 “당시 나는 진짜 월키 선생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고 싶었으나 남편(장개석)이 내가 인차 미국으로 가는걸 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월키와 헨리가 떠나는 날, 그들은 송미령이 차린 한 자선기구에서 송미령과 작별, 이날 송미령의 사무실로 들어간 월키는 인차 문을 닫았고 헨리가 문밖에서 1시간 20분 가량 기다려서야 이들이 함께 나왔다. 이날 송미령은 이들 두사람과 함께 공항까지 갔다. 월키는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송미령을 한번 포옹하면서 얼굴에 미묘한 키스자욱을 남겼다. 출처: 신화넷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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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령과 월키 사이에 진짜 부당관계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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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스케치] 존 케네디의 백악관으로 가는 길
- 존 F 케네디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며 미국의 저명한 케네디 가족성원이다. 그는 대통령 임기기간인 1963년 11월 22일에 댈레스에서 자객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였다. 케네디는 1960년에 미국대통령 선거에 성공, 미국 역사상 가장 나젊은 대통령으로 되었으며 또한 미국 역사상 첫 천주교를 신앙하는 대통령이자 유일한 퓰리처금상을 수상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윗 사진은 1960년 4월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수개월전에 미국 중동부에 위치한 웨스트버지나아주에 있는 한 잡화점을 방문하는 모습이다. 사진은 미국 뉴욕의 TV생방송실에서 죤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대통령변론현장의 남편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1960년 4월 존 케네디가 그의 동생이며 조수인 포비 케네디와 함께 있는 장면이다. 1960년 4월 케네디가 로간지구에서 의자위에 올라 강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케네디의 동생 포비 케네디와 그의 부인 에쌀이 매사추세츠주에서 투표에 참가하고 있는 장면이다. 1960년 5월 존 케네디가 신문을 통해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관련된 보도를 읽고 있다. 1960년 7월 미국민주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존 케네디를 지지하는 여성들이다. 재클린 케네디가 1960년 10월 뉴욕에서 있은 한차례의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한시기 미국에서는 케네디와 그의 부인의 패션이 유행되기도 했다. 사진은 1961년 1월, 뉴욕의 복장전매점에서 케네디와 그의 부인의 모델을 전시하고 있는 장면이다. 1961년 1월 존 케네디(왼쪽 세번째)가 곧 만기가 되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취임연설 현장에서 함께 있는 장면이다. 1963년 11월 22일 12시 30분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텍사스주 댈레스의 디리광장에서 한 자객에 의해 총에 맞아 암살되었다. 그가 암살된 후 자객인 오스왈드는 경찰에 의해 감옥으로 압송되던중 스탠드바의 보스 제크 로비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뒤 어떤 사람들은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의 3년간 선후로 18명에 달하는 해당 관건적인 증인들이 사망했으며 196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무려 115명에 달하는 해당 증인들이 각종 기이한 사건중에서 자살하거나 모살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홍콩 봉황넷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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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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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스케치] 존 케네디의 백악관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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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9)
- ■김철균 ( 3 )위에서도 자주 언급되다싶이 순자의 가정은 워낙 생활이 풍족하지 못하였다. 신흥소학교 동쪽의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비좁은 집에 식구가 많았고 또 남편 김용환 한명의 노임으로 살아가다보니 생활이 어렵다는 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문화혁명 기간 남편이 갇히어 노임이 제대로 발급되지 않은데다 순자마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의 임시일자리에서 나오다보니 수입내원이 줄어들어 매일 매일의 식생활을 이어대기가 극난이었다. 당시 순자한테는 자식 6명이나 딸려 있었다. 큰 아들 영남이, 큰 딸 영순이, 둘째 딸 영옥이, 셋째 딸 영애 그리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 이렇게 연연생 혹은 2-3년 터불씩 여럿이 되었고 모두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었으며 사회에 진출해 직장에 다니는 자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 정도로 말하면 순자 한사람만 쳐다보는 이 가정의 상황에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시 뭐 생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이 몇 집 안되고 거개가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은 건 사실이었으나 순자네 가정은 더할 나위가 없이 근근득식의 계속이었다. 한창 클 나이었던 둘째 딸 영옥이는 영양실조로 얼굴이 노랗게 되었고 둘째 딸 영옥이는 역시 영양실조로 15살 어린 나이에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백모녀”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둘째아들 경남이는 누가 “뭘 먹었느냐”고 물을 때마다 “푸대죽”이라고 대답하여 별명조차 “푸대죽”으로 되고 말았다. 푸대죽이란 말 그대로 시래기와 옥수수 가루를 마구 섞어갖고 끓인 죽으로서 그 때 그 시기 아주 오랫동안 순자네 집에서는 그 푸대죽이 주식으로 되었으며 밥을 해먹을 때가 아주 적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혹시 위생학교에서 교직원들한테 뭔가를 나누어도 독재대상이 된 김용환한테는 늘 몫이 없었다. 그 때 중학교 이상의 학교들마다 거의 모두가 농업실천기지가 있었는데 연변위생학교에도 그런 기지가 있어 거기에서 수확되는 벼, 옥수수와 콩은 흔히 학교 교직원들이 나누기가 일쑤였다. 인당 그닥 많이 차례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입쌀 한알이 귀한 세월이라 그것은 어려운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환이네 가정은 항상 제외되었다. 처음에 순자는 학교에서 그런 나누기를 한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불평의 말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를 싫어하고 공짜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던 순자는 가난해도 절대 그런데는 손을 안 내민다고 단언했던 터였다. 헌데 나중에 볼라니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위생학교에는 김용환처럼 “독재대상”이 된 교직원이 11명이 되었는데 순자네뿐 아니라 그런 가정들이 모두 학교의 “나눠가지기”명단에서 제외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정의 몇몇 아낙네들이 찾아가 제기했으나 학교지도부에서는 “오류분자”의 가정은 제외된다면서 번번히 면박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순자는 자기네만 가지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불공정했다. 순자는 학교내에서 배척받고 있는 모든 가정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학교에서 학교둘레를 막은 널판자 배자를 뜯고 벽돌담장을 쌓으면서 뜯어낸 널판자들을 교직원들한테 나눠주게 되었는데 이 역시 김용환을 비롯한 11세대 독재대상자의 가족은 그 명단에서 제외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순자는 그 11세대 가정의 “권익”을 위해 무작정 위생학교 지도부를 찾아갔다. “뭐?! 배자를 뜯어낸 널판자를 달라구? 동무는 그래 ‘오류분자’가정에서 그걸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뭐가 ‘오류분자’ 가정인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의 남편 김용환 선생은 당의 훌륭한 아들로서 건국초기 연변의 위생사업을 개척한 선구자중의 한사람이예요. 당신들이 뭔데 당의 훌륭한 간부인 김용환 선생을 가두어 놓은 것도 모자라 이런 나눔에서도 우리와 같은 가족을 외면하는가요. 그 심보는 뭔가요? 당과 모주석께서 이러라고 당신들한테 시킵데까?” “이 동무가 이거, 왜 함부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만 말하시오. 듣기 싫소.” 사무실일군이 손을 내저었지만 순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말을 시작하자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왔다. “아니, 계속 말해야 하겠습니다. 그래 누가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가요. 바로 당신같이 무지막지한 사람들이야말로 당과 모주석을 욕보게 하는 사람들인 거예요. 당과 모주석께서는 극소수의 나쁜 놈들을 제외하고는 광범한 인민대중과 단결하라고 했습니다. 그래 저희들 가족들까지 나쁜 놈들이란 말입니까? 어디 한번 대답해보시요. 당신들이 이렇게 우리 가족들까지 계속 무시하고 배척해 보세요. 그러다가 그 가족들이 정말 앙심을 품고 나쁜 사람들 켠으로 넘어갈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때는 당신들같은 사람들 모두가 역사의 심판대에 오를 것이예요……” 이 때 40대쯤 되어보이는 간부 한명이 문을 떼고 들어서다가 순자와 사무실일군이 언쟁을 하는것을 보고는 그 사무실일군을 불러냈다. 그 40대의 간부가 사무실일군을 불러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순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약 10분 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그 일군은 한결 부드럽게 어투를 바꾸며 순자네를 비롯한 그 11세대 가정의 집주소를 일일이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 사무실일군과의 설전에서 순자는 일단 승리하였다. 순자가 밖으로 나오자 위생학교의 목수일을 하던 리동무가 감탄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어쩌면 그렇게도 정치를 잘하십니까? 그 사무실일군은 말 마디가 막혀 한 마디도 못하더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2일 후 위생학교에서는 실제로 순자네를 비롯한 11세대 가정에 널판자를 실어다 주었다. 헌데 순자네 집에 실어온 널판자는 운전수가 집에서 일정한 거리가 있는 큰 길옆에 부리웠고 또한 순자네 집에 제때에 알리지 않은데서 길가던 사람들이 불쏘시개용으로 하나 둘씩 주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순자가 소식을 듣고 나왔을 때는 별반 남아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순자는 큰 길가에 널판자를 부리워놓은 운전사도, 또한 그 널판자를 하나 둘씩 주어가는 사람들도 탓하지 않았다. 워낙 공짜에 큰 욕심이 없는 순자로서 다만 문화혁명의 피해대상인 그 11세대 가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한 것으로 만족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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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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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6)
- ■김철균 내가 8살 때 소학교에 붙었으니까 그 해가 아마 1966년이었을 것이다. 그 시기 아버지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즉 내가 태어나던 1957년부터 그 때까지 아버지는 별로 “외출”을 하지 않았으며 어디에 갔다가도 밤만은 꼭꼭 집에 와서 자군 하였다. 또한 바깥에 나가 돌배 한알이라도 생기면 건사했다가는 꼭 집에 온 후 나를 주군 하였다. 그만큼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은 각별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정치상에서도 크게 “진보”했다. 아버지의 “혁명경력”이 은을 냈던지 아버지는 촌 당지부서기로 일했던 것이다. 글공부를 거의 하지 못한 아버지가 촌지서사업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단, 아버지가 얘기를 잘한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중국어에 대해서는 청산유수였다. 조선어면 조선어, 중국어면 중국어 이렇게 중조 두가지 언어에 대해 막힘이 없는 아버지였으며 그 당시 촌에서 두가지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아버지외 별반 없었다. 아마 그래서 상급당조직에서는 아버지한테 촌지서사업을 맡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헌데 내가 어섯눈을 뜨면서 지켜볼라니 그 때의 아버지는 자주 한숨을 내쉬며 뭔가에 고민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자주 “내가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참 왜 내가 그런 못된 짓을 했노?”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리군 했다. 그 때 아마 아버지는 그 무슨 폭풍우를 예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몇년 뒤 아버지는 문화혁명중에 반란파들한테 물매를 맞게 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세상을 하직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망하기 전 아버지는 나한테 이런 말을 남겼다. “이 아비가 남들의 봉창을 당한 거란다. 봉창을… ”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것을 들려주었다. 1964년은 중국에서 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일 때었다. 그 때 상급에서 사회주의교육공작대가 내려왔고 촌당지부에서도 정풍운동이 크게 벌어졌다. 바로 그 때 촌학교의 한 여성 당원교원이 당시 당지부의 부서기로 있던 김××와 눈이 맞아 돌아친 것이 탄로되었고 아버지는 당지부 지도부회의에서 그 여성당원을 호되게 비판하였으며 거수표결로 그녀를 당내 엄중경고 처분(당적을 보류하고 지켜보기)을 주었다고 한다. “낸들 그러기 좋아서 그랬겠느냐?!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의 처가 그 일을 알고는 속을 태우다 못해 목을 매고 자결했으니 일이 데럽게 꼬였단 말이다. 그 여자를 보호할 여지가 없었단 말이다.” 한편 그 일 때문에 아버지는 어머니한테서도 많은 꾸중을 듣기도 했다. “당신이 뭔데 시집도 가지 않은 남의 여자를 회의에서까지 망신시켜유?! 당신은 얼마나 깨끔한 사람인데 다 그런대유…” “남들이 뒤에서 어떻게 손가락질을 하는지 알기냐 해유?! 나 참 챙피해서 그 말 입에 담지 못하겠수.” 어머니의 꾸중에 아버지는 한마디 대꾸도 없었다. 워낙 옛날의 성미가 많이 죽어든데다 아버지 자신 또한 그 일때문에 몹시 참회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헌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6년 여름, 상해에서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의 폭풍은 마침내 연변의 작으마한 농촌마을인 나의 고향에도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제일 선참으로 반란파들에 의해 붙잡혀나와 투쟁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명은 여러가지였다. 지난날 술을 좋아하다 못해 공소합작사에 가서 외상술까지 받아 마셨으니 부화타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주자파”였고 문화혁명전 조선으로부터 민주연군시기의 전우가 찾아왔었으니 “외국스파이”었으며 조선에 있는 여인과의 일이 어떻게 새나갔는지 생활작풍상에서도 문제가 엄중한 “계급이색분자”였다. 당시 아버지를 가장 호되게 족친 사람은 다름 아닌 소학교의 당원교원인 이금자란 여자와 당지부 부서기었던 김정범이란 남성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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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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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24)
- 근 100년래 전반 지구의 기후가 보편적으로 따뜻해지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 10년의 지면의 평균기온은 1961년부터 1990년의 평균치보다 약 0.6도가 높아졌다. 그럼 지구는 어찌하여 “열”이 나는가? 근 한세기 이래 인류는 석탄, 석유 등 광물연료를 대량 사용하면서 이산화탄소 등 온실기체를 대량 배출하고 있다. 대기중의 온실기체는 한층의 두꺼운 유리마냥 지구로 하여금 큰 온난방처럼 만들면서 전반 지구의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지구의 지속적인 온난화추세는 전반 지구의 강수량을 다시 분배하면서 빙천과 동토가 해동이 되고 바다물 평면이 높아지는 등 자연생태계통의 평형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서 아울러 인류의 식물공급과 거주환경에 위협을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만약 전 지구의 온난화 추세를 효과적으로 억제하지 못하면 미래의 100년중 지구의 온도가 1.4도 내지 5.8도까지 올라가게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100년이 되면 세계에서 1/3이 되는 동식물 서식지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 수많은 동식물 종류가 새로운 생존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어 멸종이 된다고 한다.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는 협력하여 지구기후의 온난화문제를 해결하여 새로운 생존환경을 찾아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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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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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5)
- 트로이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터키, 지점 터키 트로아스평원 함의: 호메로스가 쓴 동화색채가 충만된 옛성 유적 기원전 9세기 고대그리스의 호메르스(荷马) 사시(史词) 중에는 트로이(特洛伊)전쟁을 제기한적이 있는데 이로하여 트리오성이 유명해지게 되었다. 트로이는 기원전 3000년과 기원전 2000년 기간에 일찍 한 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버려진지 몇 세기 후 그리스인들이 다시 자리잡기 시작, 후에 이 지방은 선후로 페르샤인 알렉산드르 황제와 로마인이 통치하게 되었다. 324년 후 이곳은 점차 삭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트로이유적에는 오래된 성곽, 옛성 등으로 형성됐던 층층의 폐허와 여신 아테네(雅典娜)의 무덤이 모셔져 있으며 트로이로 하여금 가장 매력적인 세계 문명고적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토로이목마 호메르스(荷马) 사시(史词)의 기재에 따르면 트로이왕자 패리스(帕里斯)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ㅡ 아내 헬렌(海伦)을 빼앗아갔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를 다시 빼앗아오기 위하여 스바다(斯巴达)왕은 형제 아가멘놈(阿伽门农)한테 간청하여 그리스 연합군과 합류하여 트로이를 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장장 10년간 지속된 전쟁이었는데 최종 그리스군대가 숨겨져있는 한 거대한 목마(木马)를 통해 몰래 트로이성내로 진입해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현재 트로이 로구역입구에는 재건된 거대목마가 있으며 이미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풍경선으로 되고 있다. 아홉개 성의 중첩 고고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트로이유적은 9개의 부동한 시기의 유적들이 중첩돼 함께 형성된 것이다. 그 중 유적의 제일 아래층으로부터 5층에 이르면 이 트로이성이 부단히 확대되었던 상황을 볼 수가 있다. 제 6 층의 폐허는 트로이문화에서 하나의 전변기로 이 때 북방의 초원민족이 트로이로 진입하면서 도시의 면모가 이전과 다르게 되었다. 제 7 층의 페허는 호메로스(荷马)사시에 기재된 트로이성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제 8 층과 제 9층 은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시기와 로마 통치시기의 도시면모를 갖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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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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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해있는 “옛상해의 마지막 아가씨”ㅡ 엄유운
- 엄유운(严幼韵) ㅡ 그녀는 민국시기 자가용을 몰고 교정으로 드나드는 “복단대학의 꽃”이었다. 첫 남편이 일찍 사망한 것 외에는 그의 출신, 경력, 용모와 학력 등은 모두 사람들한테 부러움을 주었다. 민국시기 엄유운은 복단대학의 첫기 여대생이였고 전란시기에는 국민정부 외교관의 부인이었으며 중국의 근현대사를 견증하는 옛상해의 마지막아가씨었다. 엄유운은 절강 녕파의 출신으로 지난 9월 108세 생일을 쇠었다. 다세기를 살아오면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점점 퇴색해가고 있지만 그녀한테 보관되어 있는 몇장의 사진들은 여전히 황홀했던 그제날 그녀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복단대학 교정의 “사랑스런 꽃” 1925년 엄유운은 호강대학(沪江大学)에 입학했다가 2년 뒤에 복단대학 상업학부에 전학, 복단대학의 첫 여대생으로 되었다. 당시 엄유운은 정안사(静安寺)에 거주, 대학과 비교적 먼거리 되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그녀는 자기의 자가용에 앉아 학교로 드나들었다. 집에서 그녀한테 운전기사를 배치했던 것이다. 그 시기 엄유운 역시 차를 몰줄 알았기에 자주 운전기사가 옆에 앉고 그녀가 차를 몰군 하였다. 그 시기 그녀가 모는 자가용의 번호는 “84”번이었다. 이 번호를 두고 당시 어떤 남학생들은 영어 “eighty four”를 상해방언으로 발음하며 “사랑스런 꽃”이라고 하였다. 엄유운은 워낙 생김새가 이뻤으며 거기에 부친 또한 상해 남경로에서 비단옷가게를 운영하였기에 그녀는 아빠의 가게에서 늘 각종 비단옷을 골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엄유운이 매일 바꿔입는 복장은 항상 가장 앞서가는 패션이어서 눈부실 정도였다. “사랑스런 꽃”이란 그녀의 말도 그냥 온 것이 아니었으며 재빨리 복단대학 교정내에 파급되었고 그녀의 사진은 당시 상해의 이름난 잡지의 표지에도 실리게 되었다. 엄유운은 공부에도 아주 큰품을 들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영어공부에서의 성적이 아주 높았다. 이는 후일 그녀가 외교사업을 함에 있어서의 아주 훌륭한 토대로 되었다. 조부는 “녕파방” 개척의 선구자 엄유운의 가족을 말하자면 그녀의 조부 엄신형부터 시작해야 한다. 엄신형의 고향집은 현재의 상해 강북구 장교가두의 비시촌에 있었는데 이 곳은 당시 엄씨가족의 대본영인 수지산장(寿芝山庄)이 있는 곳이었다. 엄신형은 중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이름있는 실업가로서 일찍 항주에서 호설암이 개설한 신원은루(信源银楼)의 비서로 있었고 호설암의 소개로 이홍장한테 추천되어 중용을 받기도 했다. 후에 엄신형은 소금업을 경영하여 많은 재부를 축척하였으며 회화와 서법에서도 큰 재능을 보이었다. 특히 갈대밭 그림을 잘 그리어 소문놓았는데 현재 녕파에는 전문 그의 그림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엄신형은 주로 민족 공상업과 금융업을 발전시켰다. 1887년 그는 백은 5만냥을 투자하여 녕파만에 중국의 첫 기계타면공장을 세웠고 후에는 상해에 투자하여 밀가루공장과 기름공장을 세웠으며 1902년에는 상해의 첫 상업단체인 상해상업회의공소의 초대총리로 되기도 했다. 녕파시 정협 문사위 특별위원이며 원 상해시 강북구 문사위 책임자였던 사진성 선생에 따르면 엄신형 선생은 다년간 금융업과 공상업을 발전시키는 가운데서 녕파적 인사들을 자기의 주위에 흡입하여서는 “녕파방”을 구성, 낡은 식의 상업망을 근대식 기업가단체로 개조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으며 “녕파방”의 개척 선구자였다. 한편 엄신형 선생은 딸 둘과 한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 엄자균은 개명한 상인으로 가업을 진일보 확대하였다. 바로 그런 가정환경속에서 엄유운이 태어나고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와 그녀의 언니들인 엄채운과 엄연운 모두 중국의 제1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이었다. 엄유운의 첫 결혼 엄유운과 첫 남편 양광생의 만남은 역시 “사랑스런 꽃”과 연관이 있었다. 양광생 역시 한 상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말에 상해에서 견직업에 종사, 양광생이 처음 엄유운을 볼 때는 그녀가 바로 “사랑스런 꽃”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양광생은 일종의 호기심을 갖고 엄유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같은 모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 때 양광생은 친구의 소개로 엄유운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열렬하게 그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1929년 9월 6일, 엄유운과 양광생은 혼례를 거행,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된 혼례는 당시 매스컴에서 다투어 보도하는 화제로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찍은 혼례사진이 신문에 발표되자 당시 상해에서는 많은 청년남녀들이 보을 따는 패션으로 되었다. 또한 이 사진은 근 한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여전히 옛상해의 혼례문화를 반영하는 견증자로 되고 있다. 1938년 양광생은 필리핀 주재 중국영사관의 영사로 부임되었다. 그러자 엄유운은 1939년초에 3명의 딸을 데리고 마닐라로 가서 남편과 합류하였다. 당시 총영사의 부인으로서 엄유운은 직접 영사관내의 모든 장식을 설계하고 그 작업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명예주석으로 있는 필리핀 화교부녀협회는 금은장신구를 헌납하는 운동을 발기하여 애국헌금활동을 펼치었으며 전선의 전사들을 위해 100만개에 달하는 구급의료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비록 힘들었지만 남편을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엄유운의 그 나날들은 보람이 있었다. 한대의 피아노로 고통스런 나날을 동반하며 엄유운이 딸들과 함께 귀국한 뒤 1942년 1월 2일, 마닐라가 일제에 의해 함락되고 양광생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으며 그해 4월 17일 양광생과 기타 7명의 중국외교관들은 무참히 살해되었다. 하지만 엄유운은 오랫동안 남편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가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남편이 일제에 이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찍 어릴 때부터 세상에 부러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랐고 고생이란 거의 겪어보지 못한 엄유운이었건만 돌변된 운명앞에서 그녀는 모든 아픔과 비애를 이겨내는 생활의 강자로 되었다. 그녀는 조난당한 기타 외교관들의 아내들과 함께 야채를 심고 신을 만들었고 울안에는 닭과 돼지도 치면서 생활하였고 세 딸을 키워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줄곧 낙관적인 심태를 유지했으며 마음이 허전할 때면 피아노앞에 앉아 추억의 음악을 치면서 한곡씩 부르기도 하였다. 지금도 엄유운은 당시를 추억하면서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애들을 살리고 키우려면 용감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생활을 직시하며 살아야 했었다”고 말하군 한다. 두번째 남편 고유균과의 행복한 만년 1959년, 엄유운은 저명한 외교가인 고유균(顾维钧)과 멕시코에서 결혼등록을 하였다. 그해 엄유균은 54세었고 고유균은 71세었다. 고유균과 엄유운의 첫 만남은 1946년 7월 고유균이 주미대사로 지내던 시기었다. 당시 미국으로 간 엄유운은 여권이 만기가 되어 중국대사관으로 찾아갔다가 고유균을 알게 되었고 당시 고유균은 엄유운을 위해 직접 국민정부 외교부에 여권연기 신청을 해주기도 했다. 퇴직후 고유균은 장기간 외국에 있으면서 국제법관으로 지냈고 두 남녀는 오랫동안 서로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 뒤 고유균과 결혼하여 함께 있게 되자 엄유운은 훌륭한 가정주부로, 간호사로 또한 훌륭한 비서의 역할을 하면서 고유균을 돌봐주었으며 매일 아침, 고유균이 기상하면 우유를 풀어주었고 그의 아침식사부터 저녁식사까지 직접 자기가 만든 것으로 대접하군 하였다. 고유균과 엄유운은 26년간 함께 생활, 고유균은 1985년에 타계했는데 향년 97세였다. 생전에 고유균은 자기의 양생심득에 대해 3가지를 담론하면서 “산보, 소식과 부인의 관심”이라고 개괄했다. 향수 치고 하이힐 신는 108세의 노인 “어머니는 올해 108세예요. 어머니는 특별히 흥성한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리하여 딸들이 매일 어머니에게 활동을 배치해주는거죠.” 이는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이 하는 말이다. 엄유운의 둘째딸 양설란은 올해 77세이고 언니 양뢰맹은 82세었다. 양설란에 따르면 엄유운은 기억력이 좋아 아직도 책을 읽고 마작도 논다고 하며 특히 친구를 사귀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일기도 쓰는가 하면 이미 미국에서 영어로 쓴 책도 한권 출판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엄유운의 전화번호책에는 자주 이용하는 전화번호가 수십개가 있었는데 108세가 되는 노인이 그걸 거의 암송하고 있었다. 또한 수십년래 줄곧 개변하지 않은 습관이 있다면 노인은 아직도 하이힐을 신고 있었으며 향수를 치고 있었다. 엄유운의 세딸 모두 출중한 여인들이었다. 장녀 양뢰맹은 편집원출신으로 “사랑이야기”, “키신져의 회억록” 등 250여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일찍 미국 저명한 쌍일출판사의 주필을 맡아한적도 있었다. 차녀 양설란은 기업가로서 일찍 1989년 미국 제너럴모터스사(通用汽车公司)의 유일한 화상 부총재를 지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삼녀 양천은은 한시기 부동산개발을 하면서 명성을 떨치었으나 애석하게도 어머니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사진 글 출처 : 신화넷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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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해있는 “옛상해의 마지막 아가씨”ㅡ 엄유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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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8)
- ■ 김철균 1 기숙사식당의 일군들과 학생과 독신교원 및 해방군선전대의 장병들 속에서 그렇듯 인기가 놓은 순자였으나 그 임시직원일도 그냥 할 수가 없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남편이 “외국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갇혔지만 일정기간 순자는 학교기숙사식당의 임시직원일만은 계속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학생들의 반란으로 학교지도부 일군이 교체되면서 하루밤 사이에 순자는 그 임시직원의 일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아니, 자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숙사식당 관리원의 입장을 고려하여 스스로 나와버렸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남편 김용환이 “외국간첩”란 누명을 쓰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문화대혁명 전의 어느해엔가 해방전 용정에서 김용환과 소학교 동창생으로 지내다 광복후 조선으로 나간 한철혁이란 사람이 연길로 오게 되었다. 눈과 얼굴 교정수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철혁은 조선인민군 군의관이었다. 6.25당시인 1950년의 8월 낙동강전투시에 지뢰를 밟아 터지는 통에 그의 얼굴과 눈이 흉하게 이그러지게 되었다. 그러던 한철혁이 10여년 뒤 조선정부와 중국정부의 소개로 당시 주정부 주장인 주덕해와 연락이 통하게 되었고 결국 연변변원으로 와서 얼굴과 눈을 치료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용환은 학교에서 수업을 하던 중 주장 주덕해의 비서가 찾아와 주덕해동지가 김선생을 보자고 한다기에 부랴부랴 수업을 마치고는 비서와 함께 찦차에 앉아 주정부로 향하게 되었다. 용환이가 주정부에 도착하여 비서의 안내로 주덕해 주장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웬 중년남자손님이 쏘파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용환이 이 친구야, 나야 나, 한철혁이.” “아니 한철혁이 자네가 어떻게…” 둘은 대뜸 서로를 끌어안았다. 거의 20년만에 만나게 된 소꿉시절의 친구, 반갑지를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점심 한철혁은 주정부 외사판공실에서 초대하려는 것도 마다하고 소학교 동창생인 김용환네 집에 가서 식사하기로 하였다. 그 날 점심 두사람은 용환이네 집에서 미역쌈을 먹으며 옛추억을 더듬으면서 술잔을 나누며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뒤 용환이는 주정부 외사판공실에서 차린 파티에 초청되어 몇번 한철혁과 만나 식사를 함께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 뒤 병치료를 끝낸 한철혁은 인차 귀국하였고 그 후에는 서로가 사업이 빠쁘다 보니 일절 아무런 연계도 없었다. 헌데 그 때의 그 만남이 김용환으로 하여금 주정부 주덕해 주장과 더불어 외국과 내통한 “외국간첩”란 혐의를 받게 되었으며 위생학교의 특실에 갇히게 되었다. 김용환이 갇히고 순자마저 위생학교 기숙사식당에서 나온 후 새로 교체된 위생학교 지도부에서는 수차 순자를 찾아와 남편과 철저히 계선을 나누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착한 순자는 워낙 부지런하고 남을 잘 돕는 습관은 몸에 배였으나 함부로 지도일군들한테 대드는 성미가 아니었다. 필경 연약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만은 달랐다. 순자는 강해졌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남편을 쭉 지켜보며 살아왔고 남편의 인간됨됨이와 일거일동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자는 남편과 계선을 나눌 일이 없다고 굳게 믿는터였다. “순자동무, 우리의 조사에 따르면 동무의 남편은 오래전부터 한철혁과 잦은 연계가 있었으며 몇년전 한철혁이 연변에 왔을 때 그한테 많은 비밀을 넘긴 한편 구체적인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오. 그리고 그 때 한철혁이란 자가 동무의 남편한테 무전기와 사진기를 넘겨 주었다는 제보도 들어왔소. 그러니 동무는 남편과 철저히 계선을 나누고 남편의 간첩행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몽땅 적발해야 하오. 알겠소?!” 하긴 당시 용환이네 집에서 식사를 하던 날 한철혁이 친구간의 우정에서 출발하여 이러저러한 얘기를 많이 나눈 것은 사실이었다. 헌데 그것이 간첩활동접선이라니. 더군다나 거기에 무전기와 사진기까지 제공됐다고 하니 실로 어이가 없었다. 그 지도일군이 말하는 무전기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집에 있는 사진기는 한철혁과 만나기 퍽 전부터 김용환한테 있던 물건이었다. 학교지도부 일군의 위협에 순자는 강경하게 맞섰다. “우리 나라가 색갈이 변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우리 내부에 숨어있는 간첩이거나 계급이색분자들을 색출해내야 하는 걸 저도 잘 안답니다. 그래서 아마 모주석께서도 문화혁명이란것을 일으켰겠지요. 하지만 조직에서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면서 한 전호속의 전우를 적으로 취급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착오랍니다.” “아니, 이 동무가 이 자리에서 누구를 함부로 두둔하는거요?! 김용환 교원이 ××의 중앙일군과 만나서 식사도 함께 한 것이 그래 문제가 되지 않는단 말이요? 그 때 구체적으로 어떤 비밀내통을 했을 수도 있단 말이요. ××이란 나라는 수정주의국가란 말이요.” “하지만 그 때까지만도 우리 중국과 친선적인 국가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당시 주정부의 주덕해 주장까지도 그를 소개하여 연변병원에서 병치료를 하게 했고 저의 남편은 그저 그 기회에 한철혁과 만나서 단 한번의 식사를 함께 했을뿐인데요. 그것이 간첩행위라니 정말 말도 안돼요.” “순자동무, 주덕해가 어떤 사람이요. 그는 항일전쟁시기 왜놈들한테 체포된 뒤 변절한 계급이색분자요. 그리고 장백산 천지의 적지 않은 부분과 두만강 하류의 섬 하나를 ××이란 나라에 넘겨준 자란 말이요.” “오, 그랬습니까? 당신 아주 직접 보는듯이 말하는군요. 그럼 당중앙과 모주석께서는 왜 변절자인 주덕해를 연변의 주장으로 임명했을가요? 그리고 또 주덕해어른이 아무리 주장이라지만 과연 장백산천지의 적지 않은 부분과 두만강하류의 섬을 ××나라에 넘겨줄 권리가 있었을가요? 그리고 그 때 왜 모주석과 당중앙에서는 가만 있었을가요?” …… 위생학교 지도일군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참이나 꺽꺽거리더니 제법 으름장을 놓았다. “이 동무가 이거 안되겠구만. 자식도 많고 또 당사자가 아니니까 가두지 않고 교육을 좀 하려 했더니. 그래 동무도 갇혀봐야 정신을 차리겠소?” “당신들 그래 저까지 계급의 적으로 만들 작정입니까? 그럼 어디 한번 가둬보세요. 항일군정대학의 학원생이고 당의 우수한 아들인 김선생을 간첩으로 몰아가두더니 이젠 ‘뢰봉학습표병’인 저까지 가둔다고? 어디 한번 우리 신흥가두의 광범한 혁명적 군중들과 물어보세요. 이 김순자가 계급의 적인가를 말이예요!” 순자의 말은 거침없었고 그 지도일군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조리가 있었다. …… 말을 마친 순자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저런 저 지독한 아낙네같으이라고…” 등 뒤에서 위생학교 지도일군의 악에 받친 욕설이 터져나왔다. 2 문화혁명에 대해 말할라치면 시초엔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혁명의 취지에 대해 의심하고 반대한 간부와 군중은 별반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순자와 같은 여성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이 그 문화혁명에 대해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당중앙의 결책이라면 모든 것이 정확하고 영명하다고 믿고 있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지속됨에 따라 그것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이란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처음에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이른바 가두시위를 벌이고 북경에 가서 모주석의 접견을 받고 외지의 조직과의 횡적연계를 맺는 등으로 그저 소란스럽기만 하던 것이 날이 감에 따라 광범한 노간부들을 붙잡아내고 그들의 집을 수색하는 쪽으로 파급되었으며 나중에는 전반 사회가 무정부상태에 휘말려들면서 조직과 조직 사이의 파벌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그것도 처음에는 고무총이나 몽둥이를 들고 서로가 싸움을 벌이던 것이 어느 날엔가 연길시 거리에 총소리가 울렸으며 건물에 불을 지르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던 중 전반 연변에 악명이 자자한 “개산툰 유혈사건”이 터졌고 이어서 해방군이 한쪽 파벌의 켠에 서서 다른 한쪽 파벌을 진압하는 이른바 “좌파지지”행동이 개시되었다. 불똥은 순자의 큰 아들 영남이한테도 떨어졌다. 당시 영남이가 가입한 조직은 해방군의 지지를 받는 조직이 아닌 그 반대쪽의 조직이었다. 다시 말하면 해방군의 지지를 받는 조직은 반란이라는 명목하에 주덕해, 요흔, 전인영 등 노일대 혁명가들을 타도하려는 극좌의 노선을 걷는 조직이었고 영남이네가 가입한 조직은 위에서 언급한 노일대 혁명가들 특히 민족간부 주덕해동지를 보호하려는 이른바 “보황파”조직이었다. 영남이네 “보황파”조직은 해방군의 지지하에 소총까지 갖춘 상대방 조직과 파벌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어느 한차례의 파벌싸움 아니 파벌싸움이라기보다는 상대방조직의 무자비한 진압행동속에서 “보황파”조직은 풍지박산이 됐고 조직의 많은 책임자들이 붙잡혀 연행되었다. 그 중에는 순자의 큰 아들 영남이도 있었다. 상대방 조직에서는 갇혀있는 영남이네 조직성원들한테 밥 한술, 물 한방울 공급하지 않아 그들 모두가 허기질대로 허기진 상태였다. 당시 영남이네는 연변의학원의 어느 한 교실에 갇혀있었는데 바로 학교마당에는 콩밭이 있었다. 어느 날 며칠이나 굶은 영남이와 그의 동료들은 밖에 나와 해볕쪼임을 하는 기회를 타서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콩밭에 쓸어들어가 콩잎을 뜯어먹었고 어쩌다 보니 그 소문은 순자의 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가뜩이나 아들 영남이 때문에 속을 조이던 순자는 영남이네가 배고파 콩잎을 마구 뜯어 먹었다는 소문을 듣자 쇠꼬챙이로 가슴을 긁어내는듯 했다. 아들한테 밥을 날라다주려고 했으나 들리는 말에 따르면 대문을 지키는 상대방 조직성원들이 검사하면서 먹을 것은 일절 들여보내주지 않는다고 한다. (영남이와 그의 조직성원들이 굶어죽게 생겼는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순자는 한동안 신통한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을 굴리던 순자는 무릎을 탁 치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려면 어쩌겠나. 목적을 달성하면 그만이 아닌가! 발각되어도 뭐 죄를 짓는 일도 아니고…” 이날 순자는 기장밥을 한 가마밥솥을 해서 보자기에 싸서는 앞배에다 띠였다. 그러고는 임신부처럼 그 위에 헐렁한 옷을 입고 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가 얼핏보면 흡사 임신부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보고 동네사람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상기미를 보이지 않던 순자가 임신이라니 무척 놀라는 사람들이 한두명 아니었다. 순자가 아들 영남이네가 갇혀있는 의학원 대문쪽으로 가니 역시 듣던대로 자식면회를 왔던 몇몇 여인들이 제발 밥만은 들여가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문을 지키는 상대방 조직의 성원은 소리를 꽥꽥 지르며 한사코 들어주지 않았다. 인정같은 것은 꼬물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저런 보황파 새끼들은 며칠씩 굶어봐야 정신을 차립니다. 밥같은 것을 해오겠거든 아들을 볼 꿈도 아예 꾸지 마시오.”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몇몇 여인들은 울면서 갖고온 밥보자기를 문지기한테 맡긴 다음 빈손으로 아들을 면회하러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아줌마는 빈손으로 왔구만. 잘했습니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무턱대고 가슴이 아파하며 아낄 것이 아닙니다. 저런 새끼들은 좀 혼나봐야 사상개조를 할겁니다. 지금 어느 세월이라고 한줌도 못되는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들이 보호하려고 들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반란의 연대로서 반란에는 도리가 있습니다. 저 그리고 저 새끼들이 죽지 않습니다. 2-3일 굶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랍니다…” 대문을 지키는 조직원은 순자의 “뚱뚱한 배”를 희한하게 여겨보며 유달리도 말이 많았다. 이에 순자는 짐짓 모르쇠를 놓으며 “뚱뚱한 배”를 어루쓸었다. “들어가시오. 들어가서 아들을 잘 교육하시오.” 순자는 이렇게 대문을 순리롭게 통과하였다. 순자가 영남이네가 갇혀 있는 방에 들어서자 영남이는 갑자기 뚱뚱해진 어머니의 배를 보면서 한동안 어리둥절해하는 것이었다. 미구하여 순자가 배에 띠였던 보자기를 풀자 놀란것 영남이뿐 아니라 방에 있는 영남이네 또래들 모두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영남의 어머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습니까? 아무튼 머리를 잘 썼습니다.” “영남의 어머니 덕분에 오늘 생활개선을 하게 되였네 허허허.” 갇혀있는 몸이었지만 젊은이들이라 활발하고 낙천적이었다. 순자는 여럿이 똑같이 나누어먹으라고 하면서 손수 둥글게 주먹밥을 만들어서는 여럿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이럴 때일수록 모두가 몸을 조심하면서 앞날을 생각하라며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남이와의 면회를 마치고 돌아져나올 때 순자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갈 때는 “뚱뚱한 배”를 내밀며 임신부처럼 가장했으나 나올 때는 그럴게 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대문을 지키는 조직원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미운놈 떡 하나 더 주라고 순자가 나오면서 “수고하세요”라고 인사했으나 “흥”하고 코방구를 뀌면서 대꾸도 없었다. 그 조직원은 들어가는 사람들만 중시할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인 모양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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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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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연재(2) 만년에 장학량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밀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5월 29일, 여정조는 뉴욕 맨하탄 패조이(贝祖贻) 부인의 저택에서 처음으로 옛상급인 장학량을 배알했다. 첫대면이지만 여정조는 예절성적인 인사말과 예물을 증송하는데 그쳤다. 이튿날 오전, 여정조는 맨하탄에 있는 모든 외부인들을 피한채 한 스위스은행 총재의 집무실에서 장학량과 조용히 만났다. 그들의 담화는 약 한시간가량 지속되었다. 여정조는 먼저 등영초가 보낸 친필편지를 장학량에게 넘겨주었다. 편지를 본 장학량은 대뜸 감개무량해하였다. 그는 확대경을 사용하면서 두번이나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다 읽은 장학량은 “주은래 선생은 내가 잘 안다오. 이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소. 나를 대신하여 등여사한테 문안을 전해주길 바라오”가고 하며 여정조한테 부탁했다. 이어서 여정조는 장학량에게 그에 대한 등소평, 강택민, 양상곤 등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들의 문안을 전하면서 동시에 장학량 장군이 이번에 미국행을 했던 김에 대륙으로 돌아가 친인척들을 방문한다면 조국대륙에서는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장학량은 몹시 감동되어 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차 어조를 바꾸면서 “나로 놓고 보면 진짜 대륙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 소원이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오. 나의 움직임은 곧 대륙과 대만에 모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오. 나는 나 개인의 일때문에 정치상에서 복잡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소.” 그 뒤 뉴욕의 각계 인사들이 장학량을 위해 각종 축수활동을 벌였지만 중공의 대표인 여정조는 여러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이 활동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6월 4일, 뉴욕에서의 축수활동이 끝나자 장학량은 주동적으로 여정조와 만나자고 제기해왔다. 지점은 유엔주재 중국대표단 단장 이정상의 관저였다. 이날 장학량과 여정조는 장장 3시간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담화범위도 매우 넓었다. 이날 여정조는 장학량한테 중국공산당의 한 나라 두가지 제도 및 조국의 평화통일방침 등에 대해 소개했고 장학량은 중국공산당의 이런 주장에 대해 찬동을 표하면서 자신도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저그마한 힘이라도 바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전에 나는 이를 위해 일을 하였었수다. 지금 나는 역시 나의 이 신분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소. 내 나이 이젠 90여살이지만 나를 원하는 곳이나 일거리가 있다면 나는 아주 적극적으로 중국인으로서 중국을 위해 힘을 바칠 것이우다.” 이어 장학량은 여정조에게 솔직하게 아직은 대륙방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친필로 등영초한테 쓴 편지를 내놓았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주부인 영초누님 혜감(惠鉴): ×××선생이 미국까지 찾아와 존찰(尊札)을 베풀어준 것에 대해 매우 기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학량이 대만에 기거하면서 어느 하루도 고향에 대한 정감을 잊어본적이 없습니다. 향후 기회와 인연이 닿는다면 긍정코 고향의 땅을 밟아보렵니다. ×××선생을 통해 영초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경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리면서 무더운 하계(夏季)의 안녕 빕니다. 1991년 6월 2일 그 뒤 장학량은 미국에서의 볼일을 마무리하고는 1991년 6월 27일 부인 조일적과 함께 하와이를 거쳐 대만으로 돌아갔다. 하다면 당시 장학량이 이미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가 있었음에도 왜 조국대륙으로 가지 않았을까? 이를 두고 해내외 언론들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그때 홍콩 “신보(信报)”의 한 기자는 “장학량의 동향, 먼저 대만으로 돌아간 뒤 다시 두번째 방안 강구할 것”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장학량은 행동으로 자신의 중의(重义)를 증명했다. 그는 이 중의를 위해 미국에서 직접 대륙으로 날아가 조상묘를 첨앙하고 친인척을 만나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장군 신변의 인사에 따르면 장군은 이번에 중공의 여정조 선생을 만난 뒤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번에 중공에서는 여정조 선생을 미국에 파견하여 장학량 장군을 배알하고 그를 대륙으로 초청하는 등 높은 품위를 보여주었다. 여정조 선생은 장군한테 대륙의 모든 사람들, 특히는 동북 고향의 사람들은 장군이 하루 빨리 대륙으로 가는 것을 열렬히 환영할 것이고 전했다. 하지만 장군은 심한 심리적 아픔을 참으면서 이를 사절했다. 장군이 미국에 있는 기간, 외계에서는 모두 그가 중국의 통일과 양안의 관계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지켜보았다. 하지만 장군은 조국의 통일이나 양안관계 등 정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기자들의 취재를 접수할 때면 그저 동북군 시절의 이왕지사에 대해 회고했다고 한다. 기자들이 장군한테 국가의 통일에 어떻게 기여하려는가에 대해 물었을 때 장군은 웃으면서‘나 지금 한운야학(闲云野鹤)처럼 떠도는 몸으로 진짜 국가통일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저 국가에 유익한 일을 하고 싶을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군은 국민당에 충고하기를 ‘공산당과의 담판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장학량은 제일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후 가고 싶었던 조국대륙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특히 1년 뒤 재차 대만을 떠나 미국 하와이에 가서 영구성 정착을 한 후 그가 만년에 대륙으로 가지 않은 것에 대해 각종 추측이 난무하였는데 해내외 매체들의 분석은 각양각색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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