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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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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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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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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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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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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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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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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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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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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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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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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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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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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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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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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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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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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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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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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도록 아까운 나의 옛날이여!
- ● 훈 이 남에게 맡기고 한국가서 거의 십년세월을 지우고 오니 옛집이 얼마나 많이 망가져 버렸는지 맘놓고 발들여 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이 되였다. 남편과 둘이서 어렵던 세월에 오순도순 세아이들을 키우면서 꿈도 많았던 내 보금자리, 비록 초라하게 붉은 기와를 얹은 옛스런 단층 벽돌집이지만 늘 윤기가 돌던 내집! 쇠줄로 엮은 넓고 예쁜 초롱에 닭, 오리,게사니 키워서 고기먹고 알먹고 담장을 의지해서 벽돌로 아담한 개집을 지어 네눈박이 귀여운 “보초군” 살게하고 얼마 안되는 둘의 월급을 쪼개가면서 다들 부러워하게 총명했던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던 재미, 구석구석 먼지 티끌이 쌓일세라 쓸고 닦으면서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살았던 알뜰한 내 살림! 복숭아,사과, 오얏나무가 사이좋게 둘러서 있던 앞뜰 우물터, 과일꽃 향기와 록음이 무지 은혜롭던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주렁진 과일나무 밑으로 이웃집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줄레줄레 모여들어서 넉넉한 내 인심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들고 흐뭇해했던 기억들… 갖가지 풋남새들이 흐드러지게 자라서 이웃에 나누어 주면서 맛있게 먹던 뒤뜰 채소밭…..아! 그때가 너무도 그리워서 난 미칠것만 같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처럼 알뜰했던 내 보금자리 살림집을 게으름뱅이 어떤 부부가 들어와 살면서 십년세월 아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일나무는 다 죽어 버리고 숱한 닭오리 게 사니를 키웠던 예쁜 쇠줄 초롱마저 쇠붙이라고 다 팔아먹은건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성스런 우물터에다는 더러운 널판자를 깔고 닭을 치고 있어서 우물터가 아예 닭똥터가 되었고 집안 구석구석 때와 먼지에 찌들어서 내가 살았던 깔끔했고 윤기돌던 흔적이란 찾아볼수도 없으리만치 돼지우리도 그런 돼지우리가 없다. 아!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더러울수가 있을까리해가 안된다. 너무도 화가 나서 몇 날 며칠을 새벽 세시쯤 시작해서 해가 떴다지고 달이 뜨고 그래서 어두워 보이지 않을때까지 닦아내고 쓸어내고 정리하고 가담가담 잔소리도 해가면서 애쓴 보람에 원상 복구를 어느 정도 시켰다. 물론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집이고 이미 고향에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서 살고 있으니 우리가 거기에 다시 살 가망은 거의 없지만 내 사랑 내 꿈이 깃들어 있었고 우리 다섯식구가 지지고 볶고 진한 정을 나누면서 긴 세월을 같이했던 알뜰한 옛 보금자리가 그렇게 망가져 가는걸 그냥 보고 있으려니까 아기자기 살갑던 우리가족의 정마저 엉성하니 변해가는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도 가슴아픈 일이였다. 예로부터 메토끼 잡으러 가면 집토끼가 잃어진다 했던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국가서 돈 번다고 살림을 팽개치고 설쳐대는 사이 나는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 같다. 지금은 동서남북 여기저기에 다 흩어져 버린 우리집 식구들, 십년 리별에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만나면 오히려 서로가 서먹해진 이상한 느낌! 다시 한데 모여 오순도순 화기애애하게 살던 그 옛날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아낄까? 되돌릴래야 되돌릴수 없이 된 지금에야 그 옛날의 소중함을 알게 되였으니 이보다 통분한 일이 다시 없는데 돈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건강까지 잃은점 또한 더더구나 통분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한국가기전에 그처럼 짱짱했던 내 몸이다, 기껏해서 어쩌다 걸리군 하던 경한 감기가 제일 무서운 병이였고 웬간히 무거운 물건은 겁없이 다루던 나, 지금은 껍질만 남았다. 열근쯤되는 물건도 아예 깔려 죽을듯이 무겁게 느껴지는 등신이 되었고 엄중한 풍습성관절염에 심한 골다공증과 빈혈에 저혈압에 영양부족에…그리고 나 스스로는 별로 못 느끼는건데 언니들의 말을 빈다면 난 또 심한 강박증 증세까지 보인다는가? 그새 그렇게 그냥 나는 사람이 아닌 돈버는 기계로만 산 것이였다. 귀국후 일년 반 동안을 북경 청도 흑룡강의 여러지역과 여기 연변지구까지 많이 돌아다니면서 새삼스레 느낀건데 우리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신 나게 한가하게 놀면서도 잘먹고 잘 살고 있는것 같다. 어디를 가도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넓은 공터나 이름모를 어느 광장이나 운동장같은 그런 곳엔 아침저녁으로 늘 숱한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신체 단련을 하고 그렇게 시름없이 신 나게 노는 사람들 천지다. 거기에 비해 크고 작은 공원에 아파트단지마다 있는 작은 휴식터에 간단한 체육시설이나 기구들이 널려있는 한국이지만 누구나 먹고살기 바쁜 한국인들이라 그런 곳에서 한가하게 춤이나 추고 그네타고 있는 모습들을 난 본적이 없다. 그렇게 중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생활리듬에 물 젖은 탓이였던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 악을 쓰고 일하지 않아도 되였을 것을 하루라도 놀게 되면 큰 죄라도 짓고 있는듯이 난 늘 불안했던것 같다. 그래서 거의 십년 세월 여관의 청소아줌마로 일했던 내가 휴식한 날짜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영 아파서 도저히 일할수가 없는 그런 날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저녁부터 다시 새벽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서 그 다음날 머리를 들 수 있는정도 다리를 끌지 않고 걸을수 있는 그런 정도면 다시 일을하고…. 그렇게 보낸 세월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년이나 되였으니 내 몸이 쇠덩인들 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은행에 저금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서 몸이 썩어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 삼월 중순의 어느 날, 내가 이러다가 앉은뱅이가 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서 화장실도벽을 밞으면서 기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금산은 산을 쌓아 놓은들 내가 걸음도 못걷는 병신이 되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전전긍긍을 하면서 미루어 왔던 귀국을 갑자기 결심하게 된 나였다. 이제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집에가고 싶었다. 아프고 보니 그처럼 목숨 같던 돈이 원쑤같았다. 그립던 내 식구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국에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나의 귀국은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고 귀국과 함께 열심히 벌어 모았다고 여겼던 “큰돈”도 실감이 나지 않게 여기저기 반년도 되기전에 다 날아나 버렸다. 결국 출국전이나 똑같이 난 또다시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돈이란 돌게 생긴 물건이라서 아무리 벌어도 손에 남아 있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그것이 누구의 명언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100%진리임을 실감했다. 이리 될줄 내가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왜 그 긴 세월 제몸을 혹사하며 기를 써 왔을까? 실로 후회막급이다. 그렇게 내딴엔 대단히 적시적이고 명지한 결심이고 행동이였다고 여겼던 나의 귀국,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심심히 느끼건대 지금 남아 있지도 않고 이미 다 없어져 버린 돈을 다 끌어모아 처넣어도, 아니 그보다 백배 더 되는 돈을 처넣는대도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되돌릴수 없이 나한테서 영영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소중했던 내 건강이여!!!! 돈에 미쳐서 그리 허망하게 잃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깝고 아픈 내것들이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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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도록 아까운 나의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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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침묵의 봄'
-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천만이 넘어 사는 도시 서울의 삶은 여러모로 답답했는데 올해의 봄은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설을 쇠고 나면 새해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2월 초부터 모든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어 우리에 갇힌 동물과 같다. 나의 주업은 신문발행이고 ‘부업(副業)’으로서 강연 다니고 세미나를 조직하고 다른 기관에서 마련한 세미나에 발제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표를 맡은 ‘多가치포럼’은 2020년 첫 행사로 본래 ‘3.8 여성의 날’을 맞아 조선족, 새터민, 고려인,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외 ‘부업’이 또 있다. 서울시청을 비롯해 여러 관공서 회의에 참석하고 법무부회의도 참석한다. 가끔 작품 심사, 언어발표 심사, 기관 직원 채용 심사도 맡아본다. 법무부 제1기 이민자 맨토단 멘토로 합격되어 본래 2월 27일 법무부 장관 위촉장을 받고 사회통합프로그램과 조기적응프로그램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4월 22일 회의를 개최한다는 공지가 있긴 한데 그때 가봐야 확실하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할지 말지 아직 확실한 결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름에 한 번씩 나가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독서모임도 취소되고 있어 어디도 나갈 곳이 없다. 설 쇠고 나서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은 두 달 넘게 아무 메모도 없이 깨끗하다. ‘일 년 계획은 봄에 달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마다 설을 쇠고 나면 사회가 온통 분주하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나의 달력도 왕년 같으면 한주 평균 두 개 정도 ‘행사’가 메모 되었었는데 올해는 전혀 메모가 없이 깨끗하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활동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은 ‘부업(副業)’이고 나의 ‘부업(副業)’은 곧 나의 ‘부업(富業)’이다. ‘부업(副業)’이 없으니 ‘부업(富業)’도 따라서 사라졌다. 주머니가 늘어야 되는데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인 손해도 손해거니와 두 달 넘어가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슬슬 폐인이 되는 느낌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마치 중이 종치듯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무엇이더냐? 단테는 <신곡>에서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비전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고 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지옥일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지방에 3박4일쯤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부담 없이 한가한 며칠을 보내면 나아질 것 같았다. 왕년 같으면 이때쯤이면 거의 주말마다 지방 관광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을 터인데 올해는 관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괜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내성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무지 안 되겠다싶어 지난주에 대한민국에서 청정지역인 완도로 가기로 맘먹었다. 한국 관광지들은 중국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고 일본처럼 정교하지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아 구경할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떠나는 김에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먼 곳 중에 부산, 포항, 경주 등 경상도 지역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전라도 중에 찾다보니 가장 먼 곳이 완도였다. 여수도 멀기는 하지만 수년 전 ‘여수엑스포’ 때 가보았기 때문에 완도를 택했다. 완도에서 1박, 목포에서 1박, 땅끝 마을 해남에서 1박하기로 스케줄을 짰다. 완도는 서울에서 440킬로미터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 타면 330킬로쯤 직진이어서 운전하기 편하다. 목포에 거의 도착할 지점에서 해남으로 빠져나가는 국도를 타고 에돌아 100킬로쯤 더 간다. 가는 날 장날이라고 날씨를 잘 선택한 탓인지, 타고난 운이 좋은 건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했고 바람 한 점 없이 제법 훌륭한 봄날이었다. 도중에 개나리도 피고 목련도 피고 버들가지들이 뾰족뾰족 싹을 내미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200킬로쯤 달린 지점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벌판을 만나 가슴이 확 뚫린 느낌이었다. 경상도 쪽에 여러 번 운전하고 다녀 봐도 김제 벌처럼 넓은 벌을 보지 못했다. 충청도도 마찬가지 넓은 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북쪽 강원도에 가면 가는 도중에 산이 너무 많아 터널을 수없이 만난다.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지역에 들어서면 터널이 별로 없다. 나는 터널이 2킬로 넘으면 공포증이 생겨나 운전에 지장이 있다. 전라도에 터널이 매우 적고 있다 해도 길이가 짧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환경이 좋아 440킬로 먼 길이지만 운전을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완도 목적지 앞두고 30킬로 지점에서 방역검사가 한 차례 있었다. 일행이 네 사람 모두 정상 체온이어서 무사히 통과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완도타워였다. 오후 2시경이었다. 기분 좋게 갔건만 정작 도착해서 기분이 이상해났다.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지 않는가. 타워 올라가는 길에 한 사람도 왕래하는 길손이 없다. 타워 앞에 올라가니 관광객이란 우리 일행뿐이었다. 타워 정상에 올라가면 전체 완도풍경이 한눈에 안겨올 것 같은데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갔던 김에 샤터를 눌러 기념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나마 다녀왔다는 흔적이기 때문에.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더 구경할 멋이 없어 시간도 매우 단축되어 발길을 장보고 기념관으로 돌렸다. 장보고 기념관도 굳게 닫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 때 한반도 완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로 일본에로 해상무역으로 명성을 휘날린 해상왕 장보고를 만나자던 기대가 다 사라져버렸다. 대충 말 타고 꽃구경, 변두리를 돌다가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떠났다.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번에는 완도수목원으로 가기로 했다. 설마 수목원은 닫지 않았겠지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 갔건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어 몹시 썰렁했다. 바닷가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라 서성이다가 저녁이나 일찍 먹기로 했다. 보는 재미가 없으면 먹는 재미라도 즐겨야지. 완도읍에 전복거리가 있다. 전라남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전복전문음식점에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국에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더분하고 푼더분해 보이는 매너 좋은 주인의 인사말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큰 음식점이 썰렁했다. 단체모임 손님 20명 있어도 워낙 큰 장소라 기분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조용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본래 음식은 기다려서 먹더라도 사람이 문정성시를 이루는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시국에 문전성시는 한 물 건너간 얘기가 아닌가. 저녁 메뉴는 전복집이라 전복풀코스 요리였다. 일인당 5만원, 좀 비싸기는 하지만 ‘싼 것은 좋은 물건이 아니고 좋은 물건은 절대 싸지 않다.’는 중국속담이 있듯이 음식가치가 그만큼 풍부했다. 작년부터 터득한 것인데 지방에 관광 가면 호텔에 묵지 않고 한옥단지에 묵는 것이 나름대로 좋았다. 작년 8월 중순 고열 때 정선 한옥마을에 묵었는데 앞에는 계곡이고 뒤에는 산이어서 경치가 좋을뿐더러 너무 시원하다 못해 조금 추워서 잠잘 때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있다. 피서를 제대로 하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해진한옥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앞에는 완도 바다가 눈에 안겨오고 뒤에는 역시 산이다. 한옥은 여럿이 가면 잠자기도 편하고 음식도 해 먹을 수 있고 밖에서 바비큐도 해서 먹을 수 있고 불고기도 해 먹을 수 있어 그 재미가 쏠쏠하다. 이튿날 아침 청해진포구 촬영지를 가보기로 했다. 역시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가보지도 않고 미리 예단하고 포기하는 행위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고 설마 설마하면서 찾아갔는데 우리 일행의 성의를 알았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이곳마저 닫혀 있었으면 진짜 이번 완도여행은 추억을 남길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관광은 6대 요소로 이뤄진다. 중국식대로 말하자면 먹는 것(吃)이 첫 자리이고 잠자는 것(住), 이동하는 것(行), 관광지 구경하는 것(遊), 토산품(기념품)을 구매하는 것(購), 오락 구경하는 것(娛)의 순서이다. 이 6대 요소 중에서 일단 대한민국에서 귀한 음식으로 취급하는 전복을 먹었으니 괜찮은 편이고, 경치 놓은 한옥에서 잠을 잤으니 역시 합격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은 말짱 꽝이었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다른 지방에 가도 거기서 그것이기 때문에 손바닥 만한 한국 내에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관광지 구경이다. 어느 지역이든 어디를 가던 똑 같은 음식과 똑 같은 숙소는 흔하지만 똑 같은 관광지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여행에 있어서는 관광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이번 완도 여행에서 관광지(청해진포구 촬영지 제외하고)가 모두 닫혀 있어 관광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한마디로 실패한 여행이었다. 목포에 가려다가 그곳도 역시 관광지가 모두 닫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 도망가 버렸다. 해남도 마찬가지. 아무 의미도 없는 여행을 억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3박4일로 잡은 여행이 1박 만에 끝나고 이튿날 청해진포구 촬영지에서 직접 가리봉을 찍고 돌아와 버렸다. 완도는 3월 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왕년 같으면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잠자리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올해는 숙소도 텅 비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나면 어김없이 기온이 따뜻해지고 봄이 온다. 들에는 뭇꽃들이 만발하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이 곳 완도도 틀림없이 자연은 봄이 왔다. 그런데 봄이 왔는데 봄이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이 있다. 완도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연에 맞춰 인간사회에도 봄이 와서 북적대야 하는데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적막감에 휩싸여 있어 봄은 봄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수년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난다. 미국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1년 지은 <침묵의 봄(2011년 김은령 역 에코리브르 출간)>이다. 동양인들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대충 꽃, 아지랑이, 제비 등등이다. 미국인들은 봄에 대해 동양인에 비해 다른 문화적인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곧 새의 지저귐이라고 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새들이 기가 차게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였는데 어느 해인가. 새들이 도시 거리에 죽음으로 나타나고 쥐들도 죽어서 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 해부터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가 지저귀지 않으니 봄은 침묵했다. 저자는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새들의 먹을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인류가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사용함에 따라 다수의 생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례로 북미 지역에서만 참새가 35억 마리 죽었으니 봄을 알리는 지저귐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것을 ‘침묵의 봄’으로 표현한다면 이번 봄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활동이 사라진 것도 역시 ‘침묵의 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 때문에 봄이 오면 봄 같지 않은 봄, 즉 ‘침묵의 봄’이 또 올까 두렵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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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침묵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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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화룡과 고래
- ●허성운(칼럼니스트)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두만강 연안 화룡일대 산골짜기는 과거 선인들 삶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1860년대 함경도지역에 들이닥친 끔찍한 재해와 역병은 마침내 수많은 함경도 사람들이 국경을 박차고 두만강을 넘어 눈 덮인 산악지대로 스며들어 왔다. 이들은 접근이 힘든 산골짜기와 데걱지에서 숨어살면서 따뜻한 벌판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산악 민족 대부분 그러하듯이 타자를 적대적으로 여겨 골짜기 입구까지 막아가며 철저하게 폐쇄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이들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어둠속에 묻혀있다. 거기에 도로 발달이 더디고 왕래가 많지 않았던 그 시기 두만강 유역 화전민의 거주지와 수치는 애초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며 새로운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선인들의 그 고단한 삶의 흔적은 화룡 땅 산골짜기마다 고스란히 묻혀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산골짜기를 뜻하여 고래라는 말이 있다. 파밭고래 불붙이고래 삼밭고래 싸리밭고래 봇밭고래 감자고래 누베고래 빼래밭고래 등이다. 이런 고래에는 어구지, 여불대기, 막치기, 진고래 독고래와 같은 다양한 낱말들이 흔하게 써왔다. 해와 달을 거듭하면서 이런 크고 작은 고래에서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뻗어 나와 혈관처럼 화룡 땅 곳곳에 스며들며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광복이 되면서 조 보리 메밀 감자가 자라는 산골찌기로부터 벼가 자라는 수전벌판으로 그리고 다시 농촌에서 시가지로 사람들이 이동하는 세월동안 화룡 땅 골짜기마다에 숨겨진 피눈물로 얼룩진 지명들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날에 와서 두만강 유역 옛 화룡지역 중국어 지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도구 삼도구 육도구 등 수자 나열식으로 지명을 명명한데 반해 조선어 지명은 마치 큰 나무줄기에서 뻗어나간 가지처럼 하나의 골짜기에서 펼쳐나간 곁 고래들을 빠짐없이 고유어로 지명을 붙여왔다. 홀몸으로 화룡일대를 들어왔던 한족들과 달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선 조선인들은 지팡살이를 하면서 보리밭데기 석마돌어귀 개치기 등 토박이 땅이름으로 지칭하였는데 나중에 이런 지명이 한자를 음차해서 표기된다. 이를테면 골짜기 막치기 뜻을 지닌 개치기를 개척리開拓里으로 적은 것들이다. 오늘날 세간에 알려진 것은 화룡 지명이 달라자 화룡욕에서 기원되었고 만주어 호로holo에서 유래되었다는 게 통설로 되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만큼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지만 사실 이런 해석은 정확한 풀이가 될 수 없다. 만주어 호로holo를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함경도방언 고래와 일맥상통된다. 하나의 언어밑층에서 파생되어 고래와 호로holo로 나뉘었지만 산골짜기라는 뜻에는 그 맥락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두만강 지역이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라는 점을 감안하여 보면 우리말과 만주어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화룡지명은 역사가 깊은 지명이다. 실제로 사책에서도 고라이령古羅耳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만주어 호로holo는 골짜기와 거짓말 밭고랑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거짓말은 표준어 홀리다로 나타나고 함경도 방언에서 후랄친다 홀리붓기로 파생되어 있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구라친다로 변이되어 있다. 함경도방언 고래는 구들고래 술고래와 같은 낱말을 낳았다. 화룡和龍 지명은 함경도 방언 고래와 만주어 호로holo 소리를 바탕으로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언뜻 보면 화和와 룡龍 두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문화 냄새가 진하게 풍겨 꺼림칙하다. 시초에 한자지명 火狐狸 火龍으로 새겨왔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화룡和龍으로 표기가 굳어졌다. 여기에서 화和자는 단순히 야마토 시대를 지칭하는 차원을 넘어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서 와후쿠(和服), 와시(和紙)처럼 와和자는 일본이 고유전통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지명은 한번 불리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바꾸기 어렵다. 우리 선인들이 살다간 흔적으로서 지명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만 오랜 세월 속에서 이처럼 타자에 의하여 제멋대로 찢어지고 구겨지고 비틀어지여 오늘까지도 반듯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봄이 오면 선인들의 피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화룡 땅 골짜기마다에는 연분홍 천지꽃이 어김없이 떨기떨기 피여 난다. 골짜기마다에는 극한으로 연소되어 살다간 함경도 사람들의 뜨거운 삶을 닮아 천지꽃이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오늘도 산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산새들 피타는 울음소리는 천지꽃을 붙들고 화룡지명에 맺힌 한 많은 이야기를 애타게 하소연하고 있다. 필자/ 허성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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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화룡과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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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아바이와 커라바이
- ● 허성운(칼럼니스트) 지금까지 많은 방언학자들은 표준어 할아버지에 대응되는 함경도방언을아바이로만 거론하여 왔다. 함경도에서의 아바이(abai)는 부모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에 있는 남자들을 이르는 말에 반해 부모의 아버지에만 한정된 호칭인 커라바이(khabai)라는 토박이말이 널리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바이는 역사가 깊은 단어이다. 함경도에서는 할아버지를 의미하나 커라바이 맏아바이 아즈바이 오라바이 등 친족어 계열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연장자 의미가 내포되어 경상북도와 평안도 일부에서 아버지를 아바이로 부르는 호칭과도 일맥상통된다. 아바이(abai)이 방언은 만주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아바카(abka) 그리고 북방언어계통에서 신성한 사람 하느님을 뜻하는 안파견 아바칸과 하나의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실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인명으로도 불리어왔다. 고유어의 화석 같은 존재인 아바이 단어는 생물유기체와도 같은 진화를 거듭하며 함경도 방언에서 커라바이 제주도 방언에서 할아방 강원도와 경상도방언에서 할배로 나타나고 있다. 몽골과 흉노 중앙아세아에서 지도자를 지칭할 때에는 한 (han) 또는 칸(khan)으로 부르며 “ㅎ”발음과 “ㅋ” 발음이 상호전환 되는 규칙을 감안해 보면 사실 함경도방언 커라바이와 타지방의 할아방 할배 등 방언들은 쌍둥이처럼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여러 줄기로 노출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예전에 늘 쓰고 들어왔던 “커라바이”라는 말은 오늘날에 와서 “할아버지”라는 표준어에 밀리여 아주 제한된 세대에서 사용되고 있어 이제는 영어 일어 러시아어를 술술 배워내는 우리 아래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선인들이 써왔던 이런 모어가 울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는 외래어로 전락되고 있다. 연변과 함경도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넓은 땅에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뼛속깊이 뿌리내린 함경도방언은 조상들이 살고 간 역사의 흔적으로서 마치 앙금처럼 숱한 역사가 누적된 우리문화유산이나 이제 이런 말들은 바야흐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일부 방언학자들은 연변과 함경도지역에서 남편을 나그네라고 부르는 언어현상을 마치 바깥세상과 동떨어진 외딴 섬나라 미개인의 언어로 풀이하고 있지만 그 어원을 깊이 따지고 보면 중세 몽골어에서는 남편 혹은 친구 의미를 가진 너헤nehers라는 어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함경도 방언 올찌세미를 올케의 그릇된 표현으로 섣불리 해석하고 있지만 여진어와 만주어에서 올케는 단수 형태를 지니고 올찌세미는 복수 형태를 지닌다. 함경도의 안까이는 표준어 아내라는 말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 단어이다. 여러 쪽으로 갈라진 구리거울이 하나로 이어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옛날이야기처럼 지역마다 스며있는 방언가치를 깊이 발굴하고 동질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만이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 질수 있는 것이다. 우리언어의 가시밭길을 더듬어보면 근대에 들어와서 허다한 문명은 남에서 북으로 들어왔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강력한 북방문명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거쳐 끊임없이 남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쉬운 개성이 있는 방언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 방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말을 마음속에 새길 때 장기간 밀폐된 언어의 창고에서 우리 방언도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연변과 함경도 방언은 우리 과거 역사를 풀어내는 블랙박스이며 또 미래를 헤쳐 나가는 내비게이션이기도하다. 필자/허성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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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아바이와 커라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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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을 도구화하는 한국정쟁,그만하라!
- ●박광성 한국역사를 보면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이 여러 당파로 나뉘어 권력쟁탈을 위한 정치싸움에 골몰하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외적을 앞에 두고 내부 떡 싸움을 하다가 다 같이 망한 셈이다. 일제에 나라를 뺏았기고 타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그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루멀다 하게 새로운 당파가 생기고 서로 헤게모니 싸움만 하다가 결국 결국 대국들에 의하여 광복되었으며 나라가 분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렇듯 역사를 보면 당쟁과 내부분열은 한국의 망국의 병페였다. 오늘날의 한국은 반드시 이를 역사의 거울로 삼아 얼굴을 자주 비춰보고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그러한 망령이 또다시 얼른거린다. 세계사적인 또 한번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고 그것이 한반도에 여러모로 큰 도전을 가져다 주고 있는 오늘날의 중요한 역사시기에 온 국민이 좌, 우로 나뉘어 다수 국민에게 별로 실익도 없는 논쟁에 젖먹던 힘까지 빼고 있다. 이번 코로나 19사태만 봐도 그렇다. 집안에 불이 붙었으니 원인을 막론하고 일단 불부터 꺼야 한다. 그러나 국민을 이끌고 불끄는 일에 집중해야 할 정치권이 그보다 정치싸움에 더 골몰하는 듯하다. 그것도 엉뚱하게 이 마당에 친미와 친중의 논쟁으로까지 번져 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 하다. 아전투구의 싸움이 되다보니 급기야 어느 극우 사이트를 통하여 “조선족들이 한국의 모든 여론을 조작”한다는 어느 가짜 조선족의 양심선언이 이어졌고 언론에서 이를 “차이나 게이트, 조선족 게이트”란 이름을 부쳐 대서특필하는 상황까지 번졌다. 이를 더는 방치할 수 없어 결국 청와대까지 나서서 국가별 인터넷 접속 숫치까지 밝혀가며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사이트에 올린 소위 조선족의 양심선언을 보면, 문맥이나 표현방식, 사고에 있어 분명히 어느 정치에 열중하는 한국인에 위하여 조작된 것이다. 현재 도시화로 세계 각국에 유동 중인 조선족이 무슨 정신으로 한국여론을 좌지우지 하며,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한국정치에 열중하겠는가? 매일 세계 선진국타령을 하면서 다른 나라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고국에서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재외동포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부정적인 인식은 “계급편견”에서 유래한 일면이 많았다. 돈 벌려고 온 노동자들이니 그 설음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그 양상이 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미중간에 마찰이 늘면서 한국 내에서 줄타기 고민이 시작되었고,그것이 이데올로기 영역까지 확대되면서 보수집단이 친미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이를 위하여 중국을 견제하기 여론을 조직적으로 조성하면서 조선족을 그 희생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자연발생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이용되는 일면이 있다. 고국에 희망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면 꼭 자신이 당한다. 어느 나라에 자기의 명운을 걸기보다 인류공동체에 스스로만이 공헌할 수 있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평등과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세계 10위권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나라답게 이주역사가 100여년 넘는 해외동포사회를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면서 품격 없는 정치에 의하여 고국이 다시 풍파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필자/칼럼니스트 박광성 (중앙민족대학 사회학학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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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을 도구화하는 한국정쟁,그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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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국시장과 후지동
- 연필을 뜻하는 함경도 옛말은 “가름다시”인데 국내외 방언학자들은 러시아어에서 들어온 외래어로 섣불리 못박아 놓고 있다. 허나 그 어원을 따지고 보면 북방언어계통인 몽골어와 돌궐어에서 검은 돌이라는 의미로 풀이가 가능하다. 여기에서 가름은 검다 의 의미를 지닌 가라말이라는 가라 음과 뜻이 일맥상통되며 다시는 표준어 돌과 달리 함경도 사투리 돌잭이라는 음과 뜻이 근접된다. 근대에 들어서서 러시아연해주와 연변일대로 진출한 선인들의 탈출 노정을 추적하여 보면 황야 길에 검은 돌을 쌓아올린 국시장이 도로표지처럼 등장한다. 이런 국시장은 거개가 평지의 세질어부름 (함경도 방언 삼거리)과 산 데걱기(함경방언 산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평지와 산마루사이를 이어놓는 고래를 (함경도 방언 골짜기) 국시장골로 불러왔다. 북방언어계통에서는 ‘ㅎ’음과 ‘ㅋ’ 음이 상호전환 된다. 왕을 지칭할 때 한 (han)을 칸(khan)이라고도 부른다. 연변과 함경도에서는 할아버지 혹은 할배를 “커라배”라고 부르듯이 국시장골은 어음변화를 거쳐 한자 지명 표기로 후동厚洞 후지동厚之洞으로 마을 지명들이 굳어졌다. 삼굿구이는 예로부터 두만강 일대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삼 껍질을 벗기려고 구덩이를 파고 돌을 달구어 삼을 찌는 일을 말한다. 삼굿구이는 단순한 노동행사가 아니라 김과 연기를 피워 하늘에 메시지를 보내고 신과 소통하여 가물과 장마를 피하며 초목이 푸르고 가축이 늘어나는 자연생태 선순환을 기원하는 민속풍속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와서 삼을 가공하여 진정제효과가 강한 마약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환각상태에서 복술과 무당들이 푸닥이며 구명하고 굿을 올리는 것을 단순한 미신 행위의 잣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자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다. 삼굿구이에서 까맣게 구운 돌들을 선별하여 국시장에 쌓아 올린 돌탑은 선인들이 탈출 길에 쌓아올린 독특한 역사풍경이다. 돌 쌓는 풍습은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선인들의 국시장 돌탑은 하늘과 감응하는 까만 삼굿구이 돌로 선별하여 해묵은 가둑나무(함경도방언 참나무일종) 옆에 수북하게 쌓아놓는 것이 특징이다. 하늘이 내린 운수라는 뜻으로 몽골어에서 kut 만주어에서 kesi라 적고 있다. 만주어에서 kesi은 우리말의 굿과 그 뜻과 음이 유사하며 몽골어에서 kut은 우리말의 가둑나무의 가둑 음과 근접되어 하늘과 감응하는 매개체로서 가둑나무는 하늘에서 굿이 내려오는 성스러운 곳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함경도 사투리 후투산 소리하다는 굿에서 운수가 붙는 좋은 징조가 있다는 말이다. 200년 전 선인들이 함경도대탈출은 유례없는 기적의 역사이다. 1867년 5월 길림장군 부명아는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와 연추를 돌아보고 함경도에서 탈출해온 1000여명이 집을 짓고 살고 있으며 만주인 러시아인 조선인 옷차림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각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데려다가 물어보니 모두가 토박이 함경도 말을 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청나라 봉금시기로부터 이어진 선인들의 이런 대탈출 역사는 일제시기의 집단이주와 확연히 구별되는 역사이다. 문둥이병 기아 살육 수탈 온갖 끔찍한 재난 속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운명을 박차고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거칠게 끓어지였다가 다시 이어지며 러시아와 연변 땅까지 뚫고 들어온다. 그 암울한 시대 만약 국경이란 거미줄에 목이 매여 온갖 가난의 실타래를 감고 그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면 선인들의 위대한 대탈출역사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치발복역한 양자 양녀로 시늉만하는 벙어리로 지울군으로 지팡살이군으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마침내 위대한 탈출 역사를 촉발시킨다.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두만강지역 그 울울창창한 원시림을 뚫고 나가는 탈출 길은 말 그대로 저승길이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수천만 번 끝내는 기어가는 몸의 형태는 이미 스러지고 없다. 질긴 목숨을 이어가는 추운겨울 머리 위엔 피눈물같이 마른 나뭇잎만이 뚝뚝 떨어진다. 육신이 닳고 닳아 뼈가 부서진 손으로 마지막 간절함을 빌어 국시장 돌탑에 까만 돌을 얹혀놓는 그 찰나에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의 빛이 내려오고 해와 달 전설처럼 구원의 동아줄이 드리워지고 아라비얀나이트 그 행운의 바위돌문이 열린 것이다. 오늘도 천년역사가 바윗돌로 굳어져 눈 뜨고 앉아서 세상을 굽어본다. 그 위대한 침묵위에 석불처럼 조용히 앉아 잃어버린 국시돌 전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주어본다. 타자에 의하여 굳게 닫힌 선인들의 위대한 탈출역사의 빗장을 벗기고 그 진실 된 역사를 열어놓아야 만이 우리의 과거사는 더 많은 미래 세대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드넓은 역사문화의 장으로 거듭 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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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운 칼럼] 국시장과 후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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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몽골 중국으로부터 독립되게 된 내막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약한 나라한테는 외교가 없다.” 이는 많은 외교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이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중화민국 주석 장개석이 소련과의 담판에서 수세에 몰릴 때 내뱉은 말이었다. 실제상 외교적 분쟁에서 많은 약 소 국가들은 강대국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기 마련이었다. ▲사진 : 인터넷 1945 년 2 월,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었다. 당시 세계 강국들인 미국, 소련과 영국 등은 흑해 북부에 있는 크림 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일련의 해당 전쟁 후의 질서 및 동맹국의 이익 분배에 관련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중 <일본에 대한 미, 소, 영 3국의 협정(간칭 얄타 협정)>은 당시 동맹국인 중국의 동의도 없이 체결되어 중국의 권리를 크게 침해했다. 얄타 회의에서 극동지구 문제를 토의할 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제기하였다. 첫째, 외몽골의 현 상태를 유지한다. 둘째, 중동철도(중국 동북의 철도)를 중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셋째, 소련이 대련 및 그 부근 해역에 불 동항(不冻港)을 건설한다. 당시의 외몽골은 실제상 이미 소련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민국과 과거 청조의 관리들은 이미 축출되어 중국 본토로 돌아갔으므로 스탈린의 현 상태 유지란 기실 세계열강들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자는 속심이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기타 세계열강들에게 이 일을 중국의 장개석한테 알리지 말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로 하여 후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장개석이 파견한 중화민국의 외교대표 송자문을 만났을 때 “만약 출병하여 대일 작전을 한다면 미국은 오직 <얄타협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자 송자문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동맹군 열강들은 이른바 <얄타협정>의 이익 획 분은 세계인민의 자유를 위해 싸운 반파시스트 진영을 위한 것이라면서 중국의 이익은 염두에도 없었으며 송자문한테는 아무런 태도 표시도 않았다. 그 시기, <얄타협정>의 대부분 내용은 엄격한 비밀에 붙여졌으며 송자문 역시 귀국할 때까지 절반 정도밖에 알지 못했다. 귀국 후 송자문이 장개석한테 외몽골의 독립 문제를 언급하자 장개석은 크게 놀랐다. 중국은 세계 반파시스트 진영의 일원이었지만 중국의 이익은커녕 손해만 늘어나게 됐던 것이었다. 미국의 허위적인 얼굴에 대해 장개석은 깊이 알 수 있었다. “미국인은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스탈린과의 담판이 필요한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한 장개석은 송자문을 단장으로 한 중국정부 대표단을 모스크바에 파견, 외몽골 문제를 갖고 소련정부와 담판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 담판은 근본 상 불평등의 원칙에서 진행된 담판이었다. 스탈린을 위수로 하는 소련대표단은 대일 작전을 하는 대가로 장개석으로 하여금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는 정치적 조건을 내걸었다. 이에 송자문과 장경국(蒋经国)을 비롯한 중화민국 대표단은 상대를 깔보는 소련의 그 오만한 태도와 중국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사진 : 인터넷 한편 장경국은 장개석의 친필 신을 갖고 <비 정식대표>의 신분으로 스탈린을 배알, 외몽골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측면적으로 스탈린의 설복하려고 했다. 장경국이 찾아가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아주 친절했다. 그러자 장경국은 열정적으로 스탈린을 높이 쳐올리면서 반파시스트 전쟁에서의 소련의 승리는 스탈린 동지의 영명한 영도와 갈라놓을 수 없다고 나서 중국 또한 현재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결전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파시스트의 멸망은 이미 시간적 문제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이어 공식적인 협상에 들어가자 장경국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얄타협정>에서 외몽골을 독립시키려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면 조국의 영토를 수호하려는 중국정부의 원칙에 위배되며 만약 민국정부가 승인한다면 중국 국민들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외몽골문제가 언급되자 스탈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스탈린은 대뜸 엄숙하게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한 말의 뜻을 잘 압니다. 하지만 당신도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당신들한테 도와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들을 도와 일본을 내쫓아 달라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당신들한테 힘이 있어 우리의 도움이 필요가 없다면 나 또한 이러한 요구를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외에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스탈린은 장경국 등을 물러가라는 뜻으로 손을 내 저었다. 그 뒤 중국대표단 단장인 송자문은 소련대표단과의 담판 내용을 장개석한테 회보한 다음 장개석의 지시에 의해 외몽골 문제를 해결할 세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첫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할 수는 있게 한다. 둘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결맹 기간 외몽골에서 고도로 되는 자치를 실시할 수 있으며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허락한다. 셋째, 소련과 계약을 체결해 소련이 외몽골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으며 정치와 외교에서 자주와 자치를 실시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삼민주의> 원칙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소련인 영국의 정치성질과는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런 양보는 근근히 중국 측의 입장일 뿐 소련의 도움이 필요했던 중국으로서는 소련을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나중에 스탈린은 참을성이 없어졌으며 장경국한테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강요했고 공공연히 소련이 외몽골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개석은 이러한 담판 결과에 대해 진작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장경국이 소련에서 유학했고 또한 소련 여자를 아내로 맞았기에 그 연분으로 스탈린이 장경국의 안면을 좀 봐줄 것이란 요행을 바랐을 뿐이었다. 결국 장개석은 마지막 카드까지 포기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어쩔 수 없다. 일본을 내쫓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모든 것은 우리가 약하기에 조성된 악과이다. 약한 나라에는 외교가 없기 마련이다.” 1945년 7월 7일, 장개석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면서 송자문한테 한통의 <굴욕>의 전보문을 날렸다. 외몽골의 문제에서 중소간의 쟁점은 무엇인가를 잘 찾아봐야 한다. 중소간의 공동이익과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을 격파한다는 선제 조건에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 바란다. 1945년 7월 9일, 제4차 중소담판에서 중국대표단은 소련대표단의 거듭되는 압력으로 부득불 소련 측이 주장하는 조건에 동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탈린이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된 데는 다른 원인도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일찍 이렇게 밝힌 바가 있었다. “소련이 외몽골을 독립시키는 것은 단지 정치상에서의 수요와 군사상에서의 우려여서만이 아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은 시베리아 철도의 복지이다. 앞으로 중국이 강대해진 다음 외몽골로 출병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차단해 버리면 소련은 전략적으로 매우 위험해지게 된다.” 당시 소련이 이렇게 우려한 것은 민국정부가 미국과의 관계가 밀접하였기에 향 후 강대해지면 외몽골을 통해 어떤 도발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였다. 다른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이 중국의 만주에 출병한 것은 기실 민국의 요청보다는 미국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장개석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약했기에 외교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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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몽골 중국으로부터 독립되게 된 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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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
- 편집자의 말: 최근 펑황망의 군사사이트는 <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란 글을 발표했다. 글은 라오산전투 당시 중국군과 베트남군이 투입된 군부대와 장비 등을 서술하면서 중국군이 베트남군을 얼마 소멸하고 파괴한 베트남군의 장비와 진지 등을 수치로 나열하면서도 중국군이 본 손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라오산전투는 중국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점 찍었다. 한편 베트남 매체에서도 라오산 전투에서 베트남군이 중국군을 얼마 소멸했다고 하였지만 역시 저들의 손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 어느 쪽의 주장을 믿어야 하는가? 명지한 독자라면 객관적인 분석으로 읽고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중국군 사진이다. 1984년부터 1989년 사이 5년간의 중국-베트남 국경전투 라오산과 저양산(老山、者阴山)동안 양측은 좁은 국부전장에 많은 수의 군과 다양한 무기들을 투입, 길고 치열한 경쟁은 전쟁 역사에서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중국군의 관점에서, 곤명군구, 남경군구, 제남군구, 난주군구, 북경군구 및 성도군구에는 6 개의 야전군/집단군(14군, 11군, 1군, 67군, 47군과 27군) 1개의 강력사(37사), 변방부대 (운남 성 군구 부대) 및 포병, 공병, 기술병, 정찰병 등 5개 병종의 군대와 공군 항공병, 대공 미사일 부대 그리고 변경민병, 민공으로 참가인수구 도합 35명에 달했고 각종 포 8200문, 탱크 30여대, 4만 여대의 차량, 비행기 출동차수 2900여대였다. 이렇게 작전규모는 신 중국 건립 후 1950년과 1979년에 이어 세 번째로 방대한 규모였다. 전투 중 중국군의 각 병종의 부대들은 협동작전을 진행, 240 만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하여 보병을 지원하면서 도합 3만 6000여명의 베트남군을 소멸하였다. 이중 죽은 베트남군의 수는 1만 5000여명, 부상당한 베트남군의 수는 2만 여명, 포로된 베트남군의 수는 202명었다. 그리고 베트남군의 포 1000여문, 200대 이상의 군용차량, 4대의 탱크 및 많은 장비와 요새, 화력망, 지휘소, 창고 등을 파괴하였다. ▲중국-베트남 국경전쟁 베트남군 사진이다. 한편 베트남 육군과 관련하여 보면 선후로 라오산 전투에 참가한 보병들로는, 보병 313사, 314사, 316사, 356사, 312사, 325사, 31사, 3사의 2연대, 322사의 567연대, 328사단의 2연대, 568연대가 포함된다. 그리고 포병 168대대, 36대대, 397대대, 특공 821 및 198연대, 하선성 독립 247연대, 산라성 독립 754연대 등 20만 명이 넘는 병력과 수많은 기술 장비가 투입되었다. 하지만 전쟁 후 베트남측은 저들의 손실 수치를 공개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은 의문이 있다. 즉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가이다. 라오산 전투는 두 산 사이로 주로 양측의 대립 환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상대방을 제압하는 화력을 구축하고 목표를 파괴하는 종합적인 방식으로 전장을 통제하는 것이었으므로 통계결과에 특정적인 추정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통계를 만들 때 위치확인을 기초로 하고 기술정찰을 통해 적의 정보를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삼으며 동시에 1선 군부대가 보고한 결과의 무게를 측정하게 된다. 또한 예하면 공격지점에 출격하면서 베트남군의 화력지점과 숨어있던 동굴이 무너졌을 때 그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저 그것을 3명의 중기관총 화력과 2명이 경기관총 화력으로 계산되었으며 3-5명이란 추측에 따라 보고되었다. 그리고 작전 중 적 섬멸인수가 전장의 육안검사에 따라 보고되기도 했다. 전쟁 후 베트남의 한 정보에 따르면, 허장성(河江省) 북부 국경전쟁을 위해 수건된 능원에는 2500명 이상 사상자의 자료가 모아졌으며 이는 추적할 수 없는 많은 다른 실종자로 간주되지 않다. 또한 베트남 육군 옛 군인들의 회고록은 외상성 손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반영했다. 수만 명의 베트남 사상자 수치가 신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5년 이상 지속된 이 아열대 산악과 정글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하고 잔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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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 5년간 '라오산 전투'서 베트남군 얼마 소멸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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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제일의 미녀-천훙
- ●철 민 천훙(陈红)-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어떤 이들은 흔히 일부 실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천훙은 이미 젊었을 때의 그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답기는 하나 어떻게 평가해도 대륙 제1의 미녀와는 거리가 있다. 아울러 지금의 천훙은 한 남자의 부인이다. 비록 그들 부부 사이의 금슬이 매우 좋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대륙 제일의 미녀>란 호칭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게 아닌가?! 그럼에도 왜 그녀를 여전히 미녀라고 하는 걸까? 그것은 현재 그녀의 됨됨이와 스타일에서 그제 날 그 아름다움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1968년 천훙은 장시(江西)성의 상라오(上饶)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즐기었기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상하이 희극학원(戏剧学院)에 입학할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그 길로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었다. 1986년 18세의 나이에 천훙은 TV 고대신화 드리마 <요재지이(聊斋志异)>에 출연, 아름답지만 성격이 괴벽한 여자의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어 많은 사람들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1990 년 천훙은 <어린 다이족 딸의 사랑>에서 아이커(艾可)의 역할을 담당, 스토리는 간단했지만 천훙의 순수하고도 깨끗한 얼굴, 밝고도 따뜻한 미소, 감화력이 있는 연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다이족 소녀와 총각이 나누는 사랑의 장면에 말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을 갖게 했다. 그 이듬해 1991 년, 23세인 천훙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천하제일의 미녀 디아오찬(貂蝉)의 역을 성공적으로 부각, 핑크빛의 밝은 눈과 이에 대조되는 하얀 이빨, 삶을 염원하는 그녀의 연기는 디아오찬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보게 했다. 성공을 이루는 것은 극복하기 힘든 고전이지만, 그 시대의 모든 측면에서 불리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천훙이 연기해낸 디아오찬의 예쁜 자태는 실로 타고난 천부적인 것이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모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93 년 천훙은 <물과 구름 사이(水云间)>에서 왕즈쇈 역을 담당하면서 일약 더욱 한동안 유명해지게 됐다. 드라마에서 그녀는 비록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여주인공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았다. 당시 TV 드라마는 모든 사람들이 집과 거리와 차선에서 보고 있던 TV 드라마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드라마의 내용보다는 천훙의 얼굴을 보려고 더욱 이 드라마 시청에 집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기 한동안 천훙의 아름다움은 복제할 수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00 년 천홍은 30 대 초반의 나이로 가장 매력을 발산하던 시기였다. 이 해 드라마 <따밍궁스(大明宫词)>에서 태평공주 역을 맡은 천훙은 비록 짙은 화장에 어딘가 요염한 외모를 보이면서도 행동자세는 기품이 있고 우아하고도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매료되게 했다. 1996년 천훙은 영화감독 천카이커(陈凯歌)와 결혼, 천카이거를 놓고 볼 때 중국에서 많은 유명한 영화를 제작한 유능감독으로 그의 영화중 하나가 바로 제1회 중국영화 종려나무상을 받은 <패왕별희(霸王别姬)>이었다. 결혼 당시 천카이거는 천훙보다 15살이 더 많은 1952년생이었다. 결혼 뒤 천카이거는 거의 영화화면에 나타나지 않았고 무대 뒤에서 일하는 프로듀서가 되었으며 TV산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천훙과 천카이거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다. 이 중 둘째 아들 천베이위(陈飞宇)도 군오락권에서 활약하고 있다. 영준하고도 품위가 있어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천훙한테 있어서 예전의 미모는 좀 많이 망가진 것 같으나 그녀는 여전히 현재의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이상적인 남편에 두 아들 그리고 윤기가 돌 듯 여유가 있는 생활, 이는 그만큼 인생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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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제일의 미녀-천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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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신변의 홍색 여첩보원 ― 심안나
- ▲ 사진설명: 1948년 남경에서 찍은 심안나와 화명지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장개석의 국민당 군이 모택동의 공산당군에 패해 섬도 대만으로 쫓겨간 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로 되었다. 하다면 월등한 미국 군장비로 무장하고 거기에 수많은 출중한 군 고급 지휘관들이 있는 장개석 군이 왜 <좁쌀에 보총>에 불과한 공산당군에 여지가 없이 완패해 그런 꼬락서니로 되었을까? 여기에는 국민당군이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얻지 못하고 많은 군장령들의 부패상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공산당의 첩보전이 국민당군의 비밀을 수많이 수집하여 공산당군에 넘기어 남경의 일거일동을 연안에서 손금보 듯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공산당의 지하공작 즉 첩보 사업은 그 인원수와 사업의 완성도 방면에서 국민당을 능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안나(沈安娜)―그녀는 출중한 홍색 여첩보원으로, 장시기 동안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速记员)으로 국민당 통치구에 잠복해 있으면서 국민당 최고급별의 당, 정, 군 특별회의 정보들을 대량 수집하여 중공 측에 넘기면서도 단 한번의 실수가 없었고 그 신분도 폭로되지 않아 국내외 첩보계의 경탄을 자아냈다. 1915년 심안나는 절강성 한 선비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7살이 되던 해 그녀는 여차여차한 사연으로 당시 중공의 특공일군이었던 화명지(华明之)를 알게 되었다. 당시 심안나는 점잖으면서도 여러모로 박식한 화명지를 곧 잘 따랐고 알게 모르게 심안나와 화명지의 사이는 아주 좋았다. 결국 그녀는 화명지의 영향을 받아 첩보 사업이란 이 길을 선택했다. 1934년, 자신의 첩보업무의 전업을 선택할 때 심안나는 가정의 경제사정으로 상대적으로 학비가 적은 스피드 기록반을 골랐다. 이는 향후 그녀가 하는 사업을 위해 양호한 토대를 닦았다. 스피드 기록반을 졸업한 후 심안나는 조직의 지령에 의해 민국 절강성 정부에 들어가 기록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녹음펜이 없는 당시엔 모든 회의기록은 전적으로 종이와 필에 의거해야 했다. 각종 회의로 매일 매일이 이어지는 정부기관에서는 반응이 빠르고 각종 기교가 겸비된 기록원일수록 상급의 총애를 받기 마련이다. 심안나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참답게 일하는 성실한 일군이었고 거기에 민첩하고 업무수준도 높았기에 빠른 시일 내에 절강성 주석 주가화(朱家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으며 또한 화명지의 도움으로 대량의 중요한 정보들을 수집하는 요령도 장악하게 되었다. 자주 만나고 여러모로 교류하는 과정에 심안나와 화명지 사이의 <혁명적 동지의 관계>는 애정관계로 승화되어 사업과 생활에서 모두 편리하였다. 1935년 가을, 조직의 비준으로 심안나와 화명지는 상해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결혼 후 조직의 지령으로 잠시 첩보 사업에서 손을 떼고 남편의 뒤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그러다가 1938년 원 국민당 절강성 주석이던 주가화가 당시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으로 진급하자 심안나한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바로 주가화한테 재차 접근하는 것이었다. 일찍 심안나의 총명과 업무능력을 인정했던 주가화는 심안나가 남경으로 찾아가자 그녀를 아주 반겨맞아 주었다. 주가화의 추천으로 심안나는 아주 쉽게 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록원으로 될 수 있었다. 그 때로부터 심안나는 자신의 총명과 숙련된 기능을 보여주면서 선후로 각종의 많은 고위층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서는 남편 화명지를 통해 당조직에 제공하군 하였다. ▲ 사진설명 : 국민당 고위층 회의에서 장개석이 연설할 때 뒷줄 오른쪽 기록하고 있는 심안나 한편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국민당 중앙 급의 여러 계층 고위 관리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그들의 추천에 의해 하마터면 국민당 중앙의 <입법위원>으로 될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듯 높은 <벼슬자리>도 결코 심안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장 편리한 직업을 이용해 지속적으로 국민당의 중요정보를 수집해 공산당에 제공하기 위하여 그녀는 “아직은 나이도 젊고 자격과 능력도 부족하다”고 겸손한 체 하면서 그 <벼슬자리>를 사절하였다. 이는 많은 국민당 고위급 관리들의 감동을 더욱 자아냈다. 심안나의 사진 자료들을 보노라면 한 장의 사진이 각별히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그 사진 한 장이 그만큼 여러 가지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사진은 1948년 4월, 남경 정가교(丁家桥)의 국민당 당부 예당에서 장개석이 회의를 주최하는 것을 촬영한 것으로 일찍 국민정부의 <중앙일보>에 게재된 것이었다. 사진에는 장개석이 주석대 중앙에 서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주석대 뒷줄 오른쪽 즉 장개석과 약 5미터 거리를 두고 1남 1녀가 회의기록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그 중 머리를 숙이고 기록하고 있는 여성이 바로 적의 핵심부에 잠복해 있었던 심안나였다. 그러니 이 사진이야말로 심안나의 첩보사업 생애에서의 아주 진귀한 견증으로 되고 있다. 장장 14년에 달하는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잠복사업 중 심안나와 그의 남편 화명지는 수많은 위험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부부는 서로 밀접히 배합하면서 번마다 안전하게 그런 위험고비를 넘기었다. 이는 중공의 비밀사업 전선에서 부부합작의 전형적인 본보기로 되고 있다. 1949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100만 대군이 장강을 뛰어넘어 남경을 함락하자 심안나와 화명지는 해방군 대오와 합류하는 것으로 장장 14년에 달하는 지하첩보원 생애을 완벽하게 마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심안나는 국가안전국에 배치되어 정년이직을 할 때까지 새 중국의 안전을 지키는 사업에 그 심혈을 몰부었다. 1989년 중국 국가안전부에서는 심안나에게 영예상장 및 영예증서를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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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신변의 홍색 여첩보원 ― 심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