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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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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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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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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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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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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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2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가볍게 창녀를 말한다
    ●김희수 돈을 받고 남자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창녀, 창부, 분홍녀, 매춘부, 매음부, 매음녀, 창기, 성매매여성, 갈보라고 부른다. 갈보는 창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외에 콜걸도 있는데 콜걸은 매춘장소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전화호출에 응하여 매춘을 하는 여성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남창은 남색을 파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남자이다. 한국에서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통틀어 성근로자라고도 부른다. 창녀촌, 집창촌, 사창가는 창녀가 생활하는 시설이 모인 거리를 뜻한다. 붉은 등이 늘어선 거리라는 뜻으로 홍등가, 유곽이라고 하고 매음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매음굴이라고도 한다. 기생, 기녀는 북한의 사전에서 “① 낡은 사회에서 노래와 춤을 파는것을 업으로 하는 비천한 계층의 여자. ② 노래와 춤, 몸과 웃음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젊은 여자를 통털어 이르는 말.”이라고 했고 한국의 사전에서 “①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 ② 전통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춤 및 풍류로 참석자들의 흥을 돋우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여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기생이나 기녀는 북한의 사전의 두번째 의미대로라면 창녀라는 뜻도 포함된다. 하지만 한국사전의 뜻대로라면 노래와 춤만 팔지 몸을 파는 여자는 아니다. 중국이나 조선족사회에서는 기생이나 기녀(妓女)를 창녀의 뜻으로 사용하고있다. 중국에서는 기녀(妓女)를 “구중국에서 전문훈련을 받아 직업봉사능력을 갖추고 성매매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청루여자青楼女子)로 업내의 직위는 ‘창(娼)’보다 높다. 즉 화대수입이 비교적 높고 사회지위가 비교적 높은 상대에게 몸을 판다.”고 정의했다. 중국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법률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했기에 기녀는 불법이였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지 얼마 안되여 인민정부에서 기생집을 강제로 페쇄하고 포주를 처벌하고 기생을 개조하는 등 조치를 통과해 창기제도를 금지했다. 1957년에 이르러 매음창기활동은 기본상 엄금되였다. 그러나 1970년대말 즉 1978년에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부터 여러가지 원인으로 매음활동이 중국에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개방도시와 연해지구에서 만연되고 확산되는 추세이다. 북경표준어로 기생의 기(妓)와 닭 계(鸡)의 발음이 동음이기에 기녀를 속칭으로 닭이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창녀를 청루여자(青楼女子), 암창(暗娼), 풍진여자(风尘女子)라고도 불렀고 전문 황제와 제왕들을 상대로 하는 창녀를 궁기(宫妓)라고 불렀다. 오늘날에 와서 창녀를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잠자리까지 함께 하는 여성이라는 뜻으로 삼동반아가씨(三陪小姐)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창녀는 줄곧 인류역사와 함께 존재해왔다. 중국고대에는 류여시(柳如是), 소소소(苏小小), 리사사(李师师), 진원원(陈圆圆), 량홍옥(梁红玉), 동소완(董小宛) 등 명기(名妓)가 있었고 우리 민족 역사에는 황진이, 이매창, 소백주 등 명기와 논개, 계월향, 홍련 등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이 있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명기와 의로운 기생이 있었다고 해서 기생의 존재를 찬성한다는 말이 아니다. 몸을 파는 창녀는 몸을 사겠다는 남자가 있기에 존재한다. 팔겠다는 창녀와 사겠다는 오입쟁이, 누가 더 나쁠가? 피차일반이겠지만 창녀는 남자들에게나 여자들에게나 모두 무시당하는 존재이다. 무시당하면서 돈때문에 몸을 판다. 자의든 타의든 창녀는 돈때문에 몸을 판다. 돈이 많은 여자는 몸을 팔지 않는다. 몸을 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마의 황후 메사리나와 같은 여자를 제외하고… 그리고 자중자애하는 여성도 몸을 팔지 않는다. 핍박에 의한 경우는 제외하고… 어떤 이유로 창녀가 되였건 성매매는 잘못 들어선 “직업”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창녀만 무조건 나쁘다고 단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창녀를 사자고 하는 남성도 나쁘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입쟁이가 창녀보다 더 나쁠수 있다. 파니까 샀지. 파는걸 샀는데 왜 나쁘나고 해? 금지품을 샀으니까 나쁘다는거야! 누가 금지품을 팔라고 했어? 너같이 사자는 놈이 있으니까 판게 아니겠어? 마약, 장기, 야생동물, 밀수품과 마찬가지로 몸은 이성에게 팔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자기의 몸에 달렸다고 해도 법으로 금지한 이상 팔아서는 안된다. 파는 사람은 팔아야 되는 것만 팔고 사는 사람은 사야 되는 것만 사야 한다. 세계적으로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도 있고 금지한 나라도 있다. 중국은 후자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성매매는 불법이며 타격대상이다.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이따금씩 지하성매매업소를 급습해 성매매를 하는 남녀들을 엄하게 처벌하고있다. 성매매가 불법이기에 처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매매여성들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심수의 경찰이 거리에서 100명의 창녀들과 오입쟁이들을 대중앞에 공개한 적이 있고 동관경찰도 창녀를 바줄로 묶은채 길거리에서 얼굴을 공개한적이 있다. 죄패를 목에 걸고 거리로 끌고다니며 투쟁하던 문화대혁명 때의 정경이 눈앞에 떠오르며 눈살이 찌프러진다. 아무리 죄가 있다고 해도 창녀도 인권이 있는데 거리에서 마구 끌고 다니다니…창녀도 사람인데 개취급을 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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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2
  • “때시걱이 힘들면 외식해라”
    모처럼 2주간의 년차가 주어졌을 때 나는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가사일을 후딱 해치웠다. 오래동안 여주인의 알뜰한 관심을 가져보지 못한 집안 구석구석을 털어내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할 것은 정리했다. 낮에 마트에 가서 여유롭게 장을 봐가지고 매일 따끈한 밥상을 제시간에 차려올렸더니 남편이 “전직”가정주부가 일으킨 혁명에 적응되지 못해 한다. 내가 알고있는 한 언니는 전직가정주부이다. 그녀의 집에 요청받아 갔을 때 나는 중후하고 고급스런 느낌이 나면서도 여주인의 모던한 센스를 잃지 않은 그런 인테리어 분위기에 놀랐다. 현관복도에는 촬영을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이 몇개 걸려있었는데 전혀 거치장스럽지 않았고 커튼은 우아하면서도 샤방샤방한 쉬폰같은 느낌이였다.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봐도 군더더기 하나 없고 모두 잘 정리된 모습이였다. 나는 집을 거두기 싫을 때면 그 언니네 집을 떠올리고 힘을 냈다. 그러나 주부들이라면 공감할법한 것이 거두기는 쉬워도 유지가 힘들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흐트러진 모습이다가 주말이 돼야 정돈되는 똑같은 레퍼토리가 일년내내 반복된다. 나는 주변의 워킹맘 몇몇의 집을 방문했다가 빈틈이 많은 청소상태에 어떤 동질감을 느끼고 안도의 숨을 내 쉰적이 있다. 역시 워킹맘들은 낮에는 직장일에 치대고 저녁에는 가사일을 해야 하며 그다음엔 아이와 놀아줘야 하는 투잡, 쓰리잡 엄마들이라 다 이렇구나 하는 자기합리화의 구실을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 딸내미를 유치원 입학전까지 돌봐주다가 한국으로 떠나면서 어머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했던 말이 생각난다. “때시걱 하기 힘들면 외식하고 집이 어지러워져도 못본척 해라. 모든 것을 잘 하려고 하지마라. 지친다.” 그 당부는 내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장 잘 받들었던 어머니의 가르침가운데 하나였다. 건강한 자기애란 자신이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는 것이라 한다. 반듯하게 짜놓은 계획을 헝클어놓는 작탄은 꼭 어딘가에서 튀여나온다. 계획이 엉망이 되였다고 원래처럼 되돌려놓으려 애쓰거나 아예 손을 놓고 퍼더버리기보다는 가장 중요한 일, 잘할수 있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것이 방법이다. 물론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들은 능력있다는 칭찬을 듣겠지만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것이라면 나는 싫다. 누구나 적어도 서너개의 이름표는 붙이고 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앞자리에 놓을 것이다. 만약 뭔가 밑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것은 가차없이 뒤쪽으로 밀어버릴 생각이다. 내 삶의 중심은 내가 돼야 하니까. (연변일보 리련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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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12
  • FTA 중·한기업 새로운 경쟁시대 맞아
    ■ 박정일 (중국조선족중학생신문사 사장/연변일보 논설부 부장) “중한시장 석권을 위한 기업들의 치렬한 경쟁은 이미 시작되였다. 경쟁은 중한자유무역협정을 통해서 현실화되였고 자유무역협정 《무관세시대》는 소비자들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주고 기업에게는 실질적인 경쟁력제고를 요구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후 중한기업은 실질적인 경쟁에 접어든 셈이다. 서로 자신들의 우세를 살려 주어진 시장을 석권하려는 주도권경쟁이 가열되면서 중한기업의 경쟁이 가시화될 것이다. 중한 FTA(자유무역협정)체결로 국가간의 무역에서 관세를 줄이거나 아예 철페된다. 규정에 따라 상품 품목수 기준으로 중국 측은 91%의 관세가 20년내에 철페되고 한국 측은 92%의 관세가 철페되며 수입액 기준으로 중국측은 20년내에 85%의 관세가 취소되고 한국측은 91%의 관세가 취소되면서 중한 양국 무역은 《무관세시대》에 진입하기에 소비자의 선택범위가 확대되면서 자연히 기업의 시장선택범위도 넓어지게 되였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는 즉시 항공유, 고주파의료기기, 플라스틱금속은 바로 세금이 없어지고 면이나 마는 5년내에 유아복장, 에어컨, 소형냉장고, 세탁기, 전기밥솔, 진공청소기는 10년내에 관세가 철페된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중한기업들은 자신들만의 차별화한 기술, 양질의 제품, 양호한 서비스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경제력을 가늠하면 중국이 월등하게 위이다. 하지만 한국의 제조업 기술력도 만만치 않다. 중국의 조선공업, 자동차공업이 한국을 빠르게 추격하는 반면 한국의 화장품과 같은 제조업은 중국시장에 신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중국에 중공업의 우세가 있다면 한국에는 제조업 우세가 있다. 자유무역협정의 체결로 서로간의 우세는 갈수록 강화되고 약세는 경쟁속에서 선진적인 기술과 서비스를 통해 보강되는 새로운 경쟁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 두나라의 수출입무역전쟁은 갈수록 치렬해질 것이다. 우선 중한자유무역협정으로 13억인구의 중국소비시장을 겨냥한 한국기업들의 시장점유공략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이번에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의 자유무역협정에서 체결했던 자동차 같은 수출 제외를 아쉬워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의 제조업기술을 우세로 중국의 소비시장을 점령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들은 가격경쟁대신 월등한 기술과 서비스봉사시스템으로 중국제품과의 경쟁을 시도할 것이다. 한국기업들에서 중국시장 진출에 있어서 중국기업과 가격경쟁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넉넉한 자원 저렴한 로동력의 우세는 중국기업만이 가지고 있는 월등한 우세이기에 자원이 부족하고 고가의 노동력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한국기업들은 가격경쟁으로 중국기업들과 대결하지 않고 차별화된 기술과 서비스로 승부할 것이다. 반대로 중국기업들은 저렴한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기초로 기술력 강화에 매진하면서 한국기업과 경쟁을 벌릴 것이고 록색화되고 정밀가공된 저가의 농부산품으로 한국시장 공략에 나설 것이다. 장백산의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는 연변도 청정자원의 우세를 살려 자유무역협정에 따른 무역활동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지금부터 국제화수준에 걸맞는 생산판매라인을 구축하는데 진력해야 할 것이다. 중한시장 석권을 위한 기업들의 치렬한 경쟁은 이미 시작되였다. 경쟁은 중한자유무역협정을 통해서 현실화되였고 자유무역협정 《무관세시대》는 소비자들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주고 기업에게는 실질적인 경쟁력 제고를 요구하고 있다. 중한간의 FTA체결로 중한무역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가 확대될 것이다. 중한정부는 중한자유무역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중한무역액은 해마다 3000억딸라를 돌파하게 된다고 밝혔다. 중한 양국이 상호 소망하던 경제이익이 자유무역을 통해 가시화되면서 중한자유무역은 새로운 경제성장을 이룩할 것이며 중한기업은 더욱 성숙한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다. 중한자유무역협정에 따른 중한기업의 자유무역경쟁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12-09
  • 두 중국청년의 강제출국 해프닝
    ■ 장충의(張忠義) 지난달 회의가 있어 한국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는 많은 중국 승객들이 탑승해 있었다. 귀국의 기쁨에다 한국쇼핑관광에 대한 만족감이 감도는 듯 여기저기 웃음과 환담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옆 좌석에 앉아있는 두명의 중국 청년들은 울분이 넘치는 표정을 한 채 말없이 앉아있어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말을 걸어봤더니 두 사람은 강제출국자였다. 이름이 둥장포(董江坡)와 자오옌펑(焦言朋)인 이 두 청년은 허베이(河北)성 가오청(藁城) 사람이다. 일본에 있는 친구의 초청으로 나고야(名古屋)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무비자로 한국에 며칠 체류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에 들러 관광 및 쇼핑을 하고 귀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국 땅을 밟자마자 인천공항에서 입국거부를 당한 것이었다. 두 청년의 말에 의하면 입국을 거부당한 이유는 불법체류하면서 불법취업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20여 시간 이상 공항 지하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화장실 외에 모든 출입이 금지됐습니다. 국제전화비가 비싸 2층에 올라가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하려고 했지만 저지당했습니다.”“2번의 심문을 받았고 호텔예약권과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도 보여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항의해도 쳐다보지도 않고, 중국영사관에 연락하겠다고 말했지만 심사관이 소용없다고 말했습니다.” “20여 시간 동안 식사라고는 고작 빵 두 조각과 사과주스 한잔이었습니다.” 두 청년은 계속 하소연했다. 정서적 안정을 되찾았지만 불만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두 청년의 말에 의하면 공항 지하실에는 동남아시아, 러시아, 중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한 곳의 지하실에 억류되어 있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몇개의 침대와 의자 뿐이었다. 자오씨는 의류장사, 둥씨는 인테리어 자재 도소매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딸에게 줄 옷과 일본산 쵸코렛을 샀고, 한국에 와서는 부모님에게는 효도상품, 와이프에게는 한국화장품을 사서 선물하려고 했다. “한국화장품이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고 품질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자오씨의 말이다. 그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가을동화>를 보았고 한국에 대해 줄곧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말이 좀 많은 편이었던 둥씨는 일본이 자신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다고 말했다. “출입국 관리자든, 백화점 직원이든 모두 매우 친절했습니다. 골목길을 건널 때면 자동차 운전자들이 항상 양보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미소를 지으면서 먼저 건너가라고 따뜻한 손짓까지 했습니다.”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를 했다는 두 청년은 앞으로 한국에 다시 올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모두 고개를 흔들면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답했다. 중-한 관광교류는 이제 1000만명 시대에 접어들었다. 2015년 ‘중국관광의 해’에 이어 2016년은 ‘한국관광의 해’이다. 중국인 생활수준의 향상, 비자절차 간소화 내지 무비자 관광의 추진에 따라 한국자유여행, 개별관광 같은 여행상품이 폭발적 인기를 얻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같은 두 중국청년의 해프닝은 수시로 일어날 확률이 높다. 물론 한국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상대로 확인취재를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연도 있을 수 있고 일방적인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인본주의에 입각한, 더 세심한 배려, 더 정확하고 원활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소한 사건이 양국 관광협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먼지가 쌓이면 산이 되고’, ‘개미 구멍도 댐을 무너뜨린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180만명 가까이 되고 있다. 그 중 불법체류자 수는 약 20여 만명이고 중국인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사회도 점점 국제화, 다양화되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더욱 인본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인본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유럽은 지금 중동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난민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하루빨리 전쟁을 중단시켜 안정된 삶의 터전을 되돌려주는 것이겠지만, 발등의 불인 난민문제를 놓고 일부 유럽 국가들이 인본주의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시아 각국들은 근대화를 유럽으로부터 배웠지만 일부 분야에서는 유럽을 뛰어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본주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중국과 한국이 유럽을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포용성과 관대함을 갖춘 ‘인본주의 공동체’ 만들기는 우리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할 ‘아름다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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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11-30
  • 바위돌 / 이치수
    바위돌 / 이치수 거세게 휘몰아치던 파도가 밀려가고 곳곳에 드리워진 휘갈긴 자국들 어느 시대의 아픔이기에 이토록 깊이 베어 있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점은 떨어져 나가고 뼈대만 남아 거칠게 몰아치는 저 검붉은 파도에 맞서 너 홀로 의연(毅然)히 서 있어. 번쩍이는 이빨 드러낸 포악한 상어처럼 파도가 또 다시 거세게 휘몰아 치면 그것은 숙명(宿命)이라고. 뜯기고 또 뜯기어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살점마저 흩날릴 때에도 지켜내고자 하였던 너의 고귀한 정신은 오직 하나... 한(恨)이 서려 눈물이 마르지 않는 저 암흑의 바다에서 너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 시류(時流)의 거센 파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외마디 원통함도 토해낼 수 없이. 불의(不義)에 눈 감은 오늘의 세태(世態)를 비통해하며 울부짖는 너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한 오라기 바람이 되어 내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실낱 같은 희망 하나 멀어져 간 뒤에 불어 닥친 견딜 수 없는 슬픔 어찌 너의 아픔에 견줄 수 있으랴!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한 맺힌 너의 절규(絶叫)는 궤변(詭辯)이 난무(亂舞)하는 이 어둠의 바다에서 더욱더 구슬피 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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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11-30
  • 재한조선족의 거취 및 향후 전망
    ■ 김범송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한중 양국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코리안 드림'을 위한 조선족들의 출국 붐도 점차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70만 중국동포가 고국인 한국에서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있다. 한편 일부 재한조선족들은 한국에서 불법체류 할지언정 '가족이 있는' 중국 '회귀'를 거부하고 있다. '나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조선족의 이주특징과 기현상에 대해 현재 많은 동포지성인들이 내심 우려하고 있다. 또한 대규모적 인구이동과 해외출국 러시로 조선족의 이중정체성 변화와 민족교육 위기, 주류민족 동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많은 재한조선족들이 조국인 중국으로의 '회귀'를 포기하는 중요한 이유와 주요인을 다음의 몇 가지로 개괄할 수 있다. 첫째, 현재 대다수 재한조선족들은 서울 대림등 등지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해 가족친지 위주로 생활하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중국(고향)에 일가친척과 땅, 직장도 없고 이미 '삶의 기반'을 상실했다. 둘째, 언어가 통하는 고국에서 5~10년 간 생활해온 동포 1~2세대들은 '하루살이' 품팔이에 만족하고 있고 어느덧 한국생활에 적응되었다. 그들은 중국에 아파트를 마련했고 자녀 교육비도 벌었지만, 노후준비를 위해 아직도 '고된' 한국생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셋째, 재한조선족 대다수가 시골과 도시밑바닥 출신이며 '낮은 소질'로 인해 도시화가 급진전되고 있는 중국에서 직업 찾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러나 고국에서는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과 식당 및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각자 나름대로의 '코리안 드림'을 실현해가고 있다. 또 장기간 고국에서 체류하면서 더 부실해진 중국어와 중국문화 몰이해가 고향 '회귀'의 걸림돌이 되었다. 넷째, 2007년의 방문취업제 등 재외동포정책으로 중국동포들의 불법체류가 크게 줄었고, 서울 구로구 등지에 동포타운을 구성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다섯째, 절대다수가 농촌출신인 재한조선족들은 선진국 수준에 이른 한국사회의 발달한 경제문화와 쾌적한 도시생활에 점차 적응돼 가면서 '서울인'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긍지감에 빠져 있다. 돈도 벌었고 '도시인'으로 탈바꿈해 가는 중국동포들이 황폐화된 고향농촌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과 동기부여를 이미 상실한 것이다. 한편 많은 재한조선족들이 향후 조국인 중국에 돌아갈 충분한 개연성과 주객관적인 요인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 주장이다. 그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활력과 인내심이 강한 1~2세대 동포들은 고되지만 '보람 있는' 한국생활에 미련 버리지 못하지만, '중국인' 정체성이 강한 동포 3~4세대는 중국생활을 선호하고 있다. 현재 대다수의 재한조선족들의 자녀가 중국에 있다. 물론 그들이 자녀의 교육비용을 해결했지만, 이산가족으로서 '부모구실'을 못했다는 자책감에 젖어 있다. 그들이 돈을 번 후 자녀가 있는 중국에 돌아가 노후를 보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둘째, 현재 많은 재한조선족들은 고향에 '돌아가 살' 집을 마련했고, 또 노후보험과 부모자식 간 인연이 중국에 남아 있다. 현재 고국에서 외국인도 동포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로, 인격무시와 일상차별 대상이 되고 있는 동포들에게는 소수민족 우대정책과 '자유롭고 평등한' 중국생활이 고향 '회귀' 매력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 셋째, 방문취업제 정책으로 한국에 대량 입국한 중국동포들은 체류기한이 만료된 후 귀국하지 않으면 곧 '불법체류자'로 전락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재외동포점책에 힘입어 '빚 없이' 한국에 나온 동포 2~3세대들에게는1세대의 강인한 의지와 인내력이 결여되어 있다. 결국 이는 그들이 이방인의 열악한 생활환경에 더 버티지 못하고 언제든지 중국에 돌아갈 수 있는 '주관적 요인'이 될 수 있다. 넷째, 현재 중국사회 경제발전중심이 조선족이 집중되어 있는 동북지역으로 이전되고 있다. 특히 동북진흥계획의 핵심프로젝트인 '장길도'개발계획은 연변자치주의 산업화·도시화를 촉진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이는 그동안 한국에서 창업자금을 마련했고 경영노하우와 전문지식을 익힌 조선족들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창업을 통해 저마다 '사장'이 되고 나아가 '신분상승'을 달성케 할 것이다. 이 또한 많은 재한조선족이 불원간 고향에 돌아가는 중요한 동기부여로 작용할 것이다. 다섯째, 한중 FTA시대 도래 역시 향후 재한조선족의 중국 '회귀'에 긍정적 호재, 플러스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 한중 FTA 체결로 인해 한중 경제교류는 더욱 강화될 것이고, 이는 중국조선족의 이중문화 우세와 '중간조정자' 역할을 한층 더 부각시킬 것이다. 이런 호재와 기회는 중국국민인 재한조선족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현재 한국에 장기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많은 재한조선족들은 '생활기반을 상실'한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결국 이들 중의 절대다수는 '한국인' 동화과정에서 저소득층·영세민으로 전락될 것이다. 한편 주류민족 동화과정에서 조선족 개개인은 삶의 '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지만, 조선족공동체 '멸망'은 더욱 가시화될 것이다. 요컨대 조선족사회 개개인의 '신분상승'과 '윤택한 삶'은 영위되는 반면, 주류민족에 '잠식'되는 민족동화와 민족정체성 상실은 궁극적으로 '민족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다. 100년 전에 조선족이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한편 100년 후 '주류민족 동화'로 종국에 조선족은 이 지구상에서 '멸망'될 것이라는 지성인들의 우려가 결코 기우만이 아닐 것이다. 특히 오늘날 주류민족(한족)에 동화되어 민족정체성을 상실한 소수민족 만족의 '비극적 사례'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11-24
  • [김혁 칼럼]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김염
    ●김혁 (재외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1 11월1일 방송된 MBC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그 남자의 진실' 편이 방송되었다. 영화에 빠진 한 젊은 청년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가 일본 첩자에 의해 암살되자 왜경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넘어간 후 40여편의 항일 영화에 출연한 영화 같은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홍콩, 베이징,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하이 영화에 두고있다. 1930년대의 상하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하이 영화계에 혜성 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다. 바로 김염이었다. 2 김염(金焰)의 본명은 김덕린이다. 김염은 상하이에서 영화에 출연할 때 바꾼 예명(藝名)으로서 불꽃 ‘염(焰)’자는 루쉰의 산문시 “사화(死火)” 혹은 볼셰비키 기관지 “이스크라”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김염은 1910년 4월 7일 서울의 명문 의사집안에서 태여났다.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했던 아버지 김필순은 중국 치치하얼로 망명했고 이어 일본인에게 독살 당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고모의 집에 의탁되었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감출수없는 끼를 보였던 김염은 1927년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준 차비로 단돈 7위안을 갖고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던 상하이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손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어 꿈을 펼치게 되였다. 손유감독은 콧날이 오뚝하고 눈매가 시원시원한 발군(拔郡)의 풍모를 금세 알아 보고는 그를 무성영화 “풍류검객”에 주연으로 내세웠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그후로 김염은 ”일전매'(1931년) “도화읍혈기'(1932년) “모성지광'(1933년) 등에 주연으로 발탁된다. 내용은 대부분 중국 봉건시대의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로 그의 뛰여난 연기력과 용모를 연거번거 확인해 주었다. 1932년 김염은 서생과 건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을 그려낸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에서 열연을 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후 김염은 손유감독과 손잡고 대표적 항일영화경전인 “대로(大路1934년)”를 제작했다. 영화, 특히 영화의 주제곡은 관중들 속에서 강렬한 반응과 공명을 일으켰다.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작곡가로 된 저명한 음악가인 섭이(聶耳)가 영화의 주제곡인 <대로가(大路歌)>를 작곡했고 김염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인민들 속에서 가장 즐겨 부르는 애국가곡으로 되었으며 많은 청년들을 항일열조를 불러일으키는 힘으로 되었다. 이렇듯 김염의 항일영화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김염은 또 조선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을 다룬 “애국혼'과 항일영화 “장공만리' 등에 출연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반일활동에 적극 가담했다. 항일 영화인 “장지릉운'(1936년)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필림을 찾아 없애버린 영화이기도 하다. 김염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자신의 싸인을 담은 브로마이드(肖像)를 판매 해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영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김염이었다. 중일 전쟁이 터졌고 상하이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곧 “영화황제”에게 눈독을 들였다. 군부인사가 직접 나서서 김염더러 일본군국주의를 선양하는 영화에 출연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김염은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는 향항으로 피신했다. 1947년 여배우 진이(秦怡)와 재혼했다.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라 격찬할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진 진이는 “여자농구선수” 등 영화에 출연하며 “일급 배우”의 칭호를 받았다. 몇해전 중국정부가 중국영화 90주년을 기념하여 선정했던 역대 10대 남녀배우에 두 사람은 모두 포함됐다. 현재 구순(九旬)의 고령에도 간간히 스크린에 얼굴을 뵈이고 영화감독까지 맡아 해 “중국영화계의 산증인, 기적”으로 불리는 그는 "남편은 주로 항일투쟁을 다룬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고 회고했다. 1962년 은퇴 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신중국이 성립된후 김염은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여느 거장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혼의 아픔에다 재혼한 진이와의 사이에 태여난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게되는 불행을 겪었으며 문화대혁명때는 농촌으로 하방되고 안해와 함께 수용소에 갖히는 비운을 경험했다. 장기간의 고역에서 얻은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73세로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현재 상하이시내 용화열사능원 기념관에 그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베이징영화박물관에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 돼 있다. 3 필자의 차기 장편소설은 “영화황제”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 한 “수은등의 황제”이다. 작품의 기획은 지난 해 전국소수민족문학중점작품지지항목에 선정됐다. 이 항목은 중국작가협회가 소수민족작가들의 작품창작을 지지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으로, 선정된 작품에는 창작기금을 지원하고 출판, 중문번역, 영화,드라마로의 개편등 혜택을 제공한다. 집필을 다그치면서 필자는 장편의 제목을 “무성시대”로 바꾸었다. 김염의 영화작품 중 대부분은 흑백영화이고, 무성영화이다. 당시 색채도 소리도 없는 어딘가 툽상스러운 영상기술이었지만 한 조선인의 끼끗한 외모와 불타는 열연은 걸음마를 타기 시작 한 무성영화에 소리와 색채을 압도하는 이채로움을 보태 주었다. 수난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우리민족의 걸출한 인걸- 김염, 그의 모습은 퇴색하지않는 한 컷의 필름으로 지금도 스크린을 수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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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1
  • 개고기 먹지 말라니 소가 음매…
    10월 4일은 세계동물의 날이다. 이날은 동물애호, 동물보호를 위한 기념일이다. 최초에 야생동물사냥은 인간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였다. 그러다가 탐욕에 눈이 어두운 인간들이 야생동물을 마구 사냥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에는 동물보호의식이 높지 못했기때문에 공기총이나 고무줄 새총으로 새를 쏘아죽이는 것을 취미로 여겼다. 그때는 사냥총으로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인간이 조성한 생태계파괴, 환경오염은 동물의 생존에 엄중한 위험을 주고있다. 게다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사냥으로 많은 동물들이 멸종위기에 처했다. 국제자연보호련맹의 “적색목록(레드리스트-红色名单)”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약 2만 1000종이 멸종의 위험에 처해있는데 그중에서 약 1만종은 멸종의 위험성이 매우 커서 시급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근 500년래 전세계적으로 785종의 동물이 이미 멸종되였고 멸종위기에 놓인 동물들은 해마다 크게 증가하고있다. 야생동물보호는 아주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에마저 보호의 목소리를 높이는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근년에는 복단대학연구생이 고양이를 학대한 사건, 한 녀성이 하이힐로 고양이를 밟은 사건, 고양이를 불에 태운 사건 등 고양이학대현상이 잇달아 나타남에 따라 동물을 학대하지 말데 대한 목소리도 높다. 동물학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어릴 때 잠자리를 하나 둘 잡아서는 무지막지하게 잠자리날개를 마구 잘라버리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잠자리를 각을 떠서 죽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동물학대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었고 동물학대라고 지적하는 어른들도 없었다. 잠자리가 인간들에게 하잘것없는 동물이였기 때문일가? 다 같은 동물인데 쥐를 밟아죽이면 잘 죽였다고 하고 고양이를 밟아죽이면 동물학대라고 한다. 모기나 파리를 때려죽이는건 응당한 일이고 벌레같은 것은 밟아죽여도 뭐라고 나무람하는 사람이 없다. 쥐나 모기나 파리는 해로운 동물이라서 그렇다쳐도 벌레는 왜서 밟아죽여도 동물학대라고 하지 않는가? 어느 전국인대대표가 고양이고기와 개고기를 먹는것을 금지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식품안전을 위한것이라면 이해된다. 그러나 그 리유뿐이 아니다. 고양이와 개가 인간의 반려동물이라는것이 주된 리유이다. 이는 너무 황당하다. 그럼 소, 양, 말, 닭, 오리 등은 동물이 아니란 말인가? 왜서 소고기, 양고기는 먹어도 되고 고양이고기, 개고기는 먹으면 안된단 말인가? 차라리 모든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하라고 하지? 물론 열에 아홉이 항의하겠지만… 야생동물을 보호하고 동물학대를 반대해야 하는 것은 천만지당한 일이지만 인간이 사육하는 동물에까지 등급을 매기고 존비귀천의 차별을 두는 것은 한심하고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인간사회에는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이 존재하지만 동물계에는 그런 등급이 없다. 있다면 그건 인간이 정한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보호도 인간중심으로 돌아간다. 애완견은 보호동물이 아니지만 인간이 좋아하기 때문에 특급보호동물보다 더 높은 보호를 받는다. 특급보호동물은 중점보호대상이지만 일부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구 사냥하고 마구 잡아서 암시장을 통해 교역한다. 희귀동물, 명종에 가까운 동물이기에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고양이나 개가 특별대우를 받는 것은 양이 울고 소가 항의할 일이다. 쥐도 못잡는 고양이나 집도 못지키는 개따위가 인간에게 고기와 털을 공급하는 나보다 존귀하다니? 아이구, 매매… 인간들에게 안겨 재롱을 부리는 고양이나 개같은 기생충따위가 인간에게 고기와 털, 우유를 공급하는 나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다니? 나도 상류층인간들에게 아부할 것을…음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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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3
  • 말과 글은 민족의 품격
    ■ 신연희 (연변일보 기자)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학원을 차리면서 그 인연으로 중학생 문학창작반 글짓기지도를 잠시 맡게 되였다. 첫날 학원에 가보니 글짓기에 관심이 있다는 중학생 10여명이 교실에 앉아있었다. 아직 얼굴에 어린티가 가시지 않은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글짓기를 지도하는 일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나름대로 보람있기도 했다. 어느날인가 친구가 학원에서 글재주가 있는 아이들을 나에게 소개했다. 그들중 반장이라는 박군은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산자와 죽은자》를 읽고 독후감을 제법 진지하게 써왔다. 대화를 해보니 제법 많은 독서량에다 집중력도 남달랐다. 나는 박군에게 만일 문학에 뜻이 있고 글을 쓰는 일이 정말 재미있게 느껴진다면 조언을 해줄 스승 한분을 소개해주겠노라는 의사를 부모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역시 예상했던대로 박군측은 아무런 련락이 없었다. 씁쓸한 심정이 될수밖에 없었지만 부모들의 마음을 짐작 못할바도 아니다. 시문을 써서 관료를 뽑던 조선시대도 아닌 요즘, 우리 말 우리 글이 더 이상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니라는 말, 부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잘 나가면서 인기 있고 돈 많이 벌려면 기업을 해야 하고 공무원에 합격하든지 줄을 잘서서 출세가도를 달려야 한다. 문학, 예술 분야는 이제 학생들의 진로선택에서 기피분야가 되였고 부모들이 관심을 두는 분야도 아니다. 한마디로 돈이 안되기때문이리라. 먹고 살기 바쁜 세상, 한가하게 문학타령 한다고 야단 맞을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주가 진정한 사람살이의 전부일가? 자기 소개서 하나, 편지 한통도 제대로 못 쓰는 요즘 학생들의 조선어실력에 참담함을 느낄 때마다 따라붙는 생각이 언제나 불고있는 영어열풍이다. 이제 막 “ㄱ, ㄴ, ㄷ, ㄹ”를 익히는 유치원 아이들마저 영어과외하느라 란리법석이다. 기초교육조차 온통 영어교육으로 바뀌고있는것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것일가? 우리가 월등히 다르다고 내놓을만한것 가운데 우리 말 우리 글이 있다고 생각된다. 언어를 떠나서는 민족의 문화를 운운할 가치가 없다. 인간의 정체성, 삶의 의미, 잘산다는것의 의미를 따질수 있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우리것의 학습은 필수적이다. 올해 “조선어문자의 날”을 계기로 있었던 2015년중국조선문신문출판연구토론회에 참가했던 어느 한 교수가 안타가이 털어놓았던 한마디가 떠오른다. “현재 우리의 문학지들 사이에서 원고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원고쟁탈전이 경쟁으로 번지며 문학지들의 질이 높아갈듯하나 실은 제한된 원고를 둘러싼 쟁탈전이라 질과는 그리 관계가 없다. 보편적으로 원고가 딸린다고들 한다.” 상대적으로 문학지는 많은 편인데 문학창작을 하는 작가들은 제한되였으니 그럴만도 하겠다. 한마디로 우리 문학이 객관적으로 독자를 잃어가는 형국속에 현재 겨우 명맥을 유지해간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란 뜻이겠다. 말과 글의 수준은 그 민족의 품격이다. 우리의 말과 글이 문화융성 시대를 열어가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고 그 역할로 우리 사회는 더 따뜻한 공동체가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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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3
  • 성관계 매일하면 임신 확률↑
    [동포투데이] 아이를 원하는 부부는 대부분 배란일에 맞춰 성관계를 갖는다. 임신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그러나 매일 성관계를 가져야 임신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미국 인디애나대 연구진은 30명의 건강한 여성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그 중 절반은 매일 성관계를 갖는 여성이었고, 절반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여성이었다.연구진은 매일 성관계를 갖는 여성에게서 'T 조세포'가 월경 주기에 따라 변하는 것을 발견했다. T 조세포는 Type1과 Type2 두 종류가 있는데, 이는 '외부 침입자'가 병원균처럼 해로운 것인지 정자처럼 이로운 것인지 분별하는 역할을 한다. 해로운 침입자는 없애고, 이로운 침입자는 보호하기 위해서다.매일 성관계를 갖는 여성은 자궁 벽이 두꺼워지는 시기에 T 조세포 Type 2의 활동량이 증가했고, 배란기에 T 조세포 Type 1의 활동량이 증가했다. 면역 세포가 분비하는 단백질인 '사이토카인'의 분비량도 늘어났다.성관계 후 면역글로빈 G(immunoglobin G)의 활동량도 증가했다. 면역글로빈 G는 혈청에 존재하는 단백질로 체내에 침투하는 병원균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성관계를 하지 않는 여성에게선 어떠한 변화도 발견되지 않았다.연구진은 매일 성관계를 가질 경우 여성의 몸이 특별한 방식으로 임신을 준비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면역 세포의 활동량이 증가하면 난자, 정자, 수정란을 공격하는 해로운 침입자의 활동이 제한돼 임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연구를 진행한 티어니 로렌츠 미국 킨지연구소 방문 연구원은 "면역 체계는 임신 성공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며 "성관계가 면역 체계에 임신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이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임신과 불임 저널' 최신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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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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