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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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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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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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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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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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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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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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3)
    ■ 허길성 해리서산업에서 나는 “폭발호”처럼 부자는 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치부했다고 할수는 있었다.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바라지를 하고도 집 한채를 마련했으며 용돈도 그닥 남부럽지 않게 쓸수 있었다. 한편 하도 까근하고 과학적인 관리를 한데서 실패가 적었고 또한 적시적으로 그것을 포기하고 정리한테서 빚더미에 올라앉는 위기는 만회했다. 그때는 이미 일본류학 3년째로 박사시험을 칠 날도 멀지 않았고 거기에 아들애가 적지 않게 아르바이트로 뛰면서 공부했는가 하면 또 장학금도 탔고 있었기에 부모로 된 우리의 부담은 상대적으로 많이 덜어진 셈이였다. 더이상 “제3산업”을 벌이지 않아도 될수 있었다. 하지만 동물사육업에 재미를 붙인데다 나는 미립이 텄고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사회에서 생활하자니 돈쓸 일이 많았으며 앞으로 로후에 들어서서 사람한테 어떤 일이 터질지 어떻게 알랴. 결국 나는 안해와 의론하고는 곰사육업을 벌여보기로 하였다. 안해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였다. 나는 이번에도 곰을 사놓기에 앞서 서점에 가 곰사육에 관련된 책을 사다보면서 곰사육에 관련된 지식과 기초상식부터 익혔다.곰사육을 시작할 때 우리는 사육장이 없다 보니 집안 객실에 굵은 철근으로 곰우리를 만들고는 그안에 곰 1마리를 가두고 키웠다. 곰사양장을 짓자면 큰 자금이 들어가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곰사육장을 지을만한 자금이 없어서가 아니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즉 곰사육양 역시 지난번의 해리서사육처럼 시장이 막힐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그도 그럴것이 만약 곰사육에 크게 투자해 곰사육장을 지었다가 그 산업이 얼마 안가 막을 내리게 되면 자칫 투자금도 뽑지 못할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였다. 한편 곰을 사육하면서 보면 조심해야 할것이 많았다. 곰(해리서도 마찬가지였음)이란 녀석은 강아지나 고양이와는 달리 주인을 알아보고 주인을 반기는 그런 애완동물이 아니였다. 먹거리를 주거나 혹은 가려워한다고 나무꼬챙이로 등을 긁어주거나 또는 목욕을 시킬 때도 까딱 조심하지 않으면 갑자기 주인한테 덮쳐들어 손을 물어놓거나 긁어놓기도 하군 했다. 그래서 나와 안해는 그 녀석한테 조금씩 다친적이 여러번 되였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이 주인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련한 놈”하고 욕하군 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곰사육이란 이 산업을 포기하지 못하였다. 아니, 곰한테서 뽑아내는 웅담분을 파는 시장이 포화되지 않는한 그것을 계속 해야 했다. 그러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동물을 치다보면 머리속에 떠오르는 한가지 법칙같은것이 있었다. 즉 개, 고양이 등 애완동물은 귀여울 때가 많아 그것들을 고와하다 보면 가족 지어는 집식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으며 적지 않은 가정들에서는 진짜 애완동물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애완동물은 경제적 가치가 적었다. 적어도 웅담분을 제공하는 곰이나 알을 낳는 닭에는 비할수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식한테 투자하는것처럼 돈을 때려넣는 경우가 허다했다. 례하면 먹는것이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사람보다 더 비싼 육류같은것을 먹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곰이나 해리서 그리고 닭이나 게사니같은 동물이나 가금류는 절대 가족으로 생각할수 없는것들이다. 귀엽지 않고 애를 먹이기도 한다. 가끔씩 좋은것을 먹이고 병치료도 해주지만 그렇다고 그 비용이 애완동물한테 쓰는것과는 비길수 없었다. 반면에 곰처럼 미욱한것들은 주인한테 부를 창조해주고 있는것이다. 이는 묘한 대립적 관계가 아닐수 없었다. 만약 이것들한테 그 어떠한 공통점이 있다면 애완동물은 주인한테 즐거움을 선물하고 곰같은 미욱한 동물은 주인한테 경제적 가치를 제공한다는것으로 이 두가지 모두가 사람한테는 수요된다는 바로 그 점이라 할수 있다. 6 곰사육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들어서고 또 거기에 일정한 비결이 생기고 미립도 트자 우리는 곰을 1마리로부터 5마리까지 늘였다. 곰사육업이 그냥 “흑폭풍”처럼 다가왔다 지나가는 그런 단기행위업종이 아닌것 같아서였다. 하긴 제3산업에는 단기행위를 거금을 투자를 하여 제꺽 본전을 뽑고도 큰돈을 버는것이 있는가 하면 보다 적은 돈을 벌더라도 원견성이 있고도 지구력이 있게 끌고나가는 산업항목이 별도로 있는것 같았다. 당시 우리가 생산해낸 웅담분은 주로 한국으로 많이 수출되였다. 연변특산으로는 한국행을 하는 사람들이 한국인들한테 선물하기엔 제격인 모양이였다. 그외 우리는 아들이 있는 일본과 딸이 있는 북경에도 웅담분을 적지 않게 보내주어 적지 않은 판로를 개척했다. 그리고 당시 우리가 생산해낸 웅담분은 잡질이 적고 순도가 높아 고객들한테서 호평이 좋았으며 한시기 한국나들이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사가는 특산품으로 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여기까지 오노라니 고생스러운건 사실이였다. 질병예방에도 신경써야 하였지만 사료장만이 여간 여러운것이 아니였다. 곰이란 녀석은 먹기를 엄청 많이 먹었다. 해리서를 사육할 때처럼 여겼던 내가 크게 오산한 셈이였다. 게다가 마리수가 5마리다보니 더욱 그랬다. 특히 겨울철에 먹을거리가 제일 걱정거리였다. 우리는 해마다 겨울철이 다가오면 우리는 당근, 수박, 사과와 개미 등을 대량 구입했고 옥수수도 3000근 이상씩 구입해서는 일반 개인집의 김치움보다는 5-6배가 더 큰 움안에 보관해야 했는가 하면 돈을 절약하기 위해 교외의 배추밭과 과수원을 오르내리면서 배추와 사과배 이삭을 줏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손을 얼구기도 했고 차림을 하고 나선 꼴이 말이 아닐 때도 많았다. 그리고 해리서를 키우면서 손실을 본것처럼 공사육에서도 큰 손실을 본적도 있었다. 우리는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약 20년간 곰사육을 했었는데 선후로 곰 3마리가 죽어나가기도 했다. 그중 한마리는 뇌진탕에 걸려 죽었고 한마리는 설사를 맞아 앓다가 죽었으며 또 다른 한마리는 집에서 키우는 식물을 뜯어먹은것이 중독되면서 죽기도 했다. 그때 200근이 넘는 곰 한마리가 2만원씩 했으니 6만원을 손실본 셈이였다. 그 6만원 ㅡ 그것은 큰 기업인으로 놓고 말하면 새발의 피도 되나마나 했겠지만 작은 규모로 곰사육업을 하는 우리한테 있어서는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하긴 이렇듯 고생스런 나날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아들딸의 뒤바라지를 성공적으로 할수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바로 이런 우리의 고생과 헌신으로 의해 딸 영혜가 이젠 북경에서 일본회사에 출근하며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고 아들 영동이 또한 박사모를 쓰는것으로 일본류학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동안 일본의 모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젠 당지의 모 회사에서 출근하며 회사중견으로 립지를 굳힌 상황이다. 특히 영동이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당시 아들은 우리 부부를 초청해 일본구경을 시키기까지 했다. 아들이 일본에 없다면 언제 우리 부부가 일본나들이를 할 생각이나 할수 있었으랴. 금빛석양 1 나는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일복이 있는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들어왔다.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것 같다. 왜냐하면 지나온 나의 일생을 놓고 보아도 나는 항상 시간이 넉넉하거나 한가할 때가 없었다. 초기 부대생활을 할 때에는 뭔가를 배우느라고 늘 시간의 부족함을 느꼈고 북경공정병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배운것을 실천하느라고 항상 바삐 보냈으며 그뒤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거나 연길시라지오방송국으로 전근한 다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그중 한가지 빼놓을수 없는 일이 있다면 1996년 4월 우리 3형제가 “고향정”이란 주제를 갖고는 룡정시 석정향 중성촌에 고향에 다녀온 그것이다. 당시 우리는 여러가지 준비를 했다. 우리 삼형제는 각각 호주머니를 털어서는 촌로년협회에 기부할 자금을 마련했고 또 연변예술학원 지도부와 련계해서는 가수 박춘희 등 20명으로 구성된 예술소분대를 청하기도 했다. 그날, 우리 3형제와 예술학원의 예술소분대가 중성촌에도착하자 마을사람들은 촌구락부에 모여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마침 그때는 진달래가 피는 계절이라 촌에서는 진달래꽃을 꺾어와서는 구락부의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고향정”활동모임에서는 촌민위원회 주임의 발언과 촌로년협회 회장 등 여러 사람들의 발언에 이어 예술소분대의 공연이 펼쳐졌다. 그러자 촌민들속에서는 자주 탄성이 터졌다. 특히 박춘희가수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조선족민요를 부르자 촌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흥겨워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골구석에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전업예술단의 공연이 아닐수 없었다. …그날 오후 예술학교 소분대와 기타 사람들은 다 연길로 돌아갔지만 활동조직자들인 나 그리고 둘째형님과 셋째형님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하루밤 묵기로 하였다. 촌에 보다 더 실질적으로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촌간부들과 토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의론했다. 하다면 촌을 위해 도대체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의론중 문득 셋째형님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놨다. 곧바로 오래지 않아 “6.1”절이 다가오기에 그때 촌아이들한테 연길구경을 시키자는것이였다. 그러자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그날밤 우리는 촌아이들한테 연길구경을 시킬 때 필요한 절차와 각자가 맡을 임무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토론하기도 했다. 드디여 1996년 6월 1일이 닥쳐왔다. 때마침 그해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6.1”절 경축대형활동모임이 있었는데 우리는 연길시교육국과 련계하여 룡정시 석정향에서 오는 애들과 교원 및 학부모 등 100여명이 앉을 장소를 마련했다. 그날 석정향에서 온 학생, 교원과 학부모는 약 80명이 됐으며 우리가 사전에 장소를 마련했기에 그들은 아주 쉽게 연길시인민경기장에 입장했고 또한 경축활동의 모든 장면들을 구경할수가 있었다. 점심때가 되자 애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원들은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그닥 멀지 않은 우리 집에 가서 식사하기로 하였다. 당시 우리 집은 140여평방메터가 되는지라 80명이 식사하는데는 별 불편이 없었다. 그날 점심은 애들과 학부모들이 갖고온 도시락과 우리 집에서 준비한 음식들로 마련되였다. 이어 오후에는 시간이 있게 되자 우리는 애들한테 연길시신화서점을 참관시켰다. 당시 신화서점 지도부에서는 촌어린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을뿐만 아니라 수백권에 달하는 책을 애들한테 기증했다. 참으로 고마운 신화서점 지도부일군들이였다. 그날 저녁이 되자 우리는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을 우리 3형제의 집에 배치하여 식사하고 또 주숙하게 하였는데 주숙하는데는 아무래도 좀 자리가 모자란것 같아서 연길시 하남가두의 독보조 장소를 빌려쓰기도 했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애들과 학부모 등을 데리고 연변일보사 인쇄공장을 찾아가 신문인쇄현장을 참관시켰다. 둘째형님인 허길룡씨가 연변일보사에 재직이였기에 사전에 련계했던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또한 애들을 데리고 연길공항으로 갔다. 모두 사전에 련계했던것이다. 연길공항에서우리는 애들한테 공항내부와 비행기내부 등을 참관시켰으며 비행기의 리착륙장면도 구경시키였다. 연길공항까지 구경시키고 나니 점심때가 되였다. 그러자 우리는 연길동북아호텔로 향했다. 그시기 우리 허씨종친회의 허순자녀사가 동북아호텔의 총경리로 있었기에 그가 80명에 달하는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한테 무료로 점심 한끼를 제공하기로 했던것이였다. 참으로 나의 일을 자기의 일처럼 생각하면서 도와준 허순자녀사였다. 나는 이번 집필기회를 빌어 현재 연길시에서 일본료리집을 운영하고있는 허순자녀사한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그번 활동에서 나와 둘째형님 그리고 셋째형님은 적지 않은 돈을 팔기도 했다. 전문용 뻐스 2대를 세내여 애들과 학부모 및 교원들이 타고다니게 했고 또한 식사를 제공하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를 두고 형님들과 나는 물론 형수 두분과 나의 안해도 불쾌해하는 내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촌애들을 위해 늦게나마 좋은 일을 한것으로 하여 무척 기뻐하는 모습들이였다. 한편 그때의 활동은 연변일보에 게재되기도 하고 연변TV에 방송되기도 했는데 연변일보의 기사는 둘째형님인 허길룡씨가 직접 쓴것이였다. (연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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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0
  • 오묘한 세계 대백과(9)천왕성
    천왕성은 천문학자 헤겔이 1781년에 발견한 것으로서 태양계 8대 행성 중에서 세번째로 큰 행성이다. 천왕성은 토성 밖의 해왕성 내에 있는데 해록색으로 단장되어 있다. 천왕성은 태양계 대가정 중 제일 게으른 “아이”와도 같다. 천왕성은 그 자체의 자전 혹은 공전을 막론하고 모두 “누운채”로 돌고 있다. 누군가 추측하기를 천왕성은 가능하게 아주 먼 옛날에 다른 한 천체와 부딪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왕성은 뾰로통해져 갖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단다. 천왕성은 게으르기도 하거니와 또 아주 차갑다. 그것의 핵심 온도 역시 2000도 내지 3000도밖에 되지 않으며 아울러 핵심외면을 둘러고 있는 층은 전부 얼음으로 깔려있다. 천왕성의 내부핵심과 목성 및 토성의 물질분포는 거의 비슷하다. 또한 천왕성 역시 토성처럼 그 자체의 빛무늬가 있는데 그 빛무늬가 비록 크지만 매우 어둡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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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9) 벨베데레궁전
    벨베데레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오스트리아, 지점: 잘쯔부르그 남쪽 함의: 알파브산 이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상 원림지대임 17세기초,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교주 마쿠스(马尔库斯)는 수원이 충족한 헬부른산밑에 궁전 하나를 짓자고 생각했었다. 당시 궁전설계사는 궁전을 짓기에 지형이 좋기에 말쿠스한테 아름다운 수상경치를 위주로 한 휴가궁전인 이 헬부른궁전(海尔布伦宫)을 지어주었다. 헬부른궁전은 화원을 포함하여, 풍격이 독특하기로 이름난 분수못, 그리고 기계 꼭두각시극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알프스산 북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값진 문화재의 하나로 되고 있다. 헬부른궁전의 분수못 분수못은 헬부른궁에서 가장 독특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분수의 원천은 작은 나무와 수림 뒤에 있는가 하면 돌상과 돌의자 밑에도 있으며 심지어 어떤 분수의 기관은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곳에 숨어있는 곳도 있다. 전하는데 따르면 대교주 마쿠스는 일찍 여기에서 연회를 베풀어 손님들을 청했는데 손님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분수기관을 열어놓아 물기둥이 사처로부터 튀어나오게 했다 한다. 그래서 모두들 사처로 피했지만 온몸이 물에 흠뻑 젖었다고 한다. 당시 유일하게 물 한방울도 맞지 않은 이가 바로 이 “자작극”을 꾸민 말크스 교주였단다. 헬부른궁전 내에는 아주 깜찍하게 지어진 돌건축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신기한 꼭두각시 극장으로 매개 극의 정경과 인물은 모두 세계 저명한 동화이야기로 제작되였다. 돌건축물 내의 중앙에는 하나의 특이한 돌이 있는데 위에는 왕관 하나가 놓여 있으며 사람이 손으로 그 왕관을 다치기만 하면 왕관밑으로부터 분수가 뿜겨져 나온다. 또한 분수로 꼭두각시 극장의 무대를 움직이는데 100개의 꼭두각시들이 순식간에 생명을 얻어 움직이게 되며 아름다운 음악속에서 각 자가 자기의 역을 감당, 자태가 다양해 아주 생동감을 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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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06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시리즈 4) 아버지네들을 맞아준 조국
    ■ 김철균 아버지네들을 맞아준 조국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다싶이 아버지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일원으로 강서성 남창까지 나간 뒤 다시 중국 중앙군위의 비밀지령에 의해 정주에 모였다가 화물차에 앉아 조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신의주에 도착한 그날 밤에도 아버지네들은 그곳이 조선 즉 조국인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튿날 새벽 날이 밝으면서 여기저기에서 숱한 사람들이 나타나 아버지네들의 부대가 휴식하고 있는 곳에 와서 구경하였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조선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때 누군가 흥분에 젖어 소리쳤다고 한다. “야, 조선이다. 우리 조국에 왔단 말이다!”그러자 모두들 환성을 지르며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흥분에 들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로 술렁이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선사람 조선으로 길이 보존하세…환호성속에서 전사 여럿은 또 태극가를 부르기도 했단다.……미구하여 중국에서 나간 군인들 앞에는 인민군 정복을 한 군관 한명이 나타났다.누더기같은 군복을 입은 중국해방 군출신과는 어울리지 않게 멋진 차림의 군관이었다. “여기 지휘관이 누구요?”새파랗게 젊은 녀석인데 반말이다. “나요. 나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사단장인데 지병학이라고 하오.” “사단장? …”인민군 군관은 지병학 사단장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흥!”하고 냉소를 했다. 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옷을 입은 꼴이 이게 뭐냐는 뜻이었다. “무슨 부대가 이렇게 무질서한거요?!” “이제 금방 중국에서 막 나오다보니…”지병학 사단장은 새파란 젊은 녀석 앞에서도 예의를 갖추었다. “하긴 중국에서 유격전이나 하던 사람들이라 다를리 있겠소만…”이 때 어디선가 트럭 2대가 달려오더니 부대앞에 와서 칙-하고 멈춰섰다. “당신들은 오늘부터 조선인민군 부대가 되었단 말이요. 중국에서 유격전이나 하던 부대가 아닌 소련군 고문들한테서 훈련을 받게 될 정규부대가 됐다 이 말이요.”트럭에 싣고 온 것은 전부 인민군 복장이었다. 이어 군복이 발급되었다. 사병들은 여태껏 입고 있는 중국해방군 복장을 벗고는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사단장이고 일반 사병이고 분별이 없이 똑 같은 것으로 갈아입었다. 뒤이어 찦차 한대가 달려오더니 역시 부대가 있는 곳에서 멈춰서더니 차에서 군계급이 아주 높아보이는 군관 2명이 내렸다. “아니, 강신태 동지…김책 동지!”지병학 사단장은 반달음으로 그들앞으로 다가가더니 거수경례를 붙였다. “지병학 동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반갑소. 조국은 동지들의 나라 건설과 보위 사업에 뛰어드는 것을 열렬히 환영하오.”그러고는 아까 그 젊은 군관한테 지병학 사단장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동지가 바로 소련으로부터 함께 중국 동북에 진출했던 지병학 장군이오. 인사하고 예의를 갖추도록…”그 젊은 군관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래지는 것이었다. 강신태 장군은 자기 역시 1948년 말경에 조선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과 조선에 온 뒤 이름을 강건으로 바꾸었다고 소개했다. 한편 복장을 바꿔입은 사병들은 여전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며 태극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강건 장군은 그것을 제지시켰다. “동무들이 중국에서 나왔기에 잘 모르는가 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애국가를 만들었소. 아까 그 태극가는 케케 묵은 것으로서 남조선에서는 여전히 불려지고 있다만…” 그러면서 아까 그 젊은 군관더러 새로 나온 애국가를 불러보라는 것이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이어진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빛내이세…장엄하고도 힘있는 애국가였다. 그날 조선으로 진출한 후 아버지네가 처음 배운 노래가 그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다. 그 뒤 아버지네 부대는 재차 열차편으로 원산쪽으로 이동, 원산에 당도한 부대는 그 곳의 명사십리라는 해변가에서 개편되어 조선인민군 제7군단이란 부대번호를 갖고 훈련에 들어갔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5-04
  • 【단독】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2)
    ■ 허길성 1 거듭 언급했지만 나는 1960년대 중기 어느 한 지인의 소개로 당시 개산툰화학섬유팔프공장 화험실의 처녀인 송금자씨를 만나 약혼한 뒤 1966년의 결혼에까지 이어지게 되였다. 결혼초기 우리는 연길과 개산툰 이렇게 두곳에 떨어져 생활하게 되였다. 결혼 1년뒤 안해가 출산하게 되였다. 당시 안해는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나한테 곧 출산하게 된다는 전보문을 보내왔다. 그런데 부대에서는 내가 개산툰으로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문화혁명의 무단투쟁으로 개산툰의 형세가 몹시 혼란한 상황이였다. 파벌싸움은 물론 총소리가 나는 류혈싸움으로까지 번져졌기에 부대에서는 나의 안전 때문에 가는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안해한테서 두번째 전보가 왔다. 난산이 되여 복부절개수술로 겨우 아기를 출산했다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재차 부대에 청시, 안해의 출산 5일만에야 겨우 허락을 받게 되였다. 내가 개산툰에 도착하여 안해가 들어있는 작으마한 세방에 들어서자 얼굴이 퉁퉁 부은 안해가 눈물을 흘리며 아기를 안고 있었다. 당시 안해는 수술자리의 실도 뽑지 않은 상황, 녀동생들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모든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안해를 보는 순간, 나는 강한 자책감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해가 불쌍했다. 안해한테 미안했다. 그때 그 당시의 안해에 대한 죄책감ㅡ 나는 두고 두고 잊을수가 없었다. 나의 첫 자식, 영혜는 바로 이렇게 태여났다. 이렇게 태여난 딸 영혜는 자라면서 이쁘고도 대단히 총명했다. 이는 나의 딸이라고 해서 자랑하는것이 아니라 남들도 모두 그렇게 평가했다. 우리는 딸을 곱게 잘 키우기로 했다. 딸 영혜는 우리 부부의 기대처럼 별로 탈없이 잘 컸다. 특히 2살이 되자 영혜는 라지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다 고사리같은 손을 하느작거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고 3살을 넘기자 제법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하면서 노래 한수를 몇번만 들어도 그것을 그 곡과 가사까지 외우면서 소화하군 했다. “여보게 애기엄마, 애가 어쩌면 이렇게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한다우?! 앞으로 이 집에서 예술가 한명이 나올 모양이구만.” “녀자애들은 예술이나 교원으로 일하게 하는것이 아주 제격이라오. 깨끗하고 힘도 들지 않고 말이요.” 우리 역시 딸 영혜를 음악가로 키울 계획이였다. 안해 또한 나의 결정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헌데 인생이란 한치 앞날도 내다보지 못한다고나 할가? 1972년부터 내가 군복을 벗기운 뒤 연변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게 되면서 가정생활도 급작스레 내리막질을 하기 시작하였고 게다가 그해에 아들 영동이까지 태여나면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준다던 계획은 그저 나무아미타불에그친듯 싶었다. 또한 그저 아주 먼 앞날의 “신기루”같은 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해는 결코 그것을 포기하는 눈치가 아니였다. 안해는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했다. 말그대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가까운 곳이건 아주 먼곳이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군 했다. 그리고 병원의 밤당직을 서고 퇴근한 뒤 낮에 잠을 잘념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일거리를 찾아다니군 했다. 썩 후에 딸 영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사범학교 음악학부에 입학, 그때로부터 우리는 진짜 딸 영혜한테 피아노를 사주기로 결정지었다. 그렇게 약 2년이 지나자 안해는 다시 친정집에 손을 내밀고 또 여러 친구들한테 사정사정해서는 드디여 피아노를 살만한 돈을 마련했다. 피아노를 사오던 날, 나는 안해의 손을 잡았지만 그만 할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저 코등이 시큰해나며 눈물이 앞을 가리기만 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그 피아노가격은 적으만치 인민페로 6800원이였다. 그 6800원 ㅡ 이는 당시 우리 부부 둘의 로임으로 놓고 볼 때 말그대로 천문수치였다. 그리고 번쩍거리는 그 피아노를 작으마한 웃방 벽쪽에 놓으니 헐망한 집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피아노가 집안에 어울리건 말건 나는 피아노를 딸애한테 선물했다고 생각되니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리고 피아노를 산다고 큰소리 치며 장담한건 나였지만 실제적으로 노력하며 행동에 옮긴건 안해였다. 나는 그런 안해가 고맙기 그지 없었고 절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였다. 그때 나는 아무리 역경속에 처하더라도 노력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철리를 안해를 통해 알게 되였다. 딸 영혜는 크면서 예술적 재질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인정스러웠으며 그리고 밖에 나가서도 례의가 밝아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딸 영혜는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전당인 연변사범학교에 입학하여 한동안 음악을 전공했고 졸업후에는 재차 연변예술학원에 입학, 연변예술학원을 마친 후에는 연길시소년궁전에서 음악교원으로 몇년간 근무했다. 그러다가 다시 일본류학길에 올라 계속 자신의 꿈을 키워갔다. 현재 딸 영혜는 수도 북경의 모 일본회사에서 중견으로 사업하고있는 상황이다. 2 딸 영혜와 3년 터불로 태여난 아들 영동이는 누나와는 달리 어릴 때부터 남자답게 듬직하고도 말수도 적었다. 그리고 라지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어도 별 반응이 없었으며 그러한것에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것 같았다. 이러한 성격을 보면 아들애는 나를 많이 닮은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애가 이 애비를 닮은것 같다고 말하면 안해는 점잖고 말수가 적은 아들애가 자기를 더 닮았다고 우기기도 하여나중에는 그저 웃음으로 끝나기가 일쑤였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롱작을 잘 쓰군 했다. 대신 그애는 5살쯤 되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했고 놀음감같은것이 생기면 그냥 갖고 노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주 뜯고 맞추고 하면서 원가를 궁리하는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놀음감을 망가뜨릴 때도 있었지만 나는 물론 안해도 이를 나무람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장차 커서 애가 뭔가 크게 연구하고 발명할것 같아서였다. 아들 영동이는 비교적 사색을 즐기는 그런 류형의 아이였다. 아니나 다를가 영동이는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학급내에서 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학습성적이 우수하였는데 특히 그중 수학성적이 돌출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도 했지만 머리가 남달리 총명한것 같았다. 그애는 외형적으로 성격이 강하고 말없이 남을 도와주는 일을 곧 잘하군 했다. 책읽기도 어느 정도 좋아했고 운동에도 퍼그나 취미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애의 성격으로 보아 그가 공부로 출세할것을 바랐다. 아들 영동이는 소학교때부터 초중에 이르기까지 늘 우수생 혹은 최우등생으로 성적파동이란 거의 없이 공부하다가 아무런 하자도 없이 연변1중에 붙었고 고중을 졸업한 후에는 역시 대학입시 첫해에 연변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한편 아들까지 대학에 붙자 남들은 모두 우리 부부를 극찬하며 부러워했지만 기실 자식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는 일이란 무던히도 힘든 노릇이였다. 우리 내외간의 로임으로는 그애들의 학비와 생활비를 이어댈수가 없었다. 뭐든지 해야 했다. 바로 그럴쯤인 1993년에 안해는 오랜 생활고로 얻은 지병때문에 퇴직휴양하게 됐다. 하지만 안해는 자녀 둘의 공부뒤바라지때문에 시름놓고 병치료에 전념할수 없었다. 퇴직후 안해는 병치료를 하다말고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자녀 둘을 위한 새로운 일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안해는 연길시 어느 대형복장점에 찾아가서 일거리를 맡아왔다. 복장점 재단한 옷감을 가져다가 집에 있는 재봉침으로 2차 가공을 하는것이였는데 삯값은 매 견지당 겨우 2전이였다. 삯일치고는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보수였으며 1년간 아글타글 해봤자 1000원 수입도 되나마나했다. 그러나 아픈 몸으로 다른 힘든 일은 할수 없고 신체에 알맞는 부업거리란 오직 그것뿐이였다. 한낱 눈에 차지도 않는 돈벌이였지만 안해는 그 일을 열심히 했다. 저녁마다 밥술이 떨어지면 재봉침앞에 앉았고 일단 앉았다 하면 늘 자정을 넘기군 했다. 그래서 그냥 보다 못해 나도 거들어줄 때가 가끔씩 있었지만 저녁 10시만 되면 안해가 이튿날 출근하는 나를 념려해 떠밀었으며 나또한 부득불 안해 먼저 잠자리에 들 때가 많았다. 우리는 2년간 그 삯일을 했다. 그동안 안해는 반품이 없도록 하기 위해 꼼꼼히 살피며 질을 보장했고 정한 날자에 가공품을 공장에 바치느라고 밤을 샐 때도 자주 있었다. 그 사이 오래동안 재봉침앞에서 정신을 집중해 일한 탓이랄가. 안해의 시력은 형편없이 망가졌다. 이렇게 악전고투하며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한 보람으로 딸 영혜는 일본류학을 마치고 귀국해 북경에 정착했고 아들 영동이 역시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본교의 교원으로 배치받게 되였다. 그뒤를 이어 선후로 딸과 아들 모두 취직해 우리 내외간은 어느 정도 시름을 놓게 됐다. 뜻인즉 예전처럼 아글타글하지 않아도 나의 로임과 안해의 퇴직금으로 유족한 생활을 할수 있었고 어느 정도 결혼한 자식들을 도울수도 있게 됐다. 헌데 아들 영동이가 연변대학 교원직이 퍽 맘에 들어하지 않아했다. 그는 일본에 가서 공부를 더 하여 박사학위까지 따낼 뜻을 내비치였다. 물론 영동이는 더는 부모한테 기대지 않고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겠다고 했으며 나 역시 “공부를 더 하는건 네뜻이지만 부모한테도 부모로서의 인생이 있으니 더 이상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할수 없다”고 못박아 뜻을 밝혔으나 부모로 생겨 공부를 더해 박사학위를 취득하겠다는 아들의 일에 그저 수수방관할수 없는일이였다. 그러자 우리 부부한테는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를 밀어줘야 할 또 다른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3 아들앞에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결국 그의 박사공부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자식이 장래를 위해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하는데 부모로서 그것을 막을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나서자고 보니 우리한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것도 국내에서의 박사공부도 아니였다. 당시만도 우리 중국에 비해 물가가 엄청 비싼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의 뒤를 받쳐준다는건 복장공장의 옷감을 가져다 2차 가공을 하는것 같은 삯일을 해서 되는것이 아니였다. 아니 턱도 없었다. 옛날에는 소를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다고 했지만 지금은 소뿐이 나니라 집을 팔아도 자식의 뒤받침을 한다는건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것도 외국에서 류학하는 자식을 돕자면 더욱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뭔가를 하긴 해야 했다. 그렇다면 뭘 해야 된단 말인가? 큰 자금이 없으니 내지를 드다들며 통 큰 장사는 할수 없는거고 또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재직이였기에 그럴만한 정력과 시간도 없었다. 바로 그 시기 연변에서는 해리서를 사육하는 바람이 일었다. 즉 해리서새끼를 가져다가 키워서는 나중에 원 주인한테 바쳐 계약대로 주인한테서 돈을 받는것인데 아무리 해도 그것이 다른 장사나 삯일보다는 헐씬 쉽게 할수 있는 부업거리로 해볼만한것 같았다. 그런데 관건은 관리였다. 해리서에 대한 사료공급도 잘해야 하거니와 질병예방조치도적시적으로 잘해야 했으며 모든것은 과학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여야 했다. 큰 실패를 피하기 위해 나는 해리서 새끼를 사들이기전에 서점에 가 해리서사육에 관련한 책 몇권을 사다가는 읽으며 중요한 부분들은 수첩에 적으면서 학습하였다. 그러고는 철근과 철판으로 집안 객실에 해리서우리를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해리서 새끼들을 사들였다. 정식으로 해리서에 대한 사육이 가동되자 나와 안해는 비교적 분공이 분명했다. 안해는 주로 사료를 배합하고 끓이고 하여 먹이를 만들어서는 해리서한테 규정된 시간마다 공급하는 한편 해리서우리를 청소하는것 등이였고 나는 또한 해리서사료를 구입하고 2-3일에 한번씩 해리서우리를 소독하는것 등 작업을 맡았다. 왜냐하면 낮에는 내가 주로 출근해야 하기에 매일 해리서한테 먹이를 주면서 보살필수는 없었기 때문이였다. 하긴 그렇게 분공이 명확했지만 휴식일에는 나 역시 해리서우리를 떠나지 않고 안해의 일을 거들어주군 하였다. 이렇게 우리 부부가 빈틈없이 먹이를 공급하고 질병예방조치를 강구하면서 정성을 넣자 해리서들은 거의 아무런 탈도 없이 살도 찌고 무럭무럭 빨리 자라주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이 요구하는 체중에 도달하였기에 가져다 바칠수도 있게 됐다. 어느날 우리 부부가 규정된 체중에 도달한 해리서들을철근으로 만든 초롱안에 넣어갖고 자동차에 실어 갖다바치니 주인은 그 자리에서 계약대로 돈을 지불하는것이였다. 주인의 돈을 받고 집에 돌아와 핵산해보니 원가와 인건비 등 각종 지출을 제하고도 꽤나 많은 수입이였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알심들여 잘 키워서인지 우리는 남들보다 퍽 날자를 앞당겨 바쳤기에 많은 지출을 줄일수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 부부는 대단히 큰 재미를 느꼈다. 복장공장의 반제품을 가져다 재가공하는것 즉 한견지에 2전씩 하는 삯일에 비해서는 엄청 큰 수입이였다. 그때 나는 뭘 좀 하려면 통이 크게 벌여야 한다는 도리도 알게 되였다. 그뒤 두번째로 해리서 새끼를 가지러 갔을 때 우리는 계획적으로 구입마리수를 몇배 더 늘여갖고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가 두번째의 사육에서도 우리는 대성공이였다. 이렇게 몇번 해리서 새끼를 가져다 키워서 바치니 돈은 눈덩이처럼 구르고굴러 나중에는 해리서사육에 투자하고 남은 돈과 합쳐갖고 다시 새집을 마련했고 일본에서 박사공부를 하는 아들 영동이한테도 달마다 정기적으로 지원할수 있었다. 하긴 해리서를 사육하면서 엄청난 손실을 본적도 있었다. 글쎄 한번은 집을 비운 사이에 누군가 집의 문을 부시고 들어와 다 큰 해리서 12마리나 훔쳐갔다. 그속에는 새끼를 가진 해리서도 몇마리 잘 되였는데 새끼를 가진 해리서 한마리가 그때의 시세로 수천원씩 하였으니 그 손실이야말로 어느 정도였겠는가 하는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었을것이다. 4 우리 부부가 해리서사육에 큰 재미를 붙였을 무렵, 어느날 누군가 나한테 귀뜸해주는 말이 이제 곧 해리서시장이포화상태에 진입할것이므로 실패로 끝을 보기전에 일찍감치 이 산업을 정리하고 다른 업을 벌여보라는것이였다. 처음에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가 헛소문을 얻어듣거나 아니면 “4촌이 기와집 지으면 배가 아프다”고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인줄 알았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아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마리수를 점점 늘여갔다. 더 통이 크게 벌여 한몫 잘 마련해 나이 든 후 여유작작한 로후를 보내기 위한 욕심도 없지 못해 있었다. 헌데 그의 말은 진실했고 “매를 맞아도 첫매를 맞아야 한다”, “뭐나 잘된다 할 때는 이미 그것이 기울기 시작한 때이다” 등 말이 그냥 귀등으로 지나칠 말이 아니였다. 과연 우리가 해리서사육업을 시작해 약 1년반 남짓이 됐을 때부터 “합격품” 해리서들을 바치러 갈 때마다 주인의 얼굴에 비낀 그늘을 보아낼수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주인은 계약대로 지불해야 할 돈을 제때에 결제하지 못하고 일주일 혹은 10여일씩 미룰 때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갈 때마다 빚독촉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띄기도 했으며 철남의 한 해리서대리점 주인은 빚독촉에 못이겨 야밤도주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자 나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내색을 내지 않고 평소대로 열심히 해리서들을 사양하다가 갖고 있던 해리서들을 다 키운 뒤에야 그 산업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키우던 해리서들을 싣고 주인을 찾아갔을 때 아니나다를가 주인은 우리앞에 이미 새로 수개하여 작성한 계약서를 내놓으며 “이제 더는 해리서를 수매할수 없으니 계속 해리서새끼를 가져갈 용호들에서는 자체로 판로망을 찾으라”는것이였다. 나는 이미 미리 짐작했던 일이라 그 주인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헌데 그럼에도 적지 않은 용호들에서는 행여나 하는 기대를 가지거나 시장개척에 자신이 있었던지 해리서사육업을 계속할 타산으로 계약서에 싸인하는것이였다. 이에 나는 그들한테 충고 한마디 할려다가 그만두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알수 없었고 남의 생각을 무시할수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과연 그뒤 약 반년이 지나자 우리한테 해리서 새끼들을 공급하던 그 대리점 주인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재계약에 응했던 용호들 거개가 망해도 아주 재기할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망한 모양이였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나한테 귀뜸해주던 친구의 말이 천만지당한것이였다. (연재 12)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5-01
  • 오묘한 세계 대백과(8)한 방울의 물도 없는 수성
    수성은 태양계 중에서 가장 명실에 부합되지 않는 하나의 행성이다. 그것이 비록 이름은 수성이라고 달았지만 실제상에서는 한방울의 물도 없다. 그리고 액체 상태의 물질은 근본상 수성에 자리잡을 방법이 없는바 이는 무슨 원인일까? 원래 수성은 태양과의 거리가 아주 가깝기에 이글거리는 태양의 복사에 태양을 향한 수성의 한쪽 면은 극도로 뜨거운바 최고 온도가 무려 427도에까지 이른다. 이렇듯 높은 온도속에 돌과 같은 금속마저 용화되기에 물이 있다고 해도 진작 증발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한편 태양을 등진 수성의 다른 한쪽 면은 온도가 특별히 낮아 령하 173이다. 이렇듯 낮은 온도하에서 물의 전부가 얼어붙어 빙산이 됐으므로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수성에는 물이 없을뿐만 아니라 표면층의 공기도 몹시 희소하다. 이런 공기는 태양풍이 몰아오는 원자로 구성되었기에 수성은 몹시 더우며 이런 원자 또한 아주 빨리 태공중에서 흩어져 버린다. 이로 보아 수성이란 얼마나 황량한 성구인가를 알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3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8) 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서남쪽 교외의 베르사유진 의의: 유럽황궁의 전형이며 프랑스 상처역사의 상징임 17세기,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는 당시의 궁전에 대해 불만을 느낀 나머지 더욱 웅장한 궁전을 지을 욕심을 갖고 있었다. 베르사유궁전(凡尔赛宫)은 1661년에 착공하여 1689년에 준공되었는데 지금까지 320 여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이 궁전의 부지 면적은 111만평방미터로 원림면적이 약 100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실내에는 금빛휘황하게 장식했는데 호화롭기가 그지 없다. 1789년 프랑스의 대혁명이 폭발 후 국왕 루이 16세가 이 곳을 떠나면서 베르사유궁전도 그 100년의 궁정사를 결속지었다. 그림과 같은 궁정의 원림 베르사유궁전의 원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원림에 속한다. 궁전원림의 서쪽에는 인공 대운하가 있고 스위스호 등이 있다. 원림내의 도로는 수목, 호수, 정자와 화단, 분수못 등으로 기하적 도형을 이루고 있어 매우 일치하다. 그리고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조각상들은 대부분 신화속의 인물로 형형색색이다. 그 외 두 갈래의 길이가 1000여미터, 넓이가 10미터에 달하는 운하가 원림속을 뚫고 지나 가는데 이 원림은 아주 독특한 자연미를 선보이고 있다. 윤기나고 빛나는 거울청 거울청은 이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국왕의 무도회가 늘 이 곳에서 거행되군 했다. 거울청 내에는 수백개에 달하는 거대한 거울로 17개 면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데 바닥 외 모두 유리와 거울, 그리고 금속제품과 대리석으로 조성되어 곳곳마다 눈부시게 화려하다. 그리고 거울벽의 정면 17개의 유리창으로는 베르사유궁전 뒤 쪽의 화원을 볼 수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몸이 화원속에 묻혀 있는 감을 주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편집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8
  • 해외견문 시리즈 (5) 아프리카 인상기
    “연탄동네”에서 만난 사람들 ■ 김철균 아비쟝에서 출항한 본선 “코리안스타”호는 계속해서 아프리카의카메툰, 가봉, 콩고 등 나라의 항구들에 들려서 며칠씩 머무르군했다. 참, 아프리카에서 고생한 일을 생각하니 진절머리가났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나 싶게 경찰과 도적이 한동아리가 되어훔치고 빼앗고 구걸하는가 하면 그 동네에서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선식점이 거의 없다 싶이 하여 우리 민족이 즐기는 된장, 간장과 김치는 물론 쌀마저도 구할길 없어 보리쌀처럼 길죽한 아프리카의 밭벼쌀(早稻)을 구해서 호구를 한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우선 주방음식을 장만하기가 제일 골치거리였다. 그 중 김치는 우리 민족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부식으로서다른 건 어찌됐더라도 그것만은 꼭 담그어야 했다. 헌데 처음 아프리카에서 김치를 담글 때 올라온 배추와마늘을 보니 기가 막혔다. 글쎄 배추는 그 어디 흙탕물에서 뒹군 것같은 시래기보다도 못한 것이었고 마늘은그 쪽마다 쥐잇빨만큼씩이나 작은 것이어서 그 껍질을 바르기란 여간 신경나는 일이 아니었다. 헌데 그것나마무등 애를 쓴 끝에 겨우 김치를 만들어 식탁에 올렸더니 또 골치 아픈 일이 뒤따랐다. 글쎄 그토록 씻고또 씻고 몇번이나 씻었건만 여기 저기서 바드득 바드득하고 돌씹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놈의 김치야?” “이러다간 며칠 안되어 잇빨이 몽땅 부러져 나가겠는 걸.” 이런 불평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의 얼굴은 확확 달아 오르군했다. 궁리끝에 나는 그 후부터는 포기김치를 담그지 않고 그냥 칼로 썰어서 씻은 뒤 담그었더니 보기는억망이었으나 그런대로 선원들이 돌씹는 일만은 거기서 종적을 감추었다. 그외 아프리카에서 오른 부식들을 보면 포장닭은 털이 듬성듬성그채로였고 야채와 과일류도 잘 정선하지 않아 올린 뒤 언제나 다시 다듬고야 창고에 넣을 수가 있었다. 특히주목되는 것은 농업과학기술과 축산업이 발달하지 못해서인지 배에 오른 파, 배추, 수박, 망고, 바나나등 류들은 그 크기를 말하면 수박은 두근 이상짜리가 별반 없었고 양파와 닭알 등도 작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본선에서는 돼지도 산 것채로 사다가 잡아먹군 했는데 그것들의 크기가 진짜 중국시장의 새끼돼지보다 좀 어떠할가 했다. 그런대로 비게가 적고 맛은 있었지만. 또한 여러번 언급됐지만 아프리카의 날씨란 무덥기가 말이 아니어서주방의 불앞에서 일하는 나의 목과 가슴은 늘 땀 때가 돋아 났으며 갑판과 기관실에서 일하는 선원들도 그 무더위로 하여 점도부동하게 신고를 했다. 그런가 하면 그 무더위로 하여 큰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가봉에 있을 때의 일인데 하루는 내가 한창 주방에서 점심준비를 할 때 불현듯 바로 주방의 지척에서 “꽝!”하는요란한 폭발소리가 나면서 전반 선체가 세차게 흔들렸다 멈췄다. 이에 급기야 밖으로 뛰쳐 나가 봤더니배 2층 난간이 부러지고 갑판에 커다란 구멍이 팡 뚫려져 있었다. 알고본즉 그 때 본선에서는 기관실에 쓰이는 암모니아병을 주방 근처의 벽에 묶어 놓았었는데 그것이 고온에 속의 기체가 팽창하면서 끝내 폭발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인명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선박의 파손 정도는 비교적 엄중했는바 철판 두층이나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그번 폭발사건이 있은 뒤 본선에서는 기관실의 일거리가 많은상황에서 가봉에서 근무하는 한국동아건설의 일군 몇명 모셔다 그 수리임무를 도맡겼다. 그것으로 우리는아프리카에서의 첫 한국인 단체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무료로 배수리를 도움 받은 건 물론 그들을 통해서 적지 않는 된장, 간장과 마늘지, 오이지, 깨잎지들 부식까지 넘겨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이 거처하는 곳으로 다녀오기도 했고 그들과 축구경기도펼쳤는데 비록 1대 6으로 진 경기였지만 마음은 유쾌하기가그기 없었다. 그밖에 가봉 리베비얼항에서 우리는 그곳으로 기름박으러 온본 회사의 탱크선 한척을 발견했는데 가본 결과 거기에 글쎄 우리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부터 포클랜드로 함께 갔고 포클랜드에서도 늘 함께 전재작업을했던 한국선원 안장옥씨를 만나게 됐다. 참 크고도 작은 것이 세상이고 죽지 않으면 만날 수 있는 것이세상이라더니 과연 그랬다. 안장옥씨를 놓고 말하면 문화정도는 국민학교 중퇴생이고 “배놈”경력이 10년도 넘는 선원이었다. 하다 보니 “배놈”생활에 미립이 틀만치창녀들을 다스려본 사내로서 남녀 사이의 육담을 엮을라 치면 청산유슈였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중국선원들이그한테 “좆박사”라는 별명을 달아 주었는데 그것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선원들의 말에 따르면안장옥씨의 섹스솜씨는 그들중에서도 으뜸인바 한번은 부산의 완월동에서 남녀 두쌍이 함께 한방에 들었는데 그가 얼마나 힘차고도 끈질기게 방아를 찧어대는지아가씨가 너무 흥분하여 나중에는 자기를 그채로 죽려 달라고 소리를 질러대면서 사내의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대로 잡아 뜯더라는 것이었다. 한편 그는 작업시에도 늘 우스개를 잘하여 피로한 선원들의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야참, 이 아저씨깡깡 말랐지만 연장만은 큼직하게 잘 키웠겠네. 워낙 뚱뚱한 사내일수록 그것이 작고 마른 사내일수록 그것이큰 법이라니깐.” “왜 여자들을 처녀, 아주머니, 할머니 이렇게 나누는지 아세요? 처음 해본다고 처녀이고 아주 많이하기에 아주머니이며 할만치 다 했기에 할머니라고들 한대요.” “우리 나라가 36년간이나일본 쪽바리들한테 당해서 전반 대한민국에 일본의 태양기가 휘날렸거든. 그래서 나는 일본년들을 만날 적마다그 년들의 사타구니에 태극기를 꽃아 놓았다니까요.” “깜둥이년들과 놀아대는게 왜 신나는지 아세요? 해빛에 짙게 타서 보기 흉하지만 속은 맞춤하게 익었기에 잘 삶아놓은 돼지고기처럼 맛이 구수하다구요.” 들어보면 그 모두가 얼토당토치도 않는 지껄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힘겨울 때 이런 우스개소리를 듣는다는 건 일종 위안이고 기분좋은 일이였으며 안장옥씨 역시 힘겨울때마다 일부러 그런 우스개를 피우는 모양이였다. 참 “배놈” 생활10여년에 집 한채 마련하지 못했다는 안씨, 하지만 마음씨만은 무척 좋아 술도 곧 잘 사고작업시에도 남을 잘 도와주군 했다. 그래서 술군과 오입쟁이 속이 독한 놈 없다고들 했는가? 하긴 마음씨 고와 돈과 연장까지 여자들한테 잘 주니 집 한채 마련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다음으로 아프리카에서 우리가 만난 이들로는 우리 나라의 상해에서간 어선의 선원들이었는데 그들은 80톤짜리 어선 두척을 몰고 중국을 떠나 카메룬의 해상에까지 와서 조업하면서만선만 되면 입항하군 했던 것이다. 글쎄 그 100톤도 안되는배를 몰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지나 대서양으로 들어오다니 그들이야말로 죽음이란 뭔지 모르는 모험가들이었다. 또한그들의 생활환경을 보면 한방에 10여명씩이나 들어있었고 작업조건도 본선에 비하면 억수로 차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를 만나자 그렇게도 반가와하며 선내식당에 청해 한끼 잘 대접하면서 한국선박에 승선하여 얼마나고생하는가고 위안해 주었고 돌아올 때는 또한 목숨을 걸고 잡은 참치(일본어로 “마구로”라고 하는 물고기인데매우 귀함)4마리나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외 우리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이들로는 아미잔에서 선식점을경영하는 성이 리씨라는 한국인 일가였고 콩고에서 “북경술집”을 경영하는 중국인일가 등등이였다. 와리에서 당한 봉변 참, 아프리카에서고생한 일을 생각하니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본선이 아프리카를 떠나 라스팔마스에 오자 나는 다음번의스켓쥴만은 제발 남미나 동남아 더 좋기는 한국이나 일본쪽으로 정해줍시사 하고 마음속으로 수십번이나 기도를 드렸다. 헌데 일이 탈리느라고 그러는지 아니면 내가 드린 기도가 하느님을감동시키지 못해서인지 한국 본부로부터 날아온 텔렉스에 따르면 다음 항차가 또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라는 것이었다.에이쿠, 또 아프리카, 선원들 모두가 질려버렸다. 뿐만 아니라 본선은 령에 의하여 몇년전 본선에서 잡부로 근무한 적 있는 흑인선원 죤과 죠셉이란 두 녀석까지편승시키게 했다. 배가 라스팔마스항을 떠나자 여태껏 고분고분하던 두 흑인편승자가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 이유인즉 이전에 본선에 승선하여 일한 보수로 수십박스(BAX)에 달하는 냉동물고기를 가지기로 했는데 그것을 받지 못했다면서 전임 선장의 싸인까지 내보이며 이제 나이지리아에가면 그 걸 꼭 받아내겠다는 것이였다. 이에 현임선장이 그것이 자기와는 상광없다고 잡아떼자 그들은 그것을트집 잡으며 물고 늘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다. 특히 죤이란 녀석은 여러해동안 트롤선, 참치선, 새우선 등 한국선박에만 굴러가니며 일하다 보니 한국말은청산유수였다. 헌데 일은 묘하게도 번져져 선장방에서 두 흑인편승자를 처리할데 대해 선장, 기관장, 1기사, 1항사, 통신장이 토의한 것을 그가 엿들었던 것이다. 그 토의내용인즉 항행도중 라스팔마스로 가는 본회사의 다른선박과 접선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그 두 녀석을 강박적으로 전선(转船)시켜 라스팔마스로 되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헌데 그 비밀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죤의 귀에 직접 흘러들게 되었으니 난리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흑인편승자는 미치광이처럼 날뛰였다. 그놈들은 칼이고 몽둥이고손에 쥐우는대로 쥐고 흔들어대며 본선선원들을 위협했다. 그럼에도 그 숱한 한국선원들은 그 두놈의 행위를제지시킬 수가 없었다. 뒤에서는 “그저 제놈들을 바 콱 처넣었으면”하고 이를 갈면서도 그 놈들앞에서는그들이 도리어 슬금슬금 피하였고 그 두놈이 고분고분 할 때 제일 우쭐렁거리며 큰 소리 치던 사람 또한 겁은 제일 많았다. 그러다 보니 해상에서 본회사의 “프리오라스팔마스”호와 접선했을 때도 그놈들을 넘겨줄 수가 없었다. 글쎄 그 놈들의 위엄에 선장부터 쩔쩔 매고서야 어떻게 일을 성사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프리오라스팔마스”호의 선원들은 깜둥이들이 제멋대로 설치는 본선을 보며 몹시 안타깝다고 하는 것이였다. 하긴 두 흑인녀석은 유독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들과는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도 얽매인 몸이라 평소에 그들을 잘 대해줬던 까닭이라 할까? 여하튼“죄는 지은데로 간다”는 속담이 그런데 없었다. 본선이 나이지리아의 와리항에 입항하자 시내에 집까지 있는그놈들의 기염은 하늘을 찌를듯 했다. 헌데 어창에 쌔고 버린 것이 물고기였고 또한 진작 그들한테 줘야할 것이 번연했음에도 선장은 대체 무슨 궁리를 하는지 질질 끌며 주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에 냉동기를쉬우기 위해 수백박스씩 되는 포장물고기를 바다에 처넣는 걸 보면 그들이 요구하는 수자는 새발의 피나 다름 없겠는데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것이 아닌가. 터질 일은 끝내 도래하고야 말았다. 하루는 주방에서 점심밥을 짓던 중 밖에서 하도 법석이며 떠들어대기에 브릿치쪽으로 올라가 봤더니 창피스럽기로 글쎄 선장이 브릿치안의 쇠기둥에 꽁꽁 묶이워 있었고 권총을 빼든 웬 흑인사나이 한명이 제복차림을하고는 버티고 서서 곁사람은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한편 갑판을 내려다보니 몇몇 깜둥이들이 갑판장한테서어창열쇠를 빼앗아서는 어창뚜껑을 활짝 열고 물고기 박스를 날라내고 있었는데 갑판장을 강박하여 크레인까지 돌리게 했다. 완전히 무법천지였다. 한국선원들은 물론 대리점의 에이젠트와 근무경찰마저도 속수무책으로눈을 펀히 뜬채 보고만 있을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해군제복을 입고 총을 빼든 사나인즉 편승자였던죤의 형님이었는데 해군함대의 함장이었으며 그의 세력이 어찌나 센지 와리시내에서 그라 하면 흑인들 모두가 설설 긴다고 했다. 다쳐도 큰 범을 다쳐놓은 셈이었다. 일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위낙 도적놈들이 욱실거리는 와리였지만 이전에는 죤네형제의 세력이 본선을 보호해 주었기에 부두에 아무리 정박해있어도 별로 물건이 잃어지는 일이 없었다 했다. 하지만 그 사달이 생긴 후부터는 무엇이나 달랐다. 죤네형제와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점점 격해지자 따라서 점점 물건이 연속 부절히 잃어지기 시작했다. 전날에 TV와 비디오가 잃어졌는가 하면 다음날에는 호사줄과 단정뽀트의 엔징까지 잃어졌으며 또 그 이튿날에는 주방의 창밖에있는 프로팬 가스통까지 들어갔다. 주방에 전기밥솥과 곤로까지 있었으니 말이지 그런 시설이 없는 선박같으면밥도 지어먹지 못할 번 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야지 사람이 불안해서 일이손에 잡히지 않았고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어쩐지 더 큰 봉변을 당할 것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그때 본선은 와리항에서 그리 멀지 않는 위스키포란 곳에서 닻을 내리고 기름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라스팔마스같으면이틀이면 만재할 수 있는 것을 열흘이 넘도록 절반도 채울 수가 없었다. 그 원인은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름빠지(전문 기름만 싣고다니는 작은 배)는 주로 밤에만 오군 했는데 방정맞게도 그번 항차만은 왜서인지 모든 일이 약속대로 이행되지 않아 갑판부 선원들은밤마다 그 기름빠찌를 기다리다가 잠자리에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그렇게나마 기름양을 거의 채우던 어느날, 갑자기 죤네 형제가 한무리의 깜둥이들을 데리고 또 본선에 들이 닥쳤다. 이유는뻔했다. 그들이 우리 회사의 비밀을 손금보듯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본선에서 받는 기름은 유전의 주인과 우리의 선주가 몰래 짜고 들어 그 생산양 및 수출양을 속이고 팔고 사는 즉 나라의 세금납부수속도 없는 국제적밀수였다. 그러니 권세가 큰 어른들을 끼지 않고서는 벌일 엄두도 낼 수 없는 도박이었다. 헌데 죤네 형제의 세력도 그보다 못지 않았기에 그 낌새를 알아차렸던 것이다.그러니 그 놈들이 그 약점을 틀어쥐고 본선에 협박을 들이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들은 선박에오르자 마자 비법적으로 퍼올린 기름을 몽땅 몰수할텐데 자기들이 곧바로 그것을 인수한다는 것이었다. 그기름을 그 자리에서 몰수당한다는 것은 회사를 놓고볼 때 그 손실정도를 한두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와리근처의 해상유전의 기름은 근본 잡질이 섞이지 않은 것으로 라스팔마스의 기름보다 질이 좋아 그것을 작업선에 공급하면 기본상 엔징이 꺼지는 사고가없었고 또한 값도 싸서 일단 그것을 받아서 작업선에 되넘겨 팔면 우리의 선주는 대단히 폭리를 얻는 셈이었다. 하지만그 통에 녹아나는 것은 되려 본선의 선장과 선원들뿐이었다. 죤네형제가 야단을 치는 그 복새판에 마침 회사본부로부터 텔렉스가날아왔다. 내용인즉 죤네형제를 잘 구슬려서 보낸 후 즉각 출항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장은 대뜸 큰 보따리를 벗어놓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뒤이어선장은 죤네 형제한테 담배와 위스키, 닭고기와 물고기 등 따위를 주라고 지시하고는 이미 회사에 다 연락했으니래일 다시 와보라고 죤네 형제를 구슬렸다. 이에 죤네형제 역시 물고기를 뺏아내려고 벌인 수작이었던만큼더는 트집을 잡지 않고 눈을 희번떡거리며 으름장을 놓고는 물러갔다. 또한 기름을 도로 퍼준대도 기름빠찌가없는 그들이 갑자기 어디에 싣고 가겠는가. 그날 저녁, 밤장막이무겁게 드리우자 본선은 지꿎게도 우리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던 와리항을 떠나 라스팔마스를 향해 선수를 돌렸다. 하지만 시름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혹시나 죤네 형제가 쾌속정을 타고 뒤쫓아오지 않는가 해서 선수와 선미에 선원들을 대기시켜 놓고는 몽둥이나 쇠망치등을 나누어주었다. 일단 그들이 쫓아와 선박에 오르려 할 때면 사정없이 족치라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 사색해볼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 과연 우리의 약점을 찾아쥐고협박하며 을러메고 빼앗는 죤네 형제가 무지하고 야만스러운지, 아니면 그 녀석들을 구슬려서라도 밀수기름을싣고 도망가는 우리가 인색하고도 탐욕스러웠던지?... 그렇게 황망히 도망치기에 급하다 보니 브릿치에서 항행지휘를하는 선장 역시 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와리항에서 바다까지 나오자면 강을 따라 몇시간 내려와야 했는데강과 바다 사이 합수목 어구에는 양쪽으로부터 쌓은 방파제가 있었고 그 두 방파제 사이 즉 물이 제일 깊은 곳으로 배가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으며그 방파제 두 끝에는 위낙 등대가 있었다. 헌데 그 등대의 전등이 고장났는데도 게으른 흑인들이 수려할념을 하지 않아 있으나 마나 했다. 그렇게 등대가 제구실을 못하는데다 밤이 되자 바다의 밀물이 강에까지올리 뻗치여 낮에나 겨우 보이던 방파제까지 잠그어놓았다. 어두운 밤의 항행, 보이지 않는 등대불, 거기에 제 정신이 아닌 선장의 지휘, 배는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원 배길을 벗어나 방파제위에 매달렸다. 그러자 160미터가 되는 그 육중한 선체도 기능을 잃고 파도가 치는대로 기우뚱거렸다.선내는 삽시에 수라장이 되었고 바빠 맞은 것은 선장과 1항사였다. 하지만 엔징을 아무리 돌려며 후퇴하려 해도 그 힘으로는 방파제에 걸린 선체를 조금도 뒤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럴 즈음 그 곳을 지나던 스페인 선박 한척이 마침 본선을 발견하고는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스페인 선박이 본선 선미에 두줄로 와이야샤스를 건 다음, 두 선박의엔징이 동시에 힘을 쓰며 약 반시간 가량 모지름을 써서야 본선은 간신히 방파제에서 미끄러져 내려갈 수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선박밑창에 구멍이 뚫리는 수밖에 없었다. 치명적인 손상은 아니나 구멍난 곳은 다름 아닌 기름탱크가 있는 곳 밑이었는데 이튿날에 볼라니 배가 지난 뒤의바다에는 기름이 한줄로 덮이며 본선을 따라오는 것이었다. 다행이도 기름탱크안에 밀봉한 칸들이 많았기에대부분의 기름은 살릴 수가 있었으며 선장 역시 본부에 답복할 이유는 충분했다. 에필로그 아프리카, 오늘도그 때 아프리카에서 지내던 자초지종을 생각하노라면 소름이 끼치며 진짜 어떻게 지냈던가 싶어진다. 유럽과미주의 많은 선진국들에서 바다밑과 우주에까지 탐구와 개발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오늘, 아프리카는 왜아직도 그 모양, 그 꼬락서니인지? 과연 그네들한테는 언제가야 현대문명과 첨단과학기술이 보급될는지? 그 중 우리가 돌아본 아프리카에서 가봉과 남아프리카공화국등 나라는 그래도 백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사회경제와 그 문명정도가 기타 나라들과는 앞섰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곳 흑인들 역시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습관화된 노예근성과 훔치고 구걸하는 버릇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그외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는 해상에 새우, 게, 갈치 등 맛좋은 물고기들이 깔려 있음에도 불구, 자기네는 잡으려하지 않고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빌어먹고 있었다. 특히 보편적으로 아프리카를 보면 남자들이 빈둥거리며놀고 아낙네들이 야생과일을 따거나 매생이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본 와리 시내에서도 아낙네들이 아이를 업은 채 보짐을이고 다니는 것이 수없이 많았다. 또한 해상유전의 그 많은 시추탑가운데서 나이지리아 자국의 것이 별반없는가 하면 석유자원이 풍부한 반면에 와리시의 많은 기동차량들은 기름이 없어 달리지 못한다 했다. 나이지리아처럼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이러할진대 자원이 결핍하고 불모의 땅인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 우간다 같은 나라들은더구나 어떻겠는가?! 가보지는 못했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남한테만굽어들고 의거해서는 나라가 부강하고 국민들이 잘 살 수가 없는 법이다. 남이란 언제든지 크게 부려먹고적게 주려 하기 마련이다. 마치 본선에서 흑인들한테 밥이나, 기껏해고기박스나 몇개씩 주고 얼려서 일을 시키듯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홀로서기에 열중하고 나라는 자립, 자존, 자강에 기초하여 세워져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 못한 곳. 게으르고나태하고 빈궁한 아프리카 - “연탄동네”여 각성하라!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8
  • [단독]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11)
    ■ 허길성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서 근무하면서부터 나는 점차 나의 가치에 대하여 스스로 다시 평가해보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세우면서 나는 방송중계소의 설계로부터 설비구입 그리고 건물구축과 기계가설에 이르기까지 몽땅 참여해야만 했고 나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만큼 당시 이 방면으로 전공한 인재는 너무나도 적었다. 그렇게 일하면서 볼라니 내가 연변뻐스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한 인생이 아깝고도 허무하기만 했다. 이는 이내 인생의 랑비일뿐만 아니라 전반 사회적인 손실이기도 했다. 이는 결코 용접공이나 기타 공장로동자들의 직종을 무시하는것은 아니였다. 그저 비뚤어진 세상에서 많은 지식을 소유해가지고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직종을 선택하지 못하고 용접공으로 썩은 몇년간의 인생이 억울해서였다. 한편 자신이 하고 싶고 또 잘할수 있는 직종이 차례졌다고 해서 고생이 없은것은 아니였다. 특히 고생스러운것은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잦은 출장이였고 그 다음에는 일군을 많았지만 인재는 너무나도 적어 거의 모든 시스템에 대해 모두 내가 신경써야 하는 바로 그것이였다. 그중 출장을 자주 하다 보면 외출하는 본인이 고생스러운건 물론 남아있는 가정성원들의 고생도 여간치 않았다. 당시는 아파트가 많지 못하고 많은 가정들이 단층집에서 살다 보니 필경 남정들이 할일이 따로 있었다. 례하면 석탄을 사드리고 그것을 헛간에 퍼들이고 부엌에 불을 지피고 석탄재를 파내고 … 그외 온돌을 고치고 문풍질을 하고 하는 등으로 여하튼 녀성들이 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으며 자식들이 성장중인 우리 가정을 놓고 볼 때 더욱 그랬다. 그뿐이 아니였다. 매번 나의 출장때마다 자녀 둘의 뒤바라지는 안해 혼자서 전담당했다. 그리고 출장때마다 출장비와 실제로 쓴 돈이 맞아떨어지지 않았으며 모자란 부분은로임을 발급할 때 재무과에서 잘라내다보니 로임봉투가 항상 가벼워져 안해한테 내놓기가 송구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찮아도 결혼뒤 얼마 안되여 군복을 벗기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안해를 싫컷 고생시켰는데 명예를 회복한 뒤에도 여전히 안해를 계속 고생시키다니 나같은 사람은 진짜 가정생활에서는 빵점이 아닌가 싶어지기도 했다. 한편 나는 단위의 일만은 열심히 했다. 사람이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노라면 그만큼 적극성이 커지는 모양이였다. 당년에 뻐스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할 때는 하루가 지루하고도 고달프게만 느껴지던것이 연길시라지오방송국 방송중계소에 출근하면서부터는 온몸에 새힘이 솟구치면서 늘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48시간으로 되지 않는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그만큼 보람있고도 원하는 일을 하노라니 세월은 빨리도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의 가정도 자녀 2명이 모두 성장하면서 가정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며 나 자신도 어느덧 귀밑머리가 적지 않게 희여가는 중로년이 됐다. 이렇게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또한 단위에도 기술분야의 일군들이 많이 보강되였기에 나는 스스로 은퇴준비를 하게 되였다. …… 그러던 1995년초의 어느날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그때는 우리 단위가 이미 연길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으로 됐음) 국장으로부터 자기의 사무실로 왔다가라는 호출이 왔다. 내가 국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상상외로 반가워하며 악수까지 청하더니 쏘파를 가르키며 앉으라고 해다. 뭔가 눈가에 웃음부터 짓는 품이 례사롭지를 아니했다. 그는 한참 본 화제와는 달리 나의 개인생활과 관련해 이것저것 묻더니 드디여 기침을 깇으며 본화제로 넘어갔다. “허서기를 오라고 한것은 다름 아니라 전번에 허서기가 퇴직신청을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퇴직신청이 수락되지 않았습니다. 딱히 퇴직년령이 되지 않아서만은 아닙니다. 우리 단위에서 허서기는 아직도 가치가 큰 일군입니다. 내놓기 아깝다 이 말입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기실 우리 국에서 올해에 유선TV부문을 새로 내오게 되는데 아마도 적합한 책임자가 없어 또 허서기가 그 부문을 책임지고 수고해야 할것 같습니다. 어떻게 젊은 기술일군들을 거느리고 몇년간만 더 일해주십시오.” 국장의 제의를 거절할수가 없었다. 이전처럼 그냥 출근하라는것도 아니고 새로운 일거리를 맡아달라는것을 거절한다는것은 어딘가 비겁한 노릇같았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가치가 크다는 말은 나를 인정하는것으로 들렸으며 사실 그때까지 나 역시 얼마든지 일할수 있는 년령대인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국장의 제의를 받아들이였다. 4 유선TV부문을 새롭게 세우는것 또한 라지오방송중계소를 세우는것처럼 출장이 잦을수밖에 없었다. 그중 그래도 제일 잦게 다닌 도시는 북경이였다. 북경은 우리 나라 수도이기도 했지만 유선TV보급이 가장 잘된 도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도시들의 유선TV보급망을 종합분석해본 결과 북경시를 모델로 삼고 학습하면서그 경험을 연길시에도 적용시키기로 했다. 한편 북경출장이 있을 때마다 나는 외교부에서 관원으로 근무하던 동창생친구ㅡ 량희원이를 머리에 떠올리군 했다. 그만큼 좋은 친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한테로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더는 그한테 페를 끼칠수가 없었던것이다. 하긴 내가 그한테로 이곳의 특산물같은것을 선물로 가져갈수도 있었지만 내가 그만큼 주면 그는 그 몇배로 나한테 안겨줄 그런 후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그한테로 찾아가 페를 끼치는 사람이 나 한명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찾아갈수가 없었다. 그외 그가 그때까지도 외교부에서 근무하겠는가 하는것도 미지수였다. 연길시의 유선TV보급망 구축공사는 두개의 구역으로 나뉘여 진행되였다. 그것은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안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유선TV방송은 유료서비스 시스템이였기에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도 추진하는것이였으며 우리는 자체의 욕심만 부릴수가 없어 주에 부분적 지역을 양도해야 했다. 그것을 협상할 초기 량측은 약간의 분규가 있은것도 사실이였다. 서로 지역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량측이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각측의 실제적 경제리득과 직접 관계되는 사항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협상끝에 결국 연길시에서 한발 더 양보하기로했다.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은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의 상급부문이자 모두 서로 익숙한 얼굴들이라 어느 정도 협상이 잘 풀린 모양이였다. 결국 연길시의 애단로 북측의 지역은 주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고 애단로 남측의 모든 지역을 시라지오TV방송사업국에서 맡게 되는것으로 아퀴를 지었다. 연길시에 유선TV보급망설치공사가 시작되자 계획과는 달리 진척이 늦어졌다. 하긴 당시 국에서는 두개 팀으로 조직되여 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도합 20여명의 일군중에서 이 시설공사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전문일군은 한명도 없었다. 당시 내가 총지휘와 총기술감독을 맡았지만 나 역시 이 시설에 대해 계통적으로 배우지 못했으며 외지견학을 통해 좀 상식적으로 알고있을뿐이였다. 모든것은 공사를 진행하는 한편 배우고 익히고 해야 했다. 당시 우리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에서 맡은 유선TV보급망 설치범위는 우에서 언급하다싶이 연길시 애단로 이남으로 도합 5만여세대가 되는 가정주택들이 있였는데 하루에 많이 설치해야 40-50세대 정도였다. 왜냐하면 사람이 빈몸으로 층계를 오르내리는것도 아니였고 또한 어떤 가정은 집에 사람이 없어 들어갈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한집 건너뛰여 그 다음의 집에 설치할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아파트 한개 동이면 서로 련결이 돼야 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집과 집 사이 그리고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신호가 합격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신호를 확장하는 부분품을 가설해야 하기에 무작정 밀고 나가는 공사도 아니였다. 한편 상급에서는 이를 일종 거대한 문화공정으로 간주하고 틀어쥐였으며 몇년간의 시일을 정하고는 기한내에 반드시 완수하여 연길시민들의 문화생활을 보다 풍부히 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조하였다. 우리는 기한내에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휴식일이란 별로 없이 공사를 다그쳤으며 때로는 밤대거리를 할 때도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룡정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와 화룡시라지오TV방송국 시공대의 협조에 의해 약 3년간의 악전고투끝에 1998년 연길시안의 유선TV보급망의 가설임무를 성과적으로 완수하였다. 그때로부터 연길시민들은 바깥 안테나가 없이 집안에 앉아 수십개 채널의 국내TV프로를 시청할수 있게 되였다. 이는 연길라지오TV방송사상의 일대 변혁사로 하나의 리정비로 되기도 했다. 한편 연길시유선TV보급망의 서비스시스템이 가동되고 한동안의 시운행을 거쳐 정상화가 되자 나는 재차 단위 인사과에 퇴직신청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것이 수락되리라 믿어마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때는 이미 나의 나이도 61세라 정기퇴직년령이 다된 셈이였다. 그리고 아무리 올리 훓고 내리훓고 해도 더는 내가 책임지고 할만한 일은 있을것 같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국장은 이전에 나의 첫 퇴직신청을 수락하지 않던 때와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로 나는 맞아주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단위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게 되는데 한번만 더 일해달라고 설득하는것이였다. 국장 역시 자기 개인을 위한것이 아니고 전반 국의 리익을 위해 나한테 재청을 드는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마음이 약한 나는 더 이상 국장과 따지지 못하고 그저 “이번만입니다”라고 력점을 찍고 말았다. 단위의 종업원가족 아파트를 짓는 동안 나는 현장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모든 질관리도 책임졌다. 왜냐하면 종업원가족 아파트였기에 질관리를 강화하지 않을수 없었다. 례하면 구입해들여오는 벽돌의 질이라든가 또는 모래와 세멘트를 섞는 비례 그리고 건물에 들어가는 철근의 비례 등에 대해 철저히 감독해야 했다. 약 2년뒤 종업원가족 아파트가 완공되자 국에서 더는 나란 사람에 대한 리용가치가 없어서일가 아니면 새로운 건설항목이 없어서일가 여하튼 연길시라지오TV방송국 종업원가족 아파트건설을 마지막으로 나는 비로소 퇴직하게 됐으며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2000년 8월이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4-26
  • 해외견문 시리즈 (5) 아프리카 인상기
    <첫부분>1992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내가 승선한 선박 “코리안스타”호는 “연탄동네”로 불리우는 아프리카7개국에 대한 항행코스를 밟게 되었다. 스켓쥴은 모로코,모리타니, 코트디바르(상아해안), 카메룬, 가봉, 나이지리아이렇게 쭉 잡혀 있었는데 남미주의 포클랜드 해상에서 싣고온 냉동 물고기들을 이런 나라들에서 하역하기로 되어 있었다. 본선이 스페인의 라스팔마스항을 출항하자 선내 방송은 다음과같은 유의사항들을 전달하였다. “선내에 알려드리겠습니다.선내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싶이 본선이 향하는 아프리카입니다. 각 부서들마다 자기의 관할구역 내의 물건들을 잘 간수하기 바랍니다. 그외 매 선원마다 해상경찰 및 세무관원들과의 충돌을 될수록 피면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거듭 말씀 드리겠습니다…” 라스팔마스에서부터 아프리카 모로코까지의 항행시간은 하루밖에걸리지 않는다 했다. 선내는 삽시에 분주해졌다. 뎃기(갑판)에서는 사처에 널려있는 각종 공구들과 바줄, 심지어 도람통까지 다 창고에 챙겨 넣고는 큼직한 자물통을 잠그었으며 엔징룸(기관실)에서는 출입문 하나만 남겨 놓고는 다른 문들은 몽땅 봉해버리는 것이었다. 그외 내가 근무하는 주방은 일거리가 곱절 많았다. 당시 주방에는 쌀, 기름, 양념과 그릇 등이 가득했는데 예전에는 그 어떠 나라와 항구에 들어갔어도 시시껄렁한 그것들이 잃어질까봐 신경써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헌데 아프리카 사정만은 달랐다. 일단아프리카만 들어서면 정부관원으로부터 빈민굴의 아낙네들에 이르기까지 줄을 쳐서 선박에 오르군 했는데 그네들은 눈에 보이는 물건만 있으면 그것이 자기들한테쓸모가 있건 없건 간에 훔친다는 것이었다. 옷가지, 야채와쌀, 그릇은 물론 자기들이 쓸 줄도 모르는 숟가락, 저가락과먹지도 않는 고추가루까지 닥치는대로 훔치다기에 모든 것을 잘 보관하고 지켜야 했다. 주방장인 나와 싸롱뽀이(주방조리수)는 주방에서 임시로 쓰는 약간의 부식과 그릇만 남겨 놓고는다 창고안에 집어 넣었으며 하루 세끼 식사시간 외에는 주방과 식당에 자물통을 꽁꽁 잠그기로 했다. 이렇듯 한심한 아프리카였기에 한국선원들은 흑인들의 속과 몸뚱아리가모두 연탄처럼 검다 해서 아프리카 동네를 “연탄동네”라고 불렀다. 모로코에서의 첫 인상 본선이 모로코의 시디스얼크항에 입항하자 확실히 다른 세상이라는감이 확 들었다. 부두에서 작업하는 인부들은 일색으로 새까만 흑인들이었는데 어쩐지 그곳 하늘까지도 거멓고흐리터분해 보였다. 입항작업이 완료되자 아니나 다를가 숱한 흑인들이 본선에 올랐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바람으로 “마이프랜드(나의 친구)”라고 부르면서 시가렛(담배)부터빌었다. 그들한테 담배 한가치씩 나누어 주노라니 말보로 담배 한곽이 삽시에 거덜이 났다. 그리고 담배 한가치라도 주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베리굿, 베리굿”하다가도 일단 주지 않으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흉한 상팜대기를 드러내 보이군 했다. 나는 그런 새까만인종들과 처음 상종하는지라 어쩐지 슬그머니 무서워났다. 그래서 그네들을 달래느라고 담배와 먹을 것을나누어주었지만 우르르 몰켜드는 그들의 수요를 도무지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가진 놈은 그래도 인사나마하고 가지만 못가진 놈은 그 모두가 눈알을 굴리면서 주먹까지 내흔들어 보이는것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통신장 이덕수씨가 다가오더니 “이 깜둥이 씨팔놈들아, 턱도 없이 지껄이지 말고 썩썩 물러가라”하고 꽥꽥소리치며 그것들을 쫓아 버리고는 나한테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주방장 김형은 잘 몰라요.저 깜둥이 놈들을 불쌍히 여길 필요는 털끝만치도 없다구요. 불쌍하다고 아무리 줘봤자 거것들은그걸 모르는 놈들이고 아무리 떼부자라 해도 저 놈들을 구제하노라면 자신이 망해요. 알겠습니까?”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였다. 후일 볼라니 나한테서 빵이나 얻어먹은 놈들도 그 때뿐이지 이튿날이면 그 상이 장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밥이나 음식찌꺼기 같은것을 버리면 버렸지 깜둥이들한테는 주지 않기로 작심했다. 그래서 매일 세끼의 식사가 끝나면 나와 싸롱뽀이는 음식 찌꺼기들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바다에 처넣어 고기먹이로되게 했다. 헌데 그것도 깜둥이 놈들이 눈치챘다. 그들은곧잘 바다에 뛰어 들어 그것을 건져가군 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내가 뭔가 바다물에 던지는 걸 본 깜둥이들은몇놈이나 물에 뛰어들어 서로 헤염치면서 그걸 빼앗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누구도 그걸 챙기지못하고 산산히 흩어져 버리자 자기네끼리 싸우더니 나중에는 육지에까지 올라 치고 박고 했다. 퉁퉁 붓고얻어터지고 하면서 말이다. 참, 준다는 것에 인색한 내가나쁜 인간인지? 하지만 고까짓남이 던지는 먹을 것을 두고 싸우거나 기회를 보아 훔치는 그만한 노력이면 일거리나 찾아하면 더 나을 것이 아닌가?… 한편 입항한 그날밤, 우리는각각 택시에 나누어 앉아 시내로 향했다. “연탄동네”라고는 하나 시내는 부두와는 달리 퍼그나 깨끗했다. 야자수들이 길옆에 줄지어 늘어섰고 우리 나라 신강에서나 볼 수 있는 아랍식 건물들이 잘 조화된 정원과 함께들어섰는데 고층건물은 별반 없고 그 거개가 3층 좌우로 무척 아담져 보였다. 그리고 도로 양켠에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음식을 차려놓은 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정경을 가끔씩 볼 수있었는데 시내에 들어 갈수록 아랍인종 같기도 하고 스페인 인종 같기도 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다. 아무리흑인들이 모여사는 “연탄동네”인 아프리카라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로코, 이집트, 리비아, 알제리등 부분적 나라들은 확실히 백인 인종비례가 적지 않음이 분명했다. 달리던 택시는 어느 한 차이나레스토랑(중국식당)앞에서 칙ㅡ하고 멈춰섰는데 이는 대리점의 에이젠트가 미리예약해놓은 것이었다. 들어거며 볼라니 이상한 것은 출입문에서 경비를 서는 수위가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고는 우리가 흑인이 아님을 확인하고야 출입을 허락하는 것이었다. 통신장 이덕수씨의 설명에 따르면 아프리카의많은 고급요리청들에서는 고위급 관원외의 지방인들은 언행이 난잡하기에 될수록 그들의 출입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매출을올리기는커녕 뭐 이미지가 손상 받는다나? 순간 나의 머리속에는1920년대 상해의 어느 한 공원 문어구에 “중국사람과 개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패쪽을 걸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참, 흑인들이 모여사는 제나라 땅에서 이런 식당에도 출입할 수 없다니. 이건 순전히 스스로 자기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진작 대기하고 있던 접대원 아가씨들이 반겨맞아주는것이었다. 말이 중국인 요리청이지 주인외 요리사와 시중군, 접대원은몽땅 흑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새우튀김, 튀긴 물만두, 닭고기완자 등 음식들은 진짜 중식으로서 생각과는 달리 그 맛이 별맛이었다. 중국인 요리청에서 한끼 만포식을 하고 나온 우리는 그 곳에서멀지 않는 디스코클럽으로 향했다. 디스코클럽에서도 흑인남자들을 들여놓지 않기는 마찬가지었다. 입장권은 미화 20불, 꽤비싸다는 감이 들었고 그 입장권 외에도 경비원들은 담배나 선글라스 등을 줘야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때는 한창 한밤중이라 클럽안은 술 마시거나 춤을 춰대는 남녀들로북적됐다. 그럼에도 우리 코리아맨들이 들어서자 아가씨들이 확 몰켜 들었다. 하긴 유럽이나 북미의 선진국들에 가면 반야만인 취급을 받는 한국인들이었건만 동남아나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 등 곳에서는 꽤나 인기가 높은 한국선원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밖에 모로코도 원래는 이집트이나 리비아처럼 이슬람교를 신앙하는나라로서 술집과 창녀가 범람하는 것을 엄하게 단속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헌데 나라경제가 계속부진상태에 있는데다 많은 소녀들이 스페인이나 프랑스쪽으로 몸팔러 가는 통에 남녀사이의 성비율이 크게 파손되어 혼란을 조성하고 있기에 부득불 나라경제와무작정한 소녀출국을 제한하기 위해서도 술집과 창녀가 들어서는 것을 방관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그렇다고 다른 나라들처럼 드러내놓고 아가씨를 꼬시는 것까지는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가씨와 오입 한번 하자면 반드시 경찰한테와 아가씨들의보스한테 돈을 찔러줘야 했는데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찰과 범죄자는 한 형제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가 그날밤 많은 선원들이 아가씨 보스한테 돈을찔러준 뒤 경찰과 아가씨 한명씩 차고서 호텔행을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볼라니 그 모두가 안전한 몸으로 귀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일행 거의 모두가 하루밤 사이에 적으만치 200불 이상씩 썼다고 하니 무슨 놈의 오입값 그다지도 비싸단 말인가! 참좆나게 번 돈 좇나게 쓴다더니 아깝지들 않는 모양이지? 좀 참으면 될 걸 갖고서. 도적개 코가 센 나라 모로코에서 출발한 본선은 선수를 모리타니쪽으로 돌렸다. 모리타니ㅡ 본선이 그 나라 해안쪽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저 멀리 사하라사막으로부터 불어오는 모래바람(일명 황사)으로 하여 그 곳의 하늘은 새뽀얗고, 깨끗하던 갑판과 선교는 뽀얀 먼지로 한벌 뒤덮였다. 모리타니 노와디브항에 입항하니 역시 아프리카 땅인지라 대체상모로코와 엇비슷했지만 험한 쪽으로 말하면 다른 점도 많았다. 우선 그 나라의 부두를 놓고 말하면 위생환경이불결하기가 말이 아니어서 입항한 그 시각부터 숱한 쉬파리 떼들이 선박의 주방과 식당에 몰켜들었고 밤만 되면 쥐들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기여 드는것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미리 준비했던 특별약으로 연기를 피워야 했고 주방과 식당 및 부식창고의곳곳에 쥐약을 놓았는데 파리를 잡을라치면 한번에 수천마리씩 잡을 지경이었으며 쥐도 매일 수십마리씩 잡아 쓰레기더미속에 던져넣을 정도였다. 특히 약을 먹은 쥐들은 제자리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지랄을 하다가 죽다보니 물독에 빠져죽은 놈으로, 냉장고 뒤 구석에서 죽은 놈으로 벼의별 것들이 다 있었는대 물독 같은 곳에서 죽은 것은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구석에서 죽은 놈은 제때에 찾지 못했기에 며칠 뒤면 그것이 썩어서 악취를 풍겼기에 그것을 찾노라고 냉장고나 테이블같은 것을 뒤집느라 진땀을 빼군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주방조리수가 식당안을 청소하다가 새된 소리를지르기에 뛰어 들어가 봤더니 글쎄 적으만치 고양이만큼 큰 쥐 한마리가 술에 취한것처럼 이리 비틀, 저리비틀 하며 다니는 것이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둘은 급기야 주방에서 삽 한자루씩 갖고는 쥐한테로 다가갔다. 헌데 내가 면바로 대갈통을 겨누고 친다는 것이 빗치자 그 놈의 쥐가 어정어정할 때와는 달리 감때 사납게 달려드는것이 한메터씩 길이 길이 높이 뛰었다. 그 이빨, 끝이뽀족하고 길이가 큰 마늘쪽 만큼이나 될 듯한 그 이빨에 물린다면 손목도 뭉청 뭉청 잘려 나갈 것 같았다. 우리둘은 쥐를 한가운데 놓고 소리를 치며 혼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다른 선원들이 달려와서 협조해 주어서야 겨우 그 놈을 때려 잡을 수가 있었다. 또한 삽이나 쇠몽둥이 같은 무기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빈손으로는 그 누구도 그놈한테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놈을 때려잡고 나니 긴장이 확 풀리면서 식은 땀이 쫙흘렀고 온 몸이 해나른해져 일할 힘도 나지 않았다. 그외 모리타니는 철두철미한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로서술집과 창녀같은 건 보고 죽자해도 없었고 음식점 같은 것도 극상해서 음료수와 콜라같은 것을 경영할뿐이었다. 또한봉쇄정책이 어찌도 심한지 달러같은 건 일률로 에이젠트한테 가서 본국화페와 교환하고서야 외출할 수 있었는데 그 환률은 너무도 보잘 것 없어 100불을 바꾸어 봤자 두셋이서 술도 없이 한끼도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일단 달러를 감춰갖고 시내로 들어가면 그 수요자가 엄청나게 많아 암달러 거래가 몹시 성행했고 그 환율은 은행보다 몇배나 더 높다고들 했다. 노와디브에 입항한 이튿날 저녁, 어디서나 외출하지 못하면 몸살이 날 것만 같아하던 통신장 이덕수씨, 냉동사한경오씨, 그리고 갑판원 양일선씨 이렇게 3명 선원이 캪틴(선장)이 그토록 주의를 주며 제지시킴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출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얼마 있지를 아니하여 냉동사와 양일선씨가 어깨가 축 처지여 귀선했는데 물어보자 마나 몸에 지녔던달러와 선원수첩 및 여권을 몽땅 빼앗겼던 것이다. 그쯤하면 그래도 괜찮았지만 글쎄 이덕수씨가 경찰에구속당했다고 하니 난리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네들의 말에 의하면 미화1000불을 벌금해야 통신장이 풀려 나올 수 있다 하는데 아프리카, 특히 모리타니 사람들한테서는시비고 일리고 일절 통하지 않았다. 그네들이 “야!” 하는일은 괜찮았으나 일단 “NO”란 말 한마디면 하느님도 용빼는 수가 없었다. 결국 본선에서는 억울한대로 벌금 1000불을 내고서야 통신장과 그일행이 빼앗긴 수첩과 여권을 빼내올 수가 있었다. 빼앗긴 달러는 그냥 빼앗긴채로였고 그 사건으로 하여후일 중국선원인 양일선씨는 검토서를 쓰고도 하마트면 강제귀국조치에 걸려들면 했는데 그 곳이 아프리카가 아니라 유럽이나 동남아쪽으로 중국과의 항공선이가능한 곳이였다면 낙자없이 실행될 것이 분명했다. 모리타니 사람들이 안하무인격이라는 말은 그들이 배에 올라와임무를 수행할 때에도 표현되었다. 본선에 오른 세관 경찰들은 그 때까지도 우리 중국서 30~40연대에나 썼을까 하는 싸창을 차고노끈이 달린 보총을 메고서도 자기네 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막강한바 아메리카(미국)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고 우쭐렁거렸다. 그러면서도 늘 크나큰 배낭같은걸 갖고 다녔는데 쌀, 음료수, 과일 같은 것이 보이면 아무런꺼리낌도 없이 집어넣군 하였다. 이에 우리가 나서서 좀 제지시킬가 하면 그들은 다짜고짜로 경찰국으로가자고 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아침에 썼던 밥그릇들이 점심에 밥상을 차리자고 보니 엄청나게 모자랐다. 그날 본선에 오른외인이라고는 세관원 한명뿐이었는데 그래 그 자식외 또 누구를 의심하겠는가 나는 누구도 몰래 그 자식이 보꾸레미를 둔 방에 가서 그 것을 헤쳐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그 안에는 잃어진 그릇들이 그래로 있었다. 하지만나는 그것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어 통신장한테 그 사실을 반영했다. 그러자 통신장 이덕수씨는 즉시선장방에 있는 그 자식을 불러내서는 따지고 들었다. 헌데 뻔뻔스럽기를 글쎄 실물이 드러났음에도 자식은한사코 부정하면서 다른 한국선박에서 선물받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 아침에 올 때만 해도 빈꾸레미던것이그 안에 꼴똑 들어찬 쌀, 식용유, 과일과 그릇 모두가 본선의 물건임에 번연함에도 우기다니도적개 코가 세다는 말이 조금도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나중에는 그놈이 도리여 우리를 훈계하면서 또 경찰국으로가자는데야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다. 쌀과 식용유 같은 건 아껴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밥그릇이 모자라면진짜 야단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연변의 농촌들처럼 큰 대야같은 그릇에 밥을 떠준다면이내 주방장 얼굴이 열개라도 그 까다로운 한국선원들한테서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도무지 그런 밥그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별 수 없이 우리가 굽어들어 돈 100불을 주면서 그 자식한테 사과해서야 그 그릇들을 도로 찾을 수가 있었다. 한편 항구측에서는 모든 하역작업이 완료됐음에도 불구하고 질질시간을 끌면서 출할수속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 위생보완을 해준다면서 방역일군들이 와서분무기로 파리약을 몇번 쳐주고는 밥 얻어먹고 돈을 받아 갔으며 갑판의 난간이 조금만 파손돼도 자기네 나라에 들어온 선박은 자기네가 책임져 준다면서대충 용접해주고는 또 돈을 챙겨갔다. 또한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이 적기에 그들은 그 어떤 선박이든오래동안 붙잡고 있어야 그만큼 세금액도 올리고 다른 풋돈 벌이도 할 수 있겠으니 말이었다. 그러자 본선은그들이 출항수속을 해주건 말건 무작정 부두에서 배를 떼고는 외항에다 앵카(닻)을 내리우고 출항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렇게 외항에 나와 이틀이 지나자 과연 더는 부두세를 받을수 없게 된 항구측에서는그제야 출항수속을 하러 오라는 텔렉스(전보)를보내왔다. 헌데 방정맞게도 날씨가 그닥 좋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모든 것이 시간을 재촉하는지라 선장은 단정뽀트를 타고서라도 기어코 뭍으로 가자고 했다. 그날 뭍으로 떠난 이는 선장, 통신장, 2항사, 2기사이렇게 4명이었는데 안타까운 것은 점점 비가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치면서 오후가 늦도록 그들이 돌아오지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안달아난 것은 본선에 남아있는 기관장과 1항사였다. 본선은 앵카를 올리고 선장일행이 앉은 단정뽀트를 찾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동안 바다를 헤매고 다녀서야 본선은 한바다에서 부평초처럼 표류하고 있는 단정뽀트를 겨우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단정뽀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없는 원인은 파도가 치면서 단정뽀트의 기관계통에 물이 차서 더는 엔징을 돌릴 수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체의 동력을 잃은 단정뽀트는 큰 배를 향해 앞으로전진할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큰 배가 단정뽀트한테 정확히 접근하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길이 160메터나 되는 육중한 본선이 그 작디작은 단정뽀트한테로 면바로 갖다 대인다는 것이 그토록 쉽지 않았다. 또한 간혹 엇비슷하게 접근했다가도큰 배가 헤가르는 물결에 단정뽀트는 또 다시 200~300미터씩 밀려가기가 일쑤였다. 급해난 1항사는연속 당지 해상경비대에 무전과 텔렐스를 날리면서 구원을 청했고 선원들마다 쉴새 없이 SOS구조용폭죽을하늘로 쏘아올렸지만 모리타니라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지 구조조치는커녕 아무런 답복조차도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새까맣게흐린데다 비까지 내리어 100미터밖도 분간하기 힘든 해상에서 선원들은 브릿치(조타실)에서 내비추는 탐조등 불빛을 빌어 바다를 주시하면서 단정뽀트의행방을 찾아내군 했다. 허나 그것도 잠간뿐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가끔씩 나타나군 하던 단정뽀트는 끝내우리의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선장일행이 모두 나이프쟈크(구명조끼)를 입었기에 생명위험까지야 일으랴만은 그래도 우리는 가슴이 죄여들며 몹시 불안해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배는완전히 외항에서 벗어나 한바다에 들어서서 정신없이 표류했다. 바로 이럴즈음 통신실에는 다음과 같은 무선신호가날아왔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여기는 러시아 선박 ‘×××’호이다. 귀선의 캪틴(선장)일행 4명이 본선뽀트에의해 구조되어 본선에 올랐다. 속히 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속히귀선위치를 알려주기 바란다.” 러시아 선박이 어쩌다가 그들을 발견했을까? 진짜 하늘이 도운 모양이었다. 우리가 본선 위치를 알려준 뒤 약반시간쯤 지나자 아니나 다를가 러시아 국적의 트롤선 한척이 다가오더니 세번 고동을 울리는 것이었다. 이에본선도 세번 고동을 울리여 화답해 주었다… 선장일행은 구원되었다. 다른 나라의 해상같으면 일단 SOS구조신호만 오르면 부두에서 멀지 않은 외항이라 진작 헬리꼽터나 구조선 같은 것이 들이닥칠 것이었으나 아프이카만은특히했는바 남한테 구걸하고 빼앗고 훔치는데는 신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남한테 뭔가 좀 주고 손길을 뻗쳐 자선을 베푸는데는 그렇게도 인색했다. 그것이 곧바로 아프리카였다. 코트디바르에서의 이모저모 아프리카를 놓고 말하면 누구나 다 대체로 흑인들이 많이 모여사는동네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헌데 그중 모로코와 모리타니, 남아공화국 등 나라의 흑인들은 장시기 동안 다른 인종과 혼혈배종이 되다 보니 잡종으로서, 얼굴이 그닥 검지 않고 머리가 길게 자라는 사람도 많았다. 하다면 진짜오리지날(토종)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는 그래도 코트디바르, 가봉, 나이지리아, 콩고, 가봉, 카메룬 등 나라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적도 부근의 나라들에 가보니 그 곳 흑인들은 확실히 새까맣다 못해 해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검은 가죽구두를방불케 했고 머리가 좀처럼 자라지 않아 꼬실꼬실한 것을 보면 진짜 아이들은 남녀를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또한듣는 바에 따르면 그 동네에서는 검을수록 미인선발이나 좋은 직업에 뽑히울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본선이 코트디바르 수도 아비쟝항에 입항한 것은 그해의 7월 중순쯤이라고 기억된다. 적도 가까이에 있는 나라인데다 가뜩이나여름철이 되다 보니 찌는듯한 날씨가 계속되었으며 낮기온이 자주 40도 이상으로 올랐다. 또한 자연온도도 높지만 그 열기에 선박의 갑판이 달아올라 그 위에서 작업하기란 그야말로 숨이 콱콱 막힐 지경이었다. 뭐, 한국선원들의 우스개 말을 빈다면 그 곳 사람들은 더위에 타서피부가 그토록 새까맣게 됐다나? 아비쟝에는 기이한 현상도 많았다. 시내안의 길가는 물론 부두에까지 도마뱀(우리 이 곳의 도마뱀과는조금씩 달랐음)들이 욱실거렸는데 심지어 바줄을 타고 선박으로 오르는 도마뱀들도 있었다. 그 곳 사람들은 그 도마뱀들을 근본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것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을해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부두로 몰켜드는 까닭은 선박들에서 하역할 때 떨어지는 물고기 부스레기같은 것을 주어먹기 위해서라 했다. 한편 신경써야 할 것은 1년치고춘하추동이란 계절변화가 거의 없이 찌는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고장이었기에 우리 나라에서는 열병이라고 하는 말라리아란 병이 몹시 성행했다. 그 병에 걸리는 환자수가 많은데다 예방 및 치료조치가 따라가지 못한데서 10일안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기수부지였다. 우리 나라의 동북과 서북지구에서 성행하는 류행성 출혈열이란 병이사망율이 높은 것처럼 말이다. 하기에 본선에서는 아프리카행을 시작해서부터 매일 점심시간마다 말라리아예방약을 선원들한테 공급했다. 헌데 그 예방약이라는 것도 효과가 없었던지 아비쟝에 도착하자끝내 2기사 서춘철씨, 2항사 정명복 그리고 용정서 간 기관원김영림군 이 3명 선원이 덜컥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증상으로 놓고 말하면 장질부사나 학질로 앓는 환자처럼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우나 이불 두채씩 뒤집어쓰고도 덜덜 잇빨을 맞쪼으면서 춥다고 하는 것이특징이었다. 그외 죽물도 넘기기 힘겨울 정도로 목안의 편도선이 부어 환자의생명은 포도당 점적주사로 겨우 지탱하군 했다. 그래도 대리점에서 각종 경로를 통해 그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는좋다는 약을 아낌없이 들이대여 치료했기에 그들 모두가 며칠 뒤에 몸이 완쾌되어 귀선할 수가 있었다. 다음으로 전반 아프리카가 거의 다 그러하듯이 특히 아비쟝은동남아의 태국이나 필리핀, 남미주의 컬럼비아, 브라질,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와 더부러 색정업에는 아주 이름난 동네였다. 여기서주목을 끄는 것은 발달한 유럽나라들과 미국, 일본 등 지역보다도 제3세계나라들에 기생들이 더 많다는 그 점이며 그 발달국에 있는 기생들도 그 거개가 제3세계에서 왔다는 그점이다. 대체 웬일인지? 아비쟝에 입항한 그날 저녁, 우리는 거의 습관화된 것처럼 한국선원들과 어울려 “입항신고(아가씨들과 오입하는 걸 말함)”하고 시내로 향했다. 가닿은 곳은 가라오케 비슷하게 차린 술집이었다. 우리가 택시에서내리자 마치도 정글(열대수림)속의 성성이들을 방불케 하는깜둥이 아가씨들이 줄쳐 나와서는 “무쵸아밍고(스페인어-가장가까운 친구)” 라고 하며 서로 빼앗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어깨에 매달렸다. 또한 “오빠, 내가 이뻐?”, “아저씨, 나 술 좀 사줘” 하고 지껄이는 년들도 있었는데 그런년들이 한국남자들을 얼마나 품어봤겠는가 하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하지만 뭐 한강에 배 지나간 자리가알린다더냐, 억수로 굶은 선원들은 그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술집안에 들어서자 아가씨를 옆에 끼고 술을 마시는 선원, 가라오케 오디오의 반주에 맞춰 춤을 추는 선원들로 무드(분위기)는 제법 짙어갔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지치고 짜증난 스트레스를 풀길없던 마도로스 ㅡ “배놈”들한테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천국생활이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헌데 그넓디 넓은 홀안을 아무리 휘둘러봐도 흑인남자와 코가 큰 서양사내는 한명도 없고 일색으로 동양계의 한국선원외 필리핀선원들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서양사내들 거개가 흑인들에 대해 거들어보지도 않는데 반대로 우리 동양인은 흔히 흑인남자들과는 떵떵큰 소리치다가도 왜 계집에 한해서만은 양년이고 깜둥이년이고 가르지 않고 깔아 뭉개는지? 하기에 동남아나남미, 심지어 이 “연탄동네”의 계집년들마저 기분좋을 때면 “아저씨,오빠” 하다가도 일단 기분만 잡치면 “이 씨팔놈아, 하나 빨아라”하는 등의 한국말을 청산유수처럼하는 것 역시 결코 이상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흥이 도도해지자 선원들 거개가 그 술집 뒷울안에 있는 창녀촌으로 향했는데 저마다 아가씨 2~3명씩 끼고 나갔다.참 그 화염같은 욕구를 분출한다 해도 아가씨 한명이면 족하겠는데 왜 저러지? 돈깨나 있다는걸 시사하는걸까?! 나는 창녀촌이라고 하니 중국의 여느 시골처럼 농촌마을인 걸로알았는데 그것과는 달리 그 곳의 창녀촌이란 7~8층쯤 되는 빌딩같은 건물이었다. 실내구조를 보면 방마다 침실, 주방과 화장실까지 곁딸렸는데 이로보아 건물주인이 그것을 창녀들한테 세주어서는 그녀들이 거기서 손님도 맞고 살림도 하게 하는 모양, 그것을아가씨들의 방마다 쌓여 있는 한국산 라면 “안성탕면”이 그걸 충분히 말해줬다. 한국선박이 들이 닥쳤다는 소문이 어느새 흘렀는지 그 이튿날저녁부터는 선원들이 미처 샤와를 마치고 외출을 하기도 전에 숱한 창녀들이 본선으로 몰켜들었다. 그래야돈나무인 한국선원들을 중도에서 채낼 수 있으니 말이었다. 항구규칙을 놓고 말하면 아비쟝항 역시 자유항이아니기에 외출하는 선원들은 쏘페스(임시통행증)가 있어야 했고다른 인원 역시 특별출입증에 의해서만이 그 출입이 가능했기에 창녀들의 출입은 근본 불허라 했다. 허나시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기 마련이라 창녀들은 방법도 많았다. 아니 그 방법이란 정문의 수위경찰한테 돈만찔러주면 그저 무사통과였다. 그러니 이런 나라일수록 경찰과 도적은 한형제라는 말이 더 적절했다. 헌데 그날 밤에 사달이 생겼다. 글쎄 깜둥이년 5~6명씩이나 자기 방에 불러 들인 뒤 권커니 작커니하며 술을 굽내던 갑판장 김복야씨가 끝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침대에서 코를 골자 계집년들은 이 때라 하고 김복야씨의 호주머니에서 열쇠구레미를꺼내서는 옷장이고 서랍이고 침대밑이고 몽땅 뒤번져 놓았다. 그 뒤 돈,담배와 술이며 지어는 옷과 휴지와 비누까지 몽땅 털어간데서 김복야씨는 하루 밤새에 알거지로 되고 말았다. 그외 그 곳의 창녀들 거개가 자작한 만능열쇠를 갖고 있었는바 그것을 이용해서 선원들이 자는 침실로 침범하기가일쑤였다. 그 절차를 보면 우선 만능열쇠로 문을 연 뒤 가만히 기여 들어서는 잠자는 선원들의 몸을 감빨거나 쓰다듬으며 성적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러다 선원이 깨여나서 이에 응하면 몸을 팔고 깨여나지 못할 경우 즉 김복야씨처럼 술취해 일어나지못할 때엔 소탕전을 벌려 돈이고 벽에 걸린 옷이고 박치는대로 걷어 가기가 일쑤였는데 나도 그렇게 당한 적이 몇번 잘되었다. 참, 웬 거동에 침대머리맡의 전등을 켜고 보면 성성이처럼 시커먼물건짝이 흰눈자위와 흰잇빨을 드러내 보이며 헤헤 하고 웃으며 다가드는 것이 어찌도 놀랍고도 무서워나던지… 후진국의 낮은 인간자질, 같은신분의 창녀들이었지만 동남아나 남미의 창녀들은 그 정도로까지는 음특하고 속이 검으며 절라라 하지도 않았다.1991년 6월, 본선이 태국의 방콕에 입항했을때였다. 그 때 역시 수십명에 달하는 창녀들이 본선에 올랐는데 2기사서춘철씨의 파트너였던 그 아가씨의 거동은 진짜 사람을 감동시킬만도 했다. 원체 술마시기를 즐기는 서춘철씨인지라오래간만에 이성을 만나 흥분했던지 술을 과음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가씨가 샤와하는 사이에 침대에서 그만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선창이 희붐히 밝아오고… 하느님 맙소사 그때까지 그 아가씨가 소파에 앉아 턱을 고이고 그가 깨여나기를 기다리는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의 말을 빈다면 창녀도 인간이고 양심도 있는바 믿음직한 신용과 최선의 봉사로 손님한테즐거움을 주고 그 중에서 자기의 가치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하다면 그런 기대가 아프리카같은 곳에서는 실현될 수나 있을까? 아니 아프리카뿐 아니라 우리 중국 역시 여자를 내세우고 사기협잡, 살인강탈을일삼는 현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외 한국신문들을 보노라면 ×××씨 중국교포 여인이 한국사내와위장결혼을 한 뒤 한국국적을 얻고는 도망을 쳤고 ×××씨 중국교포 여인은 일본손님과 한침대에 올랐는데 손님이 잠든 사이에 돈을 털다가 잡혔다는등 기사들이 늘 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의 정신세계를 부식시키는 매음업도 질책받을바지만 여인들의인간성, 즉 우리 조선족 여인들의 자질과 수양같은 것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태국의 아가씨들은 선박에 오르자부터 비자루로 바닥을 쓸고 물걸레로 닦고 하였으며 선원들의빨래에까지 신경써 주면서 몸팔기 먼저 인간성을 보여주었다. 그 때 내가 일하는 주방에도 아가씨 2명이 전문 일손을 거들어 주었는데 비록 살길을 찾아 몸을 파는 비천한 아가씨들이었지만 그로해서 나는 더욱 그녀들을짓밟을 수 없었으며 그녀들이 나를 꼬시지 않아도 내 스스로가 그녀들한테 용돈이나 비누, 휴지 같은 것을주고 싶었다. 하다면 이런 아가씨들의 거동을 어떻게 평가해 줘야 할는지? 하지만 아프리카라는 깜둥이 동네에서는 그럴만한 기대를 한다는건 그야말로 처녀불알을 찾는격이었다. 글쎄 갑판장 김복야씨의 방을 턴 년들이 그 이튿날에도 뻔뻔스럽게본선에 올랐는가 하면 전날 밤의 일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떼며 아닌 보살을 할 수가 있었으니 이가 글쎄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아프리카 “연탄동네”의 정조관념에 대하여 의문되는점이 많았다. 짐승도 암컷 하나를 두고 수컷들이 서로 싸운다고들 하는데 반대로 그 놈의 동네에서는 거의모두가 자기 와이프한테 매음을 강요하는 것 같았다. 그때 본선에는 “넘버쓰리”라는 제3기관조리수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술집에서 여자 한명을 사귀게 되였는데그러던 그가 그녀가 하도 졸라대는 통에 술과 안주를 사들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 것은 그 다음의 일, 헌데정작 그 년의 집문턱을 넘어서니 웬걸 그년은 아가씨기는커녕 진작 아이 셋씩이나 있는 한물 간 갈보였으며 거기에 곰같이 생긴 남편까지 있는 년이었다. 이에 너무도 놀라 넘버쓰리 박씨가 뛰는 심장을 붙안고 급기야 36계를놓으려 하자 글쎄 남편이란 녀석이 막아서며 무릎을 꿇더라는 것이었다. 내일 당장 쫍쫍(먹을것)할 것이 없으니 제발 자기 와이프와 하룻밤만 자달라고 말이었다. 그렇듯 무시무시한 분위기속에서 웬간한 사내들 같으면 다 혼비백산해서 아무런 일도 성사할 수 없으련만 그래도그 넘버쓰리 박씨만은 그 일에 미립이 튼지라 그래도 그 갈보년과 함께 침대에 올랐던 것이다. 그 뒤몇차례의 폭풍이 지나갈듯한 힘찬 섹스공세를 마치고 새벽녁에야 겨우 잠이 들었는데 문득 웬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은채로 눈을 떠보니 아이구 맙소사, 글쎄 그 남편이란녀석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역시 벌거벗은채로 넘버쓰리한테 감겨들어서 자고 있는 와이프를 깨우는 것이 아니겠는가.참, 어처구니가 없기로 삶은 소대가리마저 웃을 지경이었다. 다음, 또 하나의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라면 아비쟝이라는 그 “연탄동네”에도 필리핀클럽이라는 술집 겸 디스코바로 쓰이는 장소가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새까만 인종들과만 상대하여 오던 본선의 오입쟁이들의 두눈을 화등잔처럼 크게 한 것은 두말이면잔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가 그 필리핀클럽에 들어서니 과연 동양계 아가씨들이 10여명이 바걸(녀접대원)로일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는 필리핀 국적을 갖고 있는 중국인 아가씨도 한명 있었는데 흰만두처럼 새하얀살결에 인물 또한 핥아주고 싶을 정도로 절색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몸값은 필리핀 아가씨들에 비해 배이상으로될 것이 뻔했고 돈깨나 있다는 한국선원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몸을 가로탔다가 떨어지군 했다. 그 순서를배열하니 냉동사가 1호였고 그 뒤로 3항사와 2타수였으며 선장은 여섯번째로 됐다. 그네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모두“구멍동서”에 속했는바 선장 앞서 냉동사가 제일 맏형이 돼서 술 한잔 사는 놀음까지 벌렸다. 헌데 그녀와성관계를 가졌던 선원 10여명이 아비쟝항을 떠나 얼마 안되어 남근의 파이프가 질질 새며 임질에 걸려사타구니를 붙안고 시달릴줄이야. 아프리카에 들어가기 전부터 본선에서는 성병을 조심하라고 강조했고 또한매 항구마다에 입항해서부터는 선원들의 건강을 책임진 3항사가 외출시마다 선원들한테 “자 여러분, 장화요 장화” 하며 콤돔 한곽(24개) 씩 나누어 줬건만 선장과 3항사부터 성병에 걸렸으니 문제가 좀 심각하지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놈”은 상놈이라는걸까?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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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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