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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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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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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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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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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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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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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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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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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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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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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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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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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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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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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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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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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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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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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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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2)
- ■ 김철균 순자네가 연길시 신흥가로 이사를 간 뒤 몇년 안되어 아들 영남이는 중앙소학교에 붙었고 그와 연연생인 딸 영순이가 1년 뒤 또 연길시 중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교원들과 자주 대면하는 일이 가끔씩 있게 되자 순자는 오래동안 접었던 교원의 꿈을 꾸던 시기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교원 – 아,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성스러운 인민교원인가! 해빛도 찬연한 교정에서 수십쌍의 어린 눈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단에 올라 나라의 미래들한테 지식의 꿈을 심어주고 이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인민교원 ㅡ … 애들을 학교로 데려가고 또 학교로부터 집으로 데려오면서 인민교원들을 볼 때마다 순자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는 눈길로 대할 수가 없었다. 오, 어린 소시절부터 바라마지 않았던 교원사업이었다. 순자는 인민교원사업을 포기하고 남편 김용환과의 결혼을 선택했고 또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한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교원의 꿈을 머리속에서 영영 묻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일찍 소학교 시절부터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 꿈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는 순자였다. 인민교원 ㅡ 순자는 다만 국록이나 타먹고 남들한테서 “선생님”으로 불리기 위해서 인민교원을 흠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애들이 더 없이 사랑스러웠고 그만큼 애들속에 있고 싶었다. 그것은 단 한시간이라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순자는 반급의 전체 학부모들을 대표하여 교단에 서는 일이 있게 되었다. 순자가 자청해서 교단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학부모 중 순자와 한동네에서 살고 있는 한 중년여인이 순자를 적극 추천하여 교단에 서게 하였던 것이다. 그 중년여인이 순자더러 교단에 오르도록 적극 추천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 것인즉 신흥가에 이사와서도 순자는 여전히 하남가두에 있을 때처럼 모든 활동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특히 민족단결과 위생청결에 관한 국가의 해당문건같은 것을 선전할 때면 조리성이 강한데다 말 또한 청산유수여서 가두주민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그 어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주 순자를 청하여 조언같은 것을 듣군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 중년여인의 추천으로 신흥소학교의 교단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이는 기실 순자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일이기도 했다. 그날의 모임은 그 옛날 우리 말이 있어도 우리 조선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일제의 노화교육을 받으며 힘들게 공부하던 부모세대의 동년시절을 회억하면서 지금의 어린이들한테 교양을 주기 위한 모임이었다. 어린친구들, 지금 친구들앞에 나선 이 아지미는 일찍 1938년 용정의 육도소학교에 입학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해온 사람이랍니다. 그 때 우리 연변은 일본놈들의 강점하에 있었습니다. 일본놈들이란 어떤 놈들인지 여기에 앉아있는 친구들은 거의 모를 것입니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는 이른바 “3광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우수하고도 아름다운 우리 말이 있어도 우리가 조선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조선글을 쓸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누가 만약 조선말과 조선글을 사용하기만 하면 구두발에 채이거나 볼기를 얻어맞기도 했으며 쩍하면 벌을 서기가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몰래 조선말을 하였고 조선문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인들한테서 옛말같은것을 들으면서 중국의 사마천, 이백, 두보, 백거의, 임측서와 조선의 이순신장군, 남이장군과 농민폭동을 일으킨 임꺽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 친구들, 현재 친구들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우리 말과 글을 맘껏 배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우리 연변에도 주덕해 주장과 연변대학의 임민호교장 등 많은 조선족간부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들도 공부를 열심히 잘하여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야 될 것이 아닙니까?(박수) …… 억양이 부드럽고도 조리정연한 순자의 발언은 모임에 참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큰 아들 영남이네 반급의 담임교원은 너무도 감탄된 나머지 순자의 두손을 꼭 잡고 “참 말씀을 잘하셨습니다. 정말 훌륭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라고 하며 탄복하였다. 그리고 방청객으로 교실로 들어왔던 교장선생님과 기타 학교지도부 일군들도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수군대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뒤 며칠이 안되어 영남이네 담임교원은 순자를 부르더니 학교의 총 보도원을 맡아줬으면 하는 교장선생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순자는 원체 교단에 오르고 싶었던터라 쾌히 승낙하였다. 그러자 신흥가두 판사처에서도 순자한테 신흥가두의 총 보도원을 맡고 신흥가두에 집을 둔 학생들의 학습성적이 올라가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영남이가 다니는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 및 신흥가두의 과외보도원이 되어 학생들앞에 자주 나서군 하였는데 학생들은 물론 기타 교원과 가두판사처의 직원들까지 순자를 “김선생님”이라고 하며 깍듯이 존경하군 했다. 참, 노임 한푼 없는 과외보도원 선생님, 하지만 순자는 이것으로 하여 무한한 긍지를 느낄 때가 많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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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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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4)
- ■ 김철균 정전직후의 아버지의 생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측 대표 월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측 인민군 대장 남일 장군이 정전협정에 조인함과 아울러 한반도이 전 전선에 거쳐 총포성이 멎었다. 3년 1개월간 동족끼리 서로 밀고 밀리면서 마주 쏘고 찌르고 죽이고 하면서 혈투를 벌이던 전쟁은 드디어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결과를 맞이했다. 헌데 어머니가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와주지 않았다. 넷째 할아버지의 둘째아들이며 나의 5촌 숙부인 김노돈씨가 눈에 총상을 입은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8월 한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집중영에 갇혀있었다던 다른 한 5촌숙부도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종무소식이었다. 후에야 내가 알게 된 일이었지만 당시 집으로 돌아온 5촌 숙부 김노돈씨는 넷째 할아버지한테 여차여차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일러바쳤고 그 뒤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가 조선으로 나가 웬 여인과 살림까지 차려놓고 생활하고 있는 아버지를 억지다짐을 붙잡아왔다는 것이다. 다음의 것은 내가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준 얘기이다. “그 당시 조선은 말그대로 ‘쑥대밭’이었다. 도시는 시멘트 덩어리와 벽돌들이 널려있는 폐허로 됐고 거리마다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들이 득실거렸으며 농촌마을은 노인네와 아낙네 그리고 아이들뿐 사지가 멀쩡한 남정은 찾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도시고 농촌이고 일터로 나가는건 말짱 여성들뿐이었다. 당시 중국군인들이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라는 그렇게 빨리 춰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네들이 있었기에 도시에서는 집을 지을 수 있었고 농촌에서는 밭을 다룰수 있었으며 철길과 도로같은 것을 보수할 수도 있었다. 남조선에 있는 미군과 북조선에 있는 중국군의 다른 점이란 바로 미군은 그냥 주둔만 하고 있었고 중국군은 조선을 도와 직접 복구건설에 투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중국군까지 전후복구건설에 발벗고 나서는 마당에 조선인으로서 차마 조선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럴듯한 이유였다. 당시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두고 모두들 차마 돌아설 수 없었다고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전부의 이유였을까?… 후에 들은바에 따르면 정전후 군복을 벗은 아버지는 원산의 한 수산작업소의 세포위원장으로 비교적 잘 나갔다고 한다. 수산작업소 책임자였으니 매일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은건 물론 출근할 때도 자전거를 타고 다녔으며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들이 물고기나 얻어가질까 하고 많이 치근덕거리기도 했다는 것이 후에 아버지가 동네사람들과 한 옛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넷째 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가 아버지앞에 갑자기 나타나 그의 억지다짐으로 중국으로 끌고 왔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특히 당시 아버지와 동거하는 여인이 임신중이었다고 하니 더욱 그랬다. 그렇게 돌아온 중국이었으니 당시 아버지는 현성의 기관같은 사업터에 배치받을 수가 없었다. 조직적인 수속을 밟아서 귀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고 중국공산당원 당적도 2년 뒤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아버지는 오랫동안 5촌 숙부인 김노돈씨를 소 닭보듯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 3살이던 내가 급성폐렴에 걸려 생사를 다투게 될 때 5촌 숙부 김노돈씨가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 몇대를 사온 덕에 내가 구사일생으로 소생하자 그제야 아버지는 5촌 숙부의 손을 잡고 백배 사죄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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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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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20) 아름다운 극광
- 아름다운 극광은 구경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태양은 원래부터 강대한 전기를 낼 수 있는 미립자를 산생, 이런 미립자들은 바람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주위에 불어친다고 한다. 이런 “태양풍”이 지구 남극 혹은 북극의 공중대기층에 몰아칠 때면 기체분자와의 맹렬한 충격이 생기면서 빛을 내는 현상이 산생되는데 이 현상이 곧바로 극광이다. 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태양풍은 지구 자기마당의 영향으로 지구의 남극 혹은 북극 부근으로 접근한다. 때문에 극광은 대부분 남극 혹은 북극 부근의 상공에 출현하며 남극과 멀리 떨어진 남극 혹은 북극의 사람들은 이 극광을 잘 볼 수가 없다. 극광은 일종 아주 장관을 이루는 자연현상이다. 기재에 따르면 극광의 어떤 빛은 바람에 따라 춤추는 채색띠와 같고 어떤 빛은 신비한 한층의 면사포와도 같으며 또 어떤 빛은 진주보석처럼 반짝거리기도 한다. 극광의 색채 또한 매우 여러종으로 붉은 색과 녹색이 있는가 하면 푸른색 혹은 자색도 있으며 명랑한 색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색도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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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20) 아름다운 극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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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0) 씨엠립유적
- 씨엠립유적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캄보디아, 지점: 프놈펜 서북부 되는 곳함의: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건축군 기원 9세기 초엽, 캄보디아의 씨엠립왕조는 선후로 쎄엠립굴을 대표로 한 수백개의 인도교와 불교건축풍격의 절과 불탑을 수건하였다. 1431년, 태족군대가 캄보디아를 점령하면서 씨엠립절당은 버려졌고 후에는 수림속에 감춰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들어 이 씨엠립은 탐험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다시 볕을 보게 되었다. 씨엠립유적 앙코르(吴哥遗址)은 씨엠립성, 씨엠립굴 및 일부 사원들로 구성되었으며 “고대동방의 4대 기적”의 하나로 1992년 “세계문화재명록”에 들어가게 되었다. 왕의 성곽 ㅡ 씨엠립성곽 씨엠립성곽은 “대씨엠립”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곳은 기원 9-15세기에 줄곧 캄보디아의 수도였다. 씨엠립성은 하나의 정방형으로 된 도시로 부지면적이 9만제곱미터에 달한다. 씨엠립성에는 도합 5개의 성문이 있는데 매개 성문은 기실 모두 높이가 20여 미터가 되는 불탑으로 되어있고 역시 사방을 향한 보살의 머리모습이 그려져있어 “사면불”로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성곽밖에 있는 도랑호 다리에는 27개의 신조각상이 있고 성내에는 사당, 보탑과 황궁 등 건축물이 있다. 천년 씨엠립굴 크메르어중에 씨엠립굴은 “사원성”이란 뜻으로 씨엠립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은 “작은 씨엠립”이라고도 한다. 이는 씨엠립왕조의 시리아 왈만 2세가 영을 내려 지은 것으로 부지면적이 2080제곱미터이고 외곽에 도랑호가 있는가 하면 서항도(西巷道), 삼중회랑(三重回廊)과 오좌첨탑(5座尖塔) 등으로 구성되었다. 전반 건축물은 하나하나의 큰 돌로 돼있으며 돌가루와 시멘트가 없고 못과 기둥은 더욱 없는바 옛사람들의 높은 건축수준을 충분히 체현하였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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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0) 씨엠립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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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1)
- ■ 김철균 2 주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 때 순자네는 연변의학원에 출근하는 정규창 교수네와 아주 사이가 좋게 지냈다. 가정과 가정 사이의 관계란 흔히 여인들끼리 가깝게 보내면 남정들도 따라서 친해지는 법이랄가? 당시 순자도 정규창 교수의 부인들 좋아했지만 정규창 교수의 부인 조분단 여사 역시 순자 친척 이상으로 좋아했다. 조분단 여사가 순자를 좋아하는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었다. 첫째, 직업이 없는 일반 가정주부였지만 여느 가정의 연인들에 비해 연박한 지식과 고매한 도덕수양을 겸비하고 있었다. 순자네와 처음 알게 되였을 때 조분단 여사는 순자의 높은 지식수준과 도덕수양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위생학교 김용환 선생의 부인이니 당연히 현모양처일 것은 물론 일정한 지식수양을 갖췄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신문을 읽고 일기를 쓰고 가정규칙제도 같은 것을 세우는 것을 보면 여느 가정의 주부들에 비해 너무나도 돋보였던 것이다. 헌데 의문스러운 것도 있었다. 이렇듯 지식이 있고 도덕수양까지 겸비한 여성이 왜 직업이 없이 그냥 가정주부로 남편을 섬기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담?… 후에 조분단 여사는 순자가 연변에서도 유명한 용정 명신녀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화룡현 서성구소학교의 교원으로 배치받았으나 단연히 그것을 포기하고 고아로 의지가지가 없는 김용환한테 시집가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여 이젠 떳떳한 연변위생학교의 교단에까지 서게 했다는 사연을 알고는 더없이 감탄하였다고 한다. 둘째, 순자는 남한테는 하냥 선량한 마음으로 베풀고 쓰다듬어주고 하였으나 자기 자신과 자녀에 대해서는 항상 엄하게 요구하고 단속하였다. 그 사례로 순자는 자신과 가정구성원들한테 많은 공약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 중 돈에 대한 공약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리 간고하고 어려워도 우리보다 더 힘들게 하는 사람과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생활적 여유가 있은 뒤 남을 도우려 한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남을 도울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만다. 2. 아무리 어려워도 남한테 손을 내밀지는 말아야 한다. 3. 남들이 주는 것을 받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것을 무엇때문에 받아야 하고 받아도 될 것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받아야 한다. 4. 주은 돈이거나 물건은 꼭 임자에게 돌려줘야 하고 가령 주인을 찾지 못해 돌려주지 못하면 반드시 조직에 바쳐야 하며 백화상점 등에서 돈을 더 받았을 경우 당장 돌려주어야 한다. 5. 남의 돈이거나 물건을 훔치면 절대 용서못할 범죄행위라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이상의 5가지 내용인즉 남을 도와주고 사랑해주되 절대 남의 도움을 바라거나 탐욕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말로 귀납된다. …… 사실 그 당시 순자네 가정을 놓고 보면 남편 김용환의 많지 않은 노임에 매달려 순자와 자식 셋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 이렇게 다섯식구가 호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50년대 초기, 넉넉하지 못하기는 여느 가정도 마찬가지었지만 남편 한명의 노임으로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네 가정은 더욱 풋돈도 쪼개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남편이 자주 어렵게 기숙사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데려와 밥술을 들게 하는데다 고향인 시골에서도 문턱이 닳게 손님이 찾아오군 했다. 말그대로 남편이 의지가지없이 살면서 공부할 때는 옆에 친척이라고는 볼 수 없던 것이 이른바 출세하여 도회지인 연길에서 교편을 잡게 되자 서로 촌수에 걸리는 친척이라며 많이도 찾아왔다. 어제는 6촌형제라고 찾아왔고, 오늘은 7촌 숙부라는 분이 찾아왔으며 올 때마다 “옛날 용환이가 공부할 때 동정을 많이 했고 도와주기도 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의 집에 손님이 찾아오기 마련”이고 “모두가 우리를 믿고 찾아온다”고만 여겼다. 없는 살림에 손절구로 떡가루를 내서는 색다른 음식을 만들었고 식품상점에 달려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서는 소주라도 받아서는 대접했으며 돌아갈 때는 노비도 얼마간씩 장만해드리군 했다. 연길냉면이라면 그 때에도 연변내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음식이었다. 연길로 이사해온지 얼마 안되어 순자는 언제인가 온 가족의 생활개선으로 연길냉면 한그릇을 먹어보았는데 얼큰하고도 시원한 그 맛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으며 간혹 냉면집앞을 지나노라면 그 냄새만 맡아도 입안에서 군침이 스르르 돌군 하면서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끼군 했다. 하지만 그 냉면 한그릇의 값이면 가정에서는 하루 세끼의 생활비가 된다는 생각에서, 또한 내가 오늘 냉면을 먹고 싶을 때면 아직 수수밥 한끼나마 배불리 먹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겠다는 생각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며 그냥 지나치군 했다. 그렇듯 자주 냉면집 문앞을 그냥 지나치던 순자였으나 동네의 노인이거나 환자분 같은 이들이 혹시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면 지체없이 달려가 표를 사고 줄을 서서 냉면을 받아서는 대접시키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시골에서 친정아버지가 오래간만에 딸집으로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친정아버지 ㅡ 뭘 대접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던 순자는 장마당에 가서 찰떡을 사다가 대접시킬까 하다가 다시 시원한 냉면을 친정아버지한테 대접시키기로 하였다. 농촌사람들한테는 찰떡보다는 그래도 시원한 냉면을 대접하면 더욱 즐거워할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순자가 냉면집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냉면을 사려고 길다란 줄을 서고 있었다. 그 당시 “줄서기문화”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식당에서 냉면이나 기름튀기같은 것을 살 때만 줄을 서야 할뿐만 아니라 남새점에서 감자 몇알을 사도 줄을 서야 했고 배급소에 가서 배급을 탈 때도 줄을 서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공급이 시장경제를 대체하던 그 시기, “줄서기문화”는 계획경제시대의 일종 풍경선이기도 했다. 순자는 줄을 서서 40분 정도 기다려서야 냉면을 받아가질 수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적게 기다린 셈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한시간, 심지어 두시간씩 기다려야 냉면을 받아가지는 경우도 허다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다 팔리면 그대로 돌아서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군 했다. 냉면을 그릇에 받아담은 순자가 한여름의 땡볕 아래에서 헐떡거리며 집에 거의 도착할 무렵, 문득 한 동네에서 사는 한 할머니가 순자를 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김선생네 댁, 어디에 이렇게 급히 다녀오우?” “예, 할머니구만요. 시골서 친정아버님이 오셨는데 냉면 한그릇 대접시키려구요.” “쯧쯧 기특두 해라. 냉면 좋지. 나도 저런 딸이 있었으면 이 삼복철에 냉면 한그릇 시원이 맛이나 보겠는데…” “…?!” 그냥 지나치려던 순자는 문득 멈춰서고 말았다. 냉면을 자시고 싶어하는 할머니를 제쳐놓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할머니 제가 왜 할머니의 생각을 못했을가요? 그럼 이 냉면은 할머니께서 그냥 드세요. 냉면이야 제가 다시 가서 사오면 될거 안예요?” 순자는 “괜한 소리를 했다”며 사양하는 할머니한테 냉면 그릇채로 맡겼다. “에그에그, 고맙기도 해라. 색시 그럼 나 먹겠수다.” 할머니는 게눈감추듯 순식간에 냉면 한그릇을 다 비웠다. 할머니한테서 빈 냉면그릇을 받아쥔 순자는 부랴부랴 다시 냉면집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 때는 식당의 냉면이 다 팔리고 일군들이 한창 주방에서 설겆이를 하고 바닥과 유리창문 등을 닦고 있었다. …… 순자가 어깨가 축 처져갖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친정아버지는 냉면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자가 빈 그릇만을 들고 집안에 들어서자 친정아버지는 “뭐, 줄을 섰다가 냉면이 다 나간 모양이구나. 그러면 기다리지 말고 일찍 올거지 그랬구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쩌다 딸집이라고 찾아온 친정아버지한테 냉면 한그릇조차 대접하지 못하게 된 순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버지, 그런게 아니예요. 기실은…” 순자가 자초지종을 여쭈자 친정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딸을 나무람할 대신 오히려 칭찬하는 것이었다. “잘했다. 난 내일이라도 절로 냉면집에 가서 사먹으면 되지만 그 노인네는 그럴 수도 없는 게 아니냐? 잘했다. 아주 잘했다.” …… 이렇듯 순자네 가정의 일거일동을 주시해왔던 조분단 여사였다. 그래서였던가. 조분단 여사는 순자와 순자네 가족성원 모두가 맘에 든다면서 자주 마실도 다녔고 혹간 어디로 나갈 때면 순자한테 집을 봐달라기도 하였으며, 명절기간이 되어 2-3일씩 집을 비울 때면 아예 순자한테 열쇠를 맡기기까지 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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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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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6)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 ■ 김철균 당신이 일단 한국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무릇 그가 기업인이든 학자든 또한 회사 말단직원이든 막론하고 그들이 한결같이 한국자랑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입은 옷 뭔지 알아? 한국산이야.” “이게 다 뭐예요? 우리 한국사람은 절대 안 이래요.” 또한 얼마전 한국TV “그대 그리고 나”에서 봤는데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여인이 고객를 붙잡고 하는 말이 “아줌마 더덕 사세요. 제가 갖고 온 더덕은 중국산이 아닌 토탈(몽땅) 오리지날(진짜배기) 한국산 더덕이거든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허참, 산에서 절로 자라는 더덕도 한국산이 중국산보다 정말 우월한지?…하지만 한국사람들이 자기들 한국산을 갖고 일종의 자호감을 느끼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한편 한국선박에서 근무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한국의 부산항은 화물을 싣고 부리우는 작업도 번중하지만 한국선박들마다 사올리는 수많은 부식물 때문에 선식(船食)회사의 차량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 지경이다. 당시 필자가 승선했던 “코리안스타호(KOREANSTAR)”의 통신장 이덕수씨에 따르면 매일 부두를 통해 선박에 오르는 부식물은 전반 부산시 공급량의 평균 10%에 달한다고 한다. 10%라면 대단한 수자다. 이는 부산시의 재정수입의 10%가 보탬이 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주지하다싶이 한국의 물가는 아시아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엄청나게 비싼 축이다.그럼에도 한국선박들에서는 왜 한국땅에서만 꼭 부식물을 올리는걸까? 거기에는 물론 한국인의 식성이 독특하여 김치, 된장, 고추장 등 부류를 즐기는 것에도 관련된다. 하지만 돈을 쓸 바엔 나라의 진흥에 보탬이 되도록 자기 나라의 땅에서 쓴다는 애국심이 더 큰 작용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선원들 스스로 사들이는 술과 담배따위에서도 더 한층 반영된다. 한국산 술과 담배가 양주나 양담배보다 더 맛이 있다고 하면 그건 싸가지 없는 미친놈이 분명하나 한국선원들은 해외에 나가면 쌔고버린 “말보르”표 담배나 “죠오네카” 표 위스키 등 술·담배는 제쳐놓고 국산품인 “8.8나이트”나 “진로”표 소주같은 것을 박스들이로 사올리군 했다. 하다보니 저 멀리 남미의 포클랜드건 유럽의 로톨담이건 또한 아프리카 열대지대건 할 것 없이 일단 한국선박만 만나면 우리는 그곳에서 한국의 김치와 된장을 맛볼 수 있었고 한국소주에 한국담배를 구경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선박이 한국으로 들어가지 못할 경우 두번째로 부식물을 많이 올리는 곳이 바로 스페인의 라스팔마스(다른 곳도 적지 않겠지만)라고 할 수 있었다. 라스팔마스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선식회사를 놓고볼 때 그 물건들 거개가 대양건너 한국에서 비행기로 날라온 것이기에 운송비용도 많거니와 중개인이 값을 더 붙이는만큼 비씨기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하지만 한국선박과 한국선원들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회사를 골라가며 이용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에피소트가 있다. 한국선원들이 한국산을 그토록 애용하며 돈을 아끼지 않자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도 한시기 한국선원들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슈퍼나 가게 등에 숱한 한국산제품을 진열해놓았다고 한다. 헌데 지나가는 한국선원들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추 한집 건너에 있는 한국집으로 몰켜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스페인사람들로 놓고 보면 통분할 일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인을 독종이라고 불렀지만 이치는 뻔한 것, 아무리 한국산이라 해도 그것이 일단 외국인장사군한테 넘어간 다음에는 더는 한국의 것이 아니란 것, 한국선원들이 같은 값이면 외국인이 돈을 벌게 할리가 만무했다. 한편 라스팔마스에 거주하는 한국인(약 2000명)들 사이에는 아래와 같은 애국심이 작용했다. 그 주요한 표현으로는 한국상인들끼리 상부상조하는 형식으로 내가 너의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주고 네가 나의 식당에 와서 먹어주는 등등이었다. 이렇게 하면 한국인들의 수중에 있는 돈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나중에 그들이 귀국할 때 결국 한국으로 흘러들기에 최종적으로 나라에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외 라스팔마스의 한국인들은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한테 한국의 김치나 사시미(식회)같은 것을 극구 홍보하면서 한 두 번씩 공짜로 먹게 하는데 이것 역시 현지인들이 주머니를 털게 하는 책략중의 하나였다. “호텔강촌”의 유혁선 여사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김치나 사시미같은 것은 처음에 맛볼 때는 시굴고 매워서 얼굴을 찡그리지만 일단 맛을 들이기만 하면 그 자극성에 인이 박혀 자주 찾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일례로 “호텔강촌”에서 술도 마시지 않으면서 밥에 김치 한접시와 생게살무침을 순식간에 다 비우고나가는 한 스페인 여인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녀는 매주 꼭 한번씩 약속이라도 한듯 그런다는 것이었다. 총적으로 한국인들의 애국심은 한국이 처한 환경과 지리적 위치와도 크게 관계되는상싶다. 한국이란 나라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오랫동안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했었다. 하기에 한국인 거개가 독립된 한국의 소중함을 심각하게 느껴지면서 애국심이 생기게 된 것이고 다음 동쪽으로는 경제강국 일본, 서쪽으로는 중국이란 대국이 버티고 있는데다 북쪽으로는 동족이지만 사상과 이념이 서로 다르고 지난 1950년대에 3년간이나 서로 총포를 맞대고 싸운 적이 있는 조선이 있기에 항상 위기감이란 것이 생겨 그것이 결국 나라를 지키기 위한 분발과 노력이 자연히 생기게 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긴 이를 두고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을 “반도성격”이 농후하고 “지역감정”이 강하다고들 하지만 한국이 처한 환경이나 지리적 위치를 알면 “과연 그렇겠구나”하는 이해도 간다는 것이 필자의 일가견이다. 또한 외국인들이 말하는 “반도성격”이나 “지역감정”이 농후한 한국인들이 좀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바로 이런 “극단”이 있었기에 약 2년전에 생긴 아시아금융위기를 재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다면 이에 반해 우리 중국의 조선족을 보면 한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실시하는 중국에서 살고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동족 중의 하나이며 유일하게 주체민족보다 뒤떨어진 민족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것 같다. 어떤 견지에서 보면 바로 나라의 우월한 소수민족정책 때문에 우리의 정신상태가 약화되었다는 것도 배제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은 건달이 되고 그에 따른 손자는 거지가 된다는 설도 있으니까. 누구를 원망하랴. 남을 원망할 이유는 털끌만치도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우리들 자체에 있으니까. 애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긴 우리가 중국에서 사는만큼 중국이란 이 나라를 사랑해야 하겠지만 우선 애족이 일차적 과제라고 보아진다. 가정애, 고향애, 민족애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애국같은 것이 있겠는가. 민족을 사랑하는 차원에서 민족의 교육, 민족의 문화 및 민족의 경제를 춰세우는 것으로 나라의 부담을 덜고 나라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애국의 체현이 아니겠는가. 이렇다고 할 때 민족의 자질 즉 우리가 이 땅에서 영원히 생존하자면 또한 주체민족보다 더 잘살 수 있는 자세와 정신을 키우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고 그 뒤 자질높은 인구를 늘이는 것이 이차적인 과제라고 하는 것이 명지한 책략이라고 보아진다. (끝) <김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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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6)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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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0)
- ■ 김철균 1 인생의 가치관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그것을 가늠하는 표준이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높은 관직에 오르면 가치관을 실현했다고 인정하고 어떤 사람은 한평생 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부(富)를 축적하면 가치관을 실현했다고 자호감을 느끼며 또 어떤 이들은 자기보다도 남을 위하고 사회와 나라에 기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정한다. 즉 그것으로 인생의 가치관을 가늠한다. 그렇다면 순자는 그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우선 순자는 가정교양을 잘 받았다. 딱히 가정교양이라기보다는 착한 심정을 지난 부모님의 행동에서 많이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들한테는 제일 처음의 선생이 부모라는 말도 나온상 싶다. 특히 딸은 흔히 어머니를 많이 닮는다고 한다. 이는 순자같은 여인을 두고 한말인 것 같다. 순자가 철이 들기 시작해서부터 받은 부모에 대한 인상이라면 아버지는 말수가 적으나 대 바르고 사리가 밝았으며 어머니는 남에 대한 동정심이 많고 맘씨 고왔을뿐만 아니라 역시 사리가 밝았으며 아버지와 어머니 두분이 공동으로 갖고 있는 특점이라면 남한테 좁쌀 한줌, 옥수수 한이삭이라도 주고야 시름을 놓는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요즘 말대로라면 베푸는 인생이라고 할까? 시집와서 애낳고 남편을 섬기고 하는 생활 중에서 순자는 그제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자기 자식보다 남의 집에서 들어온 자식을, 자기 집보다 남의 집을 먼저 돌보아야 가정과 동네가 화목하다는 것을 더욱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순자의 기억에 따르면 그제날 어머니는 항상 외동딸인 자기보다도, 그것도 자기보다 한창 손우인 올케들을 먼저 생각해주군 했었다. 어쩌다 집에서 돼지고기라도 삶으면 “식솔이 적으만치 열다섯인데 언제 너희들한테 차례지겠냐”며 먼저 며느리들의 입에 고기덩이를 억지로 밀어넣어주군 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다싶이 둘째 며느리가 물동이를 깼을 때 순자가 올케의 역성을 들며 자기가 깼다고 했지만 기실 부모님들이 이를 모를리 없었다. 그저 순자한테 속히운척 하며 며느리를 책망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이었다. 또한 딸 순자가 용환총각과 결혼하면 크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용환총각이 살고 있는 환경이 하도 딱하게 보여 그 혼사를 허락한 부모님이기도 했다. 순자는 착한 부모님의 품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특히 그는 올케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다. 공휴일에 집에 오게 되면 늘 올케를 따라 내가에 가서 빨래하는 것을 도와주거나 터밭의 김을 맬 때도 풀을 뽑아주는 것으로 도와주면서 올케들의 말친구가 되어주군 했다. 이렇게 올케와 작은 시누이가 잘 어울리자 동네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했다. “저집 명기 양반네 며느리와 딸을 좀 보오. 어른들이 지체높고 착하게 사니까 며느리와 딸도 그것을 따라배우는구만. 그러니 가정에서는 본보기가 있어야 한다니까.” “저 집의 며느리와 딸은 어쩌면 저리도 사이가 좋누?! 올케와 시누이가 아니라 꼭 마치 모녀사이가 같지를 않쑤?” “명기양반네 딸을 보면 우리 봉녀는 하늘과 땅 차이예유. 저 것 저 년이 언제 철이 들겠는지? 사람의 오복중에 자식복도 들어있다는데 이 팔자는 남정복이 없는데다 왜 자식복마저 없누?!” 순자는 학교에 다닐 때에도 마찬가지었다. 당시 학교로 가는 길 도중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한 40대의 아낙네가 있었는데 항상 행인들한테 “6전만 주오, 6전만 주오”하며 구걸하고 있었다. 순자네 또래들은 학교에 가고 올 적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그 여인과 맞띄우군 했다. 그 여인을 보고 남자애들은 돌팔매를 놓거나 “정신병자”라고 놀려주었고 여자애들은 그녀가 무섭다고 피해다녔지만 순자는 달리 생각했다. 때는 한창 겨울이라 발가락이 다 보이는 헐망한 신을 신은 그녀를 보고 더욱 가슴이 알작지근해나기도 했다. 순자는 그 이튿날로 헝겊천오리 한뭉터기를 갖고 와서는 사람만 보면 “6전만 주오, 6전만 주오”하면서 헤식게 웃어대는 그 아낙네를 붙잡고는 신안에 넣어주고 해진 곳을 헝겊끈으로 동여주었다. 그 때 동행하던 여자애들은 몹시 의아해했다. “얘, 불쌍한 사람이 따로 있지 왜 저 정신이상증에 걸린 여자한테 그런 선심을 베푼다니?” “그런게 아니야. 아무리 정신병에 걸렸다지만 그 여자도 사람이야. 입장을 바꿔놓고 혹시 네가 저 녀자의 처지인데 남들이 다 배척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니?” 이렇듯 순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착하고 남을 잘 돕는 마음은 중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고 용환총각과 결혼할 때도 그랬으며 결혼하여 애들을 낳은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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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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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19) 바다의 신기루
- 맑게 개인 날에 만약 운이 좋다면 그대는 해변가 혹은 사막지구에서 아름답고도 높은 건축물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볼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바로 기이한 바다의 신기루 풍경이다. 바다의 신기루현상은 기실 신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양빛이 특수한 조건에서 대기층에 형성된 편원형, 삼각형, 타원형 등 부동한 형태로 환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환영(幻影)의 광선은 일반적으로 밀도가 고르롭고도 평온한 공기중에 직선으로 전파된다. 또한 공기중 각 층의 밀도가 부동할 때 광선은 곧 굴곡을 이루면서 절사현상(折射现象)이 산생하고 공기밀도의 수직변화가 매우 현저할 때면 빛은 대기중에서 전체가 반사 혹은 절사현상이 나타나면서 보이지 않은 먼 곳의 물체가 거울로 비추듯이 공기중에 비껴오는데 사람들한테 환영같은 허상을 주기도 한다. 이런 허상이 바로 신기루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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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19) 바다의 신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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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시기 중국 제1의 여성박사 - 정육수
- 정육수(郑毓秀: 1891년 3월 20일 ㅡ 1959년 12월 16일)는 광동성 광주부 신안현(지금의 심천시) 사람으로서 별명은 소매(苏梅)이다. 그는 청조말년과 중화민국의 혁명가이고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첫 여성박사였고 첫 여성변호사였으며 첫 성급여성정무관이었으며 첫 지방법원의 여성원장이기도 했다. 정육수의 부친은 청조의 호부관료인 정문치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정육수는 동년에 유학(儒学)을 배우고 “사서”와 “오경”을 읽었으며 후에는 천진교회의 숭실여자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광서 31년), 정육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 기간 그녀는 요중개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한다. 1911년(선통 3년), 정육수는 귀국하여 혁명파(암살조직)조직의 연락원 등 직무를 담당, 경진동맹회에 참가하여 원세개를 암살하는 행동계획에도 참여한다. 1912년(민국 원년) 1월, 정육수 등이 원세개암살계획을 개시하기 직전, 경진동맹회의 긴급지시에 의해 이 계획이 취소되고 대신 정육수 등은 양필(良弼)암살행동에서 성공하며 그 행동에서 정육수는 중대한 공헌을 한다. 그해 여름 정육수는 프랑스로 건너가 근공검학을 하게 된다. 1914년 그녀는 파리에서 법률을 전공하기 시작, 1917년 파리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법률협회에 가입한다. 1925년 정육수는 파리대학에서 법학박사칭호를 수여받고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법학박사로 된다. 그뒤 그녀는 북경정부로부터 유럽주재 조사위원으로 임명받고 사업하다가 귀국하게 된다. 귀국후 정육수와 그녀의 유학시절의 친구인 위도명은 상해의 공공조계지에서 법률사무소를 차린다. 이것으로 그녀는 중국역사상의 첫 여성변호사가 된다. 1926년(민국 15년), 중국 남방정부파인 대학교수 양향불이 상해당국에 의해 체포되자 정육수는 양향불의 변호사로 되어 법정변론에서 승리해 양향불로 하여금 석방되게 한다. 그해 4월 그녀는 산서회의파의 국민당 제2기 후보 중앙감찰위원으로 된다. 1927년 4월, 정육수는 강소성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고 연말에는 상해임시법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상해법정대학 교장까지 겸하게 된다. 그해 8월 정육수는 위도명과 결혼하였다. 1928년, 그녀는 국민정부 유럽주재 특사로 파견되어 중국과 프랑스와의 쌍방우호사무를 주로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11월 귀국해서는 국민정부 입법원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 기간 그녀는 민법편찬위원으로 민법초안을 작성할 때 몇가지 여성권리보호에 관한 조목을 제출해 증가하도록 했다. 그 뒤 정육수는 국민정부 건설위원회 위원, 재해구제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사업한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후엔 국민정부 교육부 차장으로 되기도 한다. 1942년 남편인 위도명이 주미대사로 임명되자 정육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중국지원다국회(各国援华会)의 명예주석으로 된다. 항전승리후 그들 부부는 귀국, 정육수는 재차 국민정부 입법위원으로 된다. 그러다가 대만성정부의 주석으로 있던 위도명이 사직하면서 1948년 그들 부부는 브라질로 이민가게 된다. 그 뒤 사업의 실패 등 원인으로 그들 부부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만년에 정육수는 암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9년 12월 1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69세을 일기로 사망한다.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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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시기 중국 제1의 여성박사 - 정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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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9)
- 퐁텐블로궁전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의 퐁텐블로 함의: 유럽 18세기 실내장식예술의 박물관 프랑스어로 퐁텐블로의 뜻은 “아름다운 샘”으로 일찍 이곳에 있은 팔각형의 작은 샘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일찍 12세기경 프랑스 궁왕인 루이 6세가 이 궁전을 짓고는 사냥하면서 휴식할 때 이용하군 했으며 사람들은 이 성곽을 퐁텐블로궁전(枫丹白露宫)이라고 불렀다. 이 궁전은 무성한 수립속에 있는데 부지면적은 84만제곱미터에 달한다. 궁내에는 저명한 백마광장, 프랑소와 (弗朗索瓦) 1세가 쓰던 긴 복도, 무도청 등 건물이 있으며 궁전밖에는 아름다운 디아나화원이 있다. 백마광장과 프랑소와 1세가 쓰던 긴 복도 백마광장은 프랑소와 1세가 재건한 것으로 궁내로 들어가는 긴 복도의 입구에 있다. 입구에는 거대한 말제형 계단이 있는데 이는 이 건물의 주요한 특색이다. 1814년 패전한 나폴레옹이 바로 이 퐁텐블로궁전 대문앞 말제형 계단의 오른쪽에서 거닐렀다고 하며 이로하여 백마광장은 영별광장으로도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 저명한 프랑소와 1세의 긴 복도는 벽에 많은 아름다운 벽화들로 하여 전체의 복도가 휘황하고도 우아하게 만들고 있다. 디아나화원 전형적인 유럽성곽식건물이라 할 때 모두 성곽과 거기에 배비된 정원이 있는데 퐁텐블로궁전도 예외가 아니다. 궁전의 서북쪽에는 아름다운 다아나(黛安娜)화원이 있는데 이를 “황후화원” 혹은 “등원(橙园)”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화원의 중앙에는 디아나 여신상이 세워져있으며 그것이 분수와 함께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여신은 활을 들고있는데 동작이 우아하고 매우 활력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네마리의 사냥개가 여신 디아나의 발밑에 엎드려있는데 분수가 사냥개의 몸으로부터 뿜겨져나와 분수와 여신상이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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