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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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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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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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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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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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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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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한국 불법기록, 주홍글씨 되나?
    ■ 이성기 1992년 중.한 양국수교 이후 수많은 조선족 1세대들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선 “불법체류”를 하는 행동이 한때 불가피한 이유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들을 한국출국 조선족 1세대라 지칭하여 본다. 이 1세대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고향귀국 후 안정적인 삶을 위한 목표가 있었기에 근로현장을 중심으로 묵묵히 일을하여 가정을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된다. 21세기가 시작된 이후 1세대들의 후원을 받은 2세대 자녀들의 한국행이 줄을 이었고 부모세대 덕분에 풍족한 삶을 영위하였던 2세대들은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의 법규를 위반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실제 법무부 통계를 보아도 2000년 전.후를 살펴보면 1세대들은 대다수 “위장결혼, 불법체류, 신원불일치” 등 한국출국 목적과 한국생활 연장을 위한 생활형 법규위반이 주요 위법항목 이었지만 2000년 후로는 “폭력, 보이스피싱, 불법체류, 공사문서위조” 등 위법항목 사안이 강한 형사건들이 많아짐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모순도 있겠지만 1세대들에 비하여 산업현장에서 땀흘려 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기 보다는 우선 당장 쉽게 눈앞에 이익을 쫒은 결과가 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 분석해 볼 수 있다. 한국 법무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단순 불법체류자에 한해서는 자진신고 시 형량을 감경하여 통상 1년정도의 입국규제를 제한하고 있다. 허나 한국정부의 대 조선족 정책이 다양해 지고 문호의 개방이 넓혀짐에 따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강력범죄와 한국출국 목적을 위한 고의적 공.사문서 위조의 경우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강제추방 후 한국입국을 원천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생활하는 지역과 공간에서는 법규를 준수하고 살아감이 본인 스스로를 위해서도 전체의 대의를 위해서도 필히 필요한 필수 항목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4월을 기점으로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부이기는 하나 한국에서 법규를 위반하고서 중국에 추방혹은 자진신고 후 일정기간의 입국규제 기간을 모두 채웠지만 과거의 잘못이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찍혀 한국방문의 어려움을 겪게되는 대상자가 늘어만 가고 있다. 앞선 설명대로 강력범죄 대상자의 경우 원칙적인 입국규제를 함은 옳지만 한국의 법규에 대한 무지와 체류기간 일자 계산을 잘못하는 등의 인도적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항목들이 과거에 비하여 한국 법무부의 강한 규제로 인한 범법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법무부는 올해 4월부터 3년복수비자, 1년복수비자 등 조선족 이라면 년령을 불문하고 누구나 편리하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정책을 내 놓았다. 이와함께 한국에서의 조그마한 법규위반 이라 할지라도 위법자에 대해서는 한국방문의 기회를 봉쇄하고 있는 실정임에 좌절되는 한국방문에 낙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만 가고 있다. 올해 5월 이전에는 방대한 업무량이 몰리는 심양한국영사관 에서 진행해 오던 “영사면담제”역시 사실상 잠정 패쇄된 상황이라 본인의 사유를 설명하고 기회를 얻을수 있던 창구역시 막혀버린 실정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고의성이 아닌, 특히 외국생활로 인한 해당 국가의 법규를 인지하지 못하여 발생되는 착오로 인한 법규위반은 세계 어느 국가이던 발생되게 마련이다. 법무부에서는 모든 법규위반자에게 무조건적인 입국허가를 진행하여 달라는 의견이 아닌 법규위반 내용을 살피어 단순 법규위반 자일 경우에는 인도적사유를 적용하여 입국규제 기간을 다 채웠다면 다시금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될 수 있도록 행정적 보완을 하여 주었으면 하는 필자의 바램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들 역시 이제는 모두다 알수 있듯이 한국정부에서 조선족에 대한 한국방문 문호를 과감히 개방한 만큼 해당 국가의 법규를 준수하고 모범적인 한국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자의. 타의의 환경으로 인하여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 중국공민, 조선족이 된 우리 선조들이 그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하여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하며 고생을 하면서도 민족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이어왔던 것은 한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않기를 바램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세기가 지난 후 이루어진 조선족과 한국인으 만남으로 인하여 한국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지 못한 잘못된 선입견이 많은것 또한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한민족이라 생각하여 고향이라 생각되어 더 친근히 한국을 방문한 동기가 되었지만 아직은 서로가 진정한 소통을 이루지 못함에 많은 오해와 모순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조선족 스스로 한국생활 중 모범적인 생활과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줌은 진정한 한민족으로 소통되기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우리는 꼭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한국생활을 시작한 제3세대 조선족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의 당신의 우리의 자녀들이 얻게 될 진정한 권리와 한민족으로써의 긍지를 느끼게 하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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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2
  • 오묘한 세계대백과(21)사계절의 교체
    봄이 되면 백화가 만발하고 기후가 따뜻해지며 여름이면 태양이 불볕같아 작은 새들마저 더운 나머지 숨도 바로 쉬지 못한다. 그러다 가을이면 대지가 쌀쌀해지면서 낙엽이 흩날리고 겨울이 되면 날씨가 혹독하게 추워지면서 나무들이 앙상한가 하면 대지가 백설세계로 변한다. 사계절은 이렇게 부단히 순환하며 한 해가 가면 또 새로운 한해가 다가온다. 하다면 그대는 사계절은 무엇때문에 교체되면서 출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기실 사계절의 교체는 주요하게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결과인 것이다. 지구는 운동하기 좋아하는 “아이”마냥 태양 주위를 쉼없이 돌고 돌며 한바퀴를 다 돌면 1년이 된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 때면 곧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기우뚱하고 선 채 쉼없이 서쪽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공전한다. 때문에 태양이 지구표면상에 직사하는 빛도 변화가 생겨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에서 받는 태양열량 역시 부단히 변화하면서 사계절이 윤번으로 생기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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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8-2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 (20) 법륭사
    법륭사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일본, 지점: 나라현(奈良) 의의: 일본 불교문화시대의 종교문화보물고임 법륭사는 기원 607년에 건립, 선덕태자가 세운 불교의 목조결구로 된 사원이며 현재세계서 보존력사가 가장 길고 가장 큰 목조건물이랍니다. 법륭사의 부지면적은 18.7만제곱미터로 동쪽과 서쪽의 두개 사원으로 분류, 서쪽 사원은금당(金堂)과 오중탑(五重塔)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쪽사원은 유몽전(有梦殿)으로 돼있다. 법륭사에는 소장품이 수없이 많은바 일본의 건축, 조각과 그림 등 방면의 걸작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는 일본문화와 종교유산의 중요한 조성부분으로 되고 있다. 금당과 오중탑 법륭사의 서쪽 사원에 있는금당은 기원 620년에 건립, 정체의 평면은 정방형과 흡사하며내부에는 정전(正殿)과 배불당(拜佛堂) 이 있다. 배불당의내부벽에는 석카모니상과 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다음 금당옆의 오중탑은 일본의 3대 명탑중의 하나로서 높이가 31.5미터에 달하며 사람들한테 일종하늘로 날애치는듯한 감을 준다. 그리고 탑의 최하층에는 나량(奈良)시대의 초기에 만들어진 조각상군이 있는데 나랑시대의 조각예술이 고봉에 올랐음을 말해준다. 신비한 유몽전 유몽전은 동쪽 사원의 중심에세워진 건물로서 기원 739년에 세워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팔각형 건축물이다. 전당중앙에는 화강암으로 구건된 팔각형 불단이 있는데 거기에는 제작이 정밀한 구세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전하는데 따르면 당시 선덕태자는사람들의 애대를 받았는바 그가 법륭사를 세운 것은 일찍 꿈 속에서 한 신선을 만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후세사람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유몽전”을 세운 것이라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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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2
  • “득”과 “실”은 항상 병존하는 법
    ■ 김철균 지난해 필자는 연변 주내 모 예술분야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한테 중국 인민폐로 2만위안 정도 사기당했다. 어릴적 훈춘에서부터 함께 자라던 송아지 때의 친구한테 당했으니 분통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 돈을 받으려고 그가 근무하는 예술단을 찾아다녀보기도 하고 변호사를 찾아 해당 법률자문도 해보았었다. 그러다가 올해에 들어와서는 단 한번도 그한테로 찾아가지 않았다. 그 돈을 받을 가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그 예술단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 법원에 기소해 법적으로 재정으로부터 지급되는 그 “친구”의 봉급을 동결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가 있었다. 그저 시간적으로 빠른가 늦은가 하는 차이가 있을뿐이었다. 올들어 내가 그를 찾아가지 않는건, 그한테 찾아다니는 정력과 시간이면 다른 일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한테 시간과 기회를 주어 자신을 반성해보게 하려는 것도 있었으며 또한 바꿔놓고 빚진 인간으로서의 그의 입장을 생각해본 것도 사실이었다. 하다면 그가 나의 돈을 빌려간 것도, 갚지 못하는 것(노름을 했거나 다른 한 빚진 곳이 있거나)도 사연이 있을 것이며 이것 때문에 그 또한 심한 고통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도둑이 제발등 저리다”고 전화 한번 걸려와도 빚재촉 전화인가 하고 긴장할 것이고 거리를 나서도 누가 다가와 뒤덜미를 덜썩 잡을까봐 조심조심 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돈을 떼운 나는 발편 잠을 잘 수 있어도 그만은 심한 모순과 번민속에서 모대기며 뜬 눈으로 밤을 샐 수도 있었으리라… 잠깐, 이리고 보니 “문화혁명” 후기에 있은 일들이 갑자기 떠오른다. 1978년 여름, “문화혁명”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우리 가정에도 “정책낙실”이 되었다. 아버지의 묘와 어머니의 묘를 합장하던 날, 촌의 여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그들 중에는 나의 부모님을 지독하게도 박해하던 사람도 몇명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의 눈에는 불이 일었다. 10살에 아버지를, 11살에 어머니까지 잃고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숱한 고생을 감내해왔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울컥 하는 원한을 참을 수 없어 우리한테 “용서”를 빌며 사죄하는 김××란 인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면서 주먹 하나를 날리려던 찰나, 당시 훈춘시병원의 부원장으로 근무하는 형님 김승균씨가 나의 팔을 잡으며 한사코 뜯어말리는 것이었다. “지금 저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한테서 한두매 맞았으면 할거다. 그러면 맘이 편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극단적으로 ‘원수’를 갚으면 새로운 ‘원한’을 살 수도 있는 법이다. 넓은 가슴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생각이 있을 것이다…” 하긴 그랬다. 그들은 우리와 부딪치는 걸 몹시 꺼려했다. 길가에서 만나도 저만큼씩 피했고 혹시 모임에서 한 자리에라도 앉게 되면 그 모임을 파하기 전에 자리를 뜨군 했다. 그리고 간혹 피할 수 없을 장소이기만 하면 항상 얼굴에 어색하고도 “비굴함”과 비슷한 웃음을 바르면서 담배도 권하고 술도 따라주면서 그랬다.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말한다면 몇해가 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절명하더라 그 것이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어떻게 하늘아래서 허리 펴고 살 수 있느냐?! 하늘이 천벌을 내린 것이다” 라고들 했다. 하지만 필자는 “하느님”이 천벌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심한 번민과 자책과 고통속에서 병을 얻었고 또한 그것이 “암”이 되고 “불치의 병”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싶었다. 한시기 “홍위병 사령”이요, 혁명위원회 주임이요 하며 사람을 개 패듯 하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길은 그렇게 쓸쓸했고 지어는 “애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에 “자업자득(自业自得)”이란 사자성어도 생겨나오지 않았나 싶다. 또한 그때 나는 “득(得)”이 있으면 꼭 거기에 정비례가 되는 “실(失)”도 반드시 있게 된다는 철리도 깨닫게 되었다. 세상사를 보면 이러한 사례는 너무나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18세기~19세기 당시 세계 곳곳에 식민지가 있다 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영국도 이제는 세계패권을 미국한테 내놓은지 100년이 돼오고 있고 미국이란 “국제경찰”의 호시절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한시기 독재자로 유명했던 싸담 후쎄인, 무바라크와 카다피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도 최후의 운명은 모두 비참했다. 중국국내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시진핑 정권이 반부패의 화살을 날림에 따라 지난해에는 보이시라이가 도마위에 올랐고 올해는 저우융캉이 보이시라이의 뒤를 따라 법망에 걸려들었다. 보이시라이와 저우융캉ㅡ 한시기 얼마나 위풍을 날리며 제밖에 없노라 턱이 높았던 사람들이었던가. 그들이 지금 “가련한 신세”가 됐다. 보이시라이와 저우융캉의 실각, 이는 중국 반부패운동의 확실성을 긍정할뿐만 아니라 “득”이 있으면 반드시 “실”이 뒤따른다는 철리를 더욱 잘 설명해준다. 이는 인간 대 인간 사이도 마찬가지란 생각이다. 남한테 얻어맞아도 괜찮고 남한테 잃거나 사기를 다해도 속은 편하겠지만 남을 때렸거나 남의 것을 공짜로 가지고 또 사기를 친다면 남의 저주를 받기에 앞서 자신의 양심이 몹시 찔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남한테 조금씩 밑지고 베풀고 또 조금씩 남을 생각하며 살자. 겉보기에는 바보인 것 같지만 그것이 제일 현명한 “인생철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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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13 )
    ■ 김철균 위에서 언급되다싶이 과외보도원이란 보수가 없는 “직업”이었다. 아니, 순자로 놓고 말하면 과외보도원을 맡으면서 자주 집의 물건을 학교에 가져다 바치면서까지 학교를 위해 일하다 보니 항상 밑지는 “거래”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그렇다면 순자네 가정형편이 월등해서인가? 절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미 여러번 언급되었지만 의지가지 없는 고아인 김용환한테로 시집을 왔고 또 몇년간 군정대학에서 공부하는 남편의 뒤바라지를 하였으며 거기에 영남이와 영순이를 연연생으로 낳은데다 그 아래로 영옥이와 영애 이렇게 자녀들이 육속 생기다보니 생활이 펴일 사이가 없었다. 그것도 남편 한명의 노임에 매달려 살다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여유가 있어서만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란 순자의 좌우명은 학교의 과외보도원생활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학교의 물통 밑창이 구멍나면 집의 물통을 가져가고 비자루, 쓰레기통, 물걸레와 심지어 학교벽보란을 만들 때 쓰이는 널판자까지도 집의 것을 가져가군 했다. 그 중 비자루는 시골에서 친정아버지가 만들어 해마다 몇개씩 보내준 것인데 그것을 순자가 다시 학교로 가져갔던 것이었다. 한편 순자가 이렇게 할 수 있는데는 남편 김용환의 이해와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만큼 남편 용환이는 순자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 밀어줄 위인이었다. 그것은 용환이한테 있어서 순자는 항상 “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교원직업을 단연히 포기하고 자기와의 결혼을 선택한 여인 ㅡ 아내가 교원직업을 버리고 자기한테로 시집온 뒤 어떤 대가를 치렀다는 것은 남편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안해가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과외보도원 사업을 맡겠다고 할 때 웬간한 남정들같으면 그것을 극력 반대하면서 “집에서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호령할만도 했으련만 용환이는 오히려 적극 지지해나섰다. 건국전의 중학교를 졸업한 순자의 지식과 재능이 그대로 썩는 것이 아까워서라고 할까? 아니면 그토록 사랑하던 교원의 꿈을 과외보도원이라는 무보수근무에 의해서라도 펼쳐보게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여하튼 김용환은 아내 순자의 과외보도원 사업을 적극 밀어주는 것을 아주 마땅한 일로 간주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과외보도원인 순자를 자주 불렀다. 반급에 그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순자가 가서 곧잘 해결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의 말이 설득력이 강해서인지 학생들은 그의 말을 곧잘 듣군 했다. 학생들을 교양함에 있어서 순자는 절대 강압적이 아니었다. 실제 행동으로 학생들을 감화시켰다. 예하면 반급의 유리창을 닦을 일이라도 있으면 언제 한번 어느 어느 학생이 창문턱에 올라가서 닦으라고 시킨 것이 아니라 번마다 솔선수범하군 했다. 특히 순자가 신흥소학교의 과외보도원으로 된 뒤 수개월이 지나자 둘째 아들 경남이가 생겼는데 아이를 업고 학교활동에 참가할 때가 자주 있었다. 어린 경남이를 업고 바닦을 쓸고 유리창문을 닦군 하는 순자를 보노라면 교원은 물론 학생들 모두가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선생님이 있으면 저는 모든 것이 든든해요. 어쩌면 큰 소리 한번 치지 않고 학생들이 잘 따라주게 하는지요? … 전 매일마다 순자선생님이 몰래 기다려지게 되는군요.” 이는 당시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 이 두 학교 거의 모든 담임교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었다. 순자는 또 매번 중앙소학교의 영남이네 반급 혹은 신흥소학교의 영순이네 반급에 들려도 절대 자기 자식한테 먼저 눈길을 쏠리는 법이 없었다. 전 반급의 모든 학생들이 옷은 단정하게 입었는지? 정신면모는 밝은지 하는 것부터 둘러보고 나서야 담임교원한테 반급의 이것 저것 다른 것을 묻군 했는데 언제 한번 “저의 집 애가 어떤가”고 묻는 것이 아니라 “전 반급의 성적이 어떤가?”, “요즘 앓는 애는 없는가?”, “학생들이 위생을 지키는 방면에는 어떤 부족점들이 있는가?” 등등이었다. 한편 당시 순자는 큰 아들 영남이네 반급의 담임교원이 병으로 교단에 오를 수 없게 되자 학교지도부의 허락을 맡고 몇차례 교단에 오르기도 했다. 결과 교수안을 작성한 실력이나 교수하는 능력이 비범하여 학교의 모든 교직원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어서 교원들과 교장선생님 등은 순자가 건국전에 용정의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수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일반 “교원이 턱없이 부족한 요즘 세월에 저런 분이 우리 학교 교원으로 돼줬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면서 몹시 아쉬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렇게도 교원의 꿈을 갖고 있으면서도 교원이 되어보려고 이곳 저곳 해당부문을 찾아다니며 노력해보지 않은 순자였다. 학력과 능력에 거기에 남편 등이 해당부문에 줄을 놓아 손을 써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닐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순자와 남편 김용환의 처사 ㅡ 이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을뿐이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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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1
  • 지구의 하소연 “인류, 내 건강 챙겨다우!”
    ■ 이진숙 내 이름은 지구다. 70억명이 넘는 자녀를 둔 어머니이다. 내 나이는 50억살, 과학자들과 물어보니 내 수명은 100억살 좌우란다. 지금까지 나 지구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확답은 없지만 태양계의 기원과 밀접히 연계된다는건 분명하다. 만약 나와 세번째로 가까운 거리에 산다는 태양에 탈이 생겨 영향만 끼치지 않는다면 영존할 수도 있단다. 나도 태양계8개 행성에 속하니깐. 하지만 자식들이 지금처럼 계속 나를 괴롭히고 몸살나게 한다면 제명대로 살 것 같지 못하다. 중국 민간신화에 의하면 반고가 천지를 개벽하여 하늘과 땅이 생겨났다 한다. 태고시기 천지불변일 때 온 우주는 큰 달걀모양이었는데 그 속에 반고가 잉태되어 있었다. 1만 8000년 후에 잠에서 깨어나보니 어두컴컴한데다가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어 몹시 성난 반고는 도끼를 휘둘러 껍질을 깼다. 순간에 가볍고 맑은 것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어두운 것은 아래로 내려와 땅이 되었다. 반고는 발로 땅을 딛고 머리로 하늘은 받치고 1만 8000여년을 견디어내다 드디어 하늘과 땅이 더는 붇지 않았으나 그만은 기진맥진하여 죽게 되었었다. 반고가 죽은 후 그의 시체 모두가 세상 만물로 변하여 내가 애들을 키우기엔 너무도 충분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냐? 한창 중년나이에 온몸이 벌써 다 찌그러지고 힘 빠진 파파노파로 변해버렸구나! 입으로만 에미를 사랑할뿐 망가져가는 내 몸에 대해선 수수방관하고 속수무책이고 지어 불효자들은 난도질까지 하고있다. 알려주마, 이 어미를 떠나선 그 누구도 건강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을거다. 요즘 두루 신문 보고 TV를 보면서 하마트면 정신 잃고 쓰러질뻔 했다. 자식이란 놈들이 이렇게까지 할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리 바빠도 한번쯤 내말에 귀를 귀울려주렴. 일하기 싫어 화학비료와 농약에만 매달려 농사짓고 채소 가꾸고 하더니 그 비옥하던 토양은 메마르고 황폐해지고… 농약을 듬뿍먹고 자란 곡식과 채소와 과일들, 그러니 너희들도 날마다, 끼니마다 독약을 먹고 있는 셈이다. 정말 속이 탄다. 게다가 인간생활의 주요 터전인 육지면적의 15프로가 이미 퇴화되었는데 중국에서만 날마다 10제곱미터의 토지가 사막화되어 간다는구나. 앞으로 너희들이 제대로 먹고나 살는지, 참 걱정이다. 물, 물은 생명수라 했다. 지구상에 물이 70%라지만 담수는 겨우 2.8%, 직접 먹을 수 있는 물은 1%밖에 안된대. 세계12억 인구가 물난에 허덕이는데 중국도 엄청 물 부족이란다. 인구의 증장, 생활향상, 사회의 공업화, 도시화…쓰레기들이 마구 강물에 버려지고, 출렁이며 흐르던 강물이 하나 둘씩 바닥을 드러내고 물고기마저도 오염에 떼죽음 당하고. 아, 아ㅡ 너무도 비참하다. 그리고 공업혁명 후 지구의 평균 온도는 6도 상승했고 지금도 매년 평균 0.2도씩 상승하는 추세란다. 북빈양이 녹는다는 등, 바다가 육지보다 높아간다는 등… 지구온난화에 따라 공기오염도 심해지는 판이다. 최근엔 또 뭐냐? 스모그 때문에 중국 도시들에서 난리가 났단다. 그것이 다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다. 공기중의 유해먼지가 왜 생겨나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겠니? 사회발전만 집요하게 추구하고 환경보호를 뒤전으로 한 탓이지.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고, 제가 판 함정에 제가 빠져버린거지 뭐, 참 안타깝다. 생물들도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생물은 500만종 내지 1억종인데 매년 5만여종이 멸종된다고 한다. 매년 730만제곱미터의 살림이 감소된다니 어찌 생태환경이 파괴되지 않겠나. 산에 가도 지저귀는 새소리 들을 수 없고 밤이면 농촌마을마다 요란하던 그 개구리합창단도 다 해산되고 없다.그 옛날 그 때가 너무도 그립다! 광산자원도 다 고갈되어 간단다. 석유는 50년 좌우, 석탄은 20~30년 좌우, 2020년에 이르면 지구상의 동, 석, 연, 금, 은 등 대다수의 광물자원이 채굴을 마감한다 한다. 어떻하지? 좀 두렵기도 하다. 오, 내 몸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망가졌지? 이제야 비로서 알았다. 70억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어미가 이 정도 될 때까지 무심했으니 서글프기 그지 없다. 울고 싶다. 통곡하고 싶다. 문득 청개구리 이야기가 생각난다. 청개구리 7형제가 메라면 지고 엇박자만 치면서 한사코 엄마말을 안 듣길래 죽을 때 생각반대의 유언을 남겼다. 울며 통곡하던 7형제는 딱 한번이라도 엄마의 말대로 하자고 유언 그래로 강변에다 엄마를 묻었다. 그래서 비올 때면 떠내려갈까 후회하여 개골개골… 이쯤하면 자식된 너희들도 정신이 번쩍 들겠지. 입으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내 건강을 챙겨다우! 얘들아, 나도 젊어지고 건강해지고 싶다. 내가 건강해야 너희들도 건강해진다. 내가 오래 살아야 너희들도 행복하다. 지구-이 어미의 부탁 꼭 지켜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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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1
  • 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7)사 향 심
    ■ 김철균 여기는 대서양바다의 명주로 불리우는 스페인땅 ㅡ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 지금 이 시각, 밤하늘에 휘여청 걸려있는 저 달은 젖빛안개속에 잠겨있는 이 항구도시를 밝게 비워주고 있다. 이 시각 저 밝은 달은 머나먼 내 고향의 산천도 비춰주고 있겠지? 아니 아닐거야 지금쯤 고향은 한창 바야흐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맞고 있을거야. 세계의 동방, 제일 먼저 아침해를 맞는다는 내 고향, 오, 고향이 그립구나. 나는 지금 뎃기란간에 기대선채 그 옛날 어느 한 실향민이 두만강을 건너면서 불렀다는 그 노래, “고향하늘”을 조용히 부르면서 그 구절마다를 음미해본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정다운 하늘 그 언제나 고향집이 그리울 때면 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 지도에서는 점으로밖에 표시할 수 없는 내고향, 그 곳은 머나먼 차이나 연변의 훈춘이라는 곳이다. 너무나도 철없던 그 시절, 나의 고향에는 때아닌 문화혁명이란 폭풍이 불어와 나의 부모의 목숨을 앗아갔다. “외국스파이”란 누명을 쓰고 매맞아 인사불성이 된 아버지가 “내가 어쩌면 이렇게 죽을 수 있느냐. 하늘이 굽어본다”며 넋두리하시다가 숨을 거두던 모습, 매를 못이겨 서슬푸른 훈춘강물에 몸을 날린 어머니의 처철한 그 모습, 이한 모든 것들은 어린 나의 동심에도 문학이라는 불씨를 심어주었다. 나는 이악스레 달라붙었다. 나는 쉑스피어, 발자크, 푸쉬킨, 루쉰(魯迅)을 알게 되었고 그네들과 함께 울고 웃고 하였다. 행복도 잠시나마 다가왔었다. 나는 한 이쁘장한 아가씨와 사귀다가 결혼을 했고 미구하여 건실한 아들애까지 보게 되었다. 또한 관계부문에서는 나의 재능을 봐주어 모 라지디방송의 임시 편집원자리까지 알선해주었다. 나는 무등 기뻤다. 비록 국가봉급을 타지 못하고 순 원고료로 살아야만 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였지만 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노라면 꼭 언젠가는 하느님을 감동시켜 편제문제가 해결될 것이며 밝은 앞날도 도래하리라 굳게 믿는터였다. 아내 역시 궂은 일, 마른 일 가리지 않고 나의 뒤바라지를 잘해주었다. 헌데 그런 호시절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대졸생 한명이 편집부로 배치받아오자 나는 부득불 그 자리를 양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갖은 노력과 희생을 다해가면서 쌓았던 탑이 순간새에 무너지자 나의 실망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었다. 한편 그토록 하늘처럼 받들어 믿어마지 않던 내가 생활의 평형을 잃고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자 아내의 마음도 뒤따라 평형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이었다. “재간없는 골방샌님, 돈 못버는 남자, 아내와 가정도 이끌지 못하는 바보, 아니 당신같은 남정을 믿고 섬기는 내가 더욱 바보야…” 이렇게 매일 바가지를 긁어대던 아내의 짜증섞인 잔소리도 종국에는 멎었다. 아내는 갔다. 저 세상으로 간 것이 아니라 나와 어린 것을 버리고 외간사내한테 가서 붙었다. 그날 저녁, 그날도 오늘 이 밤처럼 달은 밝았다. 바로 그 밝은 달빛아래에서 웬 사내한테 거의 매달리다싶이 붙어가는 아내를 보는 순간, 나의 두눈에서는 화염이 활활 타올랐다. “너 이년, 게 섰거라. 너 어쩜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늘이 굽어본다.” 이지를 잃고 완전히 미쳐버린 나는 아내한테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 보응으로 그 이튿날 저녁, 불의의 습격을 들이댄 아내의 친척들한테 나는 또한 죽도록 얻어터졌다. 직업과 아내마저 빼앗긴 버림받은 사나이- 그런 상황에 그렇게도 건실하던 아들애는 어쩔라고 그토록 앓던지. 어린 것이 있는 것마저 귀찮았다. 하기에 애타고 분통할 때마다 나는 야성이 발작하여 자주 죄없는 어린것한테 화풀이를 해댔다. 그러다가도 이성을 되찾게 되면 그 어린 것이 하도나 불쌍하여 그것을 붙안고 통곡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오기도 생겼다. 그 어떤 역경에 처하더라도 어린 것을 잘 키우고 싶었고 나도 살고 싶었다. 아니 이를 깨물고라도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내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나는 탄광으로 갔다. 이전에는 사람이 무슨 할 것이 없어 하늘 두층을 쓰고 사는 탄광일을 하느냐고 하찮게 보아오던 탄광ㅡ 그런 곳으로 이번에는 내가 찾아갔다. 일을 좀 시켜달라고, 살길도 마련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체가 약골인 나를 보더니 그 어느 탄부도 나와 함게 같은 막장에서 일하려 하지 않았다. 다행이도 탄광주인이 나를 봐주어 석탄운송차가 오면 석탄을 실어주는 일을 나한테 맡겼다. 허나 며칠 안가서 운전사들이 자주 주인한테 불평을 토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하긴 남들이 한시간 정도면 다 싣는 석탄을 나의 힘으로서는 두시간도 모자랐으니 말이다. 남한테 신세를 지는 것도 한두번이지 그냥 주인을 욕보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일도 며칠 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온갖 버림을 받으면서도 살겠다고 발버둥질을 친 내가 한심할 정도로 가증스러웠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 모두가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었다. 세상이 넓어도 이 내몸 하나를 건사할 곳이 없던 그 세월, 만신창이 된 나를 용납해준 이는 그래도 연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철준형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철준형 역시 애매하게 오쟁이를 지고 이혼한 몸이였다. 그 뒤로 두 홀애비가 같지 않은 두 어린 것을 거느리고 사는 특이한 가정이 산생하였다. 철준형은 부엌에서 손풍구를 돌리고 내가 부뚜막에 쭈크리고 앉아 쌀을 이는 그 장면, 우리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마주보며 허구프게 웃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헌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경제난이었다. 철준형 혼자의 봉급으로 세방값도 물고 사람 넷의 호구도 해야 했으니 철준형이 자주 여기저기로부터 돈을 꿔 들이대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무리 철면피한 인간인들 이런 형국에 어찌 계속 눌러앉아 있으랴. “형, 난 가오. 예서 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하지만 나는 가야 하오. 나 때문에 형까지 망하게는 할 수가 없소. 부디 안녕.” 이런 메모를 남긴 나는 어린 것을 이끌고 그 집을 나왔다. 버스터미널로 온 뒤 버스표를 사고 나자 나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1위안 45푼밖에 남지 않았다. 이렇게 훈춘행버스에 오르려고 줄을 서던 찰나, 갑자기 철준형이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로 나의 뺨을 두번이나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이 못난 놈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렴 입에 풀칠이야 하겠는냐. 가자, 어서 말들어!” 그날 밤, 나와 철준형은 둘 다 배갈 한병씩 굽냈다. 그러고는 울었다. 철준형은 나를 때린 것이 가슴 아프다고 울었고 나 또한 그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다. … 그러던 내가 철준형을 포함한 몇몇 형씨들의 도움으로 해외노무송출일군이 되어 고향을 떠난 것은 1991년 3월 18일이었다. 라스팔마스에서는 4-5미터씩 되는 선인장을 쉽게 볼 수 있다 달빛밝은 라스팔마스의 이 밤, 이 세상이 작다하게 주름잡고 다니는 대형선박의 마도로스가 된 오늘 나는 세계에서 유명한 네델란드의 로테르담항구에도 입항해보았고 지난 세기 80연대 초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가렬한 해상전을 벌이던 남미주의 포클랜드군도에도 가보았으며 “연탄동네”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의 원시부락에도 다녀보았다. 특히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다는 한국의 울산에도 입항해서는 옛 조상의 산천에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저 세상에 간 고인한테 얼마만한 위안이라도 드렸다. 그러면서 나는 영영 귀국하지 않고 이곳 라스팔마스에 아주 정착해버릴 생각도 자주 해보았다. 이는 실현될 수 없는 호언장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얼마전 입항시에도 라스팔마스 “호텔강촌”의 이횡권 사장님은 나한테 이렇게 귀띔해줬다. “김군, 김군같은 문화인은 사회에 대한 적응이 빠르니까 고향에 대한 미련같은 건 아예 싹 버리고 이 곳에 발을 붙이소. 이곳에서는 능력과 재간이 있는대로 써주니까 중국처럼 국가공무원이요. 농민이요 하고 영원한 탈을 씌우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요.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보이소.” 또한 이횡권 사장님의 부인이며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전도사인 유혁선 여사는 “아저씨, 하느님을 믿으세요.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이들한테 복음을 준대요. 지는 죄는 용서해주고 불쌍한 사람은 구해준대요. 믿음을 가지세요, 아저씨”라고 하며 나까지 자기와 같은 열광적인 기독교신자로 키우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호텔강촌”에서 접대원으로 일하는 콜롬비아 아가씨 수산나의 화끈한 사랑도 받았다. 사랑에는 국경도 민족도 없다는데 이혼까지 한 내가 수산나의 사랑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 역시 그녀를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오빠, 난 무서워. 오빠가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기 마련이 아니야? 너무 정들가봐 무섭고 와이프가 있는 오빠를 붙잡고 있기도 무서워…” 만날적마다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으며 눈물을 떨구는 수산나, 여자의 눈물앞에선 모든것이 약해지기 마련이랄가. 나 역시 그 낯선땅에 정착해보려고 여러번 고민도 해보았다. 하지만 나한테는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야 할 더욱 큰 이유가 있었다. 떠나올 때 8살밖에 되지 않은 나의 아들애, 항상 4촌형이 입던 헐렁한 옷을 물려입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 아빠를 쳐다보며 뭔가 바라는듯하던 아들애, 그 애의 모습이 하냥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면서 서양의 아무리 황홀한 세계도 나의 몸을 오랫동안 끄당지는 못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이횡권 사장님의 진정과, 울며 매달리는 수산나를 떼여놓고 돌아설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나는 기어코 돌아가야만 한다. 한편 고향도 그제날의 고향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한국의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신동아” 등 간행물에 소개되는 나의 고향은 지금 한창 두만강하류의 개발로 북적인다고 한다. 그러면 고향도 가난의 묵은 때를 벗겨버리고 새로운 동북아의 “금삼각지대”로 거듭날 날도 멀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돌아가야 한다. 내 아들과 함께라면 두번 다시 가난이 들이닥치고 두번 다시 버림받아도 달갑겠다. 푸른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 새파란 고향하늘 정다운 하늘 다정한 동무들과 시내가에서 버들피리 불며불며 놀았습니다 ……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8-18
  •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
    ■ 김철균 나한테는 A라는 한 친구가 있다. 지난 세기 80연대부터 지금까지 쭉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절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몹시 착하고 의협심도 있어 친할만한 사람이었다. 헌데 그는 좀 부는 편이었다. 그가 한국에 가서 노가다로 뛸 때의 일이다. “나 말이야, 지금은 한국에 와서 노가다로 뛰지만 중국에 있을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구. 군복무 3년을 했고, 대학 2개를 나왔으며 국가기관의 공무원으로 10여년간 과장직에도 있어봤고 그러다가 그걸 때려치우고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면서 꽤나 돈도 많이 벌었었는데 그만 8년만에 큰 사기를 당해 망했지만 말이야…” “그럼 아저씨, 올해 나이가 어떻게 돼요?” “얼마긴 얼마야? 마흔여섯이지…” “어머, 그럼 아저씨의 사업년한이 나이보다 더 많네요…” 이 글의 제목을 보면 왜서 “한 300년 살아보기”라고 달았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할 것이다. 자고로 300년을 살아본 사람은 없었으니깐. 나 또한 이제 반백 정도인 사람이다. 그럼 왜 한 300년 살아본다고 하는걸까? 나의 고백을 적어본다.나의 고향은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반석향 유정촌이다. 1957년 8월 26일, 태어날 때 나는 7남매 중 막내였고 당시 어머니가 42살, 아버지가 52살이었는데 가정이 째지게 가난한데다 아버지는 장기환자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늦동이인 나를 두고 “귀엽게는 생겼는데 부모복은 없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들 한다. 아니나 다를가 나는 세살 때에 급성폐렴으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약 한첩 지을 돈도 없는 나의 부모는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나를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의 생명이 경각을 다투는 그 시각에 나의 5촌 숙부님이 송아지를 팔아 페니실린을 사왔고 그걸 한대를 맞고 나는 열이 내리면서 기적적으로 소생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2년만에 죽음의 과정(기억은 없지만)을 경험해보게 되었다. 한편 나의 부모는 늦게 나를 본데다 명도 길지 못하였다. 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니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루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했고 어머니도 매를 못이겨 훈춘강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 그러니 남들이 내가 부모복이 없겠다고 한 그 말은 너무나도 일찍 현실로 다가왔다. 그 뒤 나는 손위의 누나 둘과 함께 4년, 누나들이 시집가자 형님과 형수의 슬하에서 4년, 집체호에서 3년, 공장생활을 5년 하다가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3년만에 이혼을 하여 아이와 단둘이 사는 홀애비로 되었다. 어려서 부모을 여의고 중년에 상처는 안했지만 이혼을 덜커덩 한거라 “팔자타령”도 할만 했다. 그 몇년 사이 나는 또 훈춘방송국에 편집원으로 일하다가 나왔었고 장사길에 나섰다가 꼴깍 망하기도 했다. 그 몇년 뒤에는 해외노무송출길에 나갔다가 근무를 마치고 귀국, 형편이 좀 펴이니 양고기산적집을 차렸다가 재차 망했다. 일이 안되었고 악성순환의 계속이었다. 나는 나의 인생을 걸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아니, 노력이라기보다는 발버둥질을 쳤다고 해야 더욱 적절할 것이다. 어릴 때는 뭘 전공하면 취미 혹은 남이 하니 덩달아 따라서 하는데 불과했지만 17-18세부터는 일종의 “이상”이란 것을 갖고 달라붙었다. 그림을 그려봤고 서예도 연마했으며 음악을 한답시고 입술이 터지도록 트럼벳을 불어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노무송출일군으로 해외에 나가서는 주방의 주방장 겸 요리사로 근무했고 지금은 편집기자랍시고 모 신문사의 일군으로 10여년채 출근하고 있다. 안해본 일이 거의 없었고 직종으로는 군대, 이발사외 학생, 농민, 노동자, 마도로스, 편집일군 그리고 오래는 해보지 못았지만 탄광의 채탄공 일도 한달가량 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남들은 아파트 2-3채씩 갖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여태껏 단층집에서 살다가 이제 겨우 파가이주로 아파트를 분배받게 됐다. 그것도 추가된 면적의 집값을 물돈이 없어 마누라더러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게 하고있다. 못난 놈, 그러니 지금은 또 작은 애와 함께 홀아비로 보낸다. 1983년에 첫 결혼을 한 뒤 지금의 두번째 마누라를 맞아들여서 그 28년 사이에 부부가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한 세월은 그 50%나 될까? 인생살이에는 빵점이다. 나는 모험도 좀 즐기는편이다. 만미터 고공에서 자유낙하하는 그런 모험가는 아니지만 그 버금의 담량은 있는 것 같다. 내가 해상에서 마도로스로 근무할 때니까 1992년의 일이다. 그 때 나는 함께 출국한 동료선원의 이간질로 인해 한국인 조기장과 한바탕 크게 싸웠다. 둘 다 얻어터지고 멍이 들대로 들었다. 그런데 징계를 받은 쪽은 나였다. 일리가 있건 없건 내가 조선족이었으니 당해야만 했다. 강제귀국조치었다. 이제 스페인 라스팔마스항에 입항하면 보따리를 싸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강제귀국이란 당시 중국 조선족선원한테 있어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할까? 당시 내가 징계를 받던 앙골라 해상에서 라스팔마스까지 항행하려면 거의 20일이란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강제귀국에서 벗어나려면 모험도 필요했다. 징계를 받던 그날 밤, 나는 부식창고안에서 빵, 사과, 물, 소세지, 위스키, 맥주 등 먹고 마실 수 있는 부식은 가득 꺼내서는 침대밑에 넣었고, 그 다음 주방과 창고의 열쇠를 인계한 후 침실문을 안으로 닫아 걸었다. “단식투쟁”이었다. 그러자 처음에 선장 등 한국선원들은 “자식, 뭘 단식을 해?! 멍청한 놈, 언제까지 버티는가 좀 보구려”라고 하며 코방귀를 뀌더니 3일이 지난 후부터는 선장부터가 불안해지며 얼굴표정이 심각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만약 단식으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선장은 그 책임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장은 처음에는 통신장을 보내 나한테 설득을 시작하더니 나중엔 1항사까지 보내어 나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선장이 오기 전에는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고 버티면서 침실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약 5일 가량 지난 어느날 밤, 선장이 나의 침실문을 노크하더니 “조리장, 그만 하이소. 우리 좀 대화해봅시다. 나 선장이 조리장에 대한 징계를 해제하기로 했어요. 자, 그만 문 좀 열어주이소”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 시간을 질질 끌었고 문틈으로 들여보낸 진짜 징계를 해제한다는 선장의 각서까지 받은 뒤에야 침실문을 열어주었다. 그 동안 나는 단식은커녕 먹을 것을 실컷 먹었고 숱한 책을 읽었으며 밀려온 잠도 늘어지게 자버렸다. 나의 그 모험은 성공적이었다. 헌데 나의 대부분의 모험은 충동적일 때가 많았다. 앞뒤를 재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성공차수보다 실패차수가 더욱 많기 마련이었다. 그 사례로 귀국한 뒤 연길에서의 시장조사를 거치지 않고 음식업을 벌였다가 꼴깍 망한 것 등으로 여러 건이 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어쩐지 글의 주제와 좀 벗어난 감이 든다. 여하튼 나의 “한 300년 살아보기”란 사는 날자보다 삶의 내용에 그 무게를 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다. 말하자면 초년에 부모를 잃고 고생한 걸 말할라치면 두 세 사람이 일생동안 당한 고생에 맞먹는 것 같다. 세살적에 폐렴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마도로스시절에는 본인 실수로 영하 20여도 되는 냉장창고에 갇혀 동사할뻔한 일도 있으니 죽음의 과정도 두번 넘겨봤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마누라를 두 번 만났으니 그 것도 사람마다 겪어보는 일은 아닐테고 또한 마도로스 시절에는 36개 나라의 50여개의 항구에도 드나들었다. 1.62메터의 키에 58킬로그람의 체중을 가진 보통에도 못미치는 사내치고는 그야말로 범상치 않는 경력창조자이니 “300년 살아보기”란 말도 나올상 싶다. 옛 사람들은 “걸어온 길 몇천리, 걸어갈 길 몇만리”라고 했다. 나는 지금 고중에 다니는 17살짜리 늦둥이를 키우고 있다. 어쩌면 아직도 내 나이와는 상관없이 인생초반이란 감이 들 정도이다. 하다면 더욱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으며 계속 발버둥질을 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늦둥이인 나를 낳아놓고 일찍 저 세상으로 간 나의 부모님처럼은 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도 무르익히고 있다. 그러니 삶의 내용상 “300년 살아보기”를 실천에 옮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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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6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12)
    ■ 김철균 순자네가 연길시 신흥가로 이사를 간 뒤 몇년 안되어 아들 영남이는 중앙소학교에 붙었고 그와 연연생인 딸 영순이가 1년 뒤 또 연길시 중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의 교원들과 자주 대면하는 일이 가끔씩 있게 되자 순자는 오래동안 접었던 교원의 꿈을 꾸던 시기를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교원 – 아,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성스러운 인민교원인가! 해빛도 찬연한 교정에서 수십쌍의 어린 눈동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단에 올라 나라의 미래들한테 지식의 꿈을 심어주고 이상의 날개를 펴게 하는 인민교원 ㅡ … 애들을 학교로 데려가고 또 학교로부터 집으로 데려오면서 인민교원들을 볼 때마다 순자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는 눈길로 대할 수가 없었다. 오, 어린 소시절부터 바라마지 않았던 교원사업이었다. 순자는 인민교원사업을 포기하고 남편 김용환과의 결혼을 선택했고 또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단 한번도 후회한적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교원의 꿈을 머리속에서 영영 묻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일찍 소학교 시절부터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 꿈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는 순자였다. 인민교원 ㅡ 순자는 다만 국록이나 타먹고 남들한테서 “선생님”으로 불리기 위해서 인민교원을 흠모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애들이 더 없이 사랑스러웠고 그만큼 애들속에 있고 싶었다. 그것은 단 한시간이라도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어느날, 순자는 반급의 전체 학부모들을 대표하여 교단에 서는 일이 있게 되었다. 순자가 자청해서 교단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학부모 중 순자와 한동네에서 살고 있는 한 중년여인이 순자를 적극 추천하여 교단에 서게 하였던 것이다. 그 중년여인이 순자더러 교단에 오르도록 적극 추천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그 것인즉 신흥가에 이사와서도 순자는 여전히 하남가두에 있을 때처럼 모든 활동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특히 민족단결과 위생청결에 관한 국가의 해당문건같은 것을 선전할 때면 조리성이 강한데다 말 또한 청산유수여서 가두주민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그 어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자주 순자를 청하여 조언같은 것을 듣군 하였는데 이번에는 그 중년여인의 추천으로 신흥소학교의 교단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이는 기실 순자 자신이 바라마지 않던 일이기도 했다. 그날의 모임은 그 옛날 우리 말이 있어도 우리 조선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일제의 노화교육을 받으며 힘들게 공부하던 부모세대의 동년시절을 회억하면서 지금의 어린이들한테 교양을 주기 위한 모임이었다. 어린친구들, 지금 친구들앞에 나선 이 아지미는 일찍 1938년 용정의 육도소학교에 입학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해온 사람이랍니다. 그 때 우리 연변은 일본놈들의 강점하에 있었습니다. 일본놈들이란 어떤 놈들인지 여기에 앉아있는 친구들은 거의 모를 것입니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는 이른바 “3광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우수하고도 아름다운 우리 말이 있어도 우리가 조선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조선글을 쓸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누가 만약 조선말과 조선글을 사용하기만 하면 구두발에 채이거나 볼기를 얻어맞기도 했으며 쩍하면 벌을 서기가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몰래 조선말을 하였고 조선문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인들한테서 옛말같은것을 들으면서 중국의 사마천, 이백, 두보, 백거의, 임측서와 조선의 이순신장군, 남이장군과 농민폭동을 일으킨 임꺽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 친구들, 현재 친구들은 아무런 구속도 없이 우리 말과 글을 맘껏 배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우리 연변에도 주덕해 주장과 연변대학의 임민호교장 등 많은 조선족간부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들도 공부를 열심히 잘하여 나라의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야 될 것이 아닙니까?(박수) …… 억양이 부드럽고도 조리정연한 순자의 발언은 모임에 참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특히 큰 아들 영남이네 반급의 담임교원은 너무도 감탄된 나머지 순자의 두손을 꼭 잡고 “참 말씀을 잘하셨습니다. 정말 훌륭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라고 하며 탄복하였다. 그리고 방청객으로 교실로 들어왔던 교장선생님과 기타 학교지도부 일군들도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수군대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뒤 며칠이 안되어 영남이네 담임교원은 순자를 부르더니 학교의 총 보도원을 맡아줬으면 하는 교장선생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순자는 원체 교단에 오르고 싶었던터라 쾌히 승낙하였다. 그러자 신흥가두 판사처에서도 순자한테 신흥가두의 총 보도원을 맡고 신흥가두에 집을 둔 학생들의 학습성적이 올라가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영남이가 다니는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 및 신흥가두의 과외보도원이 되어 학생들앞에 자주 나서군 하였는데 학생들은 물론 기타 교원과 가두판사처의 직원들까지 순자를 “김선생님”이라고 하며 깍듯이 존경하군 했다. 참, 노임 한푼 없는 과외보도원 선생님, 하지만 순자는 이것으로 하여 무한한 긍지를 느낄 때가 많았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8-15
  • 남과 북 모두 열광하던 광복 그리고 열망하는 통일
    ■ 김철균 지금으로부터 69년전인 서기 1945년 8월 15일의 정오무렵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국, 영국, 지나(중국), 소련 등 4개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방송연설과 더불어 조선은 광복을 맞아왔다. 순간, 3천리 금수강산의 3천만 동포는 환희로 들끓었다.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와 인파를 이루었고 조용하던 시골마을에도 사람들은 마을회관같은 곳에 모여들었으며 어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자 어린 것들조차 영문도 모르는채 어른들과 한동아리가 됐다. 도시에서, 시골에서 아니, 3천리강산의 도처에서 “만세!” 3창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토록…”이 미아리쳤다. 그랬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더불어 장장 36년간이나 일제의 군화에 짓밟히며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었다. 짓눌리고 기시받았고 “내선일체(内鲜一体)”란 강권정치에 의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의 말과 글을, 나중엔 이름마저 빼앗겼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일제놈들의 “탄알받이”로 되었고 역시 수많은 앳된 소녀들이 “근로봉사대”, “정신대” 또는 위안부로 끌려가 몸이 만신창이 되도록 유린받았던 우리 민족 36년의 수난사였다. 그랬다. 일제에 의한 망국노가 되기 싫었기에 1907년 조선의 밀사 이준은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끝내 분사의 길을 택했고 이상설 등은 간도에서 “서전서숙”을 차려놓고 민족교육을 춰세우는 것으로 독립의 길을 시도하기도 했었으며 김좌진, 홍범도 등 독립군들은 무장항일로 “조선독립”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 뒤에도 만주에서는 항일빨치산, 중경에서는 한국독립군, 태항산에서는 조선의용군 등 항일부대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부르며, 광복의 그 날을 바라며 간고하고도 피어린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었다. …… 드디어 1945년 8월 15일의 일력과 더불어 이룩된 조선의 광복 ㅡ 하지만 “만세” 소리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열창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민족한테는 새로운 비극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소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어진 38선 ㅡ 그 것은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서, 강대국이 지배를 받는 다른 한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으며 곧바로 비극의 시작이고 도화선이었다. 38선 ㅡ 그 것은 남측이 바라던 것도, 북측이 바라던 것도 아니었다. 3천만 겨레가 바라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 통분하고 원망스럽고 치욕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광복은 우리 민족 스스로 쟁취해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의해, 강대국의 도움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것이 바로 약하고 힘없는 약소민족의 운명이었다. 강대국끼리 무심히 협의를 주고 받으며 그어놓은 38선, 그 것 때문에 3천리 강산은 두 동강이 나고 단일 민족이던 우리 민족은 2개의 나라로 갈라져야 했으며 국가도 하나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이었다. 아,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오시나요… 저주의 선 38선, 원한의 38선 ㅡ 한반도 중간을 뭉텅 자른 그 것 때문에 사상과 이념이 다른 2개의 분열국가가 지구상에 나타났고 그것 때문에 동족상잔의 “6.25”가 터졌으며 또한 그 것 때문에 같은 민족끼리 서로 욕하고 저주하며 69년이 지난 오늘도 남의 비웃음까지 받고 있지 않는가?! 이제 한해만 더 지나면 한반도가 분열된지도 70년이 된다. 7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늙고 병들고 또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하는 인간세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말그대로 하늘이 눈물을 흘리고 땅이 몸부림칠 지경이다. 이제 밤을 자면 통일에 대한 새로운 진전이 있는가 눈으로 살피고 귀를 기울려도 아무런 희소식도 없다. 오히려 그 무슨 남측의 “한미군사연습”이요, 북측의 “미사일 발사”와 “핵개발”에 관한 뉴스로 신문을 도배하고 방송이 떠들어댄다. 오, 남과 북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통일 ㅡ 왜 힘들고 분단의 골을 점점 깊어만 가는걸까? 그리고 밤만 자면 점점 고착돼가는 분단, 대체 하늘을 원만해야 되나, 땅을 원망해야 되나 아니면 우리 민족 자체를 원망해야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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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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