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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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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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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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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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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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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상해탄 청방거두 황금영
    ● 김희수 황금영(黄金荣)은 지난세기 20년대 상해에서 명성이 높은 청방(青帮)두목 이였으며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张啸林)과 더불어 3대깡패거두였다. 그는 1900년에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아편 밀매를 일삼고 도박장, 오락장을 꾸려 깡패 세력을 키웠는데 문하생이 1000여 명이나 되였다. 1868년에 강소성 소주시에서 출생한 황금영은 1873년에 상해로 이사 가서 1876년에 서당에서 공부했다. 1881년에 아버지 황병천이 사망되자 맹강당사당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1884년에 자형 황전포가 꾸리는 사가당의 표장포(裱褙铺)에 들어가 학도공으로 일하던 그는 1890년에 관아에 들어가 범인을 잡는 하급관리 포쾌(捕快)일을 맡아하다가 2년 후에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방에 3등 중국인 포쾌로 뽑혀들어갔다. 1899년에 사직하고 소주에 가서 노천궁 극장을 꾸린 황금영은 이듬해에 림계생과 결혼했다. 그후 다시 상해로 들어간 그는 1901년에 취보루에 향당(香堂)을 세워놓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1917년에 송호호군사(淞沪护军使)관아의 상좌독찰에 임명 되였고 1924년에 순포방의 독찰장으로 승진했다. 1927년에 그는 “4.12”반혁명정변을 도와주었고 1928년에 장개석으로부터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육해공 3군 총사령부 고문”, “행정원참의”로 임명되였다. 1931년에 황가(黄家)화원이 낙성되였다. 그해 그는 상해대세계오락장을 먹어 치우고 “영계(荣计)대세계”로 이름을 고쳤다. 1936년에는 충신사를 세우고 1945년에는 영사(荣社)를 성립했다. 황금영은 여러 건의 큰 사건을 해명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어느 한번은 프랑스 총영사의 서기관이 동부인하여 태호를 유람하다가 토비를 만나 납치당했다.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그 소식을 들은 후 황금영을 파견하여 그 서기관을 구해오라고 했다. 황금영은 부하들을 시켜 태호의 토비두목 “태보아사”와 “저라 아미”를 찾게 했다. 그 다음 직접 나서서 손쉽게 프랑스 인질을 구해냈다. 또 한번은 복건성 독리(督理) 주음인의 참모장 양지후는 여섯상자의 공동품과 고대서화를 가지고 상해로 왔는데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강도들에게 물품을 몽땅 빼앗겼다. 이에 송호호군사 하풍림은 특히 황금영을 청하여 빼앗긴 물건을 찾아달라고 했다. 황금영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그 물건을 찾아주었다. 그 외에도 황금영은 수많은 큰 사건을 해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로는 프랑스의 천주교신부 납치사건을 해명한 것이다. 그 공로로 하여 그는 프랑스의 동정전권대신으로부터 특등 금질보성(金质宝星)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24년에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장에서 유일한 중국인탐정 독찰장으로 승진했다. 황금영은 스승을 모시지 않고 향당을 열어서 청방에서 “빈자리”였지만 세력이 강했기에 자칭 “천자(天字)”서열이라고 하고 청방이 두목으로 되였다. 당시 상해탄(上海滩)청방에서 최고서열은 “대자(大字)”서열이었다. 황금영은 손에 쥔 권력을 이용하여 아편을 밀수하고 도박장을 꾸렸으며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경견장(跑狗场) 등을 꾸려 불과 몇년사이에 상해탄의 거두로 되였다. 황금영은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 중국인 독찰장을 20여년이나 맡아했다. 그는 60돐생일을 쇨 때에야 사직했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지의 순포장 경무처에서는 계속 그를 고문으로 초빙했다. 노란춘은 황금영의 문하생 장생의 양딸 이였는데 황공관(黄公馆)에 자주 놀러왔다. 그녀는 평소에 희곡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영리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회곡을 흉내내여 부를줄을 알게 되였다. 당시 황금영은 이미 50여살이였지만 14살밖에 안 되는 노란춘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노란춘을 무대에 오르게 밀어주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노란춘에게 주역을 맡겨주고 노란춘의 레코드를 출시했다. 상해의 크고 작은 신문에서는 다투어 노란춘의 아름다운 자태를 찍은 사진을 실었다. 노란춘의 명성은 일시에 상해의 이름난 연예인 소금령과 분국화를 능가했다. 황금영은 노란춘을 첩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임계생은 “나를 이 집에서 내보내기 전에는 그 여우년을 들이지 못해요”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화가 난 황금영은 이혼을 제기했다. 그는 임계생에게 거액의 생활비를 줘서 쫓아 보내고 노란춘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혼인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3년도 안되여 젊은 남자와 눈이 맞은 노란춘은 황금영과 이혼하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1923년에 황금영과 노란춘은 프랑스변호사 위안소의 사무소에 가서 협의이혼을 했다. 1920년에 경비가 늘 부족했던 장개석은 몇몇 사람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상해에 증권물품교역소인 “항태호”를 세웠다. 교역소의 업무는 초기에는 경기가 좋았지만 1921년에 상해에 오늘의 소규모 금융위기와 비슷한 “신교폭풍(信交风暴)”이 폭발하여 주식가치는 종이장이나 다름없게 되였다. 억지로 지탱하던 “항태호”는 1922년에 부도가 났는데 숱한 주주들이 주식을 가지고 와서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채권자들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장개석을 위협하면서 돈을 갚으라고 강요했다. 깡패들을 피해 다니느라고 숨을 죽이고 있던 장개석은 상업계에서 비교적 지위가 높은 우흡경을 통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금영을 찾아가 보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길일을 택해 황금영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날 황금영은 자택의 2층의자에 늠름하게 앉아있었는데 장개석은 붉은색으로 쓴 스승으로 모시는 글을 황금영에게 공손하게 받들어 올렸다. 그 다음 장개석은 황금영에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렸다. 그 후 황금영은 채권자들을 술집에 청해놓고 옆에 앉은 장개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지청(그 당시 장개석이 늘 사용했던 이름)은 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청의 빚을 받겠으면 나를 찾아와 요구하시오!” 그제야 채권자들은 황금영이 홍문연을 차린 것을 알았다. 그들은 돈을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황금영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되여 황금영의 한마디 말로 채권자들을 피하여 다니던 장개석은 숨을 돌리게 되였다. 상해가 해방되기 전야에 사람들이 황금영을 보고 공산당에게 욕을 보지 말고 대만이나 홍콩으로 도망가라고 권고했지만 황금영은 의연히 상해에 남아있었다. 황금영은 “난 이미 여든이 넘어서 오라지 않아 관속에 들어갈 사람이요. 떠나다가 중도에서 급병이라도 생겨 죽기라도 하면 그런 낭패가 어디 있겠소. 내 일생동안 상해에서 살았는데 외지에서 죽고싶지 않소”라고 말했다. 황금영은 저택에 들어박혀 두문불출하면서 밖의 일을 묻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황금영이 이미 대만이나 홍콩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인민정부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 초에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황금영의 저택문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비판을 받을 것을 요구했다. 황금영을 검거하는 편지가 눈송이마냥 상해시정부와 공안기관에 날아들었다. 당 중앙에서는 상해를 해방하기 전야에 이미 깡패세력들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사회치안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개조를 접수한다면 그들을 다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특히 황금영, 두월생과 같은 조직두목들은 한시기 관찰한 후 표현에 따라 다시 처벌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는 상해경제발전에 유리한 것이다. 상해시 시장 진의는 이 방침과 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상해시인민정부에서 직접 황금영을 만나 이왕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그에게 “회개서”를 써서 신문에 공개해 줄것을 요구했다. 1951년 5월 20일에 상해의 《뉴스보》와 《문회보》에서 《황금영의 자백서》를 실었다. 황금영은 자백서에 “자수개과”하고 “입공속죄”하며 “정부와 인민에게 용서해줄 것”을 요구했다. 상해깡패거두의 “참회”는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깡패잔여세력을 겁먹게 하는데 매우 큰 작용을 일으켰다. 그 후 황금영은 정부의 개조호소에 호응하여 거리를 청소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황금영이 거리청소를 한다”는 소식은 세계각지에 쫙 퍼졌다. 다른 한 깡패거두인 두월생은 홍콩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상해에 남지 않는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외의 반향을 고려하여 황금영의 이런 “개조”조치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얼마후에는 그만두게 했다. 필경 황금영은 늙고 병든 노인이였던 것이다. 2년 후인 1953년에 한때 상해탄에서 권세와 명성이 하늘을 찔렀던 풍류인물은 온몸에 열이 나서 며칠동안 혼미상태에 빠져있다가 영영 눈을 감았다. 향년 86세였다. 필자/김희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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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7
  • 노르망디 해변 일본군이 지켰더라면?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장 결정적인 의의가 있는 중대한 전역이었으며 영미동맹군이 상륙작전에서 성공하여 제 2의 전장을 개척한 전역이기도 했다. 하다면 당시 가령 노르망디 해변을 지킨 군대가 일본군이었다면 상황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 전역에서 영미동맹군은 도합 288만 명의 군대, 1200척의 작전함정, 4126척의 상륙함정, 5000척의 운수선과 1만 3700대의 비행기를 투입, 8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의 5개 상륙 지점에서 제1진으로 상륙한 부대는 5개 사의 약 13만 명이었고 상륙지점 후방 즉 독일군 점령지에 공중 낙하된 3개 낙하산병 사는 약 3만 5000명이었다. 한편 당시 노르망디 해안지역을 수비하는 독일군은 352 보병사와 716 해안방어사 그리고 약 16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캉 지역의 제21 기갑사 이렇게 3개 사의 병력을 다 합쳐도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또한 동맹군이 진짜 상륙하던 80킬로미터 해변 정면에 있는 독일군은 352 보병사와 716 해안방어 사의 6개 영 19개 소대로 3000명(이 중 6분의 1은 소련군 포로로 구성된 <동방영>이었음)도 되지 않았고 대포와 반 탱크 포 88문, 평균 매 1킬로미터에 배치된 병력은 40명 정도였으며 매 1킬로미터마다 대포 1문씩 배치된 셈이었다. 당시 독일군 716 해안방어사는 기동차량이 배비되지 않은 <고정사>로서 기동능력이 전혀 없었고 중무기도 아주 적었으며 전투력도 아주 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서적과 자료들에서는 제 352 보병사를 놓고 독일군의 최정예 부대라고 했지만 기실 이는 2차 대전 시기 독일군에 대한 요해가 흐리멍텅한 것으로 이런 설법은 자연히 웃음거리라는 설도 있다. 왜냐하면 부대번호가 100번 이내이고 아울러 1939년 제 2차 대전의 폭발 전에 창설된 부대가 진정한 최정예였으며 진짜 독일군의 정예부대는 모두 기갑사 혹은 기계화 보병사였다. 일반적인 보병사 즉 352 보병사 같은 부대는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2류 수준의 부대로밖에 될 수 없었다고 한다. 제 352 보병사는 1943년 9월, 프랑스 생로에서 창건, 병력 내원을 보면 소수의 골간 군인들이 동부전선의 전장에서 온 노병이었고 절반 좌우는 모두 갓 입대한 20대의 신병이었으며 거의 3분의 1 가량은 동부전선에서 붙잡힌 소련군 포로로 구성된 이른바 <동방영>이었다. 바로 독일군들이 소련군 포로 중의 소수민족 군인을 집결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그루지아인과 카타르인, 심지어 소수의 조선인도 있었다. 이들 조선인들은 일찍 일본군이었다가 중소 변경지대인 노먼행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고 독소전쟁이 폭발하자 소련군에 보충되었다가 다시 독일군에 포로가 되는 등 곡절적인 경력자들로서 후에 재차 독일군으로 되는 해프닝으로 조직된 부대였기에 이들의 전투력이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352 보병사는 병력이 도합 1.3만 명으로 기실 이 사단은 정예부대에 속하지 못하는 부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동맹군이 오마하 해변에서 상망한 인수가 전반 상륙한 5개 해변 중 가장 많았다. 사망 약 1500명, 부상 2800명으로 오마하 해변에서의 상망인수가 전체 5개 상륙해안 상망자의 80%를 차지했다. 바로 이것으로 오마하를 수비하던 352 사단이 갑자기 <정예사단>으로 둔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독일군에서 정예사단이라 하면 제21 사단을 꼽을 수 있다. 이 사단은 룸멜의 아프리카군의 제1번 주력이었다. 하지만 당년의 아프리카 왕패군은 기본상 소실되었고 1943년 6월, 프랑스 북으로부터 철거해온 소수의 부대와 귀국해 치료받던 부상병들을 조직해 재건, 노르망디에 올 때 탱크는 거개가 구식으로 된 것으로 대부분은 III호 탱크였고 가장 선진적인 것이래야 IV호 탱크 조기의 G형이었다. 그리고 돌격포 여기 10문의 II호 G형의 돌격포와 몇 대의 <족제비>호 탱크 저격 차였고 자주포는 III호 탱크 밑바닥을 개조한 105밀리 유탄포와 <황소>호 150밀리 자주포였으며 아프리카 시기의 21 기갑사단은 이미 <넘어간 태양인 격>이었다. 동맹군이 상륙하던 날, 제21사단 역시 반격을 조직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투입된 장비와 인수는 50대의 탱크와 1개의 기계화 영뿐으로 동맹군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하긴 소수의 부대가 해변까지 반격하여 5킬로미터에 달하는 돌파구를 개척했으나 후근보급이 단절되어 철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날 동맹군은 5개의 상륙 해변에서 모두 성공, 해안에 오른 병력은 13.6만 명이었고 상망자는 6000명뿐이었다. 그럼 노르망디 해변을 일본군이 수비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제 2 차 세계대전 중 일본 육군의 방어 작전능력이 출중했다는 건 누구나 다 공인하는 바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해 공 군 폭격과 포격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지라 이들이 구축한 방어공사는 견고할 뿐만 아니라 아주 은폐적인 것이어서 어떤 요새는 전문 미군이 지나간 다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노르망디의 독일군 방어공사는 그 자체가 대서양에서의 독일군 요새 중 가장 박약한 고리였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노르망디 해변을 수비했더라면 그들은 그 방어요새를 기필코 강화했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태평양 전장에서 매번 상륙작전을 펼치기 전야마다 미군은 우선 해 공 군의 화력을 집중하여 목표 섬도를 며칠, 심지어 10여일씩 불바다로 만들 군 했다. 당시 미군은 남태평양의 쾌잘린 섬을 공략한 후 전문 일본군 방어공사를 가상으로 한 함포사격 시험을 진행, 시험결과 반드시 203밀리 이상의 대구경 포로 정조준 해야만 일본군 은폐요새를 날려 보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노르망디에서의 동맹군의 해 공 군 포격과 폭격은 몇 시간에 그쳤는 바 이는 근본 태평양 전장과는 비길 수도 있었다. 만약 태평양 전장에서의 미군 폭격과 포격이 노르망디에서의 동맹군의 규모였다면 일본군의 방어시설이 적어도 80%는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미군의 상륙부대는 일본군한테 더욱 골탕을 먹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음, 방어 전술상 독일군은 해변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논쟁이 심했다고 하며 최종 절충방안으로 해변을 방어하되 부분적 병력을 근처의 종심지대에 배치하여 반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 두 가지가 다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달랐다. 일본군은 전쟁 중에서 전쟁을 배웠다. 이들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미군의 화력 앞에서 아예 해변을 포기하고는 지하 갱도공사를 대대적으로 구축했으며 방어의 중점을 섬도의 종심에 두어 미군의 함포 포환이 근본 일본군 진지에까지 와 닿을 수 없도록 하였다. 이런 시각으로 놓고 말하면 당시 노르망디에서의 룸멜과 룬데슈타이트가 우려한 것은 기갑부대를 종심에 배치했다가 적시적으로 해변에 다닿을 수 없을가봐서였고 또한 장갑부대의 위치가 동맹군 함포의 사정거리 내에 들기라도 할까봐서였다. 그 우려는 적중한 것이었다. 전장에서 독일군의 가장 예리한 장비였던 기갑부대는 동맹군의 폭풍우와도 같은 화력 앞에서 집중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독일군 역시 일본군처럼 기갑부대를 종심의 먼 곳에 배치하고 아울러 그 기갑부대를 소규모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보병들의 돌파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시키면서 방어의 받침역량 및 소규모 반격의 중견으로 돼 줬더라면 그토록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로부터 보아 일본군은 방어전술에 있어서 독일군에 비해 보다 실제적이었고 경험도 많았다. 필경 일본군과 미군은 태평양 전장에서 3년간에 거친 공방전을 해왔던 군대였으니 말이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아프리카 북부에서 미군과 딱 한번 소규모의 전쟁을 해봤으니 경험상 일본군에 비해 뒤지기 마련이었다. 이 외 언급할 것은 전투의지에서도 일본군은 독일군에 비해 더욱 완강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 노르망디를 방어하던 독일군에 비해서는 훨씬 더 완강했다. 왜냐하면 노르망디 해변을 방어하던 독일군 3개 사단은 모두 국방군으로 또 재건된 사단 혹은 새로 건립된 사단이었으며 특히 많은 소련군 포로로 구성되었던 <동방영>은 더욱 전투의지가 자연적으로 높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군 중의 <완고파>였던 당위 군이였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기 전투에 투입되었던 당위군 제12 <히틀러 청년단> 사단은 대다수가 소년병이었지만 사상 상 매우 완고했고 전투의지도 완강했으며 여기서 영국군은 자주 골탕을 먹군 했었다. 하다면 일본군의 완강한 전투의지를 놓고 보아 당위군에 비해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미군은 거개가 육군이었다. 해군은 소수의 해변폭파 대대뿐이었고 해군육전대는 없었다. 당시의 미군 부대 중 육군과 해군은 모두 의무병이었고 오직 해군 육전대만이 청일색으로 지원병으로 모두 자기가 자원해서 군 입대를 한 진정한 군인들이었다. 아울러 육전대는 훈련마저도 진짜 전투처럼 진행하는 전투력이 강한 부대였으며 육전대의 전투력이 일반 육군 수준을 크게 능가한다는 것은 모두가 공인하고 있던 바였다. 태평양 전장에서 거의 모든 가열하고 힘든 전쟁은 모두가 육전대가 맡았으며 육군은 기본적으로 보조전투를 치르는데 그치었다. 가령 태평양 전장에서 이런 가열하고 힘든 전투를 미 육군이 맡았더라면 아마도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고 상망도 엄청 더 컸을 것은 불보듯 번연했다. 또한 반대로 노르망디에서 독일군 대신 일본군이 지켰더라면 동맹군 육군은 절대적으로 큰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재삼 언급하지만 만약 노르망디의 수비군이 일본군이었더라면 긍정코 방어공사가 더욱 공고했을 것이고 전술도 더욱 합리했을 것이며 전투력도 비할 바 없이 완강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동일하게 일본군 역시 2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갑사단이라고 할 때 상륙 첫 날은 동맹군이 비교적 순리로웠을 것이지만 그 이튿날부터는 긍정코 애로가 첩첩할 것으로 종심으로 들어갈수록 진격속도가 늦어짐과 동시에 상망자도 더욱 많아질 가능성이 컸다. 그 실례를 들자면 태평양의 섬도에 대한 상륙전들을 보면 면적과 종심이 작고 후방 보급이 거의 없는 등 불리한 요소가 많았으나 일본군은 미군으로 하여금 얼굴색이 굳어지면서 혀를 내 돌리도록 했다. 하다면 노르망디 이런 대륙을 끼고 있는 해안을 일본군이 지켰다면 종심이 더욱 크고 후방보급도 원활하기에 동맹군의 상망은 기하급수로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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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7
  • 소가죽 한장의 전설 - 간도일본총영사관
    ▲ 간도일본총영사관 유적지 [동포투데이] 기유년에 생긴 일이다. 일제는 청정부를 윽박질러 용정에 총영사관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 지을 바에는 크게 지어 한치라도 중국 땅을 더 삼키고 싶었던 영사는 못된 궁리를 꾸며냈다. 일본영사는 국자가에 자리 잡고 있는 청나라 도태부에 있는 윤대인을 만났다. 웃음 속에 칼을 품고 있는 일본영사는 속으로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살살 발라가면서 예절스럽게 말했다. “대인도 알다 싶이 우리 두 나라는 자고로 친선적인 이웃이였지요. 내 오늘 대인과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고 나라의 일을 담론하게 되였은즉 그 영광이 하늘에 미치오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왔소?” “귀 정부에서 용정에 우리 총영사관을 두기로 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영사관원들이 당도하였는데 있을 곳이 없어 걱정이옵니다.” “허허. 나라에서 승낙한 일인데 있을 곳이 없다니 당치도 않은 소리요. 대체 얼마나 큰 집을 세우려 하시오?” 때가 되였다고 생각한 영사는 속으로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빌붙는 체했다. “우리는 본디 바다 한가운데 사는 소국사람들이라 욕심 부릴줄 모르웨다. 그저 영사관을 지을 터자리로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만 떼여주면 족하옵니다.” “뭐라오?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이랬소?” “예.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이랬소이다. 그만큼하면 족하옵지요.” 아무리 큰 소라도 가죽을 벗겨놓으면 큰 구들에 절반도 펼가 말가 하겠는데 영사관을 지을 자리를 소가죽 한장 만큼 달라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제 귀를 의심하여 다시 한번 물었지만 그 소리가 그 소리인지라 윤대인은 속으로 소국놈은 소국놈이로구나 하고 비웃으면서도 꼭 간특한 계교가 있을 것 같아 일본영사를 피하라 하고는 관원들을 불러놓고 전후사실을 말했다. “그 자들로 하여금 집을 지으라고 하십시오.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에 집을 짓지 않고 좀이라도 우리 땅을 점하는 날엔 혼쌀을 먹여줍시다”. 한 관원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그게 좋겠다고 한물곬을 팠다. 일은 쉽게 낙착되여 일본영사는 물러갔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가 용정에다 으리으리한 총영사관을 지었다는 소문이 윤대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윤대인은 노기충천하여 닫는 말에 채찍을 갈기면서 용정으로 달려갔다. 도착해보니 과연 높다란 담장이 빙 둘러있는 속에 커다란 층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이것이 그래 소가죽 한장 만한 땅이란 말인가? 그대들은 언약도 없고 국제공약도 없단 말인가?” 윤대인의 벼락 터지는 소리에 일본영사는 되려 웃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린 언약 대로 소가죽 한장 만큼한 땅에다 영사관을 지었을뿐이옵니다.” “눈이 먼 줄로 아는가? 이렇게 크게 집을 지어놓고도 소가죽 한장 만큼이라니!” “용정 시장의 소 한마리를 사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을 가지고 재여서 딱 그만한 자리에다 토성을 쌓았습니다.” “당치도 않은 소리로다”! “한번 손수 재여보시지요.” 영사는 미리 준비해놓고 있던 소가죽을 가져오라고 하졸을 시켰다. 그런데 그 자가 가지고 나온 소가죽은 통것이 아니라 실오리처럼 가늘게 오리오리 오려낸 소가죽이였다. 영사가 오려낸 소가죽을 붙여놓으라고 하자 졸개들이 개미떼처럼 모여들어 잠간사이에 소가죽을 붙여놓았다. 틀림없는 큰 소가죽 한장이였다. “이 소가죽 한장을 길길이 늘여놓으면 꼭 우리 영사관의 토성둘레와 같사옵니다. 소가죽을 통채로 놔두어도 소가죽 한장이옵고 오리를 낸 걸 합쳐도 소가죽 한장이오니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소가죽 한장이야 한장이지 두장이나 백장은 아니잖고 뭡니까?” 간특한 영사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아놓고 싶었지만 손수 대답한 말이라 윤대인은 입이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되여 용정에 으리으리한 일본총영사관이 들어앉게 되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26
  • [6.25전쟁 70주년 특별기획] 한반도 전쟁과 그것이 남긴 기나긴 여운
    ●철 민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아ㅡ 소식을 물어본다 한 많은 대동강아 … 이 노래는 우리 민족 분단의 괴로움을 잘 반영한 노래이고 무려 70여 년간 불려 진 노래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한반도에는 전쟁이 터졌다. 외세와의 전쟁이 아닌 동족상잔의 유혈 전쟁이 터졌다. 적어도 전쟁 초기에는 내전이었다. <폭풍> - <진격> - <남조선 해방> - <조국통일> ㅡ 이는 당시 전쟁을 도발한 자들의 슬로건이었다. 즉 소위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38선이 돌파되고 3일 만인 6월 28일에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서울의 중앙청 상공에는 남홍 색 인공기가 날렸다. 뒤이어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인민군에 의해 붕괴되면서 외세의 개입이 공식화 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으며 8월 중순 경에는 전선이 낙동강에 이르게 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9월 15일의 인천상륙 작전, 10월 1일 국군의 38선 돌파와 10월 19일의 한국군 및 유엔군의 평양 점령과 같은 날,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의 정전협정 조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 와 중 전쟁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다뮤멘터리 및 소설 등 작품들도 많았다. 필자를 포함한 중국조선족들은 중국이나 북한에서 만든 작품의 영향을 당연히 많이 받기 마련이었다. <영웅아들딸>, <침략자를 타격>, <어젯날의 전쟁>, <1211고지 방위자들>, <남강마을 여성들>… 당시 나이 탓이었는지 필자는 그런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서 아주 재미있고도 감명 또한 깊었다. 아니, 나이 탓보다는 그 사회의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미 제국주의와 남조선 괴뢰반동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조선인민의 불요불굴의 투쟁정신… 그런가 하면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한국의 친구들한테서 듣노라면 이들 역시 지난 한시기는 그랬다고 한다. 영화 <태백산맥>을 보면서 빨갱이들의 지독함에 치를 떨었고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을 보면서 김일성과 인민군의 무자비함에서 반공선전에 열을 올렸으며 영화 <빨간 마후라>를 보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에 자호감에 도취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무>와 <인민>이란 말만 들어도 빨갱이와 연관시키군 했던 한국의 어느 시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럼 이 어찌 그냥 나이가 젊었던 탓이라고만 하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자신이 참 유치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헌데 지금 냉철하게 분석해보면 반도의 남과 북이 모두 입으로는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화와 협력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상에서는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호전세력> 이 확실히 있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남과 북에서는 전쟁으로 치 닿을 수 있는 일종의 <긴장시일>이 있었다. 남측에 있는 탈북단체들에서 보낸 대북삐라를 빌미로 북측에서는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비무장 지대에 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일련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도발행위를 감행했다. 이런 행위를 감행한 북측의 실속은 잘 알바 없으나 일개의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에 그 댓가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같은 엄청난 도발로 대응한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도 도발이지 대응이라고는 판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도 남측의 <대북 삐라 날려 보내기 행위>는 어디까지나 탈북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의 행위였지 정부 측 행위로는 볼 수 없는 마당에 북측의 <폭파> 행위는 공공연한 도발이었고 남북 정상이 애써 이룩해놓은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일방적인 파국임에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혹시 북측의 진짜 목적은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괴롭힌 것은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진정 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남측 정부와 국민들이었다. 또한 모든 것이 북측의 계획된 <씨나리오>로 그냥 남측에 엄포나 놓자는 선에서 그치자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11월 대선을 겨냥한 것이든, 엄포를 놓자는 것이든 간 반도의 안정과 북측 자체의 이익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유명한 철학가 도올 김용욱 선생이 김정은 위원장한테 “두 번 다시 문재인 같은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란 충고를 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본 기억이 난다. 이는 문재인과 김정은의 만남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말로 된다. 또한 하늘이 준 기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남측이 대통령이란 북측의 주석이나 위원장처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아니고 5년제라는 제약성이 있는 것이며 그것도 대통령이라 해서 다 문재인처럼 진정으로 평화, 협력과 통일을 염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70년 전의 6.25 전쟁ㅡ 지금 와서 이 전쟁은 북측이 도발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전쟁이란 잘못된 것이고 범죄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내전이라고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다고 볼 때 6.25는 한반도의 통일은커녕 분단을 아주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낳았으며 그것의 가장 큰 책임의 장본인은 김일성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잘못된 결과의 책임을 김일성과 북측에 몽땅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그렇다. 왜냐하면 그 전쟁을 초래하게 만든 발원지가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제멋대로 긋어 놓은 38선, 즉 국토의 분단이었던 것이다. 그럼 왜 국토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는가? 그것은 조선민족(한민족)한테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 또한 어떻게 얻어졌던가? 그것은 스스로 우리 민족 자체의 힘과 노력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이념과 체제가 서로 다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38선 이남과 이북이 분단이 되었으며 작은 갈등으로부터 마찰을 빚다가 5년 뒤엔 끝내 전쟁의 시국에까지 치달아 올랐던 것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절대적인 책임은 김일성과 북측의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남측이 잘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세기 90년대 말이었던가 2000년대 초엽이었였던가 KBS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에서는 6.25 전 남측에서도 <북진통일>을 부르짖었고 이른바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라는 등 허풍을 친 것도 사실이었다. 워낙 빈 양철통이 소리도 큰 법이다. 또한 통일정부 수립에는 노력도 하지 않고 남측만의 단독 정부를 먼저 세웠는가 하면 <빨갱이 숙청>이란 슬로건으로 숱한 민간양민들을 학살한 것도 북측으로 놓고 말하면 남침을 감행할 수 있는 빌미로 되었겠다는 분석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사 피하지 못하더라도 중도 타협만은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쟁 초기, 한국 측이 인민군한테 밀려 낙동강 이남까지 쫓겨갔을 때 이승만 정부가 이념에만 매달리지 말고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 수도 있었고 유엔군은 항복한 정부를 위해 이 국토에서 싸울 빌미가 없을 가능성이 없었을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상할 때 김일성 역시 진정 민족이라는 큰 국면을 생각했더라면 흰 기를 들지 못한다는 이유도 없었다. 투항, 항복 ㅡ 민족의 이익을 앞세우고 진정 통일국가를 원한다면 이것 역시 그렇게는 수치스로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남과 북의 6.25 전쟁, 남북 삼천리에 폐허와 잿더미만 남았고 300만 명의 죽음과 1000만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고아를 만든 전쟁, 하지만 이런 결고를 초래해 놓고도 남과 북 모두가 서로 전쟁의 승자라고 떠들썩하며 환호했다. 그래 누가 누구를 이겼단 말인가?! 수백만 명의 희생의 댓가를 내고도, 각 자 원했던 통일도 실현하지 못한 전쟁 ㅡ 당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자고자대의 망상증에 걸린 민족이었다. 20살 미만까지는 필자 역시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으로 인정했다. 머리가 총명하다는 유대민족과 게르만 민족도 따를 수 없고 꺽어질망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소화민족도 비길 수 없으며 장사에 이골이 텄다는 중화민족도 부러워 하는 민족이라고 자부해왔었다. 하긴 장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예술에서 끼가 많은 민족이고 스포츠나 다른 몇몇 분야에서도 강점이 많은 민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헌데 우리 민족한테는 치명적인 열근성이 있다. 한국 건국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는 필자의 한 친구는 “우리 민족은 1 대 1이라면 그 어느 민족한테도 뒤지지 않지만 10 대 10의 대결에서는 100%로 뒤진다”고 했다. 정말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우리 민족은 싸움에 이골이 튼 것 같다. 필자가 자주 인용하지만 크게는 남과 북이 마라톤식 싸움을 계속하고 그 다음은 국회와 지역끼리 갈등이 크며 작게는 이웃끼리 친구끼리도 잘 싸운다. 술을 먹다가도 싸우고, 잘 어울리다가도 서로 등 돌리며 싸우고, 돈 때문에, 여자 때문에 싸우고 또 싸우고… 싸움이란 수치이며 비극이다. 그젯 날 6.25의 참상들을 보면 그야말로 끔찍했다. 하다면 이제 다시 전쟁이 붙으면 더 끔찍할 것으로 자기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게 단명할 수도 있다는 것이 현대전의 법칙이다. 아무리 통일을 원한다지만 무력통일은 안되며 이른바 <흡수통일> 역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제 와서 6.25는 역사로 되었다. 누군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지나간 6.25의 참상에서 과연 무엇을 깨닫고 있는가?! 6.25 사변의 70주년을 앞둔 이 시각 우리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니 어쩐지 슬퍼지는 마음이다. ❉ 필자는 동포투데이 논설위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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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4
  • 중국의 항일명장 왕일서, 그는 한국인이였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이 조선을 강점해 버리자 망국노로 되기를 원치 않는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로 건너갔으며 이 두 나라를 광복을 위한 기지로 삼고 일련의 굴곡적이고도 간고하게, 그리고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피에 얼룩진 범상치 않는 투쟁을 벌였다. 이들한테는 해당 국가와 군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많은 조선의 망명자들은 중국의 군대에 참가, 이들과 함께 일본 파시스틈을 소멸하는 투쟁의 제일선에 투신하군 하였다. 왕일서가 바로 매우 대표성을 띠고 있는 그런 조선인 중의 일원이었다. 왕일서(王逸曙)ㅡ 그의 조선이름은 김홍일이다. 그는 1916년 18세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길고도 곡절적인 항일구국의 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당시 약하고 힘없는 망명자로서 왕일서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익사 전야의 사람마냥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뭘 보거나 듣거나를 막론하고 상대방한테 도움을 청하군 했지만 무수한 실망과 좌절만을 거듭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거듭되는 좌절 앞에서도 시종 굴하지 않았다. 이는 적지 않은 중국인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1918년 왕일서는 상해에서 귀주의 군벌 유현세(刘显世)의 아들 유강무(刘刚武)를 알게 됐다. 조국광복을 위해 그토록 동분서주하는 왕일서의 일거일동에 탄복했던 것이다. 그 뒤 왕일서는 유강무의 알선으로 귀주 육군강무당에 들어가 군사를 배웠고 졸업 후 유현세의 부대에 들어가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 군벌은 그로 하여금 크게 실망토록 했다. 그야말로 이 군벌과 저 군벌간의 파벌싸움에만 열중하는 무리에 불과했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왕일서의 적성에 너무도 맞지 않았다. 조선의 광복을 위해서는 그래도 우리 민족의 투사들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상해에 한국임시정부가 들어섰다는 소문을 들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 뒤 귀주군벌의 유혹을 물리치고 상해로 온 왕일서는 곧추 지금의 상해시 황포구 마당로 306롱-4번지(上海市黄浦区马当路306弄-4号)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요원들은 왕일서를 만나자 반겨 맞았으며 그와 함께 대한 독립의 대의를 놓고 여러 가지 의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왕일서가 군사에 대한 천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 요원들은 그를 중국 동북에 파견해 대한독립군을 창설하도록 밀어주었고 그 또한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해 군대창설 임무를 맡고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가 후에 항일투쟁의 수요에 의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 경내로 들어갔다. 당시 이들은 한 가지 크게 잘못 판단하였다.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있은 일러 전쟁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숙적이 되었기에 러시아는 이들을 적극 지지해 주리라고 크게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이 때 러시아가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면서 그 광활한 러시아 땅에는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고 대한독립군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상대한테 잘못된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러일관계에서 대한독립군은 철두철미하게 러시아 켠에 섰으나 신생의 소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같은 종속으로 치부했으며 결국 대한독립군은 러시아 땅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대한독립군은 다시 중국 경내로 들어왔으나 거의 붕괴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와서야 왕일서는 조국광복이란 일종 장기적이고도 기나긴 노정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조급정서를 버리고 중국에 뿌리박고 중국혁명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왕일서는 이렇게 인정했다. ㅡ 중국군이야말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주력군이다. 그렇다면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것 역시 간접적으로 조선의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1926년 왕일서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에 투신, 북벌에 참가했으며 후에는 상해 오송요새(吴淞要塞) 사령부의 참모장, 상해 병기공장 군사기계처 주임, 제19로군 후방정보국 국장 등 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2년 상해에서 <1.28 송호항전(淞沪抗战)>이 폭발하자 왕일서와 상해에 있는 조선의 지사들 그리고 중국 동지들은 국내외를 놀라게 한 한차례의 테러행동을 기획(총책임자 김구), <부두방(斧头帮일명-도끼방)> 두령 왕아초(王亚樵)의 도움으로 조선청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로가와를 비롯한 일본군 장병 여러 명을 죽이고 중상을 입게 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여기에는 왕일서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 뒤 왕일서는 또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오송구에 정박해 있는 일본함정 <이즈모(いずも)>호를 폭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사건도 있었다. 1937년, 중국에서 전면 항전이 폭발하자 왕일서는 견결히 자진하여 당시 중국군 중 실력이 가장 막강한 부대의 하나인 백휘장(柏辉章) 장군이 인솔하는 102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상해보위전, 만가령 전역, 상고전역 등 중대 전역을 치렀으며 혁혁한 공훈도 많이 세운 부대였다. 이 부대 참모장으로 있는 기간 왕일서는 그의 군사적 재능과 용감성 등으로 장개석의 중시를 받았고 후에는 국민혁명군 육군 중앙대학에 가서 학습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중장참모로 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하자 왕일서는 떠난지 수십년이 되는 조국으로 인차 돌아간 것이 아니라 중국 동북에 남아 일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된 후에야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호국군(护国军)국장, 육군사관학교 학장 등 직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인민군 앞에서 전투경험이 없는 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이러자 왕일서는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몇 차례의 섬멸전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이는 채납되지 않았다. 결과 한국군은 각각 격파되는 대가를 치렀다.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에 왕일서는 명령에 의해 한국군 제1군단 사령을 맡게 되었고 그가 인솔하는 제1군단은 한강 이남에 견고한 방어라인을 구축해 이를 사수하면서 미군 스미스 부대가 오산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이렇듯 왕일서의 유능한 군사전략도 인정하지 않는 한국군 수뇌부였다. 당시 왕일서는 소위 <중국파>였기에 친미파와 친일파들이 득실대는 한국 군부 내에서 입지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왕일서는 점차 실세에서 밀려났고 나중에는 군부에서 은퇴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후에 왕일서는 한국 외교부 장관, 한국 광복회 회장 등 직을 맡아하다가 1980년에 사망, 향년 8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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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2
  • [김정룡 칼럼] 귀 빠진 날과 미역국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중국어가 영어에 비해 표현력이 4.5배란다. 하긴 한문자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뜻글자(표의자, 表意字)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중국을 이웃한 우리 말 어휘 중 75%가 한자어라고 하니 한문 신세를 단단히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한자어를 제외한 순수 우리 낱말들은 삶의 정서를 표현하는 기능이 너무 풍부해서 세상에서 으뜸이라 나는 생각한다. ‘맛’, ‘멋’, ‘판’ 우리민족 삶의 정서를 대표하는 낱말을 타언어로 번역해보라. 의역은 가능하나 직역은 영 안 된다. 억지로 의역할 수 있어도 본래의 ‘멋’과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한다. 우리말 의성의태어는 더욱 기가 막히게 맛깔 난다. 더해서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말들이 우리에겐 많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는 말, 한 인간이 세상에 나온 생일을 ‘귀 빠진 날’이라고 하는 말, 우리 선조들의 기막힌 창의성에 의해 생겨난 우리만의 언어들이다. 우리만의 언어들은 나름대로 선조들의 삶의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 그 유래를 추적하다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보람도 느끼게 된다. ‘귀 빠진 날’에서 귀는 머리 양쪽에 달고 다니는 그 귀이다. 왜 인간이 태어남을 귀가 빠졌다고 말할까? 궁금하지 않는가. 요즘 인터넷이 발달해서 책을 읽지 않고도 컴퓨터만 만지작거리면 웬만한 지식정보는 다 얻을 수 있다. ‘귀 빠진 날’이란 말의 뜻도 네이버 선생한테 물으면 똑똑하게 대답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정보’를 접하는 순간 나의 옛 기억을 소환해내어 그때 그 시절 추억에 잠시 아련히 잠겨본다. 나는 헤는 나이로 18세에 고중(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당시는 대학입시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유일한 길이 곧 시골농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게 농부가 된 지 8개월 만에 시골위생소(시골보건소)에 취직했다. 일단 호미자루를 벗었으니 시골사람치고는 크게 출세하여 신분상승한 셈이었다. 더 운이 좋은 것은 위생소에 취직하자마자 6개월 만에 용정현병원에 가서 ‘용정현 제4기 맨발의사 강습반’을 다니고 맨발의사(赤脚醫生) 면허증을 취득했던 것이다. 당시는 최연소 맨발의사 기록이었다. 그때부터 이 세상 다른 총각들이 경험해보지 못하는 일들이 나의 인생길에 펼쳐진다. 에둘러 말할 것 없이 나는 이마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19세부터 아이 낳는 현장을 쌔빠지게 다녔다. 한창 이성에 대해 몹시 싱숭생숭할 나이에 그런 장소를 다녔으니 그때 있었던 일들이 지금도 영화필름처럼 생생하게 나의 머리에서 맴돌고 있다. 그저 그냥 맴도는 정도가 아니라 집요하게 추억을 소환하여 뇌리에서 재생하게 만들고 있다. 인간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애를 낳지 못하는 지구상 유일한 동물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으려면 산파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출산을 돕는 코끼리 같은 짐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새끼라도 덩치가 커서 누군가 받아주지 않으면 맨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늙은 코끼리들이 산모를 둘러싸고 상아로 아이를 받아준다. 그렇지만 분만을 집적 돕는 것은 아니니 그 코끼리들을 산파라고 부르지 않는다.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바람에 골반은 자꾸 작아지고 머리통은 반대로 커졌다. 원숭이나 북극곰처럼 네발로 다니는 짐승들은 넓은 산도(産道) 덕분에 2분이면 분만이 끝나는데 인간은 하루, 길면 며칠씩 산통을 겪어야 한다. 또 다른 포유동물들은 탯줄이 있지만 출생한 뒤에는 그냥 없어진다. 소와 말은 새끼가 나올 때 체중이 무거워 자연히 탯줄이 끊기고 개나 고양이는 어미가 씹어서 자른다. 그런데도 탯줄은 말라서 떨어지고 배꼽은 남지 않는다. 인간만이 배꼽이 있는데 역시 산파가 탯줄을 끊어줘야 올바로 정착된다. 산파의 역할은 이렇게 아이를 받아내고 탯줄을 끊어 배꼽을 올바르게 정착시키는 것이다. 옥황상제로부터 명주실 세 묶음과 은가위를 하사받았다는 삼신할머니가 우리민족의 최초의 산파이자 영원한 산파이다. 그런데 인간이 모여 사는 데는 아이를 낳기 마련이고 그 신생아들을 받아내고 탯줄을 끊어줄 산파들이 있어야 하는데 모택동의 의료노선에 의해 당시 중국 시골마다 산파가 있었다. 산파가 따로 있는데 왜 젊은 총각이 아이 낳는 장소에 나타날까? 시골 산파들은 산모가 순산으로 낳으면 그냥 받아주고 탯줄을 끊으면 그만이지만 만일 경우 순산이 아니고 난산에 부딪히면 곤경에 처하게 되며 해결책이 없다. 예하면 아이 낳는 도중 정신을 잃는 쇼크가 온다거나 지나치게 기진맥진하여 힘을 쓰지 못한다거나 하면 혈관 주사도 놓을 줄 모르는 시골산파의 능력으로는 구급이 안 된다. 그래서 이 맨발의사 총각을 불러 대기시켜 놓거나 미리 부르기 민망해서 사전대기는 못하고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야 부르곤 하였는데 아무튼 아이 낳는데 수없이 많이 다녔다. “귀가 보인다. 좀 더, 좀 더.” “자아~ 이 고비만 넘기면 되니까 힘을 모았다가 한꺼번에 해결 보자고.” 아이 낳는 장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태아는 엄마의 배와 헤어질 때 먼저 머리부터 내민다. 머리카락이 보이고 그 다음 이마가 보인다. 이마가 다 나온 다음에는 귀가 보인다. 그런데 귀는 머리 양 옆에 따로 붙어 있어서 나올 때면 애먹는다. 일단 귀가 다 나오면 나머지는 쉽게 마무리 된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데 있어서 관건은 귀가 빠져나오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생일을 ‘귀가 빠진 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렇게 아이 생산 시의 관건적인 생리적인 현상을 뜻하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엄마가 나를 낳을 때 가장 심하게 겪었던 산통을 표현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자신의 생일을 ‘귀 빠진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아마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생일을 쇠지 않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 말은 남자들이 많이 하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가 겪은 산통을 잊지 못해 ‘귀 빠진 날’이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자를 가장 천시하고 압박한 집단이 바로 이 땅의 조선남자들이었다. 우리민족의 남자들의 삶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삶이었다. 요즘 우연하게 한국 그때 그 시절 자료를 접하게 되었는데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 넘는 스피드로 달리던 197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한국 산모의 75.1%가 자기 집에서 분만했다고 한다. 그것도 거의 반수가 의사나 산파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숨죽이며 출산했다. 도움을 받는다 해도 조산부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반반이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도시에 시집 간 여성조차도 시골 시집이나 친정집에 와서 분만하다 보니 시골에서 아이 낳는 수가 엄청 많아 이 총각도 빈번하게 다녔던 것 같다. 지금은 집에서 조산소로 조산소로부터 병원으로 변화되고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가 급증하고 있다. 마취하고 배를 갈라 아이를 들어내니 산모는 태아가 귀가 빠지는 산통을 모른다. 이렇게 탄생된 아이들은 장차 자신의 생일을 ‘귀가 빠진 날’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 않을까. 하여튼 나는 좀 기괴한 인간이라 별거 다 ‘시비’를 걸고 있다. 한편 우리민족 여성들은 아이 낳으면 무조건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 있다. 또 사람마다 자신의 생일이 돌아오면 그날 아침 미역국을 먹는다. 같은 문화권인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에는 이런 풍습이 없다.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 앞에서 ‘저런 인간을 낳고도 그 어미가 미역국을 먹었겠지.’라고 말하면 무슨 의미인지 몰라 머리를 갸우뚱할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 당나라 서견이 <초학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근대 실학자 이규경도 다음과 이야기를 기록에 남겼다. “어떤 사람이 물에 들어갔다가 이제 막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먹혔다. 고래의 뱃속을 보니 미역이 가득 붙어 있었고 장부의 악혈이 모두 물이 되어 있었다. 고래 뱃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는 미역이 산후조리에 좋다는 점을 알았다. 이것이 세간에 전해지면서 효력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미역의 약효를 알리는 대목이 있다. “신라 미역, 고려미역이 안팎 종기를 낫게 하는 신비한 약제로 사용된 적이 있다.” 과학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출산 후 상처를 아물게 할 뿐만 아니라 몸 안의 피를 맑게 해주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자궁수축과 지혈까지 도와주고 출산 시에 유혈(流血)한 산모에게 피를 공급한다. 그 뿐만 아니라 갑상선 호르몬을 보충해주는 역할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역국 먹는 풍습이 삼국 시대부터 오늘까지 천여 년을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의학적으로 우리민족이 미역국을 먹는 풍습의 유래가 설명되었다 쳐도 아직도 완전한 설명이라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든다. 속설에 의하면 태아는 양수 속에 사는데 양수는 바다의 맛과 같이 찝찔한 맛이 난다. 바다에서 자라는 미역이 바로 양수의 맛처럼 찝찔하다. 미역의 사촌인 김도 마찬가지, 그 맛이 찝찔하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서 나는 낙지도 명태도, 갈치도 등등의 해산물도 모두 양수의 맛과 비슷하게 찝찔한 맛이 난다.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아이들에게 김을 주면 아주 맛나게 잘 먹는다. 나의 손자 녀석도 김을 주면 아주 잘 먹던 기억이 있다. 한국 최고 석학으로 꼽히는 이어령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김은 태아 때의 생명기억으로 그것을 먹음으로써 그 아이는 지금 태내의 세계, 바다로 가는 것이다. 바다에서 온 생명의 습성과 가장 가까운 것이 바로 한국인이다.” 우리민족이 산모가 미역국 먹고 아이들이 김을 즐겨 먹는 이유가 이어령 선생의 이 말로 설명이 다 된 것 같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연구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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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1
  • 속담으로 본 우리의 민족적 특성
    ●권진홍 “한국에는 멀리 내다보는 속담이 없어. 중국에서는 ‘나무를 기르는 데는 십년이 필요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는 백년이 필요하다(十年树木,百年树人)’라고 하잖아? 한국 속담에는 이렇게 멀리 내다보고 계획하는 속담이 어디 있냐?” 얼마 전에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오빠가 나한테 한 말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말이 나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말만은 유독 머리에 박혔다.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여서인지 아니면 또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말은 우리말에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나에게 정말 크게 다가왔다. 말 듣는 순간 머릿속 채널을 부지런히 돌려보았지만 반박할 만한 속담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이 지나고도 이 말은 여전히 귀전에서 맴돌았고 속담들을 좀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네이버사전에 들어있는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우리말샘’에 수록된 속담들을 다 추출해냈다. 어마어마한 양이였다. 학생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혼자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다음은 속담들을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보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절반 정도를 봤는데도 내심 기대했던 속담은 없었다. 실망감이 들기도 하고 왜 이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오빠의 그 한마디를 듣고 속담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속담은 여느 말들과는 달리 한 민족의 역사, 풍습, 민속, 지혜 등을 담은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백과사전(1998)에서는 속담에 대해 옛날부터 말로 내려온 교훈이나 비유의 뜻을 담은 짤막한 말로 민중의 지혜가 응축된 민간 격언, 이언, 속언이라고 정의하였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삶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이나 어떠한 가치에 대한 견해를 간결하고도 형상적인 언어 형식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어떤 학자는 속담을 어떤 종류의 교훈, 기지, 상상, 경계, 비유, 풍자 또는 모든 관찰 경험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표현하는 말로서 인간 생활에 관한 진리를 말할 목적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기술하였다. 이처럼 속담은 인간이 집단적 사회생활을 해 오는 과정에서 개인적 또는 집단적 사유 및 공감을 통해 수렵된 세상사 및 인간 삶에 대한 지식이며 신념체계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속담에 내포된 심리적 특성을 “한 국가의 기질과 정신은 속담에 의해 발견된다”라고 하였듯이 속담에는 민족의 마음이 반영되고 민중의 꿈과 슬기가 새겨져있다. 민족의 특성, 슬기, 정신을 언어화한 것이 속담이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기대하는 속담을 찾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속담을 토대로 한국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한 심리학자의 연구결과는 언어중시, 체면지향, 목전실리, 피해의식 네 가지로 정리되여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공짜는 양잿물도 마다 아니한다’, ‘나중에 꿀 한 식기 먹기보다 당장 엿 한 가락이 낫다’, ‘내일의 천자보다 오늘의 재상’ 등 속담처럼 목전실리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 속담에 멀리 내다보면서 장기 계획을 하는 속담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속담은 어느 짧은 시간 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우리 민족 전체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왜 목전실리를 중시하고, 이런 목전실리를 중시하는 심리는 어떻게 형성되고 계속 이어졌을 가 하는 사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담은 역사성, 문화성, 사회성을 갖는 만큼 이러한 속담들이 많이 형성 된 것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 문화, 종교와 갈라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의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가를 들여다보았다. 보통 우리는 민족 고유의 종교가 없다고들 한다. 종교만큼 한 집단의 의식과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진정 우리는 토착종교가 없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토착종교는 완전 사라져버린 걸가? 대부분의 민족이 나름의 원시종교가 있듯이 우리 민족도 토착 종교가 있었다. 샤머니즘, 무교/무속(巫教/巫俗)이 바로 우리 민족의 토착 종교였다. 다만 우리 민족 대부분은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신이라면서 저속하게 여긴다. 우리 민족 대부분의 심리 깊은 곳에는 무속적 특징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대체 무속이란 어떤 것일까? 무속은 신령이 실재하여 샤먼이라는 주술자에게 붙어 신에게 소속되고, 신으로서 행동하여 악마와 요정을 쫓고, 인간에게 복지를 가져다준다는 원시적인 민간신앙이다. 샤머니즘은 북아시아,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남•북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포된 하나의 원초적 종교였다. 무속은 수천 년이란 시간을 연속해오는 과정에 박해와 수난을 당하면서도 지금까지 지속되여오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언어, 풍습 제도 등에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 민족의 흥, 노래, 춤, 술문화 등은 바로 무속의 제의 형식인 굿에서 발전하여 온 것이다. 무당의 무가, 신무 등이 오늘날의 우리의 가요, 춤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여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이 원시종교는 언제부터일가? 우리 민족의 기원을 알리는 신화에 ‘단군신화’가 있다. 천제의 아들 환인이 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 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신화이다. 그런데 ‘단군’이라는 명칭은 하늘을 뜻하는 알타이어 ‘텡그리(Tengri)’의 음에서 유래한 것이며, ‘왕검’의 ‘검’은 신령을 뜻하는 ‘캄(Kam)’의 음역을 따서 한자로 표시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즉 우리 민족 무속의 역사성을 단군신화에서부터 찾는 것이다. 무속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인데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은 왕호이자 무칭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사에 있어서 무당은 부족 내지는 부족 련맹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다. 신라시대에는 불교를 수용하면서 고대 신앙이 불교와 혼합하여 창조적인 형태로 전개 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화랑도이다. 그러다가 신라의 쇠퇴기에 사회가 불안해지자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성격의 무속이 개인의 안전과 축복을 찾는 무격신앙으로 발전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유학자들이 서서히 많아지면서 무당들이 억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공자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극력 꺼렸기 때문에 유학자들에게 무속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하지만 고려 때에도 무속은 생활면에서 광범위하게 적용 되였고. 개인이 발병을 해도, 국가의 행사에도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귀족의 딸 가운데에도 무당이 된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유학, 그중에서도 성리학이 국시가 되면서 무속은 전례 없는 압박을 당하고 무당들은 천민계급으로 강등되고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량반들은 무속을 빈천한 것으로 폄하하면서 멀리했다. 그렇다고 무속이 도성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는 성수청, 활인서 등의 무청이 있었고 사제무가 기우제, 산천신제, 성황제 등을 도맡아서 하였다. 그리고 유교적 고상함으로 표방하고 있는 양반들도 정작 가문에 불행한 일들이 생기거나 하면 부인들에게 못이기는 것처럼 하면서 야밤중에 무당들을 불러다 제사를 지내고 굿을 하곤 하였다.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무당들이 다 도성에서 쫓겨났지만 도성 속의 무당에 대한 수요는 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무속은 오늘까지 이어져왔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의 억압과 핍박하에서도 요절하지 않고 지속되여올 수 있었던 것은 존재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민중들이 믿고 신앙하고 위기 때마다 민중들을 지탱해주는 힘의 원천으로 되였기 때문에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 문화의 핵이 무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무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현세중심, 현실중심, 실용주의, 인간중심이라고 한다. 이햇님(1997)은 무속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첫째, 자연주의적이고 현세 중심적이다. 무속에는 초지상적인 가치나 형이상학이 없고 오직 자연 질서에 따른 생자필멸사상(生者必灭思想)과 현세에서의 가족 내지 부락 공동체의 구복(求福)과 제재(除灾)를 위한 현세 중심적 가치관과 도구적 신관이 있을 뿐이다. 민족의식•국가의식•역사의식 같은 자연적 공간을 초월하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 의식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혈연•부락 등 일차적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좁이 의미의 공동체 의식은 비록 범위는 좁을지라도 의식의 강도는 높다. 둘째, 평화적이고 인간중심적이다. 무속에서는 선•악 같은 양극적 가치들 사이의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평화나 화해를 추구한다. 셋째, 현실 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이다. 무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긍정하고 그 현실에 적응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찾는다. 현세적 이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건 실용적으로 이용한다. 우리 민족 문화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무속의 특징을 보면 왜 우리 속담들에 현실 중심적이고 실리적인 속담들이 많은지 자연 이해가 된다. 그리고 또 왜 장기성을 나타내고 큰 그림을 그리는 속담이 없는지도 이해가 된다. 혈연, 마을공동체의 리익은 중시하면서 그 범위를 벗어난 민족의식, 국가의식이 결핍하였던 문화원류가 그 원인이 아닐가 싶다.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속담처럼 철저하게 즉 ‘지금’, ‘이곳’을 중시하는 현재 중심적 사고,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신도 인간의 삶을 부러워하고 인간의 조종을 받는 현세중심, 인간중심의 세계관에서 비롯되였을 것이다. 무속이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수천 년을 존속되여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존재의 이유가 있고 끈질긴 생명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문 무속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무속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글을 쓰면서, 사고를 하면서 느낀 점이 피해의식을 나타내는 속담이 많을 정도로 우리 민족이 피해의식의 심리가 강한 것은 자기 부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 우리 민족을 ‘한’의 민족이라고 한다. 강국들 사이에 끼여있는 지역적 특성에서 ‘한’이 맺혀 피해의식이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많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문화의 핵인 무속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조선, 일제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무속에 대한 부정과 폄하, 핍박으로 하여 점차 무속을 저속한 것으로,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원초적인 종교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부정하기 전에 이미 형성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무속 의식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핍박받을수록, 부정할수록 그에 대한 의지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것을 우리의 문화의 핵이라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인정하지 못할 뿐더러 부정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불교적으로, 유교적으로 기독교적으로 포장하면서 살아왔다. 자기에 대한 강한 부정은 내심 속 자리하고 있는 덩어리와 충돌하면서 한이 생기고 피해의식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된다. 피해의식이 생길수록 이해관계에 민감해지고, 이해관계에 민감해질수록 미래를 지향한 장기적 계획보다는 단기적 즉각 만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자기 부정이라는 것도 우리 민족의 원초적 심리인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시조 단군을 탄생시킨 웅녀는 곰이라는 자신을 부정하면서 인간이 되려고 하였고, 일련의 시련을 거쳐 녀자가 되였고, 환인과 혼인하여 단군 왕검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다른 종교들처럼 신에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의 초자연적 능력을 조종하여 인간의 행복을 만들어주고, 신도 인간세계를 부러워하는 인간중심의식, 민족•국가의식보다 더 강한 혈연의식, 그 범위를 더 좁혀보면 강한 자기애라고 할 수 있겠다. 강한 자기애와 강한 자기부정, 서로 반대되고 상충되는 이 두 의식이 강렬하게 부딪치면 어떤 심리가 만들어질까? 그러면서 어떤 특징이 보여질가? 세상을 비추기도 하고 담기도 하는 말의 일부인 속담으로부터 민족의 성격을 보았고, 심리를 보았고, 그 원류로 생각되는 것에 거슬러 올라가 보면서 우리 문화의 핵을 짚어보고 그것이 집단심리형성의 원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나의 좁은 식견으로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새로운 과제도 남겨본다. 필자/권진홍(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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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1
  • 고국도 모르고 모국도 모른다
    ●김희수 어느 조선족 사이트에서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어이없는 글을 보게 되였다. 아래 이 글의 내용을 요약한다.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모국: 1. 자기가 태어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쓰는 말. 2. 따로 떨어져 나간 나라에서 그 본국을 이르는 말. 고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사전 해석이 알려주듯이 현재 중국에서 중국 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한국을 “모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용법이다. 한국이 일부 이민 1세의 모국이었겠지만 3대 4대에 걸치는 우리가 태어난 나라는 아니다. “고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더더욱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보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면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자세이다. 글은 사전해석을 근거로 조선족에게 한국은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있다. 우선 바이두(百度) 백과의 해석을 보자. 모국: 문화상의 조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상술한 해석에 따르면 중국조선족은 한국을 모국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화교들이 미국국적을 가졌든 유럽 국적을 가졌든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모국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해석을 다시 보자. 모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이 해석을 근거로 “중국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졌기에 남의 나라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고로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상술한 사전해석에서 맨 앞에 “주로”란 말이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까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지 이런 경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도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인 조선이나 한국을 고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조선이나 한국을 “모국”, “고국”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중국을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뿐. 전 세계의 화교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의 국적을 가졌든 간에 모두 중국을 자신의 조국, 모국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염황 자손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라는 글의 작자는 조선족더러 우리의 조상이 세세대대로 살던 나라를 “모국”, ‘고국”이라고 부르지 말란다. 우리 민족더러 조상도 모르는 인간 망종으로 되라고 하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필자/김희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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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6-18
  • 아프리카서 가장 아름다운 '흑진주'-로리타
    ▲아프리카서 가장 아름다운 '흑진주'-로리타ⓒ차트망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장 인정하는 <미(美)>의 표준요소로 삼아왔다. 그리고 중국에는 <햐얀 피부 한가지로 못생긴 세 곳을 감출 수 있다(一白遮三丑)>는 명언도 있다. 하지만 얼마 전, 피부색깔이 극히 검은 한 소녀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흰 피부를 가져야 비로서 아름답다>는 고유의 관념에 일타를 안기었다. 그럼 이 소녀의 얼굴은 구경 어떤 매력을 가졌을까? 중국 차트망에 따르면 이 소녀의 이름은 로리타(Lolita)로서 진짜 오리지널 아프리카 흑인이다. 절대 다수 사람들의 심미 관념에서 흑인의 미는 진짜 감상가치가 없을 지경이지만 로리타 소녀의 용모는 그야말로 이목 일신(耳目一新)으로 너무도 아름답다. 사진으로부터 볼 수 있다 싶이 로리타의 피부는 여느 아프리카 여성보다도 오히려 더 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그녀의 정교롭게 생긴 오관에서 뿜겨나오는 미감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 약간 높다란 콧마루, 짙은 눈썹과 사람의 심령을 사로잡는 그윽한 두 눈, 이런 것들을 하나로 조합하여 구성된 얼굴은 피부의 국한 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정교한 얼굴 외 로리타의 몸매 역시 쭉 빠지고도 건강미가 넘친다. 거기에 평소 치장에 아주 신경을 쓰고 있는 로리타이다. 때문에 네티즌들은 그녀를 두고 <가장 아름다운 흑진주>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한편 평소의 로리타는 사교적인 자세로 자기의 일상생활을 친구들과 공유하기를 즐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사람들은 점차 이 소녀가 갖고 있는 자신감 넘치는 일면을 보아낼 수 있었으며 로리타 역시 이 때문에 재빨리 많은 팬을 가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로리타가 남들한테 많이 알려지게 되자 그녀의 부모는 딸의 인신안전을 위해 그녀가 단독으로 집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력 제한, 매번 외출 시마다 배동인이 있어야 가능했다. 또한 로리타의 <미적 매력>으로부터 알 수 있는바 미감이란 정교한 오관 및 하얗고 뽀얀 피부로 과시하는 외에도 다른 요소로 체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많은 사람들 인상 속의 아프리카인은 천성적으로 검기에 아프리카의 여자애들도 모두 이쁘지 않은 것으로 각인되어 왔다. 하지만 인간은 절로 자신의 이모저모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예하면 성별, 피부와 용모 등을 말이다. 반면에 평온하게 자신의 숙명을 접수하고 동시에 자신감을 드러낼 수도 있으며 또한 이것이 다른 수확으로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아프리카의 로리타란 소녀처럼 비록 피부는 검지만 오히려 그것으로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었으며 그리고 오관이 정교하기에 대뜸 18만 명에 달하는 팬을 가지는 <흑진주> 즉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흑인 미녀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한테 보이는 로리타는 용모가 아주 출중한 소녀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쵸콜렛 판>의 <바비소녀>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녀한테 잡지 표지의 모델로 시험해 보라고 건의하기도 한다. 현실 생활에 있어서 흑인은 흔히 기시를 받고 있으며 불공정한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로리타만은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검은 색 피부를 가진 것으로 하여 오히려 긍지감과 자호감을 갖고 있다. 로리타가 자신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후 그녀한테 차례지는 것은 경멸이나 조소인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네티즌들의 댓글은 모두 로리타에 대한 찬미였으며 그녀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네티즌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피부를 갖고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로리타한테는 사람을 흡인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정교한 오관과 완미한 몸매 등은 미녀 표준 잡기에 있어서 부인할 수 없는 조건이다. 아울러 로리타는 아프리카 흑인한테는 그닥 흔치 않은 높다란 콧마루와 아시아인의 심미표준에도 잘 부합되는 조건도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이윽토록 그녀를 뜯어보노라면 역시 일종 아프리카 여인의 독특한 미감을 보아낼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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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6-17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②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오만한 일본, 천장절(天長節)행사에서 폭탄공격을 받다 상해사변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끝날 무렵에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의기양양한 일본군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그들의 소위 천장절행사를 크게 열어 승전기념을 겸한 군사적 시위를 펼치고자 획책하였다. 천장절이란 일본왕의 생일로 군국주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 일본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강요하고 그들을 전쟁마당에 끌어낼 목적으로 왕을 신격화하고 왕의 생일을 일본의 최대의 명절이자 신성한 날로 지켰던 그들의 국경일이다. 일본은 마치 1871년 프로씨야군대가 파리를 점령하고 베르사이유궁전(凡爾賽宮)에서 윌헬름 1세 독일황제 대관식을 연 것을 흉내라도 내듯이 남의 나라에서《만세 일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붙이고 오만한 행사를 펼친것이다. 당시 홍구공원안은 상해거주 일본인 1만여명, 상해 침략 일본군 1만여명, 그밖에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여명 인파가 회집하여 성황을 이루고있었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 윤봉길이 일본 국기를 들고 도시락과 물통을 메고 잠입한 것이다. 일본군은 오전 10시부터 분열식과 사열식을 마치고 기념식을 시작하였다. 높은 단위에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고관들이 도열하고 그 오른쪽에 도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이 닭벼슬모자를 쓰고 사회를 봤다. 식이 시작되고 오전 11시 40분쯤 되여 윤봉길은 성난 사자처럼 뛰어나가 지니고 있던 도사락을 던졌다. 중국군 병공장(兵工廠)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 귀주의 륙군강무학교를 졸업한 독립운동가)이 만든 폭탄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을 내며 작렬하였다. 단상에서 기고만장하게 서있던 원흉들이 엎어지며 연단 아래로 쓰러졌다. 제국주의가 쓰러지는 모습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했던 한 쏘련 인이 촬영한 현장필림을 보니 일본뿐아니라 세계 제국주의가 무너지는 모습 같았다. 이때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定差) 등은 즉사하고 일본 제3함대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찌사부로(野村吉三郞)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등 나머지 놈들도 눈과 다리를 잃었다. 당시 주중(駐中) 일본공사였던 시게마쯔(重光葵)는 왼다리를 잃은 채 13년 뒤인 1945년 9월 2일 패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윤봉길은 거사후 군 경찰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쓰러졌다. 주먹질, 발길질, 몽둥이가 그의 몸으로 퍼부었다. 그가 입고 있은 회색정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몸의 형태는 알아볼수 없게 되여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군경들은 경계선을 치고 그를 감시하다가 이윽고 차가 와서 머리와 다리를 집어 들어 짐짝처럼 차 뒷좌석에 처넣었다. 윤봉길의사의 최후를 기록한 일본 륙군성 극비문서 만밀대일지(滿密大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4월 29일 상해에서 시라가와 군사령관 등에게 폭탄을 던져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살인,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벌칙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윤봉길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金澤)시 교외 육군 공병작업장내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하에 사형이 집행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자 유해(遺骸)를 씻고 납관(納棺)한 다음에 가나자와시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 30분 모두 종료되었음. 처형 직전의 윤봉길의사:“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하였다. (일본 헌병사령관 보고서) 꼭 실현되고야말 대한독립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멀지 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이는 1932년 12월 19일 윤의사의 희생직전 마지막 유언 이였다. 중국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활략하던 김학철씨는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하였다. 홍구공원의 정의로운 죽음은 우리 계레의 갈 길을 밝혀주었을뿐아니라 당시 중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커다란 자극과 공명을 남겼다. 이 쾌거로 인하여 수괴를 잃은 일제는 기세가 크게 꺾기여 급진적침략행보를 늦추지 않을 수 없었으며 중국은 민족적 자각의 계기로 삼아 일제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서두름과 동시에 한국을 동반자로 재인식하게 되였다. 또한 전 세계가 베르사이유(凡爾賽) 체제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피압박민족의 해방 없이는 세계평화를 기대할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였다. 림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도 시작되었고 독립을 기다리다 지친 세계 모든 약소민족의 가슴에 확고한 신념과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일제가 윤봉길의사를 가두고 처형하여 땅에 매장해도 윤봉길의사의 기개는 싹이 트고 일제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만한 폭발적이고 값진 민족의 에너지로 작동 되였다. 윤의사의 의거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한 통쾌한“독립전쟁”의 한 장면 이였으며 민족자존을 세계만방에 선양하는 계기가 되였음도 당연한 리치였다. 당시 세계 언론들은 이를 일제히 보도하였고 그 정의의 기록은 지금도 역사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할빈 의거와 더불어 한국독립운동사상 2대 쾌거인 상해의거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백범일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이 의거로 말미암아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은 놀랄 만큼 호전되었다. 특히 이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 양면으로의 협력과 원조를 베풀기로 다짐했다. 둘째, 이 거사로 말미암아 미국, 하와이, 메히코, 쿠바 등에 사는 한인교포들의 애국열정은 전무후 무했으리만큼 높아졌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백범에 대한 후원이 격증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도 조국광복 이후 출판한“도왜실기”에서 상해의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우리가 조국을 되찾고 조국 땅을 밟게 된 것이 모두가 윤의사의 덕이요. 우리 임시정부와 윤의사를 비겨서 말하자면 갓 난 어린이가 깊은 연못에 빠져서 금방 가라앉는 위급한 찰나에 윤의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물속에 뛰어들어 이 어린이를 번쩍 건져 구해놓았소. 이 어린이가 자라서 오늘 삼천리강산을 달리고있는 것이요. 조국독립투쟁이 우로부터의 부과된 의무조항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솟아오르는 민중의식의 일환이기에 윤봉길의사의 쾌거는 결코 일회적 투쟁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항일투사의 출현과 열렬한 투쟁의 지속과 확산을 예고하는 것이였다. 윤의사의 의거이후 중국 국민당은 적극적인 지원책을 모색하여 김구와 장개석은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의 후신)에서 영수회담을 갖고 군사교육에 관한 지원을 협의했다. 어쨌든 한국독립군의 본격적 편성을 위해 독립군장교양성에 착수했다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일이였다. 이 획기적 조치가 마련된 촉매제는 바로 홍구공원 의거이며 그 주인공은 윤봉길의사였던 것이다.” 김구-장개석 회담의 산물로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광복군조직의 기간요원 확보책이 마련된 이후 중국대륙에서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가 직접적 도화선이 된 것이다. 상해의거로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로 하게 되였다. 한인애국단의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20년대 이후 침체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후 중국정부의 지원이나 동포들의 지원도 모두 한인애국단의 김구를 통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여 자연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이 주도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기반은 굳어졌고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립 운동가는 모두 살신성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의열투쟁자(義士)처럼 죽음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봉길의사의 길은 그래도 죽음의 길이다. 그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윤봉길의사의 용기와 여유, 그야말로 순결무구한 애국애족의 정신과 태도는 누구보다 먼저 독립운동자 모두가 따라 배웠다. 윤봉길의사는 무식하거나 천박한 청년이 아니므로 그의 상해의거는 충동적이거나 감상적 행동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식민지하 청년의 역사의식이 투철하였고 배웠기에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한다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윤의사의 활동은 일제가 지적하는 것처럼 단순한 테러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임시정부에 의한 의열투쟁의 일환이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기반이 굳어짐에 따라 임시정부가 초기처럼 전체 독립운동계의 주심적위치를 회복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상해의거를 계기로 만주와 미주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을 포용 통일하게 되여 그 수립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체 또는 통합기능을 회복하였고 특히 미주지방의 동포들은 초기처럼 다시 임시정부에 재정지원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한중연합 항일운동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였다. 완바오산 사건 등으로 한중민족감정이 소원하던 무렵이고 더우기 상해사변 등으로 중국인의 배일감정이 팽배한 시점에서 윤의사의 의거로 한중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상해의거 직후 각 신문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중국청년의 행동이라고 잘못 보도하였는데 김구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에야 전 세계가 진상을 알게 되였다. 각 신문에서 중국청년이라고 오보할 만큼 상해전쟁 뒤 중국국민의 항일감정이 치솟아있었던 것이다. 동북의 땅(만주)을 빼앗기고 또 상해에서 굴욕을 당한 중국이였다. 그런데 상해의거 후 장개석정부와 중국국민은 일변하여 장개석이 김구를 초청하여 양자 단독회담이 이루어질 정도로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였고 그들의 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주기까지 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으면서 그들의 지원이 없이 활동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였다. 물론 그들도 일제의 침략을 받고있었으니 당연한 것으로 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통하여 장개석을 비롯한 그의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달리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상해의거는 국제적으로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올렸다. 상해의거는 전 세계의 각광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그 충격적인 사건에 전 세계가 놀랐다. 임시정부 수립후 어느 외교활동보다도 한국인의 독립항쟁이 한낱 감상적구호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과시한 것이 상해의거였으니 그 외교적 성과는 가히 짐작될 것이다. 세계 모든 신문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를 다루었고 오랫동안 친일노선을 택하던 영국에서도“런던 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이 일본을 규탄하였다. 상해의거는 한국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의거이후의 항일독립투쟁은 비밀결사적인 투쟁이 지닌 의의를 계승함과 동시에 그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후일의 한국광복군 성립으로 이어졌고 군관양성에 주력하여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무력항쟁의 실마리를 풀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내막을 기록한 소책자를 만들어 각국 역사관과 단체에 배포하였다. 이 소책자의 표지에는 김오연이라는 사람이 두동강난 일본도(日本刀)를 그려놓아 통쾌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더욱 통쾌하고 신선한 반응은 국민당정부의 장개석의 언급이였다.“중국의 백만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의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놓았다.” 중국인들의 감정과 감탄을 너무나 잘 집약해서 표현한 말이였다.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한 의혈남아의 의협적테러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한국인들의 의지를 단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1946년 6월 30일, 윤봉길의사에게 해방 후 첫 국민장이 엄수 되였고 서울 효창공원에 그의 유해가 안장 되였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였고 1988년“상해인민혁명사화책”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윤의사를 크게 소개하였다. 맺 음 말 민족의 독립을 갈구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다면 매헌 윤봉길이 걸어간 역사의 길은 항일독립투사의 길이였다고 감히 결론 짓고 싶다. 사람과 사회, 사람과 시대를 매개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시대정신일진대 윤봉길의사의 행위와 발자취는 역사의 발전방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었다. 매헌 윤봉길은 일신의 안일과 가족의 평안을 돌보지 않고, 일생을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관하였다. 매헌은 멸사봉공의 원칙을 벗어난 일이 없었고 평생을 민족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다는 점이다. 지적방황과 고뇌와 충절의 길을 걸어온 의사의 신념과 행동을 관통하는 기본적전제가 애국충절이였다. 매헌의 고결한 일생은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조국광복의 정의를 위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더 나아가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 매헌 윤봉길은 조국광복의 순교자이기에 앞서 농촌부흥운동의 선구자였다. 매헌은 선각적지식인이요,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식견과 신조를 지닌 인격자요, 양심가였다. 그는 농촌을 배우기 위하여 살고 농민을 살리기 위하여 배웠다. 매헌 윤봉길은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불의를 철저히 거부하는 비타협주의와 민족의 독립을 찾고야말겠다는 살신성인의 정신을 지녔다. 즉 매헌은 양심과 행동을 겸비한 항일독립운동가였으며 정녕“민족정기의 화신이며 행동적지성의 본보기이며 구국애족의 영원한 사표”였다. 윤봉길의사의 생애를 둘러싼 자기희생과 처형의 비장성(悲狀性)은 한민족의 숙명 또는 한반도의 상황이 지닌 독특한 비극성(悲劇性)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윤봉길의사의 정신은 언제나 구국의 길이자 통일의 길임을 굳게 믿기에 윤의사의 충의 혼을 기려 민족정기 함양의 산 교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윤봉길의사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 한 가닥의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 소신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단 한 번도 한 일이 없거니와 추호도 량심의 가책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는 식민지 민중의 사표요, 한국독립운동사의 화신이며 조국광복의 초석인 것이다. 나라와 민족독립의 틀과 뼈를 세운 열사였다고 하겠다. 어두운 역사의 하늘에 한때 찬란하게 수놓은 광망(光芒)의 상해의거를 감행한 윤봉길의사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장거가 한민족독립운동의 기관차 역할을 하였고 그 우에 대한민국이 섰다. 이렇게 보면 의사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의사는 이 땅의 역사, 이 땅의 민중과 더불어 늘 푸르게 살아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조국광복의 밑거름이였고 조국광복의 홰불을 들었던 의사가 오늘날에도 길이 추모되여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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