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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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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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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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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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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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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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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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기] 망각과 화해를 위한 “악수”
    ■ 김철균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이 노래은 일찍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한테서 배운 노래였고 또한 크면서 남몰래 추억속에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조용히 불러보군 했던 노래이기도 했다. 그제 날 전 박정희 한국대통령의 “18번지”었다던 이 노래ㅡ 나는 지금 이 노래를 다시 불러 보면서 이내 인생의 한토막을 정리해본다. × × ×연길시 모 호텔 예식장ㅡ 30대 고개에 갓 들어선 젊은 부부가 아기의 돌생일 파티를 열고 있었다. 사회자의 웅글진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미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된 50대 중반의 남녀가 춤을 추며 젊은 부부와 아기가 앉은 상앞으로 다가가더니 축의금이 든 붉은 봉투를 생일상 위에 놓는다. 이 50대 중반의 남녀ㅡ 그 남자가 바로 나였고 중년여인은 바로 나의 옛 마누라였던 임××씨었다. 임××ㅡ 나한테 있어서 그녀는 애증이 몹시 엇갈리던 여인이었다. 일찍 20대였던 낭만의 그 시절 가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치도록, 아니 죽도록 사랑했던 여인이었고 가정을 이룬 뒤에는 티격태격 다투었었고 이내 주먹에 맞아 얻어터지기를 반복했던 여인이었으며 그 때의 세월에는 그닥 흔치도 않은 이혼이란 비극을 나한테 안겨준 여인이기도 했다. 이혼 뒤 나는 그녀를 두고 나의 모든 것을 망치게 한 죽일 년이라며 두고 두고 저주해 왔다. 나는 가정의 파열로 창피스러운 나머지 당시 “철밥통”이라는 직장에서 사표를 냈고 집도 없이 형제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죽자고 “디디우이(敌敌畏)” 한병을 사 놓고 자살을 시도, 3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고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어 포기한 적까지 있었다. 후에 나의 인생은 다시 반전이 됐다. 형제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대형 화물선에서 근무하는 해외의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 여러개 나라를 항행하며 안계를 넓히는 행운을 가지었으며 돈도 어느 정도 벌었다. 또한 돌아온 뒤에는 다시 “상경(연길)”해 내가 좋아하던 직업을 찾게 되었고 이어서 자식이 딸리지 않은 여인과 결혼(남들은 내가 처녀한테 장가를 들었다고 부러워 했음)해 귀여운 딸까지 보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창 공부할 나이었던 나의 아들은 나와 임×× 여인 사이로 오가며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절강성 의오시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나중에야 한국회사에 취직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나는 남의 자식들이 대학을 나와 하나 둘씩 국가 공무원 혹은 기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의 첫 마누라 임××씨에 대한 증오감으로 이빨을 갈군 했다. 몇년 뒤 나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그처럼 고생하던 나의 아들도 어느 정도 인생반전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됐고 1년 후 자식을 보았으며 이어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첫 아기의 돌생일 파티도 하게 됐던 것이다. 얘기는 다시 앞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1년 10월 6일에 있은 아들의 결혼식 때 나와 아들 사이에는 약간의 분쟁이 있었다. 아들의 주장인즉 자신의 결혼식에 친어머니가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지금의 마누라는 한국에서 체류하고 있는 상황, 아들의 결혼을 두고 마누라와 나는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본처의 결혼식 참가여하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언급이 없다는 건 마누라가 본처의 참가를 묵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여보, 내가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아들의 결혼식을 어수선하게 하지 마세요.”이 말은 본처가 참가해도 된다는 암시었고 또 이 때문에 자기가 한국에서 온지 않는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들의 주장도 마누라의 귀뜸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유란 없었다. 그저 자존심이었다. 아들의 결혼식은 바로 내가 주최한다는 뜻에서 오는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라지만 가령 그 때 아들의 결혼식을 그 애의 어머니인 임××씨가 주최한다고 한다면 역시 자존심 때문에 긍정코 참가하지 않을 심산이기도 했다. 그 이후 나는 아주 커다란 자아모순속에 빠졌다. 아무리 자존심이라지만 어딘가 너무했다는 자책도 없지 않았다. 썩 후에야 알았지만 아들의 결혼식이 되자 임××씨 여인은 한국에서 돌아 왔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 장소에는 들어 오지 못하고 입구에서 몰래 혼례식을 올리는 아들과 며늘 아기의 모습을 훔쳐 보면서 그저 울기만 했다고 한다. 후에 아들은 울면서 이 얘기를 나한테 들려 주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로 놓고 말하면 평생을 두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일이예요.”아들은 별로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마디마디가 채찍이 되여 나의 가슴을 후려 치는 것 같았다. 기실 임×× 여인과의 이별내면에는 나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살고 있던 단층집에 비가 새도 문학을 한답시고 책만 붙잡고 있은 골방샌님, 거기에 초겨울 석탄을 실어 올 때마다 그 것을 창고에 퍼들이는 일은 그냥 아내의 일로만 여겼던 나였으며 그렇다고 문학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나의 과실이 더 크다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이번에는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었다. 나는 이번에만은 아들의 친어머니가 참가할 수 있도록 허락하기로 했다. 아니, 이번의 행사는 아들네 내외가 주최하니 그들한테 권리가 있다는 것이 더 적절했다. 헌데 손자의 첫돌생일이 되자 어느날 아들의 계모 즉 나 현재의 마누라가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일을 어쩐담?…아들의 생모가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있다면 아들을 키워준 계모한테는 손자생일에 참가할 권리가 없단 말인가?! 이러한 나의 고민을 풀어준 것은 그래도 마누라였다. “여보, 애들의 결혼에 임×× 언니를 참가시키지 않은 것이 썩 잘된 일은 같지 않아요. 제가 양보할테니 이번엔 임××언니가 당당하게 애엄마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합시다. 전 그냥 참가해 지켜만 보면 돼요.”나는 마누라가 눈물 겹도록 고마왔다. 아들 며느리가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와락 끌어 안고 키스 세례라도 퍼붓고 싶은 마음이었다. 드디어 손자의 첫 돌 생일날 이전의 마누라와 함께 춤을 추며 손자한테로 다가가던 중 나는 얼핏 지금의 마누라가 앉아 있는 좌석을 뒤돌아 봤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기뻐하는 기색도, 그렇다고 억울해 하거나 분통해 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마누라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장면, 이는 분명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여인인들 남편이 본처와 함께 춤추는 모습을 좋아하겠는가! 다만 그 심정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나는 옛 마누라 임××씨와 손을 잡았다. “오늘 합작을 잘해 줘 고맙소. 그리고 건강하고 부디 행복하길 바라오.”나는 불쾌했던 그녀와의 과거를 깡그리 잊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잘 지내기로 했다. 그냥 잘 알고 사이가 좋은 여인처럼, 또한 내 아들의 엄마로, 며느리의 시어머니로, 손자의 친할머니처럼 대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었다. 도를 넘는 일, 그 것만은 분명 삼가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것은 필경 우리는 한솥 밥을 먹는 한가족도,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이다.이런 생각을 굴리며 나는 뒤에서 지켜 보는 이내 현재의 마누라를 돌아 보았다. 마누라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주소:吉林省延吉市光明街89号 延边日报 综合周报 金哲均(김철균)电话:138-443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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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9
  • 어머니와 인생살이 그리고…
    ■ 김철균 인생살이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질문하면 당신은 과연 어떤 답안을 써 넣을지? 당신은 가능하게“여기에는 공식적인 답안은 없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 여기에 공식적인 답안을 써넣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인생에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획분할 방법이 없다. 단, 나의 인생여정을 돌이켜 보노라면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도 컸다. 그냥 60%요, 70%요 하고 획분하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나한테 많이 주어서가 절대 아니다. 아니, 나한테 뭔가를 많이 주기는커녕 나의 곁을 너무나도 일찍 떠나버린 어머니였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10살때와 11살 때 각각 돌아갔다. 모두 그 동난세월이었던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아버지는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맞아서 사망되고 어머니 또한 매를 이기지 못해 훈춘강에 몸을 날리며 자결을 선택했었다. 헌데 당시 아버지의 죽음은 막을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얼마든지 말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1968년 8월의 어느 비오는 날 오전, 전날 밤 “독재소조”에서 매맞고 돌아온 어머니는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면서 나한테 함께 가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이에 내가 비가 내리기에 안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를 이윽토록 내려다보더니 그냥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는 그 길로 훈춘강가로 향했고 그 다음은 2일 만에 경신향의 두만강 나루터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 어머니ㅡ 그때 가령 내가 돼지먹이풀 캐러 간다던 어머니를 따라갔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돌릴 수 있었을 것이고 내가 수십년이 지나도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그 때로부터 나한테 있어서 어머니란 그리움과 후회 사이로 오가는 무형의 존재였다. 형수님의 슬하에서의 4년, 집체호 생활의 3년 그리고 7년간의 기나긴 숙사생활을 하면서 나는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어머니를 머리속에 떠 올렸고 간혹 지나 가는 40-50대 여인만 보아도 “저 분이라도 나의 어머니로 돼 줬으면”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기대를 해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편 나는 원래의 아내와 이혼을 하고 외토리로 생활해 본 적도 있었다. 아내가 없는 생활, 힘들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생활이 어머니가 없는 생활에는 비길 수가 없었다. 막말로 “아내는 다시 찾아 맞아 들이면 될 수 있으나 한 번 간 어머니는 영영 돌아 올 수가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아내와 어머니의 비중ㅡ 이를 저울로 뜰 수는 없지만 또한 사람마다 가늠하는 척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의 마음속에서만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내가 결코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사람들은 흔히 어머니를 비롯해 부모님이 돌아가면 늘 평소에 잘해주지 못했다면서 후회한다. 특히 여인들이 그렇다. 사위도 “반자식”이라고 나 또한 장모님을 몇 년간 모셔 본 적이 있다. 당시 나의 아내는 장모님과 어짢은 일 갖고도 자주 다투고 언성을 높이군 했다.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처럼 된다고 80세 고령인 장모님이 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없지는 않았다. 헌데 이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 아니었고 돌아가기 전의 2 – 3년간 치매 비슷한 현상이 오면서 그런거였다. 후에 장모님이 사망하자 아내는 평소에 장모님과 싸우던 일을 외우면서 자주 울군 했다. 아내의 사례를 보아도 세상에 후회 약이란 없는 모양이다. 주지하다 시피 우리 세대는 이제 오래잖아 60고개에 올라서게 된다. 그러면 우리도 자식으로부터 노인취급을 받을 것이고 어짢은 일에도 자식한테 서운하고 더 나아가 노여운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럼 바꿔놓고 내가 부모한테 잘 했는가를 딱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 보자. 부모한테 잘 해주는 것 그것은 결국 자식한테 효도를 바라는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作者地址:延吉市光明街89号延边日报综合周报金哲均电话:0433-2512568(办公室),138-4433-1207(手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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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8
  • [기고]개혁 개방 일번지 심천과 덩샤오핑
    ■ 리포터 구자선"문화대혁명" 현대 중국사의 가장 잔혹사로 남아있는 비극과 암흑의 시대였음을 누구도 부인 하지 못한다. 10여년의 "문화대혁명"기간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전통의 가치관을 송두리채 뒤엎어버리며 「혁명」이라는 명분아래 수많은 지식인,학자,문화인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감옥으로 끌려 갔으며 중국 대륙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나 감옥과 같이 숨죽인 죽음과 고난의 시기였으며 이를 빗대어 외부에서는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 하여 단절되l고 통제된 중국대륙은 국제적 비난과 조롱의 대상 이었다. 그런 죽의 장막의 문화대혁명 말기인 78년 갑작스런 마오저뚱의 사망을 맞게된다.건국 이후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며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며 30년 권좌에서 중국대륙을 이끌던 절대권력자 마오의 사망이후 1년 남짓 과도기 화궈핑 체제로 숨고르기한 중국공산당의 "중화 인민 공화국" 에 오랜 부침을 거듭해야 했던 덩샤오핑이 마침내 권력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5척 단신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중국이란 거대한 지도위에 "개혁개방"이란 야심찬 설계도를 그리고 바로 이곳 홍콩 건너 조그맣고 보잘것 없고 가난하기 짝이없던 어촌,항구 마을 「선전」과 함께 개혁개방 특별지구4곳을 선정..화교 자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의 자본.기술.경험들을 과감하개 받아들이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마오쩌뚱 의 정치 사상에 완전히 배치되는 위험하고 도발적인 정치적 모험을 착수하게 된다. 「문화대혁명」기간 퇴보와 정체와 단절의 문 빗장을 처음으로 열게된 이름「개혁 개방」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검던 희던 쥐를 잘 잡아야 하는게 고양이"라는 인민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국가가 할 일을 하는 것이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그의 실용주의 정치 사상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유명한「 덩샤오핑 이론」이다.이 운동은 그야말로 전인민들의 전폭전인 지지를 받아 그 힘으로 그의 개혁적이고 과감한 정책들을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며 오늘의 발전되고 성공한 중국을 실험한 혁명적 장소가 바로 이 곳 선전이다. 이 실험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거대한 중국 대륙 전체가 공업화, 개방화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결과적으로 30여년 지난 오늘날 선전은 샹하이와 더불어 가장 개방화,공업화된 도시로서 도시평균 연소득이 선진국 수준인 $20,000을 넘을 정도로 글로벌 차이나를 견인하는 중심축이 되었으며 이제는 반환 이후 특별 행정기구로 남아있는 강 건너 홍콩을 인구 규모면에서 압도하면서 위용을 자랑한다.이곳 "연화산 공원"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기리기 위해 새워진 유일한 동상이 서있다. 동상에서 정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아치 모양의 시 정부 청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100층 이상의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개혁개방의 명과 암을 극명하게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사회주의 정치, 자본주의 경제 체재"를 처음 씨뿌렸던 심천을 내려다보며 덩샤오핑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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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6
  • [기고]2014 중국의 온라인 소비 패턴 전망
    ■ 구자선 2013년 미국의 온라인 매출 규묘는 2287억불 인데 중국이 매년 인터넷 이용자수가 3,500만명씩 증가 하더니 온라인 매출 규묘도 2124억불 까지 늘어 났다. 올해는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여 온라인 매출 세계1위가 되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해외 온라인 수출은 국경이 맞닿아 있는 캐나다에 미국 전체 해외 온라인 수출의 49%를 차지한다. 한국의 미래 희망은 여기에서 찾을수 있다. 캐나다와는 비교가 되지않는 거대 시장인 중국과 일본이 이웃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이고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일전 인천 신항의 한 부두에 중국 상하이에서 온 이탈리아 국적 크루즈 선박이 정박하자 1000 여명의 여행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관광버스를 나눠타고 당일치기 서울투어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호텔내의 면세점 쇼핑을 하는데 주로 호장품,주방용품,개인 위생 및 미용용품,유아용품 등 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매장이 텅비어 버릴 정도이다. 이들이 Off Line 쇼핑객 들로 중국내 중산층들의마지막 소비 패턴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 온라인 쇼핑 매출이 지난해 2,124 억 불이란 통계에서 보듯이 소비와구매 패턴이 On Line 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며 가파르게 거의 수직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마지막 시장과 성공의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중국 13억 소비시장의 비약적 성장을 주도하고 견인해갈 온라인 쇼핑,인터넷 소비 시장에 올인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분야는 대기업이 갖지 못한 역동성과 차별화 전략, 고객이자 소비자인 유저들에게 충성도를 높이기 위한 보상과 소득 시스템을 적극 활용한다면 아직 걸음마 단계인 중산층들의 OnLine 쇼핑패턴을 주도해 나갈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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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05
  • 한국 정치에서 ‘재한조선족의 비중’은?
    조선족이 한국에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이라는 움직임이 감지돼 펜을 들어본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 정치적 권리를 지닌 조선족은 그 수가 제한적이지만, 공개적으로 드문드문 ‘특정 정당을 지지 선언’ 또는 ‘특정 후보를 성원한다’는 성명을 내는 현상으로 비추어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므로 ‘한국 정치에서 재한조선족의 비중’을 미리 전망해 보고자 한다. 하나, 대한민국 현재를 위해 조선족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래 지역색의 정서가 짙게 밴 한국의 정치국면에 조선족마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면 곤란하다. 더구나 지역색을 띤 한국의 정치판에서 특정 정당의 장기판 ‘졸’로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러다 보면 결국 한국 사회에서 조선족은 특별히 자신의 이익집단을 형성하기도 전에 수효가 극히 적은 소집단으로 낙인찍히고 외면당할 가능성이 100%다. 아직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따돌림이 존재하는 한국사회 현실에서 공식적인 정치 개입은 조선족 입지를 더욱 어렵게 할 수밖에 없다.작금의 조선족은 같은 이익집단을 형성할 여건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재외동포법이 발효된 후, 십여 년 동안 한국정부의 ‘조선족 분열책동’ 비스름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재한조선족과 미래형 재한조선족은 이미 계층 간 신분이 확연하게 나뉘어있다. 우선 국적이 회복돼 한국의 국민이 된 노인세대와 그 직계 후손들을 조선족 시선에서 볼 때, 기득권층이다. 다음 F-4 비자 제도로 장기 거류증을 받은 조선족들은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 간 모호한 존재다. 이어서 H-2 비자 노무자 신분으로 입국한 조선족은 미득권층이고 하층으로 분류한다. 얼핏 보기에도 세 집단의 계층은 서로 추구하는 이익과 정치 참여 권리도 다르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단합돼 통일된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자면 우선은 장기 거류증 신분인 지식계층에서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정치 지도자 집단으로 집결돼야 하고, 그 지도자 집단이 H-2 노무자들의 이익을 대변해 정책 방향을 담을 강령을 새로 제정하고 그런 정책강령들은 또 유권자인 기 국적획득자들을 통해서만 한국정치권에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이익 목표가 다른 두 계층. 즉 상위에 있는 기득권층 및 모호한 존재가 과연 하층을 대변할 의향이 있을까.절대 이뤄질 수 없다. 물론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무리는 조직하기 쉽다. 원래 사람들은 가진 것이 없을 때는 단합이 잘된다. 그러나 이익을 함께 할 수 있는 무리는 조직하기 어렵다. 그러한 붕당은 자연적으로 이익을 좇으면서 형성돼야 한다. 회사와 같은 조직은 이익을 함께 하는 무리다. 양심도 속일 수 있고 회사의 이익에 무조건 충성만이 그 회사에서 살아남는 길이다. 그래서 뭉칠 수밖에 없고 단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H-2 비자와 F-4 비자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은 서로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뜻을 같이할 친구 ‘友’에는 아무런 먹을 게 없다. 하지만 이익을 함께 할 친구 ‘朋’은 고깃덩이를 두 덩어리를 나란히 놓은 형태로 돼 있고 그 의미 또한 ‘차려진 고깃덩이 두 덩어리를 각각 공평하게 나누어 가짐’을 말한다. 만약 F-4 비자 범위를 더 개방한다고 하면 H-2 취업 비자는 그만큼 어려워진다. 또 F-5 비자의 취업 범위에 H-2 비자를 개방하면 F-4 비자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가 ‘값’이 떨어진다고 투덜댈 것이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외국 노동자와 이익을 함께하는 H-2 비자와 F-4 비자를 대변해 자기 자신의 권리를 내줄 국적자들은 토박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 노동자와 토박이들 간 벌써 일자리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므로….이러한 상황에서 재한조선족이 정치권에서 자기 자신들의 대변인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또 그렇게 분열될 수밖에 없고 이미 분열된 조선족 사회를 대변해 줄 기존의 정치인은 절대로 없다. 그건 그 정치인의 정치생명을 조기 결속 지을 수 있는 위험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혹자는 “‘조선족이 가지고 있는 투표권’에 기대를 걸면서 그와 같은 정치인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의 정치 생리를 전혀 모르고 마치 ‘잠꼬대’ 같은 소리를 남발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조선족의 한 표를 얻기 위해서 토박이 다섯 표를 떼일 위험천만한 법안을 누군가 발의한다면, 아마 당내에서 ‘미친놈’이라고 당장 철퇴를 맞을 것이다. 또 혹자는 ‘이자스민’을 예로 들면서 “순수 외국인 귀화자에게서 모두 국회의원이 비례대표로 나왔는데 왜 동족인 조선족에게서는 그런 의원이 없는가” 하면서 투덜댄다. 그 귀화자대표 이자스민은 이미 조선족 귀화자까지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그 이상 더 조선족에 대한 특혜를 바란다는 것은 조선족을 한국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조선족 노무자를 배려해준 노무현 대통령에게 감격해 마지않는 H-2 눈물과 일전 대선 때 공식적으로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을 발표한 모 재한조선족(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주측이 된 모임)들 모습에서 이미 단일이익을 위한 재한조선족의 이익집단은 형성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편 이런 분열된 모습이야말로 대한민국에는 바람직한 모습이다. 각 개인이 본래 한국인의 모습으로 돌아가 토박이보다 더 토박이답게 한국 사회에 녹아들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주인공이 된 모습이고 자기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고 얼토당토않게 자기 자신들이 무슨 대한민국 채권자의 자식인 양 대한민국에 과분한 요구를 하거나 한국 사회 적응과 융화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부평초 신세며 한국 사회에서 ‘소수 무리 - 조선족’으로 따돌림당할 게 뻔한 이치다. 조선족 모두가 한국에 귀화(?)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2백만 미만인데 인구의 4%도 안 되는 비중으로 무슨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겠다고?!<연통>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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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9
  • 암담한 조선족사회, 어디로 가야 할까?
    ■ 김충정 동포세계신문 편집위원 근래 언론보도를 보면, 조선족 사회 환경은 그리 낙관할 일이 아니다. 50%의 조선족 마을이 없어졌고, 나머지 50%는 한 두호, 혹은 10호 좌우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80%의 조선족학교가 없어졌다. 90%의 논밭이 타 민족에 의해 경작된다.조선족 거주현황을 보면, 한국 60만명, 일본, 미국 등 외국 거주자 20만명, 중국 연해도시 50만명이 흩어져 살고, 동북3성 현지엔 70만명이 남아 황폐된 학교와 마을 논밭을 지키고 있다. 현지 조선족촌은 학교 교직원과 어린 학생들, 노인들과 한국에서 임시로 돌아간 귀국 동포들이다.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 조선족 가정의 8다(八多)현상도 심각하다. 과부, 홀아비, 늙은 총각, 이산가족, 한족사위와 며느리가 많아지고 있고 성(姓)은 알지만 본(本)을 모르는 젊은이가 많다. 50대 이하는 기본상 할아버지 한반도 고향 주소를 모른다. 컨로주(龈老族), 즉 일하기 싫어하는 아들이 늙은 부모에 의지해 살아가는 현상도 심각하다.이미 중국에서 거대한 나라까지 세웠던 4개 민족은 이미 본 민족의 언어는 물론, 문자까지 모두 상실된 실태이다. 청나라를 세웠던 민족, 아랍민족인 회족, 서하(西夏)국을 세웠던 당항족(黨項族), 녕하 장족차지구의 장족(壯族) 등이다.조선족 또한 중화(中華) 문화에 완전 용해될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조선족의 오늘의 현실, 대한민국 오늘의 정책을 볼때 우리의 동포 4세, 5세가 완전히 한족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새 변화1992년의 통계에 의하면 조선족은 192만 5천명, 35가구 이상의 조선족 마을이 흑룡강성에 2,678개, 조선족의 논은 110만 ha였다. 한중수교 21년이 지난 지금 모두 땅을 버리고 한국에, 외국에, 연해도시로 떠났다. 이는 사회발전의 필연이라 생각한다.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조선족의 한국 진출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중국경제 성장에 따른 현상이다. 중국 천진을 보면, 한국인 5만명, 조선족 3만명 현대, 삼성전와 그 계열 부품공장 등 기업체가 3000개에 이르고, 근로자는 15만명(한족 근로자와 조선족 간부 포함), 사무실 직원의 월급은 6000위안 이상, 노무근로자는 5000위안 좌우이며, 지금도 조선족의 수요는 무한이다. 연길 기준으로도 일반 국가 공무원의 봉급은 5000위안 이상, 일반 직장인의 월급은 3000위안 이상이다. 중국은 봉급 외에도 장금(奬金)이 많아 기본 월급을 몇배 초과할 때도 있고, 퇴직금은 3000위안 이상이다. 젊어서 정직하게 출근하면 노후 생활은 근심이 없다. 한국에 나올리 만무하다.이런 시대 변화에 맞춰 우리 조선족은 어디로 가야 하나?“시각장애인만 장애인이 아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도 장애인이다.”어느 철인의 말이 생각난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첫째, 중국으로 돌아가자. 제 18기 3차 회의의 결졍에 의하면 중국의 토지정책이 변하는 것 같다. 농호들이 경작하던 토지, 잔류지도 팔수 있는 조짐이 보이고, 농촌에서 60세 이상 노인들은 양로 보험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조상들이 일구어 놓은 동북삼성, 내몽고의 한국 농토의 3배 되는 땅을 되찾아 충북 홍성군 문당리 마을처럼 협동농장을 만들고 ‘새마을 운동’을 하여 유기농 녹색 식품 기지를 후대에게 물려주자.둘째, 재한동포들은 단합하자. 중국이나 한국에서 소외된 군체! 말로만 뭉치지 말고 갑론을박의 국면을 타개하여 진정 활기가 넘치는 동포 공동페를 만들자, 지난 12월 8일 한중타임즈 이영한 사장에 의해 동포단체들의 공동주최한 ‘제1회 재한동포군영만회’는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깊었다고 본다.셋째,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알고 피해근성에서 벗어나자. 조선족사회는 부실 여행사, 부실 언론사, 부실 학원 등의 소행으로 많은 폐단을 겪고 있다. 그 결과 정부정책에 대해 고마움 보다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성향이 있다. 우리는 한국정부의 노고도 이해하며 평가하여야 한다고 본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동포세계신문에 있습니다.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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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18
  • [류대식 칼럼]조선족인구의 격감세를 두고
    □ 류대식 조선족 인구의 격감세를 두고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연변자치주에서는 둘째를 낳으면 정책적으로 혜택을 주자고 여러번 정부회의 때 제안이 올라왔다고 한다. 2010년 제6차전국인구보편조사에 의하면 조선족 인구는 183만 명으로 2000년 192만 3천명에 비해 약 10만이 감소해 중국 56개민족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민족이 되었다. 그래서 30년후면 조선족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60년후면 조선족이 사라진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조선족 인구가 왜 감소되는 걸까?필자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다.첫째 원인은 저출산이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인구가 늘어나고 아이를 적게 낳으면 인구가 줄어든다. 아주 간단한 논리다. 그런데 왜 조선족한테서 저출산 현상이 나타난 걸까 하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지금 조선족 도시화율은 69퍼센트로 중국 평균수준의 51퍼센트를 앞서고 있는데 이미 세계 선진국수준에 이르렀다. 현대사회에서 도시화율은 사회발전의 체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교육정도와 문화수준도 중국에서 줄곧 앞자리를 차지하며 중국 사회발전의 선두에 서서 발전해왔다. 이런 의미에서 놓고 볼 때 조선족사회는 이미 많은 면에서 세계 선진수준에 접근하고 있거나 그 문턱을 넘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개혁개방 이후 사람들의 관념은 어느 민족보다 빠른 변화를 가져왔고 따라서 보다 많은 시간과 정력 물력을 삶의 질과 향상 자아가치의 실현을 추구하는데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저출산일 수밖에 없다.보면 낙후한 지역일수록 인구성장률이 높으며 발달한 지역일수록 저출산, 저인구 저성장이다.둘째는 대외혼인이다. 대외혼인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국제혼인이고 하나는 국내 타민족과의 혼인이다.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에서 대외혼인의 영향에 대해 중시를 돌리지 않고 있는데 사실 대외혼인은 조선족 인구 마이너스 성장의 '블랙홀'이다.먼저 국제혼인을 말해보자.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에서 국제혼인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중한수교이후 그 수가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국제혼인에서 대부분은 조선족 여성이 경제적으로 발달한 국외에 시집가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11년까지 대개 10만안팎의 조선족 여성이 외국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서 볼 점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수치인데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감소된 인구수가 10만이다. 그러니 만약 국제결혼이 없었더라면 조선족인구 마이너스 성장 현상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이런 여성분들이 평균으로 아이 하나만 낳는다 해도 조선족인구는 오히려 10만이 증가하게 되는 플라스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그 다음은 국내 타민족과의 혼인인데 이에 대해 통계는 없지만 유의하여 살펴보면 이 숫자도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집안을 살펴볼 때 나는 친형제에 사촌까지 합하면 23명인데 타민족과 결혼한 사람이 4명이나 된다. 그러니 타민족과의 결혼이 20퍼센트에 이른다는 얘기다. 주위를 살펴보면 어느 가정이나 타민족과의 혼인하는 일이 다 있다. 그런데 국내에서 타민족과의 혼인을 구체적으로 분석해보면 특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족여성이 타민족에게 시집가면 그건 두말할 것 없이 인구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고 조선족남자가 타민족 여자와 결혼했을 경우 겉으로 볼 때 사람을 벌어들인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족은 소수민족이기에 남자쪽에서 서서히 여자쪽으로 동화되어 버리고 그 후대는 호구상에는 조선족이어도 많은 경우에 타민족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국내 타민족과의 혼인에서 조선족 인구의 소실도 국제결혼에서 소실되는 수치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셋째는 싱글현상이다. 중국사회가 발전하고 경제상황이 좋아지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싱글들의 수도 놀랍다. 한국은 지금 25퍼센트가 '나노(nano)가족'(일인가족)인데 조선족도 그만큼은 안될 것 같지만 싱글들의 수가 상당히 많다. 20년전에는 20대 후반이 돼야 노처녀, 노총각 소리를 들었고 10년전에는 30대 초반, 중반이 돼야 노처녀, 노총각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40안팎이 되어야 노처녀, 노총각소리를 듣는다. 그만큼 관념이 많이 변했고 혼인이 늦어지고 심지어 평생을 결혼 안하는 싱글들이 많아지니 조선족인구 저성장에 설상가상이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선족인구가 격감되는 추세를 완화하거나 막을 수 있을까?첫째는 물론 많이 낳는 것이 관건이고 상책이다. 그러자면 연변주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처럼 정부차원에서 혹은 민간차원에서 생육에 대해 정책적으로 경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동시에 언론 매체에서 여론을 조성하고 적극적으로 성원하여 관념상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 주위를 살펴보면 경제상황도 좋아지면서 "그래도 자식이 제일 큰 재산이다","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식밖에 없다"...등 생각들이 많아 둘째를 낳는 수가 많아지고 있다. 둘째는 대외혼인 현상을 가능한 줄이는 것이 인구감소를 막는 방도가 아닐 수 없 다. 자고로 사랑에는 경계선이 없어 대외혼인 현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지만 조선족 경우는 그 비례가 너무 엄청난 것이다. 중국사회도 이제는 많이 발전되어 살만하니깐 국내에서 조선족끼리 '평등관계'를 이룰 수 있는 혼인을 될수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의 혼인을 보면 감정도 감정이겠지만 물질적조건이 사람나름으로 차이를 보이며 전제로 되고 있다. 국제혼인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발달한 나라에서 뒤떨어진 나라에서 혼인자를 찾는 경우 대부분은 그 나라에서 장가를 못가서 국제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현실을 정시하고 기대치와 엇비슷하게 맞는 대상자를 찾아야 행복하지 그렇지 못할 경우 장미빛 꿈은 깨어지고 인생행복지수가 낮아지고 지어 불행하게 된다.생활은 구체적이기 때문에 지난세기 90년대처럼 맹목적인 국제혼인을 피한다면 개인적으로도 행복할 것이고 조선족인구증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국제혼인에서 큰적자가 생기는 국면을 돌려세우려면 우리도중국보다 뒤떨어진 나라에서 신부감을 물색하는 것이 하나의 방도이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인구를 버는 것으로 된다.그리고 타민족과의 혼인을 보면 많은 경우에 합당한 한민족을 못찾아서 타민족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민족은 자고로 민족 자부심이 아주 강한 민족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우리민족과 혼인하려 한다. 그런데 중국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족들이 전통집거구를 떠나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으니 합당한 우리민족을 찾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 타민족과의 혼인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여러 가지 플렛폼을 만들고 기회를 제공하여 우리민족 혼인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 문제해결의 고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정보화의 시대고 네트워크시대라 얼마든지 가능할 수가 있다. 지금 많은 지방에서 정기적으로 조선족 우리민족 혼인을 위한 모임 같은 것을 만들고 있고 사이트들에서도 전문란을 개설하고 있는데 활동이 더 활발해 졌으면 좋겠다.셋째는 싱글 문제인데, 이 문제 해결에서 전통 가정관념이 관념이 강한 가정 이상분들의 '교육'과 '압력'이 제일 효과적일 것이다.총체적으로 갖은 방법으로 인구감소세를 막아 어렵사리 자리 잡고 가꿔온 중국이라는 이 터전에서 우리 조선족이 세세손손 계속 이어나가고 번영하고 창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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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04
  • [이성기 칼럼]70-80后 중국동포, 이젠 자녀와 함께 한국행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재중동포 중 방문취업 약 30만명(쿼터제), F-4 재외동포 약20만명 추산… 이외에도 재외동포법이 통과되고 나면 재중동포의 한국행은 더 수월해 질 것이고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는 동포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과거 한국에 입국하였던 1세대 재중동포의 경우 한국정부의 비자정책에 따라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였지만 점차 폭이 넓어지고 있는 법무부 정책에 따라 재중동포의 가족이주 한국행이 늘어만 가고 있다.70-80后라 불리우는 세대들은 대다수 결혼을 하였고 또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세대 들이다. 이들 젊은 세대들은 대다수 부모와 떨어져 청소년, 유아기를 보냈던 불운한 경험이 있는 재중동포 세대들이다.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어떠한 문제점을 발생시키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 스러운지를 스스로 체감하며 성장한 세대들 이기에 이들의 가족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할 수 밖에 없다.한국 정부역시 과거와 달리 부모 중 한사람 이라도 한국에서 합법적 장기체류 비자를 가지고 있을경우 만18세 미성년자 자녀에 한해서는 부모가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만큼 자녀역시 동반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인구 산아제한정책에 따라 중국에서는 小황제라 까지 불리우는 한세대 한자녀가 많으며 이들 小황제들은 생활전선에 뛰어든 부모를 대신하여 퇴직 년령이 넘어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보살핌 속에 성장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한국 정부는 올해부터 재중동포 중 만60세 이상 대상자에게 조건없이 한국에서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F-4 비자를 발급하여 주고 있다.이는 과거에는 자녀들이 한국에 나가 일하는 시간동안 부모들이 고향에서 손주. 손녀를 대신 돌보아 주던 풍토가 이젠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특히나 한국행에 따라 발생되었던 재중동포의 높은 이혼률의 원인 중 한가지였던 가족이 떨어져 지내며 발생되었던 문제점이 이젠 한국에서 재중동포의 가정이 형성되어 더이상 부모는 한국에서 , 자녀는 중국에서 떨어져 지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성장기 어린이 들에게 부모의 품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 되었기에 과거 발생하던 이혼률도 줄어들 것이며, 자식의 성장을 눈앞에 두고서 보다 성실히 가정을 이끌어 나가려는 부모의 욕심도 늘어날 것이므로 이혼과 가정해체 라는 극단적 상황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 생각된다.또한 60세 이상 고령 재중동포의 한국행이 자유로워진 만큼 부모들은 불안하게 남의손에 자녀들을 맡기지 않고, 할머니. 할아버지손에 자녀들을 보살피게 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른바 3세대 전가족의 한국 체류가 먼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실제로 이미 많은 수의 젊은 재중동포 부부들은 한국에 출국하기에 앞서 자녀동반 비자를 신청하고 있으며 그 수가 매우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자기 자녀와 함께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교육, 육아, 의료 등 해결하여야 할 문제역시 산적해 있다.수요가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급이 늘어나느 시장경제 원리상 재중동포 자녀들을 위한 교육시설과 재중동포 맞춤형 의료시설 등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한국에서 장기체류 할 수 있는 비자정책의 완화는 굳이 영주권이나 한국국적을 획득하지 않아도 원하는 만큼 한국에서 장기간 체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변화하고 있다.이는 가족체의 거주공간의 변화와 성장하는 자녀들의 교육환경 등 많은 변화를 시사하는 점이다.어떠한 결과가 만들어 질지는 모르나 과거 일명 “수업료”라 불리우던 과거의 잘못된 관행들이 줄어들어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한국생활을 위한 정보공유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지 않나 생각한다.적어도 우리 부모세대들과 그 자녀들의 고통을 자라나는 3세대 자녀들에게 까지 물려줄 필요는 없는 반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일이니 말이다.칼럼니스트 - 이성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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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4
  • 소중한 추억
    서울의 거리는 노랗고 붉게 물들어 완연한 가을이다. 오가는 차들과 아름다운 거리를 거니느라니 한국에 온지 어언간 여섯번째 가을을 맞는 이시각 저도 모르게 숨 쉴 틈도 없이 달려 온 자기를 뒤돌아 보게 된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후 무던하고 말수가 적은 남편은 언 제나 저의 의사를 잘 따라 주었으며 시골에서 아들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경제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그였다. 힘들고 벅찬 나날들을 다 넘기고 출국이 자유로와 지면서 남편이 먼저 고령 동포로 입국하여 시골에서 토마토 농장에서 일한 석달 노임 270만원은 사장이 잠적하여 못받기도 하고 나주의 뱀장어 양식장에서 일하기도 하다가 만 삼년이 되여 고향에 갔다 온 후에는 천안의 양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여 체류 자격을 변경하고 그 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다. 매일 굴암퇘지와 새끼 돼지 백 여마리를 먹이를 주고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설사를 하는 돼지 새끼들은 제때에 주사도 놓으면 정성 들여 키워야 함은 물론이고 돼지 분변 냄새가 코를 찌르는 돈사에서 일하기란 쉽지 않다. 다행이도 남편은 비염이 심해서 어지간한 냄새는 모르고 지독하게 냄새가 나야 아니 그나마 참을만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여지껏 살아 오면서 난 그이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그의 내심 세게와 그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알짝지근해 난다. 내 마음속엔 아들들의 전도만 생각하고 일군으로만 생각한 내가 야속하고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여 번 돈은 응당하다고 받아 들이고 가정의 계획과 노후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작년 가을부터 남편을 생각하여 홍삼정을 사서 보내 주었으며 봄과 가을에 주기적으로 복용하고 하였다. 우리 가난이 지겨워 고국에 와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부를 이루어 아파트를 사고 자식들의 교육비도 대면서 좋은 것을 얻었지만 단란하게 모여 살지 못하고 서로 그립고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비일비재다. 오늘 생각해 보니 얻은 것도 많고 희생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열심히 일한 남편에게 수고 많으시다고 사랑의 메세지 전하고 싶다. 감 천 2013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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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3
  • 단풍잎이 떨어질 때의 생각
    아침에 종전과 같이 출근길에 나서면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하나,둘 미련없이 길가에 살푸시 내려 앉는 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넓은 아스팔트 길 옆의 나무들도 앙상한 줄기와 가지들을 드러내며 곧 닥쳐올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감당할 준비를 서서히 해나가고 있었다. . 이 정경을 바라 보노라니 저도 몰래 마음이 착잡해지며 살아 온 과정을 반성해 보게 된다.사람은 엄마의 배속에서 십개월간의 시간을 거쳐 곱게 자라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날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맹세라도 하듯,힘 있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과 생존을 위하여 학습해야 하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수 없이 도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세상에 위대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배워 가고 어려운 이웃을 동정하고 고무 격려의 말도 따뜻하게 해 줄 때도 있으며 수 많은 풍랑도 헤가르고 살아가는 법도 알게 되지 않는가? 이 세상이 이렇듯 다채롭기에 인간은 살수록 살맛나고 이렇듯 휘황한 세계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세상은 아름답다. 이렇듯 과학이 발달하고 IT산업이 발전하여 스마트폰으로도 세계를 일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행운을 느끼게 된다.그리고 천태만상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사회는 남을 얼리고 전문적으로 남을 꼬드겨 자기의 모종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도 해야 한다.이는 자기 가정과 자기를 지켜야 하는 방호책이기도 하다. 사탕 발린 말에 넘어가 사기 당하고 돈을 떼우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단풍 든 나무잎이 소리없이 내리는 정경을 보면서 언젠가는 사람도 나에게 차례진 사명을 다하고 하나의 미련도,하나의 원망도 없이 세월의 흐름에 맡긴채 소리없이 가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것이 인생의 길고 긴 여정이 아닐가 오늘도 되새겨 본다.감천2013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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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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