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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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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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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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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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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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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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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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측천이 창조한 4대 세계기록
    [동포투데이] 세계기록은 경기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도 여전히 각양각색의 세계기록이 존재한다. 중국통치자 중의 하나의 특수한 사례로서 무측천(武则天)은 많은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는 이름이 무조(武曌)이고 별명이 무측천, 무미(武媚)이다. 그래서 무미랑(武媚娘)이라고도 한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정통 여황제, 수명이 가장 긴 황제 중의 하나(82세)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기록이 아니다. 그녀는 혼자서 황제중의 4대 세계기록을 창조했다. 중국에서 그 어느 황제도 이 세계기록을 깨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범위로 보더라도 여전히 최고기록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 4대 세계기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용한 재상이 가장 많았다. 당왕조에는 재상이라고 칭하는 관직이 아주 많았다. 좌복야, 우복야 및 문하성, 상서성, 중서성 3성의 장관을 모두 재상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의 재상수량은 전체적으로 다른 왕조를 넘어섰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재위 23년간 재상을 25명 임명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무측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무측천은 인재를 아끼기로 유명했다. 과거를 크게 일으켜세우는외에 지방의 각급관리들에게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도록 장려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녀는 인재를 놓칠가봐 두려워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스스로를 추천하도록까지 격려했다. 인재가 많아지니 그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놀려두면 그 것은 낭비였다. 결국 그녀의 통치하의 국가관료기구는 커지게 되었다. 재상의 직만 앞뒤로 73명에 달하게 되었다. "수당사(隋唐史)"에서는 이렇게 해석했다. “무후는 일처리가 마음내키는대로였고 좋고 나쁜 것이 항상 바뀌었다. 그래서 그녀가 즉위한 동안에 재상은 모두 73명에 이르렀다.” 적인걸(狄仁杰)도 무측천시기의 재상이다. 적인걸(630~700년)은 자가 회영(怀英)이고 태원사람이다. 적인걸은 천수 2년(691년) 9월에 봉각란대평장사를 담임하여 재상으로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여 래준신의 무함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억울한 누명을 벗은 후 팽택현령으로 강등되었다가 거란족의 난이 일어났을 때 다시 기용되었다. 신공 원년(697년)에 적인걸은 다시 재상으로 되었다. 적인걸은 바른 말을 잘 하기에 무측천에게 려릉왕 리현을 태자로 책봉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여 당조의 사직이 지속되게 하였다. 여기에서 무측천이 재상을 임용한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대주왕조를 건립하기전에 부유예(傅游艺)라는 9품관리가 기회를 잘 노렸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를 칭할 야심이 있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을 끌어모아 상소를 올렸다. 무측천에게 국호를 “주”로 고치라고 요구했다. 무측천은 기뻐하며 1년동안 9품관리인 부유예를 3품관직으로까지 승진시켰다. 그리하여 재상의 위치에 이르렀다. 당나라때 1품, 2품관리는 아주 적었다. 재상은 대부분 3품관이었다. 무측천은 지독하기 그지없는 악녀였지만 다행히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나라를 잘 다스렸다. 빈번하게 재상을 바꾸었지만 국가의 혼란은 오지 않았다. 역사상 무측천에 다음가는 황제는 숭정황제이다. 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는 일생동안 사람을 쓰면서도 의심을 계속 하였고 재위 7년동안 재상을 50명이나 썼다. 명왕조는 병이 깊었는데 그가 이렇게 뒤흔들면서 더욱 회복할 방법이 없어지게 되었다. 둘째, 즉위년령이 가장 많았다. 무측천의 이전에 즉위시 년령이 가장 많았던 황제는 유비였다. 이 유현덕은 전반생을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유격전을 벌렸지만 다행히 늙으막에 복이 있어 당시로서 가장 큰 2개의 주(형주, 익주)를 차지하고 최종적으로 60세에 영광스럽게 황제에 등극하고 촉한정권을 세웠다. 무측천은 그보다 더욱 힘들었다. 당태종의 재인에서 당고종의 소의(昭仪)를 거쳐 황후, 천후에 이르고 다시 태후에 이르렀다. 67세가 되여서야 비로소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 이 해가 기원 690년이다. 무측천은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자칭 “성신황제(圣神皇帝)”라고 칭했다. 14살때부터 그녀는 이미 53년을 분투한것이다. 그외에 오대십국때 마은(马殷)이라는 사람이 당나라말시기에 호남에 할거했다. 927년에 이르러 후당은 그를 초국왕에 봉했다. 그는 75세의 나이에 대기만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왕”일 뿐이고 죽을 때의 묘호도 초무목왕이었다. 뿐만아니라 이 왕은 중앙의 할거세력이 봉한 것이므로 황제의 반렬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셋째, 릉묘의 규모가 가장 컸다. 무측천이 처한 시대는 당나라의 번영시기였다. 풍부한 국력은 그녀의 릉묘건설에 견실한 재력기초를 제공했다. 그녀의 릉묘인 건릉(乾陵)은 684년에 공사를 시작하고 23년의 공사를 거쳐 1기가 완성되었다. 건릉은 수도 장안성을 모방해서 비슷하게 만들었다. 외곽성, 황성, 궁성의 3중성곽이 있고 내성에는 동쪽에 청룡문, 남쪽에 주작문, 서쪽에 백호문, 북쪽에 현무문이 있다. 남북의 주축선은 길이가 4.9킬로메터에 달했다. 남북의 담은 길이가 1450메터이고 동쪽의 담은 1582메터, 서쪽의 담은 1438메터이다. 총면적이 230만평방킬로메터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는 당태종의 소릉도 견줄수가 없어 력대제황제릉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외에 성내에는 헌전, 편방, 회랑, 궐루와 적인걸 등 60여명의 중신들의 사당이 있다. 이는 또 하나의 장안성이라 할만하다. 아쉬운 것은 “안사의 란”에 건릉의 휘황하고 장관인 지면건축물이 상당히 크게 파괴되였다는 것이다. 정원 14년(798년)에 이르러 다시 수리되었다. 이렇게 큰 릉묘이니 안에 들어있는 부장품도 만만찮았다. 현대학자의 예상에 따르면 부장된 진귀한 보물의 총량은 최소한 500톤가량일 것으로 본다. 만일 무측천의 건릉이 열린다면 아마도 진시황릉과 같이 중요한 고고학적 대사가 될 것이다. 넷째, 사용한 년호가 가장 많았다. 년호는 한무제가 발명했다. 제왕기년법의 연속이다. 무측천의 이전에 이 세계기록을 보유한 사람은 한무제였다. 그는 55년간 재위하면서 년호를 모두 11개 사용했다. 평균 5년에 1개를 사용한 셈이다. 이 년호는 각각 건원(기원전140~기원전135), 원광(기원전134~기원전129), 원삭(기원전128~기원전123), 원수(기원전122~기원전117), 원정(기원전116~기원전111), 원봉(기원전110~기원전105), 태초(기원전104~기원전101), 천한(기원전100~기원전97), 태시(기원96~기원전93), 정화(기원전92~기원전89), 후원(기원전88~기원전87)이다. 무측천에 이르러서는 그녀가 황제에 등극해서부터 마지막에 정변으로 자리를 낼때까지의 21년동안에 모두 17개의 년호를 사용했다. 생활력이 강한 녀강자로서의 무측천은 개성있는 년호를 사용했다. 이 년호는 각각 광택, 수공, 영창, 재초, 천수, 여의, 장수, 연재, 증성, 천책만세, 만세등봉, 만세통천, 신공, 성력, 구시, 대족, 장안이다. 그중 비교적 재미있는 것은 천수 3년이다 그해에 무측천은 두번이나 년호를 바꾸었다. 즉 천수 3년, 여의 원년과 장수 원년은 모두 같은 해에 바꾼 것이다. 이 해는 바로 692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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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6-11-13
  • [뒷북칼럼]불붙은 한국국제학교 사태...무엇이 중한디?
    ● 이경옥 (홍 콩)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국제학교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워” “모범 보여야 할 'KIS 이사회'…교육부의 지시와 처분 무시, 교장-학부모-교사 간 분열 조장” “교직원 내부 자료 유출 심각…국가 공무원으로서 공무상 배임 행위도 서슴지 않아” “학교 구조적 문제가 교직원 위계질서까지 무너뜨려” 연일 들려오는 ‘최순실 게이트’ 관련 소식으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는 요즘 홍콩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달 27일에 한국 언론(한국일보)에 보도된 홍콩 한국국제학교(Korean International School) 학교장 관련 기사 때문에 홍콩 교민사회가 시끌시끌하다. 한국일보 기사를 처음 접했을 때는 필자도 학교장의 갑질로 인해 한국국제학교가 큰 위기에 빠진 줄 알았다. 특히 지나치게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순간 판단력을 흐리게 한 것 같다. 하지만 기사를 자세히 읽어 보니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제보 내용만을 토대로 쓴 편협한 기사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만에 학교장의 해명이 담긴 기사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수정된 기사 역시 공정한 취재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도 직접 취재하지 않고 제보자의 말만 믿고 기사를 작성한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홍콩 현지가 아닌 한국 언론에 갑자기 왜 이런 기사를 싣게 됐는지도 궁금해졌다. 이런저런 의구심을 갖게 된 필자는 바로 집중 취재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 출장 중이었기 때문에 인터뷰는 주로 메일이나 SNS로 진행했고, 학교 이사회 관계자, 행정 직원, 학교장, 교사, 학부모, 교육부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했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왜 갑자기 KIS 한국어 과정 학교장 사태가 벌어지고 공론화됐으며, 재단이사회 관계자들이 이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확대시키는 데 주력했는지를 알게 됐다. 하지만 취재가 끝나고 기사가 나갈 무렵 중∙고등부 PTA 회장과 학교장이 학생들에게 미칠 파장을 고려해 이 문제가 더 이상 공론화되지 않도록 협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특히, 학교장은 입시를 앞둔 학생들에게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필요 이상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필자 역시 진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교의 정상화와 학생들 보호가 우선이라는 생각에 기사화 여부를 고민했다. 그런데 지난 9일(수요일) 위클리홍콩 홈페이지에 한국일보와 흡사한 내용의 기사가 올라온 것이다. 그 기사가 한국일보와 차이가 있다면 일부 학부모와 교사의 민원 내용과 사례 설명을 더욱 구체화한 것과 한인회와 KIS 이사회 관계자들과의 결탁 관계를 스스로 드러낸 정도다. 기사가 온통 문제를 제기한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의 주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필자가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의 주장을 충실히 옮겨 담았다. 물론 그들의 말이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추측성 기사가 독자들에게 여과 없이 전달된다면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취재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벌어진 학교장 사태는 수면 위에 떠오른 ‘KIS 이사회 비리’ 논란 잠재우기용 꼼수? 학부모들과 일부 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학교장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학부모와 교사들이 학사운영 과정과 관련하여 학교장과 갈등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KIS 이사회가 한국 교육부의 지침이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편법으로 운영해온 것이다. KIS 이사회는 한국 교육부로부터 학교 증축 당시 문제가 된 수의계약(공개 입찰을 하지 않음) 건과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국고보조금 일부를 불법적으로 국제과정에 사용한 것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추궁을 받았으며, 불명확한 회계 관리 등도 지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한국 교육부는 KIS 이사회에 1차 징계와 행정처분을 내렸고, KIS 이사회는 이에 불응하고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만약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2차 징계가 내렸는데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홍콩 한국국제학교의 이미지 실추는 물론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KIS 이사회가 한국 교육부로부터 징계를 받았다는 소문이 교민사회에 퍼지고, 예전보다 많은 교민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이사회를 바라보고 있던 때에 이번 교장 사태가 먼저 터진 것이다. 학교장 선에서 해결할 수도 있었던 문제를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이 절차를 무시하고 이사회 관계자들과 합세해 더욱 문제를 확대시킨 정황으로 볼 때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학교장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교육전문가인 교장이 비전문가들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특이한 구조를 지닌 학교 일반 교민들은 학교 내에서 학교장이 갑이라 생각하겠지만, 홍콩 KIS에서는 특이한 구조 때문에 한인회 임원이 갑이 된다. 모든 학교 운영을 도맡아 하는 한국 내 학교장과 달리 홍콩 한국국제학교에서는 교장이 예산권이나 시설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다. 오로지 교무학사 관련 업무만 관리, 감독을 할 수 있고, 최종 교사 임명권도 이사장(한인회장)이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적인 학교 경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장이 소신껏 개혁을 추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교사들도 막강한 한인회 임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교장은 그저 파견된 기간 동안 문제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있다 가면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일부 한인회 임원들과 힘 있는 원로들의 파워 게임은 학교 운영을 더욱 힘들게 한다. 이들은 교장의 유일한 권한인 교무학사 행정까지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현 교장처럼 자신들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거나 행정에 밝아 자신들의 흠이 드러날 것 같으면 조직적으로 모함하거나 괴롭힌다. 이러한 관행이 이번 사태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부 한인회 임원과 원로들을 주축으로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추고 홍콩 교민사회 전반을 쥐고 흔든다. 일부는 자신이 그런 영향권에 있는 줄도 모르고 뜻을 함께하기도 한다. 이러한 세력은 교육 현장인 학교에도 영향을 미쳐 인사권, 행정, 회계 등에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현 KIS 교장은 이러한 병폐를 최소화할 방법으로 ‘개방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이사 구성은 교직계인사, 문화계 인사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를 추천해 특정한 집단에 권력이 쏠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국제학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의 주장과 왜곡된 기사에 대한 항변 본의 아니게 이번 사태의 중심에 서게 된 정 교장은 나름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일부 학부모나 교사가 주장한 것처럼 불법적인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취재도 하지 않고 일부의 일방적인 주장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한 ‘위클리홍콩’에 유감을 표하며, 기사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변을 당 언론사에 보내왔다. 지면 관계상 전문을 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가감없이 옮겨보겠다. [기사와 해명 글] [위클리] 위클리홍콩이 교육부가 파견한 관료출신 정금현 한국국제학교장의 비리 의혹에 대한 내용을 총정리했다. [학교장] 교장과 인터뷰도 없이…제보자(000 교사)가 평소 말한 것과 주변 교사에게 말한 것 그리고 한국일보에 제보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모두 모아 조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클리] 뿔난 학부모들이 한국학교 재단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은명 한인회장을 찾아가 문제 해결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하자 한인회는 10월 25일 오후에 ‘긴급이사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정 교장은 이사장에게 “교육부에 긴급이사회가 소집되었다고 보고하니 참석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면서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PTA 회장이 회의를 마친 후 교장에게 긴급이사회의 불참 이유를 묻자 그는 “장은명 이사님이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며 다른 이유를 댔고, 또 다른 학부모에게는 “한국에 있는 자문이 참석하지 말라는 조언했을 했다”고 둘러댔습니다. [학교장] 회의 요건이 성립하지 않고 이사회에 참석해야 하는 의제에 대해 교육부로부터 정당한 이사회가 아니면 교장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10월 26일(25일이 아님)의 이사회는 이사 4명이 참석하였으며, 이사회는 14일 전에 공지하고 회의를 개최해야 하나 회의 2일 전에 소집하였기에 이사회가 성립하지 않고, 이사회에서 교장의 교무학사나 인사에 대해 안건을 상정하여 협의할 수 없으며, 이사회의 기능과 권한 밖의 안건을 상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교장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간담회라고 했으면 참석했을 것입니다. 이사회에 학부모를 참석시키는 것 또한 적절하지 않습니다. [위클리] 10월 14일, 총영사관의 최종석 교육담당 영사는 학교장의 전횡을 막아달라며 찾아온 학부모들에게 “총영사관은 학교운영에 대한 권한이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더 이상 시끄럽게 하면 학교가 위태로우니 조용히 있어달라”고 말해 사태해결에 의지가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학교장] 학교장의 학교경영권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며, 학부모들의 집단적인 행동으로 제시한, 교장해임서의 내용을 볼 때 교사와 교장의 갈등 부분이었기에 학교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맡기는 것은 타당하며 공식적으로 민원이 영사관실에 들어가면, 영사관실에서는 검토하여 교육부에 송부하여 교육부에서 조치하도록 하는 것이 적법한 행정절차입니다. [위클리] 정 교장은 10월 6일 규정을 위반하고 인사위원회를 소집, 교장과 사무처장, 근무한지 한 달 된 진로상담 교사(계약직) 3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영어교사에 대한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이 회의에는 인사위원장인 이사장과 고등부 학부모대표 등이 참석하지 않았음은 물론 하물며 회의소집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000 교사는 재계약 제청을 하지 않았기에 인사위원회에 미상정 (인사위원회는 규정에 맞게 실시) [학교장] <학교행정절차의 단독 처리 및 인사위원회 문제> ◌ 000 교사의 재계약 연장 거부는 교장이 제청을 거부한 것으로 인사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일 상정한 안건은 학교장이 제청한 재계약 대상자 5명에 대한 것입니다. * 교원인사규정 9조 : “교원 중 재계약 대상자는 학교장의 제청으로 인사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한다.” ◌ 000 교사에 대한 교장의 재계약 제청 및 재심의 요구는 000 교사와 교장간의 문제로서 제삼자가 개입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며, 당일 인사위원회는 위원 5명 중 3명이 참석하여, 2명 이상이 사인하였기에 적법한 절차로 진행됐습니다. 또한, 인사위원회에 교원위원이 교사대표가 아니며, 교장이 별도로 정하게 되어 있어 교사(부장교사) 중에서 정할 수 있습니다. 칼럼을 마치며 위클리홍콩이 전에 없이 이번 기사를 홈페이지에 황급히 게재한 것을 보면, 아마도 11일로 예정된 ‘재단이사회’에서 관철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11일 ‘KIS 이사회’에서 무슨 문제를 논의할지는 모르지만, 만약 소문처럼 학교장 해임 건을 논의한다면 재단이사회의 비리 문제도 이 자리에서 함께 논의해야 형평성에 맞는다. 어차피 홍콩 교민사회에 이 두 가지 사태가 큰 이슈로 떠오른 만큼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공개 청문회를 개최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0여 년 전에도 홍콩 교민사회가 들썩일 정도로 홍콩 한국국제학교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리고 홍콩 염정공서가 조사에 나설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었다. 그때도 역시 의견이 분분했고, 기사를 낸 특파원과 한 교사의 공방전으로 이어질 정도로 파장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무엇일까? '한국국제학교 이사회' 관계자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는 교민들의 마음도 헤아려야 할 것이다. 교민 대부분은 문제가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이렇게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한다. 이사회와 교직원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학교 운영 상태를 되돌아보고 재정비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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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2
  • [역사칼럼] 영화 “밀정”과 “의열단” 단원 유자명
    ●김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에 나섰던 “의열단”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밀정”이 최근 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 “암살”에 이은 또 한편의 의열단소재에 대중적 관심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영화 속 에 부각된 의열단의 실존 인물에 대한 관심도 증폭되고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의열단”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가 공존하던 시대, 독립지사들이 1919년에 설립한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 운동단체이다. 단체의 명칭은 “정의(正义)의 사(事)를 맹열(猛烈)히 실행한다”는 취지에서 유래됐다. 의열단은 일제 경찰서, 헌병대, 조선총독부 등 관공서를 폭파하고 친일 지주자본가, 총독부 관리등 요인의 암살로 일제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의열단”은 그후 중국 상하이를 주무대로 외국인 치외 법권지역인에서 폭력 항쟁으로 일본제국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상하이의 프랑스인 보호구역을 근거지로 삼아 1919년부터 192525년에 걸쳐 약 300여 건의 테러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밀정”은 1920년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의열단의 경성 폭탄반입 사건이 그 배경이다. 의열단의 수많은 의거 중에서도 1923년 의열단이 중국에서 직접 제조한 폭탄을 대량으로 국내에 반입하여 벌이려던 파괴공작 계획을 극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의열단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에 폭탄을 반입하여, 식민통치기관을 대상으로 동시다발적 폭탄투쟁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파괴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들과 물자들을 나르는 주요 철도였고, 암살 대상은 사이토 총독 이하 조선총독부 수뇌들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탄로났고, 김시현과 황옥을 비롯해 작전에 참여했던 의열단원들 전원이 검거되었고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황옥 경부(영화 속 이정출)를 비롯해 영화 속 주인공의 모델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영화 속 송강호가 주역을 맡은 주인공 이정출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황옥(黃鈺)이다. 그렇다면90 여년 전 실존했던 인물 '황옥'은 과연 독립운동가였을까? 아니면 일제 밀정이었을까? ▲ 영화 <밀정>속 송강호가 분한 황옥의 형상 역시 의열단원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유자명(柳子明, 1894~1985) 선생의 수기 “나의 회억”, (랴오닝민족출판사.1984년)에서 황옥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의 비밀참모로도 활동했던 유자명 선생은 수기에서 "황옥은 경기도 경무국의 고급정탐으로서 독립운동가들과도 비밀한 연락을 하고 있어서 내가 경성에서 김한과 같이 활동하고 있을 때도 나도 그를 만나봤다. 그런 황옥이 천진까지 오게 된 것은 폭탄과 권총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서다."라고 적고 있다. 의열단의 폭탄과 권총을 건네받은 '황옥'은 텐진에서 만난 다른 의열단원 3명과 함께 안동(지금의 단둥)으로 향했고, 단둥에서 평소 자신과 친분이 있던 일본 외교관 김우영(당시 안동 주재 일본영사)과 만났다고 수기는 기록했다. 일제와의 항쟁을 그린 영화에서 독립운동가가 아닌 일제 총독부의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 <밀정>의 흥행과 함께 또 다시 역사적 조명을 받는 의열단의 이야기, 그 증언자였던 유자명의 일대기를 돌아 본다.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한 유자명 (앞줄 맨 오른쪽) 일제강점기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빠드릴수 없는 인물인 유자명은 충청북도 충주에서3남매 중 막내로 태여났다. 호는 우근(友槿)이고 원명은 유흥식(柳兴湜), 유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었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했다. 충주 간이농업학교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맞아 학생시위를 계획한데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유자명은 임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천진 지역에서 신채호, 이회영등과 교유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특히 아나키즘 이론에 밝아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0년대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 유자명은 의열단의 요원으로 극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면서 이 시기 조선 식산은행(殖产銀行)과 동양척식회사(东洋拓植会社) 폭탄투척 등 의열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의열단 참모 유자명”으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일본인과 친일파의 제거 작업에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인민을 탄압,학살하는 상황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반대는 일제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며, 일제 침략원흉의 암살과 일제 통치기관의 폭파는 곧 반일 애국행동”이라는 론리로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정당화하였다. 그 후 선생이 1981년에 집필 한 수기 “한 혁명자의 회억록”은 중국 내 조선인 아나키즘 운동 및 의열단 활동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27년 2월, 유자명은 난징에서 김규식 및 중국인 무광록, 인도인 간다싱•비신싱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했다.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어•중국어•한국어로 발간하여 관계된 여러 나라에 발송했으며 비밀지부를 설치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운동범위를 확장하는 등 제반 공작을 추진했다.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항일독립의 연합전선을 펴나가는 한편, 조선인 청년 다수를 난징 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민족혁명의 대열에 서도록 주선했다. 유자명은 이론에 밝았으며 탁월한 어학실력과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항일운동계의 일급 참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대에는 상하이의 농업학교 립달학원(立达学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南华)한인청년련맹”을 결성하였다. 난징이 일제에게 함락되자 연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무한에서 유자명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대표 이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선생은 자신이 쓴 조선민족전선련맹 창립선언문에서 “한•중련합을 통한 항일투쟁역량의 집중, 국제적 반일세력과의 련대”를 강조하였다. 또 난징, 상하이, 천주(泉州) 등지를 무대로 중국의 “이상촌(理想村) 건설활동”에 몰두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유자명은 1941년 중국 푸젠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유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도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유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원봉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임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농립학교를 졸업했던 그는 이후 복안(福安)현 계병(溪柄) 농장에서 일개 농부같은 생활을 하면서농업기술 연구에 몰두하였다. 당시의 주민들은 선생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누구도 유선생이 화를 내거나 한 마디라도 큰소리 치는것을 본 적이 없다. 어린아이들이 아침 일찍 선생의 방문을 두드리며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부르면, 그는 문을 열고 어린 아이를 안고 들어가 요람에 뉘였다. ‘할아버지 흔들어 주세요’ 하고 재촉하면, 유선생은 ‘허허’ 웃으며 흔들어 주었다. 그는 언제나 아이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선생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늘 성실하였으며, 인도주의 정신으로 중국을 사랑하였고, 선생 또한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1950년부터 후난성 창사에서 후난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유자명은 농학교수로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농학사, 원림 화훼, 채소재배, 벼의 기원 등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유자명은 윈난 고원지대에서 최초의 특수벼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으며 한나라 묘지인 마왕퇴에서 출토된 씨앗과 종자 분석에 참여하여 볍씨의 품종과 형태 등을 판별해 냈다. 유자명은 원예면에서도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던 후난에서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 재배에 성공하게 되었다. 또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1995년 중국농업출판사에서는 전기물 “훈장을 단 원예학자-유자명전”을 출간했는데 이는 중국에서의 그의 명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85년 4월 17일 후난성 창사에서 타계했다. 1978년 북한, 1991년 한국 정부에서 훈장을 받았고 2002년 국립현충원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2003년부터 농학자, 교육자로서의 유자명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중국과 그의 고향 한국 충주에서 수차 열렸으며2004년에는 그의 평전이 발간되기도 했다. 2009년 후난농업대학에서는 그의 거소를 문물 명록에 신청하여 복구하고 실내에 유자명 사적 진열관을 꾸며 놓았으며 교정내에 그이의 동상을 세웠다. ▲ 후난농업대학 교정에 세워진 유자명의 동상 “다음번엔 나도 내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다.” 영화 “밀정”에서 황옥을 모티브로 했던 주인공 이정출이 읊은 대사다. 친일이냐? 항일이냐? 그런 경계 위에서 선택의 줄타기를 해야 했던 여러 부류 인간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에 반하여 유자명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흔들림없이 항쟁해오면서 민족사의 갈피에 그 족적을 도렷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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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03
  • [칼럼] 조선족은 누구인가
    ■ 방미화 조선족은 19세기 후반부터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1990년대 이전까지는 이동이 거의 없이 동북지역에서 생활하며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여온 집단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적 변동속에서 1990년대 이후 조선족들은 중국의 대도시나 연해 개방도시, 미국, 일본, 로씨야, 한국 등 국외로 이주하는 행렬에 들어서게 되며, 현재까지 한국으로 입국한 조선족들이 가장 많은 수치를 차지한다. 한국이주 초기,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인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또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응이 쉬울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한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그러나 이주 초기 한국의 산업연수제도하에 대부분 미등록자의 신분이였던 조선족들은 입국하기전의 기대와는 달리, 임금체불, 사기피해, 폭행 등 불평등한 대우를 받게 되며, 더우기는 "못사는 중국에서 온 중국인", "3D업종에 종사하는 최하층 노동자"라는 고정관념속에 위치해 있으면서 무시, 편견, 차별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속에서 재한조선족들은 한국을“조상의 나라”라고 생각하던데로부터 스스로에게 “조선족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며, 따라서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중・한・일 학계의 학문적 접근이 증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조선족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현재 어떠한 수준에 와있는가. 초기 조선족정체성연구에서는 정판룡 교수(1996)의 “조선족은 중국으로 시집온 며느리”라는 “며느리론”과 “모국은 한국이고 조국은 중국”이라는 “이중 정체성”이 가장 많이 논의되였다. 이에 김강일(2001)은 “변연문화론(邊緣文化論)”을 주장하면서 “며느리론”과 “모국-조국론”을 강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조선족의 문화와 정체성은 중국과 조선의 문화와 정체성이 융합되여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와 정체성으로서 자신을 ‘며느리’라고 여기는것은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당당하게 여기지 못하는 굴종적인 자세”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중 정체성”논의에 대해 황유복 교수(2009) 또한 “‘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며 조선족 “이중 정체성”논의를 반박하였다. 이와 같은 기존의 논의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서 조선족 정체성을 전반적으로 규정하고자 했으며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학계의 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서 조선족의 정체성은 어떤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간주되며,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일반화의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 이러한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설문조사를 통해 계층별, 년령별, 성별, 지역별, 교육수준, 소득수준 등 변수에 따라 중국 현지 조선족 및 한국이주 경험이 있는 조선족의 국가의식, 민족의식, 소수민족의식, 한국관, 남북통일관 등을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양적연구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한 양적연구 또한 조선족들의 여러 변수에 따라 국가, 민족 의식의 실태를 파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정체성에 접근함에 있어서 항상 국가, 민족이라는 경계를 설정하거나, 그것의 외연인 소수민족의식, 한국관, 남북통일관 등 범주들에 대한 내용들만 고찰하여 기술하기에 연구자가 설정한 측정범주들을 넘어 이주공간에서 수많은 경계들을 넘나들며 스스로의 “민족적소속”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해석하는 역동적인 자기인식의 형성과정을 간과한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는 정체성을 어떤 하나의 고정적이고 정태적인 실체로 가정하던 기존 연구의 한계에서 벗어나 정체성을 유동적이고 동태적인 과정속의 구성물로 간주하면서 정체성 (재)형성과정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조선족의 민족/국가 정체성이 한국사회에서의 생활경험을 통해 분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민족적 소속감, 귀속의식)은 어떻게 분화되고 있는가. 지난 몇년간의 연구과정에서 필자는 민족적 귀속을 표출함에 있어, 조선족들이 국가, 지역 및 대상에 따라 자신의 민족적 소속을 다르게 표출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례로 일부 조선족들은 중국에 있을적에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조선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단 다른 나라(한국이 아닌)로 이주했을 경우에는 “조선족”이라는 정체성에 비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표출한다. 그외 어떤 조선족은 한국에서 국적을 취득한 후, 한국 주류사회에서나 한국의 조선족사회에서나를 막론하고 “동포이지만 귀화했다”는것을 강조하면서 조선족 정체성을 회피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족의 귀속의식은 단일한 요소로 획일화 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지금 현재의 공간과 상황에 따라 달리 표현되며 유동하고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현실적 상황에서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어디까지나 행위주체들이 사회적 관계망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설정해 나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은 항상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자아의 경험을 떠나 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각 개인의 귀속의식의 배열 및 표출 등 구체적인 유동방식에 대한 고찰을 통해 한 민족 집단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 민족집단-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폭넓고 심도 깊은 연구는 민족 공동체 및 정체성 이론을 심화시키고 학술적 공헌도를 높이는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방미화 약력】 이름: 방미화소속: 연변대학교 사회학과전공: 이주사회학, 초국적 이동과 정체성, 초국적 네트워크학력: 한국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박사연변대학 역사학부 학사, 석사, 주요론저: "이동과 정착의 경계에서: 재한 조선족의 실천전략과 정체성"2013, 이담북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8-13
  • ‘연변팀을 배워라, 신앙이 뭔지 알려줄 것이다’
    ■ 최광명 (연변일보) 지난 7월 30일, 연변 푸더(이하 연변팀) 2016 중국축구 슈퍼리그 제20라운드 홈경기에서 전국슈퍼리그팀 중 "전국7웅 (战国七 雄)"으로 불리는 강팀 산둥 루넝을 2대 1로 기분좋게 격파면서 홈장에서 4연승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연변팀은 또 한번 축구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만방에 알렸다. 경기후 "태산석간"의 기자 좌해토(左海涛)는 '루넝이여 연변팀을 배워라, 신앙이 뭔지 알려 줄 것이다'란 제목으로 연변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피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 선수를 주체로 세명의 한국 용병이 있는 연변팀의 강점은 쉼없이 뛰는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관점을 찬성하지 않는다. 다 같은 동아시아인이고 모두 다 두다리로 하나의 공을 쫓는데 누가 누구보다 더 강하단 말인가. 누구나 힘들다. 하지만 경기자세에서 연변팀은 생명으로 전투를 치르고 투지도 충만되여 있다. 연변팀 용사들에게는 승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하려는 그런 정신이 있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기전까지 그 누구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경기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부덕용사 대부분이 그대로 그라운드에 쓰러진다.” 좌해토 문장의 골자는 연변팀의 정신력이다. 그렇다. 정신력! 쓰러져도 굴하지 않는 연변특유의 정신력이 있었기에 돈으로 도배되고 세계거물급 스타들이 즐비한 명문구 단들을 하나 또 하나 보기좋게 쓰러뜨릴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연변팀, 또 한번 말하지만 국내 슈퍼리그중에 투입이 가장 적고 몸값이 가장 낮은 서민구단이다. 연변팀의 5명 외적용병 몸값을 합쳐도 산둥 루넝에서 요즘 영입한 펠레의 몸값 절반에도 못미친다고 한다. 돈을 적게 받는다, 돈이 없다, 구단이 경제상 어렵다. 이는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승리한 것만큼 상금도 두둑히 타고 슈퍼리그 정상에다 아시아챔피언리그까지 참가한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돈은 많은데 투혼이 결핍한 것이 바로 금원축구의 고질병으로서 이는 더욱 자랑거리가 아니다. 연변팀을 보라, 입술을 악물고 뛰는 선수들의 얼굴이 TV화면에 클로즈업될 때마다 보는이의 마음이 너무도 안스럽고 가슴이 아프고 또 눈물겹다. 몸을 던져 대방을 차단하고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그라운드를 누비는 그것은 바로 연변팀의 강한자에게 더 강 함을 보이는 완강한 정신력이다. 이런 정신력이 있었기에 연변팀은 상하이 선화, 장수 쑤닝, 광저우 부리, 산둥 루넝과 같은 중국 슈퍼리그의 최강팀을 차례로 꺾었고 괴물-광저우 헝다와 비길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어떤팀들인가, 어느 팀에나 모두 세계축구무대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스타들이 즐비하다. 상하이 선화에는 덴바바, 모레노, 과린, 마딘스가 있고 장수 쑤닝에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몸값이 가장 높은 테세라이와 오스트랄리아아세아컵때 우즈베크스탄을 침몰시키고 중국팀을 8강에 올려놓았던 주인공 오희(吴曦)가 있다. 광저우 부리에는 블리니오, 레날디니오와 한국 현역 국가팀 수비수 장현수가 있고 루넝에는 유시레이, 펠레, 몬티네, 시쎄같은 스타들이 있다. 소박한 연변팀으로 보면 그 어느 하나도 게임이 될 상대가 아니다. 이들은 세계 어느 명문구단과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토호”팀들로서 우리로 말하면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겨룸이다. 하지만 연변팀은 돈으로 도배된 이 '토호'들을 상대로 주눅이 들지 않고 하나 또하나 격파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연변팀에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연변대학 체육학박사 김창권 교수는 연변팀 대 장수 쑤닝 경기 후 관전평에서 “축구경기에서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해도 정신력이 약하고 강인한 체력이 없으면 좌절과 실패를 당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금원축구를 구사하는 '토호'팀들은 몸값이 높은 선수만 있으면 어느 경기에서나 다 이기고 상금을 많이 주면 선수들이 모두 이를 악물고 뛸 것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천만에! 이들은 돈은 많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똘똘 뭉친 연변팀 앞에서는 빛좋은 모래성일 뿐이다. 그 것은 산둥석간의 좌해도 기자가 쓴 것처럼 “연변팀에는 고향을 지키려는 충성의 마음과 절대로 꺾이지 않으려는 정신력을 바탕으로 다른 팀들과 절대적으로 차원이 다른 축구를 구사”하는 감독진과 용병들이 있기 때문이다. 7월 30일 경기 후 산둥 루넝 마가트 감독은 “연변팀은 응당한 승리를 거뒀다”고 높이 평가했다. 연변팀 선수들이 강한 정신력이 있었기에 박태하 감독의 손자병법 전략전술-“병력이 적을 때는 문을 닫고 굳게 지키고 적군보다 약할 때는 결전을 피하며 기습작전”하는 전술을 확실하게 관철할수 있었던 것이 아닐가. 정신력에 바탕을 둔 연변팀의 전술은 간단하지만 명확하고 확실하다. 승점 30점이상이 돼야 슈퍼리그 잔류가 확실시 된다는 설이 있는데 만일 이렇다면 연변축구는 지금 잔류의 9부릉선을 넘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또 어떤 일이 터질 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박태하 감독의 말처럼 “끝날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항상 초심으로 남은 매 경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팬들은 믿는다, 연변팀은 잔류만이 아닌 더높은 곳을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을!!
    • 스포츠
    2016-08-07
  • [단독] 한성호(韩晟昊), 그는 누구인가?
    [동포투데이] 한성호(韩晟昊) 중국재한교민협회총회 회장은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과거를 들먹이며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인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을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다'며 기고문을 작성하여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한성호 회장이 보내온 기고문 전문이다. 1945년, 나 한성호는 19세 때 일본이 투항하고 중국 국민정부가 승리하자 동북이 해방되었음. 당시 나 한성호는 동북 길림사범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교의 수업이 중단되자 고향인 길림성 장백현으로 돌아갔다. 1946년 나 한성호가 20살이 되던 시기 동북에서는 대혁명으로 대지주와 부농을 타도하는 유혈적인 투쟁이 개시되었으며 나의 가정은 선참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택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부친과 형제 몇명도 사처로 도망갔으며 모친은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결하였다. 나 한성호 역시 그 폭풍을 피해가지 못하고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 죄명이란 첫째, 대지주의 아들이고 둘째, 위만주국 시대의 대학생이란 것이었으며 셋째, 51 폭동의 주모자(주: 제3조의 죄명은 순전히 날조된 것이었으며 1984년에 이르러 해명되었음)라는 것이었다. 후에 나 한성호는 친척 및 친구와 중공간부의 비밀도움으로 탈옥(越狱)하여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도망하기에 성공하였고 1948년에는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갔으며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로 되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49년 당시 23살인 나 한성호는 한국 서울에서 신문을 발간,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성호는 한국에서 철거하는 화교들을 실은 선박 “영송호(永淞号)에 승선하여 대만으로 피난, 6개월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이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그 때로부터 국민당에서 사무를 보면서 생활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비록 한국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70여 년간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1951년 25살인 나 한성호는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훈련과 과장으로 사업, 겸임으로 재한 대만 대도통신사(大道通讯社) 특파원 및 재한 화교청년 반공항러구국총회(反共抗俄救国总会) 총회장(주: 재한 국민당 직속지부의 조직일군들로는 다음과 같다. 주한대사 왕동이 이 지부의 당무지도원으로 최고의 권력자였고 비서로는 여규생, 과장으로는 나 한성호였고 간사는 우천덕이었다. 당시 3명씩으로 하나의 소지부가 되어 당무 및 교포사업을 하였는데 국민당의 해외지부는 근근히 간판효과만 있었을 뿐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으로 사업하기도 했다. 1952년 나 한성호는 당시 왕동 주한 중화민국 대사 및 국민당 지부 지도원의 추천으로 대만에 가서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제 20기 당무훈련반에 참가, 당시 원장은 장개석(蒋介石)이었고 학원생은 300명이었으며 1개월을 한기(주: 대북 양명산에서, 부록 1: 동창록 등 문건, 참고)로 되어 있었다. 졸업시 장개석 원장이 학원생들을 고무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매 학원생들과 기념사진 한 장(주: 부록에서의 사진이 증명, 왼쪽 사람이 한성호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 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임.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장개석의 회견을 받고 찍은 것이 절대 아님임)씩 남기었다. 헌데 이 사진을 갖고 한국적 조선족이며 신화보(월간) 사장인 조명권(曹明权)이 나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문장을 만들어 떠들줄이야. 그는 나의 인격을 모독하는 요언을 조작,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하여 중공혁명선열들을 살해했으며 한성호의 두손에는 공산당인들의 선혈이 낭자하게 묻혀 있는 바 이것으로 ‘부친을 살해한 그 원수’를 갚은 ‘공로자’로 되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이런 망나니가 이 공로로 장개석의 접견을 받게 되었다” 라고 하며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나의 애국적 인격을 짓밟고 나의 생명안전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참을래야 참을 수 없게 된 나 한성호는 부득불 자신의 프로필을 간단히 작성하여 공개해 설명하는 바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결속된 뒤 나는 여전히 재한 중국 국민당 직속지부에서 사업하였으며 1955년 29살이 되던 해에 일체 당무사업에서 손을 떼고 한국 전라남도 군산시에서 군산 화교학교 교장으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동시에 한국 동양한의대학(东洋汉医大学)에 입학(4년제), 후에 다시 한국 경의대학교 한의대학에 전학(6년제)하였으며 5학년 때 대한민국 제34기 한의사(汉医师) 국가시험에 통과되어 한의사 허가증을 획득하면서 지금까지 줄곧 의료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1992년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이등휘가 중화민국 대통령 및 중국 국민당 주석으로 당선되던 날, 나 한성호는 실망스럽고 분노한 나머지 단연히 중국 국민당에서 사퇴한 동시에 ‘한화천지(韩华天地)’ 및 ‘중국천지’ 잡지를 발간, 그 때로부터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통일을 추진하고 교포들을 발동하여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을 지지하는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한대사관과 중국화교연합회의 지지하에 2002년에 한국 서울에서 재한 중국교민협회 및 재한 중국평화통일추진연합총회를 창립,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0여 년래 나 한성호는 돈과 힘을 바치고 모든 노고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국을 지지하고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애국사업에 투신하였으며 분열세력들에 대해서는 일보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독립세력과 가까운 분자들과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나 한성호의 인격이고 품격이었다. 비록 찬반의견이 교차되는 염량세태(世态炎凉) 속에서도 나 한성호는 그 어떤 후회도 없었으며 지금까지 자신의 그 주장을 펼쳐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참전하지 못하게 했기에 중화민국의 당정 및 군부 측은 한국전쟁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과 권리가 없었다. 나 한성호 역시 재한 화교청년으로서 독서와 사업에만 몰두했을 뿐 사사로이 한국전에 참가해 공산당을 살해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또한 마음대로 중국공산당을 살해할 수 있는 그런 고장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편 나의 연령과 경력을 보면 곧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쟁에 참가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중공선열과 조명권의 부친을 살해해 조명권한테 있어서 ‘부친을 살해한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데 20대의 한 재한 화교청년이 무슨 권리로 공산당을 살해하고 대공을 세울 수 있으며 어떻게 현저한 공로로 장씨 부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또한 상여금가지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조명권이 불순한 동기로 고의적으로 나 한성호한테 살인죄를 씌우기에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바 민사, 형사로 고발해 끝까지 진상을 밝히고야 말 것이다. 모두들 미친개한테는 몽둥이 이상이 없고 정신병자한테는 철창병원이 최고라 한다. 진리도 마찬가지이다. 또 모두들 사람을 일시적으로 기만할 수는 있지만 일생 동안 기만할 수는 없다고들 말한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나 한성호의 90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젊은 시절에는 국공 양당의 유혈투쟁에서 피해자였으며 결코 가해자는 아니었으며 나 자신은 추격대상이 되었지 결코 살인자는 아니었다. 나 한성호는 한국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한 사람이었지 한국전에 참가해 전문 공산당을 죽인 살인자는 아니었다. 엄숙히 말하면 그제날 극좌의 공산당인들이야말로 ‘두 손에 나 한씨 가정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나 한성호는 당연히 한국전에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을 가득 묻힌 살인자로 될 자격이나 권리가 없었다. 이 사실이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절대 억지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다. 헌데 이런 요언에 대해 믿는 사람이 있고 이런 무함에 대해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 소위 요언은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한테서 사라져야 할테지만 아쉽게도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 많지 못하고 정의가 적은 것이 큰 비애이며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나 이 한성호는 일생중에서 단 한번도 남을 고발해 본적이 없다. 특히 해외에서 내가 제일 반대해 온 것이 바로 중국인이 중국인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의 신념이었고 원칙이었다. 하지만 현재 나는 부득불 나의 이 원칙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다. 나 한성호의 90세 인생의 명예를 위해 한국법원에 조명권을 고발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유는 첫째, 명예훼손죄, 둘째, 인격모독죄, 셋째, 이유없이 요언을 날조하여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이념 원한을 도발하고 나 이 한성호의 생명안전을 위협한 죄(주: 이외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화로 공금 1.000만원을 사사로이 챙겼다고 비방중상했기에 함께 고발할 것임), (주: 나 한성호가 일찍 한국에서 중국국민당 재한 직속지부의 당무, 교무, 청년운동, 부녀운동 및 선전사업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명령에 따라 일하는 기층 당사업일군이었지 불호령을 내리는 상급 결책지위에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나는 일개의 화교로서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중공 혁명선열을 살해하고 조명권한테 부친을 살해한 원수로 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조명권은 오래 자신의 나이가 46세라고 했는데 한국전이 발발한지 65년이 지난 것을 보면 그는 한국전이 발발한지 20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한국전 당시 조명권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이 한성오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또한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한 것을 알 수 있었는가?! 조명권은 나 이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했고 ‛두 손에 공산당인의 선혈이 낭자’했다는 증거를 내놓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명백히 밝혀 나 이 한성호의 청백한 명예를 철저히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나한테 인증, 물증이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한국법정에서 만나 시비곡직과 선악진가를 판별하기를 바란다. 당신(조명권) 같은 의리를 배신하는 것으로 밥 먹는 사람한테는 오직 냉정한 법원의 판결만 수요될 뿐 윤리도덕을 담논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조명권이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나 한성호에 대해 악성선전을 한 것은 이미 교민사회와 중국 내지 및 중국의 해당 교민관리 기관에까지 파급되어 극히 불량한 영향을 가져오고 있다. 그 사례로 중국 중앙정부 모 부문의 한 고위 지도자는 북경에서 열린 한국 화교 및 평화통일 회의(5명 부총 회장이 참가)에서 나 한성호를 ‛두 손에 공산당의 선혈이 가득 묻은 사람으로서 대단할 인물이 아니며 존경할 가치’조차 없다는 등의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의 어구와 어조는 완전히 조명권의 어구 및 어조와 똑 같았다. 나에 대한 조명권의 고의 요언조성과 악성파괴는 영향 면이 극히 넓고도 깊은바 도무지 용인할 수가 없다. 나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려면 법정해결 외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회계층의 여러분들이 나 이 한성호 노년의 불행과 핍박에 못이겨 양산에 오르는 심정에 대하여 양해해주기 바란다. (주: 이상 5명 부총회장의 성명에 대해서는 잠시 지적하지 않고 앞으로 법정에서 증거로 내놓을 것임) ▲ 부록 1 - 1952년 제20기 혁명실천연구원 동창록 ▲ 혁명실천연구원 원장인 장개석의 초상 ▲ 부록 3 - 동창록, 한성호 학원생(20295번)의 사진 ▲ 부록 4 -동창록, 한성호의 신상기록 ▲ 부록 5 - 한성호와 원장 장개석의 합영 이 사진은 나 한성호가 한국전에 참가하여 두손에 공산당의 선혈을 가득 묻힌 현저한 공로로 인해 장개석을 만나 한께 찍은 것이 아니라 중국 국민당 혁명실천연구원 졸업시 장개석 원장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이다. 그 시기 나 한성호는 26세였다. 중간 사람이 장개석이고 오른쪽 사람이 재한화교 국민대회 대표 왕흥서(王兴西)이고 왼쪽 사람이 나 이 한성호이다. 년도는 중화민국 41년이고 서기 1952년 9월이며 지점은 대북 양명산이다. 당시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한성호는 재한화교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 한명의 공산당원도 살해한 적이 없다.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6-08-01
  • 연변팀 현상 어떻게 봐야 할까?
    ■ 철민(동포투데이 논설위원) 7월 16일 오후, 박태하(한국) 감독이 이끄는 연변푸더팀(延邊富德-이하 연변팀)은 중국 슈퍼리그 제 17 라운드에서 최용수(한국)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신흥강호” 장수 쑤닝(江蘇蘇寧)팀을 3대 0으로 완승, 전통강호 상하이 선화(上海申華)팀을 2 대 0으로 타승한 뒤를 이어 재차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팬들한테 기쁨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동시에 지난 7월 3일 홈구장에서 홍명보(한국) 감독이 이끄는 항저우 뤼청(杭州綠城)에 2 대 4로 대패한 음영에서 크게 벗어나기도 했다. ▲ 7월 16일,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있은 중국•평안 슈퍼리그 제17라운드에서 연변푸더(延邊富德-이하 연변팀)은 북상해온 중국슈퍼리그의 “둘째 두령” 장수 쑤닝(江苏苏宁)을 3대 0으로 타승, 보귀한 3점을 챙김과 동시에 올들어 첫 2연승을 말아올렸다. (사진 : 연변TV) 그럼 연변팀이 중국 슈퍼리그에서 쥐락펴락하는 강팀인가? 천만에, 박태하 감독이 자주 언급하다싶이 슈퍼리그에 연변팀보다 더 약한 팀은 없을 정도로 연변팀은 슈퍼리그의 “새내기”이며 또한 광저우 헝다(廣州恒大)와 같은 호화진영을 가진 팀도 아니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같은 잘 짜여진 팀은 더구나 아니다. 지금까지 홈구장에서만도 패전한 경기가 두번 된다. 지난 4월 23일, 슈퍼리그 제6라운드에서는 1 대 2로 허난젠예(河南建業)한테 패했고 지난 제15라운드에서는 항저우 뤼청에 2 대 4로 대패하기도 했다. 이 중 허난젠예는 그래도 슈퍼리그의 중상위권에서 달리는 팀이라 어딘가 이해가 되지만 순위상 연변팀보다 몇단계 아래인 항저우 뤼청에 대패한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졸전이었다. 반면에 강팀들과의 대결에서는 “그냥 물러설 수 없고 어디 한번 겨뤄보자”는 팀이 바로 연변팀인 것 같다. 지난 슈퍼리그 제13 라운드 홈구장전에서 슈퍼리그의 “제왕”인 광저우 헝다와 1 대 1로 손잡았고 지난 7월 9일 제16라운드에서는 상하이 선화를 2 대 0으로 넘어뜨렸으며 이번에는 참 그럴듯하게 장수 쑤닝을 3 대 0으로 타승했다. 그것도 이 중 상하이 선화와 장수 쑤닝을 각각 2 대 0과 3 대 0, 무실점으로 완승한 것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속에 걸리는 체증이 없이 깨끗했다. 그럼 연변팀이 ”강팀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팀 앞에서는 강하지 못하다”는 옛폐단이 재노출되고 있단 말인가? 그것이 틀리지는 않다는 분석이다. 일찍 지난 세기 90년대 말, 고훈 감독이 이끄는 연변오동(敖東)팀은 당시 중국 갑A리그의 선두에서 달리던 랴오닝(遼寧), 산둥(山東),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충칭(重慶) 등 5개팀을 선후로 선두주자 자리에서 끌어내리어 갑A의 “거물킬러(巨人殺手)”로 불리었다. 하지만 당시 선전(深玔)팀, 텐진(天津)팀, 선양(沈陽)팀, 우한(武漢) 등 중하위권의 팀들과는 자주 패하기도 했던 연변오동팀이었다. 연변축구팀은 바로 이런 팀이었다. 현재 연변푸더팀은 박태하 감독의 인솔하에 많이 좋은 방면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3선 라인이 보다 잘 짜여지고 총체적 움직임이 고르로운 것도 사실이다. 세계급 스타같은 용병은 없어도 총체적 실력에 의해 그 어떤 강팀도 함부로 얕잡아 볼만한 구단으로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완벽에로 향하는 과정의 구단이지 결코 티없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다. 현재 연변팀의 패전요인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연변팀은 주로 공격형 축구를 구사하기에 가끔씩 많은 병력이 너무 앞으로 매진되다 보니 상대방의 역습을 미처 차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연변팀 수비라인의 선수들이 상대방 스트라이커(前鋒)와의 겨룸에서 그들의 개인기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셋째, 주로 조선족 선수들로 구성된 연변팀 매개인들을 보면 성격상 정서파동이 많이 노출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선수들이 아직 채 성숙되지 못했다는 분석이며 특히 슈퍼리그에 갓 입문한 선수들인만큼 개인기와 기타 경험상 미숙한 점이 많다고 볼 수밖에 없다. “승패는 병가 상사”라고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고 패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 중국국가대표팀 스트라이커여였던 학해동(郝海東)이 언급하다싶이 “패전이건 승전이건 이를 떠나 연변팀은 격정이 있고 현저한 특색이 있는 팀”인 것만은 분명하다는 일가견이다. 앞으로 연변팀이 보다 성숙되면서 중국 슈퍼리그의 진정한 강팀으로, 또한 언젠가는 챔피언으로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 스포츠
    2016-07-17
  • 임신 기간 비타민 많이 섭취해야 된다? NO!
    ▲ 자료사진 [동포투데이] 아기가 시작부터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을 원치않은 대부분의 엄마들은 광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임신 기간과 수유기에 비싼 돈을 주고 “복합 비타민제와 미네랄 보충제”를 섭취한다. 허나 연구원들은 과학 데이터를 회고한 후 엄마들의 이러한 노력은 사실 “필요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약물 및 치료회보(Drug and Therapeutics Bulletin)’에서 12일에 기재한 연구 보고 분석에 의하면 시판 중인 복합 비타민제 광고에서 열거한 효과들은 대부분 저소득 국가를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인데 이러한 나라들의 임산부들은 더욱이 영양실조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임산부들이 나라(영국)에서 제안한 엽산과 비타민D 외의 복합 비타민제를 복용해야 된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영국 정부에서 제공하는 임산부 지침서에서는 임산부가 임신 기간 첫 12주에 매일 400마이크로그램의 엽산을 섭취하고 전반 임신 기간 및 수유기에 매일 10마이크로그램의 비타민D를 섭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엽산은 태아에게 신경관기형이 일어날 확율을 감소하고 비타민D는 태아의 심장 및 골격건강과 연관된다. 알다시피 매일 소량의 엽산과 비타민D를 섭취하면 건강에 좋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20여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영양성분을 함유한 복합 비타민제가 아기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고 때로는 그 반대의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예컨대 다량의 비타민A는 발육 중의 태아를 위험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신화망)
    • 오피니언
    2016-07-16
  • 당신을 연변홍보대사로 위촉합니다
    ■ 박정일 (연변일보 평론부주임 겸 중국조선족중학생신문 사장) 지난 세기 90년대 초기부터 시작한 연변의 노무송출사업은 갈수록 활기를 띠고 있는 추세다. 연변취업봉사국 관련 인사에 따르면 근년래 연변주 해외노무자수는 50만 명 좌우로 집계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한국으로 나갔다. 이는 우리 연변으로 말하면 민간자금유치는 물론이고 연변을 세계에 알리는데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홍보인력자원으로 된다는 지적이다. 경험적으로 봐도 연변에서 나간 노무일군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국외관광객을 유치했었다. 국외에서 외국인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서 자기도 몰래 늘여놓은 중국이야기나 고향이야기를 자연스레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사게 되였고 그 호기심은 실제 관광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실 연변으로 다년간 수많은 한국관광객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우리 연변노무송출일군들의 이야기와 소개로 관광을 온 것이다. ▲ 정왕본동 중국동포 상권이 형성된 메인거리 (사진 : 동포세계신문) 우리 노무송출일군들은 현재 한국에 많이 집중돼 있지만 갈수록 출국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연변사람들의 해외진출은 한국으로부터 시작해 현재는 일본, 미국, 영국, 카나다, 멕시코 등 국가로 파급되고 있다. 이들로 인해 연변은 날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으며 날로 연변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인지 연변의 연길 도심에서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외국인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연변관광산업의 활성화는 전폭적인 대외홍보를 떠날 수 없다. 경제 실력이 박약한 연변은 발달한 지역들처럼 수천만원을 들여 텔레비젼광고도 할수 없는 처지이다.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홍보자원우세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수십여 만명에 달하는 노무송출인군들은 그 어느 지역에도 없는 우리만의 우세이다. 우리가 이들을 잘만 이용한다면 돈을 팔아 홍보하는 인터넷이나 민속박람회 등을 통한 연변홍보보다도 못지 않은 홍보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정부 측의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노무일군들의 자발적인 연변홍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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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6-07-09
  • 연변이 늙어가고 있다
    ●박정일 주변의 청장년들이 하나둘 떠나가면서 노령화가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요즘 연변도 걱정스러울 정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연변의 노령화가 국내 평균수준보다 심각하다. 60세 이상 노인이 약 17%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연변의 60세 이상 노인 인구는 36만 2,000명으로 전체 연변 인구의 16.6%에 이르며 이는 중국 평균보다 1.5%포인트가 높게 나타났다. 특히 1992년 후 연변의 청장년층이 한국으로 출국하고 국내 대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탓에 상당수 노인이 부양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는 상태여서 문제가 더 심각한 상황이다. 농촌의 80%가 홀로 사는 노인이라고 한다. 조사에 따르면 2000년 제5차 인구조사 때 37세 인구 비중이 가장 컸는데 2010년 제6차 인구조사 때는 47세가 가장 많았다. 이들이 60세에 도달해 노인으로 분류되어 오는 2023년 연변 노인 인구비율은 38%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관계자는 “중국 전체적으로는 오는 2050년에 노인 인구가 사상 최대가 될 전망이지만 연변은 이보다 30년가량 앞당겨 노령화의 정점을 맞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우리 연변은 급속한 인구노령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 증가라는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됐다. 개혁개방 덕분에 연변은 천지개벽의 변화와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들의 인구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그 미열로 노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발 빠른 경제성장 과정에 노출된 노령화 문제는 연변의 또 다른 모습이 되어 하나의 새로운 과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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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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