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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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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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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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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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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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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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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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의 정체성
    ●김문일 지난주 일요일날 큰 매형과 둘째 매형이 낚시질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냥 인근 교외의 강변에서 한 겨울 낚시였는데도 퍼그나 잡은듯 했다. 큰 고기는 아니였지만 손가락만한 붕어들이 대부분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낚시는 잔인한 취미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취미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취미야 어떻게 막겠는가. 아이들이 물고기를 키우고 싶어해서 일부 달라고 해서 남생이를 키우던 자그마한 어항속에 물을 부어넣고 넣어 주었더니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 이상이 죽어있었다. 남생이는 아직 작아서 물고기를 잡아먹을수 없으니 물고기들 자체가 낚시코에 걸렸던 상처때문에 죽은듯 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니 한두마리 따라서 죽어가던것이 이윽고 네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 네마리를 살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었더니 이제는 활기를 찾아서 잘 자라고 있다. 오히려 거부기에게 주려는 먹이를 빼앗아 먹을 정도로 싱싱하게 살아났다. 처음에는 사람이 어항 가까이 가면 놀라서 이리저리 흩어지던것이 이제는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어서 그런지 사람이 가까이가도 제법 태연하게 헤염을 치며 유유작작하다. 비록 강에 있을 때처럼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먹이 걱정 잡힐 걱정은 없을듯 싶다. 중국말 속담에 새는 먹이때문에 잡히고 사람은 재물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물고기 역시 그런 자연의 섭리를 벗어날수 없는가 싶다. 물고기를 낚는 사람은 낚인 물고기를 보면서 득의양양하겠지만 그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돈과 물질의 미끼에 걸려든 물고기인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진 92년 그때부터 조선족은 남한이라는 나라를 다시 알게 됐다. 88올림픽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알리고 중국에 있는 동포사회에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조선족 사회에는 서울바람이 불었고 십배가 넘는 월급을 바라보며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외화벌이에 나섰다. 그래서 생긴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오래동안 조선족 사회의 아픔과 상처로 남을듯 싶다. 한국에서는 또 조선족을 불법체류자로서 잡아서 가두고 반송해 보낸다. 그래서 잡혀온 사람들은 한국에 강한 반한감정을 가지고 돌아오고 한국사람들을 적대시 했다. 불법체류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안해와, 남편과 아이들과 생 이별하고 몇년 지어는 십년가까이 그 땅에서 돈벌어 부쳤다. 이로 인해 조선족 사회도 한국 사회도 모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게 됐다. 중국에 와서 사기를 치고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법을 위반하고 쫒기는 조선족 또한 많았다. 불법체류자 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서울에서 진행하던 때가 거퍼 2, 3년도 채 안된 전의 일이다. 많은 조선족 작가들과 지인들이 황페된 조선족 마을과 시들어가는 조선족의 가족관계를 되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써왔다. 신문에서 말하고 방송에서 이야기 했지만 돈과 물질의 충격에 이성을 잃은 조선족에게는 어떤 충고도 들리지 않았다. 한국나가도록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판을 치고 돈과 금전에 자존심도 팔고 가족도 팔고 심지어 사랑마저 팔았다. 그렇게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다. 한국에서는 재외동포법이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무연고 취업비자로 제법 쉽게 한국에 다녀올수 있도록 되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조선족의 경제적인 수준이 어느정도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년전 한국에 가서 일하다 불법체류자란 딱지로 한국의 감옥에 갇혀있다 송환돼 돌아온 한 조선족 청년은 나한테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라디오에서는 고국이고, 동포고 떠들더니 이게 뭐야? 중국에서 살면서 한번도 감옥 들가본 일 없는 내가 도적질 했냐 어쨌냐, 내 손으로 돈벌어서 살겠다는데 감옥에 넣어 온갖 수모를 주고 쫒아보내다니.”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자 문제는 커졌고 오히려 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이 가득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법으로는 역시 그들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였을 것이다. 조선족이라고 해봐야 옛날에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간도땅을 건너간 독립군 후예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진정 조선족의 미래를 한국의 미래와 연결시켜본 한국인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나, 어느 시기에서나 통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살고 능력있고 힘센 사람옆에서는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면서 빌붙으려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한 조선족에게 일을 실컷 시키고는 몇달씩, 심지어는 몇년의 월급을 제때에 주지 않고 불법체류자라고 법무부에 고발해서 중국에 잡아보낸 악덕 업자들 때문에 전체 한국의 이미지와 조선족이 한국인을 보는 태도가 변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것은 바로 돈과 이익때문이지 민족성과 고국애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국내에서도 가난한 친척은 잘사는 친척에게 무시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연변의 조선족은 자기 주변의 가난한 친척들을 한번도 무시한적 없는가? 당연히 그럴리가 없다. 잘살고 힘있으면 대접받고 못살고 가난하면 무시당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오래전에 한국 출장다녀오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대륙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대만이나 홍콩에서 온 중국인들에게는 여간 살갑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돈의 힘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고국이나 동포보다도 현실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조선족들이 한국은 우리 고국이고 한 핏줄인데 어찌 이다지도 못살게 구느냐고 한때 아우성을 쳤지만 그것은 경제의 원칙을 몰라서이다. 한국사람들이 동포를 싫어서도 아니고 동포가 고국을 찾아온줄을 몰라서도 아니다. 답은 간단하다. 조선족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조선족의 당위성이 무엇인지? 세미나가 열리고 포럼이 열리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할일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족들이 한국을 욕하고 한국사람을 욕하지만 조선족은 다 잘하기만 하는가? 한국의 잘못을 보고 한국인의 잘못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치고 바꾸어나가야 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 조선족들보다 아직 상대적으로 못사는 조선 (북한)에 가서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하던 똑 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 돈 있는척 거들먹거리고 도박, 오입질하고 벼라별짓을 다하고 다니면서 무슨 낯으로 한국을 꾸짖고 한국인을 욕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대부분 한국인들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가난의 대명사이다. 한국에서 허드레일만 하고 아직 먹고살기 어려운 그런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한국인들 앞에서 조선족하면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 노가다판에서 막일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바뀌여 가고 있다. 조선족의 경제적인 위치가 계속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가리봉동의 많은 가게들이 조선족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조선족들도 더는 그냥 단순 노무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무역과 사업을 벌려서 크게 성공한 조선족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경영으로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을 미치는 조선족 기업인들이 점점 늘어난다. 조선족을 위한 행사때면 천만원씩 일억씩(한화)선뜻 내놓는다. 옛날 미국국적을 가진 한인들이 서울에 오면 대접을 깍듯이 받았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돈에 대한 예우이고 서비스일 뿐이지 지역 감정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한국만큼 조그마한 땅덩어리서 지역감정 운운하는 나라도 없겠지만 지역이 어디든 나한테 돈을 벌어주고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조선족은 가장 우수한 핏줄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조선족이여 자부심을 가져라 글 참조) 그들은 고생을 두려워할줄 모르고 부지런하며 지혜롭다. 일부 부족한 사람들이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동네에 문제 없는 곳이 어디에 있을가? 조선족은 이제 서서히 발전하고 있고 언젠가는 미국에 있는 한인이나 일본에 있는 한인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한국의 경제성장과 한국인의 사회에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생각을 하면서 중국을 무시하고 있지만 중국의 경제 성장은 놀라울 지경이다. 빈부격차와 사회적은 문제점도 있지만 년 2만불 소득을 넘긴 사람이 이미 1억 2천만명을 넘겼다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한국이 2만불 시대에 들어간것이 이제 몇년이 안됐는데 중국이 어떻게 그럴수가? 하면서 놀랄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전반적인 국민 평균소득은 한국보다 낮을수 있겠지만 이 1억2천만명의 고소득층은 매일, 매달, 매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전체 인구를 합한 세배에 가까운 수치다. 게다가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2만불은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2만불의 열배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 그만큼 기본 물가가 싸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에서 중국어 잘하고 한국어도 능통한 신 조선족은 비약한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현재 삼십대 좌우의 젋은 층들은 거개가 한국어, 중국어, 영어 혹은 일본어등 삼개국어 이상을 자유로이 사용할수 있다. 그들은 중국의 광동, 상해, 북경 등지에 진출하여 번역, 가이드 등을 하던데로 부터 이제는 여행사, 무역회사 사장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는 국제적인 그룹을 설립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국민들은 반도땅에서 좀 더 크게 좀더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반한 감정이 생기고 일본보다 미운 나라가 한국이 된데는 한국민의 자존심 때문이다. 한국의 KBS나 기타 TV프로를 보게되면 중국을 보도하는 거의 대부분 내용이 부정적인 부분만 보여준다.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들 아니면 부정부패의 관원들, 아니면 환경오염을 만들고 짝퉁 저질 상품을 만드는 기업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삼십년전 한국도 짝퉁을 만들었고 서울 인사동에는 아직도 짝퉁이 팔리고 있다. 서울의 달동네에서도 소년소녀 가장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누굴 욕하고 웃을 상황이 아니다. 그런걸 찍어서 한국민의 자존심이나 세우련다면 큰 오산이다. 중국의 발전과 거대한 경제력을 직시하고 위기 의식을 가지고 도전적인 자세로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국은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조선족이 지금까지 그래도 중국땅에서 그만큼 대접을 받은 것은 그나마 자신의 고국이 있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북한보다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잘사는 한국이 있었기에 민족자부심도 가질수 있었다. 이제 한국이 경제가 떨어지면 조선족이 중국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자부심은 없다. 가난한 친척이 밉다가도 그 친척이 잘살게 되면 다시 고와지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한국이 중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중국 경제와 정치를 통하여 새로운 세기 더 큰 발전을 원한다면 조선족에게 투자할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윈터 헤븐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해변도 , 높은 산도 없는 그곳은 도시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을 주변은 대부분이 농지였고 약간 솟아오른 작은 언덕들과 골짜기 사이에 있는 호수, 그리고 측백나무가 자라는 늪지대가 있을 뿐이였다. 이처럼 세상과 단절된 마을을 완전히 바꿔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 포프로 농기구를 팔려고 마을에 우연히 들어온 사람이였다. 그는 마을 사람 한명과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는 소택지를 보게 됐다. “대단한 곳이군요. 측백나무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는 같이 따라온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입니까? 저희들은 항상 보는 이곳이 그저 지긋지긋할 뿐입니다.” “저는 선생님이나 마을분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경 사업을 한 적이 있거든요.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뤄 자라는 모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장관 중의 장관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마을 사람들의 물음에 리처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이 마을을 아주 유명한 곳으로 만들어 드릴수 있을것 같습니다. 제겐 이 마을, 이 측백나무들의 미래가 보이는군요. 그래서인지 좋은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르네요.” 이후 그는 전 재산을 투자해 측백나무 소택지를 구입했다. 그리고 울타리를 쳐 숲 사이로 산책로와 휴게소를 만들었다. 측백나무 정원이였다. 만들어 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세상에 정원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는 광고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광고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다른 홍보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그가 먼저 이용한것은 사진이었다. 그는 공원에 사진 재료 전문점을 열고 관광객들에게 필름을 팔았다. 그런 다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시켰다. “측백나무 정원의 빼어난 경치를 담고 싶지 않으세요? 저희가 멋지게 찍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또 수상스키 선수를 고용해 역시 같은 방법을 썼다. “정말 멋진 동작이죠? 어떤 구도로 찍어야 하는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관광객들은 그 덕에 멋진 사진을 집에 가져갔고 이들이 가지고 간 사진이 측백나무 정원의 가장 좋은 광고물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희귀했던 측백나무 정원은 금세 입소문을 탔고 관광객들은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100만달러를 내고 그 땅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리처드 포프는 거절했다. 현재 ‘윈터 헤븐리’ 마을의 이 측백나무 정원은 세계 최초이자 최대규모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처드 포프가 없었다면 ‘윈터 헤븐리’ 마을은, 그리고 측백나무 숲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코앞의 것만 바라볼뿐, 멀리 내다 볼줄 모른다. 통찰력이 없는 리더들이 모인 조직이나 국가도 그렇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루 이틀 사는것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미래를 내다볼줄 아는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 긴 인생의 굴곡을 대비 할수 있도록 도와줄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현재를 이끌어 갈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쓰면 자존심 강하고 감성이 예민한 한국인들은 발칵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때 한국인들은 우리집 어항속의 고기떼와 같다. 여기 저기 대국에서 넣어주는 먹이에 의존하고 언제 낚시코에 걸릴지 모른는 상황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매일 떨어지는 먹이에 안주하며 사는듯 싶다. 현재 중국은 14억이 넘는 거대한 인구로 내수 시장을 활성화 시키고 있고 탄탄한 기술력으로 새로운 세계시장 판도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앞으로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할 나라는 미국도 러시아도 아닌 중국이 될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것은 통찰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조선족사회는 연변의 작은 농촌에서 서울로 이동하던데로부터 이제는 다시 북경, 상해, 광주등 중국의 대도시로 각자의 사업과 실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민족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나는 그들을 새 조선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이 새 조선족의 리더들이고 대표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조선족의 정체성과 당위성을 의논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과 한국민이 해야할 일은 조선족의 지금 보이는 모습보다 그 내면에 숨겨진 잠재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고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구할 사람들은 한국인 자신이지만 미래 한반도의 통일과 경제성장의 가장 큰 힘이 될 주역은 미국의 한인도 일본의 한인도 아닌 바로 새 조선족이 될 것이다. 그게 역사의 필연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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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9
  • 싱글남녀, 설날 “맞선대응10조항”
    [동포투데이] 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집에 내려가 설을 보낼 수 있다는 기쁨과 동시에 수많은 싱글남녀들은 아마 고민거리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바로 맞선! 중국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중국 매체 화룽넷은 고민에 시달리는 싱글남녀들에게 “맞선대응10조항”을 공개했다. 자식들이 결혼하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부모들과 친척들에게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는 비결이다. 첫 번째: 침착하고 냉정하게 큰 소리를 내거나 싸워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팁1: 말을 얼버무리기(애매모호한 대답) 이미 맞선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했거나 아니면 맞선을 보고 있다고 둘러대기. 팁2: 시간 끌기 가족들에게 만나기에 앞서 먼저 QQ(챗팅 어플)를 통해 상대방을 알아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팁3: 먼저 제지하고 다시 제압하기 일단 가족들의 뜻에 따라 상대방을 만나 본 후,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싫거나 안 좋은 이유를 말해 가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두 번째: 역공격(역으로 다시 압력을 가하기) 만약 부모님이 결혼을 다그친다면 일단의 자신의 혼인에 관한 희망사항을 말씀드리고 이를 기본 조건으로 한다. 팁1: 제때에 결단 내리기 가족들에게 현지에서 찾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전한다. 팁2: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족들에게 좋은 배우자 일수록 찾기 힘들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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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3
  • 中 춘제 황금연휴, 사상 최대 해외여행붐 예상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갈수록 많은 중국인들이 해외여행휴가에 관심을 가져 올해 춘제(春節, 음력설) 황금주에는 “역대 최대 해외여행붐”이 나타날 것이라고 중국청년보를 인용해 21일 신화통신이 전했다. 중국 시트립(Ctrip)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춘제 기간 중국인 해외여행 연인수가 600만명에 근접해 역대 인기가 가장 높은 황금주로 될 전망이다. 1월 18일까지 시트립에 등록한 춘제기간 단체여행, 자유행 여행자들 중 60%이상은 해외를 선택하고 40%는 국내를 선택했다. 시트립의 해외단체여행, 자유여행 주문 집계로 보면 1월 중순까지 2016년 춘제 기간 중국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10대 해외여행국가와 지역으로는 태국, 일본, 한국, 중국 타이완(臺灣), 싱가포르, 중국 홍콩, 미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호주 순이다. 한국을 제치고 제2위에 오른 일본은 홋카이도 겨울철 관광이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및 동남아 섬 등 가까운 지역도 그 열기가 식지 않았으며 호주, 아메리카와 같은 장거리 해외여행도 대폭 늘어났다. 순위 10위 가운데 80%는 아시아 주변 지역이다. 시트립 여행상품의 예매 수치로 보면 아시아 주변 국가의 도시와 섬들이 인기가 가장 높았다. 10위권에 드는 지역으로는 한국 서울, 타이베이(臺北), 태국 방콕, 태국 푸껫, 싱가포르, 중국 홍콩, 일본 오사카, 일본 도쿄, 인도네시아 발리 섬, 태국 치앙마이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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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2
  • [역사칼럼] “서프라이즈”,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1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일본 밀정의 배신으로 인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만 독립지사들의 일화에 대해 소개했다. 그 일화가 바로 당시 간도 나아가 일본과 한반도를 들썽케 했던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이다. 1915년전 후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반일열혈청년은 비밀결사조직인 “철혈광복단”을 결성했다. 그 후 이 단체의 대부분의 단원들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통합되어 항일투쟁에 힘을 보태었다. 식지를 깨물어 혈서를 쓰고 일제와의 사투를 맹세했던 광복단 단원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 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었다. 단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책략을 모았다. 용정에서 거사를 기획 한 사람들로는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전홍섭(全洪燮)이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홍섭에게 독립무장을 위한 행동에 참여하자고 건의 했다. 이에 일본기관에서 일보고 있지만 역시 일제괴수들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있던 전홍섭은 인차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홍섭은 자기는 놈들의 은행권 수송에 몇번 참가한 적 있다면서 “왜놈들이 회령에서 용정 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구체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았다. 이에 영웅들은 일제의 수송자금을 중도에서 탈환하기로 하였다. 전홍섭은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1919년 12월 그믐 날 전홍섭은 용정 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에게서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30만원의 현금을 수송 해 오게 된다는 비빌을 알아내었다. 전홍섭은 즉각 철혈광복단에게 이 비밀행동에 대해 쪽지로 전달했다. 쪽지에는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 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 수 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고 씌어있었다. 4,5일이면 시간이 이틀 밖에 없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등 6명은 명동에 집결하여 면밀하게 습격계획을 짰다. 거액의 현금을 운송하는 일이니 놈들은 전신무장한 순사들로 호위로 경비가 삼엄할것이다. 인적이 적고 산발이 험하고 나무가 무성한 오랑캐 령이나 선바위 밑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힐 것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총령사관이 있는 용정촌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해 질수도 있다. 드디여 그들은 습격지점을 동량리 어구(지금의 승지촌으로부터 100여메터 상거한 길)로 정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여섯 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었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 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일제를 향한 증오의 총칼을 서슬푸르게 벼르고 있던 철혈광복단은 즉각 행동에 들어 갔다. 1920년 1월 4일,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여섯 명의 철혈광복단 대원들은 결전의 길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림 속을 꿰질렀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가르며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 어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동량리 어구는 용정시 남쪽으로 흐르는 륙도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좌안의 도로를 따라 약 4㎞ 가량을 가면 닿게 된다. 동량리 어구에서 그들은 큰 길옆 버들 방천에 숨어서는 오로지 수송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적들의 수송대가 나타났다. 수송대는 느릿느릿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행렬의 륜곽이 점점 똑똑히 알렸다. “땅!” 어스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다. 그 신호와 같이하여 대원들은 일제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 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 세웠다. 그런데 이때 총소리에 놀란 맨 앞장 선 말이 네굽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말을 붙들라!” 윤준희와 최봉설은 15리나 쫓아가서 어느 산중 턱에서 간신히 말을 멈춰 세웠다. 말에 실은 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주머니 속에는 도합 15만원의 새 지폐가 꽉 차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지니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 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휴식을 취한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출발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두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블라지보스토크를 향해 떠났다. 러시아 모구위(毛口崴)에서 배를 타고 블라지보스토크로 향발, 23일 블라지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사건이 일자 온 간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 날인 1월 5일, 용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수백 명의 중일경찰들을 동원 해 평강일대에서 조선인들은 검거 체포했다.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반일지사들을 잡으려고 악에 바쳐 광분하고있을 때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은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논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임국정이 찾았던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일제의 끄나불 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1908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이범윤의 의병부대에서 좌영장(左營將)을 맡아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한 사람이었다. 봉오동 전투를 진두 지휘한 반일명장 홍범도와도 의형제 사이로서 일제가 한 때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측 한국어 통역관의 증언에 의하면 엄인섭은 요수를 잘 부리고 투전 꾼이며 본처 외에 몇 명의 첩을 거느리고 품행이 아주 좋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성격이 포악하여 살상을 자기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철혈광복단이 부푸는 꿈을 안고 엄인섭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변절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상이자 일본의 첩자로 되어 있었다. 엄인섭은 겉으로는 무기를 사는 일은 근심말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호언하면서 서둘러 블라지보스토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 해 버렸다. 헌병대의 정보를 받은 일제는 즉각 출동했다. 조선 나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까지 블라지보스토크에 파견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을 벌렸다.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꿈나라에서 무기교섭의 성공을 꿈꾸던 그들은 한밤 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자 잠을 털고 일어났다. 바깥동정을 느끼고 서둘렀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던 것이다.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뒷방 문 곁에서 자고있던 최봉설이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앞을 가로 막는 일본군헌병을 발길로 걷어차 넘어 뜨리고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헌병들이 최봉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최봉설은 상처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계속 앞으로 뛰였다. 얼마 못뛰여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총알을 맞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추슬리며 최봉설은 단말마로 뛰고 또 뛰였다. 일제의 검거로 단원들이 목숨걸고 탈취했 던 15만원중에서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다. 아울러 블라지보스토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는 대가를 치렀다. 1921년 8월 25일 윤준희 등 세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에 언도되었다.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애젊은 나이었다. 당시 최신 소총 한 정이 30원 이었다고 하니 15만원은 반일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비장하게 마무리 된15만원 탈취사건이 있은 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일었다. 15만원 탈취거사가 무기구입 성사로 마무리 되었더라다면 전반 한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것은 물론일 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설처럼 살아남은 최봉설(崔鳳卨)은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러시아 백파군과 맞서 싸웠다. “15만원탈취사건”이 발생한지도 이젠 90여년 세월을 경과했다. 그동안 사건경위에 대해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의 증언과 관련자료들이 아직도 그냥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한편 밀고자 엄인섭의 행방을 보면 그후 원산에서 손영극이란 사람과 술자리에서 힘 자랑을 하다가 주먹깨나 하는 손씨의 주먹 한방에 복부를 맞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손씨는 “너, 이새끼 왜놈 앞잡이지”하는 괘씸한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때렸다고 한다.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동북동지회 엮음, 코람데오, 2009. 105페지) 지금 용정지역에는 “15만원탈취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년 일제의 군자금 조달지점이었던 조선은행 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원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용정 시정부 서쪽문, 신화서점 사거리에서 용정 서시장쪽으로 빠지는 골목 바로 오른 편의 회색 2층건물이 바로 그 곳이다. 한때 용정시 공상은행 영업청으로 사용되었다. “15만원 탈취사건”의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유적지로는 탈취사건 지점에 세워진 거사 기념비이다. 용정 시에서 동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 그 부근에 거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포장도로 오른 편 육도하가 흐르는 강언덕, 돌로 3메터 가량 쌓은 축대 언덕주변은 세멘트로 단을 쌓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석비 정면에 한자로 “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 있다. “15만원탈취사건은 민족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장을 장식하면서 아주 큰 역사 적 의미를 가진다.” 학계는 15만원 탈취사건은 용정 3•13 만세운동으로 대표되 던 비폭력 항일운동에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거사라고 정평하고 있다. 몇해 전 칸 국제영화제 초청, 200억원이라는 억대의 제작비에 정우성, 이병헌등 최고스타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으며 당년 한국영화의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 오른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바로 “간도15만원 탈취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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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3
  • [김희수 칼럼] 조선족 지금은 아플 때
    ● 김희수 어느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고인의 맏아들이 보이지 않아서 사정을 알아보니 한국에 간지 2년째라는 것이다. 고인은 전날 저녁에 갑자기 사망했기에 한국에 가있는 맏아들은 부고를 전해 듣고도 이튿날 오전에 치르게 될 장례식에 도착하지 못할 것은 뻔했다. 예전에 7일장까지 치르면서 외지에 간 아들을 기다리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부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자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일하러 나갈 뿐이다.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벌어야 하기때문이다. 여기서는 눈물도 사치이다. 아무리 슬프고 고독하고 아파도 참아야 한다. 차별화를 당하고 냉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재한조선족들의 현주소이다. 장기간의 고된 일에 몸이 지친데다가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 이런저런 고민에 마음까지 피로해져 몸에 병이 생긴다. 하지만 웬간한 경우에는 참고 계속 일하기에 나중에 병이 깊어져 사망한 경우도 있고 중병에 걸린 경우도 있다. 잔병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몸이 지쳐서 아프다. 마음도 상처를 입어 아프다. 이것 또한 재한조선족들의 현주소이다. 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안고 살면서 새로운 기적과 부를 창조하고 있다. 조선족사회는 지금 아플 때이다. 대도시 진출과 끊임없는 대규모의 한국행으로 이산가족이 늘면서 조선족 대부분이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온가족이 모여 명절을 쇠는 그런 풍경은 이젠 옛말이 되였다. 조선족마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와 아이들이 글읽는 소리를 들을수 없고 조선족이 농사짓는 모습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2015년 12월 19일자 한국일보는 “조선족의 터전인 중국 동북3성 거주 조선족은 한때 200만 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불과 40만~60만명 정도로 급감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이농현상으로 중국 대도시와 연안도시로 50만명 정도가 빠져나갔고, 한국으로도 이미 75만명(국내 체류 조선족에 한국국적 회복인원 포함) 이상 건너왔다. 한국 이외의 다른 외국으로도 15만~20만명이 이동하면서 조선족 마을은 붕괴 직전이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두고 조선족사회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두손 놓고 앉아서 비관할 수 만은 없다. 일루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조선족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조선족사회가 해체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는 고비만 잘 넘기면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될 수 있다. 조선족 전통사회는 해체되고 있지만 그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조선족 집거구가 형성되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소도시에서 대도시, 연해도시 또는 해외(주로 한국)로 이동하고 있지만 흩어지면서도 다시 모인다. 결국엔 다시 모일 것이다. 대도시, 연애도시에 가있건 한국에 나가있건 우리 모두가 중국조선족이다. 조선족은 모래알처럼 흩어진것이 아니다. 새로운 집거구를 형성하고 조선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장기간 헤여져 있어도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아프면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크면 더욱 단단하고 건강해진다. 조선족사회도 진통을 경험하는 성장과정을 거치면 앞으로 더욱 성숙하고 더욱 건강해질 것이란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다 같이 희망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위기를 해결해 넘기면서 포기하지 않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도라지 노래는 계속 울려퍼질 것이고 아리랑 선율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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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0
  • 중한 FTA 우리에게는 어떤 기회인가?
    ■ 박정일 (중국조선족중학생신문사 사장/연변일보 논설부 부장) 중한 FTA(자유무역협정)체결로 국가간의 무역에서 관세를 줄이거나 아예 철페하게 된다. 규정에 따라 상품 품목수 기준으로 중국 측은 91%의 관세가 20년내에 철페되고 한국측은 92%의 관세가 철페되며 수입액 기준으로 중국 측은 20년내에 85%의 관세가 취소되고 한국 측은 91%의 관세가 취소되면서 중한 량국의 소비자들의 선택범위가 넓어지게 되는데 이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우선 중한자유무역협정으로 한국상품선호도가 높기로 정평난 우리 조선족 소비자들이 싸고 질좋은 다양한 한국상품을 구매할수 있게 된다. 현재 연변을 포함한 국내 조선족들의 가가호호마다 한국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집에서 쓰는 그릇에서부터 복장에 이르기까지 연변사람들의 한국제품 선호도는 너무나 높다. 이번 중한자유무역협정이 효력을 발생한후 한국상품에 대한 선호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중한자유무역협정은 수많은 품목의 자유거래와 세금철페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 이런 혜택은 중국도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조선족들의 활약할수 있는 기회가 된다. 중한자유무역협정으로 앞으로 한국무역인들이 중국진출에서 가장 쉽게 활용할 사람들이 중국 조선족들이고 중국인들이 한국진출에서 가장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중국 조선족들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생활습관마저 동일한 조선족들이 할일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중국에는 아직도 한국어에 능한 사람이 극히 적다. 한국의 문화에도 익숙하지 못하다. 반면 중국에는 중국어와 한국어에 통하는 조선족젊은이들이 수없이 많다. 언어가 통하고 습관이 비슷한 우리 조선족들이 이번 중한자유무역협정을 잘 이용한다면 경제적으로도 리익을 창출할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언어의 소통우세는 무역정책과 무역정보수집에 우세적이고 무역거래와 상업경영 및 선진적인 서비스업의 도입에도 유리하다. 이러한 우세는 대부분 조선족들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이를 잘 이용한다면 무역, 도매, 판매 등 수많은 영역에서 활약을 기반으로 새로운 창업을 시도할수도 있는 기회가 된다. 뿐만아니라 조선족들이 많이 집거한 지역에서도 이득이다. 한국상품에 대한 소비가 늘면 늘수롤 그 지역의 징수액도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지역사회에도 이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백두산지역의 일부 농산품들도 한국시장에 무관세수출을 할 수 있어 연변내의 많은 지역에서도 혜택을 보게된다. 또한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서 제조기업들에게 경쟁력이 있는 우질상품을 생산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도 있어 소비자들에게는 득이다.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상호 무역은 필경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기에 상품의 소비자 만족도가 제품판매의 승부를 가늠하는 지레대가 되여 소비자만족의 상품이 생산되고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생산기업을 압박하고 생산기업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현재 우리 조선족들은 연변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 조선족들은 국내적으로 북경, 상해, 청도 등 지역에 대거 진출해 있는가 하면 한국에도 이젠 70여 만명의 조선족들이 집거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분산돼 있는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이번에 체결된 중한자유무역협정은 하나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더욱 낫은 삶의 터전을 찾아 세상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조선족들이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우세를 살려 한국과의 교류를 더욱 밀접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봐도 중한자유무역협정은 우리 조선족들이 자신들의 삶을 한층 윤택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총적으로 중한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적극적인 요소들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혜택으로 돌아오고 이런 혜택은 우리 조선족사회에 새로운 경제활력을 주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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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9
  •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우리 조선족역사가 각 가문의 이주시간이 보편적으로 100년도 채 되지 않지만 1세대·2세대들의 뼈를 묻은 정든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조선족농촌마을이 개혁개방의 거센 파도에 의해 농민들이 뿔뿔이 도시로 해외로 진출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있다. 조선인1세대들이 만주에 와서 피땀으로 토지를 개간하고 삶의 터전을 이뤄놓았던 고향이 사라져가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고 따라서 공동체 해체위기이니 뭐니 하면서 대서특필하고 떠들고 있지만 이농에 따른 농촌의 황폐는 새로운 경제시대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젠 고향이란 개념과 고향에 대한 의식 및 관념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은 농경문화의 산물 고향이란 자신이 태어난 곳, 혹은 조상이 살던 곳을 의미하며 과거 전통사회에서 90%이상 사람들이 농경에 종사해왔기 때문에 고향은 흔히 농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전통문화 맥락에서 하는 말). 고향의 다른 표현인 고구(故丘), 고리(故里), 고산(故山), 고원(故園), 구리(舊里), 모향(母鄕), 전리(田里), 향관(鄕關), 향리(鄕里) 등등의 어휘가 시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고향은 곧 농촌을 의미하고 농촌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아니 불과 30년 전의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이 이동이라면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다. 전통사회에서 절대다수 사람들은 세세대대로 한곳에서 정착하여 살아왔다. 농촌마을문화는 아침에 본 사람 점심에 만나고 점심에 만났던 사람 저녁에 또 마주치고 오늘 본 사람 내일 또 부딪힌다. 매일 반복되는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자연스레 마을 구성원들 사이 서로 유대감이 강해진다.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문화는 서로 한우물의 물을 마시고, 농번기에는 서로 일을 돕고, 색다른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허물없이 마실 다니고, 누구네 집 두지에 쌀 얼마 있고를 알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등 정(情)의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한반도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지리적인 환경특징 때문에 우리민족은 지구촌에서 정의 문화가 가장 발달되었고 따라서 고향문화가 가장 발달되었으며 가장 끈끈해졌다. 한국전통노래가사에 고향이란 어휘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우리는 고향을 말할 때 흔히 정든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된 고향은 정이 많아 살맛이 나지만 농사일이 그 어느 일 보다 고되다. 일의 고달픔도 심각하지만 주나라 이래 3천년 동안 백성이 농사일에 종사하여 부자가 된 사례가 가뭄에 콩 나 듯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일도 고달프고 게다가 가난하고, 이것이 우리 전통농촌의 현실이었다. 현대문화에서는 都와 市, 혹은 城과 市를 하나로 묶어 都市 혹은 城市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市는 都 혹은 城과 鄕 사이에 설치하여 시골농산품을 도시에 판매하는 장소였다. 都와 城은 고귀하고 鄕은 비천하고 시는 잡배들이 모이는 곳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전통사회에서 士農工商 신분서열문화가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으나 예로부터 농부가 대접받아 본 역사는 없다. 농촌현실이 이러했기 때문에 농촌을 벗어나면 출세했다고 온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먼 전통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진출이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에 농촌미녀들이 5전짜리 공인(노동자)이라도 도시총각한테 시집 갈수만 있다면 역시 온 마을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공부하여 농촌을 벗어나든, 군대 갔다가 도시에 진출하든, 병신 같은 도시총각한테 시집가든 듣기 좋게 말하면 출세였고 나쁘게 말하면 고향을 버리는 행위였다. 바꿔 말하자면 고향을 버려야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왜 고향을 그리는가? 인간은 그토록 고향을 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는 돌아서서 고향을 그리는 간사함이 강하다. 인간이 고향을 그리는 것은 추억 때문이다. 어릴 적 먹던 음식, 어릴 적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 모두 추억의 대상이다. 임어당은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어릴 적 먹던 음식의 기호를 지켜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도시에 진출했거나 특히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어릴 적 먹던 음식이 더 그리워난다.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은 살고 있는 집이 한국 집이냐, 중국집이냐 의식하지 않고 생활한다. 옷도 굳이 한국복장이냐, 중국옷이냐를 의식하지 않고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먹는 것만은 다르다. 한국에 오래 있어도 중국음식이 생각나고 조선족밀집지역 사무실에 근무하는 조선족은 매일 점심 거의 중국음식점에 다닌다. 저녁 회식도 기본상 중국음식점을 찾는다. 중국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에 진출했던 사람이 가끔 고향에 가면 고향을 떠날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지 않고 있어 반갑게 맞아준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의 음식대접을 받는데 어릴 적 먹었던 음식 맛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진짜 고향을 그리는 멋이고 맛이다. 그런데 요즘은 고향에 가면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없고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 혹은 한족들이 이주해 와서 고향을 찾아간 사람은 매우 생경하다. 반갑게 맞아줄 사람도 없고 맛있는 음식대접은 먼 옛말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향에 갈 멋이 없다. 한국 실향민들이 아직도 고향을 몹시 그리는데 그들은 고향을 갈 수 없기 때문에 꿈의 고향으로 남아 있어 더욱이 사무치게 그리게 되지만 조선족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고향에 가면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고 남은 것은 허탈한 한숨뿐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확 사라져버리고 만다. 필자는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 출신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및 삼촌들의 묘가 있어 가끔 가는데 예전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이집 저집 음식을 권하여 고향 맛이 났었는데 요즘은 청명에 보토(補土)하고 추석에 벌초하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삽을 빌기가 힘들고 낫을 얻기가 어려워 연길에서 갖춰갖고 가야하는 상황이다 보니 ‘고향’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20·30대 조선족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인관광객이 백두산투어에 나섰을 때 가이드가 전부 조선족이었다. 한국인관광객들이 같은 핏줄 젊은이들을 만나 몹시 반가워했고 흔히 “고향이 어딘가?”고 물었다. ‘왕청’, ‘화룡’이라고 대답하면 한국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들어보지 못했던 지명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연길에서 얼마 가고 어떤 방향이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알아차리고 “아니 할아버지 고향 어딘가?”라고 다시 재차 묻는다. 한반도 조상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질문은 아직도 농경문화의 산물인 고향의식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고향인 줄 로 만 알고 조상고향이 곧 나의 고향이라는 의식이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고향을 물으면 다수가 모른다.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 아이들이 방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시골할아버지 집 혹은 시골외갓집에 가서 방학을 보냈다. 도시에서 태어난 이들 세대까지는 조상고향의식이 있었는데 나의 딸애가 소학교 다닐 때 방학에 시골할아버지 집에 가라면 죽어라 가지 않았다. 아무리 어떻게 달래도 가지 않았다. 나의 딸애 세대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조상고향이라는 개념이 아예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딸애가 연길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삭막한 도시생활이 과연 그들에게 전통고향의 의미가 존재할까? 이 세대들은 기껏해야 타도시 사람들이 연길 흉을 보면 화날 정도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재한조선족들 앞에서 중국 흉을 보면 화내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중국 내 타성이거나 해외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들은 이젠 어디가 살기 편하면 그곳이 곧 ‘고향’이란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다. 고향을 버려야 잘 살 수 있다. 과거 고향을 버리는 사람이 출세였고 모두 농민에 비해 생활이 윤택했던 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세월 도시진출이 어렵다 보니 고향을 버리고 싶어도 버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고향을 버리는 행위가 매우 쉽다. 쉽다 못해 식은 죽 먹기이다. 도시에 진출해 짠지 팔아도 살 수 있고 자전거수리해도 먹고 살 수 있고 하다못해 인력거를 끌어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 아무 일 해도 농사일만 덜 고달프고 수입이 더 좋을 수 있다. 도시에 진출해 창업하면 금상첨화이고 해외에 출국하면 더욱 ‘출세’이다. 재한조선족 70만 중에 농촌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식을 공부시키고 중국에 집 사놓고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을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부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바람에 자녀공부문제 어떻고, 이혼문제가 어떻고 하면서 만약 한국이 아니었다면 조선족사회가 잘 살 것처럼 심각하게 떠들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만약 한국에 오지 않고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빈곤한 처지에서 자녀공부는 저절로 잘 될까? 돈이 없어도 부부가 여전히 이혼하지 않고 화목하게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농촌공동체는 사라져가고 있으나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개혁개방 전까지 농촌공동체마을이 조선족전통문화의 근거지였다. 이 근거지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경제시대에 어쩔 수 없는 추세였다. 농촌을 떠나 중국 내 도시생활하거나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 출국해 있거나 하는 조선족들에게 농촌에 돌아가라고 호소하는 행위는 소귀에 경 읽기이다. 최근 중국에서 도시호구보다 농촌호구를 더 선호하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는 토지를 확보하여 예측불허의 미래에 보증수표를 만들어 놓으려는 목적일 뿐 정작 지금 농촌에 가서 농사지으라면 지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무리 농촌을 중시하고 혜택을 베풀어도 조선족공동체마을 해체는 막을 수 없는 추세이다. 일각에서는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해체를 조선족사회 실종과 등식화하고 있는데 글쎄 이런 결론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중국 내 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사회는 각종 협회와 동호회 및 이런저런 모임을 통해 조선족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게다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는 한국인이 그만큼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정비례 되어 함께 하나의 새로운 문화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기타나라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공동체들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나는 조선족이란 끈을 유지하게끔 만들고 있다. 나의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광주에서 취직하게 되어 아빠인 나는 은근히 한족남자를 신랑감으로 데려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걱정은 기우였다. 광주에도 조선족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연길총각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였다. 요 몇 년래 한국에 오는 조선족젊은이들 중 적지 않은 자가 우리말을 모른다. 안다 해도 매우 서툴다. 한족이나 다름없던 이들이 한국생활 수년을 거쳐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전통문화를 알아가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실례는 우리민족의 조상도 모르고 살아온 조선족이 다수였던 것이 한국생활 통해 조상을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어쩔 수 없어 한국에 오긴 하였으나 한국생활 수년을 거치고 나면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부류는 중국에 있을 때는 90% 한족처럼 생활해 와서 무늬만 조선족일 뿐이었는데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점차 ‘조선족’으로 회복되어가고 있다. 위 사례들을 살펴보면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은 해체되어도 또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고 고국이란 끈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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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3
  • 인생(人生)은 아름다운 긴 여행 / 이치수
    인생(人生)은 아름다운 긴 여행 / 이치수 우주의 신비로움 같이 엄마 몸 밖으로 나온 아기는 탄생의 순간 기쁨을 노래하며 세상과 조우(遭遇)한다. 맑고 초롱한 아기의 눈빛과 해 맑은 미소는 부모의 가슴 속에 영원히 간직되어 세상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고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우리 선조들께서 그러했듯 인생(人生)이란 여행을 시작한다. 인생이란 여행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공존하는 세계로 서로의 마음에 상처 주기도 하지만 더 많은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함께 떠나는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우리는 왜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오직 나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만의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각 차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오해로 다툼도 하고 간혹 앙금이 쌓여 감정에 휘둘린 외마디에 커다란 아픔과 상처로 괴로워하면서 이기심과 자존심으로 그 뜻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이것이 기쁨과 슬픔의 교차점 슬픔이 다가올 때 이겨내지 못하면 감당할 수 없는 더 커다란 고통이 잉태(孕胎)한다. 마음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툭 던진 외 마디의 말은 서로의 마음만 멍들게 하고 이러한 고통이 끝이었으면 밤마다 기도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아픔의 시작이 되어 “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너에게는 단어에서 풍기는 어감만 느꼈는가 보다. 너에게 아픔을 주려 한 말들이 아니었는데 너에게 아픈 상처가 되었구나 내가 말한 참뜻은 그게(그것이) 아니었는데...” 나의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외면하고 우리는 자꾸만 쌓여 가는 아픔에 이러한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 되리라 위안 삼고 그러나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또 다른 아픔의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을 인생이란 여행 길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未知)의 길도 있다. 처음 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돈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고 힘든 고비를 넘어 서기도 전 방황하며 쓰라림도 맛본다. 미지(未知)의 길 그러나 세상 어느 곳에도 새로운 길은 없다 오직 나의 세계에서 새롭게 보일 뿐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해도 그 길은 이미 누군가가 밟아 온 길이며 지금 그 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은 단지 우리의 기억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 인생이란 여행 길목에서 우리가 개척해 가야 할 길 중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 밟지 말아야 할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 길을 가지 말 것을 이야기해도 진심을 말하는 사유(思惟)조차 들으려 하지 않기에 다시 되돌리기엔 옳은 길을 찾아 나서는 것 그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인내(忍耐)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을 마다하고 남이 가지 않는 새로운 길만 나의 길을 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을 텐데 나 조차 모르는 험하고 힘든 길을 찾아 나서는 오류를 그 길을 따라 간 이후 나에게 어떠한 결실로 맺어질지 가늠조차 하지 않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잘못된 길 걸어온 지난날을 후회하고. “내가 걸어온 그 길이 너무도 험하여 너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길을 밟지 않게 하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네가 모르는 세상 내가 먼저 보았다는 것에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먼 훗날 너에게 닥칠 그 아픔 생각하면 내가 왜 이리도 목 매워 애원하는지..." 인생(人生)은 긴 여행 우리와 마주하는 세상 어떤 미물(微物)도 소중하지 않은 존재 없듯 우리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간다.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누구나 인생이란 여행을 향유할 권리 있어 이것이 인생이란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우리의 특권(特權). 우리는 서로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며 때로는 누군가의 넉넉한 마음씀씀이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의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지만 작지 않은 이 행복을 마주하면서도 그 기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순간순간 마다 찾아오는 자그마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사는 우리들 인생이란 여행 중 만날 수 있는 기쁨과 슬픔 모두 우리의 삶을 엮어가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삶의 일부분인 것을 우리는 그저 일상화된 무관심으로 흩날려 버리고... 서로 다른 길 서로 다른 세계를 꿈꾸며 그 속에서 저마다 느끼는 기쁨과 슬픔 담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인연(因緣)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누구나 갖는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찾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네가 볼 수 있는 것도 내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 소요되지 않을 텐데 왜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인생은 여행이어서 누구나 마음을 가린 창의 커튼을 조금만 열면 생명들이 속삭이는 감미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생이란 여행 중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은 오직 물질적인 이면보다 내면적 성찰(省察)에 있는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인생(人生)은 긴 여행 아름다운 인연(因緣)으로 맺어진 너와 나의 노래가 희망과 사랑의 날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큰 울림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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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0
  • 잇따른 지진! 우린 안전한 걸까요?
    22일 오전 4시 21분 전북 익산에서 리히터 규모 3.9의 지진이 발생하였습니다. 올해 있었던 지진 중 가장 큰 규모였는데요. 큰 피해를 부르는 규모는 아니었지만 지진의 빈도가 점점 잦아지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과연 대한민국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할까요? 카드뉴스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시죠.(서울=포커스뉴스 임학현 기자 haken@foc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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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3
  • 남자 3천명을 치마폭에 감고 논 민국의 여인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남자들은 모두 성감적인 여인을 좋아한다. 그녀들한테 일종 특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면 민국시기 남자 3000명의 자기의 석류치마폭에 감고 논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민국의 서적들을 읽다 보면 우리는 흔히 임휘인, 사빙심 등 여재들의 스토리를 볼 수 있으나 광주의 여미언(余美颜)에 대해서는 크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실 지난 세기 20년대 여미언은 세상에 잘 알려진 가문의 규수었으며 그녀의 인생행로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이 화려하였다. 한편 그녀는 부유한 가정의 딸이었기에 조용하고도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었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남편이 늘 집밖에서 돌다보니 고독함을 견디기 힘들어 늘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도 했다. 전하는데 따르면 그녀는 3000명에 달하는 사내들과 여관방에서 나체로 침대에 올랐는바 말그대로 민국시기 제1의 “성개방”조류의 선봉었다. 그녀는 남자들한테서 받은 정서(情书)를 책으로 출판하였을뿐만 아니라 책이름을 “모던정서(摩登情书)”라고 달았다. 당시 그녀가 출판한 이 책은 서점가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중의 하나로 되었다고 한다. 여미언은 광동 대산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태가 아름답고 총명하였는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체로 영문을 전공하기도 했다. 당시 그녀의 부친은 딸을 자기의 통역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여미언은 공부를 마친 후 늘 고담준론과 자유해방을 주장하는 신문학파로 변하였다. 그녀의 출신신분은 봉건색채가 짙었지만 그가 배운 교육은 오히려 서양문명이었으며 특히 외국서적들을 통해 그녀는 서양의 애정스토리를 많이 접촉, 이는 그녀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계기로 되었다. 청춘기에 들어서면서 여미언의 아름다운 자태는 절정에 이르렀다. 당시 그녀는 신생사물을 좋아했는바 새로 나온 패션을 입기 좋아했고 친구사귀기를 즐겼으며 특히 남들과의 접촉에서 호방하고 대범하기도 했다. 친구들 속에서 그녀는 늘 독특한 주장을 내세웠기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친구들이 많기도 했다. 물론 그 속에는 일부 부랑배들도 있었다. 당시 여미언의 부친은 늘 상업에 몰두하다 보니 딸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못했고 모친 또한 그냥 딸에 대해 엄숙하게 타이르지 못했다. 한번은 여미언이 외갓집으로 갔을 때 옆집의 아들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또한 여미언도 상대방의 준수한 모습에 추파를 보내기도 했으며 나중에 둘은 “백년가약”을 약속했으나 여미언의 부친 여대경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여대경은 상인이었기에 줄곧 딸이 배경이 좋은 가정의 아들과 인연을 맺을 것을 바랐으며 그것으로 자기 상업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하기도 했다. 결과 부친의 노력을 거쳐 여미언은 개평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담씨 가문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여미언의 남편 역시 대단한 가문의 귀공자였으나 그들의 결혼생활까지 순리로운 것은 아니었다. 결혼 후 여미언의 남편은 상업경영을 위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여미언은 고독한 여인으로 되었다. 이미 남자를 알게 된 여미언은 결국 탈선행위를 하게 되었고 얼마 뒤 그녀의 사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남편의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혼한 여미언은 부친에 의해 기예학교를 다니면서 학습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여미언은 더는 모든 것이 염두에 없었다. 애정에 대한 갈망 등은 그녀로 하여금 더는 유언비어에 얽매이지 않게 했으며 자신의 성적취향에 따라 행동하게 하였다. 그녀는 각종 유형의 사내들과 교류, 그들이 돈만 쓰면 그들을 상대로 춤을 추고 침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내들과는 무릇 그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짧디짧은 4년간 여미언은 무려 3000명에 달하는 사내와 침대에 함께 올랐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음탕녀”라고 욕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생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그냥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사내들과의 많은 교류중 그녀는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또한 남자들을 냉대하면서 조롱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당시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개변할 수 없었으며 자기의 이상 또한 달성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점차 자유와 이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1928년 4월, 홍콩에서 상해로 가는 한 여객선 갑판에는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는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이런 행동을 여러번 반복하더니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며 바다로 투신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여미언이었다. 그녀는 기이한 여인이었고 시대의 “욕녀”이기도 했으며 더욱이는 고집스레 자유를 추구해온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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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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