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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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문 단상]日 마쯔야마시 조선학교 교육현장
    ●김태연(재일조선족) 나는 중국 출신 조선족으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 온지 11년째가 된다. 동경근처의 치바현에서 2년반정도 생활하다가 현재는 일본 시코꾸(四国) 에히메(愛媛)현의 수부도시 마쯔야마시(松山市)에서 살고 있다. 8년전 회사의 취직으로 여기 편벽한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주변에 조선족이라곤 나와 안해 딱 두명뿐이다. 일본에는 8-10만명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대부분 동경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과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평소에 우리 민족에 관심이 많은지라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중 의외로 내가 사는 마쯔야마시에 조선학교(四国朝鮮初中級学校, 재일본 조선인 학교/초등, 중등학교)가 있음을 알게 되였다. 예전에 치바에 있을 때에도 조선대학에 놀러가기도 하고 조선인 형님과도 친하면서 지냈는데 마쯔야마와 같이 편벽한 곳에 우리 동포가 살고 있다는것이 놀랍기도 하고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이국 타향의 외딴 도시에서 같은 민족을 만난다는 반가운 마음에 이분들을 더 알고싶어졌고 2019년 2월 학예회때 직접 방문하는것으로 인연이 시작되였다. 四国朝鮮初中級学校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설명을 하면 이 학교는 1947년 7월 4일 마츠야마시 각 지역의 조선어교실이 합쳐서 학교가 창립되였다. (당시에는 일본의 전역에 약 3만여개의 크고 작은 조선어교실이 재일교포들에 의해 운영되였다고 한다. 우리민족의 지대한 민족교육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수자인것 같다.) 창립 당시에는 교원 2명에 학생 25명이 있었다. 1954년에는 교원 4명 학생 55명까지 늘어났으며 2020년 현재는 교원4명 학생15명(초,중급 포함)으로 구성이 되였다. 재일본 조선학교는 중국의 조선족학교와 달리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즉 학생들의 학비와 단체 및 개인의 지원금으로 어렵사리 학교를 운영한다. 예전에는 조선에서 일부 교육자금을 지원했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안되여 중단이 되였다. 재력이 부족하니 교원들의 월급이 적고 그러다보니 재일조선인 교원도 극히 결핍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는 평범하면서도 강한 의지로 학교를 지키고 있다. 학생들 또한 일본 현지의 초등학교의 월등한 무료 의무교육을 누릴수 있지만 자신들의 민족문화와 언어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어려운 민족학교의 길을 택했다. 리일렬 교장은 일본의 조선대학교(동경 소재)을 졸업하신 분이다. '자신의 다리로 착실히 걸어갈수 있게끔, 자주성을 주축으로 한 민족교육을 하고 싶다.(自分の足でしっかり歩んでいけるよう、自主性を軸にした民族教育を行って生きたい。)'라는 리념을 가지고 굳세게 우리민족 교육을 사수하고 계신다. 최근 리일렬교장선생님과 만났을때 나눈 얘기를 적어보려 한다. 김태연 : 요즘 코로나때문에 일본 각 학교에서 휴교를 하는데 조선학교는 어떻습니까? 리일렬교장 : 일단 정부의 지시대로 휴교중이며 개학은 언제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황입니다만, 수업은 쉬면 안되니 요즘 인터넷 교학을 하려고 시스템을 도입하여 확인중입니다. 아시다싶히 일본은 태풍, 지진 등 자연재해가 많으니 언젠가는 인터넷 교학을 필요로 할 때가 있으니 이참에 준비를 해두는겁니다. 김태연 : 지금 학생수와 교원수는 어떻게 됩니까? 리일렬교장 :올해 두 학생이 졸업을 하고 두 학생이 입학을 하여 학생인수는 15명으로 변하지 않고 교원은 원래 5명이였는데 두명이 떠나고 겨우 한명을 구해서 지금은 4명입니다. 김태연 : 떠난 교원들은 다른 조선학교로 전근한 겁니까? 리일렬교장:그건 아니고 교원직업을 그만두고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는겁니다. 교원들도 젊다보니까 자신이 하고픈 일이 있겠죠. 저같이 60넘는 나이면 한자리만 지키겠지만. 김태연 : 작년에 교원 5명도 일손이 모자라다고 들었는데 더 힘들어졌겠네요. 리일렬교장: 네, 그래서 지금도 조선대학교를 통해서 교원을 찾고 있습니다. 찾고는 있는데 마쯔야마로 오려는 선생님이 적어요. 동경, 오사카의 큰 학교에는 응모하는 분이 많은데. 아마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죠. 우선 적은 월급과 도시의 크기, 생활조건 등 여러가지 요소가 영향을 주는겁니다. ▲리일렬 교장 학교 방문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조선대학교 졸업생인 조선인 형님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의향을 물어봤다. 조선인 형님의 답변은 이랬다. “십몇년전부터 존재하는 문제인데 내용은 잘 알고 있어요. 좀 더 현실적으로 얘기를 하면 우선 조선학교 선생님들은 월급이 너무 낮아요. 특히 농촌의 학교는 학생수도 적고 월급이 10만엔(인민페 6-7천원)정도밖에 안되는데 집세를 빼면 기본 생활비도 모자랄 정도의 적은 금액이예요. 아르바이트 하는것보다도 더 적은 돈이죠. 마음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죠. 가정이 부유해서 돈 근심없는 사람이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처럼 혼자서 사는 사람이면 절대로 불가능해요.” 민족학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싶은 마음만은 태산같지만 현실적인 답변에 부딛쳤을 때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아프고 어려운 현실이였다. 이렇게 겉보기에 힘이 약한 학교의 수업의 질은 어떠한가? 모든분들이 걱정하는 부분으로 생각되는데 설치한 과목으로는 국어(조선어),사회, 조선역사, 조선지리, 수학, 리과, 일본어, 영어, 체육, 음악, 미술, 가정, 정보 등으로 아주 풍부하다. 이중 특히 매년 2월의 학예회는 타지역 조선인학교 학예회와 달리 민족력사에 관한 내용도 있어서 감동이 더 하다고 한다. 교원 다섯명, 학생 15명이란 적은 수에 비해 무대는 아주 화려하고 감동적이였다. 무대위에서 혼신을 다하는 선생님들의 모습, 학생들의 모습이 한없이 커보였다. 이렇듯 힘든 악열한 조건하에서도 서슴없이 민족교육사업을 위해서 이바지하는 분들을 보면 우리는 중국의 조선족으로서 어떻게 하고있으며, 어떻게 민족 문화를 잘 지켜나가야 하는가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고, 또 우리 모두 함께 생각해가야 할 무거운 과제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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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中 해상 풍력발전기 조립 기록 쇄신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최근 중국 신장 진펑 과학기술 주식 유한회사(新疆金风科技股份公司)에서 연구개발한 중국 국내의 첫 8 메가와트짜리 해상풍력 발전기조, 산샤푸칭화(三峡福清兴化) 만 풍력발전소 제 2기 항목이 성공적으로 조립을 마치었다고 9일 인민망이 보도했다. 이는 현재 중국 국내의 해상풍력발전에서 이미 조립을 마친 최대 용량의 단기(单机) 풍력발전기 조로서 해상 단기 풍력발전기조 용량의 기록을 쇄신, 푸젠(福建) 해상 풍력발전 고질량 발전 및 <대국 중기 푸젠조(大国重器福建造)>의 최신 성과로 선정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에 조립된 GW175-8MW 기조는 진펑 과학기술 주식 유한회사의 완전 자주 지식재산권으로 된 최신 일대의 해상 풍력발전기조로서 기조 허브 센터(轮毂中心)의 높이는 110미터로 36층 아파트의 높이에 해당되고 엽륜(叶轮) 직경은 175미터였으며 풍륜이 휩쓰는 영향 면적은 3.4개의 표준 축구장의 크기와 맞먹는다. 그리고 초당 12미터 풍속의 조건에서 24시간동안 약 20만도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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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가희 등려군의 파란만장한 생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타이완 여가수 덩리쥔(등려군 邓丽君)은 1953년 1월 29일, 타이완 윈린현 바오충향 텐샹촌(台湾省云林县褒忠乡田洋村)에서 출생, 부친 덩쑤우(邓枢)는 일찍 광저우 황푸군관학교 제14기 졸업생이었고 어머니는 산둥 타이안(泰安)시 둥핑(东平)현 사람이다. 1949년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철퇴한 뒤 덩리쥔은 가정의 넷째(위로 3명의 오빠가 있었음)로 태어났다. 덩리쥔의 이름의 유래를 보면 부친 덩쑤우가 어느 한 전우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지은 것으로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대나무란 뜻으로 덩리쥔(邓丽筠)이라 지어졌으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덩리쥔(邓丽君)이라 불렀기에 그냥 그 것이 호적에까지 등록됙 되었다. 덩리쥔이 영문이름은 테레사 텅(Teresa Teng)으로 이는 그리스어로 수확의 뜻을 나타내며 저명한 수녀 테레사와 동명이었다. 위로 오빠만 셋이 있다가 덩리쥔이 여자애로 태어나자 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덩리쥔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바 어머니는 그 어디를 가나 딸을 데리고 다니며 자랑했다. 또한 덩리쥔의 어머니는 당시 영화와 연극을 구경하기 좋아했다. 그래서일까? 항상 어머니와 함께 이런 문화를 접하다보니 덩리쥔은 어릴적부터 중국 전통음악에 대해 익숙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랑하고 또한 그것을 전공할 수 있는 토대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1963년 리한샹(李翰祥) 감독이 만든 영화 “양산백과 축영태”가 타이완에서 상영되면서 한시기 타이완에서는 중국의 5대 희곡 중의 하나인 황메이시(黄梅戏) 음악창법이 널리 유행되었고 당시 중화방송국에서는 황메이시음악 콩쿠르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러자 덩리쥔은 은사의 제의에 따라 이 콩쿠르에 참가,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보좌에 올랐다. 이 때로부터 덩리쥔은 타이완 가요계에 정식으로 입문, 이것을 계기로 덩리준한테는 이러한 기회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1966년, 덩리쥔은 학업이냐 아니면 음악이냐 이 2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부친 역시 학교와 협의를 달성할 수 없었다. 최종 덩리쥔은 학교에서 중퇴하고 금마상 레코트 회사에서 펼친 가요콩쿠르에 나서서 우승을 따냈으며 그 때로부터 학교와 영영 고별을 선고, 14살 나잉 우주레코트회사에 취직하면서 프로가수의 인생에 들어섰다. 덩리쥔은 노래에서만 천부적인 재능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1969년 덩리쥔은 어린 나이에 “고마워요 사장님”이란 영화에 출연, 영화에는 많은 노래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덩리쥔은 이 과정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어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에 들어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덩리쥔은 영화배우에는 거의 관심이없었다. 1970년, 17세에 난 덩리쥔은 홍콩 공업전시회에서 주최한 “백화유 자선바자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보좌에 올라 사상 가장 나어린 “백화유 자선여황후”로 되었다. 이어 그녀는 자신의 두번째 영화 “가요팬아가씨”에 출연해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 가요열창사업에서도 첫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면서 덩리쥔은 중국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발판으로 동남아의 화교시장에도 진출하게 되었다. 한편 오우양페이페이(欧阳菲菲)는 덩리쥔으로 하여금 일본에서 음악생애를 펼치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준 사람이었다. 1973년, 오우양페이페이와 홍콩가수 천메이링(陈美龄)이 일본에서 각각 레코트 대상을 획득하면서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폴리도르 레코드) 회사에서는 동남아 지구의 가수들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홍콩, 마카오와 타이완 지구에 사람을 파견해 고찰, 결과 홍콩의 정둥한(郑东汉)이란 사람으로부터 이상적인 여가수를 소개받았다. 그 출중한 여가수가 바로 덩리준으로 당시 그녀는 “오직 그대밖에 없어”란 노래로 일본 전문가들의 마음을 움직이었다. 1971년 3월 25일, 덩리쥔은 홍콩스타 쩡소우츄우(郑少秋)와 함께 타이완, 홍콩과 마카오 등지를 드나들면서 활약, 당시 쩡소우츄우는 이미 3차례나 결혼한 몸이었지만 홍콩연예계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높았으며 거기에 덩리쥔까지 합세하자 이들의 몸값은 급상승했다. 당시 덩리쥔으로 말하면 나어린 가수에 불과했지만 이미 홍콩의 여풍레코드회사와 년 20만 홍콩달러로 계약을 맺은지라 연예인들 모두가 덩리쥔과 합작하기를 원했다. 거기에는 홍콩 일류의 사회자 썬덴샤(沈殿霞)도 있었다. 1978년 덩리쥔은 싱가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공연사업무대를 개척, 덩씨가문으로 말하면 일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의 미감으로 말하면 덩리쥔은 그 무슨 대단한 미녀에는 속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그녀는 타이완의 “대중의 애인(大众情人)”인 쑤챵(萧蔷)한테 조금도 짝지지 않는 가요계의 제일 미녀였다. 1979년 덩리쥔이 한창 자신의 사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뜻밖에서 가짜여권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덩리쥔한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지어 당시 많은 매스컴들에서는 덩리쥔을 공격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당시 덩리쥔은 타이완을 비롯한 홍콩, 마카오와 기타 동남아 지구에서 활동하기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부득불 자기의 활동무대를 다른 지역으로 선택, 단연히 미국행 유학으로 일본어, 영어와 생물, 수학 등을 배웠다. 그러다가 1979년 4월 캐나다의 밴큐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는 그녀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지역에서 개최한 개인콘서트였다. 1981년 덩리쥔은 5장 레코드상을 혼자서 받으면서 레코트 제작사상의 기록을 창조했다. 그녀가 바로 방송국에서 주최한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때 일종 희극성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청룽(成龙)으로 하여금 귀빈이 되어 덩리쥔에게 상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이 날 오후 갓 미국으로부터 홍콩에 도착한 덩리쥔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내속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당시 방송국의 한 일군이 레코드판을 든 청룽을 무대로 올리 밀었는데 무대로 올라온 청룽을 보자 덩리쥔은 너무도 뜻밖이라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1982년 1월 8일부터 11일까지 홍콩 이레사 체육관에서는 5차례에 달하는 개인콘서트를 마련, 매차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어 보우리진 녹음출판사(宝丽金录制出版)가 주최한 그 개인콘서트가 열렸으며 타아완 TV방송은 “천언만어(千言万语)”특집으로 덩리쥔의 개인콘서트를 녹화하였다. 이해 5월 덩리쥔은 고전특집 녹화계획에 들어갔고, 10월에는 린자샹(林子祥) 및 탄융린(谭咏麟)과 합작하여 홍콩에서 TV특집을 촬영했으며, 12월에는 홍콩에서 자선야회를 가지기도 하면서 개인사업의 고봉기에 들어서기도 했다. 1983년 덩리쥔은 초청으로 미국 라스베가스의 시저스팰리스 궁전에서 개인콘서트를 개최, 이 궁전에서 공연한 첫 중국인으로 되었다. 그 때 “바람과 서리는 나와 동반(风霜伴我行)”이란 노래로 무대에 오른 덩리쥔은 이어 “잘 있으라 나의 사랑(再见我的爱人)”, “첨밀밀(甜蜜蜜)” 등 노래로 사람들을 취하게 만들었으며 공연은 생각밖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공연은 3차나 재차 막을 올렸고 원래 1100석을 차지하던 관중수는 1500석에 이르기도 했다. 이로부터 덩리쥔은 국제스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 해 덩리쥔은 홍콩 홍감체육관에서 6차례의 콘서트를 가지고 자신의 가수생애 15주년을 기념, 이 콘서트의 제목은 “10억인의 박수갈채”로 번마다 초만원이었으며 티켓값도 최고로 치달아올랐다. 지난 2010년 미국CNN(인터내셔넬)에서는 지난 50년간의 세계유명 음악인 20명을 평선, 이 중에는 짱궈룽(张国荣)과 덩리쥔이 화인 가수로 선정되었다 덩리쥔의 일생은 대체적으로 60% 이상이 공개된 정감세계에서 헤맨 인생으로 이 중 저명한 영화스타 청룽과의 한단락 정감유희가 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오락권의 대사로 남아있다. 청룽과 덩리쥔은 최종 각종 원인으로 가정을 이룰 수 없었으며 이로 하여 외계의 많은 사람들은 애석해 하기도 했다. 그리고 덩리쥔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매우 진지했었다. 하지만 친샹린의 아내로 된 것 또한 덩리쥔이 아니라 린칭샤(林青霞)였다. 과거의 애정사에 대한 매스컴의 취재를 받들 때면 덩리쥔은 허다한 사랑은 각골명심할만한 사랑으로 감정투자가 많았다고 한다. 덩리쥔은 늘 “애정이 많은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사랑의 신이 자신한테서 물러갈 때마다 있게 되는 덩리쥔의 일가견이었다. 덩리쥔의 첫 사랑은 그녀 나이 18세 때 찾아왔다. 상대는 말레이시사 화교청년이며 기업가인 린쩐파(林振发)였고 나이는 덩리쥔보다 8살 이상이었다. 당시 두 남녀는 혼인과 가정에까지 담론이 오갔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있어 덩리쥔이 린씨네 며느리로 될 것으로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후 린쩐파는 돌연히 심장병이 발작했다. 소식을 들은 덩리쥔은 인차 당시 린쩐파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싱가폴로 날아갔으나 싱가폴 공항에서 덩리쥔은 자기의 애인이 이미 숨을 거둔 것을 보아야 했다. 그 때 린쩐파의 나이는 30여세에 불과했다… 그 뒤 덩리쥔은 늘 스캔들이 뒤따라고 있는 주젠(朱坚)이란 상인과 사귀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주젠은 당시 오락권내에서 상당한 배경이 있었으며 싱가폴 어느 한 나이트클럽의 보스였다. 그는 일찍 덩리쥔한테 많은 도움을 주던 사람이기도 했다. 덩리쥔은 주젠한테도 진심을 보이면서 그한테 일생을 의탁하려고 했었다. 1972년 6월의 어느 날, 주젠은 홍콩에서 공연생활을 하고 있는 덩리쥔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만나러 홍콩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주젠이 탑승한 비행기가 베트남상공에서 실종되었고 홍콩 공항에서 주젠을 애타게 기다리던 덩리쥔은 사람도 보지 못하고 주젠과 사별해야 했다. 덩리쥔과 지난 세기 70연대 타이완의 영화스타 친샹린(秦祥林)과의 애정은 “오케이”와 “노오”사이를 배회하기를 거듭했다. 당시 덩리쥔이 친샹린과 함께 유럽여행을 간 후 아버지는 이들의 동행을 부인하면서 그냥 우연하게 둘 다 유럽행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덩리쥔을 관심하는 모든 사람들은 줄곧 추궁하던 끝에 덩리쥔과 친샹린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함찍 찍은 사진을 발견하고 공개했다. 이에 대해 덩리쥔은 후에도 승인하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친샹린과 린칭샤의 혼인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1979년 9월, 덩리쥔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랜시스코로 날아가 청룽이 주연한 영화 “킬러호한(杀手壕)”을 보게 도었다. 당시 미국의 많은 신문들에서는 청룽이 덩리쥔을 끌어 안고 있는 사진을 게재, 둘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당시 청룽은 쿵후스타였고 가요계에서도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여기에는 덩리쥔의 공로도 한몫 있는 것으로 당시 미국시절 덩리쥔이 청룽한테 노래실력을 키워주었다고 한다. 그 뒤 중국 CCTV의 “예술인생”중 청룽은 덩리쥔과의 한단락 애정사를 회억하면서 몹시 가책에 시달리는 얼굴을 보이었다. 청룽은 당시 애정의 소중함을 몰랐다면서 후회, “이제와 생각해보니 잘못되었다. 당초에 그녀를 진심으로 아껴주어야 했다”고 밝혔다. 한편 궈쿵청(郭孔丞)과의 애정사는 덩리쥔한테 가장 가슴 아픈 상처로 남기도 했다. 우선 싱가폴에서 우연히 만났다가 애정이 불타올랐고 그 뒤 궈쿵청이 자기의 샹글리라호텔에서 덩리쥔을 초청해 그녀한테 구혼했었으며 결혼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도 했다. 덩리쥔의 동생 덩창시(邓长禧)에 따르면 궈쿵청이 덩리쥔을 데리고 집으로 가자 곽가 가정의 직원들이 둘러싸고 사인성세를 들이대기도 했다. 그 뒤 덩리쥔은 궈쿵청의 조부모를 만나서야 가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궈쿵청의 조부모는 덩리쥔한테 3가지 조건을 제출했다고 한다. 즉 하나는 과거의 역사를 말끔히 교대하고 궈씨 가문에 시집온 후에는 즉시 연예권에서 퇴출하며 오락권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리쥔은 이 3가지 조건에는 자기를 기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고 인정, 접수할 수가 없어 퇴혼을 제출했다고 한다. 그 뒤 얼마 안있어 궈씨 가문에서는 샹글리라 호텔에서 성대한 결혼연을 베풀었다. 단 당시의 결혼식의 주인공은 덩리쥔이 아니라 1명의 일본여인이었다. 80년대 후기에 들어 덩리쥔은 점차 무대와 고별하고 반은퇴의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덩리쥔은 프랑스 파리로 이민하여 정착, 당시에서 자기보다 10여살 아래인 폴로를 알게 되었다. 폴로는 촬영애호자였다. 당시 덩리쥔은 그와의 결혼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혼인은 애정의 정착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냥 애정의 과정을 체험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덩리쥔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안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당시 호흡도 질병으로 죽었다는 등 그녀의 사망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녀의 죽음을 두고 새로운 의문설이 제기되었다. 덩리쥔이 죽은 뒤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녀의 목에 손자국이 역력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타살로 추측된다는 견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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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5-10
  • 이재명, 이태원 클럽 관련 2주 간 집합금지 명령
    [동포투데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 클럽을 중심으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관련 업소 출입자를 대상으로 감염검사와 대인접촉금지 긴급행정명령을 발령했다. 이와 함께 도내 모든 클럽 등 유흥주점과 감성주점, 콜라텍에 대해 2주간 집합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10일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경기도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 클럽을 중심으로 코로나19의 집단감염이 확산됨에 따라 즉각대응팀을 투입하여 심층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관련 위험시설에 대해 전수조사와 소독실시 등 감염확산 차단을 위해 총력대응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에 따라 도는 우선 확진자가 다녀간 클럽과 서울 강남구 소재의 한 수면방 출입자 등 관련 업소 출입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감염검사와 대인접촉금지를 명했다. 대상자는 4월 29일 이후(29일 포함)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소재 6개 클럽{킹클럽(KING CLUB), 퀸(QUEEN), 트렁크(Trunk), 더파운틴(THE FOUNTAIN), 소호(SOHO), 힘(H.I.M)}과 강남구 논현동 소재 블랙수면방 출입자로 경기도에 주소, 거소, 직장 기타 연고를 둔 사람이다. 대상자들은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기에 보건소를 찾아 코로나19 검사를 받아야 한다. 대인접촉금지는 해당 업소 마지막 출입일 다음날부터 최대 2주간을 한도로 미감염이 확인될 때까지다. 이밖에도 밀접접촉자로 분류되면 방역당국의 별도 격리명령이 있을 수 있다. 이 지사는 이번 명령은 대상자 특정이 어려워 기자회견과 언론보도, 경기도지사 및 경기도의 각종 SNS 게시, 재난문자 발송 등을 통해 알린다고 설명했다. 경기도에 주소, 거소, 직장, 기타 연고를 둔 사람 가운데 해당 클럽과 수면방이 아니더라도 4월 29일 이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일대 및 논현동 일대에 간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11일부터 17일까지 경기도내 보건소와 선별진료소에서 무상으로 코로나19 감염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 지사는 “이 기간 동안은 해당 클럽이나 수면방의 출입여부를 밝히지 않고도 일반 시민들과 구별되지 않고 무료검사가 가능하다”며 “이후 자신으로 인해 감염이 확산될 경우 최초감염자 역학조사과정에서 출입여부가 확인된다는 점을 참고해 코로나19 감염검사에 신속히 응하고, 대인접촉을 금해 달라”고 당부했다. 도는 이번 조치가 성소수자들도 숨지 않고 검사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든 것으로 경기도가 성소수자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방역해법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명령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상 역학조사(18조 3항), 건강진단(46조), 격리 및 대인접촉 금지(47조) 등에 근거한 것으로 위반 시 최고 징역 2년 또는 벌금 2천만 원에 처해질 수 있고, 명령위반으로 감염이 확산된 경우 관련 방역비용이 구상 청구될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지사는 경기도 내 모든 유흥주점(클럽, 룸살롱, 스탠드바, 캬바레, 노래클럽, 노래바 등) 5,536곳과 감성주점 133곳과 콜라텍 65곳 등 총 5,734곳에 대해 10일 18시부터 24일 24시까지 2주 간 집합금지를 명했다. 이들 시설은 즉시 영업을 중지해야 하며, 위반 시 감염병 예방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영업장 사업주와 이용자 모두에게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이 지사는 “이태원 일대 클럽 출입자의 특성상 이들이 속한 직장, 학교, 군, 병원 등에서 2차 감염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3차 대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할지 여부는 일상적 방역수칙의 준수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개인방역수칙을 비롯한 방역당국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길 다시 한 번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10일 12시 기준 이태원 클럽과 관련한 경기도 확진자는 최초 확진자 포함 총 14명(용인 3, 안양 2, 성남 3, 남양주 1, 고양 2, 부천 1, 의왕 1, 수원 1명)이며 접촉자를 대상으로 검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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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美 전 대통령 오바마 트럼프의 방역 대응 비판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9일 미국 매체들에 따르면 미국 전 대통령 오바마는 코로나 19 사태에 대한 현임 대통령 트럼프의 대응은 <혼란의 재난>이라고 비판했다. 지난 8일 오바마는 약 3000명에 달하는 그가 집정시기의 정부 성원들과의 전화회의에서 “현재 미국인들의 생활 중에서 자사자리하고 파벌을 뭇고 분열 및 타인을 기시하고 적으로 만드는 풍기가 더욱 성행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코로나 19를 대응에 있어서 약한 고리로 되는 원인 중 하나로 되고 있다. 현재의 정부는 ‘이는 나한테 좋은 점이 있으니 기타 사람들의 의견은 듣지 않는다’는 심태운영으로 정부의 사업을 대하고 있다. 이는 일장 혼란적인 재난이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오바마는 전화회의에서 지지자들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이며 전 부대통령이었던 바이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면서 자기 역시 되도록 많은 품을 들여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바이든이 선거될 수 있도록 조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백악관 비서 케일리 매케넌은 8일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책은 전례에 없던 것으로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해주고 있다. 오마바 사무실은 이에 논평을 거절하고 있다”라고 화제를 돌리었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최신 통계에 따르면 지난 9일까지 미국의 코로나 19 확진자는 130만 명이었고 사망자는 이미 7만 8000명을 초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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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100- 3?… 中 축구경기서 나타난 황당한 스코어!
    [동포투데이]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많은 스포츠 경기가 중지되었지만 중국의 일부 전염병 위험이 낮은 지역에서는 5.1연휴를 맞아 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 그중 광동 오천시 담파진에서 열린 제18회 정룡컵 축구경기 준결승전에서는 100-3이란 황당한 스코어가 나타나 논란이 되고 있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지난 6일 오후, 오천시 축구협회는 공식 성명을 발표해 100 대 3이란 기괴한 점수는 오천시의 스포츠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질타했다. 시 축구협회는 현재 이번 대회 주최 측과 참가 인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고 허위 사실이거나 도박 현상이 적발되면 곧바로 공안기관에 신고할 것이라고 밝혔다. 도대체 이 기괴한 현상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번 일은 5월 4일에 있은 채옥축구팀과 파당축구팀의 준결승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채옥팀은 경기에서 심판의 부당한 취급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영상으로 확인한 결과 사실로 드러났다. 그 뒤에 있은 승부차기에서 채옥팀 키퍼가 상대 키커의 슈팅을 막아냈지만 심판은 키퍼가 먼저 움직였다는 이유로 페널티킥을 무효 시켰다. 그러나 영상을 판독한 결과 키퍼가 좌우로만 이동했을 뿐 앞으로는 나가지 않은 것으로 확인 되였지만 심판은 여전히 페널티킥을 다시 차게 하였고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채옥팀은 패배를 맛봐야 했다. 경기가 끝난 뒤 채옥팀은 곧바로 편파판정을 상소하였다. 현지 담파진축구협회에서 확인한 결과 두 번째 페널티킥에서 키퍼가 반칙을 범하지 않은 것으로 인정 되였지만 경기 결과는 바꿀 수 없었다. 그 뒤 채옥팀은 홧김에 준결승전에서 소극적인 경기를 펼쳤고 최종 100 대 3이란 황당한 스코어가 나오게 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경기는 인터넷에서 생중계 되였고 당시 1만 4400명이 온라인에서 경기를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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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김정룡 칼럼] 재한조선족은 원숭이에게 감투 꼴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진나라 서울 함양으로 치달아 들어간 항우는 이전에 유방에게 항복한 진왕 영(瓔)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은 석 달을 두고 탔다고 한다. 항우는 시황제의 무덤도 파헤쳤으며 진나라의 재물들을 모두 거둬 갔다. 부녀자들도 모두 붙잡아 갈 만큼 항우의 군사는 갖은 잔학한 짓을 다하고는 함양을 떠났다. 그때 한생(韓生)이란 사람이 항우에게 말했다. “진나라 땅은 지리가 좋고 땅도 길어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의 패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우는 잿더미가 된 진나라 궁궐들이 보기에도 싫었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한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이 부귀하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밤에 비단 옷인지 누가 보고 알아 줄 것이냐.” 한생은 기어이 고향으로 가려는 항우를 보고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감투를 쓴 꼴이다.’고 했다가 항우의 노염을 사서 잡혀 죽었다. 항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역사상 굉장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따라서 이 고사가 후세에 전해지면서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 스스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는 행위를 빗대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속담으로 전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속담을 우리 현실에 적용시켜보면 재한조선족사회 상황에 신통하게 하모니가 되어 있다. 10년 전의 일이다. 00한국 분이 필자에게 왈, “한국에 온 조선족 분들이 평균 수준이 굉장히 높네요.” “무슨 말씀인지?” “저마다 선생(교사) 했다는 분들이 엄청 많네요.” “아~, 그래요.” 뻥이다. 뻥도 보통 뻥이 아니라 한심한 강냉이 뻥 튀기 식의 뻥이다. 10년 전에 한국에 온 조선족 중에 교사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극히 소수였다. 00단체장의 우스운 이야기다. 자신은 조선글, 조선말 잘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연길에서 00중학교에서 선생 했다고 자랑한다. “그 학교가 조선족중학교인데”라고 말했더니 “아, 잘못 말했는데 xx중학교요.” “그 학교도 조선족학교인데요.” 얼굴이 원숭이의 궁둥이가 되어 머뭇거린다. 선생 해 본 적이 없는 단체장이 자신이 있어 보이기 위해 선생 했다고 뻥 친다. 조선족사회 리더라고 하는 단체장이 이 정도로 뻥 치고 있으니 일반 구성원들이야. 또 법원이나 검찰원에서 일반 직원으로 심부름이나 하던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자신은 중국에서 판사 혹은 검사였다고 뻥친다. 왜냐? 한국에서는 판사나 검사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기 때문에 자신을 최고 엘리트로 포장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재일조선족사회와 재한조선족사회 최대 구분이 바로 전자는 유학생 주류로 형성된 것인데 비해 후자는 노무일군을 주류로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한국에 온 조선족은 머리 쓸 필요 없이 팔다리가 멀쩡하면 모두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85만이나 밀려 온 것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국가이다. 민간단체 설립이 굉장히 쉽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슬쩍슬쩍 한두 마디 변경해서 정관이나 만들고 회원 명단만 작성하면 되고 활동 내역도 어지간히 만들어 넣으면 00협회란 법적 등록이 가능하다. 재한조선족사회 00협회 이름으로 된 단체가 한 때 가장 많을 때 60여 개나 있었다. 개혁개방 직후 80년대 연길에 실체나 실속 없는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가 너무 많아 당시에 ‘무슨 놈의 꿍쓰(회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는 말이 유행되었다. 재한조선족사회 단체들이 똑 마치 그때 피빠아오꿍쓰(皮包公司, 허수아비회사)를 신통하게 닮았다. 구체적인 일은 하는 것이 전혀 없이 일단 단체장이라는 감투만 쓰면 능력은 없어도 자신이 큰 벼슬을 한 것처럼 개폼을 잡는다. 능력이 있을 수가 없다. 이들 ‘회장님’들은 중국에 있을 때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고 더욱이 단체장 가운데 대학문을 나온 사람이 거푸 한두 명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재한조선족단체와 재일조선족단체의 큰 차이다. “저희들은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여전히 재한조선족사회 리더로 활동하고 있어요.” 한국00사법기관 동포 관련 간담회에서 나온 조선족 단체장의 발언이다. 한국공무원들이 재한조선족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말 창피하다. 창피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은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가이고 동포밀집지역 관공서와 서울시청 등에서 다문화(이럴 때면 조선족도 다문화에 포함시킨다.) 관련 간담회가 많다. 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국에서 선생 했다거나 언론 관련 기관에 종사했다거나 혹은 자신을 지식인이라 폼 잡는 사람들이 회의에서 하는 발언들을 들고 있노라면 한국어가 서툰 것은 허물도 아니다. 회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말을 길게 늘여놓고 게다가 목소리도 크고 악센트도 세서 동네망신이다. 참다못한 사회자께서 마이크를 놓으라고 제지한다. 단체장들은 스스로 재한조선족사회를 대표한다고 자랑한다. 문제는 대표라는 사람들이 이 수준이니 한국공무원들이 이쪽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는가? “중국에 있었을 때 같으면 함께 같은 밥상에 마주 않지도 못했을 ‘빈 깡통’들이 한국에 와서 회장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꼴을 정말 못 봐주겠다.” 조선족출신 00공무원의 말씀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정말 불가사의한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중국에서 경찰한테 감히 대들지 못하던 조선족들이 이상하게 한국에 와서 한국경찰한테 협조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을 무시하고 을러멘다. “사건 현장에 출동할 때면 둘이 갈 일을 넷이 가고 넷이 갈 것을 여덟이나 갑니다. 동포들이 군중영웅심리가 강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지나가던 동포들이 경찰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있어 많이 출동해야 합니다.” 동포밀집지역 경찰공무원의 고충이 담긴 고백이다. 왜, 이럴까? 중국에서 돈고생 하다가 한국에 와서 얼마간 돈을 벌었으니 세상이 녹두 알만해 보이고 자신이 영웅이나 된 것처럼 행세한다. 이런 조선족이 굉장히 많다. 일하기 싫어 입에 풀칠도 곤란한 동포들이 한군데 모여 빈둥대면서도 트럼프부터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부터 일본우익에 이르기까지 세상사를 논하는데 한다하는 정치논객들을 뺨 칠 정도다. 서로 제 말이 옳다고 우겨대는 목소리는 온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만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노라면 진짜 원숭이에게 감투 꼴이란 말이 실감난다. 한국사회가 재한조선족사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는 이유가 충분히 있다 . ‘모든 일은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반성하자.’ 이것이 필자의 일관된 신조이다. 언제 가면 재한조선족사회가 지적으로 변화되어 한국사회로부터 환영받는 집단으로 거듭날까? 지금으로서는 막연해 보인다. 참고로 모든 단체장이 다 그런 것처럼 이 글을 오해할 수 있는데 일부 조선족단체장들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다수의 재한조선족은 묵묵히 열심히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점 밝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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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문대통령 취임 3주년 연설…“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목표 ”
    [동포투데이]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을 맞은 10일 특별연설을 통해 “지금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다”며 “우리의 목표는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방역시스템을 더욱 보강해 세계를 선도하는 확실한 ‘방역 1등 국가’가 되겠다”며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해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고, 전문인력을 확충하고 지역체계도 구축해 지역의 부족한 역량을 보완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국회가 동의한다면 보건복지부에 복수차관제를 도입하고 감염병 전문병원과 국립 감염병연구소 설립도 추진하겠다”며 국회의 신속한 협조를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방역과 마찬가지로 경제위기 극복도 국민이 함께해 주신다면 성공할 수 있다”며 “남은 임기 동안 국민과 함께 국난 극복에 매진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를위해 문 대통령 ▲선도형 경제를 통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 개척 ▲고용보험 적용의 획기적 확대 및 국민취업지원제도 시행을 통한 고용안전망 확충 ▲일자리 창출을 위한 ‘한국판 뉴딜’ 추진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연대·협력의 국제질서 선도 등 4대 과제를 제시했다. 특히 고용안정망 확대와 관련해서는 “모든 취업자가 고용보험 혜택을 받는 ‘전국민 고용보험시대’의 기초를 놓겠다”며 “자영업자들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위기를 가장 빠르게 극복한 나라가 되겠다”며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서겠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 취임 3주년 특별연설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취임 3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3년, 촛불의 염원을 항상 가슴에 담고 국정을 운영했습니다. 공정과 정의, 혁신과 포용, 평화와 번영의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습니다. 어려울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국민들께서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국민들께서 보내주신 한결같은 지지와 성원에 한량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남은 2년, 더욱 단단한 각오로 국정에 임하겠습니다. 임기를 마치는 그 순간까지, 국민과 역사가 부여한 사명을 위해 무거운 책임감으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 전세계적인 격변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세계 경제를 전례 없는 위기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각국의 경제사회 구조는 물론 국제질서까지 거대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정면으로 부딪쳐 돌파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는 자를 돕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비상한 각오와 용기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겠습니다.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습니다. ‘기회는 찾는 자의 몫이고,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국민과 함께 지혜롭게 길을 찾고 담대하게 도전하겠습니다. 지금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겠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입니다. 우리가 염원했던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이미 우리는 방역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K방역은 세계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과 국민적 자부심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습니다. 방역당국과 의료진의 헌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자발적 참여,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해준 국민의 힘입니다. 우리는 국민의 힘으로 방역전선을 견고히 사수했고,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이겨왔습니다. 국내 상황이 안정화 단계에 들어서며 방역과 일상이 공존하는 새로운 일상으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이번 유흥시설 집단감염은, 비록 안정화 단계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밀집하는 밀폐된 공간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더욱 경계하며 방역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두려워 제자리에 멈춰설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방역체계는 바이러스 확산을 충분히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집단감염이 발생한다 해도 우리는 신속히 대응할 방역·의료체계와 경험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2차 대유행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일상 복귀를 마냥 늦출 수 없습니다. 방역이 경제의 출발점이지만, 방역이 먹고사는 문제까지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정부는 장기전의 자세로 코로나19에 빈틈없이 대처하겠습니다. 국민들께서도 일상생활로 복귀하면서도 끝까지 방역수칙을 잘 지켜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방역과 일상이 함께하는 새로운 도전에 성공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들께서 성숙한 역량을 다시 한 번 발휘해 주신다면, 일상으로의 전환도 세계의 모범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방역과 보건의료체계가 세계 최고 수준임을 확인했습니다. 사스와 메르스 때의 경험을 살려 대응 체계를 발전시켜온 결과입니다. 방역시스템을 더욱 보강하여 세계를 선도하는 확실한 ‘방역 1등 국가’가 되겠습니다.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여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겠습니다. 전문인력을 확충하고 지역체계도 구축하여 지역의 부족한 역량을 보완하겠습니다. 국회가 동의한다면 보건복지부에 복수차관제도 도입하고자 합니다. 감염병 전문병원과 국립 감염병연구소 설립도 추진하겠습니다. 공공보건의료 체계와 감염병 대응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하여 보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전문가들이 올해 가을 또는 겨울로 예상하는 2차 대유행에 대비하려면 매우 시급한 과제입니다. 국회의 신속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문제는 경제입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100년 전 대공황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는 멈춰 섰습니다. 공장은 생산을 중단했고, 실직자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국경이 봉쇄되고 교류가 차단되며,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되고 세계 교역은 급감하고 있습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에 직면했습니다. 바닥이 어디인지, 끝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우리 경제가 입는 피해도 실로 막심합니다. 4월 수출이 급감하면서 99개월 만에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관광·여행, 음식·숙박업에서 시작된 서비스업 위축이 제조업의 위기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튼튼했던 기간산업이나 주력 기업들마저도 어려움이 가중되며 긴급하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고용 충격도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실직의 공포는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일용직을 넘어 정규직과 중견기업, 대기업 종사자들까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경제 전시상황’입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계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부는 경제위기 극복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벼랑 끝에 선 국민의 손을 잡겠습니다. 국민의 삶과 일자리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정부는 파격적이며 신속한 비상 처방으로 GDP의 10%가 넘는 245조 원을 기업 지원과 일자리 대책에 투입했습니다. 1, 2차 추경에 이어 3차 추경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더한 충격에도 단단히 대비하겠습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자원과 정책을 총동원하겠습니다. 다른 나라들보다 빠른 코로나 사태의 안정과 새로운 일상으로의 전환을 경제 활력을 높이는 전기로 삼겠습니다. 소비 진작과 관광 회복의 시간표를 앞당기고, 투자 활성화에 적극 나서겠습니다. 제조업이 활력을 되찾도록 지원을 강화하며, 위축된 지역경제를 부양하는 데에도 신속히 추진하겠습니다. 국민들께서도 경제의 주체로서 방역수칙을 지키면서, 소비와 경제활동에 활발히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방역과 마찬가지로 경제위기 극복도 국민이 함께해 주신다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위기 극복의 DNA를 가진 우리 국민을 믿습니다. 정부는 국민과 함께 경제위기 극복에서도 세계의 모범이 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코로나 이후의 세계 경제 질서는 결코 장미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이러스 앞에서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이 얼마나 취약한지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현실은 매우 엄중합니다. 각자도생의 자국중심주의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 경제를 발전시켜온 세계화 속의 분업 질서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개방과 협력을 통해 성장해온 우리 경제에도 매우 중대한 도전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미래를 선제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남은 임기 동안, 국민과 함께 국난 극복에 매진하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길을 열어 나가겠습니다. 첫째, 선도형 경제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개척하겠습니다. 우리는 ICT 분야에서 우수한 인프라와 세계 1위의 경쟁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이오 분야의 경쟁력과 가능성도 확인되었습니다. 비대면 의료서비스와 온라인 교육, 온라인 거래, 방역과 바이오산업 등 포스트 코로나 산업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결합하여 디지털 경제를 선도해 나갈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혁신 벤처와 스타트업이 주력이 되어 세계를 선도하는 ‘디지털 강국’으로 대한민국을 도약시키겠습니다. 시스템반도체, 바이오헬스, 미래차 등 3대 신성장 산업을 더욱 강력히 육성하여 미래먹거리를 창출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투명한 생산기지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이제 값싼 인건비보다 혁신역량과 안심 투자처를 선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겐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국 기업의 유턴은 물론 해외의 첨단산업과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과감한 전략을 추진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첨단산업의 세계공장’이 되어 세계의 산업지도를 바꾸겠습니다. 둘째, 고용보험 적용을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시행하여 우리의 고용안전망 수준을 한 단계 높이겠습니다. 실직과 생계 위협으로부터 국민 모두의 삶을 지키겠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위기를 겪을 때, 복지를 확대하고 안전망을 강화해 왔습니다. 미국은 대공황을 거치며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마련하였고,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를 건너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앞당겨 도입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위기는 여전히 취약한 우리의 고용안전망을 더욱 튼튼히 구축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취업자가 고용보험 혜택을 받는 ‘전국민 고용보험시대’의 기초를 놓겠습니다. 아직도 가입해 있지 않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보험 가입을 조속히 추진하고,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예술인 등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빠르게 해소해 나가겠습니다. 자영업자들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고용안전망 확충은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위해서도 필요한 과제입니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여 고용보험 대상을 단계적으로 넓혀 나가겠습니다. 국회의 공감과 협조가 매우 중요합니다. 입법을 통해 뒷받침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또한, 한국형 실업부조 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를 조속히 시행하겠습니다. 국민취업지원제도는 저소득층, 청년, 영세 자영업자 등에 대해 직업 훈련 등 맞춤형 취업을 지원하며 구직촉진 수당 등 소득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고용보험이 1차 고용안전망이라면, 국민취업지원제도는 2차 고용안전망입니다. 취업을 준비하거나 장기 실직 상태의 국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고용안전망입니다. 경사노위 합의를 거쳐 국회에 이미 법이 제출되어 있습니다. 국회가 조속히 처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셋째, 일자리 창출을 위한 ‘한국판 뉴딜’을 국가프로젝트로 추진하겠습니다.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겠습니다. 한국판 뉴딜은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하는 미래 선점투자입니다. 5G 인프라 조기 구축과 데이터를 수집, 축적, 활용하는 데이터 인프라 구축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겠습니다. 의료, 교육, 유통 등 비대면 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도시와 산단, 도로와 교통망, 노후 SOC 등 국가기반시설에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하여 스마트화하는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도 적극 전개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정보보호는 물론 의료와 교육의 공공성 확보라는 중요한 가치가 충분히 지켜질 수 있도록 조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공공투자를 확대하고 민간협력을 강화하겠습니다. 위기극복과 함께 선도형 경제로 전환하는 발판을 마련하겠습니다. 대담하고 창의적인 기획과 신속 과감한 집행으로 양질의 새로운 일자리를 적극 만들어내겠습니다. 넷째,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연대와 협력의 국제질서를 선도해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방역에서 보여준 개방, 투명, 민주의 원칙과 창의적 방식은 세계적 성공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봉사하고 기부하는 행동, 연대하고 협력하는 정신은 대한민국의 국격이 되고 국제적인 리더십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호평은 우리의 외교 지평을 크게 넓혔습니다. 우리나라가 국제협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G20, 아세안+3 등 다자무대에서도 대한민국의 위상이 몰라보게 높아졌습니다. 이 기회를 적극 살려 나가겠습니다. 성공적 방역에 기초하여,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중심에 놓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제협력을 선도해 나가겠습니다. 오늘날의 안보는 전통적인 군사안보에서 재난, 질병, 환경문제 등 안전을 위협하는 모든 요인에 대처하는 ‘인간안보’로 확장되었습니다. 모든 국가가 연대와 협력으로 힘을 모아야 대처할 수 있습니다. 동북아와 아세안, 전세계가 연대와 협력으로 인간안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가도록 주도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남과 북도 인간안보에 협력하여 하나의 생명공동체가 되고 평화공동체로 나아가길 희망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바이러스와 힘겨운 전쟁을 치르며 국민들은 대한민국을 재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따르고 싶었던 나라들이 우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표준이 되고 우리가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 스스로 만든 위대함입니다. 양보하고 배려했고, 연대하고 협력했습니다. 위기의 순간 더욱 강해졌습니다. 국민이 위대했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위기는 끝나지 않았고, 더 큰 도전이 남아 있습니다. 정부는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겠습니다. 위기를 가장 빠르게 극복한 나라가 되겠습니다. 세계의 모범이 되고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서겠습니다. 임기 마지막까지 위대한 국민과 함께 담대하게 나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5월 10일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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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세 조선족 대학생의 빈곤해탈부축 이야기
    [동포투데이]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에 위치해 있는 로묘촌에는‘김성휘, 정문걸과 김명길 등 3명의 90후’ 명문대 졸업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공청단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에서 파견한 촌주재 간부이다. 로묘촌은 이 지난날의 극빈빈곤현에서 가장 편벽한 촌 가운데 하나였다. 촌의 청장년 노동력이 대다수 일하러 외지로 나가다보니 남은 노인들은 함께 합작사를 만들기도 힘들었다. “일부 빈곤호들은 몇 달 동안 수입이 없었다.” 김성휘는 갓 촌에 왔을 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촌의 면모를 개선하고 빈곤해탈부축산업을 기획했다… 하지만 세 조선족 젊은이 앞에 놓인 첫 번째 난제는 촌에서 통용되는 산동방언을 알아듣는 것이었다. 촌민들은 토박이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졸업한지도 얼마 안 되는 그들을 ‘업신여겼는데’ “우리 집 애보다 어린데 촌에 와서 뭘 알겠는가?”라고 했다. 울퉁불퉁한 온돌에서 세 사람은 자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높은 학력으로 대도시에서 ‘잘 나갈 수’ 있었는데 빈곤촌에 와서 벽에 부딪칠 줄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제대로 빈곤해탈부축을 하려면 촌민들의 사상 사업을 잘해야 한다.” 대학생 3명은 빈곤호들을 위해 정원을 쓸어주고 장작을 패고 물건을 대신 구매해주면서 자신들을 촌의 집사로 만들었다. 촌의 빈곤해탈부축산업을 계획하면서 식용균 항목을 발전시키기로 확정한 후 김명길은 여러 지역을 뛰어다니면서 농업기술일군을 모셔다가 촌민들에게 재배지식을 보급했다. 촌민들을 크고 작은 일에 부딪칠 때마다 그들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직업을 잘못 선택했다’고 놀림 받던 김성휘는 절반 ‘토박이말 전문가’가 되였다. 2015년 말, 로묘촌의 빈곤발생률은 45.8%였는데 현재 서류카드작성 빈곤인구가 전부 빈곤에서 탈출했다. 정문걸이 촌주재사업을 마친 다음 김성휘, 김명길은 중점 ‘관심’ 대상이 되였다. 올해 4월, 왕청현이 정식으로 빈곤 모자를 벗은 후 촌민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축행사가 아니라 두 ‘김 씨 젊은이’가 시내로 돌아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빈곤탈출가구 정학민은 그들을 찾아 “가지 마오. 내가 촌주임을 찾아 호적도 만들어주고 색시도 찾아주겠소.”라고 말했다. 평소에 김성휘는 촌 입구의 다리에 서서 동서 양쪽의 신촌과 로촌을 비교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그들이 분투한 흔적이었다. 로묘촌의 미래에 대해 그는 아직도 많은 계획이 있다고 하면서 식용균항목을 더 크게, 더 우수하게 만들고 고속도로휴게소가 설립된 후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김성휘는 “청춘의 땀방울을 이 땅에 흘릴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중앙은 '농촌 진흥 건공(建功)행동 전개에 관한 의견'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학생 당원 혹은 공청단원의 귀향을 장려해 최소 1만 명을 농촌 기층간부로 키운다는 계획도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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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0
  • 왕청현에서의 토비숙청- 마희산 비적집단의 괴멸
    ●이강춘 1945년 9월, 마희산은 왕충림, 대청해, 마희귀, 리금희 등과 함께 마을과 삼림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대고 왕청현 춘양향 우권구에서 치안대를 조직하고 10월까지 대오를 400여명으로 확대하였다. 이 때 마희산은 국간경과 단신민을 국민당 목단강시당부 훈련과의 과장인 강학용한테 파견하였다. 강학용은 치안대를 받아들이고 당장에서 마희산을 대장으로, 왕충림을 부대장으로, 국간경을 참모장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을 써주었다. 1945년 12월, 국민당 동북정진군 사령 정운봉은 또 마희산대오를 국민당 동북정진군으로 개편하였다. 마희산은 자칭 사령이 되고 국간경은 참모장이 되였으며 그 아래에 3개 퇀, 8개 처, 2개 독립영, 1개 특종련, 1개 박격포련, 1개 철도공병기관차대를 두었는데 병력 도합 1,000여명이 되였다. 이와 동시에 녕안, 왕청, 해림 일대의 크고 작은 토비무리들은 모두 마희산의 수하에 귀속 되였는데 5,000여명이나 되였다. 마희산 비적단은 구성된 그 날부터 제멋대로 날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저질렀다. 마희산은 총과 탄알을 얻기 위해 장사인을 데리고 석두하자에 가서 송촌장을 쏴죽이고 권총 1자루와 보총 8자루를 탈취해갔다. 1946년 1월, 마희산 비적단은 기타 비적단과 결탁하여 아미달에서 우리 군 부상병 20명을 수색해냈다. 그중 군관 2명이 있다는 걸 안 마희산은 국간경과 공모한 끝에 사령부에 압송한다는 구실을 대고 도중에 2명 군관을 총살하게 하였다. 그 해 3월에 마희산 비적단은 라자구에서 신화촌에 도망쳐와서 깊이 잠든 조경묵이네 한집식구 세 사람을 쏴 죽였으며 그 이튿날 철퇴할 때 소와 말 84필과 짐마차 30여대를 약탈하고 50여명 군중을 붙잡아갔다. 마희산은 569명 군민을 죽였으며 현금 1억여원(당시 화폐), 입쌀 16만 3,500그람, 소와 말 312필, 닭 1,800여 마리, 이부자리와 옷 등속 1,380여벌을 약탈해갔다. 1946년 2월, 연변경비부대와 왕청보안퇀에서는 목단강군구 산하의 대부분 부대의 배합 하에 마희산 비적단에 대한 공격을 들이댔다. 2월 15일 밤, 아군 주력부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마희산의 사령부가 있는 록도를 포위했다. 여기에 1,000여명이나 되는 토비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질 때를 기다려 아군부대는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20분간의 격전을 벌린 끝에 비적들의 병영을 점령하였으며 전투 중에 정진군 총사령 정운봉을 사로잡았다. 이튿날 아군은 마희산 비적단의 군수창고가 있는 로묘를 포위하고 리금희, 대청해를 두목으로 한 비적 200여명을 생포하였다. 뒤를 이어 비적단이 차지하고 있던 춘양, 락타산, 천교령 등지도 점령하였다. 마희산은 묘령이 함락되자 패잔병 500여명을 이끌고 라자구 일대로 창황히 꽁무니를 빼다가 쌍마가, 서란, 천강 등지를 거쳐 길림에 도망쳐가서는 국민당에 의지해버렸다. 그 후 그 자는 아군에 의해 포로 되였다가 1951년 2월 20일에 녕안에서 총살당했다. 왕경운 비적단의 괴멸 1945년 9월, 왕청현 대흥구에서 위만 경찰 이였던 왕경운과 지주 왕극귀 등이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의로 낙후한 군중 40여명을 농락하여 보안대를 조직하고 왕경운이 대장을 맡았다. 대부는 대흥구에 두었다. 그 해 10월 15일, 일본 특무 요옥령, 왕귀, 상유신 등이 암암리에 국민당 지하건군 조직의 사촉을 받고 일제와 위만주국을 위해 복무하던 자들을 긁어모으고 청년들을 농락하여 보안대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천교령에 제1퇀, 묘령에 제2퇀, 대흥구에 제3퇀을 두었다. 하마탕, 계관라즈, 묘령 등지의 토비대오가 600여명으로 확대되자 ‘동북 제2정진군 대흥구사령부’를 세우고 대흥구 하북툰(후에 하남으로 옮김)에 사령부를 두었다. 요옥령이 사령으로 되고 아래에 8개 처, 1개 퇀을 두었다. 참모처장에 왕귀, 군수처장에 우도일, 집사처장에 왕흥주, 부관처장에 관춘양이였고 퇀장에 왕경운, 부퇀장에 왕선주, 부관에 정계림이였다. 아래에 3개 영을 두고 영 아래에 11개 련을 두었다. 퇀부는 대흥구에 설치하고 제1영은 묘령에, 제2영은 계관라즈에, 제3영은 하마탕에 주둔시키고 련은 여러 촌에 널려있었다.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 등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1948년 8월, 토비 부련장 마규 등 10여명이 동양에 가서 백성들의 집을 약탈하다가 김태길 일가 4명을 죽였고 9월에 류록, 염청산이 서양툰에 가서 최창익을 보고 식량을 내라고 하였으나 내지 않으니 당장에서 죽여 버렸다. 10월에 토비영장 류록이 13명을 데리고 아미달에 가서 생아편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1946년 1월 13일, 보안대가 영벽, 묘령에서 토비들과 전투하였는데 46명이 전사하였고 2월에 토비들은 친척방문을 온 군중을 팔로군의 밀정이라고 총살하였으며 8월에 후하 상촌에서 툰장 김명창을 붙잡아다 일본 군도로 찔러 죽였다. 이에 왕청보안퇀에서는 대흥구를 공격하였다. 왕경운과 그의 비적단의 제1영, 제2영은 연변경비부대에 귀순하여 재편성되고 제3영은 마희상에게 붙었고 일부분은 길림으로 가 국민당에 붙었다. 요옥령은 우라가전투에서 아군에 포로 되여 처형당했다. 안진유 토비대의 괴멸 1945년 9월 안진유는 특무 장성기, 우헌주, 위만 촌장 류방무와 결탁하여 지방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 라자구 일대에서600여명을 긁어모아 자위대를 조직한 후 대대장이 되고 장성기가 부대대장이 되였다. 대대 아래에 3개 중대를 두었다. 얼마 후 또 준아신을 우두머리로 한 장가점의 토비 100여명을 받아들였다. 1946년 10월, 목단강에 있는 국민당 건군조직에서 연락원 진만기, 주학무를 라자구에 파견하여 ‘자위대’를 받아들이고 ‘국민당 동북정진군 제6사 제16지대 제2려 제5퇀’으로 편성하였으며 안진유를 퇀장으로, 우헌주를 부퇀장으로, 류방무를 부퇀장 겸 구장으로 위임하였다. 이 대오는 700여명으로서 산포 1문, 박격포 3문, 평사포 4문, 경 중 기관총 29정, 적탄통 30여개, 보총 600여자루를 가지고 있었다. 중공왕청현위에서는 이 토비들을 소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1946년 3월 3일, 보안퇀을 라자구에 보내어 토비들이 미처 손 쓸 새 없이 족쳤다. 영장 김문우가 120여명을 데리고 화전현으로 도망친 외에 나머지는 전부 항복하였다. 안진유는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 황급히 류방무 등 비적을 데리고 로흑산으로 도망쳐 오삼호 토비대에 가담했다. 1946년 4월 7일 이른 새벽, 아군이 자는 틈을 타서 안진유는 오삼호의 500명 병력과 7문 대포의 배합 하에 라자구를 돌연 습격하였다. 우리 보안퇀 제1영은 미처 막을 사이 없이 흩어지고 말았으며 소영장은 전투 중에서 희생되고 대부분이 전사하였거나 포로 되였다. 토비들은 마을에 들어가 제멋대로 조선민족을 죽였고 조선민족 여성을 강간하였으며 조선민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이날 오전에만 64명 조선민족을 죽였다. 그리고 조선민족 200여명을 붙잡아다가 죽이려 하였으나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족 백성들이 거듭 사정을 해서야 전부 내놓았다. 그 해 4월 14일, 보안퇀은 안진유 토비무리에 맹렬한 진공을 들이대여 라자구를 점령하였다. 기지를 잃어버린 안진유는 일부 토비들을 거느리고 다시 호흑산으로 도망쳤다. 4월 20일, 안진유는 또 오삼호와 결탁하여 라자구를 진공하였다. 아군은 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잠시 라자구에서 물러나왔다가 다시 우세한 병력으로 라자구의 적을 포위 공격했다. 안진유와 잔여토비들은 또 로흑산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군은 바싹 추격하여 5월 5일, 3호 비행장에서 오삼호를 쏴죽이고 로흑산에서 안진유를 부상(후에 병원에서 죽음)입혔다. 류방무는 토지개혁 때 붙잡혀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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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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