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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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년 체험활동 안전지도사 자격증 인기
    [동포투데이] 지난해 세월호 참사와 판교 환풍구 사고, 강화도 캠핑장 사고 등으로 안전불감증의 경각심이 증대되는 가운데 청소년 체험활동 안전 관련 자격증 과정이 개설돼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2016년 중학교 자유학기제 전면 시행, 청소년 수련활동, 학교 수학여행 등으로 안전요원 자격자들이 턱없이 부족해 청소년 안전 관련 자격증이 인기를 얻고 있다. 교육그룹 더필드(훈련본부장 이희선)는 재난안전처 인증 '체험활동안전지도사'와 '청소년안전지도사' 1-2급 자격증 과정을 개설하고 참가자를 모집중이다. 안전교육은 16시간 과정으로 소정의 시험을 거쳐 60점 이상이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주요 커리큘럼은 ▲청소년의 특성 및 심리의 이해 ▲청소년 상담기법 ▲청소년안전지도자론 ▲학교생활, 수학여행, 레포츠, 물놀이, 스키, 갯벌 등 활동에서의 안전 넘버원 ▲기본 인명구조술 ▲내·외과 손상 시 응급처치 ▲생활 속의 응급처치 ▲종합구조실습 및 체험관 실습 ▲체험학습 또는 수학여행 시 효율적인 인솔방법 ▲청소년 단체 생활 시 지시, 보고, 학생 인솔, 통솔방법 등으로 구성됐다. 주요 강사진은 인명구조 전문 교수진, 대한적십자사 인명구조 강사, 소방학교 교수(전), 산악전문가, 수상안전 전문가 등이 이론교육보다는 10년 이상 실제 현장에서 습득한 사례위주로 교육이 진행된다. 앞서 교육그룹 더필드는 이마트 문화센터 학모모 안전교육, 늘푸른초등학교 학부모 대상 안전교육, 전국 10여 개 오지초등학교 수상안전 교육, 경기복지재단 지역사회서비스 종사자 안전교육, 인천광역시협회 중증장애인 대상 심폐소생술 교육, 강남구 자원봉사센터 비상탈출 안전교육, 대구교대 재학생 대상 재난안전 교육 등을 진행한 바 있다.'체험활동안전지도사'와 '청소년안전지도사' 자격증 과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교육그룹 더필드 홈페이지 ( www.thefield.co.kr ) 또는 전화 (02-2208-0116)으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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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1
  • 고의로 8천여만원 임금 체불한 사업주 구속
    [동포투데이] 8월 19일, 고용노동부 안양지청(지청장 이철우)은 경기 안양시와 수원시에서 통신상품판매업을 운영하면서 근로자 19명의 임금 8천여만원을 체불한 사업주 송모씨(35세)를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구속된 송모씨는 체불임금을 해결하지 않은채 다른 장소에서 제2, 제3의 사업장을 새롭게 설립하여 통신상품 판매업을 운영하였다. 이에 피해근로자들이 체불금품 해결을 요구하며 진정을 제기하였으나 제2, 제3의 사업장은 자신이 운영한 사업장이 아니고, 진정인들은 자신이 고용한 직원들이 아니라며 체불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수사결과, 송모씨가 제2 사업장의 임대장소를 본인 스스로 알아보고 계약하였고, 제2, 제3 사업장으로 사업장 이전시에 본인이 스스로 차량을 운전하여 이사짐을 날랐다는 사실과 직원들과 문자로 업무지시를 하는 등 실질적인 사용자로서 사업을 운영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또한 송모씨는 직원들에게 사업장의 대표는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고 진술하라고 하는 등 증거를 인멸하려 하였고, 적극적인 체불청산 노력을 하지 아니하고 체당금 제도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올해 2번째로 체불사업주를 구속한 고용노동부 안양지청(지청장 이철우)은 구속된 송모씨는 “수사결과 피의사실에 대한 혐의가 상당한데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혐의를 부인하고, 체불금품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하지않고 자기는 사용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등 죄질이 불량하고, 제2,제3의 사업체를 편법 운영한 것처럼 제4, 제5 사업장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농후하여 구속수사를 하게 되었다”며, “앞으로도 고의적으로 임금을 체불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혐의를 부인하거나 체당금제도에 의존하여 유사사업장을 설립, 폐업하면서 체불을 발생시키는 악덕 체불사업주에 대해서는 체불액수와 관계없이 끝까지 추적하여 엄정 대응해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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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0
  • 北, 한국으로 포탄 발사 … 인근 마을 주민 대피
    [동포투데이] 한국 국방부는 20일, 이날 오후 3시 50분경, 북한이 포탄 1발을 한국 측에 발사했다고 발표했다. 경기도 부근을 향해 발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군은 20일, 오후 5시 4분 북한의 포탄 발사지점으로 보이는 지역에 155mm 포로 36발의 대응 사격을 가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특히 횡성, 연천, 파주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이 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의 포탄 도발과 관련해 오후 5시 경 김관진 안보실장으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고 5시 10분에 긴급 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오후 6시부터 40여 분 간 NSC 상임위원회를 직접 주재하고 최윤희 합참의장과 한민구 국방부장관, 그리고 안보실장으로부터 차례로 사건 개요와 우리 군의 대응에 대한 보고를 받고 북한 도발에 대해서 우리는 단호하게 대응하고 우리 군은 만반의 대비태세를 유지하는 동시에 주민의 안전과 보호에도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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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0
  • 박 대통령, “中 전승절 행사 참석”…열병식 참석 미정
    [동포투데이]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달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전승절) 기념 행사에 참석키로 했다. 주철기 외교안보수석은 20일 브리핑을 통해 “박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초청으로 9월 3일 베이징에서 개최될 예정인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9월 2~4일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주 수석은 “이번 중국 방문 시 박 대통령은 9월 3일 오전 기념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며 “구체적 일정은 현재 중국 측과 협의 중에 있으며 적당한 시기에 설명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주 수석은 이어 “박 대통령은 9월 3일 오후 상하이를 방문해 9월 4일 개최되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식에 참석할 예정으로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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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0
  • ‘실크로드 경주 2015’ 개막과 함께 경주 솔거미술관 21일 개관
    ↑이스탄불 홍보관 영상관.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실크로드 경주 2015’의 개막과 함께 경주 솔거미술관이 21일 개관한다. 개관식은 21일 오후 5시30분 경주엑스포 공원 내 솔거미술관에서 열린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소산 박대성 화백의 기증작품 및 지역 미술인들의 작품을 활용하여 솔거미술관 개관 기념 특별전을 준비하고 시도민이 함께하는 개관식을 개최한다는 계획이다. 개관식 후에는 특별공연으로 ‘새가 되어 바라보다’라는 신디사이즈 연주 공연이 이어질 예정이며, 총감독인 윤범모 교수와 박선영 경주미협지부장의 안내로 전시회 관람도 이루어진다. 솔거미술관 개관 기념 특별전은 소산 박대성 화백의 ‘기증작품전’ 과 최신작 위주의 ‘붓끝 아래의 남산’ 및 경주 출신 작품을 모은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이라는 주제로 열릴 계획이다. 이를 통해 ‘실크로드 경주 2015’를 찾는 관람객들이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됐다. ↑2014 이스탄불 홍보관 터키 전통 예술품을 카메라에 담는 관람객 경주 솔거미술관에는 소산 박대성 화백이 830점의 소장품을 기증했다. 작품은 회화 435점, 글씨 182점, 작품 활동을 위해 소장하고 있던 먹, 벼루 등 213점이다. 박화백은 ‘2013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 초대돼 한국화의 아름다움을 전세계에 알려 찬사를 받기도 했다. 경주엑스포 이동우 사무총장은 “엑스포 공원 내에 솔거미술관이 들어섬으로써 볼거리와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며 “많은 분들이 솔거미술관을 찾아 수준높은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경주 솔거미술관은 경주의 첫 공립미술관으로 예술인들의 창작활동과 지역미술의 활성화를 위한 장을 마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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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0
  • 2015 대한민국 신지식인 인증 및 시상식 개최
    [동포투데이] 대한민국신지식인총연합회는 지난 18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지식인 인증 및 시상식을 개최했다. 김병찬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각계 지도자들이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경영·교육·근로·농업·문화예술·특허·공무원·중소기업 등 15개 분야 71명이 엄정한 심사를 통해 신지식인으로 인증을 받았다. 신지식이라는 용어는 1968년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저서 '단절의 시대'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1999년 2월부터 신지식인을 선발하였다. ↑최세규총재와 이광재 박사가 수상 후 촬영하고 있다. 사진 제공 강태수 신지식인은 학력에 상관없이 지식을 활용하여 능동적으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기존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상으로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는 사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날 수상자로는 국내 최초로 웃음치료분야의 박사 1호인 이광재 목사(사단법인 국제레크리에이션협회장)와 백석대 이경호 교수 등이 수상했다. 축하공연으로는 가수 배기성, KBS 개그콘서트의 도찐개찐이 출연했다. 또한 한국 신지식인상을 두 번 수상한 함현진마술사(한국교육마술협회장)는 화려한 비둘기마술과 국내 유일의 와인마술을 선보였다. 와인마술이란 “1879 와인병”을 계속 만들어 내는 독특한 마술로 축하해 주러 온 하객과 수상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박수를 자아냈다. 끝으로 신문지마술을 통한 신지식인의 자부심을 높이는 스토리텔링 공연으로 화려한 막을 장식했다. ↑박희영회장과 함현진마술사가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 강태수) 한국신지식인엽합는 함현진마술사의 재능기부와 매직트리즈를 창안한 공로를 인정해 표창장을 수여했다. 박희영 회장(대한민국신지식인총연합회)은 “신지식인, 이 하나의 단어에는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변화하는 ‘새로움’과, 대한민국과 인류의 미래를 밝힐 ‘지식’, 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로써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견인해 온 것이 끊임없이 지혜와 지식을 찾아 현재를 개척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과거를 통해 배워왔다. 이제 오늘 인증받는 신지식인이 그 ‘사람’임을 자각한다”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대한민국신지식인총연합회는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 부응하는 새로운 신지식인 인간상을 정립하고 다양한 지식 정보의 공유를 통하여 생산력 향상 및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고자 진행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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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0
  • 2015 두만강 · 백의동포 스포츠 대축제 원만히 결속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70년 및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동북조선족축구 연의회가 주최, 도문시 인민정부의 후원으로 된 2015 제1회 (티나론컵) 두만강•백의동포스포츠 대축제가 8월 19일 오후, 도문시 인민경기장에서 원만히 막을 내렸다. 지난 17일 개막된 2015 중국•도문시 두만강 대축제의 일환으로 되는 백의동포 스포츠 대축제는 조선족민간단체 스포츠행사 중 규모가 가장 큰 축제의 장으로 내몽고와 청도,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축구대표단을 파견, 소학교조의 6개 대표팀, 초중조의 3개 대표팀, 50대조의 8개 대표팀, 60대조의 5개 대표팀이 참가하고 축구외 10개의 남녀 배구대표단도 참가하여 자웅을 겨루었다. 경기결과 소학교조에서 연길시 중앙소학교팀이 우승을, 훈춘시 제4소학교팀이 2등을, 도문시 제2소학교팀이 3등을 차지, 초중조에서는 도문시 제5중학교가 우승을, 왕청현 신흥중학교가 2등을 훈춘시 제6중학교가 3등을 차지했다. 50대조에서는 연길장수축구클럽이 우승을, 길림시축구클럽이 2등을, 연길시선우축구클럽이 3등을 차지, 65세 이상조에서는 한국 서울OB축구클럽이 우승을, 연길시 흰구름축구클럽이 2등을, 청도축구클럽이 3등을 차지하였다. 이번 경기dml 최고년령자인 올해 84세에 나는 일본축구클럽의 히라이 요시로선생, 나까가와 나오유끼(82세), 한국 서울OB축구클럽 김중배(80세)선생이 장수컵을 받아안았다. 이 외 남자배구경기에서는 연길 흰구름배구팀이 우승을, 훈춘시 배구팀이 2등을, 도문시 배구팀이 3등을 차지, 여자배구에서는 도문시 배구팀이 우승을, 길림시 배구팀이 2등을, 연길시 공원가 배구팀이 3등을 차지하였다.
    • 스포츠
    2015-08-20
  • 고속철은 연변의 신성장 동력
    9월 30일부터 시작되는 고속철개통으로 연변의 전반 사회경제질서에 새로운 변화가 일면서 연변은 고속철경제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8-19
  • [김혁 칼럼] 백포(白圃) 서일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일전 북경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가 기획한 인물평전시리즈의 일환으로 “백포 서일장군”이 출간되었다. 리광인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부연구원과 소설가 김송죽의 공저로 40만자 475쪽 분량으로 된 책은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총재이고 종교지도자, 사상가인 서일장군의 일대기를14 편에 나누어 기술하였다. 독자들은 인물전을 통해 수하장령들이었던 김좌진이나 홍범도, 이범석과 같은 인물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서일장군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고 잘못 기록되었거나 자기중심적 기술과 과대 서술되었던 역사 사실과 인물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2 교육자, 종교인, 언론인이기도 한 서일선생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서일선생은 1881년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포(白圃)이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함일(鏡城咸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하여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气)를 살리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한 나날의 련속이었다. 스물 다섯에 을사늑약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해야만 했다. 서일은 고향의 암담한 현실에 통분해했고 반일투쟁의 새로운 모색으로 고심을 거듭했다. 당시 반일지사들은 만주로 망명했고 만주지역에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1세때인 1911년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북간도 왕청현으로 떠났다. 그는 왕청 덕원리에서 물밀 듯 이주해오는 조선인자녀들을 가르치며 민족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 붙여 주었다. 1911년 서일은 홍암(弘岩) 나철(罗喆) 대종사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 그후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귀의했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민족기원 신화에서 비롯되였으며 교리에 민족의 정통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구국일념으로 불탔던 라철종사는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종지에서 대종교를 중광하였다. 서일이 왕청현 덕원리에 와서 자리잡을 때는 대종교가 화룡현 청호에 총본사를 두고 그 뿌리를 각 곳에 내리기 시작할 시기었다. 홍익인간의 리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바람세찬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등 독립군 지도자들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임시정부의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团)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었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1918년 서일은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39인 련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韩独立宣言书)”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강도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 “신국보” 등 신문을 발간했고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서일은 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의 모범을 보였고 나아가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수전병행(修战竝行)의 삶을 살았다. 급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언제나 대종교 깨달음의 상징인 단주(檀珠)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전한다. 1919년 7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서일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北路军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정규병력 1천5백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더럭 겁을 먹고 서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 이라는 보고서에는 그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군정서는 서대파구(西大坡沟)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 …그들의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鮮內地)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부사령관 김성, 참모장 라중소등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一下) 동원소집을 할수 있을 것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의 독립군 무장력량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들을 눈에 든 가시로 벼르던 조선총독부는 몇 달 간의 계획하에 대토벌을 준비한 끝에 수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일제는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미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연합토벌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육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강적이 박근해오자 그 예기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백두산 밀림으로 이행했다. 그러던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세기의 접전이 드디여 펼쳐졌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호상 배합하며 병력과 장비상 몇 갑절이나 우세한 일본 토벌군과 싸운 단병상접의 백열전이었다. 의복과 식량까지도 막대한 곤난으로 조성된 조건에서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어랑촌전투․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거쳐 일본군 1,200여명을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야말로 민족의 반일운동사상 가장 우렁찬 승전고를 울리고 눈부신 기념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청산리에서 승전고를 올린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밀산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 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 등 10개 부대는 전(全)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서일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이때 서일은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경제적 뒷받침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토비(土匪) 수 백명이 야간에 내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는 흑하사변(黑河事变)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밀산현 당벽진(当壁镇)에서 재기를 도모하던중 설상가상으로 8월 26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았다. 마지막 한 부분의 자그마한 력량마저 피바다에 쓰러졌고 발 붙이고 있던 마을과 백성들까지 참화를 당하였다. 이 치명적 타격은 서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궁지에 밀어 넣었다. 서일은 낙망하였고, 자기의 책임이 너무도 중하다는 자책으로 하여 환멸의 나락 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 28일 마을 뒤산으로 올랐다.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나서 대종교의 폐기법(废气法)으로 자결했다. 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3 서일 장군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었다가 1927년 봄에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으로 이장하였다.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의 외곽에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 한 장지가 그대로 있는데 그 주소로는 화룡시 청룡향 청호촌이다. 외곽의 작은 구릉우에 서일의 묘소가 대종교 제1대와 제2대 교주들인 나철, 김교헌 묘소와 함께 “삼종사 묘소”를 이루고 있다. 역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서일의 묘소를 찾아 보았다. 룡정에서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30여분간 달리니 드넓은 평강벌을 가슴에 품은 채 2백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청파호가 우리를 반겼다. 청파호 부근에서 무릎을 치는 수풀을 헤치고 작은 언덕을 올랐다.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언덕에 반쯤 묻힌 토굴이 보였다. 입구가 벽돌로 봉해진 이 토굴은 독립군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라고 한다. 지금도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렬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를 지나 좀 더 언덕을 오르니 드디여 삼종사묘소가 보였다. 묘역에는 중간에 나철선생이 그 좌우로 서일장군과 김교헌선생이 어깨를 나란히 한채 평강벌을 굽어보고 있었다. 묘소 앞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선생 신해지묘”, “대종교 종사 백포 서일 신해지장”, “대종교 종사 무원 김교헌 신해지상”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 화룡현 문화유물보호단위로 관리되고 있어 철책으로 둘러져 있는20여평 남짓한 묘역에는 “반일지사 무덤 (反日志士墓葬)”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있다. 1대교주 나철은 1916년 추석날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한 후 대종교 교인들은 제1대 교주 나철의 유언에 좇아 그의 유해를 화룡 청파호에 이장하고 1923년 11월 18일에 녕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제2대 교주 김교헌을 1924년 1월에 그의 유해를 역시 화룡 청파호에 옮기였다. 1989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촌 노인회에서 삼종사묘소를 수선하면서 잃어진 김교헌의 비석을 다시 세우니 대종교 삼종사묘소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뒤 1991년 9월 1일, 화룡시인민정부 공고로 되는 삼종사묘소—반일의사무덤이 화룡시 문물보호단위로 됨에 따라 삼종사묘소는 비로소 오늘의 모습으로 우리한테 나타난다. 이렇게 대종교의 선각자들이 당년에 일제와 처절한 사투를 펼쳤던 곳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서일은 탁월한 조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며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리론가였다. 특히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와 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렬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와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춘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도자였다. 41세에 자진순명(自尽殉命)한 그는 짧은 생애 가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 그의 묘소 앞에 섰노라니 민족위기의 관두에 선두에서 피를 토하듯 내지른 사자후(獅子吼)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하다. - “청우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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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9
  • [김혁 칼럼] 피서(避暑)의 방식
    에어콘이 고장났다. 하필이면 이 삼복더위에. 판매상과 연계해 고치려니 이핑계 저핑계 시종 찾아주질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 뜯어 가져가기도 번거롭고 해서 더위에 대처할 궁여지책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구식 선풍기를 꺼내 먼지를 닦고 다시 돌렸다. 개운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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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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