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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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공단에 꽃이 피어요
    2. 공단에 꽃이 피어요 김성호 연고동포 비자가 일년후이면 만기가 된다. 한국에 계속 체류할수 있는 재외동포 비자를 받기 위해 천안의 한 자동차부품공장에 취직을 하였다. 1월 말이라 많이 내린 흰눈이 땅위에 수북히 깔렸다. 이런 추위가 언제 지날까하며 무척 겨울이 지겨웠다. 천안 성거읍의 자그마한 공단의 길가에는 누가 오지가 아니랄가봐 드릅나무들이 앙상하게 자라고 있었다. 출근 첫날 나는 여섯시에 일어나 간밤에 내린 공장의 눈을 치우는 일을 도왔다. 작동하는 사출기의 소음과 녹아내리는 플라스틱제품의 매캐한 냄새가 공장안을 꽉 메웠다. 날씨가 추워 한사람당 전기난로 한 대씩 사용할수 있었다. 한국에서 흔한건 전기와 실장갑이였다. 한국에선 거의 대부분 주민들이 겨울철이면 전기로 난방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 국민의 소득수준에 견줘볼 때 전기요금은 많이 저렴했다. 또한 공장 도처에 성한 실장갑들이 버러져 있는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있을수 없는 광경이였다. 공단에는 동남아사람들이 많았다. 후에 나의 친구들이 된 스리랑카의 미트라세나씨, 다미가씨, 나르크씨 그리고 미얀마의 쪼우씨, 태국의 위칫씨 등은 생산팀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다. 미트라세나씨와 다미가씨는 스리랑카는 인도 남부의 섬나라이고 바다가 청정수여서 낚시하 는 최적지이고 병원과 학교는 전부 무료라고 하면서 자기나라야말로 제일 살기좋은 지상락원이라며 홍보를 아끼지않았다. 쪼우씨는 내가 마시는 자스민차가 떨어져 쩔쩔매는 것을 보고 미얀마차를 가져다주는 인정이 있는 젊은이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물건을 사달라는 심부름도 잘 부탁하는 스스럼없는 사람이여서 한편으로는 번거로우면서도 좋았다. 차를 즐겨마시는 나는 여러 가게를 찾아다니며 차를 몇번 샀으나 모두가 짝퉁이었다. 한국에도 주의하지 않다간 나처럼 짝퉁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할것이다. 한번은 커피도 짝퉁을 사서 못마시고 그냥 버려야 했다. 공단에는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동남아 사람들과 조선족들도 더러 있었다.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자동차는 더는 사치품이 아니고 그저 편리한 교통수단일뿐이였다. 하루 열시간이상 꼼짝 않고 서서 환한 전등불아래서 한손에 무거운 드릴을 쥐고 제품조립을 해야하였다. 새로 입사하여 분쇄실에서 일하는 이ㅇㅇㅇ씨는 처음에는 실한 몸집때문에 쭈크리고 앉아만 있어도 땀이 비오는듯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일은 우리가 다하고 땀은 네가 혼자서 흘린다고 하면서 한바탕 웃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의 손발이 부어 있었다. 일요일날 이ㅇㅇ씨를 데리고 경기도 송탄보건소로 데리고 가서 무료로 진단을 받고 약까지 공짜로 받았다. 그는 한국에 이런곳도 있느냐며 감탄했다. 송탄보건소는 한달에 두번씩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무료의료봉사를 하고 있어서 외국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었다. 이ㅇㅇ씨는 중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 부모님은 일찍이 젊은 나이에 병환으로 모두 돌아가시고 나어린 동생과 단둘이 세상에 남았다. 중학을 다니다 그만두고 부모를 대신하여 농사를 지어야만 하였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못했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이 쟁기보다 작은 네가 논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들 많이 했으나 악착스레 견뎌냈다고 한다.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랴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90년도에는 대련의 한국신발회사에 취직을 하였다. 그리고는 신발회사를 따라 산동 청도로 가서 몇년 하다가 복건성까지 내려갔다. 나중에는 부산 칸두칸등 산화 회사의 중국직원으로도 있었다. 공장 기숙사의 한 친구가 일요일마 다 서울에 사시는 어머니를 보러 가는 것을 힘들어해 하는 것을 본 이ㅇㅇ씨는 나라면 매일 찾아가겠다면서 자신의 어머니는 아직 미성년이었을 때 과부였던 외할머니가 시집가는 것이 싫어 오빠의 손을 잡고 단연히 가출해 한번도 외할머니를 다시 찾아가지 않았던 강인한 여성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직 장가를 안간 이ㅇㅇ씨에게도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가 있었다. 고향에 사랑을 나눈 처녀가 있었으나 십년전인가 가난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에 시집을 갔다. 그후 한국에 간 이ㅇㅇ씨는 동창생모임에 참석했다가 극적으로 그 여자를 만났다. 이미 한국인 남편과 별거중이었고 남편의 괴롭힘을 피할려고 전화번호를 수시로 바꾸고 거처도 자주 옮기고 있다는 사연에 이ㅇㅇ씨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였다. 이ㅇㅇ씨의 메신저 아이디는 ㅇㅇ아이다. 남방에 있던 자신의 조선족친구가 한족처녀와 결혼하고 잘 산다면서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월급을 타는 날 그는 길림시에 이발사로 있는 동생에게 미용원를 차리는데 보태라고 100만원을 송금하였다. 그는 잔업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으며 악착스레 돈을 모으고 있다. ㅇㅇ국씨는 공장에 들어와 일을 한지 하루만에 잘렸다. 기숙사 친구들과 같이 가서 반장을 찾아가 청을 들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한국말이 서툰데다가 욱하는 성격이 있는 그가 반장의 눈밖에 났기때문이다. ㅇㅇ국씨는 한때는‘불량배’이였다. 한번은 무리싸움하다가 대방의 칼에 복부를 찔렸다. 그는 밖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움켜쥐고 혼자서 병원을 찾아가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가정을 이루자 가장의 책임을 한다며 한국행을 택하였다. 남들은 일자리가 없네, 힘드 네하면서 빈둥대거나 마작놀이를 하는데 그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조선족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일자리 구하는데 게을리지 않았다. 마침내 성환에 있는 다른 공장에 취직을 해서 안정을 찾았는가 하였는데 웬걸 아침 출근길로 공장을 찾아가니 공장건물이 간밤에 화재로 재더미가 되여있었다. 한주일도 안되여 다시 실직하였다. 이 공장 화재는 당지 TV방송에 뉴스로 방송되기까지 했다. 운이 되게 없어보이던 그는 지금 한 선반공장에서 월급도 많이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얼마후에는 한쌍의 젊은 커플이 새로 들어와 공장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주었다. 조선족 ㅇㅇㅇ씨와 한국인 ㅇㅇㅇ씨였다. ㅇㅇㅇ씨는 미끈한 이목구비에 안경까지 착용하고 있어 영낙없는 인테리였고 날씬한 체격의 ㅇㅇㅇ씨는 청초한 한류스타같았다. 왜 이런 사람들이 공장에 왔을가 할 정도로 의문이 갔으나, 후에야 그들이 의류사업을 하다가 실패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재기를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ㅇㅇㅇ씨는 고된 일에 여기 아프다 저기 아프다 하면서‘엄살’을 좀 부렸으나 ㅇㅇㅇ씨는 아무말없이 꿋꿋이 참으며 일하고 있어 뭇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공장에 가서 잠시나마 일하자고 권유한 것도 ㅇㅇㅇ씨란다. ㅇ ㅇㅇ씨는 두사람의 월급은 ㅇㅇㅇ씨가 다 저축을 한다면서 지난달에는 ㅇㅇㅇ씨가 월급으로 자기에게 비싼 옷과 선글라스를 사주고 자신은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금슬이 쏟아지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공장에는 조선족과 한국인이 이루어진 커플이 그들 외 한쌍이 더 있었다. 심양에서 온 김ㅇㅇ씨는 아들의 학비를 마련하려고 불혹의 나이에 이 공장을 찾았다. 그가 항상 나이키같은 고급메이커 티셔츠를 입고 일하러 다녀 우리는 그가 부자인줄 착각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다 내 아들이 입던 낡은 옷들이다’였다. 육체노동을 해보지 않은 그는 이 고달픈 생활에 거의 매일 ‘펜잘’을 먹으며 견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가련천하 부모마음”이라는 중국속담까지 생겼을가. 그의 아들은 지금 한족고중(고등학교)을 다닌다. 조선족학교로 보내지 않은 원인은 자식이 한국에서 고된 일을 하는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고 중국땅에서 좋 은 일자리를 얻게 하기 위해서란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아들이 대학가면 방학 때마다 한국에 데려와 한국어를 배우게 한다고 했다. 공단에 눈이 녹고 메마르고 쓸쓸해 보이던 땅우에 푸른 물감이 서서히 들더니 이름 모를 가로수들이 가지마다 연방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국과 중국에서만 주로 피여난다는 노란 개나리 꽃들도 만발하였다. 기나긴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따스함과 즐거움을 전달하는 현란한 꽃속에서 나는 불현듯‘희망’이라는 단어를 읽어냈다. 춥고 힘든 인생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살아가노라면 찡하고 해뜰 날 꼭 찾아올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지겹던 공장생활에도 애정이 느껴졌다. 희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이다. 이 화창한 봄날에 신이 난 김ㅇㅇ씨는 공부 잘하는 아들이 곧 대학시험을 치른다며 희망을 찾아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
    • 문학살롱
    2013-01-18
  • 1. 결혼사진에 맺힌 한
    1. 결혼사진에 맺힌 한 하늘 나라에 계시는 시어머님께 올리는 편지 박현옥 어머님, 안녕하세요? 오늘 밖에서는 철없는 가을비가 구질구질 내리면서 날씨가 많 이 스산하니 오늘따라 어머님이 너무너무 그립습니다. 그리움에 마음이 많이 슬픈 하루입니다. 어머님, 그간 잘 지내셨지요? 어머님 생각을 떠올리니 불시로 목이 꽉 메여옵니다! 어머님도 알고 계셨죠? 제가 결혼사진에 한이 맺인 사람이여서 결혼 초에는 사진이라는 말만 나오면 스트레스를 받고 사진 찍기를 꺼려 했다는 것을. 저는 남편과 한 3년 연애하다가 양가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고 결혼날자를 잡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지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결 혼생활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과 솜처럼 부풀어 오르는 둥둥 뜬 꿈을 안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습니다. 정말 잘 살아보자고 백년 가약을 맺은 우리들이지만 생각밖의 작은 일로 결혼 초부터 티각태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결혼식 날에 사진 한장도 못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때문에 저는 엄청 화가 났고 신랑도 저를 달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변명한다 는 말이 “다들 바빠서 정신이 없어서 사진사를 부르는걸 잊었을 수도 있다”였습니다. 저는 그 변명에 더욱 화났고 신경질이 났습니다. 왜냐면 남편은 육남매가운데 막내로 위에 세 형님과 두 누님이 계셨는데 이미 다 결혼했고 모두가 결혼식 때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같아선 사진기도 흔하게 갖고 있고 사람들마다 스마트폰을 쓰고 있으니깐 수시로 필요할 때 사진을 찍을 수가 있는데, 그때는 사진기가 귀한지라 사진관에 미리 연락해서 사진사를 청해서 결혼 사진이나 회갑잔치 사진 그리고 애기돌 사진도 찍고 그랬지요. 미리 예약했더라면 사진사가 안올리가 만무한데, 사진사가 안왔다는것은 예약을 안했다는 말이 되니 그게 저의 마음에 더욱 큰 서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집 사람들은 왜 나한테 이렇게 무심하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새 색시 인 제가 그일 때문에 시댁식구들 앞에서 내놓고 화를 내기도 그렇고, 그 러다보니 속은 더욱 부글거렸습니다. 그저 불쌍한 신랑한테만 화내고 투덜거렸지요. 그런대로 지지고 볶고 하면서도 우린 아들 하나를 낳고 살았지요. 그러나 사진 콤플렉스를 가진 저는 그후로 가족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았고 아들애가 스무살이 될 때까지 남긴 가족사진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아들이 하도 사진을 같이 찍자고 졸라대서 막무가내로 한번 찍었던 것입니다. 남편 역시 나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지라 가족사진 찍자는 말은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애를 데리고 우리 가족 셋이서 태산에 여행을 가게 되였 습니다. 엄마의 속사정을 전혀 모르는 애는 여행 가서 기분이 좋아 멋진 풍경만 보면 “엄마 아빠 빨리와요, 여기서 우리 셋이서 같이 사진 찍어요” 하면서 졸라댔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아니 내가 찍어줄게, 너하 고 아빠가 찍어”하면서 이 핑게 저 핑게 사진찍기를 회피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찍은 사진을 빼보니 거의 전부가 남편과 아들이 찍은 사진이었고 몇장은 나와 아들이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습니다. 멋 모르는 아들은 사진을 보면서 셋이 여행갔다는 것이 다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다고 못내 아쉬워 했습니다. 그런 저의 서러운 마음을 읽으신 어머님께서는 힘겹게 지으신 얼마 안되는 햇 감자를 파서는 머리에다 이고 시장에 나가 팔아 푼돈을 한잎두잎 모으시고, 또 강냉이 철이 되면 풋강냉이를 삶아 팔아서 푼돈을 한잎두잎 모으셨다가 어느날인가 저를 조용이 부르시더니 속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어서 모아두었던 돈을 꺼내서 저의 손에 쥐여주면서 “아가야, 돈이 적다만 이걸로 애랑 애비랑 셋이 나가서 사진도 찍고 시원한 냉면도 한그릇씩 사먹고 들어오너라, 너한테는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정말 미안하구나!” 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죠. 제가 우리한테도 돈이 있다며 안받으려고 하니 어머님이 “내가 너희들의 결혼사진을 못찍어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아나? 이걸 해주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것 같다”면서 극구 그 돈을 제 손에 쥐어주셨지요. 그때 저는 그만 목이 꽉 메여 어머님 품에 안겨 슬피슬피 울었고 어머 님도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지요. 비록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그것은 정녕 어머님의 자식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저는 그 돈을 손에 꼭 쥐고 어머님의 그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안고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 그때는 왜서 그렇게 가난했던지... 며칠 뒤, 저희 세 식구가 가족사진을 찍어서 액자에다 넣어가지고 어머님께 가져다 보여드렸어요. 어머님은 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시면서 보고 또 보고 손으로 연신 사진을 어루쓸면서 또 눈물을 지으셨지요. 그후로 살면서 그때 당시 어려운 생활 형편때문에 우리들의 결혼식을 억지로 올렸다는것을 우연하게 알게 되었고, 그렇다보니 사진사를부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은 많은데다 생활이 어려웠던 당시 시어머님이 얼마나 힘들었을가 하는 생각은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생활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식을 여럿 낳아 키운 것도 아니고 고작 애 하나를 낳아서 키우면서도 그렇게 힘든데 자식을 옹기 종기 앉혀놓으신 시어머님은 얼마나 힘든 인생을 보내왔을가라는 생각이 가끔 들군 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항상 자기보다 며느리들을 먼저 생각해주셨고 한번도 남들 앞에서 며느리들의 흉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 잘해서, 다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넓은 마음으로 며느리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듬어 그러안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어머님이 너무 너무 고맙고 지금도 가끔은 하늘 나라에 계신 어머님이 너무 너무 그립 고 보고 싶습니다. 어머님이 저에게 남겨주신 가장 큰 선물은 부모 자식간의 사랑하 는 마음이였습니다. 어머님의 그 사랑때문에 저의 마음에 맺혔던 한은 언녕 가셔졌고 가끔은 “아! 내가 왜 일찍 이런 어머님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까?”하는 후회와 자책감으로 가슴을 탕탕 쥐여 박을 때도 있 었습니다. 살아 생전에 어머님한테 더 잘해드려야 하는데 제대로 못해 드린 것 땜에 가슴이 아파올 때도 많았습니다. 오늘도 구질 구질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는 날 저는 어머님 생각을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되뇌입니다. “ 어머님 하늘 나라에서 부디 평안하시고 더는 가난때문에 속을 앓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며느리도 이젠 결혼 사진을 찍어주지 못한 어머님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이진 우리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보고싶습니다!” 어머님을 그리는 막내 며느리 올림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
    • 문학살롱
    2013-01-18
  • 아버지 그리운 그이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서 제일 먼저 불러 본 이름은 어머니일 것이다. 하지만 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읜 나로서는 아리숭한 기억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남들이 <어버이날>이나 명절이면 귀중한 선물 보따리 들고 부모님 보러 갈때면 이 좋은 세상에 살면서 인간의 락도 누리지 못하고 뇌중풍으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번 뒤돌아 보는 글을 써보고 싶다. 한번도 속 시원히 불러보았으면 원이 없을 그 이름 <아버지>하고 웨치면 저멀리 고향에 울려가서 화답이나 할까? 어머니 한테서 들은바에 의하면 6남매중 막내 아들이였는데 일곱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11살에 자궁출혈로앓으시다가 사망한후 형님집에 있을 형편이 안 되여 훈춘 맞은 켠에 있는 온성에 가 소몰이를 하였다.그때 그 곳의 아이들은 머리를 깎고 다니였다. 아버지는 머리태를 드리우고 있다고 애들이 뒤를 쫓아 다니며<개꼬리>를 달았다고 놀려대는 것이였다. 이에 그이는 당날로 벽돌장을 놓고 다른 벽돌로 머리를 찟찧어 잘라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자라서 엄마와 결혼할 때에도 처가살이를 하고 큰 아들을 낳은후 용정시 교외에 있던 ㅅ촌 과수원막에서 있는 세째 형님네 집에 가 잔치상을 받아 큰오빠는 부모잔치 떡을 먹은 아이라고 친척들이 외우는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일제시기에 목단강에 집단 이민을 가셔서 벼농사를 하여 출하(소작료)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 안 되였다.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다보니 일본사람들이 장부책을 들고 수판을 튕기며 이리저리 떼우고 하면 <왜 이리 많으냐?>하고 한 마디 하면 <바가야로>하면서 귀쌈을 맞아대군 했다. 아버지는 아들둘을 둔 아빠지만 1942년에(그때 33세였음) 글을 알아 장부도 보고 문맹을 벗어나려고 용정에 있는 대성 중학(윤동주 중등학교)에 밤에 배워주는 광명학원에 다닐려고 나오셨다. 낮에는 온돌 수리도 하고 미장공일도 하면서 밤에는 공부에 열중했다. 학원에 가 우리 말도 배우고 간단한 수자부터 시작하여 장부도 볼 수 있게 되였으며 일년을 게으름없이 배우시여 문맹을 벗어 나셨다.아버지는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용정에 이사오셨다. 아버지는 농사일도 미립이 있었고 항상 깔끔하고 중국말도 잘하셨고 한족분들과도 잘 어울리셨다. 어린 제 기억에 의하면 한 번은 차가집 조카벌 되는 분이 아버지를 모시고 식당에 가 술을 많이 대접했는데 그날에 머리가 너무 아프시고 시신경이 잘못되여 몸져 누워 있으시다가 뇌중풍이 와서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하고 49세로 이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의 안타까운 말 한마디가 생각난다. <이렇게 빨리 갈 줄 누가 알았겠니? 사람이 사니깐 오랜 것 같지,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죽는 게 사람이다.>이젠 누구의 말도 들을수 없는 나다. 이세상 부모님들이 여생을 행복하기를 바라며 오늘은 아버지 그 이름을 떠올리며 그 분의 짧은 생애를 떠올리며 이 세상세상에 태여나 마음껏 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잊지 못할 아름다운 그 이름 아버지,아버지 나의 아버지여,,,,,,/현만녀
    • 독자기고
    2013-01-15
  • 태안 바다에서 기름 닦던 날을 떠올리며
    2008년 ,한국에 입국해서 중국 동포교회의 주숙할때의 일이다. 1월 중순에 입국하여 교회에서 주숙하면서 외국인 등록증 신청하고 취업 교육을 예약해 놓고 기다리는데 목사님이 내일 태안 바다로 기름 닦으러 갈 사람은 신청하라는 것이였다. 그때 저는 무상으로 주숙해 주는데 감사하기도 하고 정말로 일을 시작하면 봉사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며 사회에 유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며 사돈 언니와 같이 가겠다고 신청하였다. 1월 30일 다섯시 우리 일행은 서둘러 밥을 먹고 여 요섭 전도사님이 모는 차에 올라 태안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서로 이름도 모르지만 한국에서 하는 일을 우리도 봉사해야 한다는 걸 인식하고 말 없이 따라 주었다.여 전도사님은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대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서산을 지나 태안 바다가로 우리를 이끌었다.그 곳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북적거렸다. 우리들은 그 곳에서 비옷을 걸치고 고무장화를 찾아 신고 실장갑을 안에 끼고 고무장갑을 더 낀다음 전신무장하고 백사장을 지나 암초가 들쑥날쑥한 곳을 찾아 기름을 묻혀 냈다. 보이는 곳은 기름이 적었으나 큰 돌을 구울리면 그 곳에는 디젤유가 고여 있었다. 우리들은 헌 옷과 타올을 뭉그려 가지고 부지런히 닦고 또 닦았다. .여 전도사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삼성 회사의 기름을 실은 배가 사고로 기름이 유출되면서 그로인해 바다가 오염되고 물고기들이 멸종의 위험에 처했고 농어촌이 살기 힘들게 되였다고 한다. 이때 전 국민이 바다를 살리고 각 계층이 나서 바다의 원 면모를 회복하기 위하여 떨쳐 나섰다.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점심에 따끈따끈한 국밥을 공급하였으며 커피도 무싱으로 공급해 주었다. 그날 정심을 먹고 잠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바다가에 기름을 닦으면서 우리는 열을 올렸다,그날 전도사님은 우리들에게 바다가에서 기념 촬영도 해주었다. 우리는 피로도 물리치고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겼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열심히 사시는 여러분들이 잘 사실거라 믿어진다. 사돈언니는 잘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도기 하다. 그날 네시에 우리들은 귀로에 올랐다. 씽씽 달리는 차안에서 하루를 봉사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즐거웠으며 고속도로의 형광판에는 <태안 바다 봉사자님들 수고하셧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글을 바라보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날 저녁 교회분들한테서 오늘 수고했다는 얘기도 들으시고 저녁에는 우리 일행 십명을 사우나로 데리고 가 피로를 풀게 하는 대우도 누렸다. 이것이 제가 한국에서 처음 자원 봉사하던 이야기이다. 몇 년 지난 오늘 한번 회고해 보면서 사진을 보노라니 진실로 다가오는 듯 하다./현만녀
    • 독자기고
    2013-01-14
  • 연변구단, 공격수 이재민 영입에 “올인”
    새 사령탑 조긍연감독이 주축선수들이 떠난 빈자리를 새로운 얼굴들로 채울 전망이다. 해남 전지훈련 캠프에 머물고있는 연변구단(축구구락부) 김문천주임은 “현재 팀에서 테스트를 받고있는 한국 출신 공격수 리재민(26) 영입에 알힘을 쏟고있다”고 알려왔다. 키 178센치메터, 몸무게 75킬로그람의 다부진 체격을 지닌 리재민선수는 한국 내셔널리그(2부리그) 현대미포조선, 일본 J-리그(1부리그) 빗셀 고베 등 팀에서 뛰였다. 연변구단은 리재민선수의 화려한 개인기와 강력한 슈팅을 장점으로 보고 영입에 올인하고있다. 조긍연감독은 지난해 활약했던 이반 보직선수와 허파선수의 공백을 메우면서 공격진의 중심을 잡아줄것으로 기대하고 리재민선수를 해남 전지훈련에 합류시켰다. 2010년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축구단”에 입단한 리재민선수는 2011년 일본 J-리그 빗셀 고베에 이적했으며 지난 시즌(2012년)에는 다시 한국 내셔널리그 현대미포조선 유니폼을 입었다.9일, 연변팀의 해남 전지훈련 상황을 취재한 소후스포츠는 “리재민이 한국에서 매우 명성을 지닌 선수”라고 소개하고 “일본 J-리그 빗셀 고베에서 활약한 경력이 있으며 지난 시즌 한국 현대미포조선에서 24경기 12꼴을 기록, 내셔널리그 황금발(득점왕)에 등극했다”는 등 상세히 전했다. 또한 “페널티 지역(금지구내)에서의 후각이 극히 좋다. 연변행이 실현되면 한중일 3국 리그를 모두 뛰여 보는 특별한 선수가 될것”이라고 기대했다. 리재민선수 프로필출생: 1987년 5월 29일(만 26세)신체: 178센치메터, 75킬로그람소속: 비셀 고베 공격수(FW)학력: 한국 고려대학교데뷔: 2010년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축구단” 입단
    • 스포츠
    2013-01-14
  • “칼” 빼든 조긍연, “싹 다 바꾼다”
    영입하고 싶은 선수는 몸값이 비싸고 주축선수들은 나가고…2013 시즌(중국축구 갑급리그)을 대비하고있는 연변 축구결책층이 적잖게 골머리를 앓고있는 문제다. 신로교체 완수, 토종감독 양성, 갑급리그 잔류 등 구단의 소극적 목표와는 달리 새 사령탑 조긍연감독은 “올시즌 팀워크를 중요시하면서 좋은 경기로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각오다. 연변장백호랑이팀(이하 연변팀)의 새 사령탑 조긍연감독이 팀 개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화끈한 공격축구, 팬들을 열광시키는 재미있는 축구로 연변축구의 옛 휘황을 되찾는것이 그의 목표다. 이를 위해 자신의 지도철학부터 선수단 구성까지 싹 다 바꿀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걸림돌이 적지 않지만 특유의 “뚝심”을 가진 조긍연감독은 자신만만하다. 9일부터 팀과 합류한 조감독은 변화를 적극 강조하고있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선수 구성원을 포함해 방향성에 관한것이다. 다시 말해 팀 플레이스타일이나 색갈을 바꾸겠다는 말이다. 선수단의 큰 변화가 예상된다. 배육문, 강홍권, 허파 등 주축선수들의 전력 리탈은 조긍연감독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비진 주축선수로 활약했던 배육문과 강홍권 선수의 타구단 이적이 완전 성사되면 큰 구멍이 생기는것이 현실이다. 조감독은 로련한 중앙수비수(한국)를 영입해 리민휘, 오영춘, 박세호 등 어린 선수들을 진두 지휘케 함으로써 공백을 메우려 하고있어 관심있게 지켜볼 부분이다. 한편 조감독은 전술적으로는 “재미있는 공격축구”를 추구한다. 이를 위해 공격진 개편을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그동안 여러 감독(연변적)들을 거치며 굳어진 “단조로운 역습축구”를 과감히 탈피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조감독은 “흐름을 지배하는 공격축구”를 실현하기 위해 지난해 지휘봉을 잠시 반납하고 한국서 병치료하는기간 물색해놓았던 공격수 두명(한국)을 영입할것으로 알려져 지켜볼 필요가 있다. 윤광, 지문일, 고츰 등 3명 꼴 키퍼들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있는 수문장 포지션은 다소 안심이 가는 상황이지만 리호, 지충국, 리훈, 최인, 한남용 등 기존 멤버들로 구성된 미드필드진은 공수전환에 능란한 구심점이 없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조감독은 중요한 자리에 국내 수준급 선수들을 적극 영입할 생각인것으로 알려졌다. 수명의 국내선수를 인입해 들이는 한편 1, 2 팀 합병을 통해 1군에 5~6명의 기량이 좋은 “젊은 피”를 수혈함으로써 선수단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복안이다. “현대축구에서 기술이 없으면 살아남을수 없다. 기술이 있는 선수들을 많이 기용할것이다. 축구선수는 체력만 좋아서는 안된다. 생각이 빨라야 한다.” 조감독의 평소 지론이다. 올시즌 선수선발 기준도 관심사다. “철저한 프로정신을 갖춘 선수를 뽑겠다. 나이로 신예와 로장을 가르지 않고 오직 최고의 컨디션을 가진 선수로만 팀을 구성하겠다. 이름값은 물론 인적관계도 떠나 능력을 원칙으로 삼겠다.” 평소 그가 강조하는 선수선발 원칙이 그대로 유지되는지도 지켜봐야 할것이다. 수차의 단독인터뷰를 통해 조긍연감독이 추구하는 축구철학을 지켜보면 “빠른 공수전환을 앞세운 축구를 구사할것”이라는 판단이다. 여기에서 해묵은 꼴 결정력과 수비 조직력의 해결은 단호한 변화를 통해 이뤄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그가 만들려는것은 연변팀의 색갈이다. 새롭게 태여난다는 생각변화를 반드시 줘야 하며 선수들의 실력에, 선수들에게 맞는 옷을 입히는것이 중요하다. 연변에서 축구(연변 프로축구팀)는 문화생활 곳곳에 이미 깊숙이 침투돼있다.그래서 연변팀 감독으로서 받을수밖에 없는 압박감 역시 크다. 과연 그가 팬들의 생각이 다 다른것처럼 비판을 겸허히 들으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팀을 만들어 갈수 있을지 주목된다. 연변일보 리영수기자
    • 스포츠
    2013-01-14
  • 새 사령탑 조긍연, 과제 이뤄낼가
    부담감 있지만 소신있고 차별화된 리더십 앞세워야 연변축구(연변팀)의 새 수장으로 지목된 조긍연감독은 올시즌 연변축구의 “미래”를 이끌어갈 키잡이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상황은 록록치 않다. 로장들의 퇴역, 주전들의 팀 리탈 등 영향으로 현재 해남 전지훈련에 남은 선수가 고작 16명뿐인 현실이다. 일단 조긍연감독을 믿고 사령탑으로 앉혔으면 축구결책층과 연변구단이 사태 수습과 해결 전면에 나서 그에게 능력을 발휘할 무대를 마련해줘야 할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연변축구(연변팀)는 현재 기로에 서있다. 위기는 역시 기회로 이어질수 있다. 시스템을 통한 행정과 창의적이고 제도화된 구단운영이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가야 할 시점이다. 조긍연감독이 올시즌 성과를 내자면 부담감이 있지만 소신있고 차별화된 리더십을 앞세운다면 팀 면모 일신을 이끌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지난해말 연변구단과 1년 계약을 체결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조감독은 한국 스포츠전문지 《스포츠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취약 포지션에 한국선수 3명을 데리고 갈 예정이다. 동계훈련에서 잘 준비한다면 연변팀이 충분히 슈퍼리그 진입을 노려볼만하다”고 말했다. 안정보다 과감한 도전을 좋아하는 조긍연감독이 연변축구(연변팀)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벌써부터 관심이 집중된다. 일단 전임들이 끝내 풀지 못한 과제를 어떻게 풀어낼지가 주목된다. 김광주감독, 정상룡감독이 과감하게 4-4-2 카드를 꺼내들어 조직적이고 공격적인 축구를 어느 정도 구사했지만 정작 안정적인 수비진을 찾지 못해 다소 애를 먹었다. 조긍연감독도 지난해 중앙수비진을 계속 시험하고 조직력을 다지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련속되는 일곱껨 홈장경기에서 아쉬운 성적을 내고야말았다. 박만복, 최동섭 등 축구원로들과 고종훈 등 축구명장들이 연변축구가 해결해야 할 첫번째 과제로 수비안정을 지적한만큼 조긍연감독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외적공격수외에 공격수들이 꼴을 제대로 넣지 못했던 약점을 어떻게 극복해낼지도 문제이다. 지난해 연변팀은 이반 보직선수를 고정으로 세우고 고만국, 허파, 리훈, 홍진섭 등을 파트너로 내세웠지만 어떻다 할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미드필더와 달리 전술적인 움직임에서 공격수 파트너지간에 호흡이 잘 맞지 않았던 점, 꼴결정력 같은 마무리가 부족했던 점은 항상 아쉬움으로 지적됐다. 짧은 패스워크를 통해 공격기회를 만들어가는것을 중시하고 한방을 갖춘 선수를 좋아하는 조긍연감독이 자신이 골라잡게 되는 외적선수로 살릴지 아니면 팀내 새로운 자원을 발굴해 스트라이커(공격수)를 키우는 수완을 발휘할지도 관심있게 볼 부분이다. 끊임없이 이어져야 할 세대교체가 얼마만큼 더욱 활발하게 이뤄질지도 관심사이다. 똑 같이 능력위주로 출전선수 선발을 하는 조긍연감독이 팀 전력 안정을 위해 초기부터 젊은 선수들을 키워낼지 아니면 점진적으로 세대교체를 꾀할것인지도 지켜봐야 할것이다. 지난해 수차의 단독인터뷰를 통해보면 “조긍연감독은 기본적으로 패스워크를 중시하는, 짜임새 있는 조직축구를 구사하고 멀티플레이를 잘하는 선수를 키워내 보다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축구를 생각한다”는 판단이다. 과연 선수단운영 전권을 넘겨받은 조긍연감독이 선수들의 능력을 잘 살려 연변축구(연변팀)의 해묵은 과제를 화끈하게 풀어내고 최은택감독 이상의 “명장”다운 지도력을 보여줄수 있을지 주목된다. 연변일보 리영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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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14
  • 조긍연감독 연변팀 정식 사령탑 맡는다
    연변주체육국 우장룡국장에 의하면 한국인 《털보》 조긍연 감독이 중국축구 갑급리그 연변팀 정식 사령탑을 맡게 되였습니다. 조긍연감독이 연변과 인연을 맺는것은 이번이 두번째입니다. 2012 시즌이 한창이던 2012년 6월 조긍연감독은 연변구단의 요청으로 림시 사령탑에 부임했습니다. 조긍연감독은 부임이후 두달동안 팀을 8위까지 끌어올렸지만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몇년전 당했던 허리 부상이 크게 도지면서 도저히 팀을 계속 이끌수 없었고 아쉬움속에 2개월만에 귀국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긍연 감독이 돌아간뒤 연변은 다시 하위권으로 처지며 2012 시즌을 13위로 마감했습니다. 결국 2013 시즌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구단은 다시 지도력이 검증된 조긍연감독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2012시즌 조감독과 같이 하였던 정성훈코치도 조감독과 함께 1월 5일부터 중국 해남도에서 열리고 있는 겨울철훈련에 합류한뒤 2월에는 한국에서 전지훈련을 갖는 방안도 추진하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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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14
  • 한국의 숨결 조선족동네 연길(옌지)
    연길시내를 관통한 부르하통하 강변야경 ◈ 중국속의 작은 한국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여 러시아,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이 4만 3547㎢, 인구가 219만 5000명 정도로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40%가 조선족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이후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어 1955년에는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연길(延吉)·도문(圖們)·돈화(敦化)·화룡(和龍)·용정(龍井)·훈춘(琿春)의 6개시와 왕칭(汪淸)·안도(安圖)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도문강·송화강(松花江)·목단강(牡丹江)·소분강[綏芬江] 등이 있고, 도문강 유역에는 '동북아 금삼각주(東北亞金三角州)'라고 불리는 국제개발지, 훈춘경제개발지가 있다. 조선 말기 우리 민족에 이주하면서부터 연변은 한반도와 역사를 같이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으며 그 때문에 청산리 항일전승지(靑山里抗日戰勝地)·봉오동(鳳梧洞) 항일전승지·일송정(一松亭) 등 유적지가 많다. ◈ 한국의 숨결이 살아 있는 도시 연길(延吉 : 이엔지) 연길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부터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이며 중국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로 백두산과 가까워 매년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연변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 집, 길거리를 둘러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나라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자치주 스스로 그 민족 나름대로의 지역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연변자치주 내의정부기관이나 신문 광고 등에 조선족 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쓰고 있고, 그 때문에 연변의 거의 모든 옥의광고가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이 공용어로 되어 있다. 연길은 중온대 반습윤기후에 속해, 여름에는 무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겨울이 길고 춥고 뚜렷한 대륙성 계절풍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5.7℃, 최저 -32.7℃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연길의 면적은 390㎢, 인구는 약 35만 8000명(1993)에 달하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이곳은 청(淸)나라 말기에 간무국(墾務局)이 설치된 뒤 발달하였기 때문에 국자가(局子街)라고도 불렀다. 1902년 옌지청[延吉廳]이 설치되고 1909년 부(府)가 되었으며, 1913년 중화민국 수립 후 현(縣)이 되었다.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젠다오협약) 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많은 한국인 이민이 이주하여 시의 주변지역을 개척하였다. 부근에 석탄·금 등의 광산이 있고 광공업이 발달해 있다. 한국어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 의과대학·연변대학 등이 있다. ◈ 연길을 여행할 때 주의할 점 연길시는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일용품 생산지로서 가구와 한복을 비롯하여 전통 악기, 식기 등 60여 가지의 제품이 생산, 공급되고 있다. 연길을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관광객의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들에게는 단순한 여행의 의미 이상의 느낌을 갖게 하므로 매년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곳이다. 또한 도처에서 조선족 동포를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초청이나 현지 투자 등을 쉽게 약속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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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14
  • 중국동포 새해 화두는?
    ▲사진은 1월 4일 저녁 안산 원곡동 거리, 중국동포가 기술학원 홍보물에 무관심한 체 걸어가고 있다. 2013년 새해 들어 방문취업(H-2) 5년 만기자가 지난해 보다 많은 8만여명에 이르는 가운데, 5년 만기 출국을 앞둔 중국동포 대다수가 방문취업(H-2) 체류자격을 그대로 유지하느냐? 아니면 기능사자격시험을 보고 재외동포(F-4) 자격으로 변경하느냐를 놓고 크게 고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4월 10일부로 국가기술자격증(기능사 이상) 소지자에게 재외동포 자격을 부여해준다는 법무부 발표가 나자마자, 기술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중국동포 대상으로 ‘따기쉬운 자격증’ 운운하며 자격증 취득 붐을 조장하였다. 그 결과 5년 만기를 앞둔 많은 동포들이 기술학원에 등록하고 3, 4개월간 기능사시험에 열중, 시험에 합격해 F-4로 전환한 사람도 있고, 시험에 불합격해 돈과 시간만 허비했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어렵게 기능사 자격증 취득해 F-4 됐지만, H-2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못해 그런 가운데 기능사 자격증 취득으로 인한 재외동포(F-4) 체류자격자들 사이에서도 기능사 자격과 관련된 일만 할 수 있고, 기존의 방문취업(H-2) 자격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며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하면 재외동포 자격이 되어 출국하지 않아도 되고 일도 편하게 할줄 알았어요. 그런데 직업소개소를 찾아서 물어보면 F-4라 안된다고 해요, 식당에서도 쓰고 싶은데 F-4라 안된다고 그러는 거예요.”지난해 9월 정보처리기능사자격증을 취득해 F-4로 변경한 김화숙(59,여)씨의 하소연이다. 건설현장에서 설계일을 7년 넘게 일해온 이영옥(46,여)씨도 힘들게 정보기기운용기능사자격증을 지난해 11월 취득해 F-4로 변경했지만 전문가 수준에 이른 건설 설계일을 못하고 전단지 배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재외동포(F-4)자격을 부여받게 되면 더 이상 방문취업(H-2) 체류변경도 안되고 H-2전산추첨 대상자로 신청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최근 19세~24세 미만의 동포자녀들의 입국이 늘어나면서 기술학원을 다니며 기능사시험을 준비하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많다. F-4 자격을 부여받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이들이 F-4로 전환하면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만 25세 이상되면 H-2 체류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기회도 박탈되기 때문에, F-4로 전환한 조선족 젊은이들에겐 최소한 제조업체에 취업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F-4체류자는 단순노무일을 할 수 없다"면서 "불법취업시 상항에 따라 강제추방까지 당할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F-4 체류 중인 중국동포는 11만5천853명으로 1년 전의 6만9천723명에 비해 66.2%인 4만6천130명이 늘어났다. 실제로 H-2 체류 중이던 중국동포는 2011년 11월 말 29만7천48명에서 2012년에는 23만5천542명으로 6만1천506명이 줄었다. 이는 H-2체류자가 F-4로 자격변경을 많이 했음을 알게 해준다. / 김경록 기자 @동포세계신문 제284호 2013년 1월 8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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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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